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개괄적으로 본 누가의 불
지금까지는 누가-행전의 불에 대한 예비적 연구로서 구약과 유대 중간기 문헌의 불, 그리고 마가복음서, 마태복음서의 불이 연구됐다. 본 장부터는 누가-행전의 불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본 장에서는 누가-행전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불의 성격이 주로 비심판/구원임이 규정될 것이다. 누가는 복음서에서 ‘불’(toV pu'r)을 7회(3:9, 16, 17, 9:54; 12:49; 17:29; 22:55) 언급한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6회의 ‘불’(pu'r) 언급들(2:3, 19; 7:30; 28:2, 3, 5)을 합치면, 누가는 ‘불’(pu'r)에 관해 모두 13회 언급하는 셈이다. 본 장에서는 이러한 누가-행전의 불에 대한 언급들이 주제별(예, ‘심판의 불,’ ‘비(非) 심판의 불’)로 다루어질 것이다. 누가복음서에 등장하는 어떤 불에 대한 언급이 마가복음서와 마태복음서에 병행본문을 가지고 있을 때는 그 병행본문과 비교될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누가의 특징이 어떤 것인지가 규명될 것이다.
A. 누가복음서의 불
본 항에서는 누가복음서의 불이 개괄적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누가복음서의 불이 다루어지되 등장하는 순서대로 다루어지지 않고, 주제별로 묶여서 다루어질 것이다. 누가복음서의 불에 대한 연구는 누가는 복음서에서 오직 사망과 심판의 불만을 다루는 마가와 마태와는 달리 심판의 불뿐만 아니라 심판의 불에 대한 만류 그리고 이중적인 불이 등장함을 밝힐 것이다. 즉, 본 항을 통해 누가복음서에는 심판의 불과 비심판의 불이 함께 나타나지만 주로 비심판의 불이 나타난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1. 심판의 불
a. 현재 개인 종말적 심판의 불
누가는 ‘예루살렘으로 여행’(9:51-19:27) 중 재물에 관한 예수 말씀 중 ‘나사로와 부자 비유’ 가운데서 불을 말한다.
저가 음부(o& a/@dh")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h& flovx)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눅 16:24)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마가와 마태가 가지고 있지 않은 누가만의 14개 비유 가운데 하나이다. 학자들은 이 자료에 ‘L’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 비유 이야기 속에서 세상을 떠난 부자는 음부(a/@dh")의 불꽃(flovx) 속에서 고통을 당한다. flovx는 복음서에서 단 한 번, 이 본문에서 등장한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도 한 번 이 단어를 사용한다 (가시떨기 나무의 불꽃-7:30). 바울은 그의 전 서신에서 이 단어를 단 한 번 사용한다-“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살후 1:8). 히브리서 기자는 한 번-“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히 1:7), 계시록 기자는 세 번 사용한다-“그의 눈은 불꽃같고”(1:14; 2:18; 19:12). 이처럼 누가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사용하지 않은 ‘불꽃’(flovx)을 등장시킨다. 그런데 누가는 세례 요한이 언급한 ‘꺼지지 않는 불’ 이외에는 게엔나의 불을 말하지 않는다. 누가는 자기만의 자료에서(L) 게엔나를 단 한 번 언급하는데 그 언급에서는 불을 등장시키지 않는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게엔나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자를 그를 두려워하라” (눅 12:5). 다시 말하면 누가는 예수 말씀에서는 게엔나의 불을 등장시키지 않는다. 누가는 예수의 입을 통해 다만 본문처럼 하데스의 불꽃을 말할 뿐이다. 비록 게엔나의 불(pu'r)과는 달리 하데스에는 불꽃(flovx)이 있지만 악인들을 괴롭히기에는 충분하다. 누가는 이 개인적 종말을 당한 나사로 이야기에서 개인 종말적 심판의 불을 말한다.
b. 과거 집단적 심판의 불
누가는 예루살렘으로 향한 여행 중 말씀하신 예수의 강화(discourse) 중 ‘인자의 날’(h& h&mevra tou' ui&ou') 언급에서 불을 말한다.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pu'r)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눅 17:28-29)
에드워즈는 본문을 17:22-37에 묶어서 마태의 24:23; 24:26-27; 24:37-39; 24:17-18; 10:39; 24:40-41; 24:28과 함께 Q 46번 ‘Day of the Son of Man’ 항목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그는 17:28-29은 마태와 마가에도 나타나지 않는 누가만의 자료인 것을 지적하지 못했다.
누가는 제자들에게 ‘인자의 날’ 직전의 ‘인자의 날들’이 ‘롯의 날들’과 같을 것임을 말하며,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던 사람들에게 임했던 과거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불을 말한다. 누가는 단수인 ‘인자의 날’(h& h&mevra tou' ui&ou' tou' a*nqrwvpou)과 복수인 ‘인자의 날들’(ai& h&mevrai tou' ui&ou' tou' a*nqrwvpou, 개역에서는 ‘인자의 때’)을 구별한다 (눅 17:24, 26). 누가는 또한 복수인 ‘롯의 날들’(ai& h&merai Lwvt)과 단수인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h& h&mevra e*xh'lqen Lwvt)을 구분한다. 누가는 사람들이 미래의 인자의 날들에 과거의 ‘롯의 날들’처럼 죄악을 범하다가 미래의 ‘인자의 날’에 과거의 소돔 사람들이 갑자기 불로 죽임을 당한 것처럼 그렇게 미래에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누가의 이러한 구분은 우리로 하여금 ‘인자의 날들(복수)+인자의 날(단수)’이라는 그의 우주적 종말론의 구조를 가늠케 한다. 롯 이야기와 인자의 날 언급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죄악의 날들 심판의 날
과거 : 롯의 날들(복수) +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단수)-불 심판
∥ ∥ ∥
미래 : 인자의 날들(복수) + 인자의 날(단수)-------------( ? )
그런데 누가는 본문에서 인자의 날에 ‘심판의 불’이 하늘로부터 내릴지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누가는 과거에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pu'r)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라는 말에 미래의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kataV tau'ta e[stai h%/ h&mevra/ tou' ui&ou' a*pokaluvptetai, 17:30)라는 말을 연결할 뿐 인자의 날에 불이 내릴지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누가는 불을 사망과 심판의 불로 묘사하기를 피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마가와 마태의 글의 평행문에서 등장하는 불을 그가 누락시킨 것에서 드러난다. 그 평행문들은 변화산 하산 직후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막 9:14-29; 마 17:14-20; 눅 9:37-43). 이 평행문들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막 9:14-20 마 17:14-20 눅 9:37-43
9:14-18 예수님과 아비와의 첫 대화 17:14-16 예수님께 한 사람의 간청 (불 등장) 9:37 예수님께 한 사람의 간청
9:19 예수님의 탄식과 명령 17:17 예수님의 탄식과 명령 9:41 예수님의 탄식과 명령
9:20a 예수님께 온 귀신들린 아이 × 9:42a 예수님께 온
9:20b 귀신의 발광 × 귀신의 발광
9:21-24 예수님과 아비의 두번째 대화(불 등장) × ×
9:25-29 예수님의 귀신 쫓음과 17:18 예수님의 축사 9:42b 예수님의 귀신 쫓음
제자들과의 대화 17:19-20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대화 ×
9:43 사람들의 반응
비교한 바와 같이 누가는 마가와 마태가 평행문에서 등장시킨 귀신이 사용한 사망의 ‘불’을 누락시켰다. 마태와 누가가 이렇게 각각 다른 편집결과를 가져온 것에 대해 편집 접근들의 견해를 루쯔가 집약하여 설명을 시도했다. 1) 마태와 누가가 각각 독립적으로 마가의 본문을 편집했다. 2) 마태와 누가가 마가의 보다 오랜 다양한 사본들을 자료로 사용했다. 3) 마태와 누가는 막 9:14-29을 짧고 단순하게 만든 개정본을 사용했다. 루쯔는 3)을 지지했다. 그러나 루쯔는 마가와 마태가 함께 등장시키고 있는 귀신이 그 아이를 던져 넣었던 불을 누가가 누락시킨 것을 지적해내지 못했다.
살펴본 바와 같이 누가는 사망의 불을 누락시키기도 하며, 심판의 불에 대해서는 개인적 종말 차원의 불과 우주적 차원의 종말에 대해 언급하지만, 미래적이고 우주 종말적 심판의 불(주의 날의 심판의 불이나 게엔나의 불)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2. 비(非) 심판의 불
누가복음서에는 이상과 같은 심판의 불만 나타나지는 않고 마가와 마태에는 등장하지 않는 비(非) 심판의 불도 나타난다.
a. 저지된 심판의 불
누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여행 기사(9:51-19:27)의 첫머리에서 심판의 불을 만류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한다 (9:51-56). 이 부분은 공관복음서에서는 평행본문을 찾아볼 수 없는 누가만의 자료에 의한 것이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9:51-53)
누가는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을 앞서 보내셨다고 말한다. 보냄을 받은 제자들이 사마리아의 한 촌에 들어가 예수를 맞을 준비를 했지만, 그 촌의 사람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분개한 야고보와 요한이 그 마을을 불로 심판할 것을 제안한다.
i*dovnte" deV oi& maqhtaiV *I*avkwbo" kaiV I*wavnnh" eἶpan,
Kuvrie, qevlei" ei[pwmen pu'r katabh'nai a*poV tou' ou*ranou'
kaiV a*nalw'sai au*touv";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말했다.
주여, 저희가 불(pu'r)을 명하여 하늘로부터(a*poV tou' ou*ranou') 내려와
저들을 파멸시키기를 바라십니까? (사역, 눅 9:54)
이 구절은 본문비평적으로 이문을 갖고 있다. 인용한 내용을 가진 사본들은 p45,75 א B L Ξ 700* 등과 제롬 사본이다. 그런데 A C D K X Θ Π Ψ 등의 사본들은 au*touv"에 이어서 w&" kaiV *Hliva" e*poivhsen(엘리야가 행했던 것처럼)이라는 문구를 더 가지고 있다. 이 사본을 바탕으로 엘리야 모티브를 본문에 적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사본의 흐름은 마르시온의 디아테사론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제안하는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신다.
strafeiV" de e*petivmhsen au*toi'".
그분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셨다.
이 구절도 본문비평적으로 논란이 있는 본문이다. p45,75 a A B C L W X 등의 사본들은 au*toi'"로 이 절을 끝맺는다. 그런데 D itd 등의 사본들은 au*toi'"에 kaiV ei^pen ou*k oi[date oi@ou pneuvmatov" e*ste (그리고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도 모르는구나)를 덧붙인다. 그리고 K Π 1079 1242 1546 등의 사본들은 kaiV ei^pen ou*k oi[date oi@ou pneuvmatov" e*ste에 u&mei'"; o& gaVr ui&oV" tou' a*nqrwvpou ou*k h^lqen yucaV" a*nqrwvpwn a*polevsai a*llaV sw'sai(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요 구하러 왔노라)를 덧붙인다. 개역은 이 사본 계열을 따른 번역을 ‘( )’ 처리했다. 이 사본에 따르면 예수님의 사역은 제자들이 상상했던 심판의 사역이 아닌 생명을 살리는 사역이었다. 필자는 a 사본 계열을 따라 연구한다.
누가는 야고보와 요한이 제안한 사마리아에 심판의 불을 내리는 것을 예수께서 꾸짖어 만류하고 거부하셨다고 말한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예수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심판의 불이 내리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신다.
누가는 사마리아에 대해 호의적이다. 본문에서 누가는 사마리아에 심판의 불을 내리는 것을 예수께서 만류하셨다고 전한다. 누가는 선한 이웃 비유에서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는 이웃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지적한다 (10:25-37). 누가는 이적 이야기에서 예수께서 치료하셨던 문둥병자 열 명 중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 예수께 사례하였다고 전한다 (11:16). 누가는 예수의 승천 선교 명령에서 사마리아를 선교 대상지역으로 선포하셨다고 보고한다 (행 1:8). 그리고 누가는 빌립에 의한 사마리아 선교를 기록한다 (행 8:5-26). 우리는 누가가 불 이야기를 하면서 ‘성령과 불 세례’ 언급(3:16) 이외에는 이 심판의 불 만류 이야기를 제일 먼저 언급한다는 것에 유의해야한다.
누가에게 있어서 ‘하늘로서,’ 혹은 ‘하늘로부터’(a*poV tou' ou*ranou')라는 문구는 심판과 관련되지 않는다. 그 문구가 누가문서에서 심판과 관련되어 사용될 때는 오직 과거의 심판을 말할 때이다 (소돔의 불심판-눅 17:28-29). 누가는 ‘하늘로서,’ ‘혹은 하늘로부터’라는 문구를 오직 좋은 일과 관련하여 사용한다. 누가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며 예수를 인정했다고 전한다 (눅 3:22). 사단이 패배하여 하늘로부터 번개처럼 떨어져 버린다 (눅 10:18). 누가복음서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표적은 하늘로부터 온다 (눅 11:16). 하늘로부터 오는 선지자를 믿어야만 한다 (눅 20:4-5). 종말에 하늘로부터는 큰 징조들이 있을 뿐이다 (눅 21:11). 하늘로부터 천사가 내려와 예수의 기도를 돕는다 (눅 22:43).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처럼 하늘로부터 오실 것이다 (행 1:11). 하늘로부터 성령이 오신다 (행 2:2). 하늘로부터 예수의 영광의 빛이 비춘다 (행 9:3; 22:6; 26:13). 환상 속에서 하늘로부터 이방인 선교를 깨우치기 위한 그릇이 내려온다 (행 11:5). 그리고 하늘로부터 이방인 선교를 명하는 음성이 들린다 (행 11:9). 하나님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도 하늘로부터 비를 내려주신다 (행 1:17). 본문에서도 역시 예수께서는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심판하는 것을 만류하신다 (눅 9:54). 굴더와 그린은 예수님의 일행의 사마리아 여행을 엘리야의 마지막 행선과 관련지어 주석 했다. 그러나 에반스는 그 이전에 엘리야 모티브를 본문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 붙여진 모형론(This is wrongly called typological)이라고 비판하고 그 이유를 본문에서 엘리야처럼 불을 내리는 것 같은 행동은 거절당하기(repudiate) 때문이라고 말했다. 누가는 예수의 사역이 소돔성을 불로 심판하듯 세상을 불로 심판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즉, 누가는 소돔성의 불심판과 예수의 평화적 사역을 대조시키신다. 예수의 지상사역 기간 동안 하늘로부터 괴롭힘을 받는 것은 악한 영적 존재이다 (눅10:18).
b. 분리시키는 불
누가복음서에는 심판의 불도 아니고 비(非) 심판의 불도 아닌 ‘분리시키는 불’(separating fire)이 등장한다.
Pu'r h^lqon balei'n e*piV thVn gh'n, kaiV tiv qevlw ei* h[dh a*nhvfqh.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눅 12:49)
누가는 혼인집에서 돌아온 주인과 영접하는 종의 이야기를 통해 미래의 종말을 말하다가 본문에서부터 현재의 이야기로 되돌아온다. 야고보와 요한이 하늘에서 불을 내려 사마리아의 한 촌을 태우겠다는 것을 꾸짖으셨던 예수께서 이번에는 자기가 이 세상이 온 목적이 땅에 불을 붙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누가는 첫 문장의 목적어 pur'를 맨 앞에 놓음으로써 그 단어를 강조한다. 그리고 h[dh a*nhvfqh(a*navptw; 이미 붙었으면)를 두 문장의 가장 뒷부분에 놓음으로써 그 불이 이미 붙어있기를 바라는 것을 강조한다. 예수께서는 아직 그 불이 땅에 붙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땅에 던지기 원하셨던 불을 심판의 불로 보았다. 놀랜드는 이 불을 확실하지는 않지만 ‘종말적 정화와 심판에 대한 묵시적 언어’로 추측했다. 보크도 눅3:9, 17, 9:54, 17:29을 비교하면서 이 불이 심판을 의미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심판의 불이라고 제시한 9:54의 불 자체는 심판의 불이지만 문맥상 그 불은 예수께서 거부하시는 불이다. 굴더는 누가는 여기서 불은 임박한 심판을 의미하며 오순절 사건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았다. 그린도 역시 이 불을 심판의 은유적 표현으로 보았다. 모리스는 이 불을 ‘불신자들에 대한 심판’을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이 불을 심판이 아닌 다른 불로 해석한 사람들도 있었다. 피츠마이어는 이 불을 예수께서 대면할 ‘시험과 위기의 불’(the fire of testing and crisis)로 보았다. 풀루머는 이 불을 ‘분열과 싸움(division and strifle)을 일으키는 성결의 불’로 해석했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풀루머의 해석은 누가의 본문에 의해 지지를 받을 수 있다. 누가는 12:49과 51을 대조하면서 예수께서 세상에 불을 던지러 왔지 화평을 주려 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 결과는 양편으로 분리되어(separated) 나누어지는 분쟁이다.
A Pu'r ἦlqon balei'n e*piV thVn gh'n, (눅 12:49)
B dokei'te o@ti ei*rhvnhn paregenovmhn douVnai e*n th'/ gh'/; (눅 12:51)
A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bavllw) 왔노니 (눅 12:49)
B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divdwmi)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눅 12:51)
그런데 누가의 이 대조는 마태의 평행문과 비교할 때 약간 누그러뜨려진 대조이다. 이것은 마태의 평행문과 비교해 보면 드러난다. 에드워즈는 누가의 본문 12:49-53의 평행본문으로 마 10:34-36을 제시하며 그 자료를 ‘Q 30 Divisions in Households’로 분류했다.
MhV nomivshte
o@ti h^lqon balei'n ei*rhvnhn e*piV thVn gh'n΄
ou*k h^lqon balei'n ei*rhvnhn a*llaV mavvcairan.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bavllw)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bavllw) 왔노라 (마 10:34)
마태는 예수께서 세상에 화평을 던지러(bavllw) 온 것이 아니고, 검을 던지러(bavllw) 오셨다고 말한다. 그런데 누가는 예수께서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divdwmi) 온 것이 아니고 불을 던지러(bavllw) 오셨다고 말한다. 만약 누가가 B에서 마태처럼 예수께서 세상에 ‘화평을 던지러’(bavllw) 왔다고 표현했다면 ‘불을 땅에 던지러’(bavllw)와 함께 더 강한 대조가 발생했을 것이다. 이렇게 누가가 ‘bavllw와 bavllw의 대조,’ ‘검과 화평의 대조’에서 ‘bavllw와 divdwmi 대조,’ ‘불과 화평의 대조’로 약화시킨 이유는 그가 불의 성격이 화평과 반대되는 것만이 아님을 즉, 심판의 불만이 아님을 염두에 둔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뎃은 이 불을 예수의 오심에 의해 사람들을 양편으로 나누는(division) ‘영적 동요’(spiritual excitement)라고 보았다. 고뎃의 통찰은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라는 어구의 지지를 받는다. 이렇게 누가는 야고보와 요한이 끌어내리고 싶다던 오직 심판만을 위한 불을 거부한 것이다. 이러한 누가의 시각은 예수께서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신 것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
살펴본 바와 같이 누가는 복음서에서 심판의 불을 말하긴 하지만 사망과 우주적-종말적 심판의 불만 말하는 마가와 마태와는 달리 비우주적인 심판의 불로 약화시켜 말한다.
B. 사도행전의 불
복음서에서는 비우주적 심판의 불과 비심판의 불, 중립적인 불을 말하던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적극적으로 구원의 불을 말한다.
1. 구원의 불
누가는 스데반 집사의 공회 설교에서 불을 말한다 (7:30-35). 본문은 하르낙의 자료접근에 의하면 ‘예루살렘-안디옥 자료’에 속하며, 슈츠에 의하면 ‘예루살렘의 12사도 자료’에 속한다. 본문의 양식은 설교로 분류된다. 그리고 본문은 설교 중에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로 제시된다. 누가는 이 뒷받침을 위한 근거를 위해 구약으로부터 인용한다. 7:31은 출 3:6를 직접인용하며 (“주의 소리 있어”), 7:33f., 7-10은 출 3:5을 직접 인용한다 (“주께서 가라사대”).
누가의 스데반 설교 중 모세의 소명이야기 인용문은 구조에 있어서 MT와 다소 다르다.
출애굽기 (MT LXX 개역) 사도행전(GNT 개역)
A 모세가 . . .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사십 년이 차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그에게 보이거늘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B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주의 소리 있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C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D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의 신을 벗으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E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내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을 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내가 내려와서
F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G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H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시방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3:1-10)
누가는 MT의 B, F, G를 생략하며, C와 D의 순서를 바꾼다. MT에서 G는 E의 반복이며 이는 강조를 의미한다. LXX는 D에서 ‘ *EgwV ei*mi o& qeoV"’라고 말하는데 누가는 ei*mi를 생략하여 ‘ *EgwV o& qeoV"’라고 말한다. 이런 생략으로 더 직접적이고 구어체적인 문장이 됐다. 이런 구어체적인 문장은 본문이 원래의 스데반 설교를 현장감있게 전해준다는 의미이기도하다.
누가는 모세의 소명기사를 간략하게 전개한다. 이러한 누가의 간략하게 함은 e*n flogiV puroV" bavtou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LXX의 e*n flogiV puroV" e*k tou' bavtou에서 e*k tou'를 생략하여 e*n flogiV puroV" bavtou라고 기록한다. 그는 30절에서 천사(o& a[ggelo")가 가시나무떨기 불 꽃 가운데서 나타났다고(w[fqh: o&ravw의 과거) 말한다. 그런데 그는 31절에서는 천사의 소리가 아닌 ‘주의 소리’(h& fwnhv kurivou)가 있었다고(e*gevneto: givnomai의 과거) 말한다. 그리고 32절에서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하나님이셨다고 말한다( *EgwV o& qeoV"). 종합해 보면 천사가 불꽃 가운데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에게 전달한 것이다.
Kai** plhrwqevvntwn e*tw'n tesseravkonta w[fqh au*tw'/ e*n th'/ e*rhvnw/ tou' o[rou Sina'
a[ggelo" e*n flogiV puroV" bavtou. o& deV Mwu<sh'" i*dwVn e*qauvmazen toV o@rma΄
proVsercomevnou deV au*tou' katanoh'sai e*gevneto fwnh' kurivou, *EgwV o& qeoV"
tw'n patevrwn sou (행 7:30-32a)
계속되는 설교에서 누가는 모세의 소명기사를 해석하고 정리하여 말한다.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행 7:35).
그는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 나타났던 천사의 손을 통해(e*n ceiriV a*ggevlou)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속량하는 자, lutrwthv")로 세웠다고 말한다. 즉, 누가는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 현현하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사명을 부여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다고 말한다. 본문에서 불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구원자로 보내는 매개체로 사용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불은 과거 구원의 불이다.
2. 구원 표현의 불
누가는 바울의 에베소 선교이야기에서 마태의 ‘종말적으로 가라지를 심판하는 불’(동사형 katakaivw, 마 13:30))을 ‘구원 표현의 불’(동사형 katakaivw)로 바꾸는 듯 하다.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e*nwvpion pavntwn) 불사르니(katakaivw)
(행 19:19)
이 사건에 등장하는 불은 물질적이고 실제적인 불이다. 그러나 누가가 그 실제적인 불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즉, 그들이 마술책을 불에 태움으로써 자신들이 구원받았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모든 사람 앞에서’라는 말에서 그 불의 신학적 의미 함유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누가-행전에서 ‘모든 사람 앞에서’(e*nwvpion pavntwn)라는 말은 회심자들이 비신앙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신앙을 고백했다(e*xomologiouvmenoi)는 말을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e*nwvpion pavntwn은 GNT(헬라어 신약)에서 오직 누가 만의 용어이다. 게다가 e*nwvpion pavntwn은 고백적인 용어이다. 누가 문서에는 e*nwvpion pavntwn란 문구가 3회 등장하는데 본문 이외에 눅 8:47, 행 27:35에 등장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e*nwvpion pavnto") 고하니(a*phvggeilen)
누가는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고 나았음을 고했는데(a*paggevllw) ‘모든 사람 앞에서’(e*nwvpion pavnto") 고했다고 전한다. 본문도 행 19:19처럼 고백적인 상황이다. 행 27:35에서는 바울이 표류하고 있는 배 안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e*nwvpion pavntwn) 음식을 먹음으로써 자기가 선포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의 신실성에 대한 믿음을 행동으로 고백하고 증거 한다. 이외에도 개역에 ‘모든 사람 앞에서’라는 문구들이 5회 등장하지만 원문에서 차이를 보인다. 마태는 베드로가 숯불을 앞에 두고 모든 사람 앞에서(e[mprosqen pavntwn) 예수를 부인했다고 기록한다 (마 26:70). 마가는 중풍에 걸려던 사람이 예수의 명령에 따라 침상을 들고 ‘모든 사람 앞에서’(e*nantivon pavntwn) 나갔다고 전한다 (막 2:12). 누가는 베드로가 미문에 있던 장애인을 치료한 후 예수 이름이, 예수로 난 믿음이 ’모든 사람 앞에서’(a*pevnanti pavntwn) 그 사람을 치료했다고 기록한다 (행 3:16). 누가는 바울이 영문 층대 설교에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proV" panta" a*nqrwvpuo") 증거하는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셨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행 22:15).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모든 사람 앞에서’(e*nwvpion pavntwn a*nqrwvpwn)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권면한다 (롬 12:17). 살펴본 바와 같이 e*nwvpion pavntwn이란 문구는 누가 만의 문구이며 신앙고백적인 상황에서 사용됐다.
또한 누가는 ‘모든 사람 앞에서’(e*nwvpion pavntwn)라는 말을 ‘하나님 앞에서’(e*nwvpion tou' qeou')라는 말과 동일어로 사용했을 것이다. e*nwvpion tou' qeou라는 말은 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사도행전에 3회 등장한다 (4:19; 7:46; 8:21).
마술 하던 사람들이 ‘모든 사람 앞에서’(e*nwvpion pavntwn) 마술책을 태운다는 것은 회심자들이 비진리, 거짓을 좇아 살았던 지난날의 삶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행동으로 회개하고 청산하는 상징적인 몸짓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등장한 불은 마술책에 대해서는 심판의 불이지만 그 책을 태운 사람들에게는 비종말적인 구원의 고백과 신앙 표현의 불일 가능성을 내포한다.
3. 분리시키는 이중적인 불
누가는 바울의 로마로의 여행 보고에서 멜리데라는 섬에 불을 피운다.
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비가 오고 날이 차매
불(purav)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행 28:2)
바울이 한뭇 나무를 거두어 불(purav)에 넣으니
뜨거움을 인하여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행 28:3)
바울이 그 짐승을 불(pu'r)에 떨어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행 28:5)
물론 본문은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보고이고, 등장하는 불은 물질적인 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가 이 불에 신학적 의미를 담았을 가능성은 있다. 이 사건 보고를 ‘발단-전개-갈등(혹은 절정)-해소’라는 이야기 줄거리(plot)에 따라 전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발단: 폭풍(유라굴로)으로 배가 파선되었으나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멜리데라는 섬에 오른다.
2. 전개: 폭풍 속에서 살아 나온 바울은 멜리데 섬사람들에게 영접을 받는다.
섬의 날씨는 비가 내리며 춥다.
섬사람들은 바울을 위해 불을 피워준다.
이 전개까지를 그레마스의 행위자 모델(Greimas' actantial model)로 표현해 볼 수도 있다. 그레마스는 의미작용의 구조란 상정된 두 대상사이의 대립관계와 계층관계에 의해 규정되어질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런 대립과 계층의 관례로부터 차이점의 본질과 관계의 망을 고려하여 제시된 ‘의미작용의 기본적 구조’로 불리는 모델인 기호학적 사각형을 제시했다.
A ← ․․․․ → B ․․․반대관계
↔ 모순관계
n-B ← ․․․․ → non-A → 전제 혹은 포함관계
위의 도식에서 알 수 있듯 의미작용은 대립되는 관계에 의해 그 형태를 포착하는 것으로 A 대 B의 상태에서 출발하여 이 대립관계는 동질성을 부정하는 모순 관계를 거쳐 다른 편에 이르게 된다. 이런 기호학적 사각형의 구성은 의미 구조의 기본을 이루며, 이것은 표층 층위인 이야기체 층위에서 행위자 모델과 이야기체 도식으로 전환되어 나타난다.
송출자 → 객체 → 수령자
↑
반대자 → 주체 → 돕는자
그레마스 행위자 모델로 본문을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SENDER → OBJECT → RECEIVER
하나님 육지(구원) 바울
불
↑
OPPONENT → SUBJECT → HELPER
유라굴로 하나님의 뜻/계획 토인들
비, 추운 날씨
3. 갈등: 그런데 바울이 섬사람들이 피운 불에 나무를 집어넣는 순간
독을 품은 뱀 한 마리가 그 나무에서 나와 바울의 손을 문다.
섬사람들은 바울이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지만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한다고 판단한다.
뱀의 등장과 함께 바울을 돕던 자들이 바울을 적대하며
바울을 ‘살인한 자’로 몰아세운다.
4. 해소: 그러나 바울은 그 뱀을 불에 떨어뜨려 태워버리고,
뱀의 독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자 섬사람들은 다시 바울을 선대하며 바울을 신이라고 생각한다.
누가는 바울의 손을 물었던 뱀이 독사(h& e[cidna)였다고 말한다. 누가는 복음서에서도 독사를 말한다.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e[cidna)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눅 3:7)
세례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을 ‘독사들(복수형)의 자식들’이라고 쏘아붙인다. 여기서 독사는 사람들이 그 영향력 아래 있는 어떤 존재들을 상징한다. 이 ‘상징화된 독사’(symbolized viper)의 원관념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마태는 이 세례 요한의 독설을 두 번 더 말한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 3:7)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 12:34)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마태는 23:33에서 독사의 새끼들을 뱀들과 동일시한다. 그리고 마태가 말하는 독사의 자식들, 혹은 뱀들은 모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상징한다. 그러나 마태는 ‘독사들’이 무엇을 상징하는 지를 밝히지 않는다. 누가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모든 사람들(laov")을 ‘독사들의 자식들’이라고 부른다. 누가는 마태처럼 독사들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독사들이 부정적인 존재들을 상징하는 것만은 틀림없다.
연구자들은 이 멜리데의 불 이야기에 등장하는 뱀이 사실적 뱀이지만 상징성을 띌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간과하고 이 뱀에 독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에만 관심을 쏟았다. 이러한 편향성은 본문의 문학성보다는 역사성에 치우친 연구자들의 연구자세 때문이다. 이 편향적 관심은 오늘날 멜리데섬에는 독사(viper)가 없다는 사실에서 더 촉발된다. 폴힐은 로버트슨의 말을 인용하며 그 섬은 수세기 동안 인구 밀집지역이었기 때문에 독사가 생존할 수 있는 확률이 희박하다고 말한다. 콘첼만은 독사는 물고 매달리지 않기 때문에 본문이 말하는 뱀은 독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누가가 이 이야기에서 의도하는 것은 ‘진짜 이적’(a genuine miracle)이 일어났음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약 그 뱀이 독사가 아니었다면 그 독사가 아닌 뱀에 물린 바울이 죽기를 바랐던 섬사람들이 우스꽝스런 사람들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고 바울이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은 것은 당연한 사실이 될 것이고, 신으로 추앙 받을 만한 것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본문은 코메디극 대본으로 전락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뱀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을 품은 독사였다. 이렇게 본문에 등장하는 뱀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큰 소득을 얻지 못했다. 우리는 이 뱀이 독사였느냐 아니었느냐의 논의에서 더 나아가 그 뱀이 무엇인가를 상징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간파해야 한다.
마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뱀이라고 몰아붙인다. 그런데 누가는 뱀(o& o[fi")을 사람들이 아닌 제자들을 대적하는 영적 존재로 그린다. 누가 복음서의 뱀은 사단, 원수, 귀신들과 같은 범주에 놓이고, 제자들에 의해 밟히고 제어 당하며, 그들에게 항복하는 영적 존재이다.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o[fi")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눅 10:18-20)
누가는 ‘뱀들과 전갈들을 밟는 것’과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하는 것’을 평행법적으로 동일시하고 있다. 다시 말한다면, 누가에게 있어서 뱀은 원수인 사단의 세력인 것이다. 또한 뱀은 누가복음서에서 아비된 자가 아들에게 주지 못할 나쁜 것으로 등장한다.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o[fi")을 주며 (눅 11:11)
누가는 복음서를 통해 하나님과 제자들을 대적하는 사단과 같은 범주에 놓이는 즉, 사단의 세력인 독사들 또는 뱀들을 등장시킨 후, 사도행전에서 멜리데 이야기를 통해 바울은 구원받고, 뱀은 불에 던져짐을 말한다. 뱀에게 토인들이 피운 불은 심판의 불이지만, 바울에게 그 불은 구원의 불이다. 이 장면을 행위자 모델로 표현해 보면 다음과 같다.
SENDER → OBJECT → RECEIVER
하나님 불 바울
↑
OPPONENT → SUBJECT → HELPER
뱀(사단의 세력) 공의 불(성령상징?)
토인들(돕는자에서 돌변) 토인들
(다시 돕는자로 돌아옴)
그렇다면 누가는 왜 ‘멜리데의 불’ 사건 보고를 자기의 자료에서 선택하여 바울이 로마에 당도하기 직전 부분의 무대에 올려놓은 것인가? 누가는 이 ‘멜리데의 불’ 이야기를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전조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 누가는 이 ‘전조적 사건’을 통해 앞으로 바울의 로마 선교를 통해 바울을 대적하는 악한 뱀같은 존재들은 심판을 받아 패배하고 로마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즉, ‘멜리데의 불’ 이야기는 앞으로 바울의 선교로 인해 믿고 구원받을 사람과 사단의 영향 아래 믿지 않고 심판 받을 사람이 나누어 질 것임을(행 28:24-25) 미리 말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멜리데의 불은 심판과 구원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띄는 불이라고 볼 수 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사도행전의 불은 현재, 과거의 구원의 불, 구원과 심판을 가르는 이중적 불이다.
C. 요약
누가는 복음서에서 심판의 불을 말하긴 하지만 사망과 우주적-종말적 심판의 불만 말하는 마가와 마태와는 달리 비우주적인 심판의 불로 약화시켜 말한다. 누가는 복음서에서 마가와 마태의 평행본문에서 등장하는 사망의 불을 누락시키기도 하며 (눅 9:37-43), 심판의 불에 대해서는 개인적 종말 차원의 불과 우주적 차원의 종말에 대해 언급하지만 미래적이고 우주 종말적 심판의 불(주의 날의 심판의 불이나 게엔나의 불)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나아가 누가는 복음서에서 마가와 마태가 언급하지 않은 비심판의 불도 말한다. 누가는 예루살렘 여행 기사(9:51-19:27)의 첫머리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제안한 사마리아에 하늘로서 심판의 불을 내리는 것을 만류하시는 예수의 말씀을 기록한다. 이 심판의 불 만류 기사는 세례 요한의 ‘성령과 불 세례’를 제외하면 누가가 복음서에서 가장 먼저 언급하는 불이 등장하는 기사이다. 누가는 복음서에서 심판의 불도 아니고 비(非) 심판의 불도 아닌 ‘분리시키는 불’을 등장시킨다. 누가는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불을 땅에 던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눅 12:49). 그런데 이 본문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 마 10:34을 비교해 보면 누가가 마태의 ‘bavllw와 bavllw의 대조,’ ‘검과 화평의 대조’에서 ‘bavllw와 divdwmi 대조,’ ‘불과 화평의 대조’로 약화시킨 것이 드러나며, 이는 그가 그 불의 성격이 화평과 반대되는 것만이 아님을, 즉 심판의 불만이 아님을 염두에 둔 때문이었을 것이다. 누가는 “분쟁케 하려 함이라” 라는 문구를 통해 이 불이 ‘분리시키는 불’임을 드러낸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적극적으로 구원의 불을 말한다. 그는 스데반 설교 중 모세의 소명 이야기 인용문에서 하나님께서 불을 통해 현현하시고 모세 를 구원자로 세웠음을 말했다. 즉, 누가는 가시덤불에 붙었던 불을 ‘구원의 불’이라고 말한 것이다. 누가는 또한 바울의 에베소 선교 이야기에서 마술을 하던 사람들이 마술책을 “불살랐다”라는 말을 통해 ‘구원 표현의 불’을 말한다고 볼 수도 있다. 누가는 멜리데 섬의 불을 통해 동시에 심판의 불과 구원의 불이 되는 이중적인 불을 제시한다고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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