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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 오순절 선교사 존 스테츠: 조용기 목사의 오순절적 아버지

한오신 2025. 5. 10. 19:22

A Pentecostal Missionary to South Korea, John Stetz: 

the Pentecostal Father of Yonggi Cho

 

 

1958년 9월의 존 스테츠

 

 

이창승

2025.4.9./2025.6.7.

 

 

내한 오순절 선교사 존 스테츠(이창승).pdf
0.38MB

 

 

I. 들어가는 말

 

    2003년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는 희년을 맞이하며 교단 발전기여자 7인을 선정하여 발표했는데 그들 중에 존 스테츠(John Stetz)라는 내한 선교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평가될 정도로 그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에 끼친 영향은 큰 것이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한국 내에서의 언급은 너무도 제한적이고 간략했다. 그리고 그의 대한 보다 상세한 언급은 네덜란드와 미국이라는 해외 대학교들의 영어로 써진 박사학위 논문들에서만 있어 왔고, 따라서 한국 오순절주의자들이 그 언급에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김익진은 2003년 박사학위청구논문에서 스테츠와 전화와 서신을 통해 인터뷰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스테츠를 필요한 부분에서 언급했다. 그리고 그의 스테츠에 대한 자료는 당연히 2003년 이전의 것이었다. 2005년에 50년사는 오순절적 내한 선교사들을 소개하면서 주로 버터필드(Charles W. Butterfield)의 글을 참고하여 존 스테츠의 생애 전체를 간략하게 소개했다. 또한 최재웅은 2017년에 제출한 박사학위논문에서 미국내 여러 자료들을 바탕으로 스테츠에 대해 필요한 부분들에서 언급했다. 최재웅의 스테츠 언급은 비교적 자세하지만, 아쉽게도 1962년으로 마감되었다.

 

찰스 W. 버터필드
50년사의 존 스테츠에 대한 글

 

    그래서 한국에 스테츠의 전 생애를 보다 상세하게 소개할 필요가 있다. 본 소고는 이런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스테츠에 대한 종래의 국내외 언급들을 바탕으로 미국 하나님의 성회 도서관 Flower Heritage Center에 있는 자료들을 첨부하여 보다 전체적이고 상세한 스테츠의 생애 복원을 시도한다.

 

 

II. 탄생과 오순절 신자로 성장

 

    존 스테츠(John Stetz)19211125일에 오하이오, 피츠버그에서 서북쪽으로 60km 지점에 있는, 굽이치는 오하이오강변 포트 호머(Port Homer, Ohio)에서 태어났다. 그는 흙 그릇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던 아버지, 피터 스테츠(Peter Stetz, 1893-1985)와 세르비아인 어머니 안나(Anna Karaffa Stetz, 1895 [Levovik, Zaječarski okrug, Southern and Eastern, Serbia]-1983)의 다섯 자녀 가운데 넷째였다. 그의 부모는 1911년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이민 왔으며, 헌신적인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어린 소년 스테츠는 대공황 때(1930?) 부모와 함께 오대호 연안의 오하이오, 클리브랜드(Cleveland, Ohio)로 이사했다. 그리고 19세인 1940년에 클리브랜드에 있는 제일 하나님의 성회(the First Assembly of God)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곧 그 교회에서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고 오순절주의자가 되었고, 전도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현재 미국의 동북부 오대호 남쪽에 위치한 클리블랜드의 동부 교외 지역인 린드허스트(1370 Richmond Road, Lyndhurst, Cleveland, OH)“the First Assembly of God”이라는 교회가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그 교회 홈페이지에는 그 교회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20111126에 클리브랜드 컴 홈페이지에 그 교회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에 따르면 제일 하나님의 성회는 설립 100주년을 맞이했다.

 

오른쪽 빨간 표식 부분의 제일 하나님의 성회

 

1940년경  First Assembly of God, 걸려있는 만국기는 그 교회의 선교를 향한 열정을 대변해준다.

 

 

현재의 First Assembly of God

 

 

    20251월에 미 하나님의 성회 역사신학자 글렌 고어(Glenn W. Gohr)는 커(Daniel Warren Kerr)에 대한 특집 기사를 썼다. 그 기사에 따르면, 클리브랜드의 First Assembly of God191110월경에 커 목사의 주도로 세워졌다. 커는 A. B. 심슨(Albert Benjamin Simpson)이 이끌던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CMA) 소속 성결 운동가였지만, 아주사 부흥 소식을 들은 후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고, 윌리엄 더함(William H. Durham)의 영향을 받았다. 191110월에 커는 클리브랜드에 있는 CMA 교회의 목사로 청빙을 받았다. 그 교회는 오순절적 메시지에 매우 개방적이었다. 2년 후 그 교회는 정관을 변경하고 오순절적 경험을 적극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교회명을 “The Pentecostal Church of Cleveland”로 바꾸었다. 동시에 커는 CMA를 탈퇴했다. 1914년 커와 그 회중은 미 하나님의 성회에 가입했고, 교회명을 “First Assembly of God”으로 바꾸었다. 그는 1916년에 미 하나님의 성회의 근본 신앙 진술문(The statement of fundamental truths) 작성 요청을 받은 5인 중의 한 명이었고, 그의 안의 대부분이 채택되기도 했다. 커는 1919년에 그 교회를 떠나 캘리포니아로 가서 1920년에 로스앤젤레스에 Southern California Bible Institute를 세웠다.

 

Daniel Warren Kerr
1919년 총회 실행위원들 가운데 커, 뒷줄 오른쪽 첫 번째
1921년 서던 캘리포니아 바이블 스쿨 교원들과 학생들과 커

 

    초장기에 클리브랜드 제일 하나님의 성회 교회의 교인은 약 100명이었지만, 그 교회는 선교 중심이었다. 그 교회는 처음부터 선교를 위해 후원하고, 또 직접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 교회는 1915년에 인도로 첫 선교사를 보냈다. 2011년 당시 그 교회의 담임 목사였던 그로우브스(Don Groves)우리는 미국 전역에서 선교하는 교회로 유명한 교회에서 자라났습니다. 첫 몇십 년 동안 우리 교회는 전국에서 선교 사역에 가장 앞장섰던 두 교회들 중 하나였습니다라고 증언했다. 그로우브스에 따르면, 그 교회는 1913년부터 1991년까지 박성산과 배부근을 교육시켰던 존 주르겐센(John W. Juergensen)을 포함하는 칼 주르겐센(Carl F. Juergensen) 가족의 일본 선교를 후원했으며, 또한 한국의 스테츠 선교사 가족(the Stetz family)을 후원했다. 그에 의하면, 스테츠는 그가 한국에 있는 성경학교에서 가르친 조용기 목사가 교회를 개척할 수 있도록 조언했다. , 스테츠는 열정적이고 선교에 열심이었던 오순절 교회에서 십 대 후반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당시 제일 하나님의 성회 교회의 담임목사는 할로웨이(D. P. Holloway)였는데, 그는 1935년부터 1951년까지 그 교회에서 목회했다.

 

클리브랜드 제일하나님의성회가 후원한 칼 주르겐센과 도쿄 전비복음전도관
칼 주르겐센 가족, 박성산과 배부근을 길러낸 왼쪽 두번째의 존 주르겐센
1938년경 제일 하나님의 성회 성도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할로웨이(맨 앞줄 중앙에 안경쓴 인물)

 

 

1950년대 할로웨이

 

 

    그런데 1940년경에 그는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의 몸은 갑자기 고열이 되었고, 두통이 극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뉴 저지에 있는 한 군인 병원에 입원했다. 의사가 내린 진단은 척추 뇌수막염(spinal meningitis)이었다. 척추 뇌수막염(spinal meningitis)은 바이러스, 결핵균, 세균, 곰팡이균 등에 의해 뇌와 척수(뇌척수막)를 덮고 있는 조직의 층과 뇌척수막 사이의 체액이 채워진 공간(지주막하강)의 층에 급속히 발달하는 염증이다. 임상증상으로 열, 두통, 오한 등이 나타나며, 진찰 상 수막자극징후 등이 있을 수 있다. 증상은 대개 갑작스럽게 시작되며, 38도 이상의 고열을 보인다. 두통이 가장 흔히 나타나며, 일반적인 감기나 독감과 비교할 때 그 강도가 상당히 심한 편이다. 뇌염이 뇌 실질을 침범한 경우에는 의식, 성격의 변화와 함께 경련 발작이 나타날 수 있다. 증상이 심한 경우에는 혼수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뇌염은 뇌 실질에 변성을 일으켜 후유증으로 인지기능 장애, 뇌전증(간질)을 남길 수 있다 사경을 헤매고 있던 스테츠는 하나님께 살려주신다면, 자기의 삶을 전적으로 주님의 일에 바치겠다고 서원했다[이 정보는 필자의 스테츠와 관련된 자료 요청에 미 하나님의 성회 해외선교국 사서(AGWM Archivest) 크리스타 티쿠트(Christa Teachout)가 보내준 자료들 중 하나인  “Profile of the John Stetzes”에 담겨있다].

 

 

III. 한국 선교 소명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스테츠는 19421229일부터 1946222일까지 약 3년간 미군으로 복무했다. 그는 미군이 괌에서 북쪽으로 100마일 지점에 있는 태평양의 티니안 섬(Tinian)을 점령한 후 19441229일부터 1946129일까지 미국 육군 통신대(The United States Army Signal Corps, USASC)에서 근무했으며, 동성훈장(Bronze Star Medal, 銅星勳章)을 받았다. 티니안섬(Tinian) 또는 티니언섬은 미국 자치령인 북마리아나 제도의 섬으로 괌섬 북쪽 160km, 사이판에서 약 8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태평양 전쟁 동안 섬 북부에 당시 남양 군도에서 가장 큰 공항이었던 하고이 비행장(ハゴイ飛行場)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중요한 기지가 되었고, 주둔한 군인은 육해군을 합해 약 8,500명에 달했다. 미군은 티니안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했고, 1944724일 북부 추로 해안으로 상륙하여 82일에 이 섬을 점령했다. 그 후 하고이 비행장을 확장, 정비하여 섬의 동부에는 웨스트 필드 비행장(현 티니안 국제공항)을 건설하여 본격적으로 일본 본토를 공습할 기지로 삼았다. 보잉 B-29 슈퍼포트리스 폭격기인 에놀라 게이가 티니언에서 원자폭탄을 탑재하고 이륙, 2531 km 떨어진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세계 최초의 핵공격이었다. 스테츠가 소속되었던 the U.S. Army Signal Corps은 태평양 전쟁 전체의 일부로서 티니언 섬에 통신망을 건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스테츠가 티니언 섬에서 복무하고 있던 시기에, 그곳에는 조선인 약 2,500명이 있었다. 그들은 일본 제국 정부에 의해 징집되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었다. 1926년에 새로 티니안의 개발을 맡은 남양흥발 주식회사 (난요코하추 주식회사, 南洋興発株式会社)는 오키나와와 후쿠시마, 야마가타 등에서 이민을 모아 야자 대신 설탕이나 커피, 면화의 생산을 시작했다. 그 결과, 쇼와 초기에 티니안의 설탕 생산량은 대만에 이어 동양에서 두 번째로 많은 생산량을 기록하기도 했다. 티니안의 면적은 사이판보다 조금 작았으나, 섬 전체가 평탄하여 오히려 경지면적은 더 넓었다. 섬 전체는 4개의 소작농장과 7개 농구(農區)의 직영농장으로 구획되었고, 각 농장은 섬 남서쪽의 티니안정(町)에 있던 제당공장과 철도로 연결되었다. 그 외에도 섬에서는 가다랭이 잡이가 성업을 이루어, 섬에는 가다랭이 공장도 있었다. 19446월 당시 인구는 민간인만 일본인 13,000명, 조선인 2,700, 원주민 차모로 인 26명이었다.

    미군 진주시에 수백 명이 포화로 목숨을 잃거나, 자살하거나, 미군에게 포로로 잡히지 않게하기 위해 사살당했다. 그래도 무인도에 갇힌 조선인들은 거의 다 사망했지만, 티니안섬에 있던 조선인들은 주민들의 도움으로 상당수 살아남았다. 풀려난 조선인 노동자들은 미국에 의한 해방에 기뻐하였고 기부금을 내었다고 한다. 그 기부금은 대략 1945년 미국 달러로 $666.35였다. 조선인들은 일본인과 분리되어 수용되었다. 조선인수용소는 출루의 일본인 마을이 있던 곳에 설치되었고, 일본인수용소는 조선인수용소 북쪽 농장지대에 세워졌다. 수용소는 자치제로 운영되었다. 조선계 미국인 통역관이 매일 수용소에 출근하여 관리했으나, 기본적인 행정 및 관리는 수십 명의 조선인 근무원들이 담당했다. 수용소에서는 미군이 부여한 노역에 종사해야 했고, 그 대가로 급여를 지급받았다.

 

티니언 섬에서 노역하던 조선 여인들
일제하의 노동자사무소를 통해 일터로 진입하는 노동자들

 

 

태평양전쟁 때 일본에 의해 사탕수수 생산 수송에 사용되었던 설탕 운반용 협궤기관차
냠양군도에서 구출된 조선인 노동자들, 무기소지를 방지하기 위해 옷을 벗긴 것 같다.
작업지시를 받고 있는 티니언 포로수용소의 한인

 

티니안 ‘매운고추(핫페퍼)축제’ 축하공연 무대에 오른 조선인 후손들 (출처: 티니안, 한국 후손들 유쾌하고, 맵게 사는 곳[남국여행③] - 헤럴드경제)
티니언 섬의 한국인 후예

 

    그 섬에 배속을 받게 된 스테츠는 수용소에서 생활하고 있던 한인들을 보게 되었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스테츠는 그 수용소를 출입하며 장로교 군목의 보조로서 40여 명의 한국 그리스도인 그룹을 목회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김익진은 스테츠가 이끌던 이 회중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한국 바깥에 그리고 일본 영토 안에 세 번째로 세워진 오순절적 한국인 회중이었다고 보았다. 첫 회중은 존 주르겐센의 나고야 교회였고, 두 번째 회중은 곽봉조의 오사카 교회였고, 세 번째가 스테츠의 티니언 교회였다는 것이다.

    일본이 항복하자 연합국최고사령부(GHQ)는 1945년 11월 1일 일본 내의 한국인 귀환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지령을 내렸다.

1. 모지, 시모노세키, 하카다지구 오사카, 코베지구, 기타지구 등 일본을 크게 3지역으로 구분하여 이 순서대로 한국인을 귀환시킬 것

2. 이들 각 지구에서는 역원(役員)군인을 우선적으로 취급하고 이어 강제연행자, 기타의 순으로 송환시킬 것

3. 인양사무소(引揚民事務所)로 옮기라는 지시가 있을 때까지 채류 일반 한인은 현 주소지에 머무르도록 조치할 것

4. 남아있는 조선인 및 중국인 징용자들은 늦어도 [1946년] 11월 14일까지 매일 1,000명씩 출발시킬 것

    티니안의 조선인들은 19461월 귀환길에 올라 미군이 제공한 LST에 분승하여 부산으로 떠났다. 128일 마지막 귀환선이 758명을 태우고 티니안을 떠났다. 티니안에서 귀환선에 승선한 한인은 모두 2,577명으로 확인된다. 이때, 스테츠가 목회하던 조선인 교회에서 송별회가 열렸다. 조선인 회중은 그에게 한국 땅에 있는 그들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의 그런 초청은 그에게 임한 한국 선교로의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몇 사람이 나에게 한국에 가서 선교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통역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한국에 가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게 작별 인사를 한 사람은 70세 또는 75세의 한 할머니였다. 그녀는 내 손을 잡았고 내가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내밀자 내 손에 입 맞추며 두 뺨에 흐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내게 선교사로 한국에 가달라고 애원했다. 내가 그녀에게 설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통역을 부르려 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룩한 기름처럼 내게 임하셨다. 그래서 통역이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더듬거리는 한국말로 조선에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내 말을 이해했고, 얼굴에 큰 웃음을 띠었다.

 

1946년에 작성된 남양군도 귀환 한국인 명부 첫 장

 

 

 

    19461월에 티니언 섬에서 그의 복무를 끝내기 직전에, 스테츠는 미 하나님의 성회 해외선교국에 편지를 썼다. 그는 그 편지에서 자기를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미 하나님의 성회는 한국에 그 어떤 선교사도 보내지 않고 있다고 답신했다.

 

당신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하나님의 성회는 그곳에서 사역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45개의 다른 선교지들을 열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일손이 너무도 부족하기 때문에 한국에 어떤 선교사든 보낼 여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새로운 선교지를 열라고 권할 수 없습니다.

 

 

IV. 한국 선교 준비

 

    제대 후 그는 19464월부터 19477월까지 캔사스, 수어드(Seward, Kansas)에 있는 한 작은 미 하나님의 성회 교회의 목사로 15개월 동안 목회했다. 수어드가 한 카운티로서 수어드인지 한 마을로서 수어드인지 알 수가 없어서 그 교회를 특정할 수 없다. 그 교회에서 목회하던 중인 1946629일에 이탈리아계 에디스 보치리(Edith Bocchieri)와 결혼했다. 에디스는 1922124일, 스테츠가 태어나고 2 개월 후 오하이오주, 클리브랜드에서 아버지 살바토레 보치리(Salvatore E. Bocchieri, 18801967)와 어머니 조세핀 보치리(Josephine Mucci Bocchieri, 18951942)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스테츠가 다니던 클리브랜드 제일 하나님의 성회 교회에 다녔다. 그녀는 제일 하나님의 성회 교회에서 1940년에서 1942년까지 함께 신앙 생활했던 스테츠와 결혼한 것이다.

    그리고 1947519일에 장녀 린다 룻 스테츠(Linda Ruth Stetz)가 캔사스, 그래이트 밴드(Great Bend, Kansas)에서 태어났다. 그레이트벤드(Great Bend)는 미국 캔자스주 바튼 군(Barton County)의 군청 소재지이다. 1950년대에 그레이트벤드의 인구는 12,600여 명이었다. 그래이트벤드(601 S Patton Rd, Great Bend, KS, United States, Kansas)에는 현재 미 하나님의 성회 소속 오순절 교회인 Encounter Church가 존재한다. 그의 부부가 아무 연고가 없는 곳에서 장녀를 낳았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따라서 스테츠가 이 교회에서 목회했을 수도 있다.

 

에디스 스테츠

 

    그는 한국 선교 소명을 이루기 위한 준비로서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플로리다, 레이크랜드(Lakeland, Florida)에 있는 하나님의 성회의 남동지방회가 지원하는 Southeastern Bible Institute에 들어가 1947년에서 1948년까지 수학했다. 사우스이스턴 바이블 인스티튜트는 1935년에 앨라바마, 뉴브락턴(New Brockton, Alabama)Alabama Shield of Faith Institute라는 명칭으로 세워졌다. 1년 후인 1936년에 그 명칭이 South-Eastern Bible Institute로 바뀌었다. 그리고 1946년 여름에 플로리다, 레이크랜드로 캠퍼스를 옮겼다. 1947년 가을학기부터 1949년 가을학기까지 그 학교는 파커 호수(Lake Parker)의 북서쪽에 접해 있는 레이크랜드 시립 공항(Lakeland Municipal Airport) 내에 세워진 로드윅 항공학교(Lodwick School of Aeronautics)의 본관과 강의동, 그리고 기숙사를 캠퍼스로 사용했다. 개인 소유의 소형 프로펠러 항공기들이 1935년에 문을 연 그 공항을 사용했다. 1940년에 레이크랜드 시는 그 공항을 제1차 세계대전 참전 비행기 조종사 양성을 위해 사용하도록 미공군에 내주었다. 전쟁 후 그 장소는 몇 년 동안 공항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야구 메이저리그 팀인 디트로이트 타이거즈(Detroit Tigers)의 봄 캠프가 자리 잡고 있다.

 

 

Alabama Shield of Faith Insitute

 

 

1940년대 레이크랜드 시립공항, 세 동의 격납고들과 그 뒷 편으로 조금 보이는 항공학교 건물들

 

현재의 모습, 세 동의 항공기 격납고는 다른 용도로 그대로 사용되고 있지만, 그 뒷편에 있던, 성경학교 캠퍼스로 사용되던 항공학교 건물들은 사라졌다.
South-Eastern Bible Institute의 임시 캠퍼스로 사용되었던 항공학교 Lodwick School of Aeronautics

 

항공학교 본관 앞의al Missionary to South Korea, John Stetz
사우스이스턴 바이블 인스티튜트는 항공학교 본관을 강의동으로 사용한 것 같다.
채플
여자 기숙사, 로드윅 항공 학교의 마크가 벽에 선명하다.

 

남자기숙사, 역시 로드윅 항공학교의 마크가 벽면에 선명하다.
식당
기숙사 내부
1948년 학장
강의실로 이동하는 학생들
결혼한 학생들의 자녀들을 위한 학교 안의 어린이집
1948년 수업 모습

 

    이때 스테츠가 그 학교에 입학했다. 존 스테츠와 그의 부인 에디스 스테츠의 사진이 2년제 Southeastern Bible Institute1948년에 출판된 앨범(yearbook)1학년 학생들(Juniors) 가운데 등장했다. 그들은 1947년 9월에 레이크랜드로 가서 그 성경학교에 입학했다. 스테츠는 그 앨범 편집진 중의 한 사람이었고, Artist로 활약했다. “Artist”는 삽화 담당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 앨범에는 총 4장의 그림이 등장한다. 2점은 연필이나 펜으로 그린 드로잉 작품이고, 2점은 유화나 불투명 물감으로 그린 페인팅 작품이다. 5쪽에 첫 번째 페인팅 작품이 등장한다. 언덕 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린 후 하단에 “For You”라는 문구를 넣은 것이다. 그리고 오른쪽 하단 구석에 “Stetz”라는 작가 사인이 보인다. 9쪽에도 페인팅 작품이 등장하는 데 앞에 학교를 소개하는 글이 찍혀있는 종이가 물려있는 타이프라이터가 놓여있고, 뒤쪽 벽면에 미국 지도가 펼쳐져 걸려있다. 그리고 플로리다의 성경학교로부터 미 전역의 지점들에로 줄이 그어져 있다. 그리고 오른쪽에 위로부터 아래로 “Dedication”(헌신)이라는 단어가 써있다. 그 성경학교의 졸업생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헌신하여 미국을 복음화하는 것을 형상화 한 것이다. 그 그림 하단 왼쪽에 역시 “Stetz”라는 사인이 있다. 17쪽에는 드로잉 작품이 등장한다. 달이 뜬 밤에 보초가 깨어 지키고 있는 성벽의 망루를 형상화한 그 작품은 2학년(Seniors)을 소개하기 시작하는 쪽에 실렸다. 그 그림에도 스테츠의 사인이 등장한다. 마지막 그림, 67쪽의 드로잉 작품에는 스테츠의 사인이 없다. 앨범에는 한 남성이 풍경을 화폭에 담고 있는 사진이 등장하는 데, 그 남성은 스테츠일 것이다. 이 앨범에 의하면, 스테츠는 1학년 대표 두 명 중 하나이기도 했다.

Southeastern Bible Institute 1948년 앨범에 등장한 스테츠와 그의 부인

 

 

가운데 줄에 서 있는 스테츠

 

 

앨범에 담긴 스테츠가 풍경을 그리고 있는 모습

 

 

    1948년 앨범에서 하나 더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Korea)이라는 국명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학생 동아리들(앨범 편집, 합창, 오케스트라, 선교 등) 중에 선교를 위한 기도 동아리가 있었다. 그 동아리는 총 10개의 팀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에 일본, 한국, 필리핀”(Japan, Korea, Philippines)을 위해 기도하는 팀도 있었다. 스테츠는 그 단위의 대표자로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선교를 위한 기도 모임에 한국”(Korea)이라는 국명의 등장은 스테츠의 가입에 의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미국 하나님의 성회 총회, 해외선교국 차원에서 한국에 대한 독립된 선교사 파송에 대한 인식이 생기기 이전에 소속 신학교(성경학교)에서 한국을 위한 기도가 먼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948년 앨범의 선교 동아리 소개

 

    그런데 1949년 앨범에는 그 선교 동아리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스테츠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때 스테츠는 일본 한국, 필리핀기도팀의 대표자였다. 48년 앨범에서는 8번째로 소개되었던 그 팀은 49년 앨범에서는 맨 처음에 소개되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그 팀의 리더는 존 스테츠였다. 이 소개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세 나라의 순서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48년 앨범에서는 일본, 한국, 필리핀이던 순서가 필리핀, 한국, 일본으로 바뀐 것이다. 그 변경은 학생들 사이에서, 또는 스테츠 자신에게 선교지로서 일본에 대한 관심과 중요성이 그 만큼 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49년 앨범에 의하면, 3강의실에서 선교를 위한 기도회가 매일 열렸다. 참여는 의무가 아니었고, 자발적인 것이었다. 학생들은 매일 정오에 모여 여러 선교지의 선교사들의 필요와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다. 그 정오 선교 기도회는 세계의 선교지들을 대표하는 열 명의 학생들이 인도했다. 이 지도자들은 선교 정보와 요구들을 취합하여 학생들에게 알렸다. 매일 아침 730분에서 8시까지 학생들은 다시 모여 선교사들과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기도했다. 금요일 아침 채플은 특별히 선교를 위해 열렸다. 그 채플에는 자주 선교사들과 탁월한 강사들이 강단에 올라 학생들의 선교를 향한 갈망과 지식을 더해 주었다. 매달 첫 금요일은 선교일로 지정되었다. 이때 모은 헌금은 선교를 위해 사용되었다. 1949년의 목표액은 2,000달러였다.

 

1949년 앨범의 선교 동아리 소개

 

선교 동아리 학생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다.

 

 

    존 스테츠는 1949년 앨범에 졸업자들 가운데 등장했다. 사각모를 쓴 스테츠의 사진 밑에는 그가 좋아하는 성경구절과 그의 비전이 나타나 있다. 성경구절은 창세기 28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였다. 그리고 그의 비전은 “스테츠 형제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역하도록 극동으로 이끄실 때, 이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Bro. Stetz is confident that, as God takes him to the Far East to minister, He will keep every word of this promise)라는 그 성경구절에 대한 설명에서 드러났다. 한국(Korea)이라는 국명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극동”(Far East)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그의 부인 에디스는 졸업자 사진에 등장하지 않았다. 아마도 1947519일에 장녀 린다 룻 스테츠(Linda Ruth Stetz)가 캔사스, 그래이트 밴드(Great Bend, Kansas)에서 태어났었기 때문에 아이를 양육하느라 학업을 중단한 것 같다. 그 학교는 1952년에 현재의 위치인 바니 호수(Lake Bonny)와 할로웨이 호수(Lake Holloway) 사이 Longfellow Boulevard로 이전했고, 2005년에 Southeastern University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1949년 앨범에 졸업생으로 등장한 스테츠
1949앨범 속의 스테츠 가족
사우스이스턴 바이블 인스티튜트의 1949년 신축 캠퍼스
Southeastern University가 현재에도 사용하고 있는 Southeasthern Bible Institute 시절의 최초 건물들,
최초의 건물들 중심으로 확장된 사우스이스턴 대학의 캠퍼스

 

 

    그 성경학교에 다니던 스테츠는 1948228일에 다시 한번 미 하나님의 성회 해외선교국에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에서도 스테츠는 자기를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해달라고 청원했다. 그러나 해외선교국은 또다시 그의 청원을 거절했다. 그는 자기 모 교회의 개척 목사였던 커(Kerr)가 세웠고 체스넛이 다녔던 남부 캘리포니아 성경 대학(Southern California Bible College)에 진학하여 1949년 8월부터 1950년 6월까지 1년간 수학했다. 그 학교는 1945년에서 1947년 즈음에, 후에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첫 내한 남성 선교사가 될 아더 B. 체스넛(Arthur B. Chesnut)이 수학했던 학교였다. 그동안 버클리 대학교(University of California in Berkeley, 현재 UC Berkeley)1949년 여름학기 한국어 강좌를 수강했다. 오로지 한국에 선교사로 가고자 불타있던 스테츠가 1949에 써던 캘리포니아 바이블 칼리지에 들어갔을 때, 그 학교 신입생들 가운데 1950625일에 한국 선교 소명을 받게 될 루이스 P. 리차드(Louis P. Richards)가 있었다. 아마도 스테츠의 한국 선교 열망은 루이스 리차드에게도 어떤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1년 동안 이 두 사람을 같은 캠퍼스 안에 두시며 한국 선교를 준비시키셨던 것이다.

 

1950년대 서던 캘리포니아 바이블 인스티튜트 캠퍼스, 왼쪽 기숙사 오른쪽 본관과 강의동
기숙사
1950년에 찍은 서던 캘리포니아 바이블 칼리지 3학년 학생들, 왼쪽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들 중 두 번째 검은 양복을 입은 인물이 스테츠같다
University of California in Berkeley
아더 B. 체스넛
루이스 P. 리차드

 

 

    19506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즈음 스테츠는 미 하나님의 성회 해외선교국이 보낸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선교국은 스테츠 부부에게 여전히 한국에 선교사로 가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스테츠가 그 편지를 받은 때는 미 하나님의 성회가 6.25 전쟁 발발을 통해 한국을 독립적인 선교지로 검토하기 시작한 19507월부터 9월 사이였을 것이다. 미 하나님의 성회는 그에게 해외선교사로 가려면, 그 전에 반드시 목사안수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그래서 그는 1950119일에 미 하나님의 성회 캔사스 지방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쟁의 격화 때문에 한국으로 갈 수 없었다. 3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1951년에 스테츠는 오하이오, 가필드 헤이츠, 오크 파크 블르브드 12833 (12833 Oak Park Blvd, Garfield Heights, Ohio)에 그리고 1953년에는 13116 Oak Park에 거주하고 있었다.

 

 

스테츠 부부가 살았던 12833 Oak Park Blvd, Garfield Heights, Ohio

 

 

V. 한국 선교

 

A. 한국 도착

 

    마침내 1953년 초에 미 하나님의 성회는 스테츠 부부를 한국 선교사로 승인했다. 둘째 딸 산드라 리(Sandra Lee Stetz)1953423일에 캘리포니아, 파사데나(California Pasadena)에서 태어났다. 19531018일 스테츠와 그의 부인 그리고 두 딸 일행은 로스앤젤레스 항에서 화물선 라파엘 세메스”(Raphael Semmes)호를 타고 일본, 요코하마로 향했다. 세메스 호는 배수량 6,027톤의 증기 상선으로 1920년 벤쿠버의 스텐드피어사(G.M. Standifer Construction Corp)에 의해 건조된 미국, 뉴욕의 이스트미안사(Isthmian SS Co) 소유의 배였다. 그 배는 1942628일에 인도양에서 독일 잠수함의 공격을 받았다가 수리되기도 했다.

 

1953년 5월의 스테츠 부부

 

,라파엘 세메스 호

 

1952년의 세메스 호

 

 

    스테츠의 한국행은 펜테코스탈 에반젤195311월 호를 통해서도 알려졌다.

 

존 스테츠 부부와 가족 그리고 손데노 부부(Mr. and Mrs. F. Sondeno)1019일에 일본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탔다. 스테츠는 그곳 사역을 돕기 위해 한국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려 했을 때, 군 관계기관은 스테츠에게만 한국입국 허가증을 발부해 주었다. 어쩔 수 없이, 서른 세살의 그는 19541월 초에 혼자 한국에 들어왔다. 스테츠의 내한은 195421일에 발간된 순복음창간호를 통해 알려졌다. 그 소식에 따르면, 스테츠는 가족을 일본에 두고 1954118일 홀로 내한했다. 루이스 P. 리차드(Louis P. Richards)는 자기가 19531117일에 부산항에 스테츠(John Stetz) 선교사 가족과 함께 도착했다고 회상했는데, 그 기억은 오류가 있는 것이었다. 리차드 부부는 스테츠 가족과 일본에서 만났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스테츠는 아더 B. 체스넛과 루이스 P. 리차드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 땅을 밟은 오순절적 남성 선교사가 되었다. 그런데 미 하나님의 성회가 해마다 발간하는 목회자와 선교사 명부에서 한국”(Korea)이 처음으로 독립적인 선교지로 표기되고 그 아래 공식 파송 선교사가 기록된 것은 195411일이었다. 그리고 미 하나님의 성회 한국 파송 첫 번째 공식 선교사로 기록된 사람은 아더 B. 체스넛이 아닌 존 스테츠와 그의 부인, 에디스 스테츠였다. 비록 스테츠가 체스넛보다 16개월 나중에 내한했지만, 공식적으로 기록된 첫 내한 미 하나님의 성회 파송 선교사가 된 것이다. 실제적으로는 체스넛이, 기록적으로는 스테츠가 첫 공식 내한 선교사였다. 그래서인지 50년사는 버터필드(Charles W. Butterfield)의 언급을 근거로 존 스텟츠 가족은 1954년부터 한국에 첫 번째 선교사로 임명받아 19777월까지 사역했다라고 쓰기도 했다.

    그런데 1954년 그 명부에 스테츠와 그의 부인의 선교지는 한국으로 표기되었지만, 그들의 주소는 한국이 아닌 일본, “711 Matsubara 2 Chome, Setagaya Ku, Tokyo, Japan”(東京都 世田谷区 松原 2丁目 711)이었다. 이런 현상은 그 기록이 스테츠가 한국에 도착하여 머물 곳을 정하기 전인 1953년 말에 그 명부가 작성되고, 식자되고, 인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일본 주소는 스테츠와 그의 가족이 일본에 머물던 주소였을 것이다. 이런 선교지와 주소지가 다른 이중적인 현상은 미 하나님의 성회의 동아시아 선교 중심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옮겨가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B.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총리 대행

 

    스테츠는 서울에 약 두 달간 머물며 한국어를 배우다가 일본으로 가서 19546월경에 그의 가족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는 1954년 말에 미 하나님의 성회 기관지 펜테코스탈 에반젤(Pentecostal Evangel)에 한국 선교 첫 보고문을 기고했다. 그 보고문에는 그가 목포와 진도 등 전라도 남단 지역의 교단 소속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열었던 집회들에서 일어난 일과 그곳에서 들었던 간증들이 담겨있었다. 그 일들은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 신유, 환상, 예언, 그리고 축귀와 같은 성령의 은사의 나타남들이었으며, 그에 따른 교회들의 건강하고 진정한 오순절적 성장이었다.

 

최근 남한의 전라도에 있는 우리의 성회들의 순회 집회들에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우리의 교회들 중 한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의 놀라운 나타남을 경험하고 있다. 이 특별한 교회는 목포라는 해안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교회는 이미 그 지역에서 진정한 기독교 교회라는 평판을 받고 있다. 그 주일 저녁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놀랍게 축복하고 계시는 곳에 있었다.

설교 후 한 나이 많은 여성이 인사를 하기 위해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몇 달 전에 자신의 먼눈을 고쳐주셨다고 자랑스럽게 우리에게 말했다. 그녀는 기독교를, 특히 그 언덕에 세워진 그 교회를 공개적으로 반대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성령이 그녀에게 죄를 깨닫게 하기 시작하셨다.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 여성은 교회에 이끌려 가야 했다. 그리고 그녀는 즉시 그녀의 친구들과 이웃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전에 반대했던 바로 그 교회에 이제 참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그 여성은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그 이적이 일어났다.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그녀의 눈멂을 치료하셨다.

그 집회에서 일곱 명의 헌신적인 십대 소녀들이 그 방의 한구석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에 완전히 맡기면서 박수를 치며 예배하고 있었다.

이 감격적인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이 선봉적인 교회에 하나님의 나타남들에 대해 더 간증해 달라고 요청했다. 성도들이 한 여인에게서 귀신을 쫓아냈다는 간증을 들었다. 또 다른 여인은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았다. 그녀는 비참한 상황 때문에 하나님을 미워했었다. 어느 날 그녀는 갑자기 벙어리가 되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녀의 마음에 말씀하셨고 강력한 회개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격렬한 씨름 후 그녀는 회개하고 고침을 받기 위해 이 성회로 갔다. 하나님께서는 즉시 그녀의 문둥병을 고쳐주셨다!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새로운 가족이 집회가 있기 얼마 전에 그 교회 주변으로 이사했었고, 그 아내는 그렇게 시끄러운 교회라고 계속 불평했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그녀에게 그 교회 사람들에게 대항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그 여인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이 갑자기 그녀에게 떨어졌고, 그녀는 벙어리가 되었다. 놀란 그녀의 시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그녀에게 회개하라고 그리고 그녀는 반-의식(semi-consciousness) 상태에 빠졌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녀는 하늘로부터 불덩어리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그 여성을 다루셨다. 현재 그녀와 그녀의 시어머니는 이 하나님의 성회 교회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진도섬에 우리는 다른 두 성회들을 갖고 있다. 우리가 방문한 첫 성회에서 최근 우리의 한국인 목회자들 중 목포에서 온 한 사람에 의해 인도된 오일 동안의 부흥집회에서 사십 명이 성령침례를 받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근 그 교회 성도들 가운데 한 사람은 그 회중들에게 제3차 세계대전이 불가피하니 피난처를 마련하라는 예언을 받았다. 배우지 못해 단순한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가 그 메시시를 잘못 이해하여 그 섬을 떠나 뭍으로 갔다. 그 예언의 실제 의미는 피난처는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는 것이었다. 그 곡해는 그 섬을 관장하는 경찰로부터 핍박을 가져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해결하셨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곳마다, 마귀도 또한 역사한다.

이 진도섬에 있는 교회에서 열일곱 살의 소년이 주님으로부터 영광스러운 환상을 받았다. 그 환상을 받은 이래로 그는 성령의 은사로 복을 받아왔고 그 성회에 도움이 되고 있다. 작년 한 해 동안 여섯 명이 신약 성경에 기록된 것과 같은 놀라운 치유의 경험을 했다. 그 진도섬에 있는 다른 성회들에서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고침을 받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들을 받고 있다.

압해도의 한 전도 부인(Bible woman)은 병고침의 은사를 행사하였고, 많은 마을 사람들이 그녀가 안수함으로 고침을 받았다. 그녀의 사역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고, 그 성회가 세워졌다.

그와 유사한 하나님의 성령의 나타남들이 경험되고 있는 다른 교회들에서 발견된 많은 일들에 대해 말하려면 지면이 모자란다. 하나님께서 지금 한국에서 행하고 계시는 이적과 표적들 때문에, 그리고 그에 따라 교회가 성장하고 있는 것 때문에 우리와 함께 기뻐하자!

 

    스테츠는 순복음신학교 교수 사역과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행정사역을 통해 체스넛을 도우면서 그의 선교사 직무를 시작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스테츠가 선교사로 일하기 시작한 첫 5년간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에 대위기가 몰아쳤을 때였다. 이때 순복음신학교의 학생 휴업사태와 두 번의 교단 분열이 일어났다. 그는 그 위기를 극복하고 교단과 신학교를 안정시키고 성장시켰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노련한 한국 선교사로 성장했다.

 

1955년 신년 교역자 수련회 기념 맨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의 스테츠와 여섯 번째의 체스넛

 

    체스넛은 19554월 제4차 총회에서도 총리에 재선되었다. 그런데 1개월 후 체스넛이 휴가차 귀국했다. 그래서 체스넛을 대행해 스테츠가 1955년 제2대 교단 총리와 56일에 신학교 학장이 되었다. 50년사는 기하성 역대 총회장 목록을 제시했다. 그 목록에 따르면, 체스넛이 195348일에 선출된 1대와 1955427일에 선출된 2대 총리로 섬겼고, 허홍이 체스넛을 이어 1956426일에 총리가 되었다. , 스테츠는 체스넛의 대행이었고, 공식적 총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체스넛과 너무도 짧게 함께 있었기 때문에, 체스넛으로부터 인수인계를 거의 받지 못했다. 더구나 그는 선교사로서 경험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고 매우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체스넛을 제외하고는 다른 교의를 가진 교역자들이 섞여 있던 집단의 지휘는 어려운 것이었다. 1955년 말부터 1956년 초까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는 체스넛이 잡아놓은 아슬아슬한 균형을 잃고 침례 방식의 일 등으로 최초의 분열 위기를 맞았다.

 

 

 

    스테츠는 곽봉조에게 물침례에 대한 단일성적 견해를 버리라고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곽봉조는 순복음신학교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를 조용히 떠나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단일성 오순절 신학을 포기하지 않은 목회자들은 대부분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안에 잔류했지만, 점차 교단에서 멀어져 갔다. 설상가상으로 순복음신학교 2학년 학생들 중심의 맹휴가 일어났다. 스테츠는 그 문제의 원인을 단순히 배부근의 교수능력 부족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 해결하기 위해 배부근을 사임시키려 했다. 그러나 허홍의 반대로 그의 해결책은 무산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막강한 리더였던 박성산이 19563월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스테츠는 당시 체스넛 등 선교사가 총리가 되었던 이유를 한국인 지도자들 사이의 문제 때문이었다고 파악했다. 그는 특히 박성산과 허홍이 서로 간의 질시 때문에 그 어떤 한국인이 총리가 되도록 추천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이런 현지인들 사이의 긴장이 해소되었고, 아마도 어려운 상황에 당황하고 있던 스테츠의 고사 때문에 1956426일에 급하게 열린 비상총회에서 스테츠 선교사가 아닌 현지인 허홍이 교단 총리가 되었다. 그 비상총회에서 스테츠는 다음과 같이 말했고, 중앙협의원이 되었다.

 

본 교단은 순복음에 게재된 것과 같이 많이 발전되어가고 있다. 그 동안에 크게 변동이 있었으니 아세아 선교 부장이 바뀌고 총리 체스넛 선교사님의 사임으로 중직이 이와 같이 결원이 되어 임시로 대행하여 왔으며 내년도 정기 총회를 앞두고 총리 이하 각 역원을 개선하여야 할 것이며, 신학교는 미 하나님의 성회 선교부의 소속이므로 자신이 교역자 개성에 맞추어 중임을 지명하고 교장에는 정규창 목사께서 하시기로 수락하실 것이며 신학생들의 맹휴사건에 관하여 학생들의 비행의 유감과 사임처리는 간과치 말기를 요망합니다.

 

    스테츠는 종교재단법인을 만들어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산하 교회들의 재산을 재단법인에 귀속시키고 이완식에게 맡기려 했다. 이 결정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났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반대했고 그 실행을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 하나님의 성회는 스테츠를 돕기 위해 경험 많은 선교사를 보내기로 결정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일본, 고베에서 선교하던 리차드 L. 존스턴(Richard Lawrence Johnston)19571월에 한국으로 급하게 파송했다. 그에 동조하는 선교사들과 교역자들은 19575월에 열린 제6차 총회에서 존스턴을 새 총리로 선출했다. 이완식에 의해(이완식은 4년 후 문제를 일으켰다) 195710월에 재단법인이 설립되었다. 창립 당시 그 법인은 서울에 있는 선교사들의 집들, 신학교 재산, 그리고 서울에 있는 한 교회를 귀속 재산으로 갖고 있었다. 그 재단법인 설립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교회 재산을 그 법인에 귀속시키기를 거부했다. 그들을 이끈 사람은 허홍이었다. 195711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에 분열이 일어났다.

    스테츠는 1959년에 미 하나님의 성회에 목사들 중 몇 사람이 지위와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지도자가 되려했다라고 보고했다. 그리고 후에 당시의 분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보다 작은 위기는 새롭게 설립된 재단법인에 자신의 교회의 재산을 귀속시키는 것을 반대하는 지도적인 목사들 가운데 한 사람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 목사는 서른 개 교회들의 모든 재산을 훔치려는 계획을 잘 세웠었다. 이 계획은 교단의 재산을 지키려는 스테츠 형제에 의해 드러났고, 그 모든 재산문서들은 안전하게 지켜졌다. 그렇지만 이 지도적인 목사는 하나님의 성회를 떠날 때 추종하는 몇 목사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다른 오순절 집단을 형성했다.

 

스테츠는 허홍이 하나님의 성회의 재산을 사유화하려 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허홍이 교단의 재산을 사유화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이런 판단은 그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스테츠의 판단과는 달리 허홍이 당시 선교사가 주도하는 재단법인을 반대했던 목적은 독립적인 한국인 재단법인을 세워서 한국인들이 미국인 선교사들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 교단을 이끌어가는 것이었다. 그 실제적 원인은 선교사 주도와 한국인 주도 사이의 마찰이었다. , 현지인과 선교사 사이의 주도권 다툼이었던 것이다. 미 하나님의 성회 입장에서는 이제 한국을 공식적으로 선교하기 시작한 지 겨우 3년 차이었지만, 허홍 등 한국인 입장에서는 일제 하의 기독교 오순절교회를 기점으로 교단 역사가 거의 30여 년이었다. 따라서 미 하나님의 성회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주도권의 이양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했고, 반면에 허홍 등은 이제 한국인이 오순절적 교단의 주도권을 행사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 두 상충되는 판단이 충돌했던 것이다.

    19548월에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소속 교회는 28개였지만, 1955년 말에는 44개가 되었다. 19553월에 순복음신학교 졸업생이 7명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장이었다. 그런데 그 외형적 성장에는 위험 요소가 내재되어 있었다. 스테츠는 그 외형적 성장에 얽혀있던 위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런 빠른 성장의 원인은 다른 교단들에 속해있던 많은 목사들이 중요 지위를 차지하거나 높은 사례금을 받기 위해 또는 새 교단이 그들을 위해 새 교회를 지어줄 것을 기대하며 새로운 교단에 합류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오순절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다른 교단들에서 온 이 목회자들은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선교사들이 그들을 믿고 신뢰했는데, 그들은 그것을 그들이 계속 선교사들을 속이는 지렛대로 사용했다. 그들은 선교단이 미국으로부터 받은 원조 식량과 의복들을 팔아넘겼다. 그런 행위 때문에, 다른 교단들에서 온 목사들이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에서 축출되었다.

 

C. 한국 선교 보고들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제2대 총리 대행 이후 스테츠의 행적은 주로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기관지 펜테코스탈 에반젤에 실린 그의 선교보고들을 통해 알려진다. 195511월에 오순절 복음(Pentecostal Evangel)에 스테츠의 두 번째 글이 실렸다. 제목은 한국에서 거두고 있는 열매들 때문에 감사였다. 그는 한국 선교사”(Missionary to Korea)로 소개되었다. 그는 그 글에서 그해 여름 동안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소속 전국 교회들에서 진행되었던 여름성경학교의 교사들, 학생들, 교육 장소, 교과목, 교육 기간, 참석 인원, 교육 일정, 교육 결실, 그리고 사용된 찬양집에 대해 보고했다. 여름성경학교의 교사들은 순복음신학교 재학생들과 졸업생들, 그리고 각 교회의 청년들이었다. 교육기간은 보통 일주일이었고, 매일 새벽, 오전, 저녁에 집회가 열렸다. 평균 참석 인원은 2,000여 명이었고, 최고 참석 인원은 3,000여 명이었다. 스테츠가 강조한 보고는 신학생 두 명이 자체적으로 찬양집을 편집하고 등사기로 인쇄하여 전국 각 교회에 배포하여 사용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 찬양집에 포함된 131개의 곡들 중 많은 곡들은 미 하나님의 성회가 운영하는 출판사 Gospel Publishing House가 펴내는 어린이 주일학교 교사들을 위한 정기간행물 Primary Teacher Quarterly에서 택한 것이었다. 교육 결과는 460여 명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으며, 여섯 명이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았다. 특별히 주목할 만한 점은, 선교사들이 한국인 교사들에게 미국의 방학성경학교 방식을 강요하지 않고, 어린이 사역에 대한 동기만 부여하고 자율적으로 교과를 짜고 진행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스테츠의 보고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진정한 성장의 한 중요한 요인을 제시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55년에 스테츠의 주소지는 “Assemblies of God Mission, APO 72 Postmaster, San Francisco, California”였다. , 미 하나님의 성회 선교국 캘리포니아 지부였다. 그런데 19561월부터 그의 주소지는 “Assemblies of God Mission PO Box 5, Seo Dai Mun, Seoul Korea”(한국, 서울 서대문, 하나님의 성회 선교부)였다. 1956년에야 비로소 스테츠의 선교지와 주소지가 일치하게 되었다. 이것은 미 하나님의 성회의 한국 선교가 19528월 체스넛의 내한 이후 2년 반 만에 비로소 본궤도에 진입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1956년 3월 12일 순복음신학교 제2회 졸업 기념사진, 맨앞줄 중앙의 스테츠 부부

 

 

    체스넛 대신 총회장직을 임시로 대행하던 중 허홍의 당선으로 물러나 중앙협의원이 된 스테츠는 19566월에 세 명의 한국 청년들이라는 글을 오순절 복음에 기고했다. 그는 이 글을 통해 세 명의 한국 청년들이 오순절적 목사들을 통해 오순절적 순복음을 듣고 중생하고,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 성령 충만함을 받고, 삶이 변화되고, 말씀 읽기와 기도에 전념하고, 귀신 축사, 신유, 예언, 성령의 인도하심 등 성령의 능력을 나타내게 된 사례들을 보고했다. 그는 그 혼란한 시기에 서울을 중심으로 극심하게 흔들리고 있던 총회와 신학교에서 행정과 사람을 통합하는 힘겨운 일을 하면서도 한국 오순절 교회들의 진정한 성장과 그 동력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동력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한 이 암울한 종말에 죄인은 회개하고 중생해야 하며, 봉사와 전도, 선교를 위한 신유, 예언, 축사 등의 능력을 부여하는, 위로부터 부어지는, 방언이 동반되는 성령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오순절적 순복음의 전파와 성령의 역사, 한국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기도와 전도의 열심이었다.

 

서로 다른 마을들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난, 세 청년의 삶 속에서 최근에 발생한 일들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이 일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수원시에서: 열아홉 살의 청년, 정태(Chongtae)는 장 목사(pastor Chang)의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버림받은 죄인이고 그래서 구원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정태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했고, 두 달 후 성령으로 침례를 받았다. 그는 너무도 가난하여 성경 전권이 담긴 책을 살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신약성경을 열심히 읽고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했다. 정태가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한 것을 본 창 목사는 매일 한 시간을 할애하여 그에게 개인적으로 성경을 가르쳤다. 청년 정태는 은혜 안에서 그리고 주님에 대한 지식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놀라운 변화가 그의 삶에서 일어났다. 전에는 문제만 일으키는 사람이었고, 싸움꾼이었었다. 그러나 이제 복음을 위해 핍박을 받고 맞아도 참고 보복하지 않는다.

최근 그 목사는 다른 도시에 있는 한 장로교회에서 설교하도록 그를 대신 보냈다. 그 도시에 도착한 후, 거리에서 한 귀신들린 여인을 보았지만, 그저 지나가려 했다. 그때 성령께서 그의 마음에 그녀의 구출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대로 준행했다. 그는 그녀를 멈추어 서게 하고 귀신에게 나가라고 명령하자 그녀는 곧 구출되었다. 정태는 갈 길을 다시 가려고 했지만, 그 여인이 그의 뒤에서 외쳤다. “목사님, 목사님, 당신이 저를 고치셨습니다! 제가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정태는 웃으며 그녀와 함께 그 교회로 갔다. 그 여인은 그 이전에 교회에 가본 적이 없었다. 이 일이 널리 알려지자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귀신들인 친구들과 친척들을 데리고 와 고쳐달라고 요청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목리(Rimok)에서: 한 스물 네 살의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김 목사의 교회에 몇 달 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이 청년은 하나님의 복을 크게 받았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 그는 기독교 안에서 발견한 이 새로운 능력에 너무도 열광하여 그의 고향 마을에 돌아가 그의 귀신들인 누이가 기도 받게 하려 했다. 그의 스물 여섯 살의 누이는 발작하면, 그녀의 옷을 찢고 미치광이처럼 행동하곤 했다. 그는 그녀를 리목 교회로 데리고 갔고, 교인들은 김 목사가 귀신을 꾸짖을 때 열심히 기도했다. 다음 날 아침, 그 여인은 자신이 완전히 구출된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더 이상 사단에게 괴롭힘을 받지 않게 되었다! 더 이상 발작하지 않게 되었다. 사흘 후, 그녀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

그 소식을 들은 그 아버지는 그의 자녀들을 보기 위해 다른 마을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달렸다. 그는 자기 딸에게 일어난 이적에 놀랐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의 삶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에 놀랐다. 집에 돌아온 그 아버지가 맨 먼저 한 일은 성경을 구입하는 것이었고, 성경은 그의 삶을 또한 변화시켰다.

청천면(Chongchon)에서: 진희(Chinhee)가 그가 살고 있는 마을 청천에 있는 하나님의 성회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일련의 일들이 일어났다. 이 스무 살 청년은 양 목사(pastor Yang)의 기름부음 받은 사역 아래서 순복음 설교들을(the full gospel) 들은 후, 하나님께 아주 신실한 사람이 되었다. 사실, 그는 너무도 열심이어서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새벽 기도를 위해 보이기 몇 시간 전인 새벽 세 시에 일어나 기도하러 교회로 갔다. 하나님께서는 진희를 축복하셨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다. 그는 방언으로 말하고 예언했다.

성령께서는 진희에게 그의 마을에 있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한 부담을 갖게 하셨다. 그는 매우 활발해졌다. 마을들로부터 모든 주민들이 읍내로 모이는 때에 진희는 전도지들을 나누어주며 간증했다. 진희의 변화된 삶과 간증을 통해 한 다른 청년이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그 청년은 학교 교사인데 여섯 달 전에 폐결핵으로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었다. 이 교사는 놀랍게 구원받았고, 즉시 기도의 응답으로 병 고침을 받았다. 현재 그 두 청년은 새벽 시간에 교회에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있다.

 

    스테츠는 1957년에는 오순절 복음에 기고하지 않았다. 1957년 가을에 세계적인 부흥사 허만(Harald Herman)이 내한하여 중앙청 앞에서 24일간 대규모 집회를 열었지만, 스테츠는 그 집회에 대한 글을 기고하지 않았다. 아마도 1957년에 벌어진 교단의 분열 때문에 큰 마음 고생을 하고 있어서 기고할 여력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다음 해인 19589월에 그해 여름 동안 열렸던 랄프 버드(Ralph Byrd)와 존 허스턴(John Hurston)의 내한 전도집회에 대해 펜테코스탈 에반젤에 기고했다. 그에 따르면 그 전도집회는 서울, 부산, 수원, 그리고 세 곳의 다른 도시들에서 열렸다. 그가 주목한 것은 성령의 개입”(the Holy Ghost invasion)이었다. 많은 교회의 교인들이 각 저녁 집회에 불신자들과 함께 왔고, 오전에는 성령침례를 강조하는 특별 집회가 열렸으며, 때때로 오후에도 그런 집회가 열렸다. 각 도시에서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하나님께 소리 내어 기도함으로써,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그리고 성령이 오셨네”, “내가 매일 기쁘게등등의 찬양을 부를 때 박수를 침으로써 오순절적 예배 형식에 빠르게 적응했다. 장로교인들과 감리교인들은 성령께 항복하고 성령으로 침례를 받았다. 때때로 영광의 파도가 그 큰 천막을 휩쓸었고, 거의 모든 사람이 성령 안에서 방언으로 말하며 하나님을 높였다. 그때 스테츠의 열한 살 딸 린다(Lynda)도 이 놀라운 복을 받은 몇 아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스테츠가 이 집회들에서 두 번째로 주목한 것은 치유 역사였다. 맹인이 보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었다. 그는 한 사례를 전해주었다. 순천 집회의 둘째 날 저녁이었다. 거기서 첫 치유 집회였다. 그 대형 천막은 성인들로 가득 차고 넘쳐서 아이들은 천막 변두리에 서 있어야 했다. 허스튼 형제가 개시 설교를 시작하자, 하나님의 임재가 대단했다. 그다음에 버드 형제가 놀라운 기름부으심 아래서 직설적인 복음을 선포했다. 그 회중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적이 없이 그저 교회만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수백 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초청에 응했다. 버드 형제가 그 귀머거리들을 위해 기도할 시간이 되었을 때, 그 회중 안에는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귀머거리 몇 명이 있었다. 세 명이 강단으로 올라갔다. 첫 사람은 1년 이내에 완전히 귀머거리 상태였다. 구원을 위한 기도 후, 그녀의 귀가 열렸다. 회중은 놀라며 박수를 쳤다. 다음 기도를 받은 사람은 난청이었지만, 기도 후 낮은 속살거림도 들을 정도가 되었다. 세 번째 사람은 귀머거리에 벙어리였다. 그도 역시 고침을 받고 버드 형제의 말을 따라 했다. 이것은 그 군중을 깜짝 놀라게 했고, 믿음은 높이 치솟았다.

    『펜테코스탈 에반젤19595월에 스테츠의 선교 보고가 실렸다. 스테츠는 그 보고서에서 한 우상을 숭배하던 여인이 예수를 믿고 전도 부인이 되기까지의 일을 묘사했다. 그 여인의 이름은 정숙”(Chongsuk)이었다. 그녀가 우상을 극진히 섬겼는데도 그녀의 여섯 자녀 중 다섯이 사망하고, 막내마저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그녀는 그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 간절한 그녀의 기도는 아들의 치유로 응답 되었다. 어느 날 뱀들을 칼로 죽이는 꿈을 꾸고는, 집안 선반에 모셔두었던 우상들을 모두 부수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을 때,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 이 일로 다니던 이웃 마을 교회에서 쫓겨났고, 집에서도 박해를 받았다. 그런데 그녀에게 병고치는 능력이 임하여 나병환자가 고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고침을 받은 마을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개척되었고, 그녀는 자기 마을, 갈산(Kalsan)에 들어선 그 교회의 전도 부인(the Bible woman)이 되었다. 스테츠는 한 달 후인 19596펜테코스탈 에반젤에 조용기 목사의 아버지의 회심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D. 대조동순복음교회에 대한 보고와 목회

 

    1960, 1961, 그리고 1962, 삼 년 동안 펜테코스탈 에반젤에 그의 보고가 실리지 않았다. 그의 글은 4년 후 펜테코스탈 에반젤19633월 호에 등장했다. 그 글에서 드러나는 상황상 그 글의 작성 시기는 1962년이었다. 그 글에는 조용기와 최자실, 두 사람에 의한 대조동순복음교회 개척, 서대문의 순복음중앙교회 개척, 그리고 조용기와 최자실이 떠난 대조동순복음교회에서의 스테츠 자신의 목회담이 담겨있었다.

    스테츠는 조용기와 최자실이 “4년 전”(1958)에 순복음신학교 근처에 한 교회를 세웠는데, 그 장소는 미션 컴파운드의 끝자락”(on the edge of the mission compound)이었다고 진술했다. , 그에 의하면, 조용기와 최자실은 미 하나님의 성회의 글로벌 컨퀘스트”(Global Conquest)를 위해 조성된 자금지원에 의해 구입된, 순복음신학교가 그 안에 있는 대조동의 미션 컴파운드의 동남쪽에 대조동순복음교회를 개척했다. 대지 구입과 순복음신학교 이전이 있은 후, 조용기와 최자실이 그 대지의 일부분에 대조동순복음교회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30년사에 의하면, 미션 컴파운드는 대조동 산 24번지, 현재 서울특별시 은평구 역말로 85-1, 즉 대조동 67-91958년 여름 내한하여 수원, 대전, 부산 등에서 성회를 인도한 버드 목사를 통해 25십만 원, "글로벌 컨퀘스트"(Global Conquest)의 파일럿 프로젝트”(Pilot Project)에 의해 4백만 원이 마련되어 순복음신학교 새로운 교정을 조성하기 위해 약 1만 평이 구입 되어 마련된 대지였다. 또한 196035일 신학교 신축기공식이 거행되었고, 419일 새 교사가 신축되었다. 1959년에야 대지가 구입되어 미션 컴파운드가 조성되었고, 미션 컴파운드 남서쪽에 19604월 순복음신학교 새 교사가 들어섰다는 것이다. 19585월 이전에 미션 컴파운드가 조성되었어야, 조용기와 최자실이 그 컴파운드 안에 대조동순복음교회를 개척했다는 스테츠의 언급이 들어맞는다. 스테츠의 언급과 30년사의 언급이 상충된다.

 

 

 

    그 1만 평에 대한 다른 증언이 있었다. 그 증언은 존 허스턴(John Hurston) 선교사에 의한 것이었다. 허스턴에 의하면, 1만 평방 미터는 최자실 전도사가 소유하고 있던 땅이었다. 최자실과 그녀의 남편이 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준 적이 있었다. 그는 나중에 관리가 되었다. 그리고 감사의 표시로 공동묘지 옆에 있는 1만 평방 미터의 땅을 최자실에게 주었다. 허스턴은 그 땅이 “1만 평이 아니라 “1만 평방 미터라고 알린 것이다. 그 땅은 선교사 숙소 근처에 있었다.

    허스턴에 의하면, 최자실은 그 땅 위에 시멘트 블록으로 집을 짓고는 교회를 개척하기로 하였다. 그 작은 집 거실에서 조용기, 최자실의 자녀 셋 그리고 농사일을 하다가 비를 피하기 위해 잠시 들어온 나이 든 과부가 첫 예배를 드렸다. 스테츠에 의하면, 조용기와 최자실이 몇 아이들과 함께 개척예배를 드린 후 미션 컴파운드 끝자락에 작은 집을 짓고 한쪽에 예배실을 만들었다.

    같은 땅을 두고 증언이 엇갈린다. 두 증언을 종합하면, 최자실이 자기가 소유하고 있던 1만 평방 미터의 산지 동남쪽 끝자락에 교회를 개척했고, 후에 미국 하나님의 성회가 대조동순복음교회 대지를 제외한 그 1만 평방 미터를 글로벌 컨퀘스트의 자금으로 최자실로부터 양도받은 것 같다.

    스테츠는 조용기와 최자실이 몇 아이들과 함께 개척예배를 드린 후 미션 컴파운드 끝자락에 작은 집을 짓고 한쪽에 예배실을 만들었다고 썼다. 그리고 스테츠는 대조동순복음교회에서 일어난 중풍병자의 고침받음에 대해 전했다. 그에 따르면, 하루는 중풍병으로 완전히 마비된 여인의 친구들이 조 전도사에게 그 병에 걸린 여인의 집으로 와서 그녀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은 이래로 7년 동안 마비되어왔었다. 조용기와 최자실이 기도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 여인, 무성이 엄마를 완전하게 고치셨다. 우상숭배의 저주와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전통의 올무가 풀렸다. 점차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첫해 말에 이십 명이 그 작은 방들을 가득 채웠다. 1959년 봄에 천막 하나가 그 집 옆에 세워졌다.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고침을 받았다. 곧 그 천막도 비좁아졌고, 넓혀져야 했는데, 한 번만이 아니라, 세 번에 걸쳐 넓혀졌다. 불교도들, 우상 숭배자들, 주정뱅이들, 그리고 한 공산주의자가 구원을 받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 그 회중은 거의 삼백 명에 가깝게 성장했다.

 

순복음신학교를 졸업한 조용기와 최자실

 

최초의 블록집과 옆에 잇대어진 천막
더 증축된 천막
새로 세워진 대형 천막예배당
새로운 천막 교회 내부

 

 

    스테츠에 의하면, 조용기가 군에 입대하여 자리를 비운 사이 선교사 존 허스턴(John Wesely Hurston)이 그 교회를 담당했다. 허스턴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마을의 시장 안에 쳐졌던 새로운 글로벌 컨퀘스트 텐트 안에서 한 부흥회를 열었다. 그 성공적인 천막 부흥집회의 한 결과로서 오십 명 이상의 새 신자가 그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세 번이나 확장되었던 천막 교회도 그 늘어나는 회중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한 낡은 부흥집회를 위한 천막을 빌렸고, 그것을 그 미션 컴파운드 위에 쳤다. 서울 중심가에 새로운 글로벌 컨퀘스트 부흥 센터가 196035일 기공되어 19611015일 준공되었다. 허스턴은 군에서 제대한 조용기와 함께 그 부흥 센터에서 사역하기 위해 19618월 대조동순복음교회(the Full Gospel Assembly)를 떠났다. 그 센터의 준공식에서 스테츠는 하나님의 성회 한국 지부의 의장으로서 해외선교국을 대표해 축하의 말을 전했다. 그는 우리는 이 부흥 중앙 회관이 예루살렘의 초대교회에서와 같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직설적으로 담대하게 전해지고, 강력한 표적들과 기사들이 말씀에 따르기를 기대합니다.”

    조용기의 확신 넘치는 능력 사역은 스테츠의 가르침의 결과이기도 했다. 펜테코스탈 에반젤의 한 기자가 조용기에게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를 이 사역으로 이끄셨는지 물었다. 그러자 조용기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존 스테츠 형제는 성경 학교에서 저의 오순절적 아버지셨습니다(Brother John Stetz was my Pentecostal father in Bible school). 그분은 사도적 능력(Apostolic power)이 오늘날에도 가능하다는 오순절적 진리들(Pentecostal truths)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가르침이 저의 사역의 시작이었습니다.” 리차드 루이스가 조용기의 영적 아버지였다면, 스테츠는 조용기의 오순절적 아버지였던 것이다.

 

John Wesely Hurston, 1956

 

조용기(왼쪽)와 허스턴(오른쪽)
글로벌 컨퀘스트 부흥 센터의 헌당식

 

    스테츠는 그의 다른 선교적 의무들에 더하여 대조동순복음교회의 목사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소 교민(So Kyomin)이 부교역자가 되어 목회적 의무들의 주요 사항을 담당했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그 큰 천막 안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난방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테츠는 믿음으로 196110월 은평구 대조동 89-229번지에 360평에 대지를 확보하고 건평 99평의 시멘트 브록조의 예배당 공사를 착수했다. 그리고 1224일에 반쯤 완성된 교회에서 입당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그 교회의 필요를 채우셨다. 그 천정을 완공시키는 데 1,500달러가 필요하자, 하나님께서 세인트 루이스에 있는 한 기독교인 부부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스테츠에게 그만큼 보내게 하셨다. , 스테츠가 목회하던 대조동순복음교회 신축예배당의 내부공사에 글로벌 컨퀘스트의 자금이 투입되었다. 이전 교회의 소유물은 팔렸고, 그 돈은 바닥, 강단, 그리고 방 두 개를 위해 쓰였다.

 

 

 

 

    1962429일은 스테츠가 담임 목사였던 대조동 순복음교회 건물의 헌당일이었다. 극동지부장 메이나드 L. 켓참(Maynard L. Ketcham)이 초청 강사였다. 그 봉헌식 직후, 스테츠는 레이드 에반젤리스틱 파티(the Reid Evanglistic Party)와 함께 그 새 교회에서 첫 부흥 집회를 열었다. 부흥의 불길은 사람들이 그 교회를 채웠을 때 밝게 타올랐다. 수십 명이 병고침을 받았다. 각 아침에 사람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구했고, 각 저녁에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 초청에 응했다. 그 집회의 마지막 날에는 한 성도가 거의 1,000달러에 이르는 금액을 교회 실내장식을 마감하는 데 바치기로 작정했다.

 

헌당식이 열린 대조동순복음교회 내부

 

    이 보고서의 말미에서 스테츠는 대조동순복음교회는 그저 글로벌 컨퀘스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한국에 존재하게 된 많은 교회들 중 하나이다라고 썼다. 이런 그의 언급은 대조동순복음교회가 글로벌 컨퀘스트의 파일럿 프로젝트를 위해 조성된 자금으로 구입된 미션 컴파운드의 남동쪽 끝자락에 개척되어 세워졌고, 조용기의 군입대로 부재 시 허스턴에 의해 행해졌던 서대문의 글로벌 컨퀘스트 천막 부흥회에 의해 성도 50여 명 이상이 더해졌고, 이후 신축 교회의 천정 공사에 글로벌 컨퀘스트의 자금이 투입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이었다. 당시 서너 명의 내한 오순절 선교사들 중에 선임이었던 스테츠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글로벌 컨퀘스트의 파일럿 프로젝트의 실무를 담당했었을 것이어서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그 프로젝트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에 그런 언급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재의 대조동순복음교회

 

 

E. 고아원 사역

 

    스테츠는 19633월에 자신과 그의 부인이 관계하게 된 고아원에 대해 보고했다. 그 고아원을 구성했던 맨 처음의 아이들은 1958년에 로이스 야들리 양(Missi Lois Yardley, 후에 로렌 빈스 부인, Mrs. Loren Beans)이 발견한 고아들이었다. 아들리 양은 아이들을 돌보는 짐을 지게 되었다. 그녀는 즉시 the 177th ASC Unit.의 기독교 군인들에게 호소했다. 이 미군들은 월급날이면 후하게 줌으로써 그 고아들을 후원하는 데 그들의 힘을 다했다. 그런데 처음에 그 고아들이 지냈던 곳은 두 동의 미군 막사였다. 1958년 겨울에 스테츠가 그 막사를 방문했을 때 아이들은 반쯤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난로도 침대도 없었다. 그 아이들의 옷은 추위를 견디기에는 너무 얇았다.

 

 

    그 아이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져야 했었고, 그들을 위해 영구적인 건물이 세워졌다. 그 미군 병사들은 이것을 일종의 부대 프로젝트로 만들었다. 스테츠의 임무는 그 건물을 위해 그 부대 대지의 일 에이커의 절반 정도를 할당하는 것이었고, 그 군인들은 고아원 작전을 시작했다. 그 군인들이 기초를 닦기 위해 땅을 파내고 벽돌들을 놓는 것을 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마지막 조각이 지붕에 얹어지고 한국식 온돌이 완성되자, 그 군인들은 그 아이들을 자랑스럽게 그들의 새집으로 데리고 왔다.

    스테츠가 언급한 “the 177th ASC Unit.”“177th USASA Operations Company”로서 한국에 1957년부터 1967년까지 주둔했던 미군 부대였다. 그 정보 보안 부대는 전 세계에 걸친 군사력 감축의 일환으로 19577월에 창설되었다. 그 감축은 육군보안국(the Army Security Agency)에게 조직과 장비 부대들의 많은 편제(TOE)를 해산시키고, 분배와 승인 부대들의 일시적 편제(Table of Distribution and Allowance (TDA) units)로 대체하게 했다. “The 177th USASA Operations Company”TDA 부대로서 “the 330th ASA Operations Company”를 대체한 것이었다. 1957년 중순에, “the 330th ASA Operations Company”의 본부는 미아리에 자리 잡았다. 그 장소는 주요 공급로, 즉 서울과 의정부 사이의 길과 접해 있었다. 1958년 여름에 “the 177th”500명 이상의 사람들로 불어났다. 한 막사당 30여 명이 지내야 했지만, 열 동의 퀀셋 막사가 더해졌다.

 

 

    19535월에 미 하나님의 성회의 스테츠 부부의 한국선교사 승인 소식을 전한 글은 스테츠 부인이 음악과 어린이 사역에 은사를 갖고 있다고 썼었다. 1962년경 스테츠의 아내 에디스(Edith)의 관리 아래서 그 고아원은 그 시설과 능률이 개선되고 있었다. 당시 여섯 살에서 열 다섯 살에 이르는 서른 명의 아이들이 그 고아원에 거주하고 있었고 행복하며 잘 먹고 있었다. 그 고아들은 매일 예배뿐만 아니라 대조동순복음교회의 주일학교와 어린이 예배들에 참석했다. 스테츠에 의하면, 그 고아들 대부분은 1969년 여름에 전도자 젠(Gene)과 브르게스(Heather Burgess)가 주강사로 섬기며 대조동순복음교회에서 열렸던 어린이 연합 부흥회에 참석하여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았다.

 

여름 어린이 연합 부흥회
브르게스와 당시 대조동순복음교회 담임 박정근 목사 부부

 

고아원 직원들과 원생들

 

 

    1963년 보고서에서 스테츠는 그 고아원이 당면한 문제에 대해 호소했다. 새로운 한국 정부, 1961년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출범한 제3공화국 정부는 작은 규모의 고아원들을 폐쇄시키는 법을 통과시키고 있었다. 적어도 오십 명의 고아들과 3,200 스퀘어 피트의 바닥 면적을 갖고 있지 않은 고아원은 정부에 의해 새로운 허가를 갱신할 수 없을 것이었다. 스테츠는 그 고아원 그 시설을 폐쇄하거나 이십 명의 아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을 지어야만 했다. 시멘트와 목재는 미군으로부터 받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1,500달러의 인건비와 다른 자재 구입비가 필요했다. 해외선교국은 한국의 집 없는 아이들을 위한 기독교 집을 제공하는 데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한국 선교지, 고아원 건물 짓기(Korea Field, Orphanage Building)라고 지정한 헌금을 미주리주, 스프링필드, 분빌 아베뉴(Boonville Avenue, Springfield, Missouri) 1445, 해외선교국에 보내달라고 그 고아원을 위한 후원금을 독려했다.

 

 

    1년 후인 19643월에 해외선교국은 카롯테 슈미취를 통해 스테츠 부부가 담당하고 있던 고아원에 대한 기사를 내보냈다. 그 기사에 따르면, 매사추세츠, 레버(Revere, Mass.)에 있는 파크웨이 성회(Parkway Assembly)의 소녀 단원들(Missionettes)과 소년 단원들(Royal Rangers) 사이에 존재하는 훌륭한 협동 정신은 1962년 성탄절에 많은 고아들을 위한 기금을 마련했다. 파크웨이 성회의 소년들과 소녀들은 로이스 맥노날드(Lois MacDonald)와 프레드 네일(Fred Neil)의 지도 아래서 팀원 각자가 동전들을 모아 지정일에 가져오고, 팀 전원이 모은 동전이 많은 팀이 승리하는 페니 컨테스트”(Penny contest)를 가졌다. 소녀 단원들이 이겼지만, 아주 박빙이었다. 그리고 196310월에 고아 소년들과 소녀들을 위해 구입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달린 $102.75 수표가 해외선교국에 전달되었다. 그 돈은 한국과 북인도에 있는 고아들 사이에 분배되기로 결정되었다.

    그 기사에 따르면, 스테츠 부부가 담당하고 있던 고아원의 영어명은 마운튼 뷔 오르판이지)(Mountain View Orphanage)였다. 당시 그들은 다섯 살에서 열일곱 살의 서른한 명 아이들을 기르고 있었다. 더하여 박문희 원장을 포함한 네 명의 전임 직원들이 있었다. 스테츠 부부는 받은 돈으로 어린 소년들을 위해서는 장난감 트럭을 그리고 큰 소년들을 위해서는 지갑을 사주었다. 소녀들은 빗, , 그리고 거울이 들어있는 하트 모양의 지갑을 받았다. 직원들도 선물을 받았고, 모든 사람들은 사탕과 사과를 받았다. 그 아이들은 신발주머니도 받았다. 신발주머니는 한국 아이들에게 필수품이었다. 왜냐하면 교회나 한국 주택에 들어가려면 신을 벗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선물을 받기 전에 그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캐럴을 불렀다. 어떤 아이들은 이중창을 불렀고, 다른 아이들은 다른 방법으로 참여했다. 거기에는 그들을 위해 따뜻한 코코아차가 준비되었고, 스테츠 선교사의 딸 린다(Lynda)는 그 파티를 위해 컵케이크를 만들었다. 스테츠 부부는 우리는 그 아이들을 너무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또한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짜릿한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우리를 한국어로 엄마와 아빠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여기에 와서 그 아이들이 마음이 담긴 선물을 받고 얼마나 기뻐하는지 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50년사는 에디쓰는 선교 고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녀의 지휘하에 아름다운 2층 건물이 세워졌으며 다양한 종류의 운동장 시설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그녀는 이 사역에 꼬박 5[아마도 1958년부터 1963년까지]을 아름답게 헌신했다고 썼다. 아마도 해외선교국을 통해 전달된 글로벌 컨퀘스트 후원금이 그 건물을 짓는데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고아원의 한국어 명칭을 알 수 없다. 50년사는 그저 선교 고아원이라고 전했다. 카롯테 슈미취에 의하면, 그 고아원의 영어명은 “Mountain View Orphanage”였다. “Mountain View Orphanage 1958 korea”라고 인터넷 구글에 입력하여 검색해 보면, 아무런 자료도 뜨지 않는다. 다만 구글 AI파주 고아원”(The Paju Orphanage)을 안내해 준다. 그 자료에 따르면, 파주 고아원은 1958년에 설립되었으며, 캠프 스탄턴(Camp Stanton) 소속 미군들에 의해 지원을 받았다. 파주 고아원은 당시 네 살에서 열여덟 살까지의 아이들을 돌보았다. 파주 고아원의 설립시기, 지역, 그리고 미군의 후원 등이 스테츠가 담당했던 마운튼 뷰우 고아원의 그것들과 매우 흡사하다. 그런데 마운튼 뷰우 고아원의 초대 원장은 박문희”(Moon Hi Pak)였고, 파주 보육원의 초대 원장은 김경일이었다. 그리고 마운튼 뷰우 고아원을 후원했던 미군들은 정보부대 소속이었고, 파주 고아원을 후원했던 미군들은 헬리콥터를 운영했던 항공부대 소속이었다.

 

F. 10대와 11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총회장

 

    50년사에 따르면, 스테츠는 1963년과 1964년에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10대와 11대 총회장을 역임했다. 선교사로서 총회장은 그가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 196612대부터는 조용기를 필두로 한국인들이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스테츠는 19555월부터 19563월까지 체스넛의 대행으로 총리직을 수행했었다. 그런데 그는 그 후 7년 동안 총리직을 맡지 않았다. 아마도 체스넛의 갑작스런 부재로 엉겁결에, 준비가 거의 되지 않은 상황에서 총리직을 대행하면서 너무도 힘들어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후 총리직을 고사하고 대조동순복음교회의 목회와 그 후 주로 고아원 사역에 집중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노련해졌을 때, 그리고 상황이 그를 불렀을 때, 총회장직을 감당했다. 그는 체스넛으로부터 시작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운영에 대한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10년간 주도를 마무리하고 한국인들에게 그 주도권을 넘겨주는 역할을 감당했다. 그 이양은 허홍이 10여 년 전에 시도했으나, 시기상조로 성취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미 하나님의 성회의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에 대한 주도는 성공적이었고, 한국인들이 주도권을 행사해도 무방하기 위한 조건이 무르익었을 때 스테츠에 의한 이양도 성공적이었다.

 

 

 

G. 문서 선교

 

    50년사는 스테츠가 순복음지 편집인 등 많은 일을 했다고 썼다. 스테츠는 196410월에 순복음에 대해 보고했다. 당시 총회장이었던 존 허스튼(John Husrston)이 이끌었고, 스테츠가 편집장이었던 문서 위원회가 순복음(the Full Gospel Herald)을 출판하고, 그 부수를 500에서 몇천 부로 늘리기로 작정하며 극적이고 혁명적인 기획을 착수했다. 30년사에 의하면, 월간 순복음의 제1대 문서전도부장은 존 허스턴이었고, 존 스테츠가 편집장이었으며, 박정근, 배부근, 조용기가 편집위원이었다. 몇 달 동안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공식 소식지인 순복음이 등사되었다. 그 새로운 출판물은 삼도(3가지 색깔)로 인쇄되는 십육 쪽의 아주 매력적인 월간지였다. 그 프로젝트를 위한 첫 자금은 Light-for-the-Lost사의 문서 프로그램에서 충당되었으며, 첫 두 달 동안 총 20,000부를 찍어낼 수 있었다. 순복음은 본래 1954년에 4페이지, 단색으로 구성된 창간호를 시작으로 간헐적으로 출판되었었다. 서정석 목사에 의하면, 1954년에 2, 4, 6, 8, 그리고 1955년에 3월과 6월에 발간되었다. 편집을 담당하던 박성산 목사가 1956320일에 소천함과 함께 발간이 멈춘 것 같다. 19645월호부터 글로벌 퀀퀘스트의 파일럿 프로젝트의 자금지원을 받으며, 문화공보부에 등록된 월간 정기간행물로서 16페이지, 삼도 칼러 본으로 증강되어 재발간되기 시작한 것이다. 1948년과 1949년까지 플로리다의 성경학교 학생시절에 학교 앨범 편집과 제작에 참여했던 경험이 스테츠의 순복음 편집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1954년 순복음 창간호. 이 자료는 대구 순복음신동산교회에서 다년 간 목회한 서정석 목사가 부친 때부터 소장하던 것을 디지털화하여 2025년 4월 9일에 필자에게 보내준 것이다. 서정석 목사에게 감사를 표한다.
서정석 목사가 담임했고, 원로목사인 순복음신동산교회( 대구 수성구 신천동로52길 18 )
순복음지 자료를 디지털화하여 제공한 서정석 목사

 

 

이 충격 프로그램(crash program)은 한국에서 랄프 버드 전도회에 의해 수행된 성공적인 텐트 집회들과 평행 되었다. 버드 집회들은 7월 중순에 완료되었는데, 청주, 마산, 그리고 서울 근교의 세 곳의 교회들에서 열렸었다.

    『순복음 각 권에는 구독신청서가 삽입되었고, 스테츠 등은 구독자가 곧 적어도 이천 명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구독료로, 자체적으로 그 출판을 감당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 소식지(한국어로 순복음, Soon Pogum)는 현지인들에게 잘 수용되고 있었다. 그것은 오순절 진영 안에서 인기가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몇 기관들에서도 그들의 구성원들을 위해 구독을 신청해 왔었다. 스테츠는 그 보고 말미에 이 매체를 통해 순복음의 메시지가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한국 전역에 퍼질 수 있기를 우리와 함께 기도하자고 썼다.

 

 

 

서정석 목사 소장본

 

서정석 목사 소장본 목록

 

 

H. 교도소 선교

 

    스테츠에게 가장 관심 있고 보람 있는 사역들 중의 하나는 교도소 수감자 교정 집회들이었다. 그는 큰 교도소 두 곳[마포 교도소, 안양 교도소?]과 작은 교도소 두 곳에서 예배를 인도하며 사역했다. 주일 아침에 그는 1,000명에서 1,300여 명의 수감자들에게 설교했다. 그는 복음을 전파하며 구원에의 초대에 응하는 자들과 함께 기도하는데 있어서 전혀 구애를 받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펜테코스탈 에반젤에 교정 사역에 대해 한 번도 보고하지 않았다.

    추정컨대, 그의 교도소 선교는 플로리다의 사우스이스턴 바이블 인스티튜트에서 훈련받은 결과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앨범에 따르면, 학생들은 주일 오후에 군립 교도소(County Jail)를 방문해 음악(열서너 명의 오케스트라), 찬양, 간증, 그리고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가끔 수감자들을 개인적으로 대할 기회가 생겼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개인적 구원자로 알게 되었다. 학생들은 그곳에서 기독교 문서를 배포했다. 1949년 앨범에 따르면, 매달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다섯 번째 주일에 바토우 군립 교도소(Bartow County Jail)에서 예배를 드렸다. 학생들은 여러 감방에서 찬양, 연극, 간증, 그리고 설교하도록 허용되었다.

 

 

학생들의 교도소 방문 전도

 

스테츠가 교도사역을 했던 곳 중에 하나인 안양교도소 강당

 

I. 딸 메리의 성령침례

 

    스테츠에 따르면, 1972년 그의 딸 메리가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곧 그 경험을 의심하게 되었지만, 다른 경험을 통해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휴가를 제외하고, 메리 스테츠(Mary Stetz)는 스테츠 부부(Rev. and Mrs. John Stetz)와 함께 한국에서 거의 13년을 보냈었다. 그 여름 동안, 그녀는 캘리포니아에서 열리고 있던 소녀들을 위한 한 캠프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 캠프에서 결코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다른 소녀들과 함께 주님을 갈구하는 동안 메리는 성령께서 그녀에게 말하라고 주시는 대로 다른 방언으로 말하며 성령침례를 받았다.

    그렇지만 한 여성 상담자들 가운데 한 사람(Mrs. Sharon Brown, Yuba City, California)에 따르면, 메리는 이후 그 경험을 의심했었다. 왜냐하면 당시에 그녀는 여러 번 반복했지만 단지 몇 마디만을 말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것이 진정으로 성령의 영감 아래서 말했던 것이었는가, 아니면 그것은 단지 감정적인 경험에 불과했었는가? 확신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저녁에 하나님께서는 메리의 의심과 질문에 완전하게 답하셨다. 그녀가 제단에 있을 때 그녀 옆에 아홉에서 열 살 정도의 엘리자베스(Elizabeth)가 있었다. 갑자기 엘리자베스가 성령으로 충만해져 전혀 배우지 않았던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다. 메리는 놀라서 외치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국어로 말하고 있어. 한국어로 말하고 있어!” 자주 들리는 말들은 아버지”(Aboji) 그리고 하나님”(Hananim)이었다. 이후의 그 주간 동안 예배들 동안 그 경험은 반복되었고, 보다 많은 단어들이 들렸다. 메리는 다시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스테츠 가족 1967년 7월 경

 

 

J. 한국의 오순절 역사에 관한 스테츠의 견해

 

    스테츠는 1974년에 “1927년에 두 미혼 여성이 호주에서 왔다. 그리고 밀드레드 M. 바세이(Mildred M. Bassey)가 영국에서 왔다. 메리 C. 럼시(Mary C. Rumsey)는 뉴욕에서 왔다고 썼다. 그가 김익진에게 1995년에 쓴 편지에 의하면, 2차 세계대전 전에 한국에 있던 선교사는 메리 C. 럼시(미국), 글레이디스 파슨(미국), 엘프레다 오프스테드(미국), 엘시 메르디트(영국), 릴리 베시(영국), 밀드레드 M. 바세이(영국), 린드퀘스트(노르웨이), 스테빅스(노르웨이?), 그리고 호주에서 온 두 여성이었다. 그런데 호주에서 왔다는 두 여성 선교사와 영국에서 왔다는 밀드레드 바세이에 대한 어떤 자취나 증거는 없었다.

    199614일에 김익진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스테츠는 한국 오순절 운동의 역사의 기점을 1930년 메리 C. 럼시(Mary C. Rumsey)의 내한으로 잡지 않고, 1909년 평양 장대현 장로교회에서 시작된 부흥으로 잡았다. 평양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장로교 선교사들이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볼 때 극단적인 것이나 성령의 역사가 아닌 것들을 무시하고 억눌러 버렸다고 보았다. 그는 1909년부터 1910년까지 한국에 방언 현상이 일어났었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한 장로교 선교사는 1954년에 그에게 한국의 남동부, 포항 근교에 있는, 오순절적 경험을 했고 여전히 방언으로 말하고 있는 한 한국인 집단에 대해 말해 주었다.

    이러한 스테츠의 한국 오순절 운동사에 대한 이해는 변종호의 이해와는 약간 다른 것이었다. 변종호는 1972년에 펴낸 한국 오순절 운동사에서 1930년 이전까지의 시기를 오순절적 성령 역사기간으로 보았다. 그는 오순절 신앙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것은 성언(聖言), 성능(聖能), 성회(聖會), 성생(聖生), 성순(聖殉)”5대 역사가 다 갖추어진 것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1930년 이전의 한국 역사는 성령에 의한 방언과 성령에 의한 권능이 나타났지만, 성회가 결성되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저 오순절적 성령 역사시기로 평가했다. 그런데 그는 1930년부터 1933년까지 계속된 이용도의 부흥운동은 그 5대 역사를 모두 다 갖춘 것이었으며, 따라서 이용도는 오순절 교단의 목사라는 명패를 차지는 않았었으나 거진 전형적이라고 할 정도의 오순절적 부흥목사이었음이 알려진다. 그래서 이용도를 오순절교단 운동의 선구자요 개척자로서 그 오순절교단운동이 받을 바 비방을 앞어서 도맡아 받았고, 그 교단운동이 당할 바 고난과 풍파를 혼자서 뒤집어 쓰고 애쓰며 싸우다가 먼저 올라간 선진이라고 평가했다. 스테츠는 방언 현상이 나타난 것은 모두 오순절 운동으로 여겼던 반면에, 변종호는 성령에 의한 방언 현상과 성령에 의한 능력의 나타남들이 있다할지라도 성회에 이르지 못하면 오순절 신앙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생각했다. 변종호는 스테츠보다 좁혀서 한국 오순절 운동을 정의한 것이다.

    스테츠보다 더 넓혀서 한국 오순절 운동을 기술한 사람은 이영훈이다. 당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국제신학연구원 원장 이영훈은 1987년에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가 초판을 펴내고 1993년에 개정판을 낸 하나님의 성회 교회사의 머리말에서 오순절 운동을 늦은 비 성령 운동또는 오순절 성령 운동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회를 성령 운동을 주축으로 형성된 교단이라고 정의했다. 그 책은 제3단원의 제목을 한국 하나님의 성회라고 정하고 제1장의 제목을 한국의 성령 운동이라고 달았다. 그 장 첫머리에서 한국 하나님의 성회는 그 근본을 오순절적 성령 운동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한국 하나님의 성회는 그 바탕이 된 토양으로 한국적 성령 운동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영훈은 1996년에 템플 대학교에 제출한 박사학위 청구 논문에서 한국 오순절 운동을 한국 개신교의 성령 운동”(Holy Spirit Movement)이라는 보다 큰 맥락 안에 두었다. 그는 그 논문에서 1900년에서 1920년까지의 한국 성령 운동은 개인적 회개를 통한 중생과 경험을 강조했고, 1920년에서 1940년까지는 신비적 경험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1940년에서 1960년까지는 성령 지향적 운동(Spirit-oriented Movements)이 펼쳐짐으로써 오순절 운동을 준비시켰다고 주장했다. 이영훈은 또한 한국의 성령운동과 세계 오순절 운동 사이에는 그 어떤 분명한 연관이나 영향 없이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이영훈의 오순절 운동을 성령 운동이라는 보다 큰 범주 안에 넣어버리는 처사는 오순절 운동을 성령에 대한 경험으로 규정하는 성령 기원설자생설/동시다발설의 처사와 유사하다.

    그러나 오순절 운동은 벧엘 성경학교에서 성경을 연구함으로써 시작된 운동이며, 성령침례에는 방언이라는 증거가 동반된다는 교리가 먼저 세워지고 다음과 그 교리를 경험으로 확증함으로써 시작된 운동이다. 그리고 오순절 운동은 신학적 운동이다. , 방언이 동반되는 성령침례 경험을 먼저하고 오순절 신학을 인정하든, 오순절 신학을 먼저 인정하고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 경험을 나중에 하든, “성령침례에는 방언이라는 외적 표적이 동반된다는 오순절 교리, 즉 오순절 신학 인정과 방언이 동반되는 성령침례 경험이라는 두 요소를 다 가진 사람이 오순절주의자이다. 스테츠는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경험한 모든 사람들을 오순절주의자로 인식했다. 그러나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을 경험했지만, 오순절 교리를 알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오순절 주의자가 아니다. 변종호는 가장 가깝게 인식했지만, 방언이 동반되는 성령침례 교리를 인정하는 사람만을 오순절주의자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이영훈은 오순절 운동을 성령 운동이라고 인식하게 만들었다.

 

 

VI. 한국 외 선교 사역과 소천

 

    53세의 스테츠는 1974년에 “History of the Korean Assemblies of God”이라는 소책자를 썼다. 그는 56세가 되는 19777월에 공식적으로 한국을 떠났다. 그는 19769월부터 19785월까지 조용기 목사가 시무하던 순복음중앙교회(현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세계선교의 일환으로 캘리포니아, 아나하임(730 N, Euclid Street, Anaheim, CA)에 설립한 순복음 중앙 성경 대학(Full Gospel Central Bible College)의 초대 학장을 역임했다. 

 

스테츠 부부 1978년 5월

 

    19786, 피터 쿠즈믹(Peter Kuzmic, Matej Lazar Kovačević)은 스테츠를 유고슬라비아, 자그레브(Zagreb, Yugoslavia)에 있는 신학교의 교수로 초청했다. 그래서 해외선교국의 허가받은 그는 부인과 함께 유고슬라비아로 갔다. 쿠즈믹은 동유럽에서 가장 저명한 복음주의 학자이며, 막시즘에 대항하는 기독교 사역의 권위자다. 현재 그는 고든콘웰신학교(Gordon Conwell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세계선교와 유럽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1972년에 크로아티아, 오시예크(Cvjetkova 32, Osijek, Croatia, 당시는 유고슬라비아, 자그레브)에 바울루스(Dr. Steve Paulus) 등과 함께 복음주의 신학교”(Evangelical Theological Seminary, Evanđeosko teološko veleučilište)를 세웠는데, 그 학교는 동유럽과 발칸지역에서 첫 번째 복음주의신학교였다. 그 학교는 처음에 한 지역교회의 지하실에서 시작되었다. 그 교회는 1907년경에 세워진 복음주의 오순절 교회”(Evanđeoska Pentekostna Crkva)였다. 그 교회는 성령 침례가 모든 신자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매우 강력한 영적 경험이며, 그 후에 그분을 더욱 열렬히 사랑하고 더 효과적으로 섬길 수 있다고 믿는다.” 즉 그 교회는 오순절주의를 표방하는 교회인 것이다.

    크로아티아의 오순절 운동은 시르미안의 베슈카(Beška) 마을에서 복음주의(루터교)와 개혁교회(칼빈주의)의 경건주의적 신자들인 독일의 슈툰디스트(Štundists)”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시작되었다. “슈툰디스트(Štundists)”는 성경 공부 교실을 열어 개종한 신자들로, 독일어로 “Stunde leiten”이라고 불리며, 고향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 외에도 성경 공부와 기도 시간을 더 가졌는데, 대부분 개인 장소에서 드렸다. 1907년에 두 명의 여성이 성령 안에서 침례를 받았다. 그 당시, 점점 더 많은 신자들이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 침례의 오순절 체험을 경험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그들은 교회를 떠나 오순절 교회 신자들의 공동체로 모이기 시작했다. 198911, 크로아티아의 오순절 그리스도 교회는 크로아티아 공화국 복음주의 교회로 이름을 변경했다. 그 교회 옆에 새로운 건물이 지어짐으로 복음주의 신학교의 캠퍼스가 확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쿠즈믹은 그 복음주의 오순절 교회에서 신앙생활한 오순절주의자였으며, 스테츠를 교회 지하실에 세운 오순절적 복음주의 신학교의 교수로 초청했던 것이다. 그리고 스테츠는 그 동유럽의 오순절적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Peter Kuzmic

 

 

 

 

    스테츠는 또한 오스트리아의 성경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벨기에, 브루셀에 있는 컨티넨탈 바이블 칼리지”(Continental Bible College)에서도 가르쳤다. 그 대학은 현재 “Continental Theological Seminary”로 알려져 있다. 그 학교는 1959년 임마누엘 바이블 인스티튜트(Emmanuel Bible Institute)라는 이름으로 벨지움, 안드리몬트(Andrimont, Belgium)로 시작되었다. 설립자 그라이센(Victor G. Greisen)은 미국 하나님의 성회 세계 선교국의 유럽, 중동, 남아시아 지역장이었다. 그 학교는 1969년 브루셀(Brussels)로 이전하면서 교명을 Continental Bible College로 변경했고, 1970년에 2년제에서 4년제로 학제를 재편했다. 1977년에 브루셀 근처 Sint-Pieters-Leeuw에 있는 역사적 건물 Rattendaal castle을 새 캠퍼스로 삼고 몇 달 동안의 개축 후 1978년 가을에 수업을 재개했다. 그리고 1991년 대학원을 설치하면서 Continental Theological Seminary로 교명을 바꾸었다. 그 학교는 신앙진술문 5항을 통해 우리는 사도행전 24절에 따라 성령께서 말하라고 주시는 대로 방언을 말하는 증거를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그리고 영적 은사들과 사역들을 믿는다고 표방하고 있다. 스테츠는 또한 많은 교회들에서 세미나를 열었고, 유고슬라비아 안에 있는 슬로바키아인들을 목회하기도 했다. 1989(68) 퇴임 후에도, 그는 유럽과 아시아 전역을 여행하며 단기 성경 교과목을 가르치기도 했다.

 

Continental Bible College의 1976년 앨범

 

    스테츠는 1979년에 캘리포니아 신학교(California Graduate School of Theology, Glendale California)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그리고 2003년에 한세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20036월부터 2009년까지 베데스다 기독 대학교(Bethesda Christian University)로 개명된 순복음 중앙 성경 대학의 6대 총장으로 다시 봉사했다. 그가 재임하고 있던 2006년에 그 학교의 학부(CHEA)와 대학원 과정(ABHE)이 미 연방정부의 학위인준(Accredited Status)을 받았다. 그리고 2008년에 그의 자서전 하나님의 완벽한 시간(God’s Perfect Timing)이 출판되었다.

 

 

 

   

 

 

    스테츠는 92세인 201361일에 오하이오, 쿠야호가 카운티, 클리브랜드(Cleveland, Cuyahoga County)에서 소천했다. 그는 목회 사역 이외에도, 저술가, 화가, 사진가로 활동했다. 그는 그의 아내와 67년간 해로 했으며, 슬하에 딸, 린다(Lynda), 샌디(Sandy), 마리(Mari), 그리고 아들, (Paul)을 두었다. 그의 장례식은 36465 Chester Rd., Avon에 있는 Christian Heritage Assembly of God에서 치루어졌고, 그의 몸은 오하이오, 클리브랜드와 아본의 중간에 위치한, 90번 도로가의 Rocky River, Cuyahoga County에 있는 레이크우드 파크 세미터리(Lakewood Park Cemetery)에 누웠다. 그의 소천은 미국 하나님의 성회가 펴낸 2013-2015년 추모집, Southern California District에도 기록되었다. 그의 아내(Edith Bocchieri Stetz)는 일 년 후 2014128일에 쿠야호가 카운티, 클리브랜드에서 소천했다. 그녀의 장례식은 스테츠의 장례식이 열렸던 Christian Heritage Assembly of God에서 치루어졌고, 그녀의 남은 몸은 남편 스테츠 옆에 묻혔다.

 

 

 

 

 

    큰딸 린다 스테츠 키쉬(Lynda Stetz Kish)는 서울외국인학교(Seoul Foreign School)와 그의 아버지가 졸업한 Vanguard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를 나왔다. 셋째 딸 마리 크랍트리(Mari Crabtree)는 말론 대학교 (Malone University Canton, Ohio)와 아버지가 졸업한 사우스이스턴 대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현재는 말론 대학교에서 보건의료(Health Care)를 가르치고 있는 것 같다. 그녀가 말할 수 있는 외국어는 한국어(Korean). 둘째 딸과 아들은 확인되지 않는다.

큰 딸 Lynda Stetz Kish

 

셋째 딸 Mari Crabtree

 

 

VII. 나가는 말

 

    존 스테츠(John Stetz)19211125일에 오하이오, 포트 호머에서 태어나 201361일에 오하이오, 클리브랜드에서 91세에 세상을 떠났다. 1940년에 클리브랜드에 있는, D. W. 커가 개척했고, 해외 선교에 열심이던 제일 하나님의 성회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고 오순절주의자가 되었다. 그리고 19541월에 수년간 어려운 우여곡절을 겪으며 내한하여 23년간, 오순절 내한 선교사들 중에서 가장 긴 세월 동안 오순절적 복음을 전하다가 19777월에 한국을 떠났다.

    19421229일부터 3년 동안 태평양 북마리아나의 섬, 피니언에서 미 육군 통신대에서 근무하면서, 조선인으로 구성된 회중을 섬겼다. 전쟁이 끝나고 1946128일 송별 모임에서 한 조선인의 요청을 받으면서 한국 선교의 사명을 갖게 되었다. 미국 하나님의 성회 해외선교국에 여러 번의 타진에도 성사되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준비하던 스테츠는 마침내 19541월에 내한했다.

    19555월 제2대 총리 대행으로 총리와 순복음신학교 학장이 되었다. 그로부터 5년간 그는 순복음신학교의 학생 휴업사태와 두 번의 교단 분열 등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에 몰아친 대위기를 극복하고 교단과 신학교를 안정시키고 성장시켰다. 스테츠는 신복음신학교에서 조용기에게 사도적 권능에 대해 가르쳐 줌으로써 조용기 자신으로부터 저의 오순절적 아버지”(Pentecostal father)로 지칭되었다. 스테츠는 19618월경부터 조용기 전도사가 떠난 대조동순복음교회의 목회를 담당했다. 그의 목회 동안 대조동순복음교회는 새 예배당을 건축하며 뜨겁고 건실하게 성장했다. 그는 부인과 함께 1958년경부터 서울과 의정부 사이의 미군 보안부대 안에 세워진 한 고아원을 맡아 5년간 운영했다. 스테츠는 1963년과 1964년에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10대와 11대 총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한국인에게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10여년 간의 주도권을 성공적으로 이양한 선교사가 되었고, 19777월에 한국을 떠났다. 그러나 스테츠의 한국과의 관계는 그것으로 완전히 끝나지 않았고, 그가 19769월부터 19785월까지 그리고 20036월부터 2009년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의 베 데스다 기독 대학교(Bethesda Christian University)의 총장으로 봉사하며 지속되었다.

    한 편으로, 스테츠의 주된 관심은 교단 행정이나 정치보다는 그리고 교단의 외적 성장보다는 진정한 성장과 그 요인들,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 치유, 축사, 예언 등 오순절적 순복음, 열정적인 기도, 그리고 한국 어린이들의 건강한 양육과 성장에 있었다. 다른 한 편으로, 스테츠는 리차드 존스턴, 존 허스턴, 그리고 루이스 리차드와 함께 선임(Korea Field Chairman)으로써 한국에 대한, 1959년 말부터 시작되어 몇 년간 지속된, 대규모 전도집회, 순복음신학교 새 대지(Mission Compound) 마련과 교사 건축 및 이전, 중앙복음회관 건립, 교회 설립, 문서선교 고아원 운영 등 미 하나님의 성회의 글로벌 컨퀘스트(Global Conquest)의 파일럿 프로젝트(Piolt Project), 크래쉬 프로그램(Crash Program)을 현장에서 성공적으로 실행해 냄으로써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비약적 발전에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