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NGUES AND ETHICS:
WILLIAM J. SEYMOUR AND THE “BIBLE EVIDENCE”
A RESPONSE TO CECIL M. ROBECK, JR.

레나 브라스웨이트
Renea Brathwaite
History Interest Group
Regent University
Presented at the 38th Annual Meeting of the Society for Pentecostal Studies
2009
이창승 역
2025.2.1
1. 들어가는 말
(Introduction)
1906년부터 1908년까지의 아주사 거리 선교회 부흥은 오순절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 부흥은 하나님의 종말적 행위의 한 상징과 예로서 초기에 오순절 운동을 고무시키고 증진시켰다. 많은 초기 오순절주의의 주요한 지도자들은 그 선교회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교회를 설립한 메이슨(C. H. Mason), 그리고 그 가르침들과 시카고 부흥 선교회가 하나님의 성회 형성에 기초가 된 윌리엄 H. 더함(William H. Durham)이 있었다. 그 두 사람은 아주사를 방문하여 성령침례를 받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 부흥 시기에 그 선교회에서 나왔던 교리적 신앙들을 규명해 보는 것은 초기 오순절 교리의 발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먼저 토페카에서 그리고 후에 아주사 거리에서 가르쳐졌던 가장 중요한 교리들 중의 하나였던 최초 증거(initial evidence) 또는 “성경적 증거”(Bible evidence)라는 중대한 교리는 정통 오순절주의(classical Pentecostalism)를 규명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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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것은 특별한 주목을 요청한다. 그 선교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성령침례라는 경험을 받기를 바라며 제단 주위로 몰려들 때 무엇을 들었을까? 그 선교회의 목사 윌리엄 조셉 시무어(William Joseph Seymour)와 다른 지도자들은 그들의 지지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쳤고, 어떻게 그들의 견해를 옹호했을까? 그 선교회가 인기와 영향력을 누리고 있던 시기에 발간되었던 『사도신앙』(the Apostolic Faith)이라는 간행물은 몇 가지 매우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한다. 그렇지만, 그 증거에 대한 해석과 관련된 어떤 논쟁이 있어 왔다.
저명한 오순절 역사가 세실 로벡(Cecil M. Robeck, Jr.)은 1906년부터 1908년 사이에 써진 『사도신앙』 의 기사들에서 성령침례의 증거로서 방언에 관한 시무어의 견해의 변화를 추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시무어가 이미 파함의 견해들과는 다른 견해를 갖기 시작했었다고 주장하며, “분명한 것은 시무어가 ‘성경적 증거’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다”라고 쓴다. 더하여, 그는 시무어가 1915년에 발간한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의 아주사 거리 사도신앙선교회의 교리와 계율』(The Doctrines and Discipline of the Azusa Street Apostolic Faith Mission of Los Angeles, Cal.)은 시무어와 초기 증거 교리 사이의 보다 더 큰 간격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본 논문에서 필자는 이 가설을 검증해볼 것이다. 먼저, 필자는 찰스 파함(Charles F. Paham)이 시무어의 신앙에 끼친 영향의 정도에 대해 논하는 것을 포함하여 아주사 거리 부흥에서 발생했던 글로솔라리아(방언)에 대한 시무어의 견해들을 살펴볼 것이다. 둘째로, 시무어의 신학방법(theological method)을 분석할 것이다. 여기서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맥락 안에 시무어를 놓고, 그를 비아프리카화(deAfricanize)하려는 최근의 추세라고 필자가 생각하는 것과 싸우는 것이다. 셋째로, 로벡이 그가 『사도신앙』과 『교리와 계율』에서 발견했다는 증거들로부터 이끌어 낸 주장들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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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로벡의 주장과는 다르게, 필자는 시무어가 최초 증거 교리를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드러낼 것이다.
2. 윌리엄 조셉 시무어의 초기 삶
(The Early Life of William Joseph Seymour)
윌리엄 시무어가 20세기 초엽에 발생한 오순절 운동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들 중의 하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사실, 그는 『크리스챤 히스토리』(Christian History)에서 20세기의 세 번째로 가장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선정되었다. 그의 미천한 시작은 오늘날 전 세계를 덮고 있는 한 운동의 발전과 확장에 있어서 그가 행할 결정적인 역할에 대한 그 어떤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시무어는 격심한 사회적이고 경제적 대격변의 시기에 루이지애나에서 1870년 5월 2일에 이전에 노예였던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때는 남북전쟁의 종식으로부터 겨우 5년이 지났었고, 여전히 인종적 긴장이 팽팽했던 시기였다. 소위 “짐 크로우” 법에 의해 흑인들은 선언문적으로는 자유를 얻었지만, 거의 완벽하게 선거권을 빼앗긴 상태였다. 더구나, 폭행은 남부와 중서부 전역에서 아주 일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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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쉴러트(Thomas J. Schlereth)는 시무어의 소년기 동안 남부에서는 일주일에 세 번의 폭행이 발생했다고 본다. 놀랍게도, 열 살 때에, 이런 극심한 상황 속에서도, 시무어는 어느 정도 읽기를 배웠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점인 데, 19세기 말엽에 흑인들 사이의 문해력 비율은 지독하게 낮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이후 한 목사로서 그의 발전에 또한 중대한 것이다. 그는 읽을 줄 앎으로써 성경 본문 자체가 말하는 것을 탐색할 수 있었고, 기억이나 다른 누군가의 조력에 완전히 의존하지는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어느 누군가의 신학을 모방할 필요가 없었다. 반면에 그는 가장 기초적인 수준에서일지라도, 자신만의 신학을 형성할 능력을 갖추었다.
시무어의 청년기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로벡은 큰 화재가 1890년 인구조사서를 소실시켰기 때문에, 일반화시키는 것을 제외하고는, 시무어의 생애 중에서 이 시기는 계속 베일에 가려져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시무어는 1894년부터 1898년까지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짐꾼으로 그리고 후에 웨이터로 일했다. 시무어는 그곳에서 사는 동안 회심했고, 하나님의 교회(인디아나, 앤더슨)에 다녔을 것이다. 그 후, 1900년에 그는 오하이오, 신시네티로 이사했고, 빈슨 사이난에 따르면, 그곳에서 그는 마틴 웰스 크넵(Martin Wells Knapp)의 지도하에서 “급진적인 성결 신학에 젖어 들었다.” 그는 1903년에 텍사스, 휴스턴으로 갔고, 그곳과 인근의 흑인 공동체 안에서 한 복음전도자로 사역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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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후, 시무어는 루시 패로우(Lucy Farrow)에 의해 형성된 한 회중의 임시 목사로 청빙을 받았다. 파함은 그녀에게 그가 [캔사스 주] 전도여행 할 동안 그의 자녀들을 위한 가정교사가 되어달라고 요청했었다. 몇 달 후 휴스턴으로 돌아온 그녀는 시무어에게 그해 11월에 파함이 열 성경학교에 다녀보라고 권했다.
1905년 말에 파함을 만났을 때, 시무어는 독자적인 목회자였다. 넬슨은 관심사가 같았던 그 둘은 휴스턴의 어떤 흑인 지역들에서 함께 설교했다고 전한다. 파함 부인의 시무어에 대한 기억은 객관적인 진실보다는 그녀의 온정주의적 태도(paternalistic attitudes)를 반영하는 것 같다. 그녀는 “[시무어에게] 그 수업에서 한 자리가 주어졌고, 그는 그에게 너무도 새로운 진리들을 기꺼이 들여 마셨으며, 그의 주린 영혼을 채웠다”고 썼다. 그와는 다르게, 넬슨은 파함의 가르침들 중 많은 것들은 시무어에게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고 밝힌다. 그 이유는 먼저, 그는 완전히 초보자는 아니었고, 적어도 4년 동안 성결주의 목회자였었기 때문이었다. 둘째로, 그는 찰스 존스(Charles P. Jones)와 마틴 웰스 크넵과 같은 지도적 성결주의 목회자들의 지도 아래서 어느 정도 선행 신학 훈련(prior theological training)을 받았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에 더하여, 루시 패로우가 자리를 비웠을 때 임시 목사로 시무어를 임명한 것은 또한 시무어가 “숙련된 사역자”였다는 확신을 주기 때문이었다. 더하여, 흥미로운 것은 로벡도 역시 시무어의 신학적 능력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프랑크 바틀맨은 아주사 거리 부흥의 목격자인데, 그 선교회에서 사역자들(시무어가 포함된)과 함께 일했던 이유는 “그 사역의 심오함”(depth of the work)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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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한 “그들은 대체적으로 성결주의 단체들과 그 선교 현장 등등으로부터 소명을 받고는 수 년 간 준비했다. 그들은 그 불길을 전 세계로 퍼트릴 개척자들, ‘돌격대들’, 기드온의 삼백용사였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무어는 백지상태는 아니었고, 파함의 신학과 전적으로 상호영향을 주고받을 능력을 갖고 있었으며, 파함의 신학을 그 자신의 견해와 종합할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파함 부인의 과장을 제쳐 놓더라도, 성령침례에 대한 파함의 가르침은 시무어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었던 것 같다.
3. 찰스 파함의 영향
(The Influence of Charles F. Parham)
파함을 시무어와의 이 역사적인 만남에 이르게 한 여정은 어렵고 힘든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경로는 그가 시무어의 생애와 신학적 발전에서 행할 역할을 위해 그를 충분히 준비시켰다. 그는 한 감리교 대리 목사였었지만, 그의 반-교파주의와 성화에 대한 성결주의적 교리에 집착 때문에 사임했었고, 순회 전도자의 삶에 뛰어들었었다. 거의 죽음 직전까지 이르는 경험을 하게 했던 한 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후, 그리고 친밀했던 친구, 랄프 고웰(Ralph Gowell)의 죽음을 겪으면서, 그는 신유의 복음을 설교하겠노라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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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캔사스, 오타와에서 신유를 공개적으로 설교하기 시작했고, 그 사역은 1898년에 캔사스, 토페카에 벧엘 치유의 집을 설립하는 데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파함은 만족하지 못했다. “최근의 운동들에 의해 회복된 최신 진리들을 더 온전하게 알아보기로” 작정하고, 1900년 여름 동안, 그는 석 달 동안 적어도 네 곳의 성결주의 선교회들을 방문했다. 그에게, [온전한] 성화 경험과 “내주하는 기름부으심”(the anointing that abideth)은 충분하지 않은 것이었고, 그래서 그는 그 시대의 종식을 알리는 늦은 비 부으심을 갈망했다. 그 종말의 급박함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몇 친구들의 권위로, 파함은 1900년 10월에 벧엘 성경 학교를 열었다. 그 학교가 표방한 목적은 만물의 종말 이전에 세계를 향한 한 증인으로 사역자들을 준비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공부하다가 한 난관에 부딪혔다. 어떻게 사도행전 2장을 구원, 성화, 그리고 치유라는 보다 넓은 체계 안으로 합병시킬 것인가? 나아가, 성령침례의 “성경적 증거”(Bible evidence)는 무엇이었는가? 파함과 그의 학생들에게 “말씀과 부합하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없는 [증거]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절대 필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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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연속 집회들을 이끌기 위해 캔사스 시로 가 있는 동안 그 문제를 연구하도록 삼 일 동안 그들을 떠났다. 돌아온 그가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릴리안 티스틀스웨이트(Lillian Thistlethwaite)는 이것에 대해 “대답은 이의 없이 ‘다른 방언을 말하는 것’이었다”라고 썼다. 그녀의 글이 일어났던 것을 완전히 정확하게 말한 것일 것이다 또는 아닐 것이다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파함은 그의 학생들을 사도행전 2장에 집중하게 만듦으로써 이미 암묵적으로 그의 결론을 드러냈었던 같다.
“성경적 증거”의 발견은 그것의 나타남을 간절하게 구하게 만들었고, 1901년 철야 집회 동안, 학생 아그네스 오즈만(Agnes Ozman)이 성령침례를 받으며 방언을 말했다. 그녀는 후에 이 경험에 대해 “이것은 생수의 강물이 나의 내밀한 존재로부터 솟아 나오는 것과 같았다”고 썼다. 말할 필요 없이, 그들의 교리에 대한 하나님의 감지된 인증은 파함과 그의 학생들에게 그 경험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려는 욕구를 강화시켰다. 삼 일 후, 파함은 그의 오순절을 받았다. 그렇지만, 성령침례를 받는 조건으로, 그는 비록 개인적 고난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이 오순절 메시지를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날 밤의 성령과의 만남은 그의 남은 사역을 위한 토대가 되었다. 그곳에서 그와 그의 학생들은 이 메시지를 중서부와 그 너머로 전파할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재정적 어려움과 최종적으로 그의 갓난아기의 죽음에 대한 고통으로 이 계획들은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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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를 몰랐던 그는 계속 그의 메시지를 전했고, 결국 캔사스, 갈레나와 후에 텍사스, 오차드에서 호의적인 청중을 모았다. 파함은 1905년에 보다 넓은 휴스턴 시에서 그의 사역 시도에 필요한 참모진과, 자원들과, 조직과 경험을 획득했었다. 1905년 12월에, 그는 그곳에 다른 성경학교를 열었는데, 그 학교에 시무어가 출석했다. 그곳에서 시무어가 만나고 배웠던 그 사람은 당시에 어떤 발전된 신학과 성공적인 방법론을 갖고 있었고, 유명세의 절정을 경험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시무어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많은 역사가들은 그 시초에 시무어는 자신을 파함의 권위 아래서 사역하는 자로 인식했다는 것에 동의하는 것 같다. 먼저, 그는 그의 자격증명서들을 파함의 사도신앙운동조직으로부터 받았다. 기록물들은 그가 파함의 텍사스를 위한 지역장, 카로터스(W. F. Carothers)에게 자격증을 의뢰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또한 1906년 여름에 써진 한 편지에서 파함에게 그가 시작시켰던 사역을 인증하고 공고히 하기 위해 아주사 선교회를 방문해 주기를 요청했다. 중요한 것은 시무어가 그의 간행물을 위한 명칭으로 『사도신앙』(the Apostolic Faith)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 간행물의 모델은 파함이 벧엘 치유의 집 시절부터 매달 두 번 출판했던 『사도신앙』(Apostolic Faith)이었을 것이다. 시무어는 또한 파함의 “사도적” 편지를 자기 소식지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실었다. 그 편지에서 파함은 아주사 선교회의 회원들을 “나의 자녀들”(my children)이라고 부름으로써 자신을 로스앤젤레스의 운동의 “발기인”(Projector)으로 이해했었다는 인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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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주사 거리 부흥의 초기 시기에 대한 파함의 그 날인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시무어가 그의 『사도신앙』의 첫 기사에서 파함의 독창적 가르침을 반복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의 가르침을 이단적인 것으로 규정하려는 사람들에게 대항하여 방어하면서 시무어는 “그러나 그들은 사도행전 2장에 있는 그 증거를 아직 갖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자, 성령이 말하라고 주시는 대로 방언으로 말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파함과 그의 학생들은 그들의 성령침례에 대한 성경적 증거 탐구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제공하는 이 성경에 호소했었다. 시무어는 또한 동일한 호에서 “그저 신유와 모든 죄로부터 구원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언어들을 말하게 하실 수 있는 그분의 능력이라는 그분의 온전함 안에서 세상에 그리스도를 높입시다”라고 썼다. 이것은 또한 파함을 상기시킨다. 사실, 파함 부인은 그의 1905년 휴스턴 성경학교에서 배웠던 학생들에 대해 쓰면서 “그들은 [시무어의] 놀라운 기억력에 놀랐다. 때때로 그는 파함으로부터 받아 배웠던 것들을 단어까지 똑같이 말하곤 했다”고 전했다. 또 다시, 이 진술은 온정주의와 과장의 냄새를 풍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진실에 기초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분명히 시무어는, 비록 유능한 목회자였지만, 카리마스마가 넘치고 성공적인 파함과 그의 독창적인 가르침들의 영향을 받았다. 우리는 초기에 시무어는 파함의 “성경적 증거”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들였다고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향은 얼마나 지속되었는가? 특히 1906년 10월 말에 이루어진 파함의 재앙적인 그 선교회 방문 이후에도 지속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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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벡은 그 첫해 안에 그리고 그의 방문 후 시무어의 견해는 바뀌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1907년 중반에, 시무어의 성령침례를 위한 적절한 증거에 대한 생각이 또한 변하기 시작했다”라고 본다. 그리고 로벡은 그의 주장을 위한 중요한 증거를 1906년부터 1908년에 발간된 『사도신앙』의 글들에서 발견한다고 주장한다.
『사도신앙』은 아주사 거리 선교회의 공식 소식지였다. 이 소식지는 1906년 9월에 발간되기 시작하여 그 절정에 5만 부까지 배포되었었다. 처음 목표는 매달 발간하는 것이었겠지만, 발간 일정은 한 서명이 없는 기사가 “우리는 자금이 들어왔을 때 소식지를 발간하지 그 이전에는 하지 않습니다”라고 쓴 것처럼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그 목적은 적어도 삼중적이었다. 첫째 목적은 아주사 거리에서 진행되고 있는 부흥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 그들의 오순절을 받은 사람들의 간증, 방언을 통해 주어지는 메시지들의 통역들, 방문자들로부터의 편지들, 그리고 그 집회들에서 불렸던 찬양들의 가사들을 실었다. 둘째 목적은 후원자들과 지지자들과의 접촉을 유지하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셋째 목적은 아마 역사적 관점에서 가장 중요할 것인데, 그 선교회의 가르침들의 유포를 위한 장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 기사들은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의 머리와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이 되었고, 후원자 목록은 그 운동의 인명록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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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이 받은 인상은 그 소식지가 열정적으로 써졌고, 신학적으로 미묘하다는 것, 그 싹트기 시작한 운동에서 그 역할에 대한 자의식이었다. 편집자들은 너무도 정확성에 관심을 기울여서 “그 어떤 곳에서 오는 그 어떤 보고든 부풀린 것이 아닌 축소된 것이기를 바란다”고 썼다. 그 선교회의 목사로서 시무어는 또한 그 소식지의 편집장이었고, 그 선교회의 한 회원이며 지도자, 젊은 백인 클라라 럼(Clara Lum)은 편집 실무자로 그를 도왔다.
4. 시무어의 신학 방법
(Seymour’s Theological Methodology)
시무어의 신학적 여정을 추적하는 문제를 직접 다루기 전에, 필자는 그의 신학 방법에 대한 몇 가지 숙고들을 제공하려 한다. 이것은 그의 결론들에 관련된 그 어떤 논의에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몇 가지 오해들과 소홀함들이 언급되어야만 한다. 먼저, 시무어를 앵글로계 미국인적 신학 흐름 안에(within an Anglo-American theological stream) 넣고 그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맥락으로부터 그를 떼어놓으려는 움직임이 있어 왔다. 필자는 위에서 시무어가 파함의 방언에 대한 견해를 받아들이고 반복했다고 주장했지만, 이것은 시무어가 아무런 그 자신의 신학도 갖지 않았었다고 또는 그가 파함의 신학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시무어가 인종, 악인의 멸망(annihilationism), 앵글로-이스라엘주의(Anglo-Israelism)에 대한 파함의 가르침들을 받아들였다는 견해를 지지할 만한 그 어떤 증거도 없다. 사실, 우리는 시무어는 특히 인종과 관련하여 이론과 실제에 있어서 파함과 강하게 의견을 달리했다고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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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순전히 유럽계 미국인 범주들을 사용하면서 시무어에 대해 논하는 추세다. 예를 들면, 케네스 아처(Kenneth J. Archer)의 연구를 보라. 아처는 시무어를 오순절 해석 스팩트럼 안에 “성경 읽기 방법”(Bible Reading Method)의 세 가지 사례들 중의 하나로 놓으려 한다. 아처는 이 방법을 “증빙전 체계의 수정된 형태”(a modified form of the proof-text system)로 묘사한다. 그 증빙전 체계는 세 가지 단계들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1) 성구사전을 사용하여 성경 안에 있는 한 특수한 단어를 살핀다. 2) 그 특수한 단어에 대한 모든 언급들을 모아 한 목록을 작성한다. 3) 그 읽기를 바탕으로 교리를 추출한다. 아처의 분석에는 적어도 세 가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아처의 주장이 갖고 있는 첫 번째 문제는 그 범주 자체는 아주 작은 설명적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다. 모든 보수적 복음주의 해석 방법은 성경을 읽고, 어떤 주어진 주제에 대한 하나님의 온전한 권고를 선포한다. 그렇지만, 그 신학 방법의 핵심은 본문들이 택해진 후 발생하며, 이 단계만큼이나 중요하다. 무엇이 시작점인가? 무엇이 지배적인 전제들인가? 무엇이 핵심적인 해석 주제들인가? 신학의 출처들은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이 세 단계로 요약되고, 그래서 이것은 그 패러다임의 설명적 힘을 감소시킨다.
아처의 견해의 두 번째 문제는 지지하는 증거의 결여와 관련된다. 그는 시무어를 이 범주 안에 놓기 위한 그 어떤 결정적인 자료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시무어의 해석법에 대한 그 어떤 진상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독자는, 자신처럼, “표적으로서 방언”이라는 시무어의 1906년 9월 글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성경 읽기 방법을 볼 것이라고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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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글을 보다 주의 깊게 읽어보면, 다른 결론들에 이른다. 먼저, 그 글은 시무어가 쓴 글이라고 여겨질 수 없다. 그 글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써졌거나 또는 그의 글에 대한 심대한 수정본일 것이다. 그 글에는 아무런 서명도 없다는 사실은 그 사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한, 그 단어, 구문, 그리고 문체는 시무어 자신의 것이라고 알려진 글들과 아주 다르다. 로벡은 시무어의 글을 관통하고 있는 어떤 스타일에 대해 바르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스타일은 독자로 하여금 어떤 특별한 글이 시무어에게서 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이 글은 시무어의 주석적이고 신학적 과정에 대한 그 어떤 증거도 제공하지 않는다. 물론, 아처는 그 선교회의 지도자로서 시무어는 궁극적으로 그 소식지의 내용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하겠지만, 그러나 당시의 기준에서 본다고 할지라도, 한 편집자가, 심지어 어떤 종교적인 편집자가 주장들이 펼쳐지는 과정을 세밀하게 관리했다고 상상하기 어렵다.
본 논문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아처의 분석의 마지막 그리고 치명적인 결점은 그가 심지어 시무어를 백인 신학의 맥락보다는 사회-역사적 맥락 안에 놓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처는 시무어 자신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종교적/영적 민감성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이 시무어가 지배적인 신학적 해석적 추세들을 맹목적으로 따랐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 같다.
로 벡의 아주사 거리 선교회와 부흥에 대한 연구는 또한 시무어의 영성에 대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적 영향들의 분석의 결여를 반영한다. 로벡의 서술은 매체들과 다른 출처들이 시무어를 어떻게 그려냈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지만, 그러나 시무어의 삶을 형성시켜준 노예들의 종교적 전통들 안으로 충분히 깊게 파고들어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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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려받은 유산에서 오는, 시무어의 삶 안에 발생한 “특별 계시들”(special revelations)의 역할에 대한 막연한 언급들은 있다. 또한 시무어의 설교 스타일의 “부르고 답하는” 대화적 특징(the dialogical “call and response” nature)이 언급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런 진술들은 맥락 안에 적합하게 근거를 두지 않고 있으며, 그래서 진부하게 들릴 수 있다. 내가 의심하는 것은 시무어를 팔방미인으로 그려내려는 시도다. 로벡은 시무어를 그의 맥락을 훨씬 넘어서는 곳까지 높이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그 이외에 누구였든, 시무어는 남부 흑인이었고, 전에 노예였던 사람들의 아들이었다. 발터 홀렌베거(Walter J. Hollenweger)가 거의 30년 전에 오순절주의의 가장 중요한 뿌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화와 종교라고 주장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왜 오순절 운동의 영성의 아프리카적 국면들은 오순절 문서들에서 동등한 또는 적절한 취급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시무어의 신학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의 종교적 사고의 아프리카적 토대들에 대한 어떤 증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목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디아스포라의 종교적 의식 안에 남아있는 아프리카주의의 성격과 정도에 대한 헤르스코비츠(Herskovits)와 프라찌어(Frazier) 사이의 논쟁을 되살리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알버트 라보티유(Albert T. Raboteau)에 의해 제시된 어느 정도 중재적인 입장을 논의 없이 취할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아프카인적 신념들과 관행들은 노예들에 의해 지속되었고 그들의 자손들에게 전해졌다. 새로운 환경에 의해 형성되고 변형된 아프리카적 민간전승, 음악, 언어, 그리고 종교는 아프리카인 디아스포라에 의해 신세계 안으로 이식되었다. 과거의 아프리카인과 현재의 미국인을 연결시키는 노예의 문화의 가장 영속적이고 융통성 있는 요소들 중의 하나는 종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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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아프리카적 종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신학적 방법에 무엇을 제공하는가? 연구자들이 시무어의 신학적 성찰을 위해 보다 아프리카적인 틀을 취한다면 어떨까? 이것을 돕기 위해, 필자는 몇 유명한 아프리카인 신학자들, 주로 존 므비티(John Mbiti) 그리고 페트릭 칼리롬베(Patrick A. Kalilombe)의 연구에로 돌아갈 것이다. 시무어의 사고 안에서 작동하는 것 같은,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아프리카적 종교의 네 가지 특징들을 제시한다. 1) 구술성(orality), 2) 다중 방향성(multi-directionality), 3) 공동체(community), 그리고 4) 영성(spirituality). 먼저, 아프리카 신학자들 자신들이 그러는 것처럼, 아프리카적 종교는 획일적이지 않다(not monolithic)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록 이 원리들의 정확한 작동 방식은 저마다 다를 수 있지만, 어떤 두드러진 국면들이 대부분의 토착적 아프리카 종교들에 공통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아프리카 문화은 역사적으로 문자적이기보다는 구술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일 것이다. 므비티는 이 구술성이 아프리카 문화를 보다 더 성경의 언어에 가까운 것으로 만들어 준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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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전 아프리카인 노예들의 아들로서, 시무어의 신학의 대부분은 설교의 형태로 발해졌고, 문자화되고, 편집되었지만 여전히 구술적이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구술성(Orality)은 아프리카 종교성의 다른 특징인 다중-방향성(multi-directionality)을 암시한다. 본질적으로 개인적인 활동인 읽는 것과 달리, 구술성은 화자와 청자 사이의 관계성을 요구한다. 아프리카적 맥락 안에서 이 관계성은 양자 간에 절대 필요하고 적극적인 것이다. 아래의 시무어의 설교의 한 실례를 주목하라.
현시대의 남자들과 여자들이 그들의 삶에서 필요한 것은 보혜사입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이 복된 보혜사를 받았고, 그분은 우리의 영혼 안의 천국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 찬양할 수 있습니다. “산꼭대기나 골짜기나, 초막이나 궁궐이나 주님 예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보혈로 산 자녀들 각자를 도우셔서 이 복된 보혜사를 받기를 바랍니다. 구분의 이름에 영광을 돌립니다! 할렐루야! 그분의 전능하신 이름에 호산나! 오, 그분은 나의 영혼 안에서 다스리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저는 이 찬양처럼 느낍니다.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
큰 환란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주 믿는 성도들 다 전할 소식은
보혜사 성령이 오셨네!”
로벡은 시무어의 감탄사들은 반복적이고 의미 없는 대화 메우기들은 아니라고 바르게 이해한다. 그 감탄사들은 의사소통의 대화적이고 참여적 특성에 대한 아프리카적 이해의 부분이며 국면들이다. 그것들은 청자들을 의미의 창출과 적용에 참여로 초청한다. 설교자는 공동체의 분별로부터 인증을 구하고 분별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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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반응을 위해 설교하는 설교자들의 교묘하고 부정한 행위들과는 아주 다르다. 이것은 성령의 현존 안에서 행하는 정직한 대화이다. 시무어 또한 자신의 설교들을 논의들(discussions)로 “변질시키는 것”을 허용하면서 이 다중-방향성을 어느 정도 비정통적인 방식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 다중-방향성은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 선교회에 참여했던 발데즈(A. C. Valdez)는 “예배들 동안에 만약 어떤 설교자가 ‘기름부음 아래’있지 않다고 느켜지면, 그 전 회중은 괴로워하기 시작할 것이다”라고 기록한다. 그는 그 불행한 설교자에게 이의를 제기했던 “마더 슨스”(Mother Jones)를 기억한다. 그는 생각에 잠겨 말했다. “그렇게 느껴지면, 마더 존스가 해야 할 일은 일어서는 것이고, 그러면 그 기름부음을 받지 못한 목회자는 꽁무니를 빼고 강단에서 도망쳤습니다.” 발데즈는 또한 아주사 거리에서 행해진 설교의 다중-방향성을 인상적으로 묘사한다. “설교들은 진정으로 설교들이 아니었고, 영어나 통역된 방언으로 영감된 말들이었다. 그것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비구조적이었지만, 성령의 관점에서는 구조적인 것이었다. 거기에는 내가 오늘날 지휘자로서 성령 안에서 경탄하는 설교자와 회중 사이의 아름다움과 하모니가 존재했다.”
아프리카적 종교 맥락 안의 다중-방향성은 또한 공동체를 암시한다. 므비티는 이 소통적 관점을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내가 존재한다.” 그는 또한 이 접근은 신학 방법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고 제안하며, “성경은 이 공동체 지향성의 우산 아래서 읽혀지고 해석되며, 성경적 가르침들은 이 공동체에 대한 널리 스며있는 의식에 비추어서 고려된다”는 것을 주목한다. 아주사 거리 풍조 안에서 신학의 공동체적 읽기의 한 사례 또는 부가적 결과는 사회적, 인종적, 그리고 성 평등이 지배하는 곳에서 한 공동체가 되려는 그것의 결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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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의 여지 없이 웨슬리가 사용한 용어인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주제는 또한 아프라카인 디아스포라와 같은 신학적 틀 안에서 공명을 발견할 것이다. 시무어와 참으로 메이슨(C. H. Mason)과 같은 다른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도자들은 각자가 공동체를 지향했던 운동들을 설립하려 했을 때 어떤 고대 대본대로 움직였던 것 같다. 만약 “보혈 안에서 피부색에 의한 경계선이 사라졌다면,” 그것은 또한 모든 인류의 연결성에 대한 아프리카적 이해에 의해 충만해진 남자와 여자 흑인 제거자들이라는 대행자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아프리카적 맥락 안에서 공동체는 영성을 암시한다. 아프리카 종교들의 근본적인 특징들 중의 하나는 만물의 연결성에 대한 믿음이다. 영성은 단지 공동체 개념을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한다. 이 틀 안에서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자와 유지자로 이해된다. 그렇게 하나님은 그 일들을 친밀하게 수행하신다. 하나님의 내재에 대한 그런 강조와 함께 이 체계는 유럽계 미국인적 우주관에서 발견되는 급진적인 이원론(radical dualism)을 가지고 있지 않다. 즉, 가시적인 그리고 비가시적인 세계들은 그 안에서 하나는 타락하고 다른 하나는 완전히 다른 분리되고 나눌 수 있는 영역들로 여겨지지 않는다. 사실, 사람들, 영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두 영역 안에서 대행자들로서 동시에 다른 영역에 영향을 주면서 한 영역 안에서 수행되는 행위들의 영향을 받는다. 하늘과 땅, 가시적인 그리고 비가시적인, 살아있는 그리고 죽은 것들이 서로 영원히 맞물려 있다. 그 결과, 우리가 기적적인 것이라고 그리고 과학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사실은, 일상생활의 정상적인 부분들이다. 치유들은 놀랄만한 것들이 아니고, 천사들의 합창들을 듣는 것은 정당하게 기대될 수 있으며, 신적 창조자/유지자 성령 안에서 침례는 그 안에서 비가시적 에너지가 가시적 세상에 영향을 주는 능력을 개인들에 주입하는 한 경험이다. 아주사 거리는 플라톤적 우주의 한 부분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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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자면, 필자는 시무어의 그리고 아주사 거리 부흥에서 작동되었던 신학적 틀과 방법은 유럽계 미국인의 신학적 관심사들보다 아프리카적 감수성이라는 특징을 더 갖고 있었던 것 같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발전의 중요한 단계에서, 윌리엄 시무어의 지도력 아래서, 그리고 그의 신실한 추종자들 무리와 함께, 북미에서 오순절운동은 그것을 기껏해야 중서부 현상으로부터 바꾸어 전 지구적 무대로 옮겨놓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종교성의 지울 수 없는 날인을 받았다. 그러므로, 시무어의 신학에 대한 그 어떤 연구도 그를 어떤 문화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또는 그가 무엇보다도 유럽계 미국인적 이상들의 부분집합 안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처럼 취급하지 말아야만 한다.
그런 이해는 증거론에 관련된 시무어의 믿음들에 관한 연구를 진행할 때 결정적인 것이 된다. 그가 타고나게 가졌었던 아프리카적 세계관은 포용적이고, 변증법적이며, 서방적 포스트 계몽주의 정신에 가망 없는 모순들일 것 같은 것들을 극복할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방언과 윤리는 둘 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다른, 그러나 분리되지 않는 영역들에 대한 확실한 증거들로 기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주장은 그 선교회의 『사도신앙』 소직지와 그것의 『교리와 계율』에서 발견되는 사용 가능한 자료에 대한 보다 더 명확하고 상세한 분석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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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시무어와 사도신앙에서 드러나는 최초 증거
(Seymour and Initial Evidence in the Apostolic Faith)
최초 증거에 대한 시무어의 입장의 여정을 추적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사도신앙』을 접근하는 데에는 언급할 가치가 있는 두 장애물들이 있다. 우리의 연구와 관계된 이 장애물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글들 중 상당수가 [시무어의] 서명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편집자들은 진정한 오순절적 말투로 “우리는 인간 저자가 영광을 취하기를 바라지 않고, 다만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면서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하게 만든다. 글쓴이의 어떤 정보를 담고 있는 글들 중에서, 우리는 스물 세 개의 글들만이 시무어 자신에게서 온 것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몇몇 다른 글들이 시무어의 대화적이고 그리고 어느 정도 설교적 스타일을 반영하는 것 같기는 하다. 예를 들면, 1907년 1월 호에 실린 한 글은 성령침례를 받았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경고한다. 그 글은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전형적인 시무어”(classic Seymour)를 드러내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글이 그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시무어의 사고의 설득력 있는 재건은 이런 글들에 의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약 서명이 안된 글들이 허용되어 섞여진다면 객관성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충실한 논거는 그런 기반 위에 세워질 수 없다.
이 기획을 더 어렵게 만드는 또 다른 장애는 시무어에 의해 써졌다고 입증될 수 있는 글들 중에서 단지 몇 개만이 직접적으로 최초 증거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활용할 수 있는 자료가 너무도 적다. 그러므로 『사도신앙』 안에서 드러나는 시무어의 최초 증거 교리의 변화와 발전 상태를 재건한다는 것은 아주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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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벡은 이 직무를 피상적으로 우리의 질문에 결정적인 답을 주는 것 같은 어떤 아주 도발적인 인용들을 먼저 택함으로써 성취한다. 그렇지만, 최초 증거에 대한 그의 접근과 분석은 중대한 문제들을 갖고 있다. 로벡은 그가 시무어의 변화의 시작점으로 인식하는 시기에서 쓴 글을 첫 번째로 인용한다. “방언은 성령침례를 받은 모든 사람에게 동반되는 표적들 중의 하나이지. . . . 일상생활에서(in the every day life) 성령침례의 진정한 증거는 아니다.” [이어지는 글은 다음과 같다. 당신의 삶은 성령의 열매들로 판단되어야만 한다. 만약 당신이 화내거나, 악한 말을 하거나, 뒤에서 험담한다면, 얼마나 많은 방언을 말하든, 당신은 성령침례를 갖지 않은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구원을 잃은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영혼에 보혈이 필요하다. Your life must measure with the fruits of the Spirit. If you get angry, or speak evil, or backbite, I care not how many tongues you may have, you have not the baptism with the Holy Spirit. You have lost your salvation. You need the Blood in your soul. 역자 주] 틀림없이, 그 스타일은 시무어의 것인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 이 글은 서명이 안된 글들 중의 하나이며, 그래서 위에서 요약된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그 글을 시무어의 개인적인 믿음의 변화에 대한 긍정적인 증거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진술이 시무어에게서 온 것이라고 또는 그의 사고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인정한다 할지라도, 이 진술을 로벡의 주장과는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 그 열쇠는 로벡이 강조하는 것이 잘못 인도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에 있다. [그 글이 실제로 주장하는 것은] 글로솔라리아가 성령침례의 진정한 증거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고, 글로솔라리아는 일상생활에서 진정한 증거는 아니라는 것이다. 한 사람이 일상생활의 세속적인 직무들을 수행할 때, 방언을 말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떤 사람은 어떤 사람이 성령침례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어디서든 그리고 언제든 증명될 수 있는 “성령의 열매들”에 의해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로벡은 이것이 윤리적 명령과 함께 버무려진 목회적 진술이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 저자는 성령침례의 “성경적 증거”로서 방언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기를 시도하지는 않고 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14장의 사도 바울처럼, 그 저자는 그의/그녀의 청중의 사고라는 최전선에서 경건한 생활양식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즉, 다른 방언이라는 최초 증거를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은 후, [생활 속에서] 그 이상의 증거적 열매가 또한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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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용의 사용의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그 소식지의 그 특수한 호의 보다 큰 맥락을 경시한다는 것이다. 의문시되는 그 인용구 다음 페이지에 실린, 시무어가 썼다고 부정할 수 없는 글에서 성령침례와 글로솔라리아 사이의 연결성은 부정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을 우리 마음에 보내셨습니다. . . .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방언을 말하는 . . . 성경적 증거(the Bible evidence)를 주셨습니다”라고 쓴다. 오래된 해석 원리 하나를 인용하자면, 모호한 것은 명료한 것에 비추어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시무어는 성령침례의 진정한 최초 증거는 방언이라고 가르치기를 계속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른 저자가 무어라 의미하든 그것은 이 가르침에 정반대되는 것을 추론하지 말아야만 한다.
로벡이 두 번째로 인용하는 것은 “질문에 대한 대답들”(Questions Answered)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온 것이다. 질문은 이것이다. “어떤 남자 또는 여자가 성령침례를 받았다는 것에 대한 진정한 증거는 무엇인가?” 대답은 이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즉 자비이다. . . . 이것이 그들의 일상생활과 대화에서의 진정한 증거이다.” 즉시, 우리는 시무어의 성결주의적 배경을 떠올리며, 그리고 가장 논리적인 추정은 시무어가 그의 성결주의적 훈련으로 복귀했거나, 로벡이 말하는 것처럼, 시무어가 “그의 성령침례에 대한 이해를 윤리적 차원을 포함시키기까지 넓혔다”는 것일 것이다. 보다 세밀한 분석은 다른 무언가를 드러낸다. 첫 인용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그 글의 저자를 입증할 수 없고, 그래서 우리는 이 가르침이 시무어의 펜에서 직접 온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 더구나, 시무어가 그 글을 썼다고 할지라도, 위의 논의에서 제시했던 이유들 때문에, 이것은 또한 일종의 목회적 진술이지, 교리의 변경은 아니다. 어떻게 “일상 생활과 대화에서”(in their daily walk and conversation)라는 명료한 문구가 다시 중요하게 부각 되는지를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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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시무어는 언제나 강한 윤리적 차원을 가졌었기 때문에, 이제서야 윤리를 그의 가르침 안에 통합시켰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예를 들면, 1906년 9월 호에서 시무어는 “그래서 당신은 사람들과 귀신들에게 당신이 성화되고, 순전하고 죄로부터 자유로운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고, 세상적인 것, 육적인 것, 그리고 마귀적인 것을 이기는 힘을 주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나아가 성령침례를 “성화되고, 깨끗함을 받은 마음에 값없이 주어지는 은사”로 묘사한다.
위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시무어의 교리적 변경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라는 것은 아주 문제가 많다. 그렇지만, 로벡은 그의 주장을 두 번째 기둥에 의존하기도 한다. 그 기둥은 “1907년 말엽에 사도신앙은 대체 용어를 사용하여 용어들을 통합시켰고, ‘성경적 증거’라는 문구는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시무어가 증거라는 용어를 기피했다고 주장한다. 첫 주장의 두 번째 부분에 대답하자면, “성경적 증거”라는 문구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맞다. 그 소식지의 아홉 개의 호들에서, 그 문구는 마흔일곱 번 사용된다. 마지막 네 개의 호들에서, 그 문구는 단지 네 번 나타난다. 보다 넓은 용어, 방언을 지시하는 데 사용된 증거(evidence)는 첫 아홉 개의 호들에서 예순여덟 번 등장하고, 마지막 네 개의 호들에서 열세 번 등장한다. 그러나 사용 빈도를 중요도의 표시로 취할 수 있는가? 대답은 ‘아니다’인 것 같을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시무어는 결코 글로솔라리아를 진정으로 최초 증거로 채택한 적이 없었다고 성공적으로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시무어는 그가 서명한 글들 모두에서 증거라는 용어를 단 두 번 사용했는데, 두 번 다 “성경적 증거”(Bible evidence)라는 문구에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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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유용한 것은 로벡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넓은 단어일 것이다. 그는 증거(evidence)와 표적(sign) 사이에 차이를 두고, 증거라는 용어를 보다 강한 것으로 보는 것 같다. 그렇지만 『사도신앙』에서 그 용어들의 사용의 견지에서 보면, 이 용어들은 서로 동의어들로 나타난다. 몇 가지 사례들이 이 점을 보여줄 것이다. 1906년 9월 호에는 “표적으로서 방언”(Tongues as a Sign)이라는 제목의 서명이 없는 글이 있다. 그 글은 그 선교회의 가장 논쟁적인 신학적 입장에 대한 초기 변증이다. 마가복음 16장, 사도행전 2장, 10장, 19장에서 문구들을 취하면서, 그 저자는 방언을 성령침례의 증거로 만들고 있으며, “오순절에 대한 성경적 증거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축복들(blessings)을 받고 기름부음들(anointings)을 받는 것을 추구하다가 빗나갔다”라고 결론짓는다. 우리의 논의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글이 증거(evidence)라는 용어를 표적(sign)이라는 용어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방식으로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그 저자는 마가복음 16장 16절에서 17절을 인용하면서“여기서 믿음과 침례가 언급된다. 그리고 표적(sign) 또는 증거(evidence)는 당신이 그 믿음과 침례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주어진다”라고 주장한다. 또 다시, 그 저자는 “당신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베드로에게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표적 또는 증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해설한다. [“표적”이라는 용어는 성경적인 용어이고, “증거”라는 용어는 찰스 파함이 통상적인 과학적 용어를 신학적으로 차용한 용어이다. 그런데 최근 오순절 신학자들은 방언과 성령침례와의 밀접한 관계를 끊어서 방언을 제거하기 위해 “증거”라는 용어를 거부하고 “표적”이라는 용어만을 취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역자 주]
“오순절 이전에 성화됨”(Sanctified before Pentecost)이라는 또 다른 글은 똑같이 그 두 용어를 연결한다. 그 글은 “방언의 은사는 성령침례의 표적과 증거로서 오순절 날을 위해 예비되었다”라고 가르친다. 방언의 은사는 표적과 증거라는 것을 주목하라. 분명히, 그 저자의 마음에서 그 두 용어는 동일하다(ident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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륩턴 목사(Rev. Levi R. Lupton)도 또한 두 용어의 분리 불가능성에 대한 증언을 제공한다. 처음에 “새로운 행전”(New Acts)이라는 제목으로 써졌다가 사도신앙에서 인용된 한 글에서 륩턴은 “어떻게 우리가 성령침례가 어떤 잘 이해되는 표적들 또는 증거들 또는 그것의 나타남들을 동반한다는 것 이외에 다른 빛 안에서 성령침례 또는 성령의 은사의 수여에 대한 신약 성경 보고들을 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쓴다. 여기서 그는 또 다른 명백하고 중요한 동의어를 소개했다.
위 입증들로부터 결론 짓 건데, 사도신앙 안에서 그리고 아마도 보다 넓은 당시의 오순절 공동체 안에서 증거로서 방언과 표적으로서 방언 사이에는 어떤 날카로운 구분이 없었다. 사실, 증거로서 방언과 표적으로서 방언 사이에는 그 어떤 필연적인 긴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용어들은 상호 교환 가능하게 사용되었다. 유명한 오순절 역사가 게리 맥기(Gary McGee)는 최초 증거 문제를 살펴보면서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침례와 방언 말하기의 연결성을 묘사하기 위해 다양한 표현들을 사용해 왔다”라 말하면서 이 점을 부각시킨다. 비록 증거라는 용어가 결국 우선성을 갖지만, 두 용어는 오순절운동의 초기 동안 잠시 공존하지 않았다고 믿을 구체적인 이유가 전혀 없다. “대체 용어를 사용하는 더 많은 글들”의 포함은 시무어의 파함의 “성경적 증거”와의 불화의 시작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로벡의 주장은 그래서 의심스럽다.
로벡이 『사도신앙』 안에서 시무어의 최초 증거에 관한 생각이 변했다는 그의 견해에 관한 분석을 마치기 전에, 두 가지 문제를 더 논의해야 한다. 먼저, 로벡의 결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 “능력 있는 목사”가 적어도 아홉 달 동안 그의 스텝이 그가 비성경적인 생각들이라고 여기는 것을 보고하도록 허용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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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은 “첫 예배에 스물 두 명이 제단에 왔고 네 명이 성경적 증거와 함께 오순절을 받았다”로 알린다. 또 다른 글은 “지난 여름 여기 캠프에서 약 서른 명이 성령이 말하라고 주시는 대로 방언을 말하기라는 증거와 함께 성령으로 침례를 받았다”라고 보고한다. 또한 다른 글은 “플로리다에서 많은 성도들이 성경적 증거와 함께 성령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라고 쓴다. 시무어는 대부분의 일에 있어서 부드러운 겸허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그가 노골적인 거짓 진술을 용인했을 것이라고 믿기는 아주 어렵다. 자기 가르침을 고수하는 것 때문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목회하던 첫 회중에 의해 출입금지를 당했었던 사람이, 그리고 자기가 비성경적인 믿음 때문에 윌리엄 더함(William Durham)을 출입금지 했었던 사람이 그런 교리적 불일치를 묵인했을 것 같지 않다.
보다 가능해 보이는 것은 당시 시무어는 “하나님의 사랑”(divine love)이라는 그의 성결주의 배경적 가르침을 파함의 “성경적 증거” 가르침과 엉겨붙어있는 것으로 그리고 보조적인 것으로(as being coherent with and complementary) 보았다는 것이다. 그에게, 방언(tongues)과 윤리(ethics)는 둘 다 사람의 마음 안에서 성령의 역사에 대한 확실한 증거들이다. 그에게 방언은 보다 가시적인 외적 증거이고, 윤리는 신자의 일상생활 안의 증거이다. (For him, tongues and ethics are both valid evidences of the Spirit’s work in the human heart, tongues as the more spectacular outward evidence and ethics as the evidence in the believer's daily life.) 그의 아프리카적 변증법적 신학적 사고에 충실하게, 그 두 용어들 사이에는 아무런 본래적 상충이 존재하지 않았다.
주목을 요하는 두 번째 문제는 로벡이 결정적 증거를 놓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 소식지의 열세 개 호들 중에서 다섯 개에 적절하게 어떤 교리적 진술(doctrinal statement)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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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은 “사도신앙 운동[후에 선교회]은 한 번에 성도들에게 전해졌던 신앙의 회복을 위해 존재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 선교회의 믿음들을 자세하게 언급한다. 성령침례의 문제와 관련하여 그 글들은 그것은 성화된 삶에 주어지는 능력의 은사이며, 그래서 우리가 성령침례를 받을 때 우리는 제자들이 오순절 날 받았던 것과 동일한 방언으로 말함이라는 증거를 갖게 된다(행 2:3, 4)”라고 쓴다. 그 진술은 첫 호에 그리고 세 번째 호에(1906년 9월 호와 11월 호에서) 등장하지만, 그리고는 거의 일 년 동안 사라진다. 뚜렷하게, 그 진술은 1907년 9월 호에 그리고 1908년 1월 호와 5월 호에 다시 등장한다. 그 기간은 로벡이 시무어가 생각을 수정하기 시작했다고 제안하는 시기와 동일한 때다. 현저하게, 그 진술은, 비록 식자를 다시 했다는 증거가 있지만, 변경되지 않았는데 심지어 구두점조차도 동일하게 남았다. 시무어가 편집자고 그래서 그 소식지의 전체 내용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그렇게 중요한 진술의 포함은 시무어 자신에 의해 승인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그 글들은 변경이나 발전을 보여주기 보다는 시무어가 글로솔라리아는 성령침례의 “성경적 증거”라는 생각을 계속 견지했다는, 상반되는 것을 입증한다. 교리적 진술에서 드러나는 그 명백한 선언은 우리가 그것으로 최초 증거 교리와 관련된 모든 다른 언급들을 이해하는 한 결정적인 해석 도구가 된다. 따라서, 보다 적절한 시각을 위해 몇 가지 더욱 논쟁적인 견해들을 제시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시무어는 그의 견해들을 변경하지 않았었다. 그는 방언을 언제나 처럼 “성경적 증거”라고 이해하는 데 전념했다. 그가 방언을 표적으로 언급하는 것과 다른 글들에서 증거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우월하게 여기는 것 같은 언급은 보다 명확하고, 보다 공식적인 진술들에 비추어서 해석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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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자면, 『사도신앙』의 글들 안에서 최초 증거에 대한 시무어의 생각이 이미 변한 것을 볼 수 있다는 로벡의 논지는 적어도 네 가지 이유 때문에 미심쩍은 것이다. 첫째, 기껏해야 의심스러운 증거에 의존한다. 둘째, 시무어를 『사도신앙』의 보다 넓은 문맥에서 시무어를 다루려는 불가능한 일을 시도한다. 영적 지도자로 인정된 그는 분명 그 소식지의 내용과 신학적 메시지 전체를 통제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견해들은 확실하게 그 소식지 안에 반영되어 있어야만 한다. 셋째, 로벡은 모든 증거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다. 사실, 그는 결정적인 증거를 무시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의 결론은 설득력이 없다. 마지막으로, 로벡은 시무어의 체계 안에서 성령침례의 은사적인 차원과 윤리적 차원 사이에 불필요한 그리고 부자연스러운 긴장을 가정하는 것 같다. 이것은 그가 시무어를 아프리카계 미국인 맥락 안에 두는 데 실패한 것 때문일 것이다.
6. 시무어와 『교리와 계율』 안의 최초 증거
(Seymour and Initial Evidence in Doctrines and Discipline)
1915년에 발간된 『교리와 계율』(Doctrines and Discipline)은 시무어의 글로솔라리아에 대한 가르침에 급격한 변경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시무어 자신에 의해 편집되고 개정된 아프리칸 감독 감리교회 책자의 한 각색인 그 문서는 아주사 거리 선교회의 핵심 가치들과 신앙들에 대한 진술이다. 그 안에 시무어는 “[방언은] 표적들 중의 하나이지, 그 증거(the evidence)는 아니다”라고 쓴다. 그는 또한 “성령침례 교리가 오직 방언을 말함이라는 증거로 알려지는 모든 곳마다, 그 사역은 무당들과 영매들, 그리고 자유 연애주의를 위해 열린 문이 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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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이 명백한 마음의 변화를 일으켰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시무어에게 영향을 주었을 세 가지 주요 사건들을 간략하게 알 필요가 있다.
첫 사건은 이미 제시되었다. 파함에게 그 선교회를 방문해 달라는 시무어의 몇 달간의 요청 후, 파함은 드디어 1906년 10월에 아주사 거리 선교회를 방문했다. 그 사건은 아주 재앙이었다. 파함은 후에 그 경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초면술적 영향들, 친숙한 영적 영향들, 영매적 영향들, . . . 그리고 온갖 종류의 주문들, 발작들을 보았다.” 파함은 아주사 거리의 그 사건들을 도깨비불과 광신주의 그 이상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의 점진적인 인종적 발언들뿐만 아니라 이 반응, 그 선교회에 대한 권위 주장 시도의 실패, 그리고 그의 한 부흥 선교회 설립은 그와 시무어 사이에 쇄기를 박았다. 두 사람은 깊게 상처를 받았다. 사도신앙 12월 호에 등장한 시무어의 그 문제 처리는 특별히 이것을 말해준다. 그 글에서 그는 분명하게 파함의 지도력을 거부하지만, 그러나 그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그 분열에 대한 유감의 회한보다 더한 것이 있었던 것 같다.
두 번째 사건은 클라라 럼(Clara Lum)과 관련된다. 그 일화는 순진하게 시작되었다. 1908년 5월 13일에, 시무어와 그 선교회 시초부터 한 지도자와 신실한 사역자였던 제니 에반스 무어 (Jennie Evans Moore)가 사적인 의식으로 결혼했다. 그 직후, 그리고 아무런 설명도 없이, 클라라 럼이 갑자기 그 선교회를 떠나 이전에 아주사 거리 선교회 회원이었던 플로렌스 크로우포드(Florence Crawford)와 함께 사역하기 위해 오레곤, 포틀랜드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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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갑자기 떠난 이유에 대한 많은 추측들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럼이 시무어의 결혼은 그 선교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1차적 직무로부터 그의 주의를 분산시킬 것이라고 느꼈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시무어에 대해 연애 감정을 가졌었을 것이라고 제안하며 보다 사적인 이유 탓으로 돌린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의 행위들은 성장하던 오순절 운동 안에서 아주사 거리 선교회의 인기와 중심성의 쇠퇴의 시작을 보였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 선교회의 생명줄인 [『사도신앙』의] 국내 그리고 국외 우편 주소록을 가지고 갔기 때문이다. 시무어에게 있어서 그런 문서의 가치는 과대평가 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 주소록이 없이는 그는 그의 많은 후원자들과 접촉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선교회에 더 재앙적인 것은 1908년 5월에 벌써 『사도신앙』을 발간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7월에는 포틀랜드를 그 소식지의 발행지로 기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아주사 거리 선교회는 『사도신앙』 구독을 통한 재정적 후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시무어는 그의 사역에 임박한 위험을 감지했고, 그의 주소록을 돌려 달라고 우체국장을 압박하여 설득할 희망을 품고 오레곤으로 여행하기도 했다. 불행하게도, 그의 노력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마지막으로 출판된 것으로 알려진 『사도신앙』 1908년 11월 호에서 시무어는 “그 소식지를 되찾으려는 시도는 우리에게 슬픈 일이었다”라고 탄식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시무어에게 지대하게 영향을 주었던 세 번째 사건은 그의 윌리엄 더함과의 분쟁이었다. 더함의 1907년 2월부터 3월까지 아주사를 첫 번째로 방문했던 것은 경사스런 것이었다. 『사도신앙』의 한 글은 더함과 동료 설교가 “블레이크 형제”를 즐겁게 상기했다. “그들은 둘 다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며 성령침례를 받았고, 충만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흠뻑 젖어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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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적 경험에 대한 더함의 개인적 간증을 담은 한 편지가 또한 그 동일한 호에 나타났다. 더함은 “그는 하나님께 절대적인 의존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리고 어린 아이같은 단순한 마음을 갖고 있고, 동시에 너무도 하나님으로 충만하여 만약 당신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 간다면, 그때마다 그 사랑과 능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시무어의 겸손함과 그의 오순절운동 안에서 지도력을 인정하면서 그 편지를 끝맺고 있다. 두 사람 사이의 칭찬은 진정하고 상호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1907년 9월 호에 한 강렬한 진술은 “주님께서 더함 형제를 제방을 넘쳐흐르는 그리고 마른 땅을 적시는 강으로 사용하고 계시다”라고 보고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문은 그렇게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다. 시무어가 전국을 여행하고 있는 동안, 더함은 시카고에 있는 노스 아베뉴 선교회(North Avenue Mission)의 목사로서 그의 지위를 떠나 로스앤젤레스에서 살기 위해 왔다. 넬슨(Nelson)은 그가 시카고에서 떠난 것은 “형편이 나쁜 것”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대담하게, 더함은 아주사 거리 선교회에서 그의 “갈보리에서 완성된 역사”(Finished Work of Clavary)를 공포하기 시작했다. 그 시점까지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은, 특히 성결주의적 배경에서 온 사람들은 성화된 삶에 수여되는 능력의 은사인 성령침례와 함께 [온전한] 성화를 은혜의 두 번째 명확한 역사로 이해했었다. 더함은 이 생각을 완전히 풀어놓았다. 그에게 성화는 한 위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사역의 신자의 삶에 전유(appropriation)를 포함하는 한 과정이었다. 더하여, 성화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이미 구원을 받을 때 신자에게 주입되었다. 그 교리는 아주사 거리 회원들의 대부분에게 이질적인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더함의 태도는 경멸적이고 논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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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회 이사진의 재촉에 시무어가 돌아올 때까지 십 주 동안 더함은 아주사 거리 선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시무어는 더함에게 말을 자제해 줄 것을 호소했지만, 더함은 거절했다. 결국 시무어는 그의 선교회 출입을 금지하는 것 이외에는 선택할 수 없었다. 이것은 분열로 이어졌고, 더함은 아주사 거리 선교회의 회원들 중의 일부를 데리고 나갔다. 아주사로의 “불”의 돌아옴을 기뻐했었던 바틀맨 조차도 더함의 태도에 대해 말했다.
이 세 사건의 증대되던 그리고 혼합된 충격은 시무어의 사역을 손상시켰다. 시무어의 오순절운동 안에서 영향력은 결코 이전과 동일할 수 없게 되었다. 시무어를 손상시켰던 그 사람들은 세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었다. 그들은 모두 백인이었다. 그들은 모두 아주사 거리 선교회의 전체 또는 일부를 지배하기 위해 다투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방언을 말했다. 그러므로 『교리와 계율』에 기록된 것처럼 시무어가 그의 사고에서 만드는 그 세 번의 심대한 변화들 각각은 이것들 중 하나와 연결된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먼저, 시무어는 그의 소식지에 “하나님께서 사용할 수 있는 도구는 그 누구든 피부색 또는 의복 또는 교육 부족 때문에 거부당하지 않으며,”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외모나, 피부색이나, 명성을 개의치 않으시지만,” 이제 비흑인 회원들이 본 선교회 안에서 주요 지도적 직책을 취하는 것을 금하셨다고 썼다. “피부색에 의한 경계선이 보혈 안에서 사라진다”(The color line is washed away in the blood)고 썼던 그 선교회의 소식지는 이제 인종 차별을 자행했다. 시무어는 “사도신앙선교회는 흑인들의 관심사와 이익을 위해 유지되어야만 한다”라고 썼다. 그는 이 조치는 “차별을 위한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한 것이다. 교회 안에서 인종 간 다툼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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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그는 자기 자신의 신념을 버린 오점을 남겼고, 편의를 위해 깊이 가지고 있던 가치들을 기꺼이 희생시키는 것을 보여주었다.
둘째로, 1914년 5월 19일에 승인된 법인의 개정된 정관 안에 기록된 것처럼, 시무어는 자신을 특별한 권력을 갖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지도자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그는 그 선교회에서 어떤 논의가 있어야 하는지를 결정했다. 모든 모임들을 관장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종신 이사장들이었다. 모든 임원들과 이사들은 그의 결정에 따라야 했다. 그리고 그는 회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심사할, 강령을 승인하고 철회할, 그리고 그 선교회를 위한 규정과 계율을 정할 유일한 권위를 갖고 있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아주사 선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누가 설립자(the founder)인지 묻고 있습니다. 주님이 설립자이셨고, 주님이 이 운동의 발기인(the Projector)이십니다”라고 선언했던 것과는 정반대다. 아이러니하게도, 1915년에 시무어는 자신을 “설립자”(the Founder)로 만들었다. 그의 지도력에 대한 공격들의 한 결과로, 시무어는 그 선교회의 지배를 주장하게 되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그는 그런 자신의 행위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그 사역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 운동의 시초부터 채택해 왔었던 평등주의적 이념을 버렸다. 다시 한번, 반대에 직면했을 때 핵심 가치를 배제하려는 그의 성향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시무어가 방언을 증거로 삼는 것을 확실하게 거부한 것을 순전히 신학적 관심사보다는 실용적이고 목회적 관심사의 결과로 보는 것은 확대해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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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 세 사람은 적어도 세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백인이었다. 그들은 모두 시무어의 그 선교회 전 국면 지배를 강탈하려 했다. 그들은 모두 방언을 말했다. “방언” 문제는 특별히 어려웠다. 시무어는 전에 성령침례는 은혜의 세 번째 사역이 아니고, 성화된 삶에 주어지는 능력의 은사라고 가르쳤다. 그는 성령침례를 받은 사람들이 방언을 말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참으로 이 사람들이 성령침례를 받았다면, 어떻게 그들은 그런 육적이고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행동했는가? 시무어의 대답은 방언의 증거적 가치에 대한 그의 입장을 주의 깊게 평가하는 것이었다.
첫째로, 그는 방언을 말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사역에 적합한 것을 자동적으로 입증해 주지는 못한다고 주장했다. 둘째로, 그는 아무도 방언을 유일한 기반으로 삼아 성령침례를 받은 것으로 간주되지 말아야만 한다고 단언했다. 셋째로, 그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령침례와 동등한 것이라는 생각을 비난했다. 넷째로, 그는 방언이 구원과 성령의 내주에 필수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했다. 다섯째로, 그는 방언은 교리적 순수성의 지표도 아니고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위한 대용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종합적으로, 시무어는 글로솔라리아의 찬양을 거부하고, 그가 방언의 증거적 가치에 과도한 의존으로 생각하는 것에 균형을 잡아주려한다. 그의 조언은 현명하다. 그는 “성령침례 교리가 오직 방언을 말하기라는 증거로 알려지는 곳마다, 그 사역은 무당들과 영매들, 그리고 자유 연애주의를 위한 열린 문이 될 것이다”라고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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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그는 “우리가 오직 방언을 성령침례의 성경적 증거로 삼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우리 자신의 가르침을 세울 것이다”라고 충고한다.
흥미롭게도, 시무어의 관심사들은 정통 오순절 교단들(classical Pentecostal denominations)이 그들의 입장을 최초 증거에 위에서 입증해 온 주요 이유들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성회는 글로솔라리아가 성령침례의 최초의 육체적 증거(the first initial physical evidence)라는 것을 유지하고 있다. 즉, 글로솔라리아는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첫 번째 증거라는 것이고, 그러나 또한 다른 증거들도 있다는 것이다. 성령은 증거와 봉사를 위한 능력을 주신다. 이 능력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나아가, 글로솔라리아는 육체적 증거다. 그래서 적어도 암묵적으로 비-육체적 증거들(non-physical evidences)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도의적인 정통 오순절주의자들 중 아무도 방언을 말하기 시작한 후 회개 없는 부도덕한 삶을 계속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영에 대한 진정한 경험을 했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성령은 방언 말하기와 같은 외적 나타남들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내적 삶을 통해 그리고 그 사람의 인격을 통해 자신을 알게 하신다.
국제 오순절 성결 교회(the International Pentecostal Holiness Church)의 교리들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아주 유사한 것을 보여준다. 그들의 신앙 진술문의 11항은 “우리는 오순절적 성령과 불 침례는 온전하게 씻음 받은 신자 측의 전유하는 신앙의 확실한 행위로 받을 수 있으며, 그리고 이 경험의 받음에 대한 최초 증거는 성령께서 말하라고 주시는 대로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다(눅 11:13; 행 1:5; 2:14, 8-17; 10:44-46; 19:6)”라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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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 교단은 “우리는 성령침례의 받음에 대한 ‘최초’(또는 첫) 증거는 성령께서 말하라고 주시는 대로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라고 믿는다(요 15:26, 27; 행 2:1-4; 8:17, 18; 10:44-46; 19:6; 고린도전서 12:7). 우리는 방언이 성령침례의 유일한 증거(the only evidence)라고 믿지 않고, 사도행전에 반복하여 기록된 성령의 부어주심에 등장하는 것처럼 최초 증거(the initial evidence)라고 믿는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갈 5:22, 23), 그리스도를 증거할 능력, 그리고 믿음의 시험들과 세상의 적대를 견뎌낼 능력과 같은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는 다른 증거들도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가르친다.
이 교단은 시무어의 하나님과의 대면의 세 단계(구원, 성화, 성령침례) 신학을 아주 근접하게 반영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 이후의 진술에서 분명한 것처럼, 그들에게(시무어에게 그랬던 것처럼) 방언과 그리스도인의 인격, 둘의 증거적 가치 사이에는 그 어떤 필수적인 긴장도 없다. 그 둘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그보다는, 성령침례가 성화된 삶에 주어지는 능력의 은사이기 때문에, 윤리가 방언을 선행한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시무어의 언급은 “성경적 증거” 논의에 균형을 잡아주려는 초기 시도, 보다 온건한 입장의 초기 개진으로 간주 될 수 있을까? 이것은 분명히 그럴 수 있었을 수도 있다. 1915년에는 많은 이단적 집단들이 존재했다. 그 집단들 중 많은 집단은 하나님의 승인의 증거로 그들의 방언 경험들에 호소함으로써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들과 행위들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시무어는 이 위험을 인식했고, 그가 오염된 것의 유입이라고 판단한 것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진정한 몸이라고 믿는 것을 보호하려 했다. “그들은 어떻게 침투하려 하는가? 그들은 방언이라는 표적 은사를 통해 들어올 것이다.” 시무어는 성령의 다른 역사들보다 글로솔라리아를 과장하려는 위험을 이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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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만약 어떤 사람에게 오직 방언에 기초하여 교회적 권위에 대한 자동적인 허가증이 주어진다면, 그러면 이것은 비성경적인 사람들에게 교회의 무결성과 증거를 손상시킬 기회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언급에 비추어 볼 때, 아마도 방언은 성령침례의 증거가 아니라는 『교리와 계율』 안의 시무어의 진술은 재검토를 요할 것이다. 시무어는 방언을 아무런 증거적 가치도 갖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고 주장하기 보다는, 시무어의 마음에서 방언은 유일하고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더 공정한 것일 것이다. “[방언]은 표적들 중의 하나이지, 그 증거는 아니다.” 이것은 방언이 중요한 육체적 표적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고, 단지 어떤 사람이 방언을 말하기 때문에 그가 성령으로 침례를 받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보다는, 신자들이 성령침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방언을 말한다는 것이다. 넬슨도 이와 유사하게 보고 있다. 그는 “시무어는 성령에 대한 완전한 개인적 경험은 글로솔라리아라는 표적에 의해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은 글로솔라리아가 어떤 경험을 입증한다고 말하는 것과는 동일하지 않다”라고 단언한다.
7. 나가는 말
(Conclusion)
결론적으로, 필자의 분석은 로벡의 분석과 세 가지 결정적인 점에서 다르다. 첫째로, 로벡과 다른 사람들은 시무어의 “아프리카성”이 그의 신학적 입장들에 끼친 영향을 충분하게 파악하지 못한다. 반면에 필자는 시무어를 그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유산의 측면에 보다 가깝게 놓으려 했다. 둘째로, 로벡은 『사도신앙』 안에서 시무어의 입장의 변화를 본다. 그렇지만, 그 자료에 대한 필자의 검토는 그런 결론과 다른 곳으로 필자를 이끈다. 왜냐하면 필자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이 시기에 최초 증거에 대한 시무어의 가르침에 그 어떤 식별 가능한 변화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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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로, 로벡은 시무어가 『교리와 계율』에서 방언의 증거적 가치를 부정한다고 믿는다. 반면에, 필자는 부분적으로 개인적 경험 때문에, 그리고 부분적으로 목회적 관심 때문에, 시무어가 방언의 증거적 가치에 대한 과대한 의존에 반응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비록 『사도신앙』에서보다 『교리와 계율』에서 더 급진적으로 진술된 것으로 보이지만, 자료들은 시무어의 방언에 대한 입장이 중대하게 변하지 않았다는 견해를 확증한다. 자신의 성결주의적 배경에 충실하게, 그는 1906년에서 1915년까지 방언과 윤리 사이의 절대 필요한 변증법적 관계성의 필수성을 계속 유지했다. 그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으며, 오순절적 능력 부여 경험에 대한 성경적 표적은 글로솔라리아였다. 그렇지만, 방언의 증거적 가치는 너무 과대평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비록 시무어는 그의 목회 전체를 통해 입증된 목회적 지향성을 드러냈지만, 그의 영향의 절정에서 나온 그의 가르침들과 그 이후의 가르침들은 성령침례와 글로솔라리아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그의 이해에 있어서 그 어떤 급진적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번역자는 두 논문, “파함의 방언론”과 “시무어의 방언론”에서 성령침례의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 문제를 다루었다. 두 논문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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