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는 말
에이미 샘플 맥퍼슨(Aimee Semple McPherson)은 17세에 로버트 샘플(Robert J. Semple)을 통해 오순절에 대해 알게 된 후, 중생 경험과 더불어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았다. 그 후 그녀는 대형교회와 독자적인 교단을 설립하는 등 오순절운동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데도 그동안 그녀의 방언론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 본고는 되도록이면 맥퍼슨의 방언론의 전체 모습을 구성해 봄으로써, 이런 공백을 조금이나마 메우는 시도를 할 것이다.
II장은 성령침례와 방언과의 밀접한 관계성을 표현하는 “증거”와 “표징”을 살펴본다. III장은 성경시대의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와 현대의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의 연속성을 주장하고 강화하기 위해 그녀가 채택한 틀들을 살펴본다. IV장은 그녀가 분류한 방언의 종류와 기능을 알아본다. V장은 방언을 기독론이나 구원론 등의 관점에서 신학적으로 해석한 것들을 살펴볼 것이다.
맥퍼슨의 방언론은 전체적으로 그녀 이전의 파함과 시무어와 더함의 방언론들과 유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맥퍼슨의 방언론에는 오순절의 전통을 수용하면서도, 그녀만의 관점을 드러내는, 증거 방언에서 선교적 목적 제거, 성경시대의 방언과 현대의 방언을 연결하기 위한 “원형”(pattern)과 그 반복/복사라는 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 지성소 출입을 알리는 방울소리로서 방언, 심판으로서 바벨 방언과 복과 구원으로서 오순절 방언의 대비 등 독특한 것들이 존재했다.
1923년에 맥퍼슨이 로스앤젤레스에 세운 앙겔루스템플의 외부(상)와 내부(하)
II. 성경시대의 성령침례의 증거와 표징으로서 방언
A. 성령침례의 증거(Evidence)로서 방언
맥퍼슨의 방언언급에는 “증거”나 “표징”이라는 용어가 많이 등장한다. 맥퍼슨은 성령침례는 봉사를 위한 능력을 주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녀에게 성령침례와 방언과의 연결성에 있어서 “증거”나 “표징”이라는 개념은 성경시대 동안 방언이 어떤 사람이 성령침례를 받았는가를 판별하는 기준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맥퍼슨의 방언론의 주요 부분은 방언을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증거라고 주장한 것이다. 성령침례와 방언과의 밀접한 관계를 “증거”(evidence)라는 용어로 표현한 것이다. “증거”는 어떤 이론이나 현상이 올바르거나 실제적인 것임을 주장하기 위해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녀는 성령침례의 증거는 무엇인가라고 물으며, 그 증거의 후보들을 열거했다. “화평인가? 기쁨인가? 절정의 복인가? 정복하는 힘인가? 기도의 힘인가? 설교의 능력인가? 예수 이름으로 병자들을 고치는 능력인가? 환상을 보는 것인가? 급한 바람소리를 듣는 것이거나 불의 혀를 보는 것인가? 성령의 은사들 중의 하나를 받는 것인가?” 그리고는 그녀는 그것들은 그 증거가 아니고, 방언을 말함이 그 증거라고 대답했다.
맥퍼슨에게 방언은 성령침례의 증거인데, “성경적 증거”(the Bible evidence)다. 그녀는 현대에 일어나는 성령침례의 증거라고 제시되는 것들의 진위를 판별하는 기준을 “성경적 증거”, 즉 성경이 말하고 있는 증거에 두었다. 성령침례와 방언을 함께 묶기 위한 고리를 인간이 자의적으로 만든 것들 중에서 삼지 않고, 성경이 제시하는 것에서 택한 것이다. 그녀는 성경이 제시하는 것을 판단을 위한 최고의 권위로 삼은 것이다. 그녀는 “성령침례를 받는 순간을 알 수 있는 ‘성경적 증거’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녀는 “성경시대에서는 성령침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방언을 말했습니까?”라고 묻고는 “예,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녀에게 다른 방언을 말하는 것은 성경적 증거이되 “동일한 성경적 증거”(the same Bible evidence)다. “동일한”이란 개념은 과거의 “성경 안에서도 일치된”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현대의 참된 성령침례가 발생하는 순간마다 일치된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과거와 현대 연속적으로 이어주며 일치된 것을 의미하기도 하다.
맥퍼슨은 성령침례와 방언 사이의 밀접하고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성을 “동반되는”이라는 말로 강화했다. 그녀는 자기가 성령침례를 받은 후 12년 동안 수천 명의 사람들이 성령침례를 받을 때 방언을 말해왔다고 증언하였다. 그런데 그녀는 성령침례가 일어날 때 동시에 방언을 말하는 것을 “동반되는”(accompanied)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그녀는 성령침례를 받을 때 동시에 방언을 말하는 것은 어쩌다가 우연히 한두 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예외 없이 발생하는 것을 목격했으며, 그런 현상을 “동반되는”이라는 용어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맥퍼슨은 성령침례와 방언사이의 시간적 관계성을 더했다. 그녀는 성령침례와 방언 사이를 “동반되는”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물리적으로 떼어놓을 수 없게 연결시키는데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더 나아가 그 둘 사이의 밀접한 관계성에 시간성을 더했다. 그 시간적 관계성은 “즉각적”(immediate)이라는 용어를 통해 표현되었다. 그녀는 “방언은 성령침례의 “즉각적인 동반물”(an immediate accompaniment of the baptism)이라고 말했다. “즉각적”이란 용어는 성령침례와 방언 사이에 시간적 틈이 없음을, 둘 사이의 동시성을 의미한다.
성령침례와 방언의 동시성은 또한 “첫 번째”(the first)라는 용어로도 표현되었다. 맥퍼슨은 방언은 오순절 이전에는 발생하지 않았던 은사였다고 보았다. 그녀는 오순절 이전에, 그러니까 구약시대로부터 예수님의 지상 사역 시기에는 방언이 발생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 시기에 솔로몬을 통해 나타났던 지혜의 은사, 아브라함을 통해 나타났던 믿음의 은사, 엘리야를 통해 나타났던 이적의 은사, 치유의 은사, 영 분별의 은사, 예언의 은사 등 다른 모든 은사들이 나타났으나, 은사 방언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순절 이전에 다른 일곱 가지 은사들은 나타났지만, “방언 은사”와 “방언 통역 은사”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에 따르면, 오순절 날 성령침례가 베풀어졌을 때 “첫 번째로” 발생한 것은, “그 첫 증거”(the first evidence)는 “전혀 배운 적이 없는 언어들인 다른 방언들로 말하는 것”이었다. 맥퍼슨은 방언을 “첫 증거”로 뿐만 아니라 “최초의 증거”(the accepted initial Biblical evidence)로도 삼았다. 그런데 맥퍼슨이 1919년에 성령침례와 방언을 “첫 번째” 또는 “최초의”란 용어로 묶은 것은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었을 것이다. 맥퍼슨보다 3년 먼저 방언을 “최초의”(initial)와 결합한 것은 미국 하나님의 성회였다. 미국 하나님의 성회는 1916년에 “근본 진리 선언”(a Statement of Fundamental Truths)을 작성했는데, 그 선언 6 항은 방언을 성령침례의 “최초의 표징”(the initial sign)으로 규정했다. 그녀에게 방언은 오순절 날을 기준으로 마지막 은사이기도 하며, 동시에 첫 은사이기도 했다.
맥퍼슨은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증거이되 “초자연적인 증거”(supernatural evidence)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방언이라는 성령침례의 증거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인간이 지정하는, 즉 인간에게 내재된 것이 발현되는 자연적인(natural) 증거가 아니었다. 그 증거는 인간 밖에서 위로부터 주어지는 초자연적인(supernatural) 증거였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성령침례를 무시하고 있지만, 언제나 소수의 신실한 성령 충만한 성도들이라는 그루터기가 있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하나의 실제적이고 초자연적인 방법(in a real and supernatural way)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말했다. 그 하나의 허상적이지 않은, 실제적이고 자연적이지 않은 초자연적인 방법은 방언을 말하는 것이었다.
방언은, 맥퍼슨에게, 성령침례를 받은 것이 의심될 때, 그것을 “확신시키는 증거”(convincing evidence)였다. 그녀는 고넬료 가정의 성령침례를 언급하면서, 이방인들이 그 침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도 못했던 유대인들이 그 가정의 이방인들이 그 침례를 받았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게 확신시킨 증거가 바로 방언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결혼식 비유를 들어 그것을 설명했다. 그녀는 결혼식의 합법성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의심될 때, 그 합법성을 증명할 수 있는 “확신시키는 증거”(convincing proof)는 그 결혼식을 집례한 목사와 합법적 기관이 발행한 “결혼 증명서”(the marriage certificate)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처럼 성령침례를 받은 것이 의심 될 때, 방언은 그것을 “확신시키는 증거”(convincing evidence)라고 말했다. 맥퍼슨에게 방언은 “성령침례 증명서”(the Spirit Baptism certificate)였던 것이다.
B. 성령침례의 표징(Sign)으로서 방언
맥퍼슨은 성령침례와 방언과의 관계를 “증거”라는 용어로만 표현하지 않고, “표징”(sign)이라는 용어로도 표현했다. 그녀는 베드로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이 자기들과 같이 성령침례를 받았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었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결정적인 또는 확실한 표징”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그 “결정적인 표징”(a conclusive sign)은 방언이었다. 또한 그녀에게 방언은 성령침례를 통한 성령의 내적 사역(the incoming of the Spirit)의 외적 표징이었다. 그녀는 방언을 성령의 강림에 동반되는 “내적 사역의 외적 표징”(an outward sign of the inward work)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그녀는 방언의 외적 표징 측면을 미장원의 간판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그녀의 예에 의하면, 사람들이 미장원을 찾아 거리를 걸을 때, 무엇보다 빨간 색과 흰색의 간판 기둥, 즉 표징(the sign)을 찾는다. 그런데, 그 미장원 간판 기둥은 손님의 머리를 깎아 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표징은 그곳에 머리를 깎아 줄 수 있는 미용사가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indicate). “그런 것처럼, 방언을 말함이라는 그 성경적 표징(the Bible signs)도 그렇다. 그 표징은 보혜사 성령께서 강림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III. 성경 시대의 방언동반 성령침례와 현 시대의 방언동반 성령침례의 연속성, 동일성 확보를 위한 틀들
맥퍼슨은 현대에도 새로운 방식이 아닌 옛 방식 그대로 방언이 동반되는 성령침례가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주님께서 20세기에는 20세기에 걸맞는 새로운 방식으로 신자들에게 성령침례를 주시는가, 아니면 여전히 그 옛 시대(성경시대)에 하셨던 것처럼 성령침례에 방언이라는 그 동일한 성경적 증거를 동반시키고 계시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녀는 “주님께서는 바꾸지 않으셨다.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의 보혈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처럼, 성령침례를 받기 위해서는 오순절 날 사도들이 받았던 성령침례를 받으며 방언을 동반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단언했다. 맥퍼슨은 그런 옛 방식으로, 즉 방언이 동반되는 방식으로 성령침례를 받은 사례를 제시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자신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옛 방식에 따라 방언이 동반되는 성령침례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그녀는 이처럼 오순절로부터 성경시대에 “증거”나 “표징”으로 사용되었던 방언이 2000여년이 지난 현대에도 동일하게 연속적으로 여전히 그런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여러 틀들을 채택했다. 즉, 맥퍼슨은 성경시대의 성령침례에 동반되었던 방언과 현대의 성령침례에 동반되고 있는 방언사이의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체계들을 사용했다. 그녀가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한 틀들은 대략 다섯 가지, “이른 비와 늦은 비,” “이것은 저것,” “원형과 반복”(또는 원본과 사본) “성령의 시대,” 그리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틀들 가운데서 다른 오순절지도자들의 틀에 비해 독특한 것은 “원형과 반복,” “성령의 시대,” 그리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A. 이른 비와 늦은 비 (The Former rain and the Latter Rain)
매퍼슨은 과거 오순절 날 성령침례에 방언이 동반된 것과 현대 성령침례에 방언이 동반되는 것을 연결하기 위해 “이른 비와 늦은 비”라는 틀을 사용하였다. 그녀는 요엘서 2장 28절에 기록된 “이른 비와 늦은 비”(the former and latter rain) 언급을 오순절적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그녀는 요엘이 예언 했던 “이른 비”는 오순절 날에 내리기 시작했다고 판단했다. 이 오순절 날에 내리기 시작한 이른 비는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을 동반한 성령침례를 지칭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른 비”로부터 2000여년이 지난 20세기 초반의 시대를 “늦은 비”의 시대라고 규정했다. 맥퍼슨이 “늦은 비”가 내리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었던 요인은 바로 이른 비 시대에 말씀 선포에 따랐던 그와 아주 동일한 표징들이, 특히 사람들이 다른 방언을 말하는 것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 세계적인 부흥이 늦은 비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라고 묻고는 “이 부흥은 이른 비 시대에도 그랬던 것과 동일한 특징들(the same earmarks)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그랬던 것처럼(행 2:4; 10:46; 19:6) 성령침례를 받으며 방언을 말하고 있다”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맥퍼슨은 첫 오순절에 내리기 시작한 이른 비 시대와 20세기에 내리기 시작한 늦은 비 시대 사이의 시대를 비가 드문 시기로 규정했다. 그녀는 이 시기를 겨울이나 암흑시대로 규정했다. 맥퍼슨은 성령의 은사와 열매를 나무와 그 나무에 열린 열매로도 비유했다. 그리고 그녀는 송충이의 일종인 팟종이(the palmerworm)가 그 나무와 열매를 점차 갉아먹기 시작해 결국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되었었다고 보았다. 그녀는 그 팟종이의 정체를 약해진 믿음과 인간적 계획이라고 규정했다. 신자의 믿음이 약해지자 하나님의 거룩한 뜻 대신 인간의 계획이 난무하게 되었고, 그 결과 성령의 열매와 은사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언이나 방언, 통역과 같은 은사들은 비록 교회 가운데서 지속적으로 발생하긴 했지만, 아주 드물었었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그런 상태는 계절적 비유로는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겨울이었고, 빛과 어두움의 비유로는 암흑시대였다. 그런데 겨울이 끝났고, 봄비인 위로부터 내리는 “옛 시대의 성령의 능력”이 늦은 비가 되어 쏟아져 내리고 있다.
성경시대의 방언에 동반되는 성령침례와 현대의 방언에 동반되는 성령침례를 연결하려는 “이른 비와 늦은 비”(The Early and Latter Rain)라는 틀은 맥퍼슨 이전에 이미 파함에 의해 사용되었었다. 파함에 따르면, 이른 비는 새로 뿌려진 씨앗에 내려 그것을 싹트게 하고, 자라나게 했다. 그리고 늦은 비는 곡물이 설익어 추수하기 위해서 더 익어야하는 때에 밭에 내렸다. 파함은 이 구약 성경의 “이른 비와 늦은 비”는 현대의 모든 오순절적 사역에 해당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시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설익은 상태에 있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토페카에서 그분의 신실한 자들에게 참된 오순절(the real Pentecost)로 침례를 베풀어주셨다. 참된 오순절은 성령침례를 받으며 지껄이거나 재잘거리는 것이 아닌 진짜 언어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파함은 이 토페카의 현대 오순절을 “늦은 비”로 규정했다. 그는 늦은 비의 목적을 이중적으로 파악했다. 하나는 증인으로서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 세계에 전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동시에 일어날 “영광스런 추수”를 위해 열매들의 속을 꽉 채우는 것이었다. 파함이 추구한 “늦은 비” 역사는 “선교를 위한 능력부여”와 “그리스도의 신부들의 성화”라는 이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른 비와 늦은 비” 틀은 시무어의 아주사 부흥에서도 사용되었다. 시무어가 펴낸『사도신앙』2호는 머리기사에 “회복된 오순절 침례”(The Pentecostal Baptism Restored)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리고 “약속된 늦은 비가 지금 하나님의 겸손한 사람들 위에 쏟아지고 있다”(The Promised Latter Rain Now Being Poured Out on God’s Humble People)라는 부제목을 붙이고 파함에 의해 토페카에서 발생한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의 역사가 로스앤젤레스로까지 이어진 역사를 서술했다. 4호는 하나님께서 로스앤젤레스를 포함한 세계 도처에서 그 따르는 표징들과 함께 성령을 부어주시고 계시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내리는 “늦은 비”라고 규정했다. 6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언급하는 야고보서 5장 7절을 인용하고, 오순절날 성령의 부으심 역사를 “이른 비”로 규정했다. 그리고 당시 성령의 부으심 역사를 또 다른 오순절, 즉 “늦은 비”로 규정했다. 그 글에 따르면, 이른 비는 작물들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것이며, 늦은 비는 작물이 추수해도 될 만큼 성숙하는데(bring it into perfection) 필요한 것이다. 그런 것처럼 당시에 성령침례에 방언이 동반되며 내리는 늦은 비는 주님의 재림과 더불어 있을 추수를 준비시키는 것이었다. 이렇게 시무어의 공동체에서도 “이른 비와 늦은 비”라는 틀이 오순절날의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와 현대의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긴밀하게 연결하는데 사용되었으며, 그 틀은 파함의 경우처럼 “능력부여”와 “성화”라는 이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B. 이것은 저것 (This is That)
맥퍼슨은 현대의 방언과 성경시대의 방언을 연결하기 위해 “이것은 저것이다”(This is that)이라는 틀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녀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서 “이것은 저것이다”(This is that)라는 틀을 취했다. 그녀는 “이것은 저것”이라는 틀이 “교회의 생일, 그 기념할 만한 날, 오순절 날에 발해진 것”이라고 소개했다. 그녀는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그 오순절 날 120문도가 성령침례를 받고 방언을 말하는 것을 듣고 “이 어찌된 일이냐?”(What means this?)라고 물은 것에 대한 대답으로 베드로가 “이것은 선지자 요엘이 말한 바”(this is that which was spoken by the prophet Joel)라고 말한 것을 인용했다. 즉, 그녀는 구약시대의 요엘의 예언과 신약시대의 오순절 날의 성령침례에 동반된 방언이라는 성취를 “이것은 저것이다”(This is that)라는 틀을 통해 연결시켰다. 그녀는 또한 고넬료와 그의 집에 속한 사람들도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을 경험했는데, 이 또한 “이것은 저것” 경험이었다고 보았다.
맥퍼슨은 구약의 요엘의 예언과 신약의 오순절 날의 성취를 연결시켰던 “이것은 저것이다”라는 틀을 구약과 신약 전체에 확대하여 적용하였다. 그녀는 성경 시대의 사람들은 “이것은 저것이다” 경험(This is that experience)을 가졌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구약 안에서의 예언과 성취들을 “이것은 저것”의 틀에서 해석했다. 아브라함이 노년에 아들을 본 이것(this)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미 예언하셨던 저것(that)을 성취한 것을 그 첫 사례로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브라함이 그렇게 “이것은 저것” 경험(This is that experience)을 가졌었다고 보았다. 맥퍼슨은 모세와 여호수아의 사례를 언급한 다음, 신약시대로 넘어와 예수께서도 전생애를 통해 “이것은 저것” 경험(this is that experience)을 하셨다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구약에서 행해진 예언들을 성취한 것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맥퍼슨은 “이것은 저것”을 현대시대의 현상과 성경시대의 현상을 긴밀하게 연결하는 틀로 삼았다. 그녀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 현상은 성경시대의 성령침례에 동반되었던 방언 현상과 동일한 것이라는 것을 “이것은 저것”(This is that)이라는 틀을 통해 주장했다. 그녀는 자신이 성령침례를 받으며 방언을 말하는 경험을 했는데, 그 경험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며, “이것은 저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이것은 저것”이라는 틀을 통해 해석된 경험을 “동일한 경험”(a similar experience)라고도 말했다. “이것은 저것”이라는 틀은 과거와 현재의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경험들을 동일한 경험으로 해석하게 하며, 현재에서 발생하는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경험들을 동일한 경험으로 해석하게 한다. 그리고 맥퍼슨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저것”이니 안심하고 “이것은 저것 경험”을 받으라고 권고했다. 그녀는 성령께서 자신에게 임하셨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임하셨다고 증언하고, “이것은 저것입니다. 성경적 경험을 받으십시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성경적 경험들을 부어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라고 권면했다. “저는 이 집회가 끝나기 전에 여기 모인 모은 사람들이 실제적인 ‘이것은 저것’ 경험(a real ‘This is that’ experience)을 갖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저것”이라는 틀은 맥퍼슨이 맨 처음으로 채택한 것은 아니었다. 파함(Charles F. Parham)은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현상을 설명하면서 단순하게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라는 베드로의 설교를 인용했다. “이것은 저것”은 시무어(William J. Seymour)의 아주사 선교회에서 증폭되었다.『사도신앙』(The Apostolic Faith)은 사람들이 성령침례와 동반되는 방언을 구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마귀의 능력을 받게 될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 글에 따르면,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것은 저것”(this is that)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해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고 계시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분의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시고 계시는 마지막 날들에 살고 있다.
시무어는 설교를 통해 사도들은 주님의 명령을 순종했고 오순절 날에 성령으로 충만해졌고, 베드로가 “이것은 저것,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그는 아주사 선교회가 “그와 동일한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아주사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이것은 저것”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성경시대로 그친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날들에 계속될 것이다. 이것은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새예루살렘이 강림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오하이오, 콜롬비아에 사는 주디 자매(Sister M. E. Judy)는 그 지역의 한 교회에서 열린 집회에서 그 목사가 “이것은 저것입니다”(This is that)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고 『사도신앙』을 통해 전했다. 그리고 륩턴 목사(Rev. Levi R. Lupton)는『사도신앙』에 “이것은 저것입니다”(This is That)이라는 제목의 글을 개제하기도 했다.
맥퍼슨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더함(William H. Durham)은 “성령침례의 증거는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오순절 날에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에 사람들이 놀라서 “이것은 무엇이냐?”(What means this?)라고 물었을 때, 베드로가 대답한 것을 언급했다. 그는 베드로가 사람들의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하나님의 표준(the standard of God)을 발표했다고 보았다. 그 표준은 “이것은 저것”(This is that)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다. 더함에 따르면,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저것”(that)이 의미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자신이 경험한 “이것”(this)이 다름 아닌 “저것”(that)이고, “이것”이 “저것”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강변했다. 더함은 예수께서 “거듭나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베드로가 “이것은 저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오순절 날의 오순절적 경험(Pentecostal experience), 즉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 경험의 표준은 “This is that”이 되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표준”으로 작동한다고 역설했다.
그렇다면 맥퍼슨은 오순절적 전통 안에서 “이것은 저것이다”를 보다 더 체계화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파함이 언급하기 시작했고, 시무어와 그의 선교회가 보다 증폭시켰고, 더함이 보다 명료화시킨 “이것은 저것”이라는 틀을 구약과 신약에 보다 폭넓게 적용시켜 약속과 성취와 일치시키고 체계화 시켰다.
C. 원형과 반복 (The Pattern and the Repetition)
맥퍼슨은 현대에 성령침례에 방언이 동반되고 있는 것과 성경시대에 성령침례에 방언이 동반되었던 것을 연결하는 틀들 중 또 하나를 “원형”(the pattern)과 그것의 “반복”(repetition)으로 삼았다. 그녀는 구약과 신약의 성막에 대한 언급들에서 그 틀의 근거를 찾았다. 맥퍼슨은 “그 산에서 우리에게 보이신 ‘원형’(the pattern)에 따라 모든 것을 수행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녀의 그런 “원형”에 대한 언급은 구약에서는 출애굽기 25장 9절과 민수기 8장 4절에 그 근거를 두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지을 것을 명령하시면서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타브니트, tyn!b=T^, after the pattern of)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고 명령하셨다고 전한다. 그리고 민수기는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보이신 ‘양식을 따라’(unto the pattern)” 성막을 만들었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맥퍼슨은 히브리서의 성막에 대한 언급에서도 “원형”과 “반복”이라는 틀의 근거를 찾았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kataV toVn tuvpon, according to the pattern) 지으라 하셨느니라”라고 말한다 (히 8:5). 맥퍼슨은 먼저 “모양/양식/원형”(tyn!b, tuvpon, the pattern)이 하나님에 의해 제시되었고, 그 후 모세가 그 원형 “대로/따라”(T, kataV, after, according to) 제작/반복(repetition)했다는 것에 주목한 것이다.
맥퍼슨은 성경에 등장하는 성막의 설계도와 성막의 건축 사이의 관계를 현대의 건축을 통해 설명하고, 현대 신앙인은 건축가처럼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원형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청중에게 건축가는 집을 지을 때, 설계도(blueprints)를 따라 짓는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그녀에 따르면 건축가는 설계자의 설계도를 “원본”(the pattern)으로 삼고, 임의대로 그 원본에서 빼거나 더하기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건축가가 자신의 판단을 의지해 “원본”에 없는 것을 더하거나 뺀다면, 계약파기를 당할 것이며, 위반에 대한 값비싼 대가를 치룰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성경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설계도, 원형으로 비유했다. 그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이미 과거에 “그 영광스런 원본/원형”을 인간에게 부여하셨기 때문에, 현대인은 모든 것을 “그 원형에 따라 수행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맥퍼슨은 건축에서 “원형”과 “반복”이라는 틀을 찾아내었고, 그것을 모든 신앙생활에 적용하려 한 것에서 나아가 성령침례와 동반되는 방언문제에도 적용했다. 먼저 그녀는 사도행전을 비롯한 성경에서 성령침례의 “원형”(the pattern)을 찾아내었다. 맥퍼슨은 첫 성령침례를 받은 신자들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인 것을 변함없으신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원형”(the pattern)이라고 보았다. 그녀는 신약 성경의 모든 기자들은 성령이 임하실 때 방언을 말했다는 것을 주목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은 오순절 날에 그곳에 있었고, 사도행전 2장 4절은 분명하게 그들이 모두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말했다고 보고한다. 바울은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그리고 서신서들을 썼는데, “저는 여러분 모든 사람들보다 방언을 더 말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오순절 날에 그곳에 있었고 성령이 임하실 때 방언으로 말했다. 맥퍼슨은 “이것이 옛 시대의 종교, 옛 시대의 성령, 우리가 오늘날 주장하는 옛 시대에 제시된 원형(the old-time pattern)”이라고 말했다.
맥퍼슨은 “성령침례에는 방언이 동반된다”는 성경에 제시된 성령침례의 원형을 현대와 미래의 모든 신앙인들도 재현, 반복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녀에 따르면, 당시 많은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옛 구식 원형”을 전적으로 따를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것 같았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 원형에 따르는 것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성령침례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맥퍼슨은 이것을 비판했다. 그녀는 그들이 옛 원형을 거부한다 해도, 이것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원형에 따라 모든 것을 행할 의무로부터 현대 신앙인들을 제외시키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맥퍼슨은 성령께서 임하실 때, 그분은 옛 시대에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의심할 여지없이 성령침례를 받는 사람들을 통해 다른 방언을 말하실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방법과 원형에서 결점을 찾으려는 것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성경적 방식(Bible formula)에 따라 성령을 받은 사람들과 싸우거나 그 사람들을 비판하기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방언을 말함이라는 성경적 증거를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감히 하나님이 되려하며, 가위를 들고 성경 안에 있는 모든 그런 성구들을 잘라내 버리려 한다고 비판했다. 그녀는 휴거 이전에 성령으로 침례를 받을 마지막 날의 신자들은 이 원형(this pattern)에 따라 침례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맥퍼슨은 성령침례의 원형을 당시뿐만 아니라 미래의 모든 세대에로 확장시켰다. 그녀에 따르면, 성령을 받았던 그 첫 무리가 성령께서 그들에게 말하라고 주셨던 것에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했던 것처럼, 예수께서 나타나시기 전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마지막 날들의 사람들도 사도행전 2장 4절, 10장 46절, 19장 6절에 따라 그 동일한 성경적 증거를 가질 것이다.
이렇게 맥퍼슨은 성경에서 발견한 “원형”과 “반복”이라는 틀을 통해 과거의 첫 오순절의 방언 동반 성령침례와 현대의 오순절적 방언 동반 성령침례를 연결시켰다. 그럼으로써 현대의 방언 동반 성령침례의 정당성을 확보하려했다. 이는 옛 것과 새 것의 연관성, 연속성, 계속성, 동일성, 옛 것의 반복으로서 새 것, 시간과 지역적 간격을 초월한 양자의 동일성, 현 경험의 진실성, 정당성, 당위성의 기준, 근거를 마련한 것이었다. 맥퍼슨은 사람들에게 그 원형을 보고 미래의 경험을 예측하고, 기대하도록 그들을 권면하고, 지도하고, 촉구하고, 견인했다.
맥퍼슨이 1910년대에 사용하기 시작한 “원형”(pattern)이라는 개념은 현대 오순절 해석학에서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맥퍼슨의 “원형”은 30여년 후 칼 브럼백(Carl Brumback)에 의해 재사용되었다. 브럼백은 성경의 오순절 경험이 현대 오순절적 경험의 원형이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성경에 기록된 성령침례에 수반된 방언은 현대의 모든 신자들에게도 표준이며, 방언은 능력부여의 “성경적 원형”(the Scriptural pattern)이었다. 맥퍼슨이 사용했던 “원형”은 브럼백을 지나 고든 피(Gordon D. Fee)에 의해서도 거론되었다. 고든 피는 복음서들이나 사도행전에서는 “반복될 수 있는 원형”(repeatable pattern)을 발견할 수는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적 이야기들에서는 모든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 “규범적인” 역사적 선례(normative historical precedent)를 끌어낼 수는 없고, 다만 “정상적”(normal)인 것만 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피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방언은 원형이라는 것을 인정했지만, 모든 세대에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정상적인 것으로만 한정하고, 모든 세대에서 항상 반드시 규범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맥퍼슨이 살아있다면, 그녀는 고든 피를 신랄하게 비판할 것이다.
D. 성령의 시대 (The Age of the Spirit)
과거의 방언을 동반하는 오순절적 성령침례와 현대의 방언을 동반하는 오순절적 성령침례를 연결시키기 위해 맥퍼슨이 사용한 틀들 중에는 “성령의 시대”(The Dispensation of the Holy Ghost)도 있었다. 맥퍼슨은 세계의 시간을 3 시대, 또는 세대로 나누었다. 그녀에 따르면, 첫 시대는 성부의 시대다. 그 시대에 성부께서는 구속하시는 은사를 약속하셨다. 둘째 시대는 성자의 시대다. 이 세대의 말미에 성자는 성부께서 약속하셨던 성령의 은사를 주셨다. 세 번째 시대는 “성령의 시대”(The Dispensation of the Holy Ghost)다. “성령의 시대”의 커튼이 공식적으로 열린 날은 오순절 날이었다. 급하고 강한 바람과 불의 혀와 함께 성령께서 오순절 날에 강림하셔서 일백 이십 문도들에게 주님께서 그들에게 수행하라고 주신 사역을 위한 초자연적인 능력과 영광을 부여하셨다.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행 2:1-4). 전혀 배우지 않은 다른 방언(언어들) 말하기라는 그와 동일한 성경적 증거(the same Bible evidence)가 가이사랴에서도 성령강림에 동반되었다.
오순절 날을 “성령의 시대”의 시작점으로 삼은 맥퍼슨은 예수님의 재림을 성령의 시대의 끝점으로 삼았다. 그녀는 성령의 시대는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맥퍼슨은 오순절 날로부터 예수님의 재림까지의 기간을 “성령의 시대”라고 명명했으며, 종말론적으로는 “마지막 날들”(the last days)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따라서 맥퍼슨은 당시에도 여전히 성령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고 보았다. 그녀는 “이 시대는 그 이래로 계속되었으며, 우리도 오늘날 여전히 성령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맥퍼슨은 “성령의 시대”의 계속성을 근거로 현대의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는 성경에 기록된 과거 오순절 날과 그 이후의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와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선지자 요엘을 통해 하신 “모든 육체에 내 영을 부어줄 것이다”라는 약속의 말씀을 이루시며 그분의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시고 계시다고 보았다. 그녀는 그 약속의 핵심은 방언이 동반되는 능력이라고 주장했다. 맥퍼슨에게 이것은 성령의 시대의 개막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맥퍼슨은 그 동일성의 근거를 “이 약속은 너희와 먼데 사람, 주께서 얼마든지 부르시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라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 두었다. 그녀는 “우리는 여전히 성령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래서 반드시 사도행전 2장 4절[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처럼 옛 성경적 방식으로 방언을 말하며 성령을 받아야만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성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옛 시대에 그러셨던 것처럼 방언을 말함이라는 동일한 성경적 증거(the same Bible evidence)를 주시고 계시다.
맥퍼슨이 방언을 동반하는 오순절 날의 성령침례와 방언을 동반하는 현대의 성령침례의 연속성을 주장하기 위한 틀로서 “성령의 시대”를 사용한 것은 그녀만의 독특한 점이었다. 파함도, 시무어도, 더함도 “성령의 시대”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E.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맥퍼슨이 성경의 오순절 방언과 현대의 오순절적 방언의 연속성을 주장하기 위해 택한 틀들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그녀는 먼저 예수님의 영원히 변함없으심을 말한다. 그 틀의 근거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의 지속되는 능력과 변함없으심”(the continued power and unchangeableness of Jesus, the same yesterday, today, and forever)이었다. 그녀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며, 영원히 존재하되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변함없으심은 존재론적 변함없으심과 함께 말과 그 말을 현실화시키는 능력이라는 경세적 변함없으심을 포함한다.
맥퍼슨에게 그 경세적 변함없으심은 “약속”(promise)과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간격을 초월하여 그 약속을 구체화 또는 현실화시키는 실행 “능력”(power)에 집중된다. 예수님의 존재적 변함없음은 예수님의 경세적 약속의 말의 변함없음을 담보한다. 예수님은 존재론적으로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연속성을 가진 분이실 뿐만 아니라, 경세적으로도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연속성을 가진 분이시기 때문에, 맥퍼슨은 “어제의 약속은 오늘의 약속입니다”(The promise of yesterday is the promise of today)라고 말할 수 있었다. 경세적으로 영원히 변함없으신 예수께서는 “거짓말을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실수를 범하지도 않으신다.” 과거에 약속을 말씀하시고 실행시키셨던 변함없는 예수께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동일한 약속을 말씀하시며 실행시키고 계시다. 맥퍼슨에게 예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너희 각 사람이 회개하고 침례를 받으면 죄를 용서받고, 성령의 은사를 받으리라”(행 2:38)고 말씀하시고 계실 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 . .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는 약속을 말하고 계시다(막 16:17-18).
맥퍼슨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론적 변함없으심과 경세적 변함없으심을 토대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에 대한 약속과 그 실행의 변함없음을 주장했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구원에 대해 하셨던 약속의 말씀을 오늘날에도 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 약속의 말씀을 실행하셔서 구원하고 계시다고 말했다. 또한 예수께서는 여전히 이적을 행하고 계시며, 병자들을 고치고 계시다. 그녀에 따르면, 그런 것처럼, 예수께서는 과거에 성령침례와 그 동반되는 성경적 증거에 대한 약속을 말씀을 오늘날에도 하고 계실뿐만 아니라 그 약속의 말씀을 실행하셔서 “다른 방언을 말함이라는 성경적 증거(the Bible evidence, speaking in other tongues)를 동반하는 성령으로 침례를 주고 계시다.”
맥퍼슨은 예수 그리스도의 경세적 변함없으심을 거부하는 은사중단론과 고등비평을 비판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많은 교수들과 설교자들조차도 이런 하나님의 약속들은 오늘날에는 문자적으로 해석되지 말아야 한다고 믿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들은 그 어떤 성경적 증거도 없이 이적의 시대는 끝났으며 주님께서는 더 이상 병자들을 고치시고 않으며, 신자들에게 오순절 날처럼 성령으로 침례를 주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은사중단론자들이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과거에 한정시키고 현대에는 중단된 것으로 해석하거나, 문자적해석을 거부하고 고등비평이라는 인위적 안경을 통해 보면서 가공적인 신화로 만들어버리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맥퍼슨은 소위 고등비평(higher criticism)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론적 신성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능력이나 약속도 신화로 전락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맥퍼슨은 성부께서 베푸시는 “이른 비와 늦은 비”에 성령침례를 수여하시는 “영원토록 동일하신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께서 여전히 활동하시는 “성령의 시대”를 더함으로써 성경시대의 방언동반 성령침례와 현대의 방언동반 성령침례의 연속성 지지를 위해 삼위일체적 틀을 강화하였다.
IV. 방언의 종류와 기능들
A. 방언의 종류: 증거 방언과 은사 방언
맥퍼슨은 두 종류의 방언만을 주장했다. 하나는 “증거 방언”(the Bible evidence of speaking in tongues)이며, 다른 하나는 “은사 방언”(the gift of tongues)이었다. 맥퍼슨은 증거 방언을 “다른 방언”(other tongues)이라고 명명하기도 했으며, 은사 방언을 “각종 방언”(divers Kinds of tongues)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그녀는 증거 방언의 근거를 사도행전에 두었으며, 은사 방언의 근거를 고린도전서에 두었다. 성령침례와 관련하여 증거 방언은 “성령침례를 받는 순간” 나타나며, 은사 방언은 “성령침례와 관련이 없다.” 성령과 관련하여 증거 방언은 “성령의 오심”과 동반되며, 은사 방언은 “성령의 내주”에서 발생한다. 기능적으로 증거 방언은 “성령침례의 성경적 증거”(the Bible evidence)이며, 은사 방언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들 중 하나”다. 증거 방언을 받는 범위는 성령침례를 받는 “모든 사람”이며, 은사 방언을 받는 범위는 “소수”다.
맥퍼슨에게서 증거 방언의 발화 대상은 사람이지만 반드시 외국인은 아니었으며, 은사 방언도 발화의 대상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지만, 때로는 외국인 등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맥퍼슨은 증거 방언은 배우지 않은 외국어(clear languages that they had never learned)라고 단언하는 한 편, 은사 방언은 기본적으로 미지의 방언(unknown tongues)이라고 보지만, 때로는 외국어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목적에 있어서 증거 방언은 성령침례를 받은 것을 확증하는 것이며, 은사 방언은 기본적으로 개인과 교회를 세우는 것이며, 때로 선교적 목적(missionary purpose)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맥퍼슨은 은사 방언의 대부분은 비선교적인 것이고 때로 선교적인 것이 발생하기도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증거 방언이 외국어들이지만 외국인들에게 선교하기와 그들에게 의도적으로 설교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그 근거로서 오순절 날의 성령침례의 증거로서 방언이 외국어들이었지만,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외국인들이 아니었고, 모두 유대인들이었다는 것과, 에베소와 가이사랴에서 증거 방언을 말한 사람들도 또한 외국인들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 오순절 후 설교하기 위해 방언으로 말했다는 성경의 사례가 없다는 것, 방언으로 많이 말했던 바울조차 방언으로 설교했던 적이 없다는 것을 들었다. 발화자의 의지와 관련하여 증거 방언은 성령께서 말하라고 주시는 대로 말해야 하기 때문에 발화자의 의지가 개입하지 못하고 “비의도적으로”(involuntarily) 말하게 되는 것이며, 은사 방언은 발화자의 의지가 개입되어 “의도적으로”(at will) 말하는 것이었다.
증거 방언 | 은사 방언 | |
별 명 | 다른 방언 | 각종 방언 |
근거 성경 | 사도행전 | 고린도전서 |
성령침례와 관련 | 성령침례와 함께 | 성령침례 후 |
성령과 관련 | 오시는 성령 | 내주하시는 성령 |
기 능 | 성령침례의 성경적 증거 | 은사 |
받는 범위 | 성령침례 받는 모두 | 소수 |
성 격 | 외국어 | 비외국어, 때로 외국어 |
대 상 | 사람에게 | 하나님께 때로 사람에게 |
외국인에게는 아님 선교목적은 아님 |
주로 내국인에게 때로 외국인에게 외국인에게는 선교적 목적 |
|
발화자 의지 여부 | 성령이 주시는 대로 의지와 상관없이 |
발화자의 의지대로 |
표 1.
맥퍼슨의 그녀의 증거 방언론에서 선교적 목적은 설 자리를 잃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선교적 목적의 방언은 은사 방언의 영역에 속한 것이었으며, 그것도 은사 방언을 받은 모든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 외국인들에게 의지를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B. 은사 방언의 기능들
맥퍼슨에게 은사 방언은 신자의 사적인 경건 생활에 있어서 놀라운 복이었다. 그녀에게 사적인 경건 생활에 복이 되는 방언은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와 찬양의 매체였다. 그녀는 “바울은 방언이, 통역이 없을 때에도, 기도와 찬양에 있어서 우리의 사적인 경건 생활(in our private devotional life)에 놀라운 복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라고 말했다. 먼저 맥퍼슨에게 방언은 사적인 경건 생활의 일부인 기도의 매체였다. 특히 그녀는 방언을 성령의 기도로 이해했다. 그녀는 “바울은 우리에게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으로 중보기도를 하실 때 이 기도 생활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말하려합니다”[롬 8:26]라고 말했다. 내밀한 방에서 홀로 기도할 때, 바깥세상을 차단하고, 미약한 방식으로 기도할 수 있는 모든 기도를 마쳤을 때, 신자의 몸을 성전 삼으시고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일어나셔서 혀를 주관하셔서 신자를 통해 방언으로 기도하시고 신비 가운데서 하나님께 말씀하신다(고전 14:2)는 것이다.
맥퍼슨에게 은사 방언이 사적 경건생활에 복이 되는 이유는 은사 방언을 통한 영의 기도는 먼저 말하는 자 자신을 세우기 때문이다. 맥퍼슨은 은사 방언을 영의 기도로 인식했다. 그녀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14절과 15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영의 기도를 성령 안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녀는 “교화되고, 세움 받고, 북돋움 받고, 격려 받음 없이 말(2절), 기도(14절), 노래(15절), 찬양(17절) 중에 거하시는 복 있는 성령을 모시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세운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필요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세울 수 있기 전에 자신을 세워야만 한다고 역설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수준 이상으로 다른 사람을 더 높게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은사 방언이 사적 경건생활에 복이 되는 두 번째 이유는 타인을 위해 중보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저는 홀로 기도할 때면 말할 거리로 가득 찹니다. 성령께서는 저를 통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저를 통해 기도하시며, 우리가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불이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기도 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맥퍼슨에게 사적 경건 생활에 복이 되는 은사 방언은 또한 찬양의 매체이기도 했다. 맥퍼슨은 성령께서 머무시려 오시면, 몸과 혼과 영을 통제하신다고 보았다. 주님께서는 혀라는 어거하기 어려운 음성기관조차도 성령으로 통제하신다. 예수님은 참으로 실제적이 되시고, 성령께서 그 왕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실 때 영혼은 찬양으로 넘쳐나게 된다. 그럴 때 성령께서는 배우지 않은 어떤 언어로 신자 안에서 스스로를 높이시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신다. 그리고 신자가 성령께서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들을 때, 기쁨의 강과 영광의 파도들이 그의 전 존재를 휩쓴다. 신자가 전혀 생각하지 못할 때 성령께서 방언으로 신랑을 칭송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맥퍼슨은 은사 방언의 방향성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향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녀는 은사 방언의 특성적 기능을 확실하게 드러내기 위해 방언 은사를 예언 은사와 비교했다. 그녀는 상상으로 대차대조표(balance sheet)를 그려놓고는 한 쪽에는 예언을 다른 한 쪽에는 방언과 통역을 놓았다. 비교되는 방언 은사와 예언 은사의 공통점은 둘 다 “신적 영감 아래서”(under divine inspiration) 동일한 성령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방향성이다. 그녀의 대차대조표에서 방언 은사는 성령께서 신비 안에서 신자를 통해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다. 반면에 예언 은사는 동일한 성령께서 신자를 통해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맥퍼슨은 방언 은사에 통역 은사가 동반될 때 그 방향성이 바뀌어 사람에게 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방언 은사가 사람에게 향할 때 그 방언은 메시지를 포함할 수 있다. 그녀에 따르면, 예언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며,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때 예언은 중간에 다른 은사의 중재가 필요 없이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모국어로 직접적으로 주어진다. 반면에 하나님께 기도와 찬양의 매체인 알지 못하는 방언이 사람에게 향하기 위해서는 듣는 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듣는 자의 모국어로 전달해주는 통역 은사의 중재가 필요하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주어진다. 이때 방언은 예언처럼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매체가 된다. 예언 은사는 방언 은사보다 더 바람직한 것이지만, 방언 은사가 그것의 다른 반쪽인 통역과 함께 할 때, 예언과 동등한 수준이 된다.
방언 은사 | 예언 은사 | |
공통점 | 신적 영감 아래서 말함 | |
성령께서 화자를 통해 말씀하심 | ||
차이점 | 하나님께 말함 | 사람에게 말함 |
발화자 자신을 세움 사적 경건 생활에 유익 |
청자, 공동체를 세움 공적 경건 생활에 유익 |
|
기 능 | 기도와 찬양 (때로 선교) |
덕을 세움, 권면, 위로 |
언어성 | 발화자도 청자도 모르는 방언 | 발화자와 청자의 모국어 |
메시지 | 통역 동반할 때 사람에게 말함 발화자의 모르는 방언 + 통역자/청자의 모국어로 통역 (때로 외국어로 발화) 간접적으로 |
통역 없이 사람에게 말함 직접적으로 |
표 2.
맥퍼슨은 통역자가 없을 때는 공적 모임에서 큰 소리로 방언을 말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교회에 통역자가 없을 때 발화자는 자기에게 능력이 임하는 것을 느꼈을 때 큰 소리로 방언을 계속 말해야 합니까?”라고 스스로 질문했다. 그리고는 그녀는 “아닙니다. 통역자가 없을 때는, 그는 교회에서는 침묵을 지키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해야 합니다. 즉, 설교자를 방해하지 않도록 부드럽고 조용하게 말해야합니다”라고 대답했다.
VI. 방언에 대한 신학적 해석
A. 방언의 기독론적 의미: 대제사장의 출입을 알리는 방울로서 방언
맥퍼슨은 대제사장의 지성소 출입을 알리는 방울소리를 언급했다. 그녀는 회중에게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갔을 때, 방울이 울렸으며, 대제사장이 지성소에게 나올 때 다시 방울이 울렸음을 상기시켰다. 그녀가 언급한 대제사장의 방울은 출애굽기 28장 34절에서 35절까지에서 발견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대제사장의 의복 제작하는 법을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의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한 금 방울, 한 석류, 한 금 방울, 한 석류가 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방울의 기능은 대제사장 아론이 방울이 달린 옷을 입고 여호와를 섬기러 성소에 들어갈 때와 성소에서 나올 때에 그 소리가 울림으로써 하나님의 죽이심을 면하게 하는 것이었다(출 28:34-35).
그 다음, 맥퍼슨은 방언을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하늘 지성소 출입을 알리는 방울로 비유했다. 그녀는, 아마도 히브리서를 근거로 삼으며, 구약의 대제사장의 방울은 신약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방울을 예표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녀에 따르면, 초림하신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는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셨는데, 이 때 방울이 울렸으며, 그 방울 소리는 오순절날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소리였다. 2000년이 지난 지금, 늦은 비 시대에,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기다리고 있는 교회”를 위해 다시 하늘 지성소에서 나오고 계시다.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위해 나오시자, 방울이 울리는 것처럼 사람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하고 있다. 맥퍼슨은 구약시대 대제사장의 방울의 기능을 “하나님의 죽이심을 면하게 하는 것” 대신, 대제사장의 “지성소 출입을 알리는 것”으로 재해석하고, 방언을 그 출입을 알리는 소리라고 보았다.
방언을 대제사장의 방울소리와 연결시킨 것은 맥퍼슨이 처음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처음 시도한 사람은 시무어와 아주사 선교회였다. 그들은 구약 시대의 제사장이 찼던 방울소리는 그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고 해석했다. 그리고는 그들은 “방언은 마치 사람들을 깨우는 방울과 같습니다”(The tongues are like a bell, ringing the people up)라고 썼다. 방언이 방울처럼 사람들을 깨워야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죽은 것처럼 여기며 자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방언이 방울처럼 울려서 사람들을 깨우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성령께서 방언을 통해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계속해서 울려 전할 것이다. 시무어와 아주서 선교회에게 방언은 성령께서 사람들을 깨워 살아있는 예수님의 존재를 알리는 방울소리였다. 맥퍼슨은 시무어가 방언을 예수님의 존재를 알리는 방울소리로 해석한 것과는 다르게 대제사징이신 예수께서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심과 재림적 나오심을 알리는 방울소리로 해석한 것이다. 이렇게 맥퍼슨은 방언을 구약의 대제사장의 방울소리로 해석한 오순절의 전통을 전수받고, 나아가 다른 각도에서 재해석했다.
B. 방언의 구원론적 의미: 바벨탑 방언과 오순절 방언의 대조
맥퍼슨은 바벨탑의 방언과 오순절의 방언을 대조시켰다. 그녀에게 바벨탑 방언은 “하나님의 징벌로서”(as a punishment) “언어의 혼잡”(a confusion of tongues)과 흩어짐을 초래했었다. 반면에, 그녀에 의하면, 오순절 방언은 “하나님의 축복으로서”(as a blessing) “모임”(being brought together)을 일으켰다. 그리고 오순절 방언은 신약시대에 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동일하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맥퍼슨에게 바벨탑 방언은 “흩어져 땅에 편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사람들이 불순종한 죄, “그 끝이 하늘 안으로 들어가는 탑을 만들어 하나님의 징벌인 홍수를 피하자”며 하나님께 반항한 사람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바벨탑 방언은 하나였던 구음이 여러 개로 나누어지고, 나뉜 구음에 따라 사람들도 나뉘어 한 덩어리로 있지 못하고 흩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반면에 맥퍼슨에게 오순절 방언은 “흩어지지 말고 한 곳에 모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 즉 구원이었다. 오순절 방언은 여러 구음으로 발설되었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라는 동일한 메시지를 선포했고, 그 방언을 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한 곳으로 모이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맥퍼슨에게 바벨탑 방언은 심판이었으며, 오순절 방언은 구원이었던 것이다.
바벨탑 방언과 오순절 방언의 비교를 처음 시도한 사람은 맥퍼슨이 아니었다. 그것을 처음 시도했던 사람은 찰스 파함이었다. 파함은 바벨탑 방언을 심판으로 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오순절 방언도 역시 심판으로 해석했다. 파함에게 바벨탑 방언의 목적은 “인간이 만든 길(바벨탑)이 하늘에 닫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즉, 바벨탑 방언은 하나님께 대항한 사람들을 흩어버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파함의 마음에는 오순절 방언도 역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그런데 오순절 방언의 심판성은 방언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었다. 파함은 성경의 오순절 방언에 대한 분석은 하지 않고 바로 현대 오순절 방언의 의미를 말했다. 파함에게 “오늘날의 다양한 방언들의 내림은 이 현대 바빌론과 그 개신교도들이라는 딸들을 완전히 혼란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벨탑처럼 “인간이 만든 길”(man-made way)들 중 하나로서 현대에 방언의 가능성을 배척하는 “은사중단론”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파함에게 바벨탑 건설과 방언 배척은 하나님께서 만드시지 않은, 인간 스스로 만든 길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것이었다. 그리고 구음의 다양화, 다른 방언들은 그 길을 만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혼란, 흩어버리심과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이기도 했다.
시무어의 아주사 선교회는 아주 짧게, 단 한 문장으로 바벨탑 방언과 오순절 방언을 비교하여 언급하기도 했었다. 시무어는 중국으로 간 한 외과의사 겸 선교사를 언급하며, 그녀가 중국에 8년간 있었음에도 중국어를 조금밖에 모른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리고 괄호를 치고 그 안에서 “바벨탑에서 사람들을 혼잡케 하셨고 예루살렘에서 모든 나라들에서 온 사람들이 자신의 언어로 듣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그까짓 하나의 언어를 주실 수 없겠는가?”라고 질문했다. 그런데 비록 시무어가 바벨탑 방언과 오순절 방언을 그렇게 짧게 언급했지만, 그것은 바벨탑 방언을 심판으로 오순절 방언을 구원으로 해석하는 시각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충분히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한 것이었다. 즉, 시무어의 심판적 바벨탑 방언과 구원적 오순절 방언의 대조는 오직 심판의 관점에서만 보았던 파함과 심판과 구원의 대조의 관점에서 보았던 맥퍼슨의 교량역할을 했다. 맥퍼슨은 시무어의 대조적 관점을 더욱 확장시켰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VII. 나가는 말
일면, 맥퍼슨의 방언론의 대부분은 그녀 이전의 오순절주의자들, 파함과 시무어와 더함의 방언론들과 유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방언을 성령침례에 초자연적이고 확실하게 즉각적으로 동반되는 첫 번째, 성경적 “증거”(evidence)와 내적인 성령침례의 외적이고 성경적인 “표징”(sign)으로 삼은 것이 그런 유사점이다. 그리고 그녀에게도 또한 은사 방언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찬양의 매체로서 사적 경건 생활에 유익한 것이었고, 통역 은사를 동반할 때 예언 은사와 동등하게 사람들에게 덕 세움, 권면, 위로를 담은 공적 메시지의 전달 매체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반면에, 오순절의 전통을 수용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퍼슨의 방언론에는 그들의 방언론들에서와는 다르게 그녀만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들이 존재했다. 첫째, 맥퍼슨은 “증거 방언”에서 “선교적 목적”을 제거하고 그것을 “은사 방언”에서도 특수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삼았다. 둘째, 맥퍼슨의 방언론에는 그 세 사람의 방언론에서는 볼 수 없었던 “원형”(pattern) 등의 새로운 개념들이 등장한다. 맥퍼슨이 성경에 기록된 오순절 방언과 현대 오순절 방언의 연속성을 주장하기 위한 여러 틀들 가운데서 “이른 비와 늦은 비,” “이것은 저것”이라는 틀이 등장하는데 이것들은 이전의 틀들을 수용하고, 더 심화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원형과 반복,” “성령의 시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틀들이 등장하는데, 이 틀들은 이전의 오순절 지도자들의 틀들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그녀만의 독특한 것들이었다. 특히 “원형”이라는 개념은 후대의 오순절해석 논의에 중요한 논점을 제공했다.
셋째, 맥퍼슨은 방언을 기독론과 구원론적 관점에서 신학적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 작업에서 그녀는 오순절 전통을 전수받으면서도, 나아가 그녀만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심화시켰다. 구약시대 “대제사장의 방울소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시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심과 재림시 하늘 지성소에서 나오심과 연결시킴으로써 방언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을 시도했다. 이는 시무어의 공동체가 방언을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의 방울소리와 연결시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며 성도들을 일깨우는 기능을 한다고 주장한 것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여 심화시킨 것이다. 또한 맥퍼슨은 “바벨탑의 징벌로서 방언”와 “오순절의 복으로서 방언”을 비교하면서 방언에 대한 구원론적 해석을 시도했다. 이는 파함이 바벨탑 방언과 오순절 방언을 오직 하나님의 심판으로만 해석했던 것과는 다른 관점에서의 해석이며 심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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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에이미 샘플 맥퍼슨(Aimee Semple McPherson)은 17세에 한 오순절 전도자 로버트 샘플을 통해 오순절에 대해 알게 된 후, 중생 경험과 더불어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았다. 그 후 그녀는 대형교회와 독자적인 오순절적 교단을 설립하는 등 오순절운동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데도 그동안 그녀의 방언론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 본고는 맥퍼슨의 방언론의 전체 모습을 구성해 봄으로써, 이런 공백을 조금이나마 메우기를 시도한다.
한 편으로, 맥퍼슨의 방언론은 대체적으로 방언을 성령침례의 “증거”(evidence)와 “표징”(sign)으로 삼았던 그녀 이전의 파함과 시무어와 더함의 방언론들과 유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맥퍼슨의 방언론에는 오순절의 전통을 수용하면서도, 그녀만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들이 존재했다. 첫째, 맥퍼슨은 “증거 방언”에서 “선교적 목적”을 제거하고 그것을 “은사 방언”에서도 특수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삼았다. 둘째, 맥퍼슨의 방언론에는 성경시대의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과 현대의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을 연결시키기 위한 틀들로서 “원형”(pattern), “성령의 시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개념들은 그녀만의 독특한 것이었다. 셋째, 맥퍼슨은 방언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 작업에서 그녀는 오순절 전통을 전수받으면서도, 나아가 그녀만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심화시켰다. 그녀는 “대제사장의 방울소리”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시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심과 재림시 하늘 지성소에서 나오심과 연결시킴으로써 방언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을 시도했다. 이는 방울소리를 하나님의 임재로만 보았던 시무어의 해석을 자신의 관점에서 변화시킨 것이었다. 또한 맥퍼슨은 “바벨탑의 징벌로서 방언”와 “오순절의 복으로서 방언”을 비교하면서 방언에 대한 구원론적 해석을 시도했다. 이는 바벨방언과 오순절 방언을 심판으로만 보았던 파함의 해석과는 다른 맥퍼슨 만의 독특한 관점을 드러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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