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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역사

에드워드 어빙과 성령침례의 “현저한 표적”

한오신 2023. 1. 11. 06:25

Edward Irving and the “Standing Sign” of Spirit Baptism

 

Gary B. McGee, ed., Initial Evidence: History and Biblical Perspectives on the Pentecostal Doctrine of Spirit Baptism (Peabody, MA: Hendrickson Publishers, 1991; Wipf and Stock Publishers, 2008), 41-56.

 

에드워드어빙성령침례의현저한표적방언번역(도리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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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ard Irving

 

 

 

데이비드 W. 도리스

David W. Dorries

 

이창승 역

 

David W. Dorries: he is a teacher, speaker and writer with a demonstrated history of working in the higher education industry. Strong education professional skilled in Christian History, Nonprofit Organizations, Student Recruiting, Discipleship, and Pastoral Counseling.

David W. Dorries, Ph.D. - Director - Kairos Ministries International | LinkedIn

 

학력

  • University of Aberdeen: Ph.D.Church History  1984년 1988년
  • Andover Newton Theological School: Master of Arts (M.A.)Religion/Religious Studies
  • Baylor University: Bachelor of Arts (B.A.)History
  • Commerce High School - Commerce, TX : HS diplomageneral
  • Oral Roberts University-

 

 

 

"지난 세기 동안 스코틀랜드인 어빙(Irving)의 가르침 아래 일어났던 한 분파인 어빙주의자들(Irvingites)이 고린도전서 112절에 기록된 여덟 가지 은사들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그분의 다가오심의 증거로서 마련해 두신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받았습니다. 그 이름들은 잊혀 졌지만, 한 신사와 그의 아내는 자신들의 오순절을 받고 이탈리아어로 말했습니다."

--- 찰스 F. 파함의 에디워드 어빙 언급 (Charles F. Parham, “Baptism of the Holy Ghost: the Speaking in Other Tongues and Sealing of the Church and Bride,” A Voice Crying in the Wilderness (Baxter Springs, KS: Apostolic Faith Bible College, 1902), 29)

 

 

 

여는 말

 

    1830년대 동안 영국에서 에드워드 어빙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일어난 놀라운 오순절적 발생들과 그것들의 풍부한 신학적 함의(moorings)에 비추어보면, 20세기에 미국에서 발생한 고전적인오순절적 부어주심(the “classical” Pentecostal outpouring)은 그것의 독특성을 어느 정도 상실한다. 비록 그 어떤 직접적인 신학적이고 역사적인 연관성이 이 두 운동들 사이에서 추적된 적이 없지만, 그 미국의 운동을 70년 이상을 앞섰던 그 영국적 표현은 분명하게 그 고전적경험의 보다 중요한 특징들의 어떤 것들을 앞질러 말했다.

 

 

에드워드 어빙과 19세기 성령의 나타남들

Edward Irving and Nineteenth-Century Manifestations of the Spirit

 

    에드워드 어빙(1792-1834)은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교육받고 목사와 신학자가 되었지만 기독교 교회에 대한 그의 신학적 공헌들은 그의 출생지의 스코틀랜드적 칼빈주의의 편협한 한계들을 뛰어넘었다. 그는 그의 런던에서의 십 이년 목회 사역 동안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논쟁이 어빙을 괴롭혔다(Controversy seemed to court Irving). 그리스도의 가현적 모습이 종교적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에, 어빙은 교부들의 고대 성육신적이고 삼위일체론에 뿌리를 둔 그리고 개신교 개혁가들에 의해 회복된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을 강력하고 생생하게 설교하는데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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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시대의 교회에 기독론적 균형을 회복시키려는 어빙의 노력들은 반발을 일으켰으며, 그 반발은 그가 1833년에 스코틀랜드 교회의 안수 받은 목회자직으로부터 파면당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그렇지만, 당시 어빙의 관심은 분명 다른 방향으로 향해있었다. 1830년에 변변찮은 상황에서 처음으로 스코틀랜드 서부에서 발발하고 그다음에 런던에서 나타났던 영적 은사들, 표적들, 그리고 이적들의 발생은 당시의 종교적 세계를 철저하게 흔들었고, 어빙의 생애와 사역의 미래 행로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스코틀랜드 서부 오순절 부흥 West of Scotland Pentecostal Revival

 

    1830년 봄에, 어떤 사람들이 성령의 이적적인 나타남들(manifestations)을 경험해왔다는 소문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은 스코틀랜드 서부 가클로크(Garcloch)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어빙의 영향력은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그의 목회 친구들 존 맥클로드 캠벨(John Macleod Campbell)과 로버트 스토리(Robert Story)를 위해 18281829년 여름에 설교해 왔었다. 일련의 사건들의 첫 번째 것이 발생했는데, 그것은 폐결핵으로 죽어가던 메리 캠벨(Mary Campbell)이 고침을 받고 성령의 방언 은사를 실행한 것이었다. 그 이야기는 18304월 초에 시작된다. 그때 글래스고우에 있는 클라이드 강 건너에 살고 있던 맥도날드 가족은 마가렛(Margaret)이 그녀의 형제 제임스(James)의 명령에 그녀의 병상에서 일어나면서 이적적인 치료를 경험했다. 그의 명령은 그가 성령침례가 그에게 임했다는 것을 극적으로 알린 직후 짧게 행해졌었다. 맥도날드 가족들은 메리 캠벨의 친구들이었다. 마가렛이 치료되었을 때, 제임스는 즉시 메리 캠벨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의 자매의 치료를 알렸을 뿐만 아니라, 일어나 치료받으라고 명령한 것도 알렸다. 제임스의 편지를 읽는 과정에서, 메리 캠벨은 즉각적인 회복과 방언을 말하는 경험을 했다. 제임스와 그의 형제 조지(George)는 또한 성령의 방언, 통역, 그리고 예언의 은사들을 나타냈다.

    그 사건들에 대한 소식들이 그 땅 전체에 퍼져나가면서, 사람들은 이 현상들을 조사하기 위해 메리 캠벨과 맥도날드 가족의 집들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의 여러 지역들에서 왔다. 매일 기도 모임들이 몇 달 동안 계속 열렸으며, 늘어난 사람들에서 성령의 은사들이 일정하게 나타났다. 몇몇 집들이 그 집회들을 위해 제공되었고, 그 운동은 교단이나 안수받은 목회자의 지휘없이 계속되었다. 예상할 수 있듯이, 격렬한 논쟁이 이 사건들을 놓고 종교적 세계 안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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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회들에 대한 광범한 관심과 참석은 영적 나타남들이 빈도와 힘에 있어서 현저하게 감소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어빙의 관련 The Irving Connection

 

    어빙이 이 이적적인 부어주심의 소식들을 처음 들었을 때, 그는 그의 교리가 그것들의 발생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는 메리 캠벨이 쓴 몇 편지들을 자세하게 살펴보고 나서야 얼마나 그의 설교가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인간으로서 삶의 확실함과 그분 고유의 신성보다는 성령의 역사로 인한 그리스도의 성결에 대한 그의 강조는 메리 안에 그녀의 방언 은사 받음과 몸 치료에 이르게 한 발견을 촉발시켰다. 그녀는 어빙의 그리스도론을 그것의 논리적인 최종 결론으로 받아들였다. 어빙의 그리스도론은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이적적인 역사들은 또한 그분의 신적 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동일한 인성을 가지고 있고 동일한 성령이 내주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행하신 것들과 그보다 더 큰 것들도 행해야만 한다.

    어떤 직접적인 연계가 그의 기독론과 그 나타남들의 발생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이 어빙에게 떠오르자, 복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그에게 펼쳐졌다. 그는 그분의 성육신과 속죄에서 그분에 의해 성취된 인류를 위한 위대한 구속 사역은 교회의 부활된 머리로서 그분이 맡으신 중요한 직책, 예를 들면, 성령침례 수여자(Baptizer with the Holy Spirit)로서 그분의 역할을 예비한 것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어빙은 다음과 같이 쓴다.

 

. . . 교회의 머리로서 그리스도의 특별하고 적절한 명칭은 성령으로 침례를 주시는 분”(He which baptizeth with the Holy Ghost)이며, 오순절 날까지는 성취되지 않았다 . . . 그리고 성경 전체는 미래의 모든 시대에서 동일하게 교회의 적절한 소명으로 그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 . .

 

    1830년 이후 이 심오한 발견이 내포하고 있는 것들이 어빙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스코틀랜드로부터 그에게 당도한 지속적인 이적적 나타남들에 대한 보고들은 그에게 지극히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의 참된 교리에 대한 고찰들을 어떤 사실에 대한 검사로 돌리게 만들었기때문이었다. 어빙은 이제 그의 고향 스코틀랜드에서 펼쳐지고 있는 놀라운 사건들을 승인할 준비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런던 리젠트 광장 교회 회중들 사이에 같은 성령의 방문(visitation)을 진심으로 원하기 시작했다. 18314월에, 어빙은 그의 교회에서 아침 630분에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기도모임들을 갖기로 결정했었다. 그의 바램들은 많은 다른 사람들과 공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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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백 명에서 천 명의 사람들이 매일 기도를 위해 모였고, 성령의 초자연적 나타남들이 그들에게 임하기를 기대했다. 참석자들은 은사들, 표적들, 그리고 이적들을 기대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옛 직분들의 회복을 추구했다. 어빙이 표현했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선물이신 성령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은 사도들, 선지자들, 전도자들, 목사들 그리고 교사들을 위해[세워달라고] 주님께 부르짖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직분들이 예수의 몸의 유익을 위해 임명된 직책들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런던에 오심 The London Visitation

 

    이 기도 모임들이 시작된 약 석 달 후, 방언, 통역, 그리고 예언의 은사들의 나타남들이 발생했다. 목사로서 어빙은 영들을 시험하는책임을 떠맡았다. 그는 은사들이 사적으로 증명된 사람들만이 공적으로 그들의 은사들을 행사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아침 기도회에서 나타남들은 몇 달 동안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어빙은 적절한 성경적 원리들과 영적 은사들의 실행에 대해 전 회중을 가르치기 위해 설교와 교육 사역에 전념했다.

    성령의 은사들은 기독교 예배 안에서 정상적인 위치와 목적을 갖는다는 것을 그의 장로교 회중들에게 가르친 것은 특히 개신교 역사의 삼백여년 동안 그런 발생들을 위한 선례의 결여의 견지에서 감당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어빙은 리젠트 광장 교회의 그 주일 아침과 저녁 예배들의 질서정연함을 휘저어 놓은 그 첫 나타남들의 단계에 그의 이사들의 대부분이 놀랐을 때 아연해 하지 말았어야 했다. 18311016일에 미지의 방언이 주일 아침 예배 동안에 처음으로 그 큰 예배당을 가득 채웠을 때, 참석했던 거의 이천 명의 사람들은 대혼란에 빠졌다. 더 큰 혼란이 그날 저녁에 많은 호기심 가득 찬 탐색자들과 그 이상한 행동들을 비웃기 위해 온 구경꾼들을 포함한 거의 삼천 명이 그 건물 안으로 밀려들었을 때 일어났다. 주로 교회 성도들 자신들로부터 보다는 외부의 반대자들에 의해 촉발된 무질서한 혼란들의 두 주간을 직면한 후, 어빙은 잠시 주일 예배들 동안 성령의 나타남을 정지시켰다. 더 숙고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어빙은 그의 정책을 취소하고 그 은사들이 계속 되는 것을 허락했다. 그는 은사들을 방해하는 것은 성령의 음성을 소멸시키는 것이 될 것이며, 성령으로 침례를 주시는 분으로서 그리스도의 역할에 저항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렇지만, 은사들의 속행과 함께, 그것들의 나타남은 예배의 순서 안에 지정된 두 번에 한정되었다. 어빙의 현명한 지도력과 지속적인 성경적 가르침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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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와 조화가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통한 성령의 음성을 소멸시키지 않고 주일 예배들에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사들 가운데서 그런 선례가 없는 발생들을 승인하는 어빙의 방침을 향한 반대는 더욱 결렬해졌다. 그들은 십 년 이상의 목회 사역 동안 어빙을 만장일치로 지지해 왔던 동일한 성도들이었다. 이제는 그들이 그를 대항해 전선을 형성했다. 그들은 그가 그들이 믿기에 장로교 예배의 적정함이 미혹된 광신자들의 헛된 지껄임들이라고 믿는 것에 의해 방해를 받도록 허용하는 그 어떤 정당한 이유도 갖고 있지 않다고 확신했다.

그 이사들은 그 문제를 1832317일에 런던 장로회에 회부했다. 그 이사들의 고소는 고소장에 포함된 첫 진술에 의해 요약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에드워드 어빙 목사는 본 교회의 공적 예배들, 안식일 하나님 예배 시간에, 그리고 다른 날에 스코틀랜드 교회의 목사들이나 미취임 유자격 목사들이 아닌 사람들에 의해 방해를 받는 것을 당하고도 허용했고, 그리고 여전히 허락하고 있다.

 

    장로회 앞에서 어빙의 우아한 자기 항변은 그의 증언의 이 처음 진술에 의해 예시된다: “오늘 제가 이 법정 앞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성령으로 침례를 주시는 분으로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한 것입니다. . . . ” 일주일간의 긴 심리 끝에, 장로회는 183252일에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그들은 그들에게 강요된 그 곤란한 필요성을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하면서 에드워드 목사가 스스로를 전술한 국가 스코틀랜드 교회의 목사로 남아있는 것에 부적절하게 만들어 왔다는 것을 인식했으며, 이 문서에 의해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전술한 교회의 정관의 규정들에 따라 거기서부터 면직되는 것이 타당하다.

 

 

뉴맨 거리 오순절주의 Newman Street Pentecostalism

 

    그 재판 후 주일에, 어빙과 그의 회중은 리젠트 광장 예배당 밖으로 나와야 했다. 교회의 대다수 사람들이 어빙의 목회 아래서 증가했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그를 기꺼이 버리고 떠나려 하지 않았다. 임시 장소에서 다섯 달 이상을 예배들인 후, 그 추방된 회중은 런던의 뉴맨 거리(Newman street)에 한 상설 장소를 확보했다. 장로교 체계로부터 강제로 쫓겨난 어빙과 그의 교회는 이제 방해 없이 영적 은사들과 사도적 교회 행정을 추구할 수 있는 상황에 놓였다. 막 나타나기 시작했던 그 새로운 교회의 질서를 따라 어빙은 목사직을 유지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구별되어 사도들로 임직을 받았다(ordained). 그 첫 사도 임직(the first apostolic ordination)18321117일에 이루어졌다. 1835714일에, 열두 번째 그리고 마지막 사도가 그 교회에서 임직을 받았으며, 그 교회는 이제 보편 사도 교회(Catholic Apostolic Church)로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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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전역에서 같은 생각을 가졌던 다른 교회들과 목사들이 자발적으로 뉴맨 거리의 오순절적교회와 연합하기 시작했다. 한 새롭고 확장성 있는 운동이 탄생했다는 것은 확실해졌다.

    침례를 주시는 분으로서 그리스도의 직무가 교회사 속에서 수 세기 동안 간과되어왔었다는 어빙의 확신으로부터 그것의 추진력을 얻은 한 새로운 운동의 출현과 함께, 런던은 이제 찰스 파함의 고전적오순절 공식들보다 칠십여 년 전에 그리고 아주사 거리 오순절 부흥보다 칠십 오년 더 이전에 한 오순절 부어주심(a Pentecostal outpouring)을 위한 무대가 되었었다. 기독교 세계에 새로운 날이 밝아오고 있다는 확신으로 무장한 어빙은 성령침례가 교리적이고 실천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것들을 확장하기 위해 그의 설교하기와 글쓰기를 계속했다.

 

, 형제들이여! 제가 여러분에게 지금 가르치려는 이 성령침례는 천사들과 사람들의 시각에서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입니다. 이것을 받고 싶지 않으십니까? . . . 왜냐하면 이것은 제가 지금까지 발견한 것들 중에서 또는 들어왔던 것들 중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복 있는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어빙의 성령침례론

Irving’s Doctrine of Spirit Baptism

 

    어빙에게 있어서 성령침례는 모든 침례(세례)를 받은 신자들의 공동 유산이다.

 

그리고 저는 모든 침례 받은 사람은 그 은사를 소유할 특권을 받는다고, 그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그리고 하나님을 믿음을 통해 그 은사를 소유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 . . 저는 그 은사가 침례와 결합되어 있다고(is knit unto baptism), 침례의 항목(the rubric of baptism)이라고 말합니다.

 

    어빙은 중생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침례와 성령침례라는 두 차원을 그것들의 서로 다른 기능들 때문에 확실하게 구별했다. 죄 사함과 그리스도와 연합을 포함하는 중생은 성령침례 없이도 신자와 교회의 삶 안에 존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성령침례 없이 중생만 존재하는 곳에는, 침례적 특권들의 점에서 어떤 심각한 결핍의 상태가 있다. “침례를 중생만 내포하는 것으로 설교하는 사람들은 침례 요한의 제자들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물로 침례를 주시지 않으시고, 성령으로 침례를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침례는 교회를 통한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의 연장이다. 성령침례는 적어도 그리스도께서 그의 육체의 날 동안 가지셨던 것만큼 모든 신자에게 성부의 임재와 성령의 권능을일으킨다. 그분으로 하여금 인간의 몸으로 계실 동안 성부의 강력한 말씀과 역사로 일할 수 있게 하셨던 그 동일한 성령으로 지금 그분의 교회를 침례주고 계시는 분은 바로 승리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다. 어빙에 의하면,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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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결합했기 때문에 . . . 우리는 그 하늘의 사람의 자녀들이며, 그래서 우리는 그 하늘 사람의 모습과 특징과 능력과 행위들을 나타내야만 한다, . . . 지금, 부활한 사람으로서 그분의 행위들은 전적으로 그리고 모두 초자연적이다. . . .

 

 

중생과 성화에 후속하는 성령침례

Spirit Baptism Subsequent to Regeneration and Sanctification

 

    어빙은 성령침례의 특권과 의무에로 교회의 관심을 돌리려 함으로써 성령의 성화 사역을 경시할 의도를 갖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도 우리가 씻음 받은 영혼과 거룩한 몸의 성례적 봉사를 경시한다고 말하지 말라 . . . .” 어빙은 성화를 그리스도에 의해 신자에게 전가된 의라는 법적 지위로서 중생의 일부분으로 간주한 것 같다:

 

. . . 우리는 온전한 성결 안으로, 모든 죄의 확실하고 절대적인 용서 안으로, 육의 부패와 욕구와 함께 육의 매장 안으로, 성령의 살리심이라는 모든 성결 안으로 잠겨 침례 받는다.

 

그러나 신자의 침례에 있어서 의롭다함을 받는 믿음을 넘어 성령침례는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들을 활성화시키려는 신앙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중생과] 구별되고(separate) [중생에] 후속하는(subsequent) 경험이다.

 

 

성결 향상 Enhances Holiness

 

    그의 사상에 있어서 이 차원을 더 탐사하기 전에, 신자의 성화의 법적 상태(legal standing)는 성령의 가능케 하심(the Spirit’s enablement)의 전 생애에 걸친 과정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 점에 대해, 어빙은 성령침례는 성결한 삶을 완전하게 만들기 위한 신자의 능력을 대단히 높인다고 믿었다. 결국, 성령의 은사들의 목적은 신자와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교회]의 성화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성령의 나타나심들을 요구하기 전에 온전한 성화를 기대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성령의 나타나심들은 그 위에 도움이 되라고(to profit), 자신을 교화하고(to edify), 교회를 교화하라고 주어진다.

 

    결국, 교회는 자신의 능력 부여받음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 교회(the church)가 되살아나려면, 그 교회(the Church)처럼 행해야만 한다. 육체로 계실 때 그리스도의 사역의 완전함의 나타남을 위해서 그리고 영광을 얻으시고 계시는 때 그 동일한 사역의 첫 열매들을 위해서도, 단지 성결의 길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능력의 길에 있어서도 그렇다.

 

 

믿음에 의한 활성화 Activation By Faith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성령침례는 신자의 믿음이라는 반응에 의해 활성화되어야만 하며, 그것은 중생과는 구별되고(separate) 중생에 후속하는(subsequent)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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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은 신자의 침례에 본질적으로 포함되는 반면에, 성령침례는 북돋우어져야 하는”(stirred up) 침례적 특권(a baptismal privilege)이다. 어빙은 디모데는 한 번 이상 성령의 은사들을 경홀히 여기지 말고, 북돋울 것을 권고 받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 표적들과 이적들, 그리고 다양한 기적들, 그리고 성령의 은사들이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이 보였다면, 그것은 그들이 믿음에 의한 것(by faith)이라는 어린아이들의 배움 방식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어빙은 끈질기게 조르는 어린아이 같은 믿음의 기도는 성령침례라는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 . 진심으로 구하고, 찾고, 끈질기게 두드리는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확실하게 보증되어 있는 것은 그분의 가장 크고 충분한 활동에 있어서, 그분의 모든 능력과 유효성에 있어서, 그분의 모든 은사들과 은혜들에 있어서 성령이시다.

 

    어빙은 처음부터 그것들을 이해하려는 경향을 삼가면서, 정중하게 구하고 받으려는 단순한 바람을 가지고 성령침례와 표적들과 은사들을 동반함에 다가가도록 격려했다. 어빙은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들에게 그들이 그 나타남들을 이해하든 못하든 진심으로 그리고 간절하게 방언과 예언 등의 영적 은사들을 바라고 그것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요구했다. 왜냐하면 믿음(faith)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순종하는데 참여하며, 그 후 이해(understanding)가 우리들이 기도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을 뒤따르기 때문이다.

 

 

최초 증거와 방언

Initial Evidence and Speaking in Tongues

 

    에드워드 어빙은 신자가 성령침례를 받았었다는 것을 결정하기 위한 최초 증거이론을 주장했을 가능성이 있는가?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렇지만, 어빙은 증거라는 용어를 거북하게 여겼을 것이라는 것을 주목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가 당대의 어떤 증거 작가들”(evidence writers)을 경멸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적들의 유일한 가치는 그들이 주장했던 기본적 능력(the raw power)이라고 생각했다. 증거 작가들은 복음의 본질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성격의 고려들로부터 이적들을 분리시켰다.

 

그들이 단지 그들의 능력 안에 놓으려는 이적들도 그렇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것들의 행사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증명하려한다(demonstrate) . . . , 그렇다 해도, 이것이 그리스도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어빙은 이 경험적 풍조”(empirical spirit)가 신약의 이적들을 세대주의화하려는 만연한 개신교 경향을 자극하는 것임을 간파했다. 이 경험주의자들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적 사역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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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성경의 정경의 완성 때까지 신약의 사건들의 신빙성에 대한 초자연적 증거들(supernatural proofs)로서만 소용되었다고 보았다. 더 이상 어떤 목적을 위해서도 소용이 없게 되자, 이적들은 영원히 기독교세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이다. 어빙은 이 경험주의자들의 주요 실패를 드러냈다. “. . . 거기에는 그 사역(the work)의 행사자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그 어떤 인식도 없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부분으로서 그 사역 자체에 대한 그 어떤 인식도 없다.” 어빙은 신약의 이적들은 부수적인, 양념 같은 발생들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을 전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초자연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현저한 표적 방언 Tongues the Standing Sign

 

    “최초 증거”(initial evidence)보다는 표적”(sign) 또는 은사”(gift) 등의 용어들을 선호한 에디워드 어빙은 신자에 의한 성령침례 받음은 미지의 방언(unknown tongues)의 나타남에 의해 증명되거나 확증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쳤다. 어빙은 성경의 방언 나타남을 표적과 은사 둘 다로 간주했다. 방언은 받는 자가 불신자들 앞에 있을 때 표적으로서 온다. 방언은 받는 자가 혼자 또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있을 때 은사로서 온다. 어느 경우든, 방언의 나타남은 받는 자가 성령으로 침례 받았다는 것을 증거한다. 다음과 같은 어빙의 글들로부터 직접 인용을 주목하라. “. . . 성령침례, 그것의 현저한 표적(standing sign), 우리가 잘못 알고 있지 않다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다.”의심할 여지없이 성령침례, 그것의 표적은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다.” 성령침례에 대해 말하면서, 그는 미지의 방언이라는 최초 표적”(the introductory sign of the unknown tongue)에 주목했다.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사람들에 대해 말하면서, 어빙은 우리는 그것이 언제나 그 침례에 맨 처음으로 주어지는 은사(the gift first bestowed)라는 것을 발견한다. . . .”라고 말한다. 어빙은 성령의 모든 은사들 가운데서 방언 은사는 그 모든 은사들의 뿌리와 줄기이며, 그것으로부터 모든 은사들이 자라나고, 그것에 의해 자양분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성령침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방언의 최초의 역할(the initiatory role)을 옹호하는 데 있어서 보다 더 강한 확증은 방언의 나타남을 받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기 위한 어빙의 말들 가운데서 발견될 수 있다. 비록 그가 그들이 성령침례를 받지 못했다고 추정하지만, 그는 그들이 우리가 성령을 거부했는가, 그리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모시지 못하고 있는가. . .”라며 낙담하지 말라고 격려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모시고 있다,

 

지치고 무거운 짐을 진 죄인이 안식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 . . 그러므로, 이 진리를 가진 사람은 누구든 이 진리에 대한 믿음과 이 진리의 향유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자신의 구원을 확신해야만 하며, 평안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그는 방언으로 말하기를 바라야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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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신자는 방언의 나타남 없이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성령을 모신 자이지만, 그러나 성령침례의 능력부여를 받지는 못했다.

 

 

표적과 은사로서 방언

Tongues as Sign and Gift

 

    어빙이 방언을 교회의 오순절적 능력부여의 최초의 나타남이라고 명명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방언의 다양한 기능들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어빙은 표적과 은사의 역할에 있어서 방언들을 간결하게 구별한다.

 

방언은 불신자들에게는 표적이며 나타남이다. 신자들에게 방언은 자신을 교화시키려는 목적을 위한 일종의 은혜의 수단이며, 그래서 그는 성도들의 모든 몸을 교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불신자들에게 표적으로서 방언은 거만하고 교만한 사람들을 걸려 넘어뜨려 올가미를 걸고 포획하기 위한것이다. 이것은 불신자들이 방언의 나타남을 통해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대면할 때 그들이 하나님께서 참으로 교회에 거하신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일어난다. 인간 방편을 통해 말해진, 하늘로부터 오는 이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믿음의 토대를 위해 제공하시는, 그리고 슬프게도 그들이 또한 거부할 생생한 증거(a fresh evidence)이다.” 겸손한 사람들은 방언으로 오는 메시지를 하나님의 의사소통으로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거만한 사람들은 오직 이해할 수 없는 발화로 듣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거부함으로써 자신들을 파괴시킨다.

    어빙에게, 방언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계시다는 표적, 그리고 발화자를 통한 초자연적 의사소통이라는 방언의 본질적인 목적을 넘어서서 선교적 기능으로 공헌할 수 있다. 오순절 날에서처럼, 방언은 이해할 수 있는, 비록 발화자는 그 메시지를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그 언어를 아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는 메시지일 수 있다.

 

의미 없는 지껄임과는 다르게, . . . 방언은 규칙적으로 조직되고, 유창하게 발음되고, 깊이 감동시키는 강화이며, 방언은 분명하게 그것이 자신의 모국어인 사람의 귀만을, 방언을 강력한 연설의 걸작을 만들기 위해 원한다.

 

    하지만, 파함의 지도아래서의 초기 미국 오순절주의자들과는 다르게, 어빙은 분명하게 방언의 제노글로적 기능(xenoglossic function, 언어적 기능)의 폭넓은 사용을 권하지 않았다. 비록 그는 방언 발화가 어떤 알려진 언어에 상당한다는 것을 확신했지만, 그는 이 특징을 중시하지는 않았다.

 

 

개인적 교화를 위한 방언 Tongues for Personal Edification

 

어빙에게, 방언의 진정한 중요성은 언어적 기능에 있지 않았다. “이 방언들이 사람들의 방언인가 또는 천사들의 방언인가라는 질문이나 그것들이 어떤 피조물에 의해 사용되는가라는 질문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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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빙의 관점에서 방언의 가장 큰 목적은 성령에 의해 형성되는 받는 인간 영과의 의사소통이라는 수준이었다. 이 개인적 교화의 깊은 수준은 신자로 하여금 성령의 초자연적 영역에 점점 더 익숙하게 만든다. 이것은 다른 영적 은사들에 증대된 이용 가능성의 준비이며, 이것에 의해 전체 교회가 교화를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방언들은 개인적인 교화를 위해 대단히 유용한 수단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불가사의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매우 갈구되어야 하며, 타인들에 대한 표적과는 전혀 별개다. 그리고 그것들은 사적인 기도와 예배 그리고 교화를 위해 그리고 간절한 바람에 의해 베풀어지는 것이라고, 특히 하나님을 향한 개인의 영혼의 은밀한 행위들에 전념하도록 주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타당한 것 같지만 . . . 그러나 동시에 즉석의 즐거움과 개인적인 교화를 넘어 목표로 삼아져야 할 궁극적인 결과가 있다. 그것은 방언들이 교회의 성도들이 교화되어야만 할 때 그들에게 예언하고 그들을 교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빙은 입증해야할 점을 갖고 있다. 방언 은사는 사람은 이성의 군집 그 이상의 어떤 것이다”(a person is something more than a community of reason)라는 것을 드러내면서 지성의 오만한 콧대를 꺾는다. 방언들은 어빙에게 놀라운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에게 이성이 공허한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렇지만 영은 교화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그래서 비록 그 이성이 완전히 죽은 것같이 되지만, 사람이 하나님과의 비밀스런 대화 그리고 하나님과의 기쁨에 종사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깊이 고찰해야할 주제인가!”

그렇지만, 어빙은 전혀 반 신학적이(anti-theological)지 않고, 단지 합리적인 차원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의 영의 하나님의 영과의 보다 깊은 소통의 우선성을 옹호한다. 인간의 교만은 지성의 우월성을 자랑하지만, 방언들의 어린애 같은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발화들은 하나님께서 성령의 직접적인 소통들에 의해 인간 이성과 전적으로 독립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영혼을 교화하신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인간의 말의 능변과 논거들, 그리고 다른 자연스런 미사여구들을 공허하고 헛된 것으로 만들며, 그것은 우리의 유아기의 젖이며, 영혼을 먹이는 말의 힘이다. 이런 이성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수준에서 발산하는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영 사이의 내적인 대화는 성령침례 받은 신자들에게 타인들의 교화를 위한, 이성적으로 이해된 계시들을 나타내는 영적 사실에 대한 점증적으로 성숙해가는 파악을 제공한다.

 

방언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자녀들을 모든 성도들을 위해 교회 안에서 계시에 의하든, 지식에 의하든, 예언에 의하든, 교리에 의하든 예언하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훈련시키기 위한 주요한 수단이다.

 

말하는 자들에게 불가해한 방언의 발화들은 엄마가 그녀의 아기를 키우는 것과 같다. 엄마는 아기의 음성을 불분명한 소리들로 끌어내고, 그 다음에 음절들과 단어들로, 그리고 마침내 이성의 의견 교환의 다양한 형태로 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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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 통역과 예언

Interpretation of Tongues and prophecy

 

    어빙에게, 모든 신자들을 위한 방언들의 나타남은 필요한 것이다. 그 나타남은 성령의 은사들의 공적 나타남을 위한 준비로서 초자연적인 일들에 있어서 실제적 성장과 발전의 차원을 상징한다. 성령의 은사들은 근본적으로 교회에게 주어지며, 그 지체들의 교화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성령침례를 받은 사람은 공적으로 행사될 수 있도록 그 은사들의 사용에 있어서 성숙해질 것이다. 방언 은사가 집회에서 행사되려면, 통역의 은사가 동반되어야 한다.

    공적으로 행사될 때, 방언은 단지 예언의 새로운 형태,”방식이며, 그래서 언제나 예언 사역에 보조적인 것에 머물러야만 한다. 어빙은 고린도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가르침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사도는 통역과 결합될 때 방언을 예언과 동등한 수준에 놓는다.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 14:5]

 

이 통역 은사는 발화자 자신의 영에 주어질 수 있으며, 그런 후에야 그는 그 자신의 통역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은사는 더 자주 타인에게 주어진다.” 어빙은 통역 은사(the gift of interpretation)번역(translation)과 전혀 같지 않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왜냐하면 통역 은사는 외국어들의 생소한 단어들 또는 체계에 대한 지식으로 구성되지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어진 방언 메시지에 대한 영적으로 분별된 해석이다. 공적 교화는 그 두 은사들이 나타났을 때, 통역 은사가 따르는 방언이 나타났을 때 일어난다.

 

방언들이 하나님의 이런 내주하심의 표적이라면, 예언하는 것은 그것의 확증이다. 그리고 그 둘은 함께 성령의 온전하고 완전한 나타남(demonstration)을 가져온다.

 

 

방언과 성령침례

Tongues and Spirit Baptism

 

    어빙의 풍부한 교리적이고 실천적인 설교들에서 끌어오자면, 성령의 은사들과 그 기능에 관해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방언은 다른 모든 영적 나타남들의 뿌리와 줄기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어빙은 그 은사에 대한 어빙의 공들임들은 특히 통찰력이 있다. 이 성령침례의 신비로운 현저한 표적”(standing sign)은 어빙의 관심과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방언 은사는 이 모든 것들 중에서 최고의 행위이다. 옛 선지자들 중에서 아무도 그것을 갖지 못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것을 가지지 못하셨다.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의 시대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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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사람이 천국에서 왕좌에 앉혀진다는 것을, 사람이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전이라는 것을, 만약 그들이 하나님을 알려 한다면, 사람의 방언에 귀를 기울여 이성의 한계를 알아야만 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말하는 이는 우리가 아니요, 바로 그리스도시다.

 

    방언은 그리스도께서 그런 값비싼 희생을 통해 획득하신 그 직무, 성령으로 침례를 주시는 분이라는 직무를 교회가 상속받았다는 것의 현저한 표적이다. 어빙에게, 방언은 오직 만인에게 행사되는 그리스도의 최상의 주권에 의해서만 제한되는 초자연적인 능력부여의 정도(the measure of supernatural empowerment)를 예고하는 교회의 성령침례의 최초의 표적(the introductory)이었다.

 

이것[성령침례]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주라고 선포하는 것의 한 표적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께서 행하시고자 하시는 귀신들을 쫓아내고, 죽은 자들을 살리고, 그리고 피조물들을 자유케 하는 것을 선포하는 것의 한 표적이다. 이것은 교회인 우리가 그분과의 진정으로 방해받지 않는 연합 안에서, 그분 아래서 참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의, 우리가 그분의 힘센 팔, 그분이 현존하는 성전, 그분의 영의 혀, 그분의 지혜의 집합체, 하나님을 위한 그리스도의 왕들이며 제사장들이라는 것의 한 표적이다.

 

    한 맴도는 질문이 던져져야 한다. 성령침례라는 이렇게 놀라운 주제의 회복에 자신을 거리낌 없이 던진 이 사람 자신이 이 경험을 소유했는가? 분명 어빙 자신의 저작들에서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확실한 대답을 나타내는 그 어떤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결론은 어빙이 성령침례를 받았으며, 방언을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말년을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이 최고의 표현의 이해와 이행에 생각과 에너지를 집중시켰다. 어빙의 저작들은 성령침례가 모든 신자의 침례적 유산의 한 차원이라는 것을 그리고 오직 활성화될 끈덕진 믿음 반응을 기다린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힌다. 다른 사람들을 능력의 이런 차원 안으로 보다 깊게 들어가도록 이끄는데 자신을 지치지 않고 헌신한 어빙이 자신을 버림받은 자로 놓아두었겠는가? 또한 방언이 모든 신자들의 개인적 교화를 위해 주어진 성령의 어린아이 같은 언어라는 어빙의 통찰은 오직 함께 경험해본 사람만이 표현할 수 있는 권위로 전해진다.

 

 

보편적 사도 교회

Catholic Apostolic Church

 

    보편적 사도 교회는 어빙의 나이 사십 이세에 죽음에 직면했을 때 시작되었다. 이 갓 시작된 운동의 체계와 의전은 대부분 그의 추종자들이 그들의 지도자를 갑작스럽게 잃었을 때 형성되었다. 어빙의 영향 아래서는 본래 없었던 것들이 그 교회가 발전하면서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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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적 예배, 예복들, 촛대들, 향들을 포함하는 고교회적”(high church) 형식들이 받아들여졌다. 물론, 성령의 나타남들을 위한 기회는 각 예배 동안 주어졌다. 보편적 사도 교회는 그것의 열 두 사도들의 지도력 아래서 세계적인 운동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1901년에 그 열두 사도들 중에서 마지막 사도가 세상을 떠나자 제한된 사도성 때문에 더 이상 목사들이 안수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존재하던 목사들이 세상을 다 떠나자 이 운동의 회중들은 하나씩 흩어졌다. 보편적 사도 교회는 사실상 사라졌다.

 

 

새 사도적 교회

New Apostolic Church

 

    1860년대에, 보편적 사도 교회는 대륙에서 희망적인 성장을 경험하고 있었을 때, 한 독일 교구는 원 열 두 사도를 넘어 사도들의 수를 늘리는 권리를 거부당한 후 모교회로부터 독립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새 사도 교회(the New Apostolic Church)라 명명된 분리된 단체를 조직했다. 이 새로운 교회는 자신의 사도들을 임명하고 모교회의 고교회요소들의 일부를 제거했다. 이 조정들은 새 사도 교회가 계급과 문화의 보다 폭넓은 범위 가운데서 성공적으로 확장할 수 있게 했다. 스위스 취리히에 본부를 둔 새 사도 교회는 현저한 세계적인 성장을 경험해왔으며, 오늘날에는 거의 육백만의 신자들에 육박하고 있다.

 

 

결론적인 평가

Concluding Assessment

 

    20세기 오순절 운동은 그것의 고전적인기원을 찰스 파함에서 찾는다. 이 운동의 독특성에 대한 주장은 방언을 성령침례의 최초 증거를 강조하는 것에 집중되어 왔다. 그렇지만 19세기 초반에 에드워드 어빙에 의해 분명하게 말해진 현저하게 고전적인성령침례론에 의해 뒷받침된 한 오순절 운동이 출현했었다. 그 영국적 운동은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는 그 자신의 전통을 갖고 있다. 20세기 오순절 운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 전통은 그 현대적 표현보다 칠십 오년 더 앞선다. 현대 오순절 운동의 독특성에 대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하나는 영국에서 다른 하나는 미국에서 일어난 오순절적 나타남들이 있었던 역사적으로 분리된 그 두 부흥들은 오늘날까지 나란히 공존해온 그 두 분리된 오순절적 전통들을 위한 산란장이었다. 그 두 전통들은 그것의 뿌리를 기독교적 중생에 후속하는 경험으로서 성령침례라는 주제의 교리적 회복에 둔다. 그리고 그 둘은 방언을 이 경험의 최초 표적(initiatory)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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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포스트 종교개혁 시대(the post-Reformation period) 안에서 이 분리된 그러나 유사한 전통들의 존재는 그 어떤 하나의 집단이나 운동도 오순절적 메시지의 독점적인 또는 고전적인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할 것이라는 결론에로 이끈다. 아마도 이 연구는 모든 곳의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침례는 교회의 공동 유산이며 자기 안에 있는 그 은사를 북돋우는 모든 신자들에게 가능한 것임을 인식하는 것을 촉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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