Across the Lines: Charles Parham’s Contribution
to the Inter-Racial Character of Early Pentecostalism
2003년 12월 22일, 94세로 세상을 떠난, 찰스 파함(Charles Parham)의 며느리 파울라인 파함(Pauline Parham)의 견해와 함께
에디 하야트
Eddie Hyatt
이창승 번역
저자에 대해
Eddie L. Hyatt, D.Min. (Regent University), M.Div. and M.A. (Oral Roberts University), serves the body of Christ around the world by teaching with academic excellence and the anointing of the Holy Spirit. He has authored several books, including 2000 Years of Charismatic Christianity. His passion is to see authentic spiritual awakening transform the Church and impact the world in the Twenty-first century. www.eddiehyatt.com
출처: Pneuma Review (December 20, 2004)
찰스 파함은 “맹렬한 인종차별주의자”와 “백인 지상주의자”로 낙인찍혀 왔다. 그는 오순절 운동 안에 인종적 편견을 일으킨 창시자라고 비난받아왔다. 어떤 사람들은 현대 오순절주의자들 가운데 존재하는 그 어떤 인종차별주의의 결과들도 그에게까지 추적될 수 있다고 믿는다. 최근 그의 인종차별 죄에 대한 회개와 용서를 비는 화해 모임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찰스 파함은 오순절 운동에 장애물이며, 그래서 오순절운동의 창시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인식과는 반대로, 맨 처음 인종적 장벽을 넘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과 멕시코계 미국인들에게로 다가가 그들을 햇병아리 같았던 오순절운동에 합류시켰던 사람이 바로 파함이었다. 흑인 교회들에서 설교하고,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텍사스 휴스턴에 개설한 그의 성경 학교에 한 흑인 목사가 등록하도록 허락함으로써 남부 백인들을 화나게 했던 사람은 바로 캔사스 출신의 파함이었다. 1906년에 텍사스 남부에서 열린 그의 사도 신앙 캠프 집회에 무명의 흑인 여성 목사 루시 패로우(Lucy Farrow)를 초청해 설교하도록 했던 사람은 바로 파함이었다. 1929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의 고향 캔사스 박스터 스프링스에서 흑인 공동체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가끔 그 지역 흑인 오순절 교회에서 설교했던 사람은 바로 파함이었다.
그렇다면, 파함과 그의 인종적 이해에 대한 이런 상반되는 견해들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가? 찰스 파함이 한 사람 이상인가? 문제는 상황(context)이거나 그것의 결여인 것 같다. 역사적 사건들은 어떤 상황 안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역사가는 그 상황을 무시하지 말아야만 한다. 파함의 생애가 그의 시대의 사회적-법적-종교적 상황 안에서 평가될 때, 드러나는 것은 인종평등을 위한 거룩한 십자군 전사도 아니고, 맹렬한 인종차별주의자도 아니다. 드러나는 것은 많은 점에서 그가 살았던 시대를 반영하는 한 인물이며, 그 시대는 인종 격리(racial apartheid)가 일반적으로 용인되고 그 땅 전체에서 실행되던 때였다. 그러나 또한 드러나는 것은 위기의 시대에, 그렇게 하는 것이 보편적이지 않을 때, 기꺼이 문화적 관행을 깨뜨리고 인종적 장벽을 넘어간 한 인물이다. 바로 이것이 찰스 파함이 초기 오순절주의 안에서 어느 시간 동안 압도적이었던 인종 간 개방성과 조화(inter-racial openness and harmony)를 위한 풍조를 형성하는 데 공헌했다는 영예를 받을 가치가 있는 이유이다.
역사적 상황
The Historical Context
파함(1873-1929)은 인종 차별(racial segregation)이 미국 전역에서 용인되고 실행되었던 시기에 살았고 사역했다. 14차 개정 헌법은 “분리되나 평등하다”(Separate but Equal)라는 문구를 포함시켰었으며, 분리를 인정하지만 그러나 모든 시민이 그 법에 따라 평등하게 대접받아야 한다는 것을 요구했었다. “플레시 대 퍼거슨”(Plessy vs. Ferguson)의 소송에서, 미합중국 연방대법원은 흑인과 백인이 분리된 열차 칸을 타도록 규정하는 루이지아나의 한 법이 헌법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판결했을 때 그 문구 중에서 “분리되나”를 근거로 삼았다.
그렇지만, 그 문구의 “분리되나” 부분은 “평등하다” 부분보다 더 강력하게 지지를 받았다는 것은 분명하였다. 흑인들을 위한 공공시설들은 열악했고, 백인을 위한 시설들보다 더 적었다. 흑인들은 보통 열차와 버스에서는 뒷자리에 앉아야 했고, 음식점에서는 허름한 뒷방에서 먹어야 했다. 최상의 호텔들은 오직 백인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프로 스포츠 조차도 오직 백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교회는 어땠을까? 1960년대에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미국에서 주일 오전 11시가 가장 차별이 심한 때라고 밝혔다. 그보다 50년 전에는 더욱 심했다. 백인 교회에서 흑인 또는 흑인 교회에서 백인은 생소한 것으로 그리고 심지어 부적당한 것으로 여겨졌다. 대부분의 백인 그리스도인들은 백인종은 우월하며, 인종차별은 성경으로 옹호될 수 있다고 믿었다.
남부에서, 인종격리정책은 보다 더 강하게 선포되었다. 흑인을 주변으로 내몰기 위해 고안된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s)이 거기에 있었다. 흑인들은 분리된 공공 화장실과 음수대(drinking fountains)를 사용해야 했다. 그들은 열차, 버스, 음식점, 그리고 모든 공공시설에서 분리된 부분에 앉아야만 했다. 모든 공교육은 인종에 따라 차별되었다. 흑인들은 분리된 지역에 살았으며, 공공연하고 교묘한 위협이 그들을 “그들의 자리에”(in their place) 묶어두기 위해 가해졌다.
파함의 첫 심각한 인종 문제 대면
Parham’s First Serious Encounter With the Race Issue
1905년 여름에, 파함은 처음으로 위험을 무릎 쓰고 매이슨 딕슨 라인(Mason-Dixon line)을 남쪽으로 넘어 텍사스로 들어갔다. 그는 그가 새롭게 발견한 방언으로 증거 되는 성령침례라는 메시지를 선포하기 위해 그곳에 갔다. 5년 전에, 토페카에 열렸던 그의 성경학교의 학생들은 방언으로 말하기를 성령침례의 “성경적 증거”(Bible evidence)로 인지했었다. 거의 즉시 그 학교 전체가 파함을 포함하여 그곳에 참석했던 거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방언을 말하며 성령의 강력한 부어주심을 경험했다. 파함은 그들의 경험이 사도행전 2장 17절에 약속된 전 세계적인 종말의 성령 부어주심의 시작을 알린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이 새롭게 발견된 진리를 선포하기 위해 남부에 갔었다.
파함은 1905년 7월에 스물다섯명의 사역자들과 함께 휴스턴에 도착했다. 그는 처음으로 큰 흑인 무리와 그리고 그가 고향인 캔사스 주에서는 알지 못했던 강한 인종적 편견을 대면하였다. 그는 브라이언 홀(Bryan Hall)에서 아주 성공적인 집회를 주관했으며, 그 모임에는 지역 법 때문에 아마도 분리된 자리에 앉았을 몇 명의 흑인들도 참석했었다. 그렇지만, 그는 흑인들과 접촉하였으며, 루시 패로우(Lucy Farrow)와 윌리엄 시무어(William Seymour)와 같은 흑인 지도자들을 친구로 삼았다. 사실, 그의 인종적 개방성(racial openness)은 휴스턴의 어떤 백인 그리스도인들을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한 백인 목사는 파함과 그의 캔사스 사역들을 언급하면서, 1905년에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그러므로, 나는 북부에서 온 우리의 전도자들과 사역자들은 이 상황[인종적 분리]을 잊고서 뜻은 좋지만 그 상황을 무시하려는 잘못된 노력으로써 남부 사역자들을 당황하게 하지 말 것을 기대한다. 우리의 북부 형제들은 다른 것을 통해서는 배우기가 불가능할 것을 경험을 통해 충분히 배우도록 남부에 오래 머물 때까지는 인종 문제에 간섭하지 말라.
흑인 지도자들을 친구로 삼은 파함
Parham Makes Friends With Black Leaders
파함 일행은 박스터 스프링스(Baxter Springs)로 돌아가면서 패로우에게 그들과 함께 동행하기를 권유했다. 그녀는 그 권유를 받아들였고, 떠나기 전에 그녀의 회중을 윌리엄 시무어라는 이름을 가진 한 흑인 설교가에게 맡겼다. 패로우는 캔사스에서 파함의 집에서 지내며 파함의 자녀들의 가정교사(governess)로 일했으며, 그 자녀들은 그녀를 사랑스럽게 “이모”(Auntie)라고 불렀다. 캔사스에 머무는 동안 패로우는 성령침례를 받고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
패로우는 1905년 12월에 파함 일행과 함께 휴스턴으로 돌아왔으며, 시무어와 그녀의 성령침례 경험을 나누었다. 그녀는 또한 그에게 파함이 휴스턴에 성경학교를 곧 열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시무어는 지원했으며 받아들여졌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시무어는 옆방에 앉아 열린 문을 통해 그 강의들을 들었다. 이 배치는, 사실이라면, 짐 크로우 법과 지배적인 분리 관행에 비추어 보면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함 가족은 이 상황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들었다.
파울라인 파함(Pauline Parham): [파울라인 파함은 찰스 파함의 넷째 아들 로버트 파함의 아내였다]
입학을 지원했던 사람들 중에 윌리엄 시무어가 있었는데, 그는 루시 패로우의 격려를 받고 그렇게 했다. 그가 그 성경학교에 들어간 것은 당시 택사스에 존재했던 짐 크로우 법과 분리 법 때문에 어떤 당황을 일으켰다. 시아버지 파함은 캔사스에 살았었기 때문에 그런 법과 관행에 익숙하지 않았고, 그는 시무어가 그 수업에 들어오는 것을 환영했다. 많은 책들이 반복적으로 시무어가 옆방에 앉아 열린 문을 통해 수업들을 들을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는 증명되지 않은 일화를 기록했다. 내가 거기에 참석했던 사람들로부터 듣기로는 그가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수업에 들어오도록 환영을 받았다.
파함과 시무어는 이 기간 동안 매우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시무어는 파함을 휴스턴 지역에 있는 몇 흑인 교회들에 소개했으며, 그들은 몇 번 함께 사역했다. 2월 중에 시무어는 로스앤젤레스 지역에 있는 한 성결교회의 목사 청빙을 수락했다. 파함은 그의 열차요금을 위해 헌금을 모아주었고, 시무어는 로스엔젤래스를 향해 떠났다.
남부 택사스에서 무너진 인종의 벽
Racial Walls Broken Down in South Texas
1906년 봄에, 패로우는 시무어를 따라 로스엔젤래스로 가서 아주사 거리 312번가의 한 낡은 건물에서 폭발한 부흥회를 이끌기 위해 시무어와 합류했다. 로스엔젤래스에 있는 동안, 패로우는 그녀의 조상들이 미국으로 끌려왔던 라이베리아로 가라는 소명을 받았다고 느꼈다. 라이베리아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버지니아로 가는 도중에 휴스턴에 머물렀는데, 마침 파함의 사도적 신앙 캠프 집회(Apostolic Faith campmeeting)가 열리고 있었다.
파함은 친구로서 그리고 그녀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사를 발견하고서 그때까지 들어보지 못한 일을 행했는데, 그 캠프 집회들 중의 한 시간에 설교하도록 그녀를 초청했다. 그 커다란 천막은 입추의 여지없이 사람들로 가득 찼으며, 그 청중들은 그녀가 로스엔젤래스에서의 경험들과 그녀의 라이베리아 선교에 대해 말하는 것에 푹 빠져들었다. 그 설교 끝에 그녀는 성령침례를 받으려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었다. 그것은 능력이 넘치는 시간이었다. 한 참석자는 그녀가 “사람들에게 성령을 받도록 안수하는 비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파함의 그런 인종적 개방성은 제임스 고프(James R. Goff. Jr.)로 하여금 그의 박사 논문에서 파함에 대해 “그 당시의 상황에서 그는 전혀 인종차별주의자로 불릴 수 없었다”라고 선언하도록 이끌었다.
파울라인 파함:
이 사건은 그 자체 그리고 스스로 시아버지 파함이 어떤 사람들이 주장해 왔던 것 같은 인종 차별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한 흑인 여성이 거의 모두가 백인인 청중들에게 설교하고 그들에게 안수 기도해 주었다는 것은 당시 남부 택사스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시아버지 파함은 만약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돕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의를 진전시키는 것이라면 기꺼이 지역적 편견과 관행을 깨뜨리고 있었다.
아주사 거리에서 결별
Separation At Azusa Street
1906년 봄과 여름 동안 파함과 시무어는 파함의 로스엔젤래스 방문에 대해 활발하게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들의 편지들은 매우 서로를 북돋아 주는 것이었고, 둘은 놀라운 재결합을 기대하고 있었다. 1906년 8월 27일 자 편지에서 시무어는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랑하는 형제 파함에게,
홀 자매(Sister Hall)가 도착해 이 도시에 큰 부흥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그 부흥은 당신이 올 때 일어날 것입니다. 부흥은 우리가 이 도시에 온 이래로 여기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이 오실 때 다시 한 번 시작할 한 총괄적인 부흥(a general one)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 작은 부흥들이 모두 합쳐져 하나의 대 연합 부흥(on great union revival)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둘은 그 재결합에 대해 아주 긍정적이었다. 파함이 마침내 도착했을 때, 그는 그가 판단하기에 아주사 집회들에서 드러나는 육적이고 귀신적인 나타남들에 섬뜩해졌다. 그의 직선적인 스타일로, 그는 그 상황에 정면으로 맞섰고, 그가 육적인 것들과 성령의 것들 사이에 대한 분별에 대해 익혀왔다고 믿는 것에 근거하여 바로잡으려 했다. 아주사 성도들은 저항했다. 두세 번 설교한 후, 그는 두 명의 백인 장로들로부터 그가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시무어가 그 거부에 동참한 것은 확실하다.
파함은 이 거부 때문에 매우 격분했다. 이 괴로움은 후에 아주사 집회들에서 감지된 과도한 것들에 대한 통렬한 비방에서 표출되었다. 이 비난에서 파함은 그가 관찰했던 한 무명의 “육적”(fleshly)인 사람을 지칭하는 데 “엔”(n) 자를 사용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파함의 정상적인 용어가 아니었다. 기록상 그가 이 경멸적인 용어를 사용한 것은 그 단 한 차례였다. 그는 언제나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그의 시대에 용인되었던 “니그로”(Negro) 또는 “유색인”(colored)라는 용어로 언급했다.
아마도 위의 비방 때문에, 파함의 시무어와의 결별은 종종 인종차별주의 탓으로 돌려져 왔다. 그 증거는 그 비방은 질서, 예배 스타일, 어떤 영적 나타남들의 진위성에 대한 의견 차이와 의문에 대한 것이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흥미롭게도, 시무어, 패로우 그리고 그의 친구들이나 적들도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난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비록 파함이 그 후에 아주사 거리 부흥의 과도한 것들로 단언된 것들 때문에 그 부흥을 비판했을지라도, 그는 시무어나 흑인 참여자들을 비난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그는 그가 그 집회들에 침입해 들어왔다고 말한 로스엔젤래스의 “거룩한 구르는 자들”(Holy Rollers)을 지목했다.
로스엔젤래스에는 성령의 아름다운 부으심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 도시의 한 거룩한 구르는 자 종교 집회가 끝나자 그들이 갑자기 아주사 거리로 내려왔고, 그들의 집회를 장악했던 모든 것이 흘러들어와 아주사 거리 집회에서 방종으로 변했다.
파울라인 파함:
시아버지 파함이 1929년 2월에 돌아가셨을 때, 나의 남편 로버트, 시어머니 파함 그리고 나는 그 외투를 집어 들고 그의 순회 사역 스케줄을 채웠다. 그 해 후반에 그의 스케줄은 우리를 로스엔젤래스 지역으로 이끌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우리는 아주사 거리 선교회와 제니 시무어를 방문했다. 그녀는 그녀의 남편이 1925년에 세상을 떠난 후로 그 선교회를 목회하고 있었다. 우리는 시무어 부인과 아주 우호적 만남을 가진 후 계속 우리의 길을 갔다.
이십 세의 젊은 나는 이 방문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고 시아버지 파함과 아주사 거리 선교회 사이의 그 이전의 불화의 세부 사항을 알지 못했다. 사실, 시아버지 파함은 그 불화 때문에 시무어를 비난한 적이 없었고, 그 보다는 아주사 선교회의 몇 장로들을 비난했다. 나는 이제 시어머니 파함이 시무어 부인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서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파함의 고향에서 인종적 관계
Parham’s Hometown Race Relations
파함은 그가 1929년에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그의 고향 캔사스 주의 박스터 스프링스(Baxter Springs)에서 연례적으로 캠프집회를 열었다. 전국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매년 그 집회에 참석했다. 한 사람이 박스터 스프링스의 캠프집회의 인종간 성격(interracial character)에 감명을 받고 “모든 신앙고백과 유색인들이 그 모임에서 편안함을 느꼈고, 그들은 확실히 주님 안에서 그들의 자유를 누렸다”라고 썼다. 심지어 비 오순절 학자들도 파함의 사역과 집회들의 인종간 성격에 주목해 왔다. 로버트 앤더슨(Robert Mapes Anderson)은 다음과 같이 썼다.
심지어 로스엔젤래스 부흥 이전에도, 파함은 휴스턴에서 이 새로운 다인종적 기반(ethnically heterogeneous constituency)을 만들어 왔었다. 그는 그 기반에 시무어, 패로우, 그리고 “형제” 존슨(Johnson)과 같은 흑인들과, 몇 멕시코계 미국인들을 모았다. 1913년에 캔사스, 박스터 스리프링스에서 열렸던 파함 그룹의 여름 캠프 집회에서 “백인들, 유색인들 그리고 인디언들(Indians)이 그 집회에 참가했으며,” 파함 형제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흑인과 백인과 황인 모두를 위한 복음을 가지고 있었다.” 수 년 동안, 파함은 중서부 이하 전역에서 인종통합 집회들(intergrated meetings)을 개최했다.
파울라인 파함
시아버지 파함은 우리의 고향 캔사스, 박스터 스프링스에서 흑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자주 그곳의 흑인 오순절교회에서 설교했고, 심지어 백인들에게 흑인교회 예배에 참석해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그 흑인들은 그가 그들을 정당하게 대우해 주었기 때문에 그를 사랑했다. 그가 해마다 개최했던 천막집회들에는 모든 인종들이 참여했다. 그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었다!
캐이 캐이 단 왜곡
The Ku Klux Klan Distortion
파함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보통 그가 그의 설교들 중에서 한 번 캐이 캐이 단을 우호적으로 말한 사실을 인용한다. 간과되어 온 것은 1920년대의 KKK는 19세기의 캐이 캐이 단 그리고 20세기 후반의 캐이 캐이 단과 매우 다른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19세기의 KKK는 공공연한 반 흑인 단체였으며, 해방된 흑인들에게 풍요와 권력을 주지 않으려 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1872년에 기능을 멈추고 사멸하였다.
1915년에 형성된 새로운 단체는 그 인종주의를 감추고는 도덕성, 애국주의, 그리고 개신교 신앙의 보호자로 그 모습을 보였다. 그것은 이혼, 성적 부도덕에 대항하였으며, 육체적 학대가 발생하는 가족 상황에 개입했다. 휴 다운스(Hugh Downs)는 한 20/20 기록에서 “1920년대의 KKK는 가족의 가치들을 증진시켰고, 옛 시대의 신앙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데이비드 로베(David Lowe)가 그의 KKK의 역사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이 시대의 많은 흑인들은 그 단체를 위협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애국주의와 성적 도덕을 증진시키는 것에 더하여, 1920년대의 KKK는 또한 반가톨릭 입장을 취했는데, 그것은 20세기 초엽에 유럽 남부로부터의 대규모 가톨릭 이민에 대한 많은 개신교도들의 불안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한 작가는 이 시대 동안 캔사스(파함이 태어난 주)에서의 KKK를 위한 종교적 지지는 “대부분 가톨릭에 대한 불안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1920년대에 KKK는 유력한 정치 세력이 되어 주지사들과 상원의원들의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는 남부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KKK는 1924년에 힘의 절정에 이르러 그 회원과 권력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결정적인 요인들이었다. 로베는 그 단체는 많은 사람들이 어떤 방편 또는 정치적 수단으로 삼고 협력한 그런 권력을 취해 왔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예를 들면, 젊은 헤리 트루먼(Harry Truman)이 1922년에 KKK에 가입했는데, 그는 후에 대통령으로서 미국 군대에서 인종차별을 폐지했다. 또한 그 시기에 한 젊은 법률가 휴고 블랙(Hugo Black)이 그 단체에 가입했는데, 그는 후에 대법원 판사가 되었다. 서부 버지니아출신으로 민주당 상원의원이었던 로버트 비르드(Robert Byrd)가 그 단체의 회원이 된 것은 또한 바로 이 시기였다.
그 단체가 1920년대에 그런 탁월함을 보여주었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파함이 그들과 그들의 행적들에 대해 논평했을 것이라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파함은 결코 (어떤 사람들이 주장해 온 것처럼) 그 단체에 가입하지 않았으며, 그리고 그의 그들에 대한 칭찬은 그들의 애국주의, 결혼과 가족에 대한 옹호와 관련된 것이지, 그들의 감추어진 인종적 문제(masked racial agenda)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파함은 심지어 그 단체의 긍정적인 노력들도 실패할 것이 분명한 데, 그 이유는 그들이 순수한 영적 문제(a purely spiritual agenda)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선언했다.
결론
Concluding Thoughts
파함이 캔사스와 휴스턴에서 보여주었던 인종적 개방성(racial openness)은 로스엔젤래스의 아주사 거리 선교회에서 한 동안 꽃을 피웠다. 그렇지만, 오순절주의자들은 계속 인종에 대한 예언자적 목소리가 되기보다는 주변 문화에 항복했으며, 인종 차별 같은 불신앙인들의 길을 채택했다. 그리고 비록 오순절주의자들이 최근 긍정적인 변화를 시도해왔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변화하고 있는 미국 문화의 자국을 좇아가고 있을 뿐이지, 그 어떤 예언적 목소리나 비전의 결과를 좇아가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파함은 어떤가? 그는 그에게 쏟아져 온 비난을 받을 만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비록 그는 시민 권리를 위한 투사는 아니었지만, 그가 살았던 시간을 초월하는 인종적 개방성을 보였다. 그 초기 단계에서 보여준 파함의 모범은 뒤 따르는 것들에 매우 결정적이었다. 이것이 그가 초기 오순절주의 시기에 압도적이었던 인종간 개방성과 조화의 풍조를 놓는데 기여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을 만한 이유이다.
Across the Lines: Charles Parham’s Contribution to the Inter-Racial Character of Early Pentecostalism
With comments by Pauline Parham, daughter-in-law of Charles Parham, who passed away at the age of 94 on December 22, 2003.
Eddie Hyatt
About the Author
Eddie L. Hyatt, D.Min. (Regent University), M.Div. and M.A. (Oral Roberts University), serves the body of Christ around the world by teaching with academic excellence and the anointing of the Holy Spirit. He has authored several books, including 2000 Years of Charismatic Christianity. His passion is to see authentic spiritual awakening transform the Church and impact the world in the Twenty-first century. www.eddiehyatt.com
He has been called a “rabid racist” and a “white supremacist.” He has been vilified as the progenitor of racial prejudice in the Pentecostal movement. Some believe that any traces of racism among modern Pentecostals can be traced to him. In a recent reconciliation gathering, repentance was offered and forgiveness asked for his sin of racism.1 In the minds of many, Charles Parham is an embarrassment to the Pentecostal movement and does not deserve recognition as one of its founders.
On the other hand, it was Parham who first reached across racial lines to both African-Americans and Mexican-Americans and included them in the fledgling Pentecostal movement. It was Parham, a native of Kansas, who offended southern whites by preaching in black churches and allowing a black pastor to enroll in his Bible school in segregated Houston, TX. It was Parham who did the “unheard of” and invited a black woman, Rev. Lucy Farrow, to preach in his Apostolic Faith campmeeting in south Texas in 1906. And it was Parham who, until his death in 1929, maintained cordial relations with the black community in his hometown of Baxter Springs, KS, often preaching in the local black Pentecostal church.
So, how are we to reconcile these conflicting views of Parham and his racial stance. Is there more than one Charles Parham? The problem seems to be context, or lack of it. Historical events occur within a context and the historian must not ignore the context. When Parham’s life is evaluated within the social-legal-religious context of his time, what emerges is neither a saintly crusader for racial equality nor a rabid racist. What does emerge is an individual who, in many ways, reflected the times in which he lived—when racial apartheid was generally accepted and practiced throughout the land. But what also emerges is an individual who, at critical times, was willing to break with cultural mores and reach across racial lines when it was not the popular thing to do. It is for this reason that Charles Parham deserves credit for setting the tone for the inter-racial openness and harmony that prevailed for a time in early Pentecostalism.
The Historical Context
Parham (1873-1929) lived and ministered during a time when racial segregation was accepted and practiced throughout America. The 14th amendment to the constitution had included a “Separate but Equal” clause, recognizing segregation but requiring that all citizens be treated equal under the law. In the 1896 case, “Plessy vs. Ferguson,” the United States Supreme Court upheld the “separate” part of this clause when it ruled that a law in Louisiana requiring blacks and whites to ride in separate railroad cars did not violate the constitution.
It was obvious, however, that the “separate” part of the clause was upheld far more vigorously than the “equal” part. Public facilities for blacks were inferior and fewer in number than those for whites. Blacks were commonly required to sit on the back seats in trains and buses and to eat in dilapidated, back rooms in restaurants. The best hotels were for whites only and even professional sports was for whites only.
And the Church? In the 1960s Dr. Martin Luther King Jr. declared 11 a.m. on Sunday morning to be the most segregated time in America. It was even more so fifty years earlier. A black person in a white church or a white person in black church was considered strange and even inappropriate. Most professing white Christians believed the white race to be superior and that racial segregation could be defended with Scripture.
In the South, the racial apartheid was even more pronounced. Jim Crow laws designed to marginalize the black populace were in place. Blacks were required to use separate public restrooms and drinking fountains. They were required to sit in separate sections on trains, buses, in restaurants and in all public facilities. All public education was segregated according to race. Blacks lived in separate neighborhoods and both overt and subtle forms of intimidation were used to keep them “in their place.”
Parham’s First Serious Encounter With the Race Issue
During the summer of 1905, Parham, for the first time, ventured south across the Mason-Dixon line into Texas. He went there to declare his newly discovered message of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evidenced by speaking in tongues. Five years earlier, the students in his Bible school in Topeka had identified speaking in tongues as the “Bible evidence” of Spirit baptism. Almost immediately the entire school experienced a mighty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 with virtually everyone present, including Parham, speaking in tongues. Parham believed that their experience signaled the beginning of the world-wide, last-days effusion of the Spirit promised in Acts 2:17, and he had come South to declare this newly discovered truth.
Parham arrived in Houston with about twenty-five workers in July of 1905. For the first time he encountered a large black populace and an intense racial prejudice he had not known in his home state of Kansas. He conducted a very successful meeting in Bryan Hall which was attended by a number of blacks who, because of local law and custom, probably sat in segregated seating. Nonetheless, he reached out to the black populace and made friends with black leaders such as Lucy Farrow and William Seymour. In fact, his racial openness made some white Christians in Houston very uncomfortable. A white pastor, referring to Parham and his Kansas workers, wrote the following rebuke in December of 1905.
I trust, therefore, that our evangelists and workers from the North will not forget this condition of affairs [racial segregation] and embarrass the work South by well meaning but mistaken efforts to disregard them. Let the race question alone until you have been South long enough to know by experience what it seems impossible for our Northern brethren to learn through other sources.2
Parham Makes Friends With Black Leaders
When the Parhams returned to Baxter Springs, they invited Farrow to go with them. She accepted the invitation and, before leaving, turned her congregation over to a black preacher named William Seymour. In Kansas, Farrow lived in the Parham home and acted as a “governess” to the Parham children who endearingly referred to her as “Auntie.” While in Kansas, Farrow was baptized in the Holy Spirit and spoke in tongues.
Farrow returned to Houston with the Parhams in December of 1905 and shared with Seymour her experience of Spirit baptism. She also informed him of a Bible school that Parham was about to open in Houston. Seymour applied for enrollment and was accepted. According to one account, Seymour sat in an adjoining room where, through an open door, he listened to the lectures. This arrangement, if true, would not be surprising because of the Jim Crow laws and prevailing custom of segregation. Nonetheless, the Parham family heard a different story about this situation.
Pauline Parham:
One of those who applied for enrollment was William J. Seymour, who had been encouraged to do so by Lucy Farrow. His entry into the Bible school must have caused some consternation because of the Jim Crow and segregation laws at that time in Texas. Dad Parham, being from Kansas, was not used to such laws and customs and he welcomed Seymour into the classroom. There is an undocumented account, repeated in many books, that Seymour was required to sit in an adjoining room and listen to the lectures through an open door. The account I heard from those present was that he was welcomed into the class along with everyone else.
Parham and Seymour became close friends during this time. Seymour introduced Parham to some of the black churches in the Houston area and they ministered together on several occasions.3 Sometime in February, Seymour answered a call to pastor a holiness church in the Los Angeles area. Parham collected an offering for his train fare and he departed for Los Angeles.
Racial Walls Broken Down in South Texas
In the Spring of 1906, Farrow followed Seymour to Los Angeles and joined him in leading the revival that was breaking forth in an old building at 312 Azusa Street. While in Los Angeles, Farrow sensed a Divine call to Liberia from whence her ancestors had been brought to America. On her way to Virginia, where she planned to board ship for Liberia, she stopped in Houston just in time for Parham’s Apostolic Faith campmeeting.
Being a dear friend and recognizing the gift of God in her life, Parham did the “unheard of” and invited her to preach in one of the campmeeting services. The large tent under which she preached was packed to capacity and the audience listened intently as she told of her experiences in Los Angeles and of her mission to Liberia. At the close of her sermon she prayed for many to receive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It was a powerful time. One participant said that she possessed “an unusual power to lay hands on people for the reception of the Holy Spirit.”4 Such racial openness by Parham led James R. Goff., Jr., who did his doctoral dissertation on Parham, to declare, “In the context of the day, he could hardly be called a racist.”5
Pauline Parham:
This event, in and of itself, demonstrates that Dad Parham was not a racist as some have contended. A black woman speaking to a predominately white audience and then laying her hands on them in prayer was unheard of in south Texas at that time. Dad Parham was willing to offend local prejudices and customs if it meant helping another human being and advancing the cause of Jesus Christ.
Separation At Azusa Street
During the Spring and summer of 1906, Parham and Seymour kept up a lively correspondence concerning a visit by Parham to Los Angeles. Their letters were very cordial and both were anticipating a wonderful reunion. In a letter dated August 27, 1906, Seymour wrote,
Dear Brother Parham,
Sister Hall has arrived, and is planning out a great revival in this city, that shall take place when you come. The revival is still going on here that has been going on since we came to this city. But we are expecting a general one to start again when you come, that these little revivals will all come together and make one great union revival.6
Both were overly optimistic about the reunion. When Parham finally arrived he was appalled at what he considered to be fleshly and demonic manifestations in the Azusa meetings. In his usual straightforward style, he confronted the situation head-on and offered correction based on what he believed he had learned about discerning between the flesh and the Spirit. The Azusa saints took offense. After preaching two or three times, he was informed by two of the white elders that he was no longer welcome. Seymour apparently went along with the rejection.
Parham was very embittered by this rejection. This bitterness later came out in a diatribe against the perceived excesses at the Azusa meetings. In this denunciation Parham used the “n” word in referring to an unnamed “fleshly” individual he had observed. This, however, was not normal verbiage for Parham. To his credit, this is the only recorded time he ever used this derogatory term. He always, before and afterwards, referred to African-Americans with accepted terminology for his day, i.e., “Negro” or “colored.”
Perhaps because of the above slur, Parham’s falling out with Seymour has often been ascribed to racism. The evidence indicates that it was over differences and questions concerning order, worship style and the genuineness of certain spiritual manifestations. Interestingly, the “racist” accusation was never made by Seymour, Farrow nor by any of his friends or enemies while he was alive. And although Parham afterwards criticized the Azusa Street revival because of its alleged excesses, he did not blame Seymour or the black participants. Instead he pointed the finger at the “Holy Rollers” of Los Angeles whom he said invaded the meetings. He later wrote,
There was a beautiful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 in Los Angeles. Then all of a sudden a Holy Roller religious meeting in the city dismissed and came down to Azusa Street, and everything that was prevalent in their meeting was turned loose into the Azusa Street Meeting.7
Pauline Parham:
When Dad Parham died in February of 1929, my husband, Robert, Mother Parham and I picked up the mantle and fulfilled his itinerant schedule of ministry. Later that same year, his schedule took us to the Los Angeles area. While there we visited the Azusa Street Mission and Jenny Seymour, who had pastored the mission since her husband’s death in 1925. We had a very friendly visit with Mrs. Seymour and then proceeded on our way.
Being a young twenty year old, I did not realize the significance of this visit and did not know the details of the earlier rift between Dad Parham and the Azusa Street Mission. Actually, Dad Parham never blamed Seymour for the rift but, rather, some of the elders at the Azusa Mission. I now realize that Mother Parham was going out of her way to reach out to Mrs. Seymour.
Parham’s Hometown Race Relations
Parham conducted an annual campmeeting in his hometown of Baxter Springs, Kansas right up to the time of his death in 1929. Several thousand people from throughout the nation attended each year. One person, impressed with the interracial character of the Baxter Springs campmeeting, wrote, “People of all creeds and colors were made to feel at home in the meeting and they certainly used their liberty in the Lord.”8 Even non-Pentecostal scholars have noted the inter-racial character of Parham’s ministry and meetings. Robert Mapes Anderson wrote,
Even before the Los Angeles revival, Parham had tapped this new ethnically heterogeneous constituency in Houston, where he garnered black converts like Seymour, Miss Farrow, and “Brother” Johnson, and some Mexican-Americans. At the 1913 summer encampment of Parham’s group in Baxter Springs, Kansas, “White people, colored people and Indians all took part in the meeting” and as Brother Parham remarked, “We had the Gospel in black and white and red all over.” For years, Parham held integrated meetings throughout the lower Midwest.9
Pauline Parham:
Dad Parham was loved by the black people in our hometown of Baxter Springs, Kansas. He often preached in the black Pentecostal church there and even encouraged the whites to attend services at the black church. The black people loved him because he treated them right. The yearly campmeetings he conducted in Baxter Springs were attended by all races. He was not a racist!
The Ku Klux Klan Distortion
Those who accuse Parham of racism commonly refer to the fact that he once commended the Ku Klux Klan in one of his sermons. What has been overlooked is that the KKK of the 1920s projected itself very differently from the KKK of the 19th century and the later 20th century. The KKK of the of the 19th century was an overt, anti-black organization intent on keeping the freed slaves from obtaining any affluence and power. It eventually died out and had ceased to function by 1872.
The new Klan, formed in 1915, masked its racism and presented itself as the guardian of morality, patriotism and the Protestant faith. It opposed divorce, sexual immorality and intervened in family situations where physical abuse was known to be taking place. In a 20/20 documentary Hugh Downs stated that, “In the 1920s the Ku Klux Klan promoted family values and advocated a return to old time religion.” Because of this, many blacks of this era did not view it as a threat, as is pointed out by David Lowe in his history of the KKK.10
In addition to promoting patriotism and sexual morality, the KKK of the 1920s also took a very anti-Catholic stance, voicing the fears of many Protestants at the large Catholic immigration from southern Europe during the early 20th century. One writer has pointed out that religious support for the Klan in Kansas (Parham’s home state) during this time “was a result, by and large, of a fear of Catholics.”11
During the 1920s the KKK became a potent political force and helped elect governors and senators, mayors and councilmen, not only in the south, but in other regions as well. It reached its pinnacle of power in 1924 when its membership and power were decisive factors in the Democratic national convention. Lowe points out that the Klan had assumed such power that many joined as an expedient or political measure.12 For example, a young Harry Truman, who later as president desegregated the American armed forces, joined the Klan in 1922.13 During that same period, a young lawyer, Hugo Black, who later became a Supreme Court justice, also joined the Klan.14 It is from this general era that Robert Byrd, the Democratic senator from West Virginia at the time of this writing, also became a member of the Klan.
With the Klan having gained such prominence in the 1920s, it is not surprising that Parham would comment on them and their activities. Parham never belonged to the Klan (as some have asserted) and his commendation of them is likely related to their championing of patriotism, marriage and family, not to their masked racial agenda. Parham went on to declare that even the supposedly positive efforts of the Klan were doomed to failure because they lacked a purely spiritual agenda.15
Concluding Thoughts
The racial openness Parham exhibited in Kansas and Houston flowered for a time at the Azusa StreetMission in Los Angeles. However, instead of continuing to be a prophetic voice on race, Pentecostals capitulated to the surrounding culture and adopted the ways of the heathen, i.e., racial segregation. And although Pentecostals have made positive changes in recent years, they have come in the wake of a changing American culture, not as the result of any prophetic voice or vision.
And Parham? It seems obvious that he is not deserving of the criticism that has been heaped upon him. Although he was no crusader for civil rights, he did express a racial openness that transcended the times in which he lived. Parham’s example at this early stage was critical for what followed. It is for this reason that he deserves credit for helping set the tone of inter-racial openness and harmony that prevailed for a time in early Pentecostalism.
Endnotes
1 This information was given to the author by a friend who was present at this gathering in Kansas City, KS.
2 W. F. Carothers, “The Race Question in the South,” Apostolic Faith vol. 1, no. 8 (Dec. 1905).
3 See B. F. Lawrence, The Apostolic Faith Restored (St. Louis: Gospel Publishing, 1916), 64.
4 See Lawrence, The Apostolic Faith Restored, 66.
5 James R. Goff, Jr., Fields White Unto Harvest (Fayetteville, AR: Univ. of Arkansas Press, 1988), 108.
6 Sarah Parham, The Life of Charles F. Parham (Baxter Springs, KS: Apostolic Faith Bible College, 1977), 154.
7 Charles F. Parham, The Apostolic Faith, no. 3 (April 1925): 10.
8 Sarah Parham, The Life of Charles F. Parham, 246.
9 Robert Mapes Anderson, Vision of the Disinherited (New York: Oxford, 1979), 123.
10 David Lowe, Ku Klux Klan: The Invisible Empire (New York: W.W. Norton & Co., Inc.).
11 James R. Goff, Jr., “Charles F. Parham and His Role in the Development of the Pentecostal Movement: A Reevaluation,” Kansas History (Autumn 1984): 236.
12 Lowe, Ku Klux Klan: The Invisible Empire, 18.
13 See Lowe, Ku Klux Klan: The Invisible Empire, 19, who says, “Truman had joined during a judgeship campaign, but quickly withdrew and did not receive Klan support when he ran—and lost—the next time.”
14 Lowe, Ku Klux Klan: The Invisible Empire, 19.
15 Parham, The Apostolic Faith, no. 3 (January 192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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