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세계의 오순절신학을 위해 KIPT

누가행전 불의 용례의미(ThM논문)

누가-행전에 나타난 불의 용례와의미5 (성령과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본 누가의 불)

한오신 2017. 7. 1. 11:34

V. 성령과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본 누가의 불

 

지금까지 누가의 불에 관한 일반적인 언급이 다루어졌다. 이제부터는 누가-행전에 등장하는 성령과 관련된 불이 집중적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그럼으로써 성령과 불 세례의 성격이 비심판/구원임이 규명될 것이며, 오순절의 불이 해석될 것이다.

 

A. 누가복음서의 성령과 불

 

누가-행전에서 성령과 불의 세례에 대해 맨 처음 언급하는 사람은 세례 요한이다. 세례 요한은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자기 보다 능력 많으신 분이 오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외친다 (3:9-17).

 

1. 구조로 본 성령과 불

 

A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pu'r)에 던지우리라 --(3:9)

(세례 요한과 무리들과의 대화 삽입)

         B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 (3:16a)

                       C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 (3:16b)

         B' 그는 성령과 불(pu'r)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3:16c)

A'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pu'r)에 태우시리라(katakaivw) ---- (3:17)

 

누가는 마태와는 달리 교차대구법적으로 짜 놓은 세례 요한의 말에 세례 요한과 무리들, 세리들, 그리고 군병들의 대화와 사람들의 심중의 생각을 삽입함으로써(ABb 사이의 3:10-16a 부분) 그 교차대구법을 약화시킨다. 이렇게 전체 교차대구법 구조는 마태의 것보다 약화되었지만, 그러나 BB'의 대조는 마태의 것보다 오히려 더 강화됐다. 누가는 B와 평행인 마태의 B(3:11a)에서 회개케 하기 위해’(ei*" metavnoian)라는 문구를 생략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물 세례성령과 불 세례를 더 직접적으로 강하게 대조한다. 그 외에는 몇 가지를 빼놓고 마태의 것과 거의 흡사하다.


2. 성령과 불에 관한 견해들

 

누가복음서에 세례 요한이 언급한 성령과 불 세례 (baptisma e*n pneuvmati a&givw/ kaiV puriV)에 대한 편집 접근은 다양한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다양한 결과가 산출된 것은 마가의 언급과 마태, 누가의 언급이 다르기 때문이다.

 

오실 자의 세례에 대한 요한의 예언

Mk 1:8 e*gwV e*bavtisa u&ma'" u@dati

               au*toV" deV baptivsei u&ma'" e*n pneuvvmati

Mt 3:11 e*gwV u&ma'" baptivzw e*n u@dati . . .

               au*toV" u&ma'" baptivsei e*n pneuvmati a&givw/ kaiV puriv

Lk 3:16 e*gwV u&ma'" baptivzw u&ma" . . .

               au*toV" u&ma'" baptivsei e*n pneuvmati a&givw/ kaiV puriv

 

바이어와 불트만과 테일러는 불 세례’(Fire-baptism)가 원래 요한이 말한 것이고 후에 마가가 그것을 성령 세례’(Spirit-baptism) 바꾸었다고 보았다. 그 이후에 이렇게 주장한 사람은 케스폴이다. 그는 마태와 누가가 독립적으로 Q에 마가의 성령을 더하여 성령과 불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굴더는 마태와 누가가 독립적으로 일한 것이 아니고, 누가가 마태의 것을 사용했다고 보았다. 이들의 주장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세례 요한

e*n puriv

↙ ↘

마가 Q

e*n pneuvmati a&givw/ e*n puriv

↘ ↙

마태 누가

e*n pneuvmati a&givw/ kaiV puriv

 

이들과는 반대로 엘리스는 성령 세례’(Spirit-baptism)가 본래적이었고 기독교인들(Q)이 후에 그것에 을 더했다고 보았다.

 

세례 요한

e*n pneuvmati a&givw/

↙ ↘

마가 Q

e*n pneuvmati a&givw/ e*n pneuvmati a&givw/ + kaiV puriv

마태 누가

e*n pneuvmati a&givw/ kaiV puriv

 

에반스는 바렛(C. K. Barrett)을 따라 바람과 불로(e*n pneuvmati kaiV puriv)라고 기록했을 Q가 본래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마가가 바람’(pneu'ma)거룩한’(a&giva)이라는 말을 더하여 성령으로’(e*n pneuvmati a&givw/)로 바꾸고, ‘을 제거하였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마태와 누가가 Q바람과 불로’(e*n pneuvmati kaiV puriv) 그리고 마가의 성령으로’(e*n pneuvmati a&givw/)를 각각 취하여 성령과 불로 (e*n pneuvmati a&givw/ kaiV puriv)라는 문구를 만들었다고 보았다. 최근에 멘지스도 이렇게 주장했다. 그는 마가가 을 생략한 것은 그의 예수의 복음’(1:1)과 조화를 이룬다고 보았다. 이 주장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세례 요한

e*n pneuvmati kaiV puriv

Q

e*n pneuvmati kaiV puriv

↙ ↓

마가

e*n pneuvmati + a&givw/

마태 누가

e*n pneuvmati a&givw/ + kaiV puriv

 

던은 성령과 불 세례’(Holy Spirit & Fire-batism)가 요한이 원래 말한 것이며, Q는 그것을 그대로 받았고, 누가와 마태가 각각 그것을 그대로 받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마가가 요한의 성령과 불 세례를 담고있던 원래의 기독교전승에서 을 생략했다고 보았다. 이들의 견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세례 요한

e*n pneuvmati a&givw/ kaiV puriv

↙ ↘

마가 Q

e*n pneuvmati a&givw/ e*n pneuvmati a&givw/ kaiV puriv

마태 누가

e*n pneuvmati a&givw/ kaiV puriv

 

   

이런 편집접근적 견해들은 단지 추측에 불과한 것이고 본래적인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마가는 예수를 성령으로 세례주시는 분으로 그리며, 마태와 누가는 예수를 성령과 불로 세례주시는 분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3. 의미로 본 성령과 불

 

성령과 불 세례는 한 가지 세례인가, 아니면 두 가지 세례인가? ‘성령과 불 세례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해 지금까지 시도된 대답들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a. 두 가지 세례, 두 효과 (two baptims, two effects)

 

오리겐(Origen)성령과 불 세례를 둘로 나누고 요한은 회개하는 자는 성령 세례를,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한 불의 형벌 세례를 받을 것을 예언했다고 보았다. 이스톤(B. S. Easton)성령과 불 세례를 둘로 나누어 성령 세례는 의인에게 주는 것이고, ‘불 세례는 악인에게 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멘지스는 먼저 성령과 불 세례는 두 가지 세례로서 씻음(cleansing)과 멸망(destruction)이라는 두 가지 국면이 있음을 주장한 것을 긍정했다. 그러나 그는 그 성령으로 인한 씻음이 개인의 정결(purification)이나 윤리적 전환(moral transformatio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separation)-악인(쭉정이)으로부터 이미 의롭게 된 사람들(알곡)을 분리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을 씻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 그는 성령은 의인을 악인에게서 분리시키고, ‘은 악인을 태워 멸망시킬 것으로 보았다. 웹은 두 가지 세례를 말하며 예수께서 회개하여 물세례를 받은 자들에게는 성령의 세례를(시온 회복),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불 세례를(심판) 주실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뷰로우스도 두 가지 세례를 말하지만 두 가지 세례 모두 심판보다는 주로 완전한 전환’(complet transformation)을 가져오는 정화(purification)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b. 한 가지 세례, 한 효과 (one baptism, one effect)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불을 성령과 관련시키고 요한이 성령의 불’(the fire of the Holy Spirit)을 은혜롭게 부어주심을 말했다고 보았다. 이와 달리 브루스는 요한이 여기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지 않았으며, 성령이 강한 심판의 바람으로서 쓸모 없는 것들을 쓸어버리며, 불은 바람이 휩쓸고도 남은 것을 파괴해 버릴 것을, 즉 완전한 파괴를 말한 것이라고 보았다. 심판만을 주장하는 브루스와는 달리 모리스는 e*n이라는 전치사 하나가 성령을 꾸미는 것이라는 것과, 성령 세례와 불 세례가 같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에 착안하여 성령과 불 세례란 불로 정화하고, 성령으로 힘을 주는 세례라고 주장했다.

 

c. 한 가지 세례 두 효과 (one baptism, two effects)

 

던은 요한이 두 가지 구별된 세례를 말했다는 주장들을 비판하고 요한의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자와 세례 받기를 거절한 회개하지 않는 자 모두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요한이 말한 더 강한 자성령과 불세례는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심판 세례로서, 두 가지 효과-회개하는 자에게는 죄악을 씻어버리고 정화시켜 구원(redemption or salvation),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를 가져오는 세례라고 주장했다. 모리스가 말하는 것처럼 예수께서 성령과 불로 주시는 한 세례로 두 가지 효과-회개하는 자에게는 구원,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를 가져온다는 주장의 주요 약점이 바로 이것이다. 요한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성령과 불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성령과 불 세례를 주겠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터너는 성령과 불 세례는 한 세례로서 요한이 물세례로 회개하는 이스라엘의 죄를 깨끗하게 씻은 것처럼, 메시야도 회개하는 이스라엘을 성령과 불로 깨끗하게 씻으시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메시야가 성령과 불 세례를 통해 시온 유토피아를 회복하신다고 본 것이다. 그는 그 근거로서 메시야 시대를 예언한 사 4:2-6심판의 영과 태우는 영으로서시온이 정화될 것이라는 언급을 든다. 메시야가 성령과 불 세례를 통해 이스라엘을 불로 심판하여 정화하고 구원한다는 것이다. 터너가 말하는 성령과 불 세례는 한 세례이며 두 효과를 나타내지만 그 대상은 던이 말하는 것처럼 회개하는 자/회개하지 않는 자, 둘이 아니요 하나-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d. 필자의 견해-한 가지 세례, 한 효과 (one baptism, one effect)

 

필자가 보기에 누가가 요한을 통해 소개하는 성령과 불 세례는 의인들에게만 임하는 한 가지 세례이다. 첫째로, 교차대구 구조가 이 견해를 뒷받침한다. 누가가 구원받을 알곡과 심판 받을 쭉정이를 말하고 있는 곳은 B'이 아닌 A'부분이다. 또한 B'성령과 불은 그렇게 멀지 않은 임박한 미래에, 현재라고도 말할 수 있는 시간에 나타나겠지만, A'꺼지지 않는 불은 먼 미래에 나타날 것이다. 이렇게 B'의 불과 A'의 불은 시간적 차이를 갖는다. 그러므로 B'의 불과 A'의 불을 동일시하여 B'의 불이 A'의 불처럼 두 가지 효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누가는 교차대구법적 구조 안에서 AA'BB'와 평행법적으로 대조했다. , 누가는 교차대구법의 바깥 부분인 AA'에서는 미래 종말적 심판의 불(꺼지지 않는 불)을 말하고, 반면에 교차대구법의 안쪽 부분인 BB'에서는 현재적 불(성령과 불)을 말함으로써 AA'BB'(시간)평행법적으로 대조했다. AA'가 미래적 종말적 심판의 불을 말하는 것은 분명하다(꺼지지 않는 불). 마태의 것보다는 약화되었지만 AA'는 교차대구 구조 안에서 평행을 이룬다. 열매 맺지 않는 나무와 쭉정이가 동일시되고, 불과 꺼지지 않는 불이 동일시된다. a*sbevsto"(꺼지지 않는)는 신약 성경에 단 네 번-3:12, 9:43;45, 3:17- 등장한다.꺼지지 않는 불은 종말적 심판의 불인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알곡과 쭉정이를 가릴 수 있는 때는 농사철의 마지막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가는 꺼지지 않는 불’(toVV pu'r toV a*sbevsto")게헨나(개역에는 지옥’)의 불이라고 말한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9:43)

 

그런데 BB'의 불의 성격을 결정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우선 B에 나타나는 요한의 세례는 심판의 세례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비록 누가가 B에서 마태의 평행본문에 나타나는 회개케 하기 위하여”(ei*" metavnoian)라는 문구를 생략하였지만, 그는 요한의 요단강 세례 사역을 소개하기 시작하는 부분에서 마태가 세례 요한의 말을 통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말하게 한 것과는 달리 해설자(narrator)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고 말하게 함으로써 요한의 물 세례를 규명한다. , 누가는 요한의 물 세례가 죄 사함으로 인도하는 세례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B의 세례는 심판의 세례가 아니다. AA'가 서로 시간적으로 일치하고, BB'가 서로 시간적으로 일치한 반면에 AA'BB'는 시간적으로 서로 일치하지 않고 대조된다면, 내용적으로도 AA'는 서로 일치하고, BB'도 서로 일치한 반면에, AA'BB'는 내용적으로 서로 일치하지 않고 대조될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 본다면 누가가 B에서 심판 세례를 말하지 않는다면, B'에서도 역시 심판의 세례를 말하지 않으며, 대신 의인을 위한 한 가지 세례를 말하는 것이다.

 

A 미래 종말적 심판의 불

         B 세례 요한의 현재 물 세례

         B' 예수의 현재적 성령과 불 세례

A 미래 종말적 심판의 불


고댓은 16절의 불을 회개하고 요한의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이 받을 성결의 불’(the fire of holiness)로 보고 그 불은 17절에 나타나는 꺼지지 않는 불과 대조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 두 불을 교차대구법 구조 안의 평행법적 대조로 보지는 못했다.

둘째로, 누가의 세례 이야기B'가 한 세례를 말한다는 견해를 뒷받침한다. 누가 이야기 속에서 성령과 불 세례를 최초로 받는 사람들은 바로 요한의 물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다. 세례 요한이 예언한 성령과 불 세례의 최초의 성취 사건인 오순절 성령강림 이야기를 살펴보면 성령 세례를 받은 120명이 그 전이나 후에 물 세례를 받았다는 문구가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에 누가는 바리새인과 율법사들 이외에 모든 백성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말한다.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7:29-30)

 

또한 누가 이야기 속에서 성령과 불 세례를 최초로 받은 사람들은 말씀을 깨닫고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사람들이다. 누가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에게(24:33) 그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시고(“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24:38), 그들에게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자신을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을 그들의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하시는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24:44-45). 누가는 자기 이야기 속에서 깨닫다’(sunivhmi)라는 용어를 대부분 구원과 관련시킨다 (8회 중 7). 그 첫 번째 예는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스스로 밝히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8:10)

 

비유를 깨닫는 것은 듣고 믿어 구원을 얻는’(8:12) 말씀, 즉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8:10, 12) 아는 것이다. 마가는 평행본문에서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4:12) 라고 아주 분명하게 깨달음을 구원과 관련시켰다. 마태는 평행본문에서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라고 마가보다는 간접적으로 깨달음을 구원과 관련시켰다. 그런데 누가는 평행본문에서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8:10) 라고 말함으로써 깨달음과 구원과의 관련성을 제거하는 듯 하지만, 그는 비유 설명 속에서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8:12)이라고 말함으로써,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라는 어구를 선택하여 예수 말씀에 복원함으로써 말씀을 깨닫는 것과 구원을 간접적으로 관련시킨다. 이렇게 누가는 깨닫는 것을 구원과 관련시킨다.

그 두 번째 예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으나 제자들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고 누가가 해설하는 곳에서 등장한다.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18:34)

 

누가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예언을 깨닫지 못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을 묘사한다 (24:11, 25, 38, 41). 그러다가 누가는 마지막으로 해설 속에서 제자들에게 깨닫다’(sunivhmi)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24:45)

 

누가는 예수께서 그분의 부활을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 즉, 자기를 가리켜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셔서 제자들이 그 말씀을 깨닫게 하셨다고 말한다. 18:34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 예언 말씀이 감추여서 제자들이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고 말한 누가는 24:45에서 이제 예수께서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서 그 말씀을 드러내어 깨닫게 하셨다고 말한다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여셨다). 제자들은 이렇게 말씀을 깨달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은 것이다 (8:12).

제자들의 마음을 여셔서 감추였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깨닫게 하신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을 이 모든 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누가는 예수께서 예수의 말씀 증거를 받고 깨달아 믿어 구원받은 제자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던 자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24:49)고 말씀하셨다고 보고한다. 다시 말하면, 누가에게 있어서 증인은 예수의 증거를 들어 죽음과 부활을 깨달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증인들에게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받아 위로부터 능력을 입으라고 명령하신다 (24:49).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 증인들에게 진정한 증인이 될 수 있도록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도 역시 깨닫는 것을 구원과 관련시킨다. 그 첫 번째 예는 스데반의 설교에서 등장한다.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 (7:25)

 

스데반은 회당설교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가 구원자임을 깨닫지 못하여 구원이 40년이나 지연되었음을(7:30) 상기시킨다. 이 본문에서도 여기 누가는 깨닫다와 구원을 관련시킨다.

그 두 번째 예는 바울이 로마에서 사 6:9-10을 인용하여 말한 것에서 등장한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26-27)

 

마태는 예수님의 비유로만 말씀하심 설명 가운데서는 사 6:9-10을 인용하지만, 누가는 평행본문에서 그 인용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누가는 바울의 로마에서의 말에서 사 6:9-10을 마태와 거의 유사하게 인용한다. 누가는 본문에서 깨달음과 고침 받음을 동일시한다. 그리고 누가는 바로 다음절에서 구원이라는 말을 등장시킨다. , 누가는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 대신 깨닫는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보내졌다고 말한다 (28:28).

이렇게 누가는 깨닫다’(sunivhmi)라는 동사를 구원과 관련시켰으므로, 그의 이야기 속에서 믿지 못하던 제자들이 예수의 증거를 듣고 깨달았다는 것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게 구원을 받은 자들이 오순절에 성령과 불 세례를 받은 것이다. 이방인 고넬료와 접촉한 것에 대해 힐난하는 할례자들에게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ei* on thVn i[shn dwreaVn e[dwken au*toi'" o& qeoV"

w&" kaiV h&mi'n pisteuvsasin e*piV toVn kuvrion *Isou'n Cristovvn (11:17)

ei* on

au*toi'"

qeoV" e[dwken dwreaVn w&" kaiV

o& thVn h&mi'n

i[shn pisteuvsasin

e*piV kuvrion *Isou'n Cristovvn

tν

 

누가는 그들에게’(au*toi'")우리들에게’(h&mi'n)라는 두 개의 직접보어가 동사 e[dwken(divdwmi의 과거) 하나를 꾸미도록 문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믿고 있었던(pisteuvsasin)의 분사 시제를 과거(aorist)로 잡고 우리들에게’(h&mi'n)라는 직접보어를 형용사적으로 꾸미게 했다. 과거분사의 시제는 본 동사의 시제에 의해 좌우되며, 과거분사는 본 동사의 시제보다 한 시제 앞선다. pisteuvsasine[dwken보다 한 시제 앞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를 포함한 우리가 예수를 믿은 것은 선물을(dwreav) 받기(e[dwken) 전이다. 즉 베드로는 예수를 믿은 다음에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가 말하는 성령과 불 세례는 악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심판의 세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요한의 물 세례를 받고 나아가 이미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의인에게 최초로 주어진 한 가지 세례인 것이다.

이러한 필자의 주장은 성령과 불 세례에 관하여 한 편으로는 그 세례가 두 가지 세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성령 세례는 의인들에게 씻음을, 불 세례는 악인들에게 심판을 가져오는 세례라고 보는 멘지스와 터너의 두 세례 주장을 비판하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그 세례가 한 가지 심판의 세례이지만, 두 가지 효과를, 의인에게는 정결과 구원을, 악인에게는 심판을 유발시킨다는 던의 견해를 동시에 비판한다. 필자는 던이 성령과 불 세례는 한 가지 세례를 말한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그 한 가지가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그 심판이 어느 사람들에게는 구원을 가져온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또한 두 가지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또한 필자는 멘지스가 성령과 불 세례를 두 가지로 분리할 수 있는 세례를 의미한다는 것, 불 세례가 악인에게 멸망을 가져온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성령 세례가 변화(transformation)나 구원(salvatio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이미 구원받은 의인을 악인으로부터 분리(separation)하여 씻는 세례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필자의 주장은 누가가 말하는 성령과 불 세례는 예수 믿고 구원받아 증인된 사람들에게 최초로 부어진 한 가지 세례라는 것이다. 성령과 불 세례는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한 가지 세례로서, 증인되는 능력을 부여하는 한 가지 효과를 낳는다.

 

B. 사도행전의 성령과 불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보내는 두 번째 이야기에서 요한의 세례와 관련된 성령으로 세례를 두 번 언급한다. 누가는 이 세례를 한 번은 예수의 말을 통해 언급하고 (1:5), 다른 한 번은 베드로의 말을 통해 언급한다 (11:16).

 

1. 예수께서 언급한 성령과 불


누가는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다시 이야기하며 두 번 째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다시 이야기 속에서 예수께서는 요한이 예언한 세례를 자신이 직접 언급한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1:5)

 

이러한 예수의 언급은 세례 요한의 대차대구법적 언급 중에서 BB'만을 취한 것이다.

 

B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3:16a)

B'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3:16c)

 

예수의 언급은 B에서 요한으로 바꾸고, ‘너희에게를 생략하였으며, B'에서 주어인 너희로 바꾸고 능동적 동사를 수동적 동사로 바꾸어 몇 날이 못되어라는 어구를 더했다. 누가는 세례요한의 언급 중에서 심판의 불에 관한 부분인 AA'를 완전히 생략한다. 또한 B'에서 을 생략한다. ‘성령과 불 세례성령으로 세례로 바뀐다. 이것은 마가로 회귀하는 것인가? 외관상 누가는 두 번째 이야기에서 마가로 회귀한 듯 하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1:8)

 

그러나 누가는 결코 마가로 회귀하지 않았다. 마가의 청중은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1:5)이지만 누가의 본문의 청중은 예수의 사도들이다 (1:4). 마가의 청중은 아직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누가의 청중인 사도들은 데오빌로에게 보낸 첫 이야기 후반부에서 나타나듯 예수의 증거를 듣고 깨달아 믿어 구원을 얻고 증인이라고 불린 사람들에 속한다. 그래서 첫 이야기 전반부에서 세례요한이 말한 심판의 불이 이글거리는 AA'는 생략된다. 이미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 심판의 불 이야기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는 왜 B'의 불이 심판의 불이 아닌데도 그 불을 두 번째 이야기의 예수의 언급에서 생략하였는가? 그런데 지금까지 누가가 예수의 성령 세례에 관한 언급에서 을 생략한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사람이 없다. 멘지스는 세례 요한이 언급한 성령과 불 세례성령 세례불 세례로 나누고 불 세례는 악한 자들에게 임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가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다시 언급한 성령 세례에서 을 생략한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것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성령과 불 세례를 한 가지 세례로 보았던 던이 그의 사도행전 주석에서 의 누락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멘지스는 세례 요한의 예언을 마가가 사용한 것을 언급하면서 누가의 생략을 단순하게 다룬다. 이러한 누가의 생략이 단순히 마가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면, 누가는 왜 을 생략하였는가? 멘지스나 터너가 주장하는 것처럼 누가는 불 세례는 심판의 불이므로 아직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므로 생략하고 성령 세례만을 말한 것인가? 아니면 누가는 특별한 의미 없이 을 생략한 것인가?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누가는 두 번째 이야기에서 한 번만 을 생략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 베드로가 언급한 성령과 불

 

누가는 베드로의 성령으로 세례언급에서도 을 생략했다 (11:16). 베드로는 이방인과 접촉하고 왔다고 자기를 힐난하는 할례자들을 향해 그의 행동의 정당성을 말하면서 성령으로 세례를 언급한다.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1:16)

 

베드로는 세례 요한의 말을 인용하지 않고 예수의 재 언급을 인용한다. 베드로의 예수 말씀 인용에서 누가는 또다시 을 생략한다. 그러므로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2 번이나-두 번의 언급에서 2회 생략이니까 사실 100% 생략-‘성령 세례에서 을 생략한 것은 특별한 의도가 있어서 생략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특별한 의도는 무엇인가?

 

3. 오순절의 성령과 불

 

누가는 세례 요한의 최초 언급에 대한 예수의 인용의 말, 그 인용에 대한 베드로의 인용의 말에서 을 생략하지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해설 속에 불을 등장시킨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diamrizovmenai glw'ssai w&seiV purov")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2:3)

 

누가는 해설자를 통해 오순절에 성령께서 시각적으로 같은 혀들(glw'ssai w&seiV purov")로 임하셨다고 이야기한다. 누가는 이런 방식으로 예수와 베드로가 생략했던 성령 세례와 묶는다. 그는 불같이라고 시각적으로만 표현하지 않고 더 나아가 불같은 혀라고 표현함으로써 불을 더 감각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다시 말하면 불을 더 강화하는 것이다. 이 표현에서 은 결코 수사적 양념이 아니라 표현의 중심이다. ‘불같은 혀혀같은 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불은 날름거리는 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혀는 불이 맹렬하고 뜨겁게 타며 움직이는 모양을 묘사하는 것이다. 누가는 오순절 이전의 예수의 언급과 오순절 이후의 베드로 언급에서 을 생략함으로써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 후 오순절 사건에 을 등장시킴으로써 보이지 않는 성령의 역동적 강림을 불로써 시각화, 감각화, 구체화한다. , 누가는 보이지 않는 성령 세례언급들과 을 갈라 놓고 오순절에 하나로 통합함으로써 성령과 불 세례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멘지스는 성령과 불의 세례를 성령 세례와 불 세례 두 가지로 나누고, 성령 세례에 대한 예언과 약속은 오순절에 성취되었으며, 불 세례는 미래로 밀어 파루시아 때에 이루어질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누가는 세례 요한이 예언한 성령과 불 세례를 하나의 세례로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예수님의 성령 세례에 대한 예언에서 불을 누락시키고, 또한 베드로의 성령 세례 회고에서 불을 누락시켰다. 그는 그렇게 생략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고,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불을 등장시킴으로 성령 세례가 동시에 불의 세례임을 강조한다.

    

  

EXCURSUS: 독자반응적 측면에서 성령과 불 세례

지금까지 대부분의 학자들은 성령과 불 세례에 대해 편집적이고 지엽적으로 접근해왔다. 그 결과 그들은 성령과 불 세례를 누가-행전 전체를 통해 펼쳐지는 하나의 이야기(narrative) 속에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했다. 그들은 복음서의 요한의 언급과 사도행전의 예수님의 언급, 오순절 사건 보고 그리고 베드로의 언급을 통합해서 보지 못한 것이다. 문학적 접근 방법에 속하는 독자반응 접근은 그렇게 통합적으로 누가-행전을 볼 수 있는 눈을 제공해 준다. 독자반응 접근으로 누가-행전의 성령과 불 세례언급을 분석, 종합해보면 그 의미가 보다 명확해진다.

누가-행전의 성령과 불 세례 언급에 독자반응 접근을 시도하기 전에 간략하게 그 이론을 소개한다. 독자반응접근은 작가작품독자 등 문학접근의 주요 대상 또는 요소 중에서 독자를 접근의 가장 중심 위치에 놓는 방식이다. 이 접근은 수용미학(aesthetics of reception)으로 불리기도 한다. 수용미학이란 용어는 야우스(H. R. Jauss) 1967년 서독의 콘스탄츠대학 취임 강의 논문문예학의 도전으로서의 문학사에서 처음 사용됐다. 그는 이 논문에서 60년대 말까지 진행된 모든 비평 이론에 도전하여 문학사는 작품과 독자간의 대화의 역사로 써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전까지 진행된 모든 문학연구 방법론들은 형식-심미적 자세이거나 역사-사회적 자세의 두 가지 측면의 어느 한 면에 속했다. 즉 작품 내재적 연구 또는 작품 외재적 연구에 속하여 독자에 관한 관심과 연구가 빠져있었다. 그리고 그는 문학사는 작품과 독자간의 대화의 역사로 써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독자중심적인 문학연구를 시작했다.

수용미학은 언어학의 발전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언어학이 특히 언어소통’(communication)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문학연구도 그 영향을 받게 됐다. 소쉬르(F. de Saussure)언어’(랑그, langue)언사’(빠롤, parole)를 구분하였고, 야콥슨(R. Jakobson)은 소쉬르의 이분법을 약호’(code)전언’(message)의 대립관계로 포괄적으로 정식화했다. 그는 언어소통이론에서 원용한 도식을 바탕으로 언어활동의 6기능도식을 정식화했다.

 

문맥(contexte)

<지시적 기능>

발신자(addresser) . . . 전언(message) . . . 수신자(addressee)

<정서적 기능> <시적 기능> <능동적 기능>

접촉(contact)

<친교적 기능>

약호(code)

<메타언어적 기능>

 

야콥슨의 언어소통 모델에서 발신자(화자)-전언(소통기호)-수신자(청자)의 관계는 바로 작가-텍스트-독자의 관계와 같다. 다시 말하면, 언어소통에서 발신자인 화자가 언어를 통해서 수신자인 청자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한다면 작가는 텍스트를 통해서 독자에게 작품을 전달한다. 작가의 문학텍스트와 독자간의 대화를 거치게 되고 독자의 수용이 이루어진다.

이저는 텍스트’(text)작품’(work)를 구분한다. 그는 작가가 만들어 놓은 인쇄물인 창작품을 텍스트라 부르고, 독자가 읽고, 수용하고, 이해하며 재생산해낸 문학 텍스트를 작품이라고 한다. 즉 그는 문학작품의 이해는 텍스트와 독자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는 특히 독자의 능동적인 독서과정을 중시했다. 이저는 독자가 독서과정에서 경험하는 심미적 경험을 이동 시점’(wandering point view)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 개념은 텍스트 내부에 있어서의 독자의 독서행위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전환활동이다. 텍스트는 시간성에 바탕을 둔 직선적 구조를 갖고 있다. 독자는 작품을 독서하는 과정에서 의미 방향에 대한 기대’(expectation)를 갖지만 작품은 독자의 기대에 부응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문장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고 직선적으로 나타나는 이미지를 연결하여 일관성 형성’(consistency-building)을 시도하고, 이를 통하여 작품을 구체화시킨다. 즉 독자는 의미방향에 대한 예상’(pretension)과 텍스트를 읽으며 형성된 과거에 형성된 기억’(retention)을 갖고 텍스트를 읽어나간다. 그러나 텍스트 내의 예기치 않았던 사건’(unexpected thing)은 독자의 예상을 수정’(modification)하고, 이미 일어난 일에 부여했던 의미를 재해석’(re-interpretation)하도록 한다. 즉 예상의 수정과 기억의 변형이라는 연속적인 의식의 전환’(transformation), 즉 시점의 이동 과정을 밟는다.

 

예상 기억 예기치 않은 사건 수정

↑                                                   ↓

의식의 전환 ←――― 재해석 ←――――――

 

이저는 또한 독자의 읽기에서 틈 메우기’(filling gaps)라는 활동을 중시했다. 이야기의 통일성은 틈 메우기라는 독자의 읽기 행위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란 논리적으로 연결이 잘 안되는 것, 시간적으로 연속성이 없는 것, 주제의 단절이 나타난 것 등을 말한다. 이런 틈들은 내재 독자에게 긴장감을 유발시키기 위한 수사학적 전략일 수 있으며, 구두 읽기와 듣기 문화를 배려한 의도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이저는 독자에 의한 틈 메우기야말로 문학적 의사소통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 요소라고 보았다: “독자가 틈을 메울 때 의사소통이 시작된다. 틈들은 본문과 독자의 전체 관계가 전개되는 일종의 주축(pivot) 역할을 담당한다.”

 

텍스트의 진행

――――( )――――( )――――→

        ↑        ↑

――――――― 독자의 틈메우기――――――→

 

이저가 제기한 예상,’ ‘예기치 않던 사건,’ ‘수정,’ ‘재해석이란 읽기 이론과 틈 메우기이론을 통합해 본다. 텍스트 내에 저자가 장치해둔 예기치 않던 사건기대했던 것이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삼고 두 이론을 합하여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텍스트 진행 ――――――( 미 등장 )―――――→

독자의 예상 기억 틈메우기 ――→ 수정

↑                                                     ↓

의식의 전환 ←――――― 재해석 ←――――――

 

이제 정리한 독자반응 접근방법 사용하여 누가-행전의 성령과 불 세례를 해석해본다. 누가-행전을 읽는 독자는(내포독자이든 현실독자이든) 먼저 세례 요한의 예수께서 베푸실 성령과 불 세례에 대한 언급을 읽게 된다. 그리고 독자는 예수께서 성령과 불 세례를 베푸실 것을 기대하며 누가-행전을 계속 읽어간다. 읽어가던 독자는 예기치 못한 일에 부딪힌다. 그것은 예수님의 성령 세례 언급에서 이 빠져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분명 독자는 세례 요한의 말을 신뢰하고 예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을 기대하고 그곳까지 읽어왔는데 정작 예수의 성령 세례 언급에서는 불이 사라져 버리는 읽기 경험을 하면서 당황하게되고 의문을 품게 된다. 그리고 이 사라져 생긴 틈(gap)을 메우기 위해 마음속에서 여러 가지를 시도하게 된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잠시 멈추었던 읽기를 다시 시작한다. 계속 읽어나가던 독자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대해 누가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읽어가다가 불같은 혀라는 문구를 발견하게 된다. 그 순간 예수의 성령 세례 언급에서 불이 사라졌던 것을 기억하게 되고 그 때 품었던 의문을 다시 떠올리며 그 의문이 불같은 혀를 읽으며 풀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누가가 불을 생략한 의도에 대해 잘못 내렸던 해석을 수정하게 된다. , 독자는 예수님의 성령 세례 언급에서 불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누가가 오순절 사건에 나오는 불에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승천 이야기 중 성령 세례언급에서 을 등장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된다. 누가는 예수의 언급에서 불을 생략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의문을 품게 했다가 오순절 이야기에서 다시 불을 등장시킴으로써 독자에게 그 사건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고 독자의 기대와 해석을 수정하여 예수의 성령 세례 언급과 오순절 이야기를 재해석하게 한다. 예수의 언급은 본래 성령과 불 세례였으나 누가는 해설자가 해설하며 펼쳐 나가는 이야기 속에서 불을 생략함으로써 틈을 만들어 독자의 능동적 읽기에 초대하고 다시 오순절 성령강림에 불을 등장시킴으로써 그 중요성에 주목하게 한 것이다. 독자는 회상과 수정과 재해석을 마치고 다시 앞으로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읽어나가던 독자는 다시 베드로의 예수의 성령 세례 언급에서 이 다시 누락된 것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틈메우기를 시도하며 오순절에 등장했던 불을 회상하게 된다. 이제 독자는 세례요한의 예수께서 베푸실 성령과 불 세례언급과 예수의 성령 세례 언급,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에 등장했던 불을 종합적으로 회상하게 된다. 독자는 세례요한이 소개했던 예수님께서 베푸실 세례는 성령과 불 세례였으며, 그런데 저자가 예수의 언급에서 의도적으로 불을 생략함으로써 독자의 능동적인 틈메우기를 유도했으며 성령이 임하는 오순절에 불을 등장시킴으로써 오순절의 불을 강조했고, 그후 베드로의 언급에서 다시 한 번 불을 생략함으로써 오순절의 불에 다시 주목하게 했다는 것을 알게된다. 지금까지 독자접근방식으로 누가-행전의 성령과 불 세례언급을 분석한 것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텍스트의 진행

세례요한의 언급 예수의 언급 오순절에 대한 언급 베드로의 언급

성령과 불 세례 성령( )세례 성령, 불같은 혀 성령( )세례

                               ↑                                           ↑

기대 ―――――→틈메우기――――→수정――――→틈메우기/회상

↑                          ↑                                                           ↓

의식전환 ←―――――――――――재해석←――――――――

독자의 읽기 오순절의 중요성

 

      

C. 요약

 

누가는 성령과 불 세례에 대한 세례 요한의 언급에서 완벽한 교차대구법을 사용했던 마태와는 삽입부분으로써 그 교차대구법의 균형을 깨뜨려 약화시켰다. 마가의 성령 세례와 마태와 누가의 성령과 불 세례중 어느 것이 본래 세례 요한의 말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편집 접근적 견해가 있었지만 그 견해들은 단지 추측에 불과하고, 분명한 것은 마가는 예수를 성령으로 세례주시는 분으로, 마태와 누가는 예수를 성령과 불로 세례 주시는 분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가 전해주는 성령과 불 세례의 의미에 대해 두 가지 세례, 두 효과,’ ‘한 가지 세례, 한 효과,’ ‘한 가지 세례 두 효과등 세 가지 설들이 제기되었는데 필자는 그 세례에는 악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심판의 세례의 의미는 없고, 그 세례는 이미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의인에게 주어진 한 가지 세례로서 증인되는 능력을 부여하는 한 가지 효과를 낳는 세례라고 보았다. 필자는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서 세례 요한의 성령과 불 세례 언급에 대한 누가의 약화된 교차대구법, 누가의 세례 이야기를 제시했다.

누가는 두 번째 승천 기사에서 예수의 성령 세례언급과 고넬료 가정에서 베드로의 성령 세례언급에서 을 생략한다. 학자들은 이러한 누가의 생략에 주목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것에 대해 해석을 가하지 못했다. 이러한 누가의 생략은 어떤 특별한 의도가 있었다. 왜냐하면 오순절 성령 강림 기사에서 누가는 불을 등장시키기 때문이다. 누가는 불같은 혀처럼 성령이 임했다고 묘사한 것이다. 누가는 오순절 사건 전의 예수의 성령 세례 언급에서, 그리고 오순절 사건 후의 베드로의 성령 세례 언급에서 불을 생략하지만, 가운데 우뚝 세운 오순절 사건에 성령과 함께 불을 등장시킨다. 누가는 세례 요한이 성령과 불 세례를 언급했던 것처럼 예수께서 하늘로 오르신 후 성령과 불 세례를 보내주셨음을 보고했다. 누가가 오순절 사건 전 후에 성령 세례 언급에서 불을 생략한 것은 오순절 사건의 성령과 불 세례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누가는 성령과 관련된 불 언급을 통해 비심판/구원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