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Pentecostal Missionary to South Korea, John Wesley Hurston:
the Mentor and Coworker of Yonggi Cho
이창승
2025년 6월 2일/ 2025년 6월 28일
I. 들어가는 말
“우선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의 선교 단체(FIRST AND FOREMOST a missionary body).” 이 어구는 당시 총회장이었던 웰취(J. W. Welch)가 1925년 총회에서 미국 하나님의 성회를 묘사한 것이다. 더하여 웰취는 “어떤 사람이든 성령으로 충만하면 이론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로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사망의 어둠과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가지고 가거나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하나님의 성회가 성취한 것들 중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해외선교였다. 그러한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선교지향성은 그 교단의 예산에서도 드러난다. 1914년에 10,000달러였던 미 하나님의 성회의 해외선교비는 46년 만인 1960년 즈음에 5,000,000달러까지 증가했었다.
그런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선교 중심 신앙과 노력은 대한민국 선교에서 만개하고 좋은 열매를 맺었다. 특히 대한민국에 대한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선교는 조용기 목사라는 걸출한 세계적 신앙 지도자와 역사상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낳았다. 그런데 그런 미 하나님의 성회의 성과는 1958년부터 1969년까지 그리고 1976년부터 1981년까지 내한 선교사였던 존 웨슬리 허스톤(John Wesley Hurston), 한국명, “허요한”을 통해 가능했다. 김익진은 조용기 목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선교사는 루이스 피 리차드(Louis P. Richards)와 존 허스톤이었다고 보았다. 그 둘 중에서 리차드는 주로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조용기가 순복음신학교에 들어가기까지 영향을 주었다면, 허스톤은 주로 조용기와 함께 십수 년을 함께 사역하면서 영향을 주었다.
허스톤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30년사에 제16대(1980) 순복음신학교 교장으로, 그리고 순복음중앙교회의 교역자로 소개되었다. 또한 30년사는 버터필드의 글을 그대로 번역하여 허스톤에 대해 짧게 기술했다. 그 후 그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가 2003년에 발표한 “희년 50인” 중 선교사 부문에 선정되었다. 그는 그리고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50년사가 시도한 내한 선교사들에 대한 간단한 소개들 중에 그의 부인 그리고 딸의 사진과 함께 등장했다. 50년사는 30년사의 기술에 허스톤의 베트남 선교와 그 이후 내한 선교에 대해 한 문장을 짤막하게 덧붙였다.
한국 오순절 역사에 대한 학문적 연구들에서 허스톤이 등장하기도 했다. 김익진은 1958년에 내한 한 랄프 버드(Ralph Byrd) 목사와의 전국적인 전도집회을 기술하며 허스톤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익진의 허스톤 언급은 1964년에서 멈추었다. 최재웅은 허스톤의 1958년 내한 전도집회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했을 뿐이고, 1961년 순복음중앙회관 봉헌식에 대한 허스톤의 보고를 각주들에서 언급했을 뿐이다.
허스톤은 2003년 미국에서 Divine Desperation을 저술했다. 그 책은 허스톤의 자서전의 성격을 띤 것이었지만, 온전한 자서전은 아니었다. 탄생과 성장은 다루지 않고,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의 한 일화를 소개하고, 그리고 대학생 시절의 일들을 회상했다. 라이베리아 선교와 베트남 선교도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책의 대부분은 내한 선교, 특히 조용기 목사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기술되었다. 그 책은 한세대학교 도서관이나 국내 다른 도서관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다행히 그 책의 전자문서본이 구글북에 올려져 있으나, 저작권 문제로 라이베리아 선교까지만 공개되어 있다. 나머지 부분이 아쉬웠는데, 2003년에 그 책이 출판되기 전에 허스톤이 여의도순복음교회에 한국 부분을 발췌하여 보냈고, 그 부분은 순복음가족신문에 2003년 5월부터 17회에 걸쳐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본 글은 그동안의 연구들과 언급들을 뼈대로 삼고, 미 하나님의 성회 해외선교국 도서관 사서(AGWM Archivest) 크리스타 티쿠트(Christa Teachout)가 보내준 자료들을 첨부하여 조용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존 W. 허스톤의 전 생애의 복원을 시도한다.
II. 탄생과 오순절주의자로 성장
존 W. 허스톤은 1922년 7월 29일에 미국, 조지아, 무스코지 카운티, 컬럼버스(Columbus, Muscogee County, Georgia)에서 둘째 아이로 태어났다. 컬럼버스는 플로리다주 북쪽에 접해 있는 조지아주 중서부, 채터후치 강(Chattahoochee River) 연안에 위치하며, 서쪽은 앨라배마주에 접한다. 지명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했던 이탈리아 출신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의 이름에서 따왔다. 1920년에 컬럼버스의 인구는 31,125명이었다.
그의 부친은 윌리엄 허스톤(William Wade Hurston)이었으며, 그의 모친은 이스터 허스톤(Easter Jane Duk Hurston)이었다. 부친은 1897년 4월 27일에 앨라바마, 데일 카운티, 그림스(Grimes, Dale County, Alabama)에서 태어나 1 Nov 1956년 11월 1일 59세로 조지아, 머스코지 카운티, 컬럼버스(Columbus, Muscogee County, Georgia)에서 세상을 떠났다. 모친은 1897년 1월 15일에 태어나 1978년 10월 28일에 81세의 일기로 컬럼버스, 머스코지 카운티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누나 애이미 애반젤린 허스톤(Aimee Evangeline Hurston)은 1920년에 태어나 2004년에 사망했다.
허스톤은 1939년에 컬럼버스의 조던 직업 고등학교(Jordan Vocational High School)를 졸업했다. 그 학교는 1906년에 미국에서 첫 번째로 공교육 체계 안에 직업 교과과정과 학문적 교과과정을 통합한 실험적 학교로 세워졌다. 지역 경영자이며 자선사업가, 그리고 컬럼버스 공립학교 협회의 이사장이었던 건비 조던(G. Gunby Jordan)이 최초의 교정을 위한 땅(29th Street)과 만 달러를 기부했다. 그 학교는 컬럼버스 공업 고등학교(Columbus Industrial High School)로 명명되었다. 그런데 허스톤이 고등학교 2학년이었을 1937년 3월 12일에 하워드 아베뉴 3200(Howard Avenue)로 이전하면서, 첫 교정을 위한 땅을 기증했던 건비 조던을 기리기 위해 조던 보케이셔널 하이 스쿨(Jordan Vocational High School)로 개명되었다. 그 새롭게 출발한 학교는 백인들뿐만 아니라 흑인들도 수용했다.
허스톤은 1938년 고등학교 3학년 때에 성령침례를 받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그는 다니던 하나님의 성회 교회의 제단 옆에 무릎을 꿇었고, 몇 성도들이 그에게 안수하며 기도했다. 오래지 않아, 그는 방언으로 몇 마디를 말했다. 그러자 한 성도가 “허스톤, 성령침례를 받았어!”라고 외쳤다. 그는 별다른 것을 느끼지 못했지만, 그 성도가 말한 것을 인정했다. 그때 그는 방언은 성령침례 안으로 들어가는 문과 같은 “증거”(evidence – an entry point into the baptism)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현재 컬럼버스에는 3개의 하나님의 성회 교회들이 존재한다. Trinity Assembly, Edgewood Assembly of God, 그리고 Bethel Tabernacle Assembly of God이 그 교회들이다. 엣지우드 어셈불리 오브 갓은 1949년에 설립되었다. 벧엘 타버나클 어셈블리 오브 갓은 설립연도는 제시하지 않고 현 담임목사가 30년 동안 그 교회에서 목회해 왔음을 알리고 있다. 트리너티 어셈블리가 가장 규모가 큰 교회인 것 같은 데, 홈페이지에 역사에 나타나지 않는다. 허스톤이 트리너티 어셈블리를 다녔을 가능성이 크다.
III. 선교사역을 위한 준비: 오순절 신학 수학과 목회
허스톤은 1943년에 미주리 주, 스프링필드(Springfield, Missouri)에 있는 중앙성경대학(Central Bible College)을 졸업했다. 센트럴 바이블 칼리지(CBC)는 하나님의 성회가 1922년에 총회 본부가 있는 미주리주, 스프링필드, 노스 그랜트 아베뉴(North Grant Avenue, Springfield, Missouri)에 세운 학교였다. 그 학교는 2013년 가을에 에반젤 유니버서티(Evangel University) 그리고 어셈블리즈 오브 갓 테올로지칼 세미나리(Assemblies of God Theological Seminary)와 통합되어 하나의 학교 에반젤 유니버서티(Evangel University)를 형성하게 되었다. 다른 말로, 센트럴 바이블 칼리지는 당시 미국 하나님의 성회 소속 성경학교들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학교였으며, 허스톤이 그 중심적인 학교에서 정통 오순절신학을 공부한 것이다.
1940년 앨범 64쪽에 허스톤의 사진이 146명 1학년(Juniors) 학생들 가운데 등장한다. 당시 총장은 교단 총회장 어네스트 윌리엄스(Ernest S. Williams)이었으며, 이사진에는 교단 총무 로스웰 플라우어(J. Roswell Flower), 해외선교국장 노엘 퍼킨(Nel Perkin), 유럽 오순절 운동의 창시자들 중 하나였었으며, Pentecostal Evangel의 편집장이기도 했던 스탠리 포르드샴(Stanley Frodsham) 등 쟁쟁한 미국 하나님의 성회 인물들이 포진해 있었다.
특히 센트럴 바이블 인스트튜트의 이사진 가운데 교단 총무였던 로스웰 플라우어는 오순절운동에 대한 정통 오순절적 신학(Classical Pentecostal Theology)을 미 하나님의 성회 안에 확립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오순절의 시금석을 성령침례에는 방언이라는 성경적 증거를 동반한다는 교리(dogma)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오순절의 기원을 벧엘성경학교를 설립했던 찰스 F. 파함(Charles F. Parham)으로 보았으며, 오순절운동의 발발 시점을 1901년 1월 1일로 잡았다. 그는 오순절운동이 미국 켄사스주 토페카에서 원자폭탄처럼 폭발하여 전세계로 퍼져나갔다고 보았다. 그런 그의 오순절운동에 대한 이해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가 해외선교를 펼쳐나가는데 큰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만약 플라우어가 오순절운동을 1906년 전후 전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는 자생설을 주장했다면, 미 하나님의 성회의 해외선교는 동력을 잃고 밖으로 뻗어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허스톤은 이런 미 하나님의 성회의 오순절운동에 대한 정통적 이해와 강력한 해외선교 지향적 신학 교육과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1941년 앨범 57쪽에는 허스톤의 사진이 2학년(Middlers) 학생들 가운데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거리 집회 팀(Street Mettings)의 오작(Ozark) 담당으로 소개된다. 1942년 앨범에 허스톤이 등장하지 않는다. 어떤 이유 때문에, 아마도 군 복무 때문에 휴학했던 것 같다. 센트럴 바이블 칼리지의 1944년 앨범(yearbook), “컵”(Cup)의 145쪽 “Class of 43”에 존 허스톤의 졸업 사진이 등장한다. 그 학교의 1940년대 앨범 컬렉션에 1943년 앨범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1943년 학생들을 1944년 앨범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앨범상에 나타나는 그 학교의 이름은 Central Bible Institute(CBI)이다.
그는 1940년 성경학교 1학년 때에 성령침례를 받고 방언을 말하는 것이 근거가 있는 것인가 다시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성경을 연구했다. 그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말씀을 특히 인상 깊게 보았다. 그 제자들은 이미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그분은 그들이 무언가 더 갖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성령께서 강림하셨고, 그들 모두가 충만하여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후에 그들이 모인 곳이 흔들렸고, 모두가 다시 한번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말하게 되었다. 방언은 그 어구에서 언급되지 않지만, 성령 “충만”이 강조되었다.
허스톤은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신자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마리아 신자들은 이미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보다 더 받을 것이 있었다. 그것은 마술사 시몬의 말처럼 “성령을 받은 것”이었다. 허스톤은 마술사 시몬이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방언을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는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성령이 그 이방인들 가운데 부어지는 것에 놀란 것은 “그들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허스톤은 더 나아가 바울이 열두 명의 에베소 신자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이 그들에게 강림하시고, 그들이 방언을 말하며 예언했다”는 말씀에 주목했다.
허스톤은 그 성경연구를 통해 방언을 말하는 것이 사람들이 성령침례를 받을 때 자주 언급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는 방언을 그저 성령침례로 들어가는 문, 하나의 증거로 간주했다. 기도할 때 때때로 방언을 몇 마디 말하곤 했지만, 그는 “나는 이미 받았어”라며, 그 정도에 만족하는 데 그쳤다. 그 정도로도 허스톤은 미국 하나님의 성회에서 가장 중심적인 성경학교에서 방언이 성령침례의 첫 육체적 증거, 성경적 증거라는 것을 배우고 성경을 통해 확인함으로써 체험과 신학을 겸비한 확고한 정통 오순절주의자가 되었다.
학업을 마친 그는 1944년 12월부터 복음전도 사역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는 『펜테코스탈 에반젤』에 “저는 지금부터 복음전도 사역에 전념하기 시작합니다”라며 자신의 사역 시작을 공고했다. 그때 그의 주소지는 P. O. Box 1101, Columbus, Ga.였다. 24살의 허스톤은 1946년 6월 27일 미국 하나님의 성회 플로리다 서부지방회(West Florida)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20살의 맥신 포스톤(Maxine Poston)과 1946년 10월 24일 플로리다, 펜사콜라 제일 하나님의 성회(Pensacola First Assembly of God)에서 결혼했다. 펜사콜라 제일 하나님의 성회는 1917년에 오순절 교회로 설립되었다. 1922년 하나님의 성회에 가입되며 교명이 Pensacola First Assembly of God로 변경되었다. 그 교회는 현재 4301 Bayou Blvd, Pensacola, FL에 자리 잡고 있다. 펜사콜라(1004 East Cross Street, Pensacola, Florida)에는 맥신 포스톤의 친척(Mr. and Mrs. J. M. Paston)이 살고 있었다.
맥신은 1926년 5월 6일에 오클라호마, 크릭 카운티, 브리스토우(Bristow, Creek County, Oklahoma)에서 태어났다. 맥신은 불과 여덟 살에 아프리카 선교사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 그때부터 그녀의 삶의 초점은 오직 그 한 목표에 맞추어졌다. 현재 브리스토우에는 First Assembly of God이 존재한다. 이 교회는 35146 W 221st St S.에 있으며 국내 선교 뿐만 아니라 해외선교에도 주력하는 교회로 알려진다. 1943년에 허스톤이 그녀를 만났을 때 맥신은 그녀가 다니던 성경학교의 유능한 학생이었다. 그녀는 아프리카에서의 사역을 그리며 학교 도서관의 개관을 도왔고, 금요 밤 예배를 조정했으며, 여름방학이 되면, 그녀의 어머니 전도자와 함께 전도 집회들에서 말씀을 전했다. 학교 앨범에 등장한 그녀의 사진 밑에는 “그녀의 인성은 장미와 같이 감미로워 그녀가 가는 어느 곳에서든 향기를 풍긴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허스톤은 맥신과 동일한 소명을 갖고 있었다. 허스톤도 센트렐 바이블 인스티튜트에서 공부할 때 아프리카 선교 소명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완벽한 파트너였다.
맥신과 결혼 후, 허스톤은 그녀가 기도할 때면 거의 언제나 방언을 말한다는 것을 인지했다. 맥신이 천국과 지옥의 환상을 보았을 때도, 그녀는 방언으로 대화했다. 맥신은 종종 방언을 그녀의 “기도 언어”(prayer language)라고 칭했다. 성경학교에 다닐 때 그녀는 또한 주일날 장년 예배가 진행될 때 어린이 교회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그때 많은 학생들이 성령침례를 받고 방언을 말하기도 했다. 방언을 성령침례의 증거로만 인식했던 허스톤은 맥신과의 결혼 생활을 통해 방언을 “기도 언어”로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러한 허스톤의 방언에 대한 이해는 초기 오순절지도자 찰스 F. 파함과 윌리엄 J. 시무어의 방언에 대한 이해를 그대로 잇는 것이었다. 사도행전적 방언, 언어적 방언, 표적(증거) 방언, 선교 방언(missionary tongues), 위로부터 아래로 방언, 공적 방언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는 방언만을 알고 있던 허스톤은 맥신을 통해 고린도전서적 방언, 천상적 방언, 은사 방언, 기도와 찬양을 위한 경건 방언(devotional tongues), 아래로부터 위로 방언, 사적 방언이라고 불리는 방언을 접하고 자기 신앙생활에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젊은 허스톤은 이미 사역에 경험을 갖고 있었다. 두 교회의 목회자였었고, 교단 청년 프로그램 조지아 부지부장(the assistant to the head of the denominational youth program throughout Georgia)으로 섬기기도 했다. 미 하나님의 성회는 해외선교사로 지망하는 부부는 해외로 가기 전에 반드시 미국 내에서 먼저 1년 동안 성공적으로 목회하는 능력을 보여주기를 요구했다. 그 요청에 따라 아프리카 선교사 자격을 얻기 위해 먼저 국내 목회를 시작했다.
미 하나님의 성회가 1947년 펴낸 목회자와 선교사 명부에 따르면, 그의 주소지는 조지아, 파인 마운트 벨리(Box 37, Pine Mt Valley, Ga)였다. 그곳은 미 하나님의 성회 조지아 지방회에서 랄프 버드와 함께 활약하고 있던 윌리엄 허스톤(William Wade Hurston) 목사의 주소였는데, 존 허스톤은 그와 친척이었다. 1948년 2월 1일 명부에 따르면, 스테츠 부부의 주소지는 애틀란타와 컬럼비아 사이를 잇는 20번 도로 거의 중간에 있는 조지아, 오거스타(Box 164, Augusta, Ga)였다. 현재 오거스타에는 The Assembly at Augusta, Cornerstone Assembly가 존재한다. 어셈블리 엣 오거스타는 1937년에 설립되고, 2018년에 예배당을 신축한, 4207 Wheeler Rd, Martinez, GA에 있는 미 하나님의 성회 소속 교회이다. 그 교회는 “우리는 하나님의 성회의 ‘네 가지 주요 신앙’: 구원, 성령침례, 신유, 그리고 재림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한다(We believe in the ‘Four Core Beliefs’ of the Assemblies of God: Salvation, Baptism in the Holy Spirit, Divine Healing and the Second Coming of Christ).
허스튼과 그의 부인은 1947년경 한 수요일 밤에 오거스타에 있는 한 작은 시멘트 블록 교회, 시멘트 바닥에서 여섯 명의 교인들과 함께 금식하며 기도했다. “절망”(desperation)이 그들을 몰아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과 그 작은 교회에 어떤 돌파를 일으키시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아무런 희망도 없을 것이었다. 그때 그의 부인 맥신이 방언을 말하며 입신 상태에 들어갔다. 9개월 전에, 가능한 빨리 선교사로 아프리카로 갈 욕심이 앞서 목사가 필요한, 제안받은 첫 교회에 부임했었다. 그들은 기도하고 신중하게 여러 가지 사항을 알아보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성급하게 가장 빠른 길이 가장 좋은 길이라고 여겼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목회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이 목회를 위해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았었다. 도착한 교회 건물은 생각보다 훨씬 작고 낡았었으며, 교회는 문제가 많았다. 그들은 교회 부흥을 위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해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진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고, 그들은 점차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그 절망 속에서 그들은 예수께서 모든 것의 주님이셔야만 하며, 그분의 일을 하는 방법의 선택에서도 역시 주인이셔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인간적 꿈이 사망하는 절망의 벼랑 끝에서 금식하며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부흥을 기대하게 되었었다. 입신에서 깨어난 맥신은 자기가 천사에게 이끌려 천국에 들어간 예수님과 스데반 집사, 베드로, 허드슨 테일러를 만난 것, 그리고 지옥을 보고 온 것을 간증했다.
2007년에 청주중앙순복음교회 김상용 목사가 맥신의 간증이라는 것을 설교예화로 사용했다. 김 목사는 맥신이 자궁암에 걸려 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그녀의 영이 몸을 떠나 천국에 갔고, 그곳에서 스데반 집사를 만나 순교 당시에 대해 들었다고 전했다.
우리 교단에 초대 선교사인 존 허스톤 목사님의 사모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모님이 자궁암 수술로 인해 몸이 굉장히 허약해졌습니다. 어느 날 사모님 자신의 몸에서 영이 떠나 자신의 죽음을 인해 울고 있는 존 허스톤 목사님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에게 받들려 천국에 가게 되었는데 너무나 아름답고 좋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과 지옥을 다 보여주시며 함께 계시는데 옆에 스데반 집사님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모님이 “집사님, 어떻게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천사 같이 기쁜 얼굴로 순교할 수 있었습니까?”라고 묻자,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는 순간에 하늘 문이 열리고 주님이 내려오셔서 내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아픈 것도 전혀 느끼지 못하고 하늘나라에 왔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돌에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천사같이 기쁜 얼굴이었던 이유는 주님께서 그의 영혼을 위로하여 주시고 붙잡아 주셔서 아픔을 전혀 모르고 순교하여 하늘나라에 올라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맥신이 자궁암에 걸려 수술을 받고 입신한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목회할 때 입신한 것이었다. 맥신에게 다가온 스데반은 “사람들은 내가 돌에 맞고 있을 때 고통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눈을 들어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우편에 서 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본 후, 돌에 맞는 것은 더 이상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맥신은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스런 손을 꽉 잡았습니다. 천국의 진정한 본질은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계시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분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일을 통해 허스톤과 맥신은 예수께서 그의 신부들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할 일은 그 신부들을 부르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절망”(Divine desperation)은 지옥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움임을 깨달았다.
3일이 지난 주일에 세계적인 복음전도자 메임 윌리엄스(Mayme Williams)가 인도하는 한 부흥 집회가 개최되었고, 교회는 가득 찼고, 기다리던 영적 부흥이 일어났다. 몇 주 안에 몇 성도들도 맥신과 유사한 환상을 간증했다. 그리고 허스톤은 교단 청소년 지도자들을 위한 전국 집회에 강사로 초청을 받았고, 자기 교회에서 일어났던 것을 간증했다. 그 이야기는 한 총회 임원을 감동시켰고, 그는 해외선교국과 면접을 주선했다. 그 결과 그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공식 선교사 인증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곧 아프리카로 떠날 준비에 돌입했다.
IV. 라이베리아 선교
허스톤과 그의 부인은 1948년 6월 25일에 서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그는 하나님의 성회가 인정하는 산하 공식 선교 단체였던 “그리스도의 대사들”(Christ’s Ambassadors)의 조지아 지역장이었다. 그 단체가 펴내고 있던 소식지에 의하면, 존 W. 허스톤과 그의 아내 맥신(Maxine)은 아프리카 선교사로 임명받았고 5월에 떠날 예정이었다. 지역 대표들은 그들이 떠날 때까지 C. A.의 직원들로 남기를 투표로 결정했다. 그런데, 『펜테코스탈 에반젤』에 따르면, 허스톤과 그의 부인은 1948년 8월 미국 하나님의 성회가 세계 선교를 위해 마련하고 “앰바사도르”(Ambassador)라고 이름 붙인 항공기 C-46에 올라 아프리카, 라이베리아로 떠났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대양을 건너는 상업 비행기들은 쉽게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해외 선교국장 노엘 퍼킨(Noel Perkin)은 두 개의 엔진을 갖고 있는 군용수송기 C-46을 5,000달러에 구입하여 선교를 위한 항공기로 개조하고, “앰바사도르”(Ambassador, 대사)라고 명명했다. 참전 용사들이 조종하는 커다란 쌍발기 앰바사도르는 1948년 8월 12일에 선교사들을 싣고 미주리, 스프링필드 공항을 이륙하여 동해안, 아일랜드, 뉴파운드랜드, 라브라도르, 그린랜드, 그리고 아이스랜드를 거쳐 날아가 10일 만인 8월 21일에 아프리카에 도착했다. 이것은 배로 이동하는 것보다 5주 정도 훨씬 빠른 속도였다. 그 처녀 비행에 나선 앰바사도르 안에 다른 9명과 함께 뉴저지에서 탑승한 허스톤 부부가 타고 있었던 것이다.
허스톤 부부는 라이베리아로 향하기 직전에 부부의 사진이 실려있는 엽서 한 장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커닝햄 부부에게 보냈다.
커닝햄(Cunningham) 형제와 자매에게
이 편지를 통해 우리와 아프리카를 위한 여러분의 관심, 기도, 그리고 여러분의 교회로부터의 서약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이 편지를 받을 즈음에는 우리는 라이베리아로 가는 여정에 올라 있을 것입니다.
아프리카로 떠나는
존과 맥신 허스톤
아프리카의 오순절운동은 1906년 8월에 시작되었다. 아주사 거리의 부흥에 불을 당겼던 루시 패로우(Lucy Farrow)가 라이베리아에 도착한 것이 아프리카에 오순절 운동의 기점이 되었다. 루시 패로우는 뉴욕에서 아프리카로 선교하러 간다는 소식을 아주사에 전하며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패로우는 바트맨 부부(Bro. and Sister Batman)와 헛친스 부부(Bro. and Sister Hutchins)와 함께 영국 잉글랜드에서 출발하여 1906년 12월 말에 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 몬로비아(Monrovia, Liberia, Africa)로 갔다. 그리고 그녀는 몬로비아에서 25마일 떨어진 존슨빌(Johnsonville)로 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오순절적 메시지를 전했고,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성령침례를 받고 방언을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토착어인 그루어 방언으로 두 번의 설교를 하기도 했다.
라이베리아 하나님의 성회는 1908년 즈음에 형성되었다. 1908년 성탄일 아침에 야스퍼 토우(Jasper Toe)는 거주지에서 7일을 걸어 가라웨이 비취(Garraway beach)에 나갔다. 야스퍼는 부족 물활론적 종교 제의들을 충실하게 따랐었지만, 무언가 결여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어느 날 밤 그는 헛간 집 밖에 서서 별들이 촘촘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떤 창조자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아는 길을 알 수가 없었다. 절망의 순간에 이른 그는 외쳤다. “창조주 신이 계시다면, 당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때 지시가 내려왔다. “가라웨이 해변으로 가라. 물에 떠서 연기를 품어 내는 큰 상자를 볼 것이다. 한 작은 상자가 그 큰 상자에서 나올 것이고, 그 작은 상자 안의 사람들이 너에게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것이다.” 야스퍼스는 그 지시를 따라 그 해변으로 가서 수평선을 살펴보며 기다렸다. 그는 예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그날이 성탄일이라는 것도 몰랐다.
하나님께서는 야스퍼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10년 전부터 준비하고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존 퍼킨스(John Perkins)라는 한 젊은 사람을 부르셔서 라이베리아 선교사가 되게 하셨다. 1900년에 존과 그의 신부는 8명의 다른 선교사들과 라이베리아로 갔다. 그런데 말라리아와 열대 풍토병에 걸려 그의 부인을 포함한 대부분이 소천했지만, 퍼킨스는 살아남았다. 그는 감독 감리교회 소속 선교사 제시 암스(Jessie Janet or Jennette Arms)와 재혼했다. 1906년 휴가 동안 퍼킨 부부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오순절 집회에 참석하여 방언이라는 증거를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았다. 그들이 라이베리아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감리교 해외선교국은 그들의 오순절적 경험을 문제삼아 그들의 지원을 철회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으며 그들은 1908년에 그 어떤 선교회의 후원도 받지 못한 채 믿음 선교사가 되어 라이베리아로 향했다. 몇 오순절 신자들이 라이베리아 복음화를 돕겠다며 동행했다.
대서양을 건너면서, 그 무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시간을 보냈다. 존 퍼킨은 해변가 마을 가라웨이에 상륙해야만 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가라웨이는 일반적인 기항지가 아니었고, 선장은 그곳에서 내리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성령의 지시는 급박했다. “너희는 여기서 그 배에서 내려야 한다. 여기가 바로 너희가 가기를 내가 원하는 곳이다.” 큰 배는 해안가에 접근할 수 없어서, 해변으로 가려는 사람은 누구든 작은 배로 옮겨 타야 했다. 또한 그는 안전이 염려되었다. 그렇지만, 성령의 지시는 급박했다. “너희는 여기서 배에서 내려야 한다. 여기가 바로 너희에게 가기를 원하는 곳이다.”
존은 선장에게 “우리는 기도해 왔는 데, 하나님께서 내게 여기서 우리에게 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선장은 허락했다. 그는 선교사들과 물품들을 작은 보트에 태워 해안가로 보냈다. 그곳에서 야스퍼스가 그들을 환영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야스퍼스는 그들의 첫 회심자가 되었다. 퍼킨 부부는 느와카(Newaka)에 선교본부를 세우고 학교를 열었다. 몇 달 안에 성령침례의 부으심이 부흥을 가져왔다. 놀라운 구원과 치유가 일어났다. 1918년 퍼킨 부부는 새롭게 형성된 하나님의 성회 교단에 가입했다. 야스퍼 토우는 라이베리아 하나님의 성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 허스톤 부부는 라이베리아, 펠로크(Feloke)에 있는 남성 성경학교(men’s Bible school)을 관장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었다. 그러나 아프리카로 가는 도중에 라이베리아 지역장 헨리 갈록(Henry Garlock)으로부터 그 임무가 취소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허스톤은 실망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함을 그리고 하나님의 시간에 성령을 신뢰해야 함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들은 라이베리아로 가서 스스로 새로운 사역을 개척하든지, 아니면 나이지리아나 남아프리카로 가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는 여전히 라이베리아로 가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마을들과 종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몬로비아에 도착은 허스톤과 그의 부인은 짐을 놓자마자 기존의 선교 사역장들을 둘러보고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떠났다. 먼저 느웨이크(Newake)에 있는 여성 성경학교에 가다가 선교사들의 무덤에 들렀다. 그들은 그 무덤들 한 가운데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 이 나라에서 전국적인 부흥이 일어나는 것을 보기 전에 우리를 데려가지 마십시오.” 그전까지 라이베리아에서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지역적인 부흥들이 있어 왔지만, 라이베리아 전역을 휩쓴 부흥은 일어나지 않았었다. 허스톤 부부는 그 전국적인 부흥을 꿈꾸며 기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여성 성경학교의 사모가 될 오십여 명의 학생들 중 상당수가 아직 중생하지 못하였고, 헌신하지 못하였고,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지 못했으며, 심지어 성령의 역사에 저항하는 상태였다. 그곳에서 진행된 2주간의 집회들에서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와 다양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학생들이 새롭게 헌신하며 변화되는 것을 목격했다. 한 여학생이 방언을 말하며 입신하여 예수께서 계시는 천국 환상을 보기도 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그 보혜사는 사람의 도움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성령과 방언을 말하는 것”이 사람들의 일상적 어려움들을 이겨내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으며, 성령의 역사를 더 사모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성령에 대해 말하고 다른 사람들이 성령님을 보다 온전하게 경험하도록 도울 것을 결심했다.
허스톤과 그 부인은 느웨이크 근교에 있는, 스타이들(Florence J. Steidel)이 1947년에 설립한 New Hope Town 나환자촌에서 두 주간 사역하기도 했다. 1948년에 그 나환자촌 수용인원은 300여 명에 달했고, 200명이 예배드릴 수 있는 예배당도 있었다. 그들은 그곳의 나환자들에게 설교 전과 후 그들과 서슴없이 악수하며 포옹해 주었다. 그 부부는 그들에게 여성 성경학교 학생들에게 설교한 것을 똑같이 설교했다. 그 주제는 성령침례와 방언, 성령께 대한 것이었다. 허스톤과 그 부인은 어느 날 설교 후 각 성도들의 머리에 안수하며 지나갔다. 그러자 각 성도들의 입에서 방언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한 여인에게 예수의 구원에 대해 말하자, 그녀는 울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글을 전혀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는데, 완벽한 영어로 시편 103편의 한 성구를 인용하며 말했다. 그 부부는 그것을 통해 성령은 사람의 형식들이나 방법들에 관심이 없으시다는 것, 그분은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고, 필요한 것과 때를 아신다는 것을, 사람은 그분을 지시할 수 없고, 다만 기도하고 그분의 방법에 순종하며 따라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몇 달을 선교 현장들에서 집회를 인도한 스톤 부부는 몬로비아로 돌아왔다. 그들은 다시 아직 그리스도의 소식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갈록(Garlock)은 그들에게 몬로비아에 위치한 중앙 선교 회관(Central Mission Home)을 관장하는 임무와 선교 행정 임무를 맡겼다. 그 회관은 13개의 방과 하나의 외부 화장실을 갖춘 넘어질 듯한 3층 건물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라이베리아에 새로 도착하는 선교사들을 묵게 하고, 라이베리아 각지에서 필요한 것을 받으러 오는 선교사들을 맞아들이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일상적인 업무를 감당해야 했다. 1949년 미국 하나님의 성회가 펴낸 목회자와 선교사 명부에 따르면, 허스톤 부부의 주소지는 서아프리카, 라이베리아의 수도 몬로비아(PO Box 37, Liberia, Monrovia)이었으며, 미 하나님의 성회 소속 라이베리아 선교사들은 열일곱 쌍, 34명이었다. 그날들은 활발하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그들에게 힘든 나날이었다. 그들은 그 기간을 통해 성령의 영광스런 역사 후에는 메마른 광야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의 길을 알려하지 말고,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저 따라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미 하나님의 성회는 1949년에 앰바사도르 I을 매각하고, 10월에 제2차 세계대전 때에 폭격기로 사용되었던, 4개의 엔진과 프로펠러를 가진 더 강력한 항공기, B-17을 구입하여 Ambassador II라고 명명하고 승객용으로 개조하여 운용하기 시작했다. B-17은 “날으는 요새”(Flying Fortress)라는 별명을 가졌었다. 앰바도르 II는 1949년 10월에 25명을 싣고 남미를 거쳐 아프리카로 처녀 비행을 했다. 총비용은 $20,000이었다. 그 두 대의 선교사들을 위한 앰바사도를를 통해 “하늘이 고속도로가 되었다.” 그런데 2년 후 1951년에 퇴역시켜야 했다. 1950년에 조종사등 승무원들이 한국전쟁에 투입되어야 했고, 유지비, 특히 보험료가 대폭 인상되었기 때문이었다.
허스톤 부부는 1951년 8월 1일에 제1기 라이베리아 선교를 마쳤다. 휴가 기간 그는 아프리카를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1953년 미 하나님의 성회 목회자와 선교사 명부에 따르면, 그와 그의 부인은 휴가중이었다. 1953년 7월 11일 장녀 캐런(Karen Louise Hurston)이 태어났고, 캐런이 태어난지 6개월 후 2년 반의 휴가를 마친 그의 가족은 화물선을 타고 다시 선교지 라이베리아로 향했다. 공식 문서는 그 부부가 1954년 1월 1일에 라이베리아 선교에 복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55년 허스톤의 팀은 두 주간의 특별 집회들을 열었다. 저녁 집회마다 흑인 전도자들이 강단에 섰다. 그들 중 몇 명은 몬로비아에 있는 다른 교회들에서 왔다. 다른 사람들은 미국 흑인 선교사들이었다. 이것은 라이베리아 사람들과 원주민들에게 그 교회는 진정으로 그들에게 속한 것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때까지 설교는 대부분 백인들에 의해 이루어졌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고, 몇 명이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았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그것은 그 교회 최고의 부흥이라고 느꼈다. 그곳에는 성령의 보다 자유스런 역사들이 있었다.
당시 탁월한 사역을 펼치고 있던 목사들과 전도자들은 단기 선교 집회를 권장받았다. 폭스(Lorne Fox), 칸텔론(Willard Cantelon), 에릭슨(Clifton Erickson), 섬랄(Lester Sumrall), 버드(Ralph Byrd), 호스트(Glenn Horst), 맥알리스터(Harvey McAlister), 그리고 허만(Harold Herman)과 같은 사람들이 전 세계에 걸쳐 대규모 전도집회들을 열고 있었다. 그들의 역동적인 설교와 치유사역으로 인해 수천 명의 회심자들이 주님께 나아오고 있었다.
허스톤은 라이베리아의 오순절 복음화를 위해 랄프 버드(Ralph Byrd)의 라이베리아 특별 집회가 열리기를 기도했다. 랄프 버드 목사는 조지아, 애틀란타를 중심으로 활동한 신유 사역자였다. 그는 1935년 초에 천막을 치고 어셈블리 오브 갓 타버나클(the Assembly of God Tabernacle)을 개척했다. 그리고 그 교회는 1944년에 the Ponce de Leon church 건물로 이전했다. 1949년 미 하나님의 성회 목회자와 선교사 명부에 나타난 버드의 주소지는 조지아, 애틀란타, 퐁스 드 레옹 아베뉴(1215 Ponce de Leon Ave NE)였다. 허스톤이 구상한 라이베리아에서의 랄프 버드의 집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계속 금식하며 기도했다.
그런데 1956년 윌리엄 투브만(William Vacanarat Shadrach Tubman, 29 November 1895 – 23 July 1971)이 라이베리아 19대 대통령으로 3선 되었다. 그는 장기 집권을 했지만, “근대 라이베리아의 아버지”(father of modern Liberia)로 불리며 라이베리아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그와 그의 부인에게 절친이 있었는데, 그녀는 라이베리아의 수도 몬로비아의 시장의 부인, 파커(Mrs Parker)이었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랄프 버드가 필리핀에서 일으킨 부흥의 역사의 소식을 듣고는 대통령과 그 부인에게 랄프 버드가 라이베리아에서 집회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필리핀 오순절 신학자 자비에르에 따르면, 1950년대 초엽 필리핀에서 영혼의 구원뿐만 아니라 몸의 구원을 주장하는 이중 구원의 한 국면으로서 신유에 대한 강조는 버드 목사가 1955년에 필리핀에서 집회들을 연 후에 일어났다. 또한 자비에르에 따르면, 버드는 방언을 동반하는 오순절적 성령침례를 필리핀에 소개하는 데 큰 역할을 감당했다. 그런 버드의 사역은 멀리 서아프리카에도 전해져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도전을 준 것이었다.
라이베이라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투브만은 그 간청에 긍정적으로 반응하여 미 하나님의 성회 선교사들과 협의했고, 대통령 명의로 버드를 공식 초청했다. 허스톤의 기도가 그렇게 응답되었으며, 허스톤은 19대 대통령 취임식과 연계된 그 집회 진행 총책임자가 되었다. 당시, 아픈 사람들이 많아서 병자들을 위해 기도해주었고, 특히 청각장애자를 가진 사람을 위해 기도했을 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고 라이베리아에 큰 부흥이 일어났다. 당시 라이베리아의 유일한 일간지 The Liberian Age는 “믿음 치유의 이적들이 몬로비아를 휩쓸다”라는 헤드라인을 내걸기도 했다. 다수의 각료들도 그 집회들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하기도 했다. 그들 중에는 재무부 차관, 데니스(Mr. Dennis)가 있었는데, 그는 자기와 많은 자기 친구들이 오늘날에도 이적이 일어날 수 있는가에 회의적이었지만 그 집회들에 참석하고 나서 그런 의심이 사라졌다고 간증했다. 한 저녁 집회에 아홉 개의 부족장들이 안수를 받고 고침을 받았고, 각자의 부족어로 자기 부족들에게 간증하기도 했다. 버드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그 집회에 임하면, 나뿐만 아니라 그 어떤 신자도 환자에게 안수할 수 있을 것이고, 치유의 이적이 일어날 것이다. 기름부음이 떠나면, 아무도 효과적으로 기도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치료하시는 분이시다. 순복음 메시지(full gospel message)가 이 시간을 위한 진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이것이 사람들이 필요하고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1956년 윌리엄 투브만 대통령은 라이베리아의 전국적인 부흥운동에 참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허스톤에게 기사 작위(knighthood)를 수여했다. 허스톤이 라이베리아 선교사로 부임했던 때에 기도했던 라이베리아 전국적인 부흥이 응답되어 일어난 것이었다.
『펜테코스탈 에반젤』 1956년 8월 호에 이런 라이베리아의 부흥에 관한 허스톤의 보고가 다음과 같이 실렸다.
버드 부부의 떠남은 그 부흥의 종식을 의미하지 않았다. 라이베리아 공화국 전역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지속적이고 고무적인 소식을 전해 듣고 있다. 여기 몬로비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치유를 받고 있고, 성령침례를 받고 있다. 집회 참여자가 계속 증가해 왔고, 영성과 신앙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라이베리아 교회에 부흥을 허락하신 것을 인해 감사드린다.
아프리카에는 많은 생소한 관습들이 있다. 성수와 성유를 사용하며 병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그 물과 기름을 축복하고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판다. 그러나 이번 부흥 동안, 그들은 사람들이 믿음의 기도를 통해 고침 받는 것을 보아 왔다. 참으로 교육적이다.
랄프 버드의 전도집회 동안, 그가 법원에서 기도하기 위한 특별 집회가 마련되었다. 며칠 전, 정부에서 주는 샴페인과 담배가 데이비스 판사에게 전해졌다. 그는 이것은 그의 치유의 값이라며 이것들을 받지 않았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전도 집회들은 많은 사람의 치유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의로 각성시켰다.
상원의원 깁슨(Senator Gibson)은 그 전도 집회에서 첫 번째로 고침을 받았고, 첫 번째로 성령침례를 받은 사람들 중의 하나였는데, 지난 주일 밤에 우리 교회에서 강연했다. 그의 메시지는 오순절적이었고, 그 예배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제단 주변으로 가서 자신을 주님께 헌신하게 했다. 전망은 밝고, 우리의 마음은 격려를 받고 있다.
한 장교는 치엔시(the city of Thien)에서 전도집회를 보호하던 사람들 중의 하나였는데, 치엔에서의 부흥 집회의 한 결과로 그 도시에 한 영어로 진행되는 교회가 개척되고 있다고 전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로 하나님께 아주 감사한다. (1) B.G.M.C(The Boys and Girls Missionary Crusade)가 그 집회들을 위해 『펜테코스탈 에반젤』 1월 8일 호 5,000부와 찬송집을 항공 소포로 보내준 것. (2) 해외선교국이 그 집회를 위해 놀라운 협력을 펼쳐준 것. (3) 여러분이 라이베리아에 전국적인 부흥을 일으켜 달라고 힘써 기도해 준 것.
허스톤은 2001년경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956년 라이베리아의 대통령은 첫 구원과 신유 집회를 위해 나에게 자금까지 지원했었다. 3개월 동안 나와 버드는 라이베리아의 주요 해변과 내륙 도시에서 구원과 신유 집회를 가졌었다. 우리는 4만 명이 넘는 병자를 위해 기도해 주었었고, 현지 일반언론사는 90% 이상이 고침을 받았다고 보도했었다.
허스톤은 1957년 후속 사역회의와 부흥회를 개최했고, 그 후에도 라이베리아에 지속적으로 복음을 나누며 관계를 발전시켜나가며 교회를 성장시켰다.
허스톤 부부의 라이베리아 선교는 밝은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두 가지의 고통이 닥쳤었다. 그 두 가지 고통은 가족과 관련된 것이었다. 하루는 나환자촌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그래서 허스톤은 그곳에 경비행기를 타고 빨리 가야 했다.
맥신과 네 다섯 살 캐런이 집에 남겨졌다. 그때 가까운 원주민 친구 아민(Amin)이 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그는 술중독자이며 회교도 신자였으나 허스톤의 사역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허스톤이 물로 침례를 준 사람이었다. 맥신이 문을 열자, 그가 들어와 맥신과 캐런을 납치해 자기 집으로 데려 갔고, 3일 동안 원할 때마다 맥신에게 폭행을 가했다. 허스톤이 돌아와 아민을 보았을 때, 아민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의 상태였다. 허스톤과 가족들은 고통스러웠지만, 그들은 아민을 용서했다. 그들은 아민에게 “당신은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이제 당신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용서란 감정이 아니고 의식적인 의지의 행동으로서 선택(forgiveness was not an emotion, but a choice, an act of our conscious will)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허스톤은 “그로부터 용서를 향한 우리의 여정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가득찼습니다”라고 말했다.
다른 고통은 임신 중이던 아들을 잃은 것이었다. 그 죽음은 1957년 12월 1일에 휴가를 위해 라이베리아를 떠나기 직전에 일어났다. 아들의 유산은 그들의 마음 한구석에 슬픔을 갖게 했다. 허스톤은 아들의 사망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우리가 라이베리아를 떠나기 얼마 전 아내는 임신 4개월에 사내아이를 유산하였다. 우리는 그 아이를 구두 상자에 넣어 아프리카에서 살던 집 뒷마당에 묻었다. 비록 우리에게 캐런이 있었지만, 그 슬픔은 결코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
V. 한국 선교
허스톤은 1958년에 라이베리아 선교사로서 휴가 중이었다. 1958년 1월에 나타난 그의 주소지는 존 허스톤의 친척, 윌리엄 허스톤의 주소지인 조지아, 파인 마운틴 벨리(Pine Mt Valley, Ga)였다.
한국에 있던 선교사들로부터 6번의 천막 집회를 인도해달라는 초청을 받은 랄프 버드는 허스톤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1958년 서울의 여름은 아주 더웠다. 허스톤과 버드가 서울에 도착하여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그들은 본 것에 놀라고 말았다. 전후 한국의 경제 사정은 절망적인 것이었다. 울며 치마를 붙잡고 있는 아이들을 곁에 둔 채, 행상을 하는 과부들은 그들이 파는 많지도 않은 야채에서 파리를 쫓고 있었다. 상이군인들은 집에서 만든 수레 위에 앉아서 다니는가 하면, 더 건강한 사람들은 낡은 우마차에 큰 짐을 싣고 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근처 거리에는 전쟁고아들이 거지로, 소매치기로 배회하고 있었다. 허스톤과 버드가 넘은 산에는 미군이 내다 버린 맥주 깡통을 두드려 만든 지붕에 마분지 벽으로 만든 집으로 이루어진 판자촌이 가득 차 있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36년간의 일본점령과 3년간의 한국동란으로 나라는 완전히 휘청거리고 있었다. 1950년대 초반 북에서 수만 명의 피난민들이 남한으로 남하했는데, 이것은 황폐된 나라에 더 큰 긴장감을 가져다주었다. 폭탄과 박격포탄은 세 집에 한 집을, 또 어느 지역에서는 공장 다섯 개 중 네 개를 사라지게 했다. 심지어 나무마저 사라져버렸다. 일본이 전쟁을 위해 함부로 벌목을 했고, 절망의 시기에 사람들이 땔감으로 베어갔기 때문이었다. 일거리는 거의 없었고, 한국 사람들은 매일 매일 다음 끼니까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만 했다. 가난과 질병이 만연한 가운데 인구의 절반이 폐병에 걸려있었다.
과거 왕성했던 불교는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처가 나라가 어려웠을 때에 그들을 버렸다고 느끼고 있었다. 또 다른 이들은 선조들의 묘를 지키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 부질없는 것이라고 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지방의 무당에게도 도움을 청하려 하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하나님의 움직임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미 당시 한국에는 소수지만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부르짖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허스톤과 버드의 부흥회를 축복하셨다. 그들은 한국 역사상 그 같은 규모의 전도 집회가 열린 것은 처음이라는 말을 들었다. 첫 부흥 집회 첫날 저녁에 3천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6번의 부흥 집회 중 3번이 서울에 쳐진 큰 천막에서 있었다.
순천 부흥 집회 기간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천막 밖에까지 사람들이 서 있어야만 했다. 천막 안에는 아직 예수를 믿지 않은 자, 호기심에 온 사람, 감리교도, 장로교인 그리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 그중에는 여전히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허스톤은 개회 말씀을 전했고, 버드는 간단한 복음을 선포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하나님의 귀한 임재하심을 느낄 수 있었다. 버드는 귀가 아주 멀었거나, 부분적으로 들리지 않는 사람들에게 손을 들라고 하고는, 그중 세 사람을 강단에 올라오게 했다. 첫 번째 올라온 사람은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 여인이었다. 버드가 기도를 마치자, 그 여인은 한쪽 귀가 깨끗이 들렸고 사람들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다음 여인은 귀가 전혀 들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것까지 들렸을 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이 자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세 번째 사람은 완전 귀머거리였다. 그는 버드가 그의 귀에 하는 말을 되풀이하였다. 다음날은 병자들이 너무나 많은 바람에 한편에서는 버드가 병자의 반을, 다른 한편에서는 허스톤이 나머지 반을 기도해 주었다.
한 집회에서는 사소한 일로 불순종했다는 이유로 일본군에게 고문을 받은 나이 든 한국인이 찾아왔다. 일본군이 양 귀에 젓가락을 밀어 넣는 바람에 고막이 파열된 사람이었다. 그는 30년 동안 듣지 못하고 살았었다. 그날 저녁 예배 중에 그 노인이 갑자기 듣기 시작했다. 다음날 그 노인은 손자를 포함한 온 가족을 집회에 데리고 나왔다. 온 가족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허스톤이 조용기 목사를 처음 만난 것은 그때 여름이었다. 깡마른 젊은 신학생으로 마지막 학년을 다니고 있었다. 자신과 조국이 직면한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옷을 정갈하게 입었으며, 유쾌하고 친절한 성품에 하나님의 일에 대해 몹시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버드는 네 번의 집회 가운데 조용기 학생에게 허스톤의 통역을 맡게 했다. 그중 세 번은 전도 전략 도시들의 교회에서 열렸다. 조용기는 영어를 아주 열심히 공부했고, 통역도 항상 잘해 내었다. 허스톤이 이전에 십여 명의 통역자들과 같이 사역을 해보았고, 그중에는 신학생들도 있었는데, 조용기 학생 같은 통역자는 없었다.
6개 도시에서 가졌던 1주일 기간의 전도대회 중 허스톤과 버드는 아침 집회에서는 성령 충만을, 저녁 집회에서는 구원과 신유에 초점을 맞추었다. 당시 허스톤의 설교들을 통역했던 조용기는 허스톤의 성령 강조와 자신에 대한 영향력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존 허스톤(John Hurston)은 나의 사역에 큰 영향을 끼친 두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나의 소천한 장모 최자실은 내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다. 1958년 이래로 존과 나는 함께 목회해 왔고, 일해 왔고, 웃어 왔고 그리고 울어 왔다. 그[허스톤]는 내게 인생의 많은 진리들을 가르쳐 주었지만, 특히 성령에 대한 진리들을 가르쳐 주었다. 나의 젊은 시절에 그의 통역자로 봉사했을 때, 그의 모든 설교는 성령에 대한 것이었고, 그분에게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것이었다(his every sermon was on the Holy Spirit and how vital it was to depend on Him). 나는 존의 성령에 대한 반복되는 언급에 점차 짜증이 났지만, 그 집중은 후에 나의 목회의 초석이 되었다(that focus later became the bedrock of my ministry).
매일 4번의 집회로 쉴새 없이 바빴지만, 조용기 통역자와 허스톤은 집회 사이마다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에게 숙소를 제공한 두 가정에서 함께 지내는 동안 허스톤은 조용기 통역자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아홉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그의 부모는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그를 집에서 쫓아낸 상태였다. 그는 일찍이 영어를 배웠고, 전쟁 중에 법률과 의학을 조금씩 배웠지만, 어떤 학위도 갖고 있지 않았다. 나중에 루이스 리차드(Louis P. Richards) 선교사가 그의 순복음신학교 입학을 주선했다. 조용기는 아주 열심히 공부했고, 눈에 보이는 기독교 서적은 모두 읽었다. 허스톤은 그때까지 조용기만큼 하나님에 대해 굶주려있던 사람은 보지 못했다. 허스톤은 부모로부터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그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때는 조용기와 최자실 목사가 대조동에서 사역을 막 시작하던 시기였다. 조용기는 참된 신앙인이었다. 주님의 일에 대해서는 항상 열정적이었다. 허스톤과 함께 사역했던 그 어떤 통역자보다도 그와 함께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기도했다. 조용기는 또한 하나님의 일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쏟아내었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순복음신학교 학생들이 갖는 질문은 신유(神癒, Divine healing)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 한국에는 오순절과 은사주의 출신의 선교사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신학교에 출강 온 초빙 강사들은 말씀에 대한 지식은 많았지만, 반면 성령에 대해서는 상당히 약했고, 오순절적 신앙생활을 뒷받침 하기 보다는 반대하고 파괴하는 신학을 가르쳤다. 그 강사들은 마지막 열두 사도의 죽음과 함께 기적의 시대도 끝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유와 기적은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은사중단론”(Cessationism)을 가르쳤다. 그래서 조용기는 자신이 폐결핵에서 고침을 받았음에도, 자신의 병고침을 신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예외적인 것으로까지 여기게 되었다. 그 후, 조용기는 오럴 로버츠(Oral Roberts) 목사의 신유에 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가 질문한 많은 것 중 하나는 “신유가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정말로 믿느냐?”는 것이었다.
조용기는 그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허스톤에게 도움을 청했다. 조용기가 신유에 대해 질문했을 때, 허스톤은 하나님께서 조용기와의 관계를 이끌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허스톤은 처음에 신유에 대한 성경 구절들을 그에게 보여주며 설명했다. 그리고는, 과거 10년 동안 서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것을 말해주었다. 허스톤은 신유야말로 성경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하며 “은사지속론”(Continuationism)을 성경과 경험을 통해 가르쳐 주었다. 또한 신유는 “중생, 온전한 성화, 방언을 증거로 동반하는 성령침례, 신유, 재림” 또는 “중생, 신유, 방언이라는 증거를 동반하는 성령침례, 재림”이라는 오순절 운동의 신앙과 신학, 순복음(Full Gospel, 純福音)의 주요 요소들 중 하나라는 것을 깊게 인식시켰다.
허스톤과 조용기는 조용기 전도사의 고향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부산의 한 교회에서 부흥 집회를 가졌다. 하루는 저녁 집회가 끝나자 조용기가 허스톤에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 집회에 참석한 한 목회자가 귀신을 내어쫓지 못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마귀씨, 제발 이 사람에게 나와주세요”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허스톤과 조용기는 그 목회자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대로 해야된다고, “예수님처럼, 우리도 귀신들에게 나가라고 명령해야 합니다”라고 조 전도사의 통역을 통해 말해주었다. 허스톤과 조 전도사는 그 귀신들린 자를 위해 기도해주었고, 이번에는 귀신에게 나가라고 명령했다. 그는 즉시 고침을 받았고 귀신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함께 있던 목회자는 자신이 배운 것에 크게 기뻐했다.
마침내 조용기에게 신유에 있어서 새로운 약진의 때가 다가왔다. 수년 동안 양쪽 귀가 들리지 않았던 사람들 위해 허스톤이 기도해 주었을 때였다. 허스톤 옆에 있었던 조용기는 그 남자가 들린다고 하자 확인해 보고 싶어 했다. 조용기는 한국말로 그 사람의 양쪽 귀에 속삭이고는 따라 해보라고 했다. 그가 그대로 따라 하자, 흥분하고 놀란 조용기는 크게 외쳤다. “들을 수 있대요! 들을 수 있답니다!” 그 집회 일정이 끝나기 전에, 신유에 대해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그리고 임상적으로 확신을 갖게 된 조용기는 비로소 병자를 위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허스톤은 이렇게 조용기에게 성령에 대한 전적 의존과 신유의 현재성을 성경과 간증과 실제적 현장사역을 통해 전수해주었고, 그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던 것이다. 허스톤이 없었다면, 강력한 신유 사역자 조용기도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허스톤의 조용기에 대한 영향력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 부흥 집회의 마지막 주간 동안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제6차 총회가 열렸고, 그 총회 기간 동안 아침마다 버드와 허스톤이 오순절적 교리(Pentecostal doctrine)를 바탕으로 한 가르침에 기초하여 “성령의 기름 부음 아래서”(under the anointing of the Holy Spirit) 집회를 인도했다. 그 총회는 새롭게 마련된 순복음 신학교 대조동 캠퍼스 부지, 미션 컴파운드에서 봉헌 예배를 드림으로 막을 내렸다. 허스톤은 버드와 함께 봉헌 설교와 기도를 인도했고, 주님의 영광이 아주 생생했다. 이때 버드는 자기가 담임하고 있는 애틀란타의 페이스 메모리얼 처취(Faith Memorial Church)가 이 새로운 성경학교를 위해 첫 1,000달러를 기부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라는 어구는 초기 오순절 지도자들의 글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특히 오순절운동의 아버지 찰스 F. 파함에게 있어서 성령의 기름부음은 주로 방언을 그 증거로 동반하는 성령침례 이전 단계에서 발생하는 것이었다. 그릇이 깨끗해져 도구로서 준비되었을 때, 비로소 그 그릇에 담길 다른 것이 필요한 것처럼, 성령의 기름부음은 한 영혼을 정결케 하는 것이었다. 파함은 그런 성령의 기름부음을 성령의 “내주하시는 기름부음”(the anointing that abideth)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그 근거 본문을 요한복음 20장 22절로 삼았다. 파함은 그렇게 성령께서 한 영혼에 내주하시는 기름부음이 발생할 때 성경에 대한 눈이 열리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일어난다고 그리고 그 단계를 거쳐야 비로소 성령침례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최근 성령은 사실 은사이며 성화 때에 받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의 파도가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령님을 이런 의미에서 추구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께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 불어넣으셨을 때 그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받았던 것과 같은 특별한 기름 부으심을 받는 것입니다(요 20:22). 그 결과 예수께서 숨을 불어 넣으셨던 그 제자들처럼 “내주하시는 그리고 가르치시는 기름 부으심”(the anointing that abideth and teacheth)을 받으면서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러자 도유자(the Anointer)시며 교사이신 성령 받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분명하고 귀중해졌습니다(눅 24:45). 그 제자들은 그 현대 성령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획득했지만, 그러나 그 발생은 오순절 10일 이전에 있었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말씀을 조명하시기 위해, 성경에 열리게 하기위해, 영적인 사람을 하나님의 마음과의 직접적인 교통 안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분의 마음을 여러분의 영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킬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안에 있는 영의 마음이 시대의 지혜가 에테르의 파도 위에 떠다니다가 여러분의 명령에 의해 철수할 수 있을 때까지 지난 수 세기 동안 교회에 의해 잊혀진 지혜의 파도 같은 생각을 위한 그릇이 된다는 의미에서 신비합니다. 이것은, 비록 거의 이해되지 못하고 있지만, 심오한 진리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그 도구, 성화에 의해 정화되어 온 성화된 도구를 조절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진리와 지식의 수용을 위해 그 도구를 조절합니다. 그 조절로 인해 우리는 한 벽에 의해 보호되는 정원에 있는 영원히 솟아나는 샘이 됩니다. 그 정원은 활짝 핀 꽃들과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향신료들과 여러 종류의 과일을 맺은 나무들로 가득차고, 그 영원히 솟아나는 샘들로부터 물을 공급받습니다. 그 정원에 모아진 향기들은 거의 가두어 질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복된 오순절 [방언을 증거로 동반하는 성령침례] 경험이 그 달콤한 향기들을 산과 계곡에 퍼트리게 되고, 여러분의 영혼 안에서 영원히 솟아나는 생명의 물을 모으게 되고, 그러면 그것은 온 땅 위에 생수의 강처럼 흘러 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파함은 성령침례 이전의 단계로 “성령의 내주하시는 기름부음”만을 언급하지 않고, “내주하시는 기름부음” 이후에 때가 한정되지 않는 성령의 “간헐적인 기름 부으심”(occasional anointings)이라고 부르는 것을 언급했다. 이 “간헐적인 기름부으심”이 허스톤이 언급한 “성령의 기름 부음”과 겹친다. 파함 이후의 오순절주의자들은 파함이 주장했던 “성령의 내주하시는 기름부음”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점차 파함이 언급한 “성령의 간헐적 기름부음”만을, “성령의 기름부음”만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한국 6대 도시에서 집중적인 여름 전도 집회를 마치고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허스톤과 버드는 병고침을 받고, 구원을 얻고, 성령 충만함을 받은 수 많은 사람들로 인해 기뻐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아, 버드는 피곤한지 잠이 들었다. 하지만 허스톤은 너무 벅찬 나머지 잠을 잘 수 없었다.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구름 위로 떠오르자, 허스톤은 미래에 펼쳐질 두 가지 일을 깨닫게 되었다. 라이베리아에서 놀라운 사역을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허스톤을 한국의 선교사로 부르고 계셨다. 그리고, 조용기와 함께 일하도록 허스톤을 예정하고 계셨다. 허스톤은 전쟁으로 처참해진 한국이었지만, 그 나라의 사람들, 특히 조용기에게서 라이베리아에서는 볼 수 없었던 큰 가능성을 보았을 것이며, 허스톤이 도와준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한국이 맺어낼 풍성한 열매들을 미리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허스톤은 아프리카 선교를 접고 한국 선교를 펼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미 하나님의 성회가 1959년 1월 20일에 펴낸 목회자와 선교사 명부에 따르면, 그의 사역지는 한국(Korea)이지만, 그는 휴가 중이었다. 미국에 도착한 허스톤은 곧바로 미 하나님의 성회 해외선교국에 자기의 선교지를 아프리카에서 한국으로 바꾸어줄 것을 청원했을 것이고, 해외선교국은 신중한 검토 후 그 청원을 수락했을 것이다. 이 기간 동안 허스톤은 여러 곳에서 선교에 대해 강연하며 지냈다. 미 하나님의 성회 해외선교국에는 허스톤이 강연 기회를 얻기 위해 교회들이나 개인 단체들에 보냈을 자기 소개서 또는 강연 신청서가 보관되어 있다. 그 소개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John W. Hurston, formerly missionary to Liberia, West Africa and now Evangelist to the Orient, will be the featured speaker at the missionary service of the on , according to the pastor, Rev. .
그 소개서에 따르면, 몇 달 전(1958년) 조지아, 애틀란타에 있는 페이스 메모리얼 어셈블리 오브 갓의 목사 랄프 버드(Ralph Byrd)는 허스톤에게 석 달 간의 전도여행에 합류하는 것을 제안했다. 허스톤은 당시 한국이 영적 각성 가운데 있다(Korea is witnessing a spiritual awakening)고 생각했다. 그는 강연 중에 제시할 한국인들이 복음에 크게 반응하는 것을 보여주는 동영상 필름과 슬라이드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해외선교국으로부터 “동양 전도자”(an evangelist to the Orient)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는 그 임무를 따라 한국에 돌아갈 것이고, 다른 동양 지역들에서도 복음전도자의 직무를 수행할 것이었다.
그의 1959년의 활동은 미 하나님의 성회 해외선교국의 글로벌 컨퀘스트의 제28차 총회 승인과 자금모금, 그리고 그 파일럿 프로젝트 지역으로 한국 선정 등과 맞물렸었던 것 같다. 아마도 제임스 호간(James P. Hogan)은 1958년 한국에서 버드와 함께 전도집회들을 열었던,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와 한국 선교사로 지원한 허스톤에게 한국의 상황에 대해 물었을 것이며, 한국에서 가능성을 보았던 허스톤의 대답과 제안은 한국이 파일럿 프로젝트 대상 국가로 선정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허스톤 가족은 1959년 말 아주 추운 날 한국에 일시적인 순회 전도자가 아닌 거주 선교사가 되어 돌아왔다. 허스톤은 아내 맥신과 일곱 살 된 딸 캐런과 함께 하나님의 성회 선교사 숙소로 가서 선교사들을 만났다. 허스톤은 선교사 숙소로 가져온 은빛 색의 스팔탄 이동 주택(Spartan Mobile Home) 차량에 거주하며 그들과 함께 글로벌 컨퀘스트, 파일럿 프로젝트의 실행을 논의했다. 스팔탄은 1928년에 오일 무역으로 시작하여 그 사업을 제2차 세계대전시에 항공기 제작, 그리고 전후 항공기 제작 기술을 응용한 이동주택으로 바꾸었다. 그 회사는 1959년에 은빛 찬란한 Spartan Imperial Mansion을 출시했다. 허스톤이 들여 온 모델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전해지지 않지만, 그 회사의 이동주택들은 항공기처럼 거의 그 표면이 빛을 그대로 반사하는 은색이었다. 허스톤이 건축된 주택을 택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이미 글로벌 컨퀘스트 자금으로 미션 컴파운드를 위한 1만 평방미터의 대지가 구입되었었기 때문에 기존의 주변 건축물을 사거나 빌리기보다는 그 대지 위에 이동주택을 가져다 놓는 것이 빠르고 효율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이동주택은 조용기 전도사가 사는 미션 컴파운드의 남동쪽 끝자락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최자실의 아들 김성광 목사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조용기 목사님이 영어를 참 잘하셨어요. 미국 선교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열었죠. 존 허스톤 선교사님은 아예 우리 집 옆에다 트레일러 집을 놓고 사셨어요. 그 안에 화장실도 있어서 참 신기하게 생각했었죠.
허스톤과 맥신은 조용기를 만나기를 몹시 고대하고 있었다. 다음날 그들은 캐런을 선교사들에게 맡기고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매섭게 옷을 뚫고 지나가는 가운데 눈 위를 걸어갔다. 허스톤 부부는 조용기가 살고 있다고 들었던 한옥 문을 두드렸다. 상냥해 보이는 중년 부인이 문을 열더니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그녀는 한국말로 크게 소리쳤다. 얼마 후 조용기는 그녀의 어깨너머로 바라보며 물었다. “허스톤 목사님 맞습니까?” 그들은 조용기를 다시 만나니 너무나 반가웠다. 맥신을 소개하자, 조용기는 중년 부인을 허스톤 부부에게 소개하였다. 최자실 전도사였다. 허스톤 부부가 한국식 온돌방에 들어가 앉았을 때, 맥신은 몸을 떨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한옥은 연탄을 때는 온돌난방을 갖추고 있었다. 최자실 전도사는 맥신의 손이 차가운 것을 보자 그 손을 아랫목에 놓고 따뜻해질 때까지 자신의 손으로 덮어주었다. 그들은 허스톤 가족이 무사히 한국에 온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함께 기도했다.
허스톤은 자기가 미국에 돌아갔던 동안 조용기와 최자실이 겪은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다. 두 사역자는 같은 신학교에 다녔으며, 1957년 겨울 조용기 학생이 아주 강한 독감으로 심하게 병들게 되었다. 전직 산파였던 최자실 학생은 15일 동안 그를 간호하며 기도해 주었고, 그 이후로 그들은 아주 가깝고 강한 연대 의식을 갖게 되었다. 두 사역자의 나이 차이와 조용기 학생의 불교도 부모님이 멀리 사는 관계로 조용기 학생은 최자실 학생을 어머니로, 최자실 학생은 조용기 학생을 아들로 불렀다. 두 사람은 몇 년 뒤 최 전도사의 딸 성혜 그레이스가 조 전도사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조용기 학생과 최자실 학생은 다른 학생들과 자주 파고다 공원 근처에 나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에서 찬양을 부르며 복음을 전파했다. 최자실 학생은 조용기 학생의 지성과 복음에 대한 헌신을 존중했고, 조용기 학생은 최자실 학생의 흔들리지 않는 끈기 있는 기도에 감탄하고 있었다. 수년 전 힘든 시기에 최자실 학생과 남편이 한 사람을 도와준 적이 있었다. 그는 나중에 관리가 되었고, 감사의 마음으로 공동묘지 옆에 있는 1만 평방 미터의 땅을 최자실 전도사에게 주었다. 그 땅은 선교사 숙소 근처 대조동이라고 불리는 서울 변방의 빈민 지역이었다. 서대문구 충정로 1가 21번지에 있던 순복음신학교를 졸업하자, 최 전도사는 가까이에 있는 고아원에 지원을 했으나, 고아원이 다른 지원자를 원하는 바람에 뽑히지 못했다. 그래서 최 전도사는 1만 평방 미터의 남동쪽 끝자락, 후에 미션 컴파운드의 남동쪽 끝자락, 나무 그늘이 있는 곳에서 주일 학교를 열며, 그 땅 위에 시멘트 블록으로 집을 짓고는 교회를 개척하기로 했다.
하지만 최 전도사는 자신이 담임 교역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조 전도사가 담임 목회자가 되기를 원했고, 자신은 그를 돕는 협력사역자가 되기를 원했다. 1958년 여름, 최자실 전도사는 조 전도사에게 자신의 교회 창립예배 설교를 부탁했다. 단 다섯 명만이 대조동의 작은 집 거실에서 조용기 전도사의 첫 설교를 들었다. 최자실 전도사, 그의 자녀 셋 그리고 농사일을 하다가 비를 피하기 위해 잠시 들어온 나이 든 과부가 그들이었다. 강단은 사과 궤짝을 얇은 천으로 씌운 것이었다. 조 전도사가 설교를 하는 동안 피곤했던 과부는 잠이 들었고, 이내 코를 골기 시작했다. 조 전도사는 거의 자리를 박차고 나올 뻔했다. 그 후 몇 달 동안 조 전도사는 고향으로 가는 열차표를 사기 위해 서울역을 향하면서, 몇 번이고 교회를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신실한 목회 파트너였던 최자실 전도사가 그를 따라다니며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고 권면했다. 그는 한 번도 기차를 타지 못했다.
조 전도사는 1958년 여름 부흥회 동안 허스톤의 통역을 도우며 현대에서도 신유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병자를 위한 기도에 전심을 다했다. 그와 최 전도사는 새로 시작한 교회가 일어설 수 있도록 매일 간절한 기도 가운데 자신들을 하나님께로 내던지다시피 했다. 최자실 전도사는 다 낡은 군용 천막을 사다가 그 땅 위에 세우고, 교회 성장을 준비했다. 매일 새벽 4시 30분이면 그들은 빈 가스통을 종 삼아 두드리며 불어나는 성도들을 새벽기도에 불렀다. 나머지 일과는 그들이 사는 빈민 지역의 가정을 방문하며, 말씀을 전하며 기도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천막 안에서는 언제고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편은 조용기 전도사를 중심으로, 다른 한편은 최자실 전도사를 중심으로 팀을 이루어 가정을 방문하며 병자를 위해 기도해주었다.
조용기 전도사는 점점 늘어나는 자신의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폐병을 고쳐주셨으며, 지금도 그들에게 똑같은 치료를 하신다고 말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성령께서 돌파구를 열어주셨다. 중풍병에 걸린 여인이 걷기 시작했고, 7년 동안 마비 상태에 있던 남자가 고침을 받았다. 무당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우상을 불태우며 무당일을 끊어버렸는가 하면, 너무나 유명한 알코올 중독자가 회심했다. 이 모든 소식이 그 작은 지역에 퍼지자, 갑자기 성도가 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곧 다른 천막을 기존의 천막 옆에 연결하여 나무 합판으로 옆을 연결했고, 신문지로 합판을 도배했다. 추운 날씨에 따뜻하게 하려고 중앙에는 올챙이배 모양의 난로를 놓았고, 그 밑에는 쌀가마니를 펼쳐 놓았다. 조 전도사와 최 전도사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며 하나님께 순종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그들 넷이 앉아 이야기하는 동안 허스톤과 맥신의 손은 따뜻해져 갔고, 그들의 마음 또한 서로에 대한 우정 속에 따뜻해져 갔다. 조 전도사는 천막 교회 성도가 2백 50명이나 된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허스톤 부부는 조 전도사의 사역이 계속 성장하기를 격려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1960년에 선교사들은 조용기 전도사가 교단을 떠나자 자신들이 얼마나 좌절했는지를 허스톤에게 말했다. 몇몇 한국 목회자들 간에 정치적 분쟁이 있었는데, 그때 성도 수가 얼마 되지 않는 한 목회자가 허스톤이 교회를 세우려고 했던 서대문의 부지를 불법적으로 점거했다. 허스톤이 이 사실을 조 전도사에게 말하자, 그는 분열에 끼어들기를 원치 않았다고 말했다. 여름부흥회에서 허스톤을 위해 통역을 하는 동안 신유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고, 자신의 신유에 대한 믿음이 그 사람들보다 강한 지금, 다른 것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때문에 교단을 떠났고 자신들을 독립 사역자로 칭했다.
1960년대 초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내에서 미국인 선교사들과 한국 목회자들 사이에 큰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표면적으로 이 논란은 신유(神癒)의 성경적 근거에 관한 것이었다. 서명삼에 따르면, 교단의 내분이 심화되는 가운데에서 조용기는 다른 한국 목회자들과 거리를 두고 미국 선교본부의 주요 인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마찬가지로 선교사들도 젊은 조용기를 자신의 편에 두려고 했는데, 이는 그가 신유의 은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인해 인기 있는 영-한 통역자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1960년 2월 1일에 미 하나님의 성회가 펴낸 목회자와 선교사 명부에 따르면, 허스톤의 주소지는 3118 W. Desota, Pensacola, Florida였지만, 그의 사역지는 Korea였다.
허스톤이 다음에 조용기 전도사를 본 때는 1960년 초봄이었다. 허스톤 가족은 부산항으로 보낸 짐을 기다리면서 몇 달간 부산에 머물러 있던 때였다. 조 전도사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곧 입대하여 2년간 복무하라는 입영통지서를 받은 것 때문이었다. 조 전도사는 한창 늘어나는 성도를 걱정했다. 최자실 전도사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사역이었다. 이야기를 마칠 무렵 조 전도사는 허스톤에게 자신이 군대에 있는 동안 최 전도사와 함께 천막 교회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허스톤은 미소를 지으며 조 전도사를 안심시켰다.
허스톤 가족이 새 가구들을 서울로 가져오자, 최자실 전도사는 천막 교회의 몇몇 청년들을 데리고 와서 천막 교회 옆 선교사 숙소에 있던 허스톤의 이동주택을 위해 슬라브를 쳐주었다. 맥신과 허스톤은 매일 이른 아침 천막교회에서 기도회를 가졌다. 기도회 후에 30분간 머무르며 더 기도하거나 최 전도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머지 시간은 최 전도사와 함께 가가호호 전도와 심방을 했다. 이따금 시멘트 블록으로 된 집도 있었지만, 대부분 판잣집이었다. 어디를 가든 전한 메시지는 똑같았다. “구원하고, 병 고치고, 복을 주고,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내용이었다.
최 전도사와 성도들은 조 전도사가 어떻게 하든 병역을 빨리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도했다. 어느 날 새벽기도회에서 하나님께서는 허스톤에게 분명하게 말씀해주셨다. 조용기 전도사가 7개월 만에 군대에서 나오게 된다는 것이었다. 최 전도사에게 이 말을 전하자, 씩 웃기만 하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다. 허스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조 전도사를 면회했다. 매번 만날 때마다 허스톤의 메시지는 동일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조 전도사를 곧 우리에게 보내주신다. 우리는 조 전도사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그 후 허스톤은 수도육군병원[현 국군수도병원] 마루 위 요에서 자고 있는 조 전도사를 보게 되었다. 다음에 찾아갔을 때, 허스톤은 간이침대와 함께 매트리스를 가져갔다. 하나님께서 조 전도사를 조기 제대하게 하신다면, 그동안만이라도 조 전도사를 가능한 편안하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조 전도사가 군에 있는 동안, 허스톤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계속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허스톤은 미국에서 커다란 새 천막을 가져와 시장 가까이 펼친 뒤 부흥회 광고를 냈다. 성령께 집중하며 설교했지만, 조 전도사가 너무나 아쉬웠다. 통역을 맡은 사람이 지금까지 만난 통역자 중에 가장 형편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때 허스톤은 하나님은 통역자로 인해 제한되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후에도 그토록 통역을 못하는 통역자는 만나지 못했지만, 그렇게 강하게 역사하시는 성령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기간 부흥회 아침 집회에서 너무나 강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나머지, 허스톤은 그만 자기가 혹시 한국의 오순절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할 정도였다. 팔백 명 가까이 되는 회중이 기도할 때 그 옆을 지나가자 모두가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하늘의 강권하심이었다. 시장에서의 부흥회를 마치고, 허스톤은 이전의 낡은 천막을 거두고 근처 언덕 꼭대기에 새 천막을 쳤다. 얼마 후, 천막 교회 성도 수는 육백 명이 되었다.
군에 입대한지 7개월 후, 조용기 전도사는 병원의 진단에 따라 제대를 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식언치 않으셨고, 나중에는 피가 나던 치질도 고쳐주셨다. 그가 돌아온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천막교회 외에도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이런 일화는 허스톤에게 성령의 은사 중 “지혜의 말”이나 “지식의 말”의 은사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허스톤은 맥신을 통해 방언이 “기도의 언어”라는 것을 배우고 그 후 지속적으로 방언으로 기도했을 것이고, “은사들의 문”으로 인식되는 방언 기도는 허스톤의 성령과의 깊은 교제로 이어졌을 것이며, “지식의 말”이나 “지혜의 말” 은사를 받게 되었고, 그 은사에 따라 조용기의 7개월 군 생활 후 전역을 예언했을 것이다. 이런 허스톤의 성령과의 교제와 그 은사는 그대로 조용기에게 전수되었을 것이다.
휴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허스톤은 글로벌 컨퀘스트의 일환으로 1천 5백 명이 앉을 수 있는 조립식 건물을 매입하기 위해 모금했었다. 젊은 조용기 전도사가 군대에 있는 동안, 허스톤은 최자실 전도사와 함께 천막 교회 사역을 했을 뿐 아니라, 마침내 서대문 중앙에 좀 더 가까운 선교부지에 “글로벌 컨퀘스트”(Global Conquest)에 의한 중앙복음전도회관을 짓기 시작했다. 허스톤의 1959년 휴가 동안 미국에서의 사역은 글로벌 컨퀘스트와 맞물려 있었고, 1959년 말 내한은 글로벌 컨퀘스트의 파일럿 프로젝트의 핵심 사업이었던 서울에 대규모 전도회관 건립 담당자로서 내한이기도 했던 것이다. 허스톤은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통해 엄청난 일을 행하실 것을 알고 있었다. 라이베리아에서도 바울의 신약 성경적 패턴이 오늘날까지 통한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중요 도시에 강한 교회를 세울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영향을 그 나라에 확산시키신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허스톤은 갓 미 하나님의 성회 선교국장이 된 호간에게 라이베리아의 선교 경험을 살려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인 서울에 강한 교회를 세울 것을 제안했을 것이고, 호간은 그 임무를 허스톤에게 맡겼을 것이다.`
조 전도사에 대한 허스톤의 신뢰와 존경은 매일 매일 깊어만 갔다. 천막교회의 한 성도를 심방했을 때 일이다. 그 성도는 어느 추운 겨울날 조 전도사가 쌀가마니를 두른 채 큰 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더니, 방언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조용기 전도사는 그 천막교회에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 있었고, 허스톤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위대한 것들로 채워주시리라는 것을 알았다. 허스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를 존중하고자 했다.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허스톤은 조용기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허스톤은 그에게 하나님의 성회로 다시 돌아올 것을 고려해 보라고 말했다. 조 전도사는 교단 정치에 환멸을 느낀 터라, 다시 교단 일에 간여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부정적인 생각들을 떨어버리듯, 점잖게 고개를 저었다. “선교사님, 그 문제에 대해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에게 요청할 것이 더 있었던 허스톤은 말을 이었다. “서대문에 조립식 건물을 짓고 있는 동안, 저는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조 전도사와 최 전도사가 저와 함께 새로운 곳에서 사역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조 전도사가 장차 서대문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도 느끼고 있습니다. 교단으로 복귀를 말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 전도사가 더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허스톤은 이렇게 말했다. “내 선교관을 말해주겠습니다. 저는 선교사란 건물을 지을 때 사용하는 발판이나 비계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단 건물이 세워지고 모든 마감이 끝나면, 발판과 비계는 뜯어서 다시 다른 곳에서 사용합니다. 일단 교회가 세워지면, 선교사는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해야만 합니다. 한국교회의 리더십은 한국 사람이 맡아야 하는 것입니다.”
조 전도사는 허스톤의 말에 동의했지만,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선교사님과 서대문으로 갈 수 없습니다.” 조용기는 대조동에 있는 자신의 성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서대문으로 가는 장거리의 비싼 버스를 탈 수 있는 성도는 아주 소수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그날 오후에 헤어진 허스톤은 기도하며 상황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며칠 뒤, 허스톤의 이동식 주택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 전도사가 웃음을 지으며 서 있었다. “기도해 보았는데, 제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선교사님과 서대문으로 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최자실 전도사님도 함께 가실 겁니다.” 허스톤은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하지만, 조 전도사의 결정에 모두가 허스톤과 같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교단 내 일부는 “조 전도사가 너무 어리다. 너무 거만하다. 신유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너무 강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경건한 사람들도 판단을 잘못 내리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조 전도사는 허스톤과 함께 서대문으로 옮기겠다는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조 전도사는 곧 교단 가입을 신청했고, 다시 받아들여졌다.
김익진에 따르면, 조용기의 교단 이탈의 원인은 그의 타협하지 않는 믿음과 교회의 급속한 성장에 대한 특히 이완식과 정규창의 질시였다. 당시의 가장 큰 문제는 교단 목회자들이 오순절적 교리들을 배우기는 했지만, 그것을 사도행전의 모범에 따라 실행하려는 충분한 용기가 없었다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것을 실행할 용기가 있는 조용기를 다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로 돌아오게 한 것은 전적으로 허스톤의 공이었다.
새로운 건물이 세워지는 동안 조용기의 비전도 함께 커져 갔다. 그는 종종 하나님께서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로 이끌어 가실 것을 감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 말했다. 하루는 당시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인 영락교회를 함께 방문했다. 그 교회는 예배를 여러 번 드렸고, 1만 명 가까운 등록교인이 있었다. 텅 빈 성전을 조 전도사는 미터로, 허스톤은 야드로 재었다. 그들이 더욱 놀란 것은 그들의 서대문 새 성전이 더 넓다는 사실이었다. 허스톤은 하나님께서 조 전도사의 마음에 심어주신 것으로 알고 있는 비전에 함께 협력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 일은 허스톤을 흥분케 했다. 이때 허스톤은 자기의 역할이 조 전도사에게 명령,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소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조언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새 건물이 세워지는 동안, 허스톤과 조용기는 공사현장 옆 공터를 빌렸다. 그들은 대조동의 천막을 가져와 그곳에 치고는 연속 부흥회를 열었다. 대조동에서 그들을 따라온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선교사 숙소에 교회를 세운 존 스테츠 선교사와 함께 남기로 했다. 허스톤과 조용기는 3주에 걸쳐 아침과 저녁에 공터에 세운 천막에서 부흥회를 가졌다. 아침에는 허스톤과 조 전도사가 번갈아 설교를 했고, 저녁에는 초청 강사인 샘 토드(Sam Todd) 부흥사가 조 전도사의 통역으로 성회를 인도했다. 부흥회 첫날에 이미 천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천막에 몰려왔다. 매일 수십 명이 회심을 하고 병고침을 받았으며, 수 많은 사람들이 성령충만을 체험했다. 그들이 교회를 헌당하기 전, 최자실 전도사와 열여덟 명의 여성도들은 주위 1천여 가구를 방문하며 앞으로 있을 헌당 예배에 사람들을 초청했다.
허스톤은 1961년 4월 13일 제8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1962년 4월까지 봉사했다. 66명이 참석한 제8회 총회에서 4일째 되는 날, 허스톤은 교단의 문제들이 발생한 것을 회개하며 무릎을 꿇고 울부짖었다. “이것은 우리의 잘못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우리 선교사들이 회개합니다.” 다른 선교사들이 허스톤을 따라 울며 기도했다. 그날 선교사들은 금식하며 밤새 기도했다.
1961년 6월 15일에 열린 부흥센터 봉헌예배는 글로벌 컨퀘스트의 파일럿 프로젝트의 절정이었다. 그날 오후 2시 30분에 그 새로운 건물의 1,500명 수용 좌석, 그 복도들, 그리고 그 건물 밖에 세워졌던 천막은 적어도 3,000명의 사람들로 가득 찼다. 연사로는 당시 문교부 장관, 국회 부의장 윤채영 박사, 퇴역 합참의장 정달빈 장군이 초청되었다. 저녁 집회에는 그 오후 집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모였다. 그 봉헌예배에 대해 허스톤은 다음과 같이 썼다.
수 천 명의 사람들이 사방에서 번잡한 서울 중심가 서대문 교차로를 향해 몰려들었다. 그들은 크고, 아름답고 새로운 하나님의 성회 부흥 센터 안으로 밀려들었다. 1961년 10월 15일, 이날에 꿈과 비전이 결실을 맺었다!
한국 하나님의 성회의 선교사 스텝진에게, 이것은 수년 동안 바랐던 것의 성취를 의미했다. 거기에 눈으로 볼 수 있는 벽돌들, 회반죽, 페인트, 그리고 강철로 이루어진 서울 부흥 센터 건물이 서 있었다. 그 건물을 위해 너무도 많은 기도가 드려졌고, 너무도 많은 눈물이 흘려졌다.
글로벌 컨퀘스트 프로그램에게 이것은 그 “파일럿”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절정을 의미했다.
동양지부장 M. L. 켓참(Ketcham)에게 이것은 영광스러운 승리를 의미했다. 그 승리는 거의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들을 넘어선 승리였다.
전도자와 그의 부인 샘 토드(Sam Todd)에게 이것은 그들의 성공적인 1956년 서울 부흥 직후 그들을 사로잡았던 한 꿈의 성취였다.
건축 선교사(missionary builder) 아더 알버그(Arthur John Ahlberg)에게 이것은 우리의 선교지 전체에서 가장 큰 교회 건물들 중의 하나의 성공적인 준공이었다. 봉헌일 전날, 알버그 형제는 안도의 쉼을 쉬며 뒤로 물러서서 나무 판넬로 잘 덮여 있는 커다란 대들보들, 부드러운 옥색 천정, 평온한 베이지 색의 정면, 흰 회반죽 벽들, 그리고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멋진 좌석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경건하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완성되었다.” [알버그는 건축가였는데, 1929년에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고 1934년 11월부터 부인과 함께 만주, 홍콩, 일본, 필리핀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선교하며 교회 건물들과 부흥회관들을 건축했다. 알버그의 마지막 선교 건축 프로젝트가 바로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글로벌 컨퀘스트의 파일럿 프로젝트의 중점 사업이었던 서울 부흥회관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건축가”(Builder in the Kingdom)라는 별명이 붙었다.]
한국에게 이것은 복음화를 향한 새롭고 강력한 발걸음의 시작이었다. 여기에 젊은 목회자들이 와서 일어나고 있는 부흥을 목격할 것이다. 여기에 서울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의 많은 다른 지역들에서 구름 같은 사람들이 와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진정한 능력인 신약 메시지를 들을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은 실제로 행사되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할 것이다.
나의 탁월한 동료 조용기와 나의 아내 그리고 내 자신에게 이것은 우리가 수개월 동안 지고 살았던 짐을 영광스럽게 벗은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전에 지어보지 못했던 가장 큰 책무의 시작이기도 했다.
봉헌일은 그 센터에 잇대어 있는 장소에 세워진 큰 천막 안에서 진행되어왔었던 삼 주간의 부흥 집회의 절정이었다. 이 집회의 인도자는 전도자 샘 토드(Sam Todd)였다. 그 천막 집회의 마지막 며칠 동안, 천막 밖의 군중은 천막 안에 가득찼던 군중보다 더 많았다. 3,000명 이상이 공개적으로 구원을 간증했었다. 그들 중 수백 명이 지금도 정기적으로 그 센터의 예배들에 참석하고 있다.
그 천막 집회 동안, 많은 사람들이 몸의 치유를 간증했다. 귀머거리이며 벙어리 한 사람이 마이크 앞에 나서서 그 군중에게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셔서 즉시 그의 귀들을 열어주셨었고, 그에게 말의 능력을 주셨다고 간증했다. 절뚝발이들이 다시 발들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센터가 완공되는 동안 열렸던 그 집회 동안 영광스럽게 그 도시를 방문하셨다.
그 봉헌 예배는 오후 2시 30분에 시작될 것이었지만, 1,500명의 사람들이 1시 45분에 교회 안에 있었다. 오후 2시에 복도들이 가득 찼고, 사람들은 바닥에 앉았다. 15분 후, 서 있을 수 있는 모든 공간 조차 없어졌다. 사람들이 여전히 그 건물 곁에 세워져 있는 천막 안으로 밀려들었다. 보조 스피커가 그 천막 안에 설치되었다. 적어도 3,000명이 이 역사적인 순간에 그곳에 있었다.
허스톤은 그날 저녁 순복음중앙부흥센터의 첫 정규 전도 집회에서 성령이 역사하신 것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175명 이상이 그 집회 동안 확실하게 구원을 경험했다. 100명 이상이 치유를 간증했다. 한 청각장애인이 듣고 말했다. 한 시각 장애인이 “제가 볼 수 있어요, 볼 수 있어요!”라고 외쳤다. 걸을 수 없던 한 여인이 손과 무릎으로 거리를 기어와 그 성전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복도에 누워 그 메시지를 들었다. [샘 토드의 설교와 조용기의 통역에 의해] 그 말씀이 전해지는 동안, 그녀의 마비된 근육들이 생명력을 얻기 시작했다. 치유 기도가 끝날 무렵, 그녀는 자기 발로 뛰어올라 손을 흔들며 기뻐하며 걷기 시작했다.
그 교회의 담임은 허스톤이 맡았고, 조 전도사는 협력 사역자로 일했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조 전도사가 목회를 위한 교단 목사안수를 아직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허스톤은 한국어에 유창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 전도사가 사역의 많은 부분을 담당했고 최자실 전도사가 협력했다. 처음 그들은 교회 이름을 순복음부흥센터라고 불렀고, 얼마 후 5백 명 정도 수용할 발코니를 추가로 지었다. 그들은 예배를 마치 천막 부흥회처럼 드렸지만, 항상 더 영원한 장막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주로 허스톤과 조 전도사가 말씀을 전했지만, 더 많은 성도가 모이도록 기도하는 가운데 여러 외부 강사도 초빙했다.
몇 달이 지나자, 정규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자들 중 여러 사람이 부흥센터를 교회처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뿐 아니라 조 전도사도 허스톤에게 남녀 집사를 세우길 바란다고 말했다. 허스톤은 망설였다. 종종 미국교회의 집사회의 경우 집단의 힘이 생겨 목회자와 회중에게 자신의 결정에 따르도록 하는 경우가 있었다. 허스톤이 아는 몇몇 집사들은 상당히 사업적인 반면, 진정한 영성이 거의 없었다. 결국 그들로 인해 문제가 생겼었고, 허스톤은 그 교회에 그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조 전도사는 허스톤이 주저하는 이유를 알고는 증가하던 직장인 평신도 모임에 와달라고 청했다. 허스톤은 조 전도사가 섬김의 도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보고, 사역에 대한 그들의 신실함에 감사하며 계속해서 서로 섬기기를 격려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신실한 마음으로 성전 안내, 주일학교 봉사 등을 했으며, 많은 시간을 내어 병자와 초신자를 위한 심방을 도왔다. 그곳에 앉아 있는 동안, 허스톤은 다른 시각에서 모든 것을 보기 시작했다. 이들은 허스톤이 미국에서 본 몇몇 집사들과는 달리 남들을 섬기고 봉사하는데 적극적이었으며, 조 전도사가 집사로 임명하고 싶어하는 성도들이었다. 그 신실한 모임 가운데서 허스톤은 조 전도사가 옳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얼마 후, 조 전도사는 집사를 임명했다. 더 이상 청중을 모으기 위한 부흥강사 초청 부흥회는 없었다. 대신 그들은 성도를 가르치고 동기를 부여하여 남들을 섬기고 전도하게 했다. 허스톤은 조 전도사가 곧 담임 교역자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그의 은사를 모든 것에 우선하게 했다. 조 전도사의 설교는 솔직담백했고 기름부으심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고,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하게 하는 은사를 주셨다. 때문에 그들은 수 년 간 지속했던 새로운 사역의 패턴을 시작했다. 주일 아침에는 조 전도사가 구원과 신유에 대해 설교했고, 저녁에는 허스톤이 성령침례에 대해 설교했다.
조 전도사가 주일 아침 설교할 때면,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모여서, 병자들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오는, 일어선 자리에서 기도를 해주는 방법을 처음 시작했다. 조 전도사는 병자를 위한 집단 기도를 했고,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특별한 치유의 모습이 일어나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가 병 나은 것을 각각 말할 때면, 그 병들었던 자가 일어나 손을 흔들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들은 곧 주중 프로그램도 개발했다. 주일은 설교했고, 월요일은 휴식을 위한 가족의 날이었으며, 화요일과 수요일은 교회 사무실에서 상담을 했다. 조 전도사는 수요 저녁 설교를 준비했다.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허스톤과 조 전도사가 함께 심방 했다.
1962년 매 주일 약 1천 2백여 명의 성도가 출석했고, 그해 4월에는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에서 조 전도사를 목사로 안수했다. 허스톤은 담임 사역자 직분을 내려놓고 자기가 이름을 붙인 “고문 선교사(missionary advisor)”가 되었다. 허스톤은 공식 스텝 직을 원하지 않았다. 허스톤의 직무는 조 목사를 예우해 주는 것으로 바뀌었고, 그의 새로운 역할은 더 젊은 사역자들을 독려하고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주중에는 신학교 학생 중 핵심 멤버들을 데리고 다른 도시에 가서 부흥회를 가졌으며, 그곳에 새로 개척된 교회를 돌보기 위해 한두 명의 학생을 두고 왔다. 주중 다른 날은 새로 개척된 교회나 어려운 교회를 돕기 위한 모임에 참여했으며, 때로는 가정이나 갓 개척된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했다. 1962년 5월 13일 그들은 교회명칭을 “순복음중앙교회”로 바꾸었으며, 이것은 교회의 위치를 부각시켰고, 그들의 사역의 철학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한편, 점점 증가하던 청중들은 곧 활기찬 회중이 되었다.
조용기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존에 대한 많은 소중한 기억들을 갖고 있다. 내가 1960년에 한국군에 입대했을 때, 나의 버둥대고 있던, 그러나 성장하고 있던 천막 교회의 직무를 존에게 맡겼다. 나의 교회는 그의 지도력 아래서 두 배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돌아왔을 때, 존은 또한 서울의 중심가에서 보다 가까운 곳에 한 큰 성전을 짓고 있었다. 함께 이전하자는 존의 제안을 처음 받았을 때, 나는 거절했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과 같았다. 왜냐하면 나의 천막 교회 회중 가운데서 그곳까지 버스를 타고 갈 여력이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과 존이 이겼고, 우리는 1961년에 이전을 단행했다. 내가 아직 목사 안수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존이 그 교회의 두 번째 시기의 설립자로 일 년 간 봉사했다. 내가 1962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을 때, 존은 내려와 “고문 선교사”(missionary advisor)가 되었으며, 내가 담임 목사가 되었다. 그때부터 1970년까지 계속된 한 패턴이 시작되었다. 내가 주일 아침에 여러 차례의 예배들에서 구원과 신유(salvation and healing)를 설교하면, 존은 두 차례의 저녁 예배들에서 성령에 대해 설교했고, 교회들을 개척하기 위해 몇 주 동안 여러 지방으로 가곤 했다.
성경말씀은 언제나 틀림이 없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허스톤은 조용기 목사를 존중해 주었고, 조용기 또한 허스톤을 성심껏 예우해 주었다. 조 목사는 허스톤의 가족을 늘 염두에 두었는데, 허스톤이 지방으로 설교하러 갈 때면, 최 전도사와 함께 늘 맥신과 캐런이 잘 있나 찾아주었다. 한번은 캐런이 깊은 슬픔에 빠져있었을 때 집을 방문하였다. 캐런에게는 해피라는 아주 쾌활한 금빛 코커 스파니엘 강아지가 있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눈에 흐릿한 막이 생기며 시력을 잃기 시작했다. 한겨울 날씨가 추워지자 해피를 따뜻한 작은 이동식 주택에 데리고 들어왔다. 하지만 해피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앞을 거의 보지 못하는 해피가 머리를 가구에 부딪칠 때마다 캐런은 마음이 깨어지는 듯 아파했다.
조 목사의 반응은 즉각적인 것이었다. 그는 허리를 굽히더니 그의 손을 해피의 눈에 대고 시력 회복을 위해 기도해 주었다. 다음날 해피의 눈을 보니 하얀 막이 사라지고 없었다. 해피는 아무런 시각장애를 느끼지 않으며, 그날부터 캐런과 함께 다시 놀기 시작했다. 캐런은 성장하던 그 교회의 다른 아이들처럼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웠다. “하나님은 정말로 고치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매일 매일 삶에 있어 모든 부분을 하나하나 담당하시는 분이시다.”
조 목사는 다른 여러 면에서도 허스톤 가족을 격려했다. 허스톤 가족이 라이베리아를 떠나기 얼마 전 맥신은 임신 4개월에 사내아이를 유산했었다. 그들은 그 아이를 구두 상자에 넣어 아프리카에서 살던 집 뒷마당에 묻었었다. 비록 그들에게 캐런이 있었지만, 그 슬픔은 결코 완전히 떠나지 않았었다. 허스톤 가족이 한국에 갔을 때, 맥신의 유산에 대해 말해준 사람은 조 목사뿐이었다. 하루는 조 목사가 찾아와 흥분하며 허스톤에게 한 여성도가 교회에서 본 것을 말해주었다. “어제, 저녁 꿈에 천국에 갔었습니다, 조 목사님. 너무너무 아름다웠어요. 한데, 그곳에 자신이 존 허스톤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어린 소년을 보았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꿈이죠?” 그 성도가 말한 소년의 나이는 죽은 허스톤의 아들과 일치하는 나이였다. 허스톤 부부는 처음으로 성령께서 그들의 상실을 위로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언젠가 아들을 다시 볼 것이다. 한때 허스톤이 격려했던 사람이 이제는 허스톤을 격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훨씬 더 위대한 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1963년 7월경 허스톤은 조용기와 함께 마가렛 칼로우가 사역하고 있던 전주 영생 고등학교와 교회에서 5일간의 집회를 열었다. 그 집회는 또한 극동 선교지부 지부장 켓참(Maynard Ketcham)도 강사진에 참여했다. 2,000명이 훨씬 넘게 참여한 집회는 영생교회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학생들뿐만 아니라 나이 든 사람들도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 조용기는 특히 병자들을 위한 기도에 집중했다. 마지막 날 집회에서 조용기는 영생병원에서 신장문제로 죽어가던 한 청년을 위해 기도했다. 조용기가 사망을 꾸짖자, 그 환자는 일어나 말했다. “생명의 영을 받았습니다. 저는 죽지 않고, 살아날 것입니다.” 약 4시간 후, 그는 의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퇴원하겠다고 말했다. 곧 그와 그의 가족은 그 교회 예배들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1963년 여름, 더운 주일날 조 목사는 꽉 찬 성전에서 2번의 아침 예배를 인도했다. 항상 설교를 잘하는 그였지만, 그날따라 몹시 피곤해 보였다. 오후에 그는 3백 명의 새신자에게 물침례를 줄 예정이었다. 조 목사는 자신이 담임 목사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아주 열심히 노력했다. 하지만 허스톤은 염려가 되어 사역을 돕고 싶다고 제안했는데, 조 목사는 단호했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직 튼튼합니다. 더군다나 이것은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조 목사는 3백 번이나 사람들을 물속에 넣었다 끌어올렸다 하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었다.
조 목사는 저녁 예배에 자신이 통역할 미국 부흥사를 영접하러 공항에 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조 목사는 담임목사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려 했지만, 그가 과중한 짐을 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던 허스톤은 그에게 다시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내가 공항에 대신 나가서 부흥사를 만나고 호텔로 모셔다 드릴테니, 조 목사님은 식사도 하고 좀 쉬십시오.” 조 목사는 다시 거부했다. “아니요. 그 부흥사는 제가 나올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 목사는 공항으로 가서 부흥사를 모시고 호텔에 여장을 풀게 한 뒤 곧바로 저녁 집회 장소로 이동했다. 결국 조 목사는 식사할 기회조차 없었다. 저녁 집회가 시작되자, 허스톤은 강단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허스톤은 협력 선교사로서 대개 주일 저녁 예배에 설교했고, 초청 강사가 왔을 땐 함께 자리를 하여 사역을 도왔다. 맥신과 캐런이 평소에 앉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며, 성가대의 찬양을 듣고 있었다. 설교 시간이 되자 조 목사는 천천히 강단으로 걸어가 초청 강사 옆으로 섰는데 약간 흔들리는 듯 보였다. 당시 조 목사는 최고의 통역을 하고 있었다. 몇 분 동안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는 것 같았다. 조 목사는 지쳐 있었지만 불같이 설교하는 강사와 똑같은 몸짓을 하면서 통역을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조 목사의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마루로 쓰러졌다. 그의 마른 몸이 마루 위에서 맥이 빠진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허스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조 목사에게 달려갔다. 조용기는 희미한 소리로 허스톤을 불렀다. “존, 나 죽습니다.”
집사들이 재빨리 조 목사를 근처 병원으로 호송했다. 허스톤은 놀란 부흥사에게 다른 통역을 붙여주고 놀란 회중에게 설교하게 하고는 맥신과 함께 바로 뒤따라갔다. 허스톤은 몇 십년 후에도 희미한 기억 속에서 녹색과 하얀색의 응급실에서 맡았던 소독약 냄새를 생생하게 떠올렸다. 조 목사는 침상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누워있었다. 병원에서는 조 목사의 심장이 1분에 2백 회 이상 뛰고 있으며, 호흡도 간신히 하고 있다고 전했다. 하얀 유니폼을 입은 간호사가 들어와 검사를 위해 큰 주사기로 피를 뽑아갔다. 허스톤과 성도들은 자리에 앉아 머리를 숙인 채 그 젊은 목사를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마침내 의사가 움직임이 없는 조 목사를 진찰하기 위해 왔다. 의사는 몇 분 동안 검사를 하더니 허스톤과 성도들을 향해 돌아섰다. “이분은 육체적으로 완전히 탈진했습니다. 건강이 손상되었고 심장이 약해져 있습니다. 회복하기 위해서는 침대에 누워 쉬는 수밖에 없습니다.” 의사는 잠시 멈추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저의 소견으로는 이분은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설교나 목회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다시 긴장하게 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 위기 상황은 허스톤과 사역자들에게 빠른 결단을 필요로 했다. 최자실 전도사와 허스톤은 일시적으로 목회사역을 나누었다. 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휴식을 취해야만 하는 조 목사를 위해서였다. 허스톤은 조용기 목사가 회복되는 동안 자주 면회했다. 예배에 몇 번 참석한 것 외에 조 목사는 대부분의 시간을 침상에서 기도와 안식과 말씀을 읽으며 보냈다. 그는 더 이상 교회의 모든 짐을 혼자서 지고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최자실 전도사와 허스톤, 둘조차도 함께 지고 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형편이었다. 놀랍게도 교회 운영은 효과적으로 되고 있었다. 하지만 더 성장하려면, 이런 식으로는 조용기 혼자로서도 또 최자실 전도사와 허스톤으로서도 육체적인 한계로 인해 불가능하다는 것을 조용기는 알고 있었다.
조 목사는 그 답을 찾기 위해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사도행전을 읽고 있을 때, 조 목사는 초대교회의 성장과 사역 패턴을 주시하게 되었다. 오순절 날 3천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고, 사도행전 4장에서는 그 수가 5천 명을 더했으며, 5장에서는 수많은 무리가 그리스도께 나왔다. 그리고 성령께서 매일 매일 그 수를 더하셨다. 함께 모일 수 있는 큰 장소가 한 곳도 없었던 그때의 신자들은 회당이나 성전으로 나갔다. 그리고 믿는 무리들을 이끄는 리더는 단 19명뿐이었다. 12명의 사도와 7명의 집사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조 목사는 초대 예루살렘의 교회가 어떻게 그 많은 무리들을 돌보았는지 궁금했다. 자신은 늘어나는 3천 명의 회중도 충분히 돌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 목사는 자신이 그 부분을 여러 번 읽는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집에서 모여 함께 떡을 떼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함께 나눈 것을 보았다고 했다(행 2:42∼47). 그 수 많은 성도들은 작은 그룹으로 나뉘어 각 가정에서 모이되, 그들은 가정을 방문했을 뿐 아니라 가정에서 예배도 드렸다. 그리고 훗날에는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눔바와 빌레몬과 그의 가족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의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다(롬 16:3∼5, 고전 16:19, 골 4:15, 몬 1∼2). 대조동 천막에서 모인 교회 개척 시절에도 성도들은 지역을 4곳으로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각 지역의 연락체계를 정해 이따금 다른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곤 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 나타난 것이 훨씬 더 나아 보였다.
조 목사는 또한 구약도 읽고 있었는데, 이드로와 모세의 이야기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출 18:5∼27). 그는 자신이 모세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느꼈고,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충고를 세심히 읽었다.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이 꼭 해야만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집사들을 가정 예배의 리더로 세우고, 주중에는 서울 전역의 가정에서 모이는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주일과 수요일에는 조 목사가 계속해서 설교를 했고, 교회는 꾸준히 성장하여 갔다. 너무나 놀랍고 성경적인 계획이었다. 최자실 전도사와 허스톤은 조 목사에게 이 계획을 추진하도록 격려했다. 그들은 지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마침내 기력을 회복한 조 목사는 집사들과 남성 리더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열었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평신도 리더들을 임명하여 가정 모임을 갖도록 하신 것을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한 집사는 “일을 마치고 나면, 너무 피곤하여 모임을 이끌 수 없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몇몇 그룹은 분명 교만해져서 교회를 이탈하여 다른 교회를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세 번째 평신도 리더는 “이 계획이 성경적으로는 보이나, 자신들이 이에 대한 훈련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통적인 교회 활동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게다가 그는 “이 때문에 사례비를 드리는 것이 아니냐”고 조 목사에게 반문하기도 했다. 회의 결과 리더들은 “멀리 가셔서 오랫동안 휴가를 보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조 목사는 깊이 낙담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홈 그룹을 시작하려던 그의 첫 시도가 실패하고 만 것이었다. 전통과 틀에 사로잡힌 사고는 그의 남성 리더들을 바꾸기에 너무 강했다.
최자실 전도사는 종종 여성 그룹을 이끌었는데, 이들은 효율적으로 심방을 했고, 심방은 가정 모임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당시 이 모임의 여성도들은 조용기 목사에게 여성을 가정 모임의 리더로 세우는 것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었지만, 조 목사는 주저했다. 더구나 남성우위의 한국 문화의 편향성과 성경의 특정 본문들은 조 목사를 더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성경을 더 깊이 공부하면서 조 목사의 부정적 입지는 줄어들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여인들을 사역 가운데 얼마나 자주 사용하셨는가를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일깨워주신 것이다.
조 목사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묻고 계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누가 예수를 낳았느냐?” “여인인 마리아입니다.” “누가 예수를 키웠느냐?” “여인인 마리아입니다.” “누가 예수의 사역을 주위에서 돌보며 그의 쓸 것을 공급했느냐?” “여인들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마지막 수난을 당할 때까지 남아있던 자들이 누구였느냐?” “여인들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 일어난 후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부활의 사실을 알리기 위해 처음으로 말을 건넨 사람은 누구였느냐?” “여인입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있을 때, 여인들이 그의 사역을 도왔고, 이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니라. 어째서 여인들로 섬기게 하지 못하는가?”
그래서 조 목사는 여선교회 여집사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조 목사가 그들에게 자신의 육체적인 약함을 이야기하자, 몇몇 집사들은 울고 말았다. 그들은 조 목사가 목회를 계속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성경적 패턴을 따르는 것, 즉 평신도 지도자들로 하여금 서울 전역에서 가정 모임을 이끌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하자, 흥미를 갖고 들었다. 그리곤 이렇게 반응했다. “목사님, 무엇이든 우리가 할 일을 말씀해 주십시오. 순종하겠습니다. 그 사역에 임하겠습니다.”
하지만 조 목사가 여성 그룹의 리더로 여성을 세우겠다고 남자 집사들에게 공표하자 어려움이 뒤따랐다. 어떤 집사들은 무리를 지어 여자들을 세우면 교회를 떠나겠다고까지 말했다. 조 목사는 불만에 가득한 그들과 이치를 따졌다. “좋습니다. 그것이 결정하신 바라면, 그렇게 하시고 떠나십시오. 제가 집사님들께 가정 모임을 이끌어 달라고 요청했을 때, 집사님들은 거절하셨습니다. 저는 아직 몸이 아픈 상태로, 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이러한 상황으로 몰고 계시며 저에게는 이제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저는 여성을 사역에 참여토록 하겠습니다.”
첫 그룹들이 곧 형성되었다. 조 목사가 계속 투병했기 때문에 최자실 전도사가 그 조직을 이끌고 나갔다. 서울 전역, 서로 다른 지역에서 이십 명의 여성도들이 첫 리더들로 임명되었다. 각 리더는 자신의 그룹에서 봉사하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음악 카세트를 담당했고, 어떤 이들은 교육을 담당했고, 어떤 이들은 외부 강사를 초빙하여 강의를 주선하는 사역을 했다. 대부분의 그룹은 20∼30명 정도로 구성되었다.
조 목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이끌고 계신지 분명히 설명했지만, 성도 중 참여하는 자는 아주 소수였다. 성도들의 반응은 실망스러운 것이었지만, 조 목사와 나는 이 일에 대해 성도들에게 자주 말했다. 조 목사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한동안은 모든 것들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문제들이 곧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 새신자가 리더에게 “삼위일체”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열심은 있지만 신학적 지식이 없던 리더가 하나님은 몸이 하나고 머리가 셋인 것 같다고 말한 것이었다. 다른 리더들은 강사들을 자신의 모임에 초청을 했는데, 그들의 신학적 입장이 교회와 다른 것을 가르쳤다. 그 결과, 어떤 남자가 한 그룹에 들어가 모임을 못하게 했고, 또 다른 남자는 자신의 아내가 그룹을 인도하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에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아내를 때리고 말았다. 첫 그룹은 거의 붕괴되고 말았다. 몇몇 남자들은 기뻐했다. 조 목사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계속 문제를 넘어 나가라고 격려하시는 것을 느꼈다.
조용기 목사가 소그룹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발표하자, 남성도들 중 일부는 이에 반발했다. 조 목사의 사무실에 능률적으로 일하는 몇몇 여성 리더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조 목사를 격려하며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우리들은 설교하는 법을 모릅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르쳐주시면, 모임에 가서 목사님 말씀을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가정 모임을 갖는데 목사님의 도움이 더욱 필요합니다.” 그래서 매주 수요일 저녁 예배 전, 조 목사는 자원하는 여성리더들을 만나 등사한 공과지를 나누어주며 가르쳤다. 거기에는 다음 주에 나누어야 할 내용의 개요도 적혀있었다. 여성 리더들은 조 목사가 나누어준 자료를 가지고 모임에 가서 전달했다. 조 목사는 또한 가정 모임이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일반적인 지침을 알려주었다.
아주 잠시 동안은 모든 것이 잘되어 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곧 새로운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그룹 모임은 매주 다른 가정으로 돌아가며 진행되었는데, 그만 다과를 차리는 데 있어서 서로 먼저 가정보다 더 잘, 더 많이 차리려는 경쟁의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 너무 긴 예배 시간으로 인해 아내들이 집안일을 등한시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시계만 바라보는 남편들을 짜증 나게 했다. 그리고 어떤 그룹에서는 지역이 너무 큰 나머지 리더들이 심방하기 위해 장시간 버스를 타야만 한다는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일부 리더들은 신앙적 교리가 맞지 않는 외부 강사를 계속해서 초빙했으며, 어떤 그룹에서는 회원 간에 돈을 서로 빌리고, 또 그 돈을 잘못된 곳에 투자하는 일이 생겼다. 한 리더는 그룹 리더들이 주마다 드리는 헌금을 훔치기도 했다. 일부 그룹은 50명까지 성장하여 한 명의 리더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수 이상으로 성장했다. 나이가 든 리더들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지쳤고, 결국 떨어져 나갔다.
조 목사는 분명한 지침을 갖고 대응해나갔다. 다과는 비싸지 않은 것으로 간단히 마련하며, 순서가 정해진 1시간 모임이 끝날 때 대접하는 것으로 했다. 사전 승인 없이는 외부 강사를 세울 수 없게 했으며, 돈을 빌리거나 모임의 다른 사람에게 투자하는 것을 금하게 했다. 헌금은 리더와 회계가 함께 계수한 후 회계가 교회로 가져오도록 했다. 조 목사는 젊고 강건한 여성 리더들을 선발했다. 그룹의 인원이 15명이 되면, 부리더를 임명한 뒤 새 그룹을 세우게 했는데, 이때 기존 멤버들의 반까지 새 그룹에 가세할 수 있었다. 모임이 끝나면 리더는 서면 보고서를 교회에 제출했다. 미래에 이 그룹들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강력하게 사용하실 줄은 그들 중 아무도 몰랐다.
1963년 말 조용기와 허스톤은 말레이시아, 쿨알라룸푸르에서 집회를 인도했다. 1964년부터 셀그룹 활동은 아주 잘 진행되었다. 그해에 허스톤은 문서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글로벌 컨퀘스트의 파일럿 프로젝트의 지원을 받아 『순복음』을 수천 부로 늘리기로 결정했다. 순복음은 교단의 공식 계간지일 뿐만 아니라, 전도를 위한 문서로도 사용되었다. 1964년 여름에 허슨톤은 로버트 암스트롱(Robert Armstrong), 그리고 버드와 함께 마가렛 칼로우가 선교하고 있던 전주 영생고등학교에서 6일간의 집회를 열었다.
허슨톤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2년 이상의 휴가를 떠나는 동안 헨리 스웨인(Henry A. Swain)과 리디아 스웨인(Lydia Swain) 선교사 부부로 하여금 조 목사를 돕도록 했다. 조 목사는 자신과 교회에서 성령께서 행하시는 것을 허스톤 부부에게 자주 편지를 써 알려주었다. 1964년 겨울, 조 목사는 이러한 편지를 보냈다. “매주 20∼30명의 가족이 새로 오고 있습니다. 조만간 결혼할 예정입니다. 하객이 2∼3천 명 정도 올 것 같은데, 결혼식과 피로연이 끝나면 비행기를 타고 부산으로 갈 예정입니다. 다시 한번 성혜와 저는 선교사님을 몹시 그리워하고 있답니다.” 답장과 함께 허스톤은 하나님께서 조 목사를 강력하게 사용하시는 것을 멀리서 보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몹시 기뻐했다. 하나님께서는 조 목사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 지에 관심이 있었을 뿐 아니라, 조 목사 개인의 행복에도 관심을 갖고 계셨다. 교회가 일정하게 계속 성장하듯, 하나님께서는 조 목사의 삶도 확장시키고 계셨다. 조 목사의 약혼녀 성혜는 아주 아름다운 젊은 숙녀였다. 그녀는 재주가 빼어난 음악가였으며, 조 목사의 사역에 큰 도움이 될 자매였다.
1965년 2월 10일에 발간된 미 하나님의 성회 목회자와 선교사 명부는 한국 선교사 허스톤 부부가 조지아, 파인 마운트 벨리(Pine Mt. Valley, Georgia)에서 휴가(furlough) 중이라고 표기했다. 허스톤은 휴가 중에도 불구하고 엘돈 브라운(Eldon A. Brown) 선교사가 부산에 개척한 순복음명륜교회의 성전건축에 필요한 자금을 위해 몇백 달러를 모금하여 보냈다.
조용기와 김성혜가 결혼한 후 1965년 봄, 허스톤은 조용기 목사로부터 소식을 들었다. 편지에는 온통 교회성장에 대한 내용뿐이었다. “이제 주일에 두 번의 예배로는 몰려오는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습니다. 5월 첫 주부터는 3부 예배를 새로 시작할 예정입니다. 최근에는 대구에서 매우 놀라운 부흥회를 인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셨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집회 장소로 들어가려고 하는 바람에 경찰이 통제를 위해 파견되기까지 했습니다. 아내와 저는 현재 함께 살 집을 짓고 있습니다. 한국에 오시면 기쁜 마음으로 저희 새집으로 모시겠습니다. 매일 아침 영광의 보좌 앞에서 선교사님과 선교사님 가족을 위해 잊지 않고 기도드립니다.”
휴가 중이던 허스톤은 펜테코스탈 에반젤 1965년 8월 호에 한국 선교에 대한 글 하나를 기도했다. 그 글에서 허스톤은 한국 청년들 사이에서 오순절적 큰 부흥이 일어나고 있어서 더 많은 전도 문서들이 필요하고, 조용기 목사와 동역하고 있는 서대문 회관의 확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렸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한국에서 하고 계시는 것은 이적 이야기의 연속이다! “잃어버린 자들을 위한 빛”(Ligth-for-the-Lost)은 이 극동 아시아의 이 매력적인 나라에서 경이적인 결과들을 성취하는 것을 돕고 있다.
하나님께서 서울의 청년들 가운데서 하고 계시는 것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우리의 기독교 청년들은 흥분과 짜릿함을 느끼며, 거리에서 그리고 가가호호 방문하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에 푹 빠져있다.
이 경험은 청년들에게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들에서 비춰지고 있는 현재의 불안정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a strong antidote)를 제공하고 있다. 양산 중학교와 고등학교 학생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전도 문서에 큰 흥미를 표하였다. 그들 가운데서 한 부흥이 일어나 몇몇이 성령침례를 받았다.
1964년 여름 동안, 랄프 버드(Ralph Byrd) 전도팀이 서울, 마산, 그리고 전주에서 집회들을 열었다. 서울에서 온 성경학교 학생들이 낮 동안 전도 문서를 나누어 주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거리를 메웠다. 500,000부의 소책자들, 20,000의 쪽 복음서, 1,000권의 성경책, 그리고 40,000부의 『펜테코스탈 에반젤』 한국어 번역본이 배포되었다.
청년들 가운데서 이런 활동에 대한 소식은 도시들 전역에 퍼졌고, 수천 명을 집회들로 끌어들였다. 그리스도를 전하고 복음 문서를 배포하는 오순절 청년들의 열심은 한국 전역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군중들이 소도시들에서 보통 2,000명, 서울에서 4,000명이 집회들에 참석하고 있다.
거의 이 년 전에, Light-for-the-Lost는 한국에서 몇 전도 집회들에 사용될 문서를 위한 1,000불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받았다. 이 기금은 곧 소진되었고, 추가적인 1,200불을 요청받았다.
1965년 4월에서 6월 동안, 3,650불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성령을 통해 계속 역사하고 계시는 도시들 안에 분배하기 위한 추가적인 전도 문서를 제공하기 위해 수령되었다. 현재 서울 전도회관은 하나님께서 이 수도에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에 몰려들고 있는 군중을 수용하기 위해 확장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센터는 현재 2,000석 규모이지만, 계속되고 있는 부흥은 이 시설을 불충분하게 만들고 있다.
오늘날 한국 전도의 문들은 활짝 열려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움직이고 계실 때 움직여야만 한다(We must move while God is moving). 복음 문서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한국의 주요 도시들을 흠뻑 적시는 것은 Light-for-the-Lost의 한 훌륭한 목적이다. 선교사들은 이 위대한 남선교회의 선교부(missionary arm of Men’s Fellowship)로부터 그들이 받고있는 도움 때문에 가장 감사하고 있다.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허스톤은 성령님께서 쉴새 없이 기도하는 조 목사에게 보상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결혼한 지 일 년이 지나서, 조 목사와 사모 사이에 첫아들이 태어났다. 성령님께서 교회에서 역사하시는 동안에 조 목사는 이따금 자신의 진정한 부르심이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고심하고 있었다. 1966년 2월 조 목사로부터 주일 낮 예배에 5천 명이 출석한다는 편지를 받고 감사드렸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분명 목사와 교사로 부르셨습니다. 제 아들이 이제는 상당히 컸습니다. 제게 웃음도 짓고 말도 붙여옵니다. 아내가 선교사님께 안부를 전해달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 돌아오실 날만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그들이 함께 하지 않았지만, 성령님께서는 당신의 종 조 목사와 셀 리더들을 통해 강력하게 역사하셨다. 허스톤 부부는 매일 매일 조 목사와 그의 가족을 위해 기도했고, 성령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사용하시는지를 보며 기뻐했다.
1967년 7월 1일에 허스톤이 안식년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기 직전, 조 목사는 서울에서 라디오 사역을 위해 후원금을 마련해주는 노고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그는 편지를 통해 교회소식을 전했다. “우리는 4층을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재 4층은 교회학교와 청년부를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 교회 도서관 개관과 함께 문학 프로그램도 시작했습니다. 교회 월보(monthly church magazine)도 발행했습니다. 현재 이곳의 사역은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선교사님의 협력의 손길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씨를 뿌리며 흘리던 눈물은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놀라운 수확을 거두는 큰 기쁨에 차 있습니다. 빨리 오셔서 이 승리와 놀라운 추수에 우리와 함께 하십시오! 오직 선교사님과 우리만이 이날을 보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알뿐입니다.”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해, 셀 그룹이 시작된 지 3년이 지난 1967년에 그들은 1백 26개의 홈 셀과 함께 7천 7백 50명의 성도를 섬기게 되었다. 성장은 그 후에 더 빨리 진행되었다. 1968년 5월 22일에 발간된 미 하나님의 성회 목회자와 선교사 명부에서는 허스톤이 휴가 중이라는 표식이 삭제되었다. 1968년이 되자 홈 셀은 1백 45개로 늘었다. 여성 그룹의 놀라운 성장에 자극을 받는 가운데 교회의 남성도를 염려하던 이철익 성도가 첫 남성 셀 모임을 안창식이란 성도의 집, 넓은 거실에서 갖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5명만이 참석하였지만, 나중 20~30명이 모였다. 곧 교회 전체 남성도들이 홈셀 구역예배를 시작했다.
허스톤과 조용기는 예전의 사역 패턴으로 돌아왔다. 조 목사는 주일 오전 3차례 구원과 치유를 중심으로 예배를 인도했고, 허스톤은 저녁 2차례 성령을 중심으로 예배를 인도했다. 월요일은 가족의 날이었다. 교회에서 일하는 분들도 집에서 쉬었다. 허스톤은 월요일에는 한두 시간 조 목사와 함께 사우나를 하러 가기도 했다. 실내에 수도가 있기 전 피로를 풀기 위해 발전했다는 한국의 전통방식이었다. 뜨거운 증기가 그들 주위에 가득하면, 그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며 함께 웃었다. 월요일 다음 주일 설교의 대지를 설정하는 조 목사의 관습 때문에 그들은 종종 설교 요점과 인용하려는 성경구절에 대해 자주 토론했다. 예전처럼 주중에는 신학교 학생 중 핵심 멤버들을 이끌고 다른 도시나 농촌지역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한 후, 새로 세워진 교회를 위해 한두 명을 남겨두고 왔다. 서울에 있을 때 조 목사와 허스톤은 화요일과 수요일 사무실에서 지냈으며, 허스톤은 상담을 하고 수요 저녁 예배를 준비했다.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가정이나 사업장에 가서 기도 심방을 했다.
허스톤에게 당시의 일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어느 추운 가을날 있었던 심방이었다. 조용기 목사와 허스톤은 교회에 출석하는 한 가난한 가족의 판잣집을 찾아 산꼭대기 근처까지 걸어갔다. 그들은 방 한 칸 집 더러운 쪽마루에 걸터앉아 기도하고 그들을 심방했다. 바로 그때 멀리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심방이 끝난 후, 그들은 울음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살펴보았다. 조 목사와 허스톤은 쌀쌀한 바람을 가르며 지붕이 없는 아주 작은 판자 구조물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울어대는 어린아이들과 함께 몸을 움츠리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 어머니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조 목사와 허스톤은 조용히 들어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의 남편은 한국 전쟁 때 그녀와 세 아이를 남겨둔 채 사망했다. 그녀는 나이가 30세에 불과했는데 중노동과 배고픔이 모든 것을 앗아갔다. 그녀는 마치 노인같아 보였고, 아파서 가족을 부양할 능력이 없었다. 조 목사는 몸을 웅크려 울고 있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온기를 찾고 울음을 그칠 때까지 옆에 있어 주었다.
그 모습은 허스톤의 영혼을 감동시켰다. 하나님은 조 목사를 비전과 지혜로 사용하실 뿐 아니라 깊은 연민을 통해서도 사용하고 계셨다. 조 목사와 허스톤은 교회로 돌아와 사람들을 보내 그 산에 사는 미망인을 돌보게 했다. 그 미망인은 너무나 감동된 나머지 교회에 나와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드렸다. 몸이 완쾌된 후, 그녀는 거리 행상을 하며 세 자녀를 부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무렵 다른 목사들이 무엇 때문에 조 목사를 하나님께서 강력히 사용하시는지 찾아와 묻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조 목사를 도와 교회 성장을 위한 해결책을 찾게끔 하셨을 뿐 아니라, 셀 그룹이 다른 교회에서도 일어나도록 하셨다. 교회가 계속 성장하여 예배당이 인원을 다 수용할 수 없었다. 허스톤과 조용기는 1969년 서울의 여의도섬에 교회를 건축하기로 하고 착공을 함께 했다. 미 하나님의 성회가 1969년 6월 2일에 펴낸 목회자와 선교사 명부는 허스톤의 주소를 Central Post Office Box 385, Seoul, Korea로 기입했다.
VI. 베트남 선교
1969년경 허스톤은 점차 전쟁 중이던 남베트남 선교에 거룩한 부담을 갖게 되었다. 결국 그는 사이공에 탐색 여행을 떠났다. 그는 남베트남 정부에 사이공을 중심으로 활동할 선교센터 설립 허가를 타진했다. 1970년에 군목 돈 워렌(Don Warren, Donald Charles Warren)과 그의 부인(Nancy (Miller) Warren)은 펑 타우(Vung Tau)에 한 고아원과 난민촌을 세웠고, 그 구조 사역이 커지자 미 하나님의 성회에 도움을 청했다. 워렌 군목은 1964년에 한국에서 근무하기도 했었다. 1970년 4월 경 허스톤과 조용기는 인도네시아, 수라바자(Surabaja)에서 미 하나님의 성회의 글로벌 컨퀘스트의 후신인 굿 뉴스 크루세이드(Good News Crusade)의 일환으로 집회를 열었다. 50에서 100명이 제단 초청에 응했다.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았고, 다른 사람들은 치유 이적들을 간증했다. 공식 문서에는 허스톤이 1970년 9월 19일까지 한국 선교사였다고 표기되어있다.
워렌의 요청에 미 하나님의 성회는 1971년부터 베트남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다. 미 하나님의 성회는 1971년 7월, 존 허스톤 부부가 하나님의 성회의 새로운 선교지인 베트남으로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으니, 그 사역을 하나님께서 예비해주시도록 기도해주기를 회원들에게 당부했다. 그리고 허스톤 부부는 베트남으로 이동했다. 허스톤은 1972년 2월에 베트남에 보다 많은 복음 문서들을 배포하기 위한 사역을 위해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 있었다. 이렇게 그는 미 하나님의 성회 소속 첫 공식 남베트남 선교사가 되었다. 공식문서에 따르면, 허스톤의 선교지가 베트남으로 바뀐 때는 1973년 1월 3일이다.
허스튼은 1972년에 “비록 우리의 임무가 단순히 물질적인 구호만을 위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절박한 상황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못한다면, 베트남에 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1972년에 첫 베트남 하나님의 성회 교회가 펑 타우에 세워졌다. 1973년 글렌 스테포드(Glen Stafford)는 펑 타우에 첫 성경학교를 열었다. 그리고 그해 7월에 베트남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 in Vietnam)가 베트남 내무부로부터 교단 승인을 받았다. 그 교단 사무소가 사이공에 개설되었는데, 첫 총회장(general superintendent)이 바로 허스톤이었다.
베트남에는 마약중독자 문제가 심각했다. 베트남 하나님의 성회와 베트남 정부 관계가 열렸다. 베트남 대통령의 부인이 서명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회는 베트남 사이공에 마약재활센터를 설립했다. 허스톤은 마약재활센터를 통해 마약중독자들과 접촉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마약중독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사역했다. 그리고 성경학교를 세워 제자들을 훈련시키며, 교회사역을 했다.
1975년 북베트남의 승리로, 하나님의 성회는 다른 교단들처럼 핍박을 받았다. 교회들은 폐쇄되었고 재산은 공산 정권에 의해 압류되었다. 허스톤 부부는 어쩔 수 없이 베트남을 떠나야 했지만, 베트남을 마지막으로 떠난 미국인들 중에 그들이 있었다. 공식 문서에 따르면 그의 베트남 선교는 1975년 4월 24일자로 종결되었다. 한 역사가는 1975년부터 1988년까지의 시기를 “침묵의 시기”(Silent Period)라고 명명할 정도로 베트남 하나님의 성회가 입은 타격은 큰 것이었다.
허스톤은 현재 베트남에서 허스톤스 미니스티리즈(Hurstons Ministries)의 설립자이며, 1970년에서 1975년까지 하나님의 성회 선교 베트남 담당자(country coordinator)로 소개된다. 허스톤은 베트남에서의 선교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우리가 5년간 베트남에서 선교단을 이끌고 있을 때, 조 목사는 최선을 다해 우리를 도와주었다. 그는 김남수 선교사와 그의 가족을 파송하여 당시 국제 선교팀에 합류시켰다. [김남수는 1974년 월남에 순복음중앙교회의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75년 월남패망 2주 전, 미국 군용기를 타고 만삭의 아내, 딸 세 식구가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태국으로 간 지 5일 만에 아들을 낳았다. 현재 뉴욕 프라미스교회(순복음뉴욕교회의 후신) 원로목사다.] 1973년 말, 조 목사의 교회는 훨씬 더 큰 여의도의 성전으로 20명의 목회 스텝과 1만 2천 5백 56명의 성도와 함께 이전했다. 그리고 1974년 말이 되자 5백 42개의 셀과 1만 6천 3백 9명의 성도로 더 성장했다.
베트남에서 아내와 내가 보낸 시간은 큰 기쁨과 큰 슬픔이 함께 채워졌다. 우리는 여러 선교사들로 구성된 팀을 이끌고 있었는데, 이들은 성경학교와 교회를 개척했으며, 마약 재활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하지만 1975년 4월 사이공이 함락되자, 우리는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압박감을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미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심장마비에 걸리고 말았다. 베트남에 이제 어린 교회를 막 탄생시켰다고 생각했는데, 그 어린 교회를 아무런 도움도 없이 홀로 남겨두고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캘리포니아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다가 회복실에 있었을 때, 조용기 목사는 나를 보기 위해 그 먼 곳까지 찾아왔다.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모두 나를 놀라게 하고 기쁘게 했다. 조용기 목사, 그는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강력하게 사용하시는 사람이었다.
베트남 하나님의 성회(The Assemblies of God in Vietnam (AGVN))는 세계 하나님의 성회 협회에 가입되었다. 2001년에 두옹 탄 람(Duong Thanh Lam)이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2009년에 베트남 하나님의 성회는 40,000명의 회원을 갖게 되었다. 허스톤이 베트남에 눈물로 뿌린 씨앗이 풍성하게 발아된 것이다.
VII. 한국 재선교
1976년 초 많은 사람들로부터 “교회성장의 아버지”(the father of Church Growth)라고 불리던, 선교 지도자이자 풀러신학교 선교대학원 교수였던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Anderson McGavran, 1897년 12월 15일 - 1990년)이 조용기 목사를 찾아왔을 때, 여의도순복음교회는 3만 5천 명에 가까운 교세에 1천 6백 개 이상의 셀로 성장해 있었다. 맥가브란 박사는 "세계에서 조직이 가장 잘 정비된 교회"(the best organized church in the world)라며 조용기 목사에게 기구를 만들어 폭발적인 교회성장을 직접 보려고 찾아오는 많은 목회자들을 격려하고 가르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심장마비로 쓰러진 허스톤을 보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조용기 목사는 맥가브란 박사의 제의에 대한 하나님의 확증을 느꼈다. 1975년 베트남 선교사역의 붕괴로 인한 충격에서 회복 중이던 허스톤 부부를 만난 자리에서 조 목사는 서울로 돌아가 자신과 함께 교회를 방문하는 목회자들을 가르치는 사역을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허스톤은 즉각적으로 하나님께서 부인과 자신을 다음 단계로 인도하고 계심을 알았다.
1976년 11월 7일, 그는 아내 맥신과 딸 캐런과 허스톤은 서울로 돌아와 국제교회성장연구원(Church Growth International)을 출범시켰다. 목회자와 교회 리더들을 대상으로 서울과 해외에서 세미나를 개최했는데, 회장에는 조 목사가 그리고 허스톤은 실행위원으로 일했다. 제1회 국제교회성장연구원 주최 대회가 1977년 6월 22일부터 서울에서 열렸다. 2백 명이 넘는 미국 목회자들과 약 1백 20명의 태국 목회자들을 포함한 총 6백 명의 목회자와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그해 허스톤은 존 스테츠가 졸업한 Southeastern College로부터 명예 신학박사 학위(Doctor of Divinity)를 받았다. 국제교회성장연구원에서 허스톤은 3가지 유형의 세미나를 개최했다. 하나는 서울에서 개최한 것으로 교회를 배우기 위해 찾아온 목회자와 리더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둘째는 서울에 올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외국에서 연 것이었으며, 셋째는 사역 초창기 교회 내 리더십을 위한 것이었다.
1978년이 되자 국제교회성장연구원은 확실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고, 6천 명의 목회 지도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국내외에서 19번의 세미나를 개최했다. 같은 해, 그들은 세계 도처의 지도급 목회자들, 대부분 성도 1천 명 이상의 교회를 이끄는 목회자를 중심으로 국제교회성장연구원의 자문회를 발족시켰다. 조 목사와 허스톤은 다양한 세미나에서 강의했으며, 종종 자문회 위원을 초빙하여 함께 사역했다.
1978년 1월 초 허스톤과 조용기가 이끄는 연구원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첫 해외 세미나를 가졌다. 자카르타가 국가적으로 위급한 상황에 처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천 93명의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조 목사가 구원과 치유에 대한 말씀을 선포하며 병자를 위한 기도를 하는 가운데 저녁 이적의 집회에는 5천 명까지 참석했다.
1978년 어느 월요일 조 목사와 허스톤은 사우나에 함께 갔다. 그들은 교회 어린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모 가운데 버스를 타고 오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자녀들을 주일학교에 데리고 오지 못하는 성도들이 있었는데,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인가 혁신적인 방안이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했다. 조 목사의 방향 설정대로 어린이 부 담당 목사였던 캐런과 허스톤은 아동 구역 설립을 계획했다. 이 구역은 나중에 교회에서 가장 전도를 잘하는 구역이 되었다. 구역에 속한 아동 70%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가정에서 전도되어 나온 것이었다. 주일학교는 또한 계속 커져 가는 서울의 여러 지역에 지역 분교 성전을 열기 시작했다.
1978년 4월 말 국제교회성장연구원은 유럽에서 낮 세미나와 저녁 부흥회 형식의 대회를 독일, 스웨덴, 프랑스 그리고 스위스의 6개 도시에서 열었다. 스톡홀름 세미나에서는 유고슬라비아와 폴란드를 포함한 23개국에서 1천 2백 명의 목사가 참석하였다. 독일 칼스루에서는 4천 명이 저녁 기적 집회에 참석하였다. 이 대회 기간 수명의 사람들이 암에서 고침을 받았다. 조용기 목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신유의 능력을 행하심을 믿은 가운데 계속해서 기도의 강한 자가 되고 있었다. 낮 시간에 그들은 기본적인 원칙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저녁에는 조 목사가 믿음이 충만한 목회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흐르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1978년 7월에는 208명의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가 포함된 호주사람들이 국제교회성장연구원의 환영을 받았다. 허스톤과 조용기는 그들에게 교회성장의 원칙과 실제에 대해 3주간에 걸쳐 강의하며 교회 각 기관을 탐방시켰다. 그들은 특히 금요 철야 예배를 좋아했으며, 주일 예배와 셀 모임에도 참석했다. 그 세미나의 마지막 때 호주 방한단은 목표를 세웠는데, 결국 5년 뒤 그 교회들이 평균적으로 출석 600%의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9월에는 전 아시아 성도 세미나를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개최했다. 인도네시아가 가장 많은 330명 참가단을 보내왔다. 그 대표단 가운데는 전 대통령 수카르노의 첫째 부인인 이부 파트마와티와 두 명의 인도네시아 정상급 가수들 그리고 세 명의 가톨릭 수녀들이 포함되었다.
그때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셀 그룹은 2,000개가 넘어섰고, 목회자들은 더 많은 정보를 원했다. 수많은 나라에서 이에 대한 필요가 절실했다. 태국에는 600여 개의 작은 교회가 있는 반면에, 불교사찰이 2만 5,000곳이나 되었다. 더구나 태국 교회의 5곳 중 4곳은 전임 사역자를 두지 못하고 있었다. 이전부터 생각했던 대로 허스톤 자신이 선교사로 가는 대신 1979년 초, 허스톤은 방콕에서 조 목사가 주도하는 4일간의 교회성장 세미나와 저녁 기적 전도집회에 합류했다. 600명 이상의 태국 평신도 지도자들과 목회자들이 세미나에 참석했다. 매일 밤마다 평균 4,000명의 사람들이 방콕 시내의 집회 장소를 가득 메웠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성령 충만을 받았을 뿐 아니라, 100명도 넘는 사람이 귀머거리, 폐병, 천식, 허리 병, 피부 알레르기 그리고 심지어 소아마비 같은 병에서 고침을 받았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태국에 열린 집회 중 가장 대단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로이에트 시에서 온 솜붐 목사는 낮 세미나와 밤 기적 집회가 주는 이중 효과에 대해 글을 보냈다. “이번 집회 중에 나는 많은 것을 배웠을 뿐 아니라, 나의 다리와 허리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현재 저는 태국의 북동 지역에서 10개의 교회를 돌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벽기도를 시작했을 뿐 아니라, 성도들에게 금식과 기도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올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300명의 새신자를 보내주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번에 배운 것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1978년 9월 27일부터 30일까지 허스톤은 조용기와 함께 스테츠가 졸업한 플로리다, 레이크랜드에 있는 미 하나님의 성회 소속 Southeastern College에서 열린 연례 선교 세미나(Annual Missions Seminar)에 참석했다. 조용기는 그의 교회에 대한 경험을 참석자들과 함께 나누었고, 허스톤은 오후 시간에 배정된 교회성장세미나에서 강의했다. 그때 허스톤은 그 학교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11월 7일에서 17일까지 미주 지도자 교회성장 세미나가 선교센터에서 개최되었다. 미국 25명, 캐나다 1명, 서독 1명 등 모두 27명이 교역자가 참석했는데 조용기 목사, J. W 허스톤 목사, 웨이먼 로저스 목사가 강사로 나섰다.
1979년 4월 말 허스톤과 조용기는 호주 남부지역에서 3일간의 교회성장 세미나를 열었다. 호주 전역은 물론 타스마니아와 뉴질랜드에서 온 1,500명의 목회자와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그들은 개인의 믿음이 성장하는 법, 더 많은 불신자들을 교회로 이끄는 법 그리고 셀 그룹의 멤버들을 양육하는 법을 배웠다. 참가자들의 소속 교단은 오순절, 침례교, 루터교를 비롯 성공회와 연합교회 등 다양했다. 저녁에 이들은 3,000명의 지역 시민들과 함께 이적 집회에 참석했다. 조 목사는 말씀을 선포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시간을 갖고는 각 사람에게 병들고 아픈 곳에 각자의 손을 얹고, 친구나 친척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자주 조 목사에게 고침 받은 질병에 대한 지식의 말씀을 주셨다. 저녁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800마일 가까이 먼 길을 온 2명의 자매가 폐병의 고통에서 고침을 받았다. 다른 한 여인은 30년 간 자신을 괴롭혔던 갑상선이 나았다.
캐쓰 래버릭이라는 여인은 골수암으로 병원에 입원 중이었는데, 너무 고통스러워서 3시간에 한 번씩 몰핀을 맞아야 했었다. 그녀는 병원에서 나와 저녁 집회에 참석했는데, 병자를 위한 기도 시간에 자신의 몸에 따뜻한 것이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조 목사가 “이 시간 뼈에 이상이 있는 사람이 나았습니다”고 선언 했을 때 그때 그녀는 아팠던 통증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의사가 그녀를 검진했을 때, 골수암이 놀랍게 회복된 것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런 집회가 언제 또 있는지 알아봐야겠습니다. 저도 가보고 싶습니다!”
연합교회 소속의 어느 목회자는 이러한 편지를 보냈다. “이번 교회성장 세미나는 제 생애에 있어서 가장 생생하면서 도전을 주는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믿음에 대한 비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성장하라고 창조하셨는데, 이는 성령님의 능력에 의존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필요를 돌봐주고, 기도의 중요성과 성령님의 권위를 재발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과 우리의 믿음을 나누고 셀 그룹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회복하는 데 경각심을 늦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다른 목회자는 이런 글을 보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세우신 리더십보다 더 큰 교회를 세우지 못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번 세미나를 통해 호주 전역의 기독교 지도자들의 마음과 영혼을 넓히셨습니다.”
교회성장 세미나를 저녁 이적 집회와 함께 연계시켜나갔을 때, 해외 집회 시 그 영향이 극대화되고 있음을 계속해서 지켜볼 수 있었다. 언제나 신유의 소식이 있었고, 신유는 매번 집회를 더욱 강화시켰다. 그중 가장 인상에 남는 일이 산호세 전도대회에서 일어났다. 휠체어를 타고 온 한 남자가 병을 고침 받고 걷기 시작한 것이었다.
1979년 유럽에서 또 다른 집회를 갖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포르투갈, 프랑스, 스위스 그리고 핀란드였다. 3,000명이 넘는 목회자와 리더들이 4번의 교회성장 세미나에 참석했으며, 포르투갈 리스본 같은 곳에서는 8,000명이 넘는 청중이 저녁 이적 집회에 참석했다. 1,000명이 넘는 목회자들과 전도자 그리고 평신도 지도자들이 참석했던 프랑스 낭스 집회의 경우 진행본부에 몇몇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이 편지를 보내어 왔다. 국제 복음선교회(International Evangelical Mission) 회장은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신앙과 사역이 강화되고 갱신되고 충전되었다고 고백했다. 몇몇 침례교 지도자들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이제 주님께서 우리에게 열어주시는 비전의 세계로 들어갈 것입니다.” 어느 은사주의 지도자는 다음같이 적었다. “참석한 사람 모두가 개관적이고 긍정적이며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님의 그 위대하심의 깊은 차원을 발견하거나 재발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이 품고 있는 비전보다 더 크게 당신의 교회를 세우지 못하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1979년이 되자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0만 성도 돌파를 기념했다. 11월 4일 700클럽(미국의 유명한 기독교 TV방송 프로그램) 진행자이자 설립자인 팻 로벗슨(Pat Robertson) 목사가 감사예배에서 말씀을 전했다. 교회는 계속해서 7,000여 셀 모임을 강화시켰으며, 16개국에 92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82개의 교회를 세웠다. 또한 서울 공장지대에서 일하는 미혼 청장년을 대상으로 하는 청년 셀 모임도 발족했다.
1980년에는 첫 중국인 교회성장 세미나를 서울에서 열었다. 싱가포르, 홍콩 그리고 대만에서 300명의 참석자가 교회성장 원칙을 배우기 위해서 모였다. 대만으로 돌아간 많은 사람들은 “목표 80”의 일원으로 대만의 2,000 교회를 도와 평신도 지도자들을 가르치고 활용하는 일을 도왔다.
1980년 조용기 목사는 셀 모임이 더 커질 경우 반드시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만 명의 셀 리더 중 우수한 리더들을 지역장으로 임명하여 평신도 리더십을 통한 중간 관리를 시작했다. 각 지역장이 지역의 책임을 지고 5명에서 10명의 셀 리더를 돌보고 감독하도록 한 것이다. 셀리더를 돌보는 셀지역장 모임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1981년에 들어서자 첫 6개월 동안 7분에 한 명 꼴로 새신자가 등록했으며, 평균 한 시간 반에 셀 하나가 생겨났다. 1981년 중순이 되자 아동, 청년, 여성, 남성 셀이 1만 3,387개가 되었다. 그리고 그해 말 20만 970명의 성도를 이루었다.
1981년 7월 29일 허스톤은 생일파티에서 조용기목사로부터 평생 명예 목사직을 받았다. 1981년 11월이 되자 국제교회선장연구원을 이끈 지 5년이 되었다. 허스톤과 조용기는 115회의 세미나를 통해 약 5만 명의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섬겼다. 동시에 그들은 서울의 교회가 4만의 성도에서 20만으로, 셀 그룹이 1만 개까지 성장하는 것을 보았다. 이 무렵 조 목사는 세계 전역에 수천 명의 목회자와 교회에 영향을 끼치며 국제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더 많은 외국의 목회자들이 하나님 역사의 현장으로 여겨지는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보기 위해 찾아왔다.
하지만 허스톤은 그 무렵 이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 5년이 되자 국제교회성장연구원은 유능한 스탭진을 구성하고 스스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교회에는 국제교회성장연구원 업무를 담당할 만한 능력있는 사람이 준비되어 있었다. 조용기는 허스톤의 국제교회성장연구원 사역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존은 1970년에 5년 동안 베트남 선교지부장이 되기 위해 떠났다. [1975년] 사이공이 함락된 후, 나는 그에게 가족과 함께 서울로 돌아오기를 청했다. 1976년에, 존은 내가 국제 교회 성장 연구원(Church Growth International)을 진수시키는 것을 도왔다. 그 연구소는 우리 교회의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5년 만에 115회의 세미나를 열어 전 세계 나라들의 거의 50,000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훈련시켰다.
VIII. 귀국과 소천
1982년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허스톤은 조 목사와 계속해서 연락했다. 허스톤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도가 33만 명이 되었고, 기도원에 매일 1,500명의 방문객이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해 허스톤은 캘리포니아 신학대학원(California Graduate School of Theology)에서 문학박사(Doctor of Letters)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부총장과 국제교회성장연구소의 소장(Vice-President of California Graduate School of Theology and Dean of Church Growth International)을 역임했다.
허스톤은 1982년 2월11일부터 12일까지 미주리 스프링필드에서 열린 제1차 미국 하나님의 성회(A/G) 한국지방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74년 창설된 순복음 세계 선교회 미주연합회가 초석이 되어 미 하나님의 성회의 57번째 지방회가 승인되었고, 허스톤은 1년간 지방회장 서리로 봉사했다. 그는 1983년 3월 15일에서 17일까지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순복음 웨스턴교회에서 96명의 교역자들이 모여 열린 제2차 하나님의 성회 한국 지방총회에서 선출된 김기홍 목사에게 지방회장직을 넘겨주었다.
1984년도는 한국 개신교 100주년을 맞는 해로, 교회 이름을 순복음중앙교회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바꾸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8월 19일에 100주년을 기념하여 주일 예배에 설교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성령의 임재하심이 대성전 가득한 것을 느꼈습니다. 말씀을 전할 때 말이 거침없이 술술술 흘러나왔습니다.”
허스톤은 1998년 5월 20일 여의도순복음교회 창립 40주년을 맞이하여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초청을 받아 조용기와 함께 설교한 후 교회 성장 공로패를 받았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창립 40주년 축하 기사에서 교회창립 및 성역 40주년 기념예배가 5월 20일 대성전에서 드려졌다고 기술했다. 그 기사에 따르면, 이날 예배의 강사로는 존 허스톤 목사가 초청됐다. 그 기사는 존 허스톤 목사가 불광동 천막교회 개척부터 함께해 온 조용기 목사의 오랜 동역자였음을 밝혔다. 허스톤 목사는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고 인내하며 전진해 온 결과 오늘날 세계 최대의 여의도순복음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며 허름한 천막에서 설교하던 20대 젊은 청년이 세계 최대 교회의 당회장으로서 성역 40주년을 맞이한 것에 깊은 감흥을 감추지 못했다. 조 목사와 사모 김성혜 총장에게는 장성한 세 아들과 한창 자라는 손자 손녀들이 있었다. 교회 교적인은 75만이 넘었고, 세계 도처에서 순복음교회를 배우기 위해 목회자들이 몰려왔다. 허스톤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의 오랜 친구를 다시 보는 것은 몹시 흥분된 일이었다. 조용기 목사는 오직 위대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정중한 예의를 갖춘 사람이다. 그는 선교사로서 초창기 시절 자신과 함께 사역을 하였던 나를 예우하고자 마지막 시간에 나의 통역을 자처했다. 그 수 많은 성도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면서, 나는 조용기 목사에 대해 대단한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조용기 목사와 함께 나란히 서는 순간, 나는 그 기쁨이 모두에게 나타나며 우리의 삶을 함께 엮어 놓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2001년 9월 어느 날 밤, 집중치료실의 한 간호사가 허스톤의 가족에게 그가 곧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해 6월에 행해진 그의 심장을 여는 수술 이후, 그는 일련의 합병증들을 경험해 왔었고, 몇 차례 입원하고 퇴원해 왔었다. 그가 너무도 약해져서 담당 의사는 그에게 인공호흡기를 부착시켰었다. 그 장치는 스스로 호흡하기에 너무 약해진 사람을 도와서 숨을 쉬게 해주는 일종의 인공적 생명 유지 수단이었다. 성경과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며 겪었던 경험에서 배운 그의 아내, 맥신과 딸, 캐런은 주님께 간절하게 기도했다. 캐런은 너무 심하게 흔들려서 심지어 한국에 있는 조용기의 집무실과 접촉하여 그가 허스톤의 장례식에 설교하러 올 것인지의 여부를 물었다.
그 이후 며칠 동안 많은 사람들이 허스톤을 위해 기도하기 위해 찾아왔는데, 그들 중에는 몇몇 강력하게 기도하는 소중한 친구들이 있었다. 짐과 제인 톰슨(Jim and Jean Thompson)은 그의 사랑하는 친구들이고 위글리스워스(Wigglesworth)와 견줄만하게 치유 사역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은 메리랜드에 있는 한 교회의 목사들인데, 그를 위해 기도하기 위해 플로리다로 날아왔다. 그들의 기도 덕분에, 허스톤은 결국 다시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길을 예비하는 침례 요한과 같았다. 그는 여전히 온전한 돌파가 필요했다.
허스톤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조용기는 그저 그의 책상에 앉아 기도만 하지 않았고, 또한 장례식 설교를 준비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그는 한국에서 무려 7,000마일 이상을 날아 9월 29일에 플로리다로 갔다. 조용기가 그의 중환자실 안으로 들어왔을 때, 하나님의 능력의 어떤 감지할 만한 느낌이 그와 함께 들어왔다. 그는 허스톤에게 그가 장례식 설교를 하러 오지 않았고, 부활을 위해 기도하러 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조용기는 “나는 당신에게 800,000명의 나의 회중의 기도들을 가지고 왔습니다”라는 말을 더했다. 조용기는 허스톤에게 손을 얹고는 그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기도했다.
조용기의 방문과 기도 이후, 그는 빠르게 호전되어서 곧 퇴원했다. 그는 건강해졌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생명을 선언해 주시기 위해 그가 한때 조언했었던 사람을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에게 책을 쓰기를 촉구하시기 위해 그를 사용하셨다. 다음 날 아침, 한국으로 날아서 돌아가기 위해 떠나기 전에 조용기는 캐런에게 허스톤이 자신의 생애에 대한 책을 써야만 한다고 말했다.
비록 그 책이 조용기의 아이디어였지만, 그리고 그를 무척 존경하지만, 허스톤은 처음에는 머뭇거렸다. 그는 탁자 너머 건너편에 앉아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할 수 있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만 주신 꿈과 소명에 대해 그에게 말해주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가르쳐 주신 어떤 것들을 나누며 사람을 격려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러나 그는 진실을 직면했다. 비록 그는 당장은 건강하고, 여전히 얼마간 여행하고 있지만, 80세이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결코 얼굴을 만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너무 바쁘거나 너무 멀리 있어서 그에게 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 책은 읽을 수 있을 것이었다. 허스톤은 다시 한번,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의 목사가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조용기의 충고를 받아들여 그 책에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었다.
2003년 조용기의 권위를 받은 허스톤은 마침내 그 이야기들을 담은 자서전적 단행본을 세상에 내놓았다. 조용기는 이미 2001년에 기꺼이 그 책의 서언을 써주었다. 그는 그 서언에서 허스톤을 “나의 멘토”(my mentor)라고 소개했다. 그는 자신의 사역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던 두 사람을 꼽았는데, 그 두 사람은 최자실과 허스톤이었다. 최자실은 기도를 허스톤은 성령에 대한 진리들을 그에게 가르치며 조언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나의 아이디어였다. 존 허스톤(John Hurston)은 나의 사역에 큰 영향을 끼친 두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나의 소천한 장모 최자실은 내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다. 그녀는 많은 춥고 이른 아침에 기도하라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도록 나를 놀라게 했다. 그때는 그녀를 원망했지만, 그녀에게서 기도에 대해 배운 것은 나의 사역에 결정적이었다. 존 허스톤은 나의 멘토였다(John Hurston was my mentor). 1958년 이래로 존과 나는 함께 목회해 왔고, 일해 왔고, 웃어 왔고 그리고 울어 왔다. 그는 내게 인생의 많은 진리들을 가르쳐 주었지만, 특히 성령에 대한 진리들을 가르쳐 주었다.
허스톤의 부인 워나 맥신 허스톤(Wanna Maixne Hurston)은 2005년 5월 29일에 플로리다, 산타로사 카운티(Santa Rosa County, Florida)에서 향년 79세에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남은 몸은 플로리다, 에스캄비아 카운티, 펜사콜라의 해안가에 있는 베이 뷰 기념 공원(Bayview Memorial Park)에 안치되었다.
조용기는 허드슨의 아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존의 아내, 맥신(Maxine)은 그의 신실한 동역자였다. 맥신은 외모와 정신에 있어서 사랑스러웠고, 그녀의 방법은 부드러웠고, 그러나 그녀의 분별력은 날카로웠다. 그녀는 언제나 나와 그녀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격려가 되었다.
존 W. 허스톤은 맥신의 소천 2년 뒤, 85세에 플로리다, 산타로사 카운티, 걸프 브리즈(Gulf Breeze, FL)에서 2007년 7월 25일 소천했다. 그의 장례식은 2007년 7월 28일, 토요일 오후 3시에 펜사콜라, 세닉 흐위 3351(Scenic Hwy)에 있는 베이 뷰 기념 공원(Bayview Memorial Park)의 베이뷰 피셔-포우 채플(Bayview Fisher-Pou Chapel)에서 베이뷰 피셔-포우 채플(Bayview Fisher-Pou Chapel)에서 열렸다. 그의 남은 몸은 2007년 7월 25일에 그의 부인 옆에 누었다.
조용기는 허스톤과 동역했던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우리의 초기 해외 선교 여행 중에, 존과 나는 종종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호텔 방을 함께 썼다. 나는 함께 교제하고 사역했던 우리의 많은 절정의 시간들을 기억한다. 우리는 또한 여러 익살스런 일화들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독일에서 조깅하러 나갔는데, 몇 마리의 공격적인 개들의 추격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때 우리는 특별히 빠르게 뛰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각광을 받도록 밀어 넣으실 때면, 존은 한 번도 나의 증가하는 부상을 불쾌해하지 않았고, 그 대신 내 뒤에 서서 내가 하나님께서 하도록 부르신다고 느끼는 모든 일에서 나를 격려했다.
나의 교회는 존이 공식적으로 나와 함께 봉사했던 마지막 5년 동안 40,000명에서 200,000명으로 성장했다. 우리는 그 이래로 접촉을 유지해 왔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셨던 모든 새로운 길에서 언제나 존과 함께 기뻐했다.
존은 나의 목회를 변혁시키는 것을 도왔고, 나는 하나님 안에서 나의 목표를 성취할 수 있게 자라났다. 우리가 개척한 교회는 역사상 가장 큰 교회가 되었고, 이제 830,000명의 성도를 갖게 되었다.
허스톤은 큰딸 캐런 허스톤(Karen Hurston)과 작은딸 앤 허스톤 콜린스(Ann Hurston Collins)를 세상에 남겼다. 캐런은 1963년경, 열 살 때 성령침례를 받기를 원하게 되었었다. 조 목사와 허스톤이 그녀에게 물로 침례를 준 후, 그녀는 그보다 더 원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몇 달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 저녁 예배 때 그녀 옆에 맥신이 앉았고, 그녀가 성령침례를 받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맥신은 그녀에게 기대고 말했다. “애야, 성령침례는 선물과 같은 거란다. 너는 어떤 사람에게 선물을 달라고 간청하지 않고, 그저 손을 뻗어 선물을 받잖아. 내려놓고, 하나님을 찬양해봐, 그러면 받을 거야.” 어느 날 성도들이 함께 통성으로 기도할 때, 캐런은 마음을 놓고 부드럽게 하나님께 감사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는 갑자기 따스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이해하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어깨가 굽고 머리를 떨군 마귀가 천천히 걸어나가는 환상을 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자기가 성령침례를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캐런은 1994년에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조용기의 성장에 대한 『세계에서 가장 크게 성장한 교회』(Growing the World’s Largest Church)라는 책을 써서 출판했다. 그녀는 그 책에서 그 교회의 교인이었고, 그 교회 주일학교 교역자로 사역했던 입장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놀라운 성장의 요인들을 분석했다. 그 책을 통해 캐런은 조용기가 자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했다. “나의 사역을 통해, 나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온전한 의미를 설교하려고 애써왔다. 나는 사람들에게 희망, 믿음, 그리고 그들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주기를 원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의 통전적 사역을 전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그리고 캐런은 2001년에 『성공적인 셀 그룹』(Breakthrough Cell Groups)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캐런은 그 책에서 오클라호마, 털사에 있는 빅토리 크리스챤 센터(Victory Christian Senter)가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나누었다. 그 책은 그 교회가 속한 지역 사회의 필요들에 민감하며, 고정 관념을 깨면서 29개의 셀 그룹에서 12,00개의 셀 그룹으로 성장한 비결을 공개했다.
캐런은 2008년에 내한했다. 5월 11일에 캐런 허스톤 목사와 우크라이나에서 사역하는 국제교회성장연구원 보드멤버 8명이 여의도순복음교회 주일 2부 예배에 참석한 후 조용기 목사와 만나 환담했다. 조용기 목사와 김성혜 총장은 캐런 목사를 환영하며 반갑게 맞았다. 조용기 목사는 이들에게 “성령님을 인정하고 함께 동행하면 모든 나라가 파워풀해질 것이다. 4차원의 영성을 갖고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생각, 믿음, 꿈, 말을 할 때 기적이 일어나고 환경이 변화된다”며 꿈과 희망을 심어줬다.
2010년에 캐런은 한세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8월 20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빌딩 우봉홀에서 라이베리아 카브라케 마을 학교 건립을 위한 자선경매 행사가 개최되었다. 그 행사를 주관한 사람은 캐런이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 목사와 이영훈 담임목사, 김성혜 한세대 총장의 애장품이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의 학교 건립을 위해 기부되었다. 조용기 목사는 자켓과 넥타이를, 이영훈 목사는 넥타이와 설교 노트 원본(1984년 10월∼90년 11월) 등을 경매에 내놓았고, 김성혜 총장은 의류를 선보였다. 이와 함께 여의도순복음교회 초기 사역을 담은 사진 등도 다수 출품됐는데 이는 캐런이 내놓은 것이었다. 허스톤 교수는 “카브라케 마을은 지금까지 어떠한 학교도 세워지지 않았던 곳”이라며 “우리의 사랑이 라이베리아 아이들을 교육하는 데 전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학교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과정으로 운영되며 마을 대표 이름을 따 “윌리엄 키아프 카르마 리어즈 학교”로 불리게 되었다.
조용기는 허드슨과 맥신의 딸 캐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들의 딸 캐런(Karen)은 교회 사진들이 찍힐 때면 종종 나의 무릎에 앉았던 아이였다. 한 번은, 내가 매우 아팠고 여전히 총각일 때, 그녀는 내 이마를 쓰다듬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내가 자라면, 간호사가 되어 당신을 돌볼거예요. 기다려 준다면, 당신과 결혼할 거예요.” 그녀는 단언했다.
IX. 나가는 말
존 웨슬리 허스톤(John Wesley Hurston)은 1922년 7월 29일에 미국, 조지아, 무스코지 카운티, 컬럼버스에서 태어나 85세에 플로리다, 걸프 브리즈에서 2007년 7월 25일 소천했다. 그는 1938년 고등학교 3학년 때에 방언을 그 증거로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았고, 18세인 1940년에 미주리 주, 스프링필드에 있는 미 하나님의 성회 소속 성경학교들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중앙성경학교(Central Bible Institute)에 입학하여 1943년에 졸업했다. 그는 성경학교 1학년 때에 방언을 증거로 동반하는 성령침례의 경험을 성경연구를 통해 성경적 뒷받침을 확립함으로써 진정한 정통 오순절주의자가 되었고, 재학시절에 아프리카 선교 소명을 받았다.
그는 그처럼 아프리카 선교사로 소명을 받은 맥신 포스톤(Maxine Poston)과 1946년 10월 24일 플로리다, 펜사콜라에서 결혼했다. 맥신과의 결혼을 통해 허스톤은 방언이 성령침례의 증거로서 기능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한 기도 언어로서 기능을 갖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프리카 선교사로 파송받기 위해 시작한 목회를 통해 성령에 대한 전적인 의지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의 중요함을 배우게 되었다.
그 후 허스톤은 1948년 6월 25일 아프리카 선교사로 승인되어 8월에 라이베리아로 가서 1957년까지 라이베리아의 전국적인 오순절적 부흥을 이끌어내었다. 1958년 여름에 휴가 중이던 허스톤은 랄프 버드와 함께 내한하여 6대 도시에서 오순절적 부흥회를 개최했다. 그때 허스톤은 조용기를 만났다.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허스톤은 한국 선교로 방향을 전환할 결심을 했다. 해외선교국의 승인을 받은 허스톤은 글로벌 컨퀘스트의 파일럿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서울 부흥회관 설립에 대한 책임자가 되었다. 1959년 말 한국에 돌아온 허스톤은 조용기와 동역하기 시작했으며, 1969년부터 베트남 선교로 방향을 전환하여 베트남 하나님의 성회 초대 총회장이 되었으나 1975년 베트남의 패망 후 조용기의 권유로 1976년 다시 내한하여 국제교회성장연구원 설립을 주도하고, 전 세계의 수많은 교역자들, 평신도들에게 교회성장을 전수했다. 허스톤은 1980년 한국 선교를 마치고 미국으로 귀국하였다가 2007년 소천했다.
허스톤의 내한 선교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총회장, 문서위원회 위원장, 여러 교회 개척에 관여 등 교단 사역들을 포함하기도 했지만, 주로 조용기와의 동역으로 채워졌다. 허스톤은 신유가 여전히 현대에도 발생함을 성경과 실제 발생 현장을 통해 조용기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용기가 확고한 신유 사역자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허스톤은 조용기에게 성령에 대한 전적인 의존을 가르치면서 증거 방언과 경건 방언을 전수해 줌으로써 성령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의 길을 제시해 주었다. 허스톤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를 떠났던 조용기가 다시 복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글로벌 컨퀘스트의 파일럿 프로젝트의 중심 사업이었던 부흥회관을 건립해내고, 조용기를 담임 목회자로 세움으로써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기초를 놓았다. 그럼으로써 조용기가 세계적인 기독교 지도자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허스톤은 국제교회성장연구원의 설립과 사역에 참여함으로써 조용기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 비결을 전 세계에 전수해 주는 데 큰 역할을 감당했다. 허스톤은 조용기의 멘토로 조용기와 동역하고, 조용기에게 조언하며 함께 성장했다. 이런 허스톤과 조용기의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는 조용기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정통 오순절 신학 안에서 미국 하나님의 성회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서양과 동양의 합작품,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의 선한 결과이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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