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세계의 오순절신학을 위해 KIPT

오순절역사

오순절주의자 윌리엄 H. 더함의 방언론

한오신 2022. 11. 12. 19:19

 

William H. Durham

 

오순절주의자 윌리엄 H 더함의 방언론(이창승).pdf
0.59MB

 

 

이창승

순복음총회학교 조직신학, 조교수

2020. 5. 4.

 

 

I. 들어가는 말

 

    윌리엄 H. 더함(William H. Durham, 18731912)은 성결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는 19064월경에, 찰스 F. 파함의 제자들 중의 하나였던 윌리엄 J. 시무어에 의해 주도된 아주사에서의 오순절적 부흥운동의 발발에 대해 들었다.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190711일 경에는 성령께서 여기 시카고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강림하시기 시작하셨다.” 그는 오순절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072월에 아주사에 갔다. 그리고 그는 190732일 오전에 마침내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을 경험했다. 더함은 그 후 파함과 시무어에 필적할 만큼 중요한 오순절 사역자로 평가 받아왔으며, 특히 성화론적 방향전환자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그런 더함의 방언론에 대한 기존 연구가 전무하다. 본 논문은 오순절 신학의 이런 공백을 조금이나마 메우기 위해 더함의 방언론 탐사를 시도한다.

    더함의 방언에 대한 언급들은 주로 침례교 근본주의자이며, 1906년에서 1911년까지 시카고 무디 교회의 목사였던 딕슨 박사(Dr. Amzi Clarence Dixon, July, 6, 1854 June 14, 1925)의 주장들에 응수하며 이루어졌다. 더함은 딕슨 이외에도 부룩스(Brooks), 갓비(Godbey), 리스(Reese), (McLaughlin), 스틸(Steele), 마틴(Martin), 피어슨(A. T. Pierson), 하버손(Mrs. Habershon), 카우프만(Kauffman), 마이어스(Johnston Myers) 등을 언급하며 그들의 오순절적 방언을 공격하는 글들을 자세히 읽어보았다고 썼다. 그런데 더함은 그들의 주장들이 너무도 다양하여 어떤 주장을 택하여 일반화시켜 대답 글을 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그래도 그는 딕슨을 택하여 대답했다. 시무어의 아주사 선교회가 기사화 한 것처럼 시카고에는 오순절 집회들이 몇 개 형성되었으며, 그 집회들을 통해 많은 주린 영혼들이 특히 무디 연구원(the Moody Institute)의 몇 사람이 자기들의 오순절을 받았다. 그런데 딕슨을 포함한 무디와 동역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딕슨은 오순절 운동의 증거 방언론을 공격하기 위해 방언을 주제로 두 번 이상 설교했고, 1908년에 그 주제에 대해 소책자를 출판했다. 더함은 그 책을 읽었으며, 딕슨이 그 주제를 공정하게 다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함은 방언을 공정하게 다루기 위해 글을 썼다. 에와르트에 따르면, 더함은 글을 쓰는데 그치지 않고 딕슨을 직접 방문하여 오순절적 메시지를 받아들이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Dr. Amzi Clarence Dixon

 

 

    방언은 성령침례의 증거가 아닌가, 아니면 증거인가? 방언은 불신의 표적인가, 아니면 믿음의 표적인가? 육체적 나타남들 가운데 하나인 방언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나 악령인가, 아니면, 성령인가? 방언은 격한 기쁨에 순간에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출하는 비이성적인, 황홀경적인 것인가, 아니면 이성이 중지되지 않으며 고통과 중압감 속에서도 발화되는 비황홀경적인 것인가? 방언에는 어떤 종류들이 있는가? 방언은 사도시대 이후 중단되었는가, 아니면 계속되고 있는가? 방언은 메시지를 내포하지 않는 사람의 독백인가, 아니면, 메시지를 내포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 매체인가? 요약하자면, 방언과 성령침례와의 관계성, 방언과 믿음과의 관계성, 방언의 근원, 방언과 이성과 정서, 방언의 중단여부, 그리고 방언의 메시지성, 이런 주제들이 더함과 딕슨의 방언 논쟁에서 주로 다루어졌던 것들이었다. 본 논문은 이 주제들을 중심으로 더함의 방언론을 구성해 볼 것이다.

    더함의 방언론을 요약하자면, 그에게 방언은 성령침례의 증거이며, 믿음의 표적이고, 그 근원은 성령이며, 기쁨의 순간뿐만 아니라 무감정, 고통과 중압감 속에서도 발화되며 이성이 그 활동을 결코 중지하지 않는 비황홀경적인 것이고, 사도행전적 방언과 고린도전서적 방언과 마가적 방언이라는 세 종류의 방언이 존재하며, 사도시대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메시지를 내포하는 의사소통 매체였다.

 

 

II. 성령침례의 증거로서 방언

 

    시카고에서 성결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던 더함은 로스앤젤레스의 아주사거리에서 오순절적 경험을 하기 이전에 자신의 경험들이 사도행전과 비교할 때 부족한 것이 있음을 인식했었다. 그는 사도행전이 제시하고 있는 경험들과 자신의 성결운동적 경험들을 비교하곤 했다. 그는 그것을 통해 자신의 경험들에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음을 인식했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에 그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그 불분명한 부족한 것을 가리기 위해 두 가지를 택했다. 하나는 소극적으로 사도행전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적극적으로 성결운동을 통해 얻었던 성화 경험들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또한 더함은 그 스스로의 오순절적 경험 이전에는 성령침례와 방언이 결합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방언을 말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었다. 왜냐하면 그는 신자들이 방언을 말해야만 한다는 것하나님의 강력한 역사이며 성경적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성령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도 인정했었다. 그가 반대한 것은 방언을 말하는 것성령침례의 증거”(evidence)라는 가르침이었다. 그는 교리의 이 점”(this point of doctrine)에 저항했었다. 그리고 그 교리가 거짓이라고 비판했었다. 더함은 성령침례와 방언을 말하는 것이 결합될 수 없는 전혀 별개의 것들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성령침례와 방언의 분리 견해는 당시 시카고 부흥운동가들에게 일반적이었던 것 같다. 토레이(R. A. Torrey)를 비롯한 무디(D. L. Moody)와 당시의 성결적 부흥운동가들은 대부분 중생과 구별되고 후속되는 성령침례가 여전히 필요하며 그래서 그것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토레이는 성령침례의 유일하고 결정적인 증거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는 오순절주의의 주장을 거부했다. 성결운동가 시절 더함이나, 더함의 논쟁 상대였던 딕슨도 그런 입장을 견지했다. 딕슨은 방언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성령침례를 받지 않은 것이라는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라는 반응을 내놓았다. 그가 그렇게 반응한 이유는 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상충되기 때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딕슨은 방언을 말하는 것은 성경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딕슨은 방언으로 말하기를 경멸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만 그는 고린도전서 1228절을 근거로 삼고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령의 은사들 중에서 가장 낮은 은사이고, 가장 좋은 은사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딕슨은 또한 성령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가 거부했던 것은 방언을 말하지 않는 사람은 성령침례를 받은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성경과 싸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더함은 자기가 이끌고 있던 시카고 선교회 회원의 삼분의 이 이상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따로따로라고 생각했던 성령침례와 방언을 말하는 것이 결합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는 아주사로 갔다. 그 집회들에 참석해 본 더함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그 역사[성령침례]가 끝마쳐졌다는 성경적 증거(the Bible evidence)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성령침례를 받으며 방언을 말하기를 경험했다.

    더함에게 방언을 말하는 것은 성령침례에 반드시 동반되는 것이었다. 그는 기쁜 소식,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기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완전한 구속이라는 복음을 전하면, 성령께서 청중들에게 임하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성령이 임하실 때 그들을 채우시고, 점유하시고, 더하여 다른 방언들로 그들을 통해 말씀하신다.” 더함은 이런 성령침례와 함께 방언이 발생하는 것을 이 성령의 동반 역사”(accompanying work of the Holy Spirit)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더함에게 이런 동반 역사는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지고 있다는 하나님으로부터의 확증이었다. 그는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이 동반되는 전형을 사도행전에 기록된 오순절 날의 성령강림으로 삼았다. 더함에게 성령을 받는 경험,” 즉 성령침례에는 오순절 날의 사도들의 경우처럼 성령이 말하라고 주시는 대로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변함없이 동반된다(invariably accompanied).” 그에게 성령침례에 방언은 언제나 동반되며, 그 어떤 예외도 없었다.

    더함은 방언을 말하는 것이 듣는 타인이나 말하는 자 스스로가 성령침례를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됨을 경험을 통해 검증했다. 그는 아주사 거리의 오순절적 경험 후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간증하여 알릴 필요가 없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더함이 방언을 말하는 것을 들음과 동시에 더함 형제가 그의 오순절을 받았다고 외쳤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 더함은 사도행전을 통해 베드로 등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도 성령침례를 받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방언을 말하는 것이었다고 가르쳤다. 그는 고넬료의 집 사람들에게 임한 오순절, 성령침례를 언급하며, “방언으로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성령이 그 이방인들에게 임하셨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이 알게 된 표징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더함은 에베소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하며 예언함으로써 그들이 성령침례를 받았다는 것을 자신들도 알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더함은 성령침례를 받을 때 그 증거로서 방언을 말하게 된다는 교리가 옳다는 것을 경험과 성경연구를 결합해 주장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더함은 사도행전을 연구하며 “5년 이상 설교하면서 자기 경험에 무언가 부족함을 인식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를 만나주셨고, 증거로서 방언이라는 표징과 함께 성령을 그에게 채워주셨다. 그렇게 더함은 성경연구를 통해 어렴풋하게 느꼈던 그 부족은 방언을 말하며 성령침례를 받는 것이었음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고, 그 부족한 것을 경험을 통해 채우게 되었다. 그 이후 그는 실제 경험(actual experience)에 비추어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 실제 경험을 검증된 지식”(tested knowledge)이라고 불렀다. 더함은 성령침례라고 칭해지는 어떤 경험이 과연 그런가 아닌 가를 판별하는 기준을 성경적 낙인”(the Bible brand),오순절의 큰 표준,” 또는 하나님의 표준”(God’s standard)이라고 칭했다. 그에게 그 표준은 사도행전 24절이었고, 그 내용은 성령께서 말하라고 주시는 것을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더함은 2000년 전에 오순절 날에 하나님께서 성령침례의 경험에 관해 그분의 표준을 들어 올리셨기 때문에 그 이후의 세대들은 그 표준으로 그 경험을 가졌는지 갖지 못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함에 따르면, 방언이 성령침례의 증거라고 선포되었을 때, 그 교리는 거센 저항을 받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거짓된 교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을 경험을 통해 검증한 사람들은 그 교리가 옳다는 것을 인정했다. 더함은 방언으로 말하기(speaking in tongues)가 성령침례의 증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따르는 표적들로써 이 교리(this doctrine)를 확증하셨다.

 

 

III. 신자들의 표적, 불신자들에게 표적으로서 방언

 

    딕슨은 방언으로 말하기라는 경험은 불신의 표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고린도전서 1422절을 근거로 제시하며, 이것은 예배에 참석하여 듣고 있는 불신자를 가리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딕슨은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들어온 불신자들이 교인들이 미쳤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 딕슨에게 방언 말하기는 듣는 불신자의 불신을 드러내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딕슨은 고린도전서 1224절과 25절을 근거로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말하거나 예언하는 것은 모임에 참석한 불신자들을 신앙으로 이끄는, 불신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보았다. 탄성을 지르며 방언을 말하는 것은 불신자들에게는 의미 없고, 불신자들의 눈에는 방언을 말하는 신자들이 미친 것으로 비춰지며, 불신자들에 대한 신자의 선한 영향력은 더 이상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방언을 말하기는 불신자를 신앙으로 이끌기 보다는 불신자의 불신을 더욱 키우는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딕슨에게 방언을 말하기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구하는 사람의 불신을 징벌하는 기능을 담당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딕슨은 바울의 이사야서 2811절의 인용(고전 14:21)을 근거로 구약 시대에 왕을 구했던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왕을 줌으로써 그들의 불신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분의 징벌을 보내신 것처럼, 낯선 방언은 불순종과 불신앙에 대한 징벌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딕슨에게 성령침례의 표징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고, 그래서 표징 없이 믿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며, 방언으로 말하기라는 표징이 없는 사람은 성령침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신의 영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더함은 이런 딕슨의 주장을 반박하며 방언이란 신자들의 표적이며, 동시에 불신자들에게 표적이라고 주장했다. 더함은 딕슨이 방언을 신자들의 표적이기 보다는 불신자들의 표적이라고 주장한 것을 문제 삼았다. 그리고 그는 마가복음 16장의 긴 종결에서 예수께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들이 따르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근거로 방언을 신자들의 표적”(a sign of believers)이라고 규정했다. , 그는 방언을 말하는 것은 말하는 자가 신자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적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더함은 방언은 불신자들에게 표적”(a sign to unbelievers)라고 말했다. 불신자들 앞에서 방언을 말하는 것은 신자들이 불신자들에게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실이라는 것을 불신자들에게 알려주는 표적이 된다는 것이다. 더함의 그런 주장은 마가가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파할 때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표적들을 불신자들에게 행하셔서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확실하게 증거하셨다고 전하는 것과 일치한다.

 

 

IV. 내적 근원인 성령의 육체적 나타남으로서 방언

 

    딕슨은 오순절운동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방언들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방언을 말하는 것은 무질서하며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방언 소리는 마치 수탉의 소리, 뱀의 소리와 같이 소음에 불과하며 품위가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래서 딕슨은 그런 방언 말하기는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딕슨은 비록 방언의 은사를 인정했지만, 오순절운동 안에서 발생하고 있는 방언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그 기원이 성령이 아니라고 보았다. , 그는 오순절운동 안에서 방언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인간 심리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거나, 사단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더함은 딕슨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며 육체적 나타남”(physical manifestation)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 것은 하나님의 영의 직접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발생한다.” 두 번째 것은 정반대 쪽에 있는 나타남인데 그것은 마귀의 능력의 직접적인 역사에 의해 발생한다.” 그가 세 번째로 제시하는 나타남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 나타남과 마귀로부터 기인한 나타남의 중간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서 육적인 것의 나타남”(the manifestations of the flesh)이다. 그는 사람들이 어떤 육체적 나타남(physical manifestation)을 보자마자, 너무도 쉽게 그것을 마귀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돌린다고 비판했다. 그에게 모든 육체적 나타남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말하는 것은 틀린 말이며, 반대로 그 나타남들이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틀린 말이다. 또한 육체적 나타남은 모두 육에서 온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다.

    더함은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육체적 나타남들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딕슨의 주장을 반박하며 오순절운동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방언의 기원은 성령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 더함은 그 방언은 인간 심리가 내재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인간 심리 외부에서 오는 초자연적인 방언(supernatural tongues)라고 보았다. 그는 개인적인 경험과 성경을 토대로 성령침례를 받을 때 성령께서 인간 안에 오시며, 그 성령께서 방언을 말하게 하신다고 보았다.

 

내 영혼이 고대했던 성령께서 그 때는 내게 머무셨고, 오랜 동안 나는 방언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내 안에 거하시는 복된 성령을 모시고, 그래서 그분의 임재를 의식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이었던가!

 

또한 그는 고린도전서를 근거로 방언은 성령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더함은 삼위 중 세 번째 위(the third Person in the Trinity)이신 성령께서 오실 때, 자신의 영원한 처소를 취하러 들어오시는 데, 그때 그분은 방언을 말하신다(He speaks in other tongues)”고 말했다. 더함은 성령께서 방언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의 경험담을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내 혀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내 입술이 이상한 소리들을 내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 소리는 내 마음에서 발원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성령께서 나를 통해 다른 방언으로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계셨고, 나는 형제 시무어 목사가 그분이 지금 관통하고 계십니다등등을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성령께서 인간의 영혼과 몸 안으로 들어오셔서 내주하시고 그 인간을 통해 방언으로 말씀하심으로써 방언이 성령침례의 진정한 성경적 낙인”(the real Bible brand)임을 증거하신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더함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능력을 우리의 영에게 행사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에게도 역시 행사하실 수 있으시다. 더함은 바울이 몸은 성령의 전이다라고 말한 것을 근거로 성령이 인간의 몸 위에 그리고 안에 오실 수 있으며, 그래서 육체적 나타남들은 필연적인 결과라고 말했다.

    더함에 따르면,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하는 육체적 나타남은 긍정적인 결과들을 드러낸다. 하나님이 원인이신 나타남은 육체적으로(bodily), 정신적으로(mentally), 그리고 영적으로(spiritually) 강하게 한다. 또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믿음을 증가시키며, 사랑과 기쁨과 평화로 채운다. 더함은 사도행전(2:4, 10:44-47, 19:6)을 근거로 방언이 사단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닌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란 증거로서 성령침례를 받을 때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들었다. 하나님을 높이는 방언이 사단으로부터 오는 것일 수 없다는 것이다. 더함에 따르면, “하나님의 성도들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인격(personage)이신 복된 성령은 신자 위에 임하셔서 때때로 몸을 흔들기도 하며(shake), 다른 때에는 엎드리게 하며(prostrate), 방언을 말하고 찬양하게 하며, 그리고 다른 많은 나타남들을 일으키신다.

    더함은 자신의 방언을 최초로 말했을 때 일어났던, 성령에 의한 자기 몸의 움직임을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했다.

 

그런데 31, 금요일 저녁에 그분의 강력한 능력이 내게 임했습니다. 저는 그 능력 아래서 약 세 시간 동안 씰룩거리며 떨었습니다. 그것은 이상하고 놀라웠지만 영광스러웠습니다. 그분은 저의 몸 전체를 움직이셨습니다. 한 번에 한 부분을 움직이셨는데 먼저 저의 팔을, 그 다음에 손발을, 그리고 몸통을, 다음에 머리를, 그리고 얼굴을, 턱을, 마침내 32, 토요일 오전 한 시에, 세 시간 동안 그 능력 아래 놓인 후, 그분은 저의 발성기관에 대한 역사를 마치시고, 배우지 않은 방언으로 나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세 시간동안 성령은 내게 놀랍게 역사하셨다. 나는 그와 같은 것을 증거 해본 적이 없었다. 내 몸은 동시에 부분 부분이 따로따로 움직여졌다. 내 얼굴의 피부조차 경련을 일으켰고 떨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내 아래 턱이 이상하게 흔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잠시 동안 계속되었고, 마침내 나의 목이 확장되기 시작하더니 내 음성 기관이 다른 형태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 그것이 얼마나 이상하고 놀라웠던가! 하나님의 손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이었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내 혀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내 입술이 이상한 소리들을 내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 권능은 먼저 그 사람의 몸을 사로잡고 흔들며, 어렵지 않게 그의 발성기관으로 옮겨 가서 그것들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내맡기면, 어떤 언어를 말한다. 어떤 사람이 방언을 말한 후 우리는 그가 성령침례를 받았다(관통했다: through)고 선언했다.

 

    더함은 마귀로부터 기인한 나타남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역사하고 있는 사단의 능력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던 나타남들을 보았는데, 그것은 다만 일반적으로 정령주의(Spiritualism)에 얼마동안 젖어 있던 사람들 안에서 또는 이혼이나 재혼한 여인들의 경우에서 발견되었다. 그의 눈에 하나님의 영의 나타남들과 사단의 나타남들 사이에는 참으로 닮은 점이 거의 없었다. 그는 마귀의 일들을 보자마자 알아챌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마귀는 언제나 사람들로 하여금 어리석고 비성경적인 일들을 하도록 이끌기 때문에 결국 유익이 못되었기 때문이었다. 더함에 따르면, 사단으로부터 기인하는 육체적 나타남은 몸과 마음과 영을 파괴하며, 의심, 두려움, 시기, 그리고 다툼으로 가득 채우며, 하나님과 사람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파괴한다.

    더함은 하나님의 역사도 아니고 마귀의 역사도 아닌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육적인 나타남들도 보았다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자기를 의식하며, 육체적 나타남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지기를 바라게 된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육적인 것들(the flesh)도 또한 역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로인해 하나님은 방해받으시고, 그 사람은 자신이 바라는 만큼 아름다운 경험을 갖지 못하였다.

 

 

V. 비황홀경적인 방언

 

    더함이 딕슨과 충돌한 지점은 방언의 표징성이나 방언의 기원만이 아니었다. 더 격한 충돌이 일어난 곳은 바로 방언의 성격 규정이었다. 딕슨은 방언을 무아지경적이고 열광적인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방언을 생각하기가 결여된(without thought) 정서들을 표출하는 무아지경적이고 열광적인 경험(ecstatic rhapsodical experience)”이라고 보았다. 그는 방언은 신자가 마음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경험했을 때 그것을 표현하고자 택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에게 방언은 이성이 무언가를 설명할 수 없으면 작동을 멈추고 무아지경적(ecstatic) 상태가 되었을 때 발생하는 것이었다. 이성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어떤 격한 정서들이었다. 그런데 그 격한 정서는 감사, 기쁨, 그리고 환희같은 긍정적인 것들이다. 그에 따르면, 이성이 말로 표현할 수 없어 작동을 멈출 때 그런 격한 정서는 소리를 지름, 웃음, 울음, 또는 환호성의 형태로 표출된다. 딕슨에게 그런 격한 정서들의 육체적 표출들이 바로 방언이었다. 그래서 딕슨에게 방언은 일종의 영적 강장제”(a spiritual tonic)였다. 그런데, 크레포드는 딕슨이 감정주의를 배격하고 이성주의를 지지했다고 말하여, 그의 딕슨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드러냈다. 딕슨에게 정서를 표출하는 방언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런 무아지경적이고 열광적인 기쁨에도 좋은 이유들”(good reasons)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열광적인 감정들은 일종의 성령의 은사였으며, 멸시를 받지 말아야 하고, 그보다는 진가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것을 타인들에게 통역하는 능력은 또한 성령의 은사들 중에 하나였다(고전 12.18-30)는 것도 인정했다. 그러나 딕슨은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그들의 무아지경적 정서들에 과도하게 열중하지 말라는 경고를 보냈으며, 그리고 그들에게 그보다는 타인들의 덕을 세우는 예언의 은사를 구하라는 권면을 했다는 것을 근거로 방언을 무조건 반대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방언에 열중하지도 말고, 그보다는 예언을 사모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딕슨은 방언 말하는 자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페르시아인들을 교회에서 축출하기도 했다.

    더함은 이러한 딕슨의 황홀경적이고 열광적인 방언론에 이의를 제기했다. 더함은 딕슨이 방언을 단지 황홀경적 발성(ecstatic utterances), 미칠 듯이 기쁠 때 이성(a person)을 벗어나는 것, 통역은 단지 이것이 그런 경우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먼저 방언이 딕슨의 견해와는 달리 탈이성적인, 무아지경적인 상태에서 발화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더함은 자기의 경험을 말하며 방언을 말할 때 이성이 계속 작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방언을 말할 때 저는 깨어 있었고, 제가 충만하게 성령침례를 받았다는 것을 외적으로 내적으로 온전하게 의식하고 있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그 다음 더함은 미칠 듯이 행복할 때만 방언을 말하는 것인가?”라고 질문하고는, 그렇지만은 않다고 대답했다. 그는 첫 방언을 말한 후 거의 삼년 반 동안 방언을 말해왔는데, 실제적 경험”(actual experience)으로 판단해 보았을 때, 딕슨의 생각은 완전히 틀린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더함은 첫 방언을 말했을 때 거기에는 딕슨 박사가 말하는 것 같은 황홀한 것이나 또는 감정적인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나는 행복했고 계속 행복할 것이었지만, 방언을 일으킨 것은 나의 행복이나 감정들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제자들이 오순절에 그랬던 것처럼 성령께서 말하라고 주시는 대로(as the Spirit gave utterance) 말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방언을 일으킨 것도 성령의 역사였다고 회고했다. 또한 그는 무감정일 때나 기쁠 때만 방언을 말하지 않고, 고통스러울 때도 방언을 말했다고 주장했다. “무척 행복할 때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자들을 위한 또는 주님의 일을 위한 부담아래 있을 때 또는 진지하게 기도할 때에 방언을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

 

 

VI. 방언의 종류

 

    딕슨은 1908년 즈음에 사도행전적 방언과 고린도전서적 방언의 차이를 인식했다. 그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날에 발생한 방언과 고린도전서 14장이 언급하는 방언을 네 가지 점에서 대조해 보고는 두 방언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에 따르면, 그 차이는 먼저 이해 가능성의 차이였다. 사도행전적 방언은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고, 고린도전서적 방언은 아무도, 심지어 말하는 사람 자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둘째로, 방향성의 차이였다. 사도행전적 방언은 사람에게 향한 것이었고, 고린도전서적 방언은 하나님께 향한 것이었다. 셋째로, 효과를 일으키는 대상의 차이였다. 사도행전적 방언은 그것을 듣는 사람들을 세우는 것이었고, 고린도전서적 방언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을 세우는 것이었다. 넷째로, 표징의 유무의 차이였다. 사도행전적 방언은 급하고 강한 바람이라는 표징이 동반했고, 고린도전서적 방언은 아무런 표징도 동반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그에게 사도행전의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speaking with other tongues)와 고린전서의 방언으로 말하기”(speaking with tongues)는 서로 다른 것들이다. 그런데 딕슨처럼 방언을 성령침례의 증거라는 오순절주의의 주장을 거부했던 토레이는 사도행전적 방언과 고린도전서적 방언을 구분하지 않고 한데 섞어서 이해한 것 같다. 토레이는 고린도전서적 방언을 근거로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방언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기준을 제시하는데도, 방언 운동가들은 성령침례를 받는 모든 사람들이 방언을 말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성경에 맞서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더함의 활동의 주요 무대였던 시카고의 오순절 운동 안에서는 1907년 즈음에 이미 사도행전적 방언과 마가적 방언과 고린도전서적 방언을 구별하기 시작했었다. 시카고의 오순절주의자들은 발화 가능 범위와 발화 대상이라는 두 범주로 방언을 구분하였다. 그들에게 사도행전 방언과 마가적 방언은 모든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것이고, 고린도전서적 방언은 소수만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사도행전적 방언은 사람에게 향하는 것이었고, 고린도전서적 방언은 하나님께 향하는 것이었다. 륍톤은 구하는 모든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근거로 자기 공동체에 발생하는 방언을 사도행전의 오순절적 방언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시카고의 한 오순절 공동체(아마도 더함의 선교회)의 구성원들은 자기들이 말하고 있는 방언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향한다는 측면에서 고린도적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는 면에서 소수에게만 임하는 고린도적인 은사적 방언만도 아니고, 모든 신자들에게 따르는 마가적이기도 하다고 보았다. 더함은 사도행전적 방언을 다른 방언”(Other tongues)이라고, 그리고 고린도전서적 방언을 각종 방언”(Divers kinds of tongues)라고 명명했다. 그는 1909년에 1903년의 첫 오순절적 방언경험을 간증하면서 당시에는 성령침례를 받을 때 받는 표징으로서 사도행전적 다른 방언과 성령으로부터 은사로 받는 고린도전서적 각종 방언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몰랐었다고 고백했다. 슌메이커는 1907년에 사도행전적 방언을 표징 방언”(sign of tongues)이라고, 고린도전서적 방언을 은사 방언”(gift of tongues)이라고 구분하기도 했다. 아마도 딕슨의 방언 종류 구분은 이런 오순절 공동체의 인식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더함은 딕슨이 사도행전적 방언의 언어성을 확신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사도행전적 방언이 발화의 이적인가 아니면 청취의 이적인가에 대한 논의를 함의한다. 더함은 딕슨은 사도들과 다른 사람들이 오순절날 정말로 다른 방언들을 말했는지, 또는 사람들이 단지 자신들의 언어로 들었는지 의심한다고 말했다. 더함에 따르면, 딕슨은 사도행전적 방언이 화자가 배우지 않은 이 세상 언어를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딕슨에게 사도행전에서 나타나는 방언은 화자가 이 세상 언어가 아닌 어떤 불명의 것을 말했는데 청자가 그 불명의 것을 알아듣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딕슨의 사도행전적 방언에 대한 언급에서 그런 불확실함이 드러난다. 딕슨은 오순절날의 방언은 다른 방언”(other tongues)이었는데, 사도들이 다른 언어들로”(in different languages) 말하였고, “듣는 사람들 각자가자기들의 모국어들로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다른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미지의 어떤 발언”(a tongue), 즉 비언어를 발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도 말했다. 그는 화자들이 이 세상 언어들로 말을 했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청자들이 그것을 이해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딕슨은 고린도전서적 방언을 비언어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적 방언도 비언어적 방언이었을 가능성을 생각한 것이다. 더함은 성경은 그들이 다른 방언들로 말했다고 분명하게 말한다는 말로서 딕슨의 그런 모호함을 바로잡으려 했다.

    이런 더함과 딕슨 사이의 화자의 이적으로서 방언과 청자의 이적으로서 방언에 대한 논의는 몇 십 년 후에나 정리될 것을 미리 논한 선구적인 것이었다. 중세기에 나타난 방언 현상을 분석한 스탠리 버거스(Stanley Mr. Burgess)1976년에 제노랄리아, 헤테로글로솔라리아, 글로솔라리아라는 세 가지의 방언 유형을 제시했다.다른 방언은 버거스의 분류에 따르면 제노랄리아로 분류될 수 있다. “제노랄리아”(xenolalia)는 발화자가 배우지 않은 타국어로 말할 때, 청자가 자기 모국어로 알아듣는 현상이다. “헤테로글로솔라리아”(heteroglossolaia)는 화자가 자국어로 말하는데 외국인 청자가 모국어로 알아듣는 현상이다. “각종방언은 버거스의 분류에 따르면 글로솔라리아”(glossolalia). 글로솔라리아는 화자가 비언어를 말할 때 통역 은사를 받은 청자가 그 뜻을 알아듣는 현상이다.

 

 

VII. 방언의 계속성

 

    딕슨은 사도행전적 방언의 단회성을 주장하고 현재적 계속성을 부정했다. 사도행전적 방언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성령침례의 증거임을 인정하지 않았던 딕슨은 사도행전적 방언의 현재적 존속을 부정했다. 딕슨은 오순절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은 영원하시지만, “가시적 불과 가청적 바람 그리고 다른 방언들이 동반된 오순절은 반복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른 방언이 동반된 것은 오순절날 단 한 번 발생하고는 그쳤으며, 당시까지도 발생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오순절날 이후의 고넬리우스 집이나 에베소 등의 방언 언급들에서는 다른 방언이 아닌 그저 방언으로”(with tongues) 말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마가복음 1617절의 새 방언”(new tongues)도 역시 다른 방언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오순절의 본질로서 죄인들의 회개와 회심이다. 딕슨은 사도행전적 방언의 중단과 고린도전서적 방언만의 계속성을 주장한 것이다.

    더함은 딕슨의 사도행전적 방언의 단회성 주장을 일축하고 고린도전서적 방언의 계속성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적 방언의 계속성을 주장했다. 그는 딕슨의 단회성 주장을 오순절적 경험은 결코 반복되지 않았으며, 방언 말함이 기록된 다른 사례들에서 그것의 증명을 시도한다. 이것은 그 사람들이 다른 방언들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라고 요약했다. 그런 딕슨의 단회성 주장에 대해 더함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그들은 우리처럼 성령을 받았다고 말한 것을 연속성의 근거로 제시했다. 더함은 우리처럼우리가 오순절날 다른 방언으로 말한 것처럼으로 해석한 것이다. 더함에 따르면, 그래서 베드로와 함께 있던 사람들 모두를 확신시켰던 것, 이방인들도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시켰던 것은 바로 다른 방언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딕슨과 더함의 오순절날의 현상에서 반복되는 것과 반복되지 않는 것, 단회성과 계속성이라는 주제는 40년 후 칼 브럼백에 의해 다시 거론되었다. 브럼백은 오순절날의 여러 국면들은 반복될 수 없는 것들과 반복되어 재 경험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반복될 수 있는 것들은 첫째, 직접적인 소통이라는 성령침례의 개인적 특성이며, 둘째로, 위로부터 오는 능력 부여라는 성령침례의 목적이고, 셋째로, 방언이라는 성령침례의 증거이다.

 

 

VIII.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의사소통 매체로서 방언

 

    더함은 딕슨이 고린도전서적 방언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탈이성적 기쁨의 표현만으로 본 것, 그리고 사도행전 방언의 언어성도 의심한 것에 반대하고 사도행전적 방언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적 방언도 의사 소통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딕슨 박사가 방언 은사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것처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그분의 자녀들이 그분 자신과 소통하는 수단으로 약속하시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반문했다. 더함은 방언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의 소통 수단”(a means of communication)으로 규정한 것이다.

    딕슨은 방언은 가사가 없는 기악과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오순절 날 사람들이 다른 방언으로말하기를 통해 회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때 회심은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었던 헬라어로 말해진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발생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생각하기에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도 그 어떤 하나님의 메시지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예언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물론 딕슨에게 방언은 통역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무언가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방언은 메시지를 내포한 것은 아니지만 해석하는 자가 무언가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방언을 음악에 비유하여 방언은 성악이 아닌 수금이나 피리 등 기악이나 관악과 같이 소리를 내지만 가사가 없는것이라고 주장했다.

    더함은 딕슨의 방언 비메시지성 주장을 방언은 방언 메시지성으로 응수했다. 더함은 하나님으로부터 통역을 통해 사람으로 향하는 방언은 예언과 같으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통역은 그 메시지를 실제로 통역한다고 주장했다. 더함은 성령의 의지와 발화자의 의지가 동조할 때 성령께서 그 발화자를 통해 말씀하시며, 그 말씀은 일종의 메시지라고 생각했다. 더함은 190821일부터 더함의 선교회의 일원들 중 두 사람에게 주어지기 시작한 방언을 통한 예언을 메시지라고 규정했다. 그는 그 방언을 통한 예언과 그에 대한 통역을 기록하여 소책자로 발간했다. 그는 그 책의 서문에서 이 소책자의 여기저기에서 해석들’(interpretations)이라고 표기된 것들은 예언하는 사람들에 의해 방언으로 말해진 것들이며, 곁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 성령에 의해 해석된 것이고, 주어진 메시지의 부분이다라고 썼다.

    또한 더함에게 방언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메시지일 뿐만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께 말하는 매체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령의 은사로 주어지는 고린도전서적 방언을 말하는 자가 하나님께 말하는 것”(the speaker speaks to God)이라고 규정했다. 더함은 방언이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매체도 된다고 주장했다. 더함에게 방언은 현악이나 기악이 아닌 성악이었던 것이다. , 더함은 방언이 하나님께로 향할 때는 사람이 방언을 통해 하나님께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또한 그는 윗 단락에서 밝힌 것처럼 사람에게로 향할 때는 하나님께서 방언을 통해 사람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더함에게 방언은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메시지를 교환하는 의사소통 매체이기도 했다.

 

 

IX. 나가는 말

 

    이렇게 더함의 방언론은 주로 딕슨의 방언관에 대응하며 제시되었다. 더함에게 방언을 말하는 것은 성령침례에 반드시 동반되는 것이었으며, 듣는 타인이나 말하는 자 스스로가 성령침례를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였다. 더함은 방언이란 신자들의 표적이며, 동시에 불신자들에게 표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오순절운동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육체적 나타남들 가운데 하나인 방언의 기원은 성령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 더함에 따르면,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하는 육체적 나타남은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강하게 하는 긍정적인 결과들을 드러낸다. 더함은 방언이 탈이성적인, 무아지경적인 상태에서 발화되는 것이 아니며 방언을 말할 때 이성이 계속 작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무감정일 때나 기쁠 때만 방언을 말하지 않고, 고통스러울 때, 잃어버린 자들을 위한 또는 주님의 일을 위한 부담아래 있을 때 또는 진지하게 기도할 때에 방언을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더함과 그 선교회는 1907년 즈음에 이미 사도행전적 방언과 마가적 방언과 고린도전서적 방언을 구별하기 시작했었다. 그는 사도행전적 방언의 단회성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고린도전서적 방언의 계속성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적 방언의 계속성을 주장했다. 더함은 방언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 수단이라고 보았으며, 딕슨의 방언 비메시지성 주장에 방언 메시지성으로 응수했다.

 

 

 

참고문헌

 

 

이창승. “사적으로 공적으로 방언 말하기: 오순절운동의 아버지 찰스 F 파함의 방언론.”오순절신학논단Vol. 13 (2015): 81-14

          .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연구: 조직신학의 주요 쟁점과 관련하여.” Ph.D 논문, 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 2010.

 

Brumback, Carl. “The Pattern at Pentecost.” What Meaneth This?: A Pentecostal Answer to a Pentecostal  Question. Springfield, Missouri: Gospel Publishing House, 1947.

Burgess, Stanley Mr. “Medieval Examples of Charismatic Piety in the Roman Catholic Church.” Perspectives on the New Pentecostalism. ed. Russel P. Spittler. Grand Rapids, Michigan: Baker Book House, 1976: 14-26.

Crawford, Dan D. A. Thirst for Souls: The Life of Evangelist Percy B. Crawford (1902-1960). Selinsgrove, Pennsylvania: Susquehanna University Press, 2010.

Dixon, Amizi Clarence. Evangelism Old and New: God’s Search for Man in All Ages. New York, New York: American Tract Society, 1905.

          . Speaking with Tongues: The Plain Replies of the Word of God to Some Modern and Dangerous Views of the Matter. Chicago, Michigan: the Bible Institute Colportage Association, 1908; The Pilot: Organ of Northwestern Bible School Vol. 13, No. 2 (November, 1932): 57-59.

          .  “Friendship-Love Builds Character.” Through Night to Morning. Solid Christian books, 2016: 100-108.

Durham, William Howard. “A Chicago Evangelist’s Pentecost.” The Apostolic Faith (Los Angeles) 6 (February-March, 1907): 4.

          .  “Personal Testimony of Pastor Durham.” Pentecostal Testimony 1.1 (March, 1909): 5-7.

          .  “A Word to Ministers, from a Minister.” Pentecostal Testimony 1.1 (March, 1909): 10-12.

          .  “Editorial.” Pentecostal Testimony 1.5 (July, 1910): 1.

          .  “Manifestations Number II.” Pentecostal Testimony 1.5 (July, 1910): 7.

          .  “Doctor Dixon Answered.” Pentecostal Testimony 1.5 (July, 1910): 12-14.

          .  “The Two Great Experiences or Gifts.” Pentecostal Testimony 1.8 (Summer, 1911): 5-7.

          .  “What is the Evidence of the Baptism in the Holy Ghost? No.3.” Pentecostal Testimony 2.1 (January, 1912): 4-6.

          .  “The Gospel of Christ.” Pentecostal Testimony 2.1 (January, 1912): 8-10.

          .  “The Great Crisis.” Pentecostal Testimony 2.2 (May, 1912): 3.

          .  “Speaking in Tongues is the Evidence of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Pentecostal Testimony 2.2 (May, 1912): 9-12.

          .  “Notes For the Reader.” Heavenly Messages. Third Edition. Chicago, Illinois: Eld. F. A. Sandgren, n.d.

Ervin, Howard M. Spirit-Baptism: A Biblical Investigation. Peabody, Massachusetts: Hendrickson, 1987.

Ewart, Frank. The Phenomenon of Pentecost. Hazelwood, Missouri: World Aflame Press, 1975.

Farkas, Thomas George. “William H. Durham and the Sanctification Controversy in Early American Pentecostalism, 1906-1916.” Ph.D dissertation,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1993.

Lupton, Levi R. “This is That.” The Apostolic Faith (Los Angeles) 7 (March, 1907): 3.

Menzies, Robert P. “R. A. Torrey’s Enduring Theological Legacy: The Pentecostal Movement.”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70th Annual Meeting. https://www.etsjets.org/files/annual_meeting/2018_Program/RA%20Torrey's%20Theo%20Legacy.pdf, accessed 4, May, 2020.

Parham, Charles F. A Voice Crying in The Wilderness. Joplin, Missouri: Joplin Printing Corporation, 1902, 1910.

          .  The Everlasting Gospel. Baxter Springs, Kansas: Apostolic Faith Bible College, 1911.

Priest, Gerald L. “A. C. Dixon, Chicago Liberals, and the Fundamentals.” Detroit Baptist Seminary Journal 1 (Spring, 1996): 113134.

Seymour, William J. ed. “The Promise of the Father and Speaking with Tongues in Chicago.” The Apostolic Faith (Los Angeles) 9 (June, 1907): 1.

          .  “Other Points.” The Apostolic Faith (Los Angeles) 10 (September, 1907): 1.

Shoonmaker, Christian. “A Testimony from India.” Pentecostal Testimony (July, 1910): 5.

Urshan, Andrew. “Pentecost among the Persians in Chicago.” The Bridegroom’s Messenger (September 1, 1910): 3.

Torrey, R. A. The Baptism with the Holy Spirit. Minneapolis, Minnesota: Bethany Fellowship, 1972; orig. 1895.

 

 

“Ecstasy.” Cambridge Dictionary. https://dictionary.cambridge.org/ko/%EC%82%AC%EC%A0%84/%EC%98%81%EC%96%B4/ecstasy, accessed 21, November, 2020.

“Ecstasy.” Merriam-Webster. https://www.merriam-webster.com/dictionary/ecstasy, accessed 21, November, 2020.

 

 

국문초록

 

    더함(William H. Durham)은 중요한 오순절운동의 성화론적 방향전환자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그의 방언론의 전체적 모습에 대한 기존 연구가 전무하다. 더함의 방언에 대한 언급들은 주로 침례교 근본주의자이며, 시카고 무디 교회의 목사였던 암지 클레렌스 딕슨 박사(Dr. Amzi Clarence Dixon)의 주장들을 상대로 이루어졌다. 딕슨은 오순절 운동의 증거 방언론을 공격하기 위해 방언을 주제로 두 번 이상 설교했고, 1908년에 그 주제에 대해 소책자를 출판하기도 했다. 더함은 그 책을 읽었으며, 딕슨이 그 주제를 공정하게 다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함은 방언을 공정하게 다루기 위해 글을 썼다. 더함에게 방언은 성령침례의 증거였으며, 믿음의 표적이었다. 그 근원은 사람 자신이나, 사단이 아닌 성령이었다. 더함의 실제적인 경험에서, 방언은 기쁨의 순간뿐만 아니라 무감정, 심지어 고통과 중압감 속에서도 발화되며, 이성이 그 활동을 결코 중지하지 않는 비황홀경적인 것이었다. 그의 분류에 따르면, 사도행전적 방언, 고린도전서적 방언, 그리고 마가적 방언이라는 세 종류의 방언이 존재하였다. 그가 살펴보았는데, 방언은 사도시대 이후에도 그치지 않고 계속 발생해 왔다. 그에게 방언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메시지를 내포하는 의사소통 매체였다.

 

주제어: 윌리엄 H. 더함, 암지 C. 딕슨, 방언, 오순절 운동, 성령침례의 증거, 방언의 종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 수단.

 

 

Abstract

 

A Pentecostalist William H. Durham and Speaking in Tongues

 

Lee, Chang-Soung (Ph. D.)

Assistant Professor, Systematic Theology

Korea Christian College

Republic of Korea

 

    William H. Durham was the significant sanctification direction changer in the Pentecostal movement. But, there has been no research on the overall appearance of William H. Durham’s view on speaking in tongues. His view was expressed mainly through debates with Dr. Amzi Clarence Dixon, a Baptist fundamentalist and a pastor of the Moody Church in Chicago. Dixon preached more than once on the subject of speaking in tongues to attack the evidential tongue of the Pentecostal movement, and in 1908 published a booklet on the subject. Durham read the book and thought that Dixon was not fair on the subject. So Durham wrote to handle the speaking in tongues fairly. For Durham, speaking in tongues was the evidence of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the sign of faith. Its source was not man’s mind or Satan, but the Holy Spirit. In his real experience, speaking in tongues was not ecstatic because reason or mind did not cease its activity during speaking in tongues. And it broke out not only at the moments of joy but also at those of no emotion, further even under those of agony or heavy burden. According to his classification, there were three kinds of speaking in tongues: Lukan tongue, Corinthian tongue, and Markan tongue. After investigation, he said that speaking in tongues did not cease but, had continued since the Apostolic era. For him, speaking in tongues was a communication medium between God and man containing messages.

 

Key Words: William H. Durham, Amzi Clarence Dixon, Pentecostal Movement, Speaking in Tongues, The Evidence of The Baptism with the Holy Spirit, Kinds of Speaking in tongues, A Way of Communication between God and 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