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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역사

윌리엄 J. 시무어의 성경 해석 (레나 브레스웨이트)

한오신 2025. 3. 23. 16:33

SEYMOUR ON SCRIPTURE

 

 

 

 

레나 브레스웨이트

Renea Brathwaite

 

레나 브레스웨이트는 카리브해 동쪽 끝에 있는 섬나라이며 민주공화국인 바베이도스(Barbados)에서 태어났다. 캐나다의 은사주의적, 갱신주의적 학교인 리젠트 대학교(Regent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현재 방가드 대학교의 교수이다(Vanguard University). (https://www.vanguard.edu/about/vunews/posts/~board/news/post/this-is-renea-brathwaite)

 

Biblical Studies Interest Group

Regent University

Presented at the 38th Annual Meeting of the Society for Pentecostal Studies

(2009)

 

이창승 역

2025.2.1

 

시무어와성경번역(브레이스웨이트).pdf
0.27MB

 

 

 

 

1. 들어가는 말

 

    윌리엄 J. 시무어는 20세기 초엽에 일어난 오순절 운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도자들 중의 하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실, 그는 크리스챤 히스토리20세기의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세 번째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꼽혀왔다. 그리고 최근에, 오순절 신학자 프랑크 마키아는 시무어가 초기 오순절주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신학자였다고 공표했다. 그의 미미한 시작은 그가 오늘날 전 세계를 덮고 있는 한 운동의 발전과 확장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에 대한 그 어떤 단서도 제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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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1906년부터 1908년까지 이끌었던 아주사거리 선교회 부흥은 오순절 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쳐왔다. 하나님의 종말적 행동의 한 상징과 사례였던 아주사 부흥은 그 운동에 영감을 주고 그 운동을 고취시켰다. 초기 오순절주의의 주요 지도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 선교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의 교회를 설립한 메이슨(C. H. Mason), 그의 시카고에서의 가르침들과 부흥 선교회가 하나님의 성회의 형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더함(Willaim H. Durham)이 있었다. 그 두 사람은 아주사 선교회를 방문했었고, 그곳에서 성령침례를 받았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 부흥의 시기에 그 선교회에서 나왔던 신앙과 행위를 밝혀보는 것은 그 이후 오순절주의의 발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된다.

    이 글은 성경 해석이라는 아주사 거리 부흥의 영향력의 한 국면을 탐사한다. 특히, 이 논문은 그 선교회의 지도자, 윌리엄 조셉 시무어(William Joseph Seymour)의 성경해석을 어느정도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며, 세 덩이의 주요 부분으로 구성될 것이다.

1) 그 선교회의 소식지 사도신앙(로스앤젤레스)에 등장하는 기사들에서 발견되는 시무어의 성경 사용의 정량적 분석

2) 로벡(Cecil M. Robeck, Jr.)과 아처(Kenneth J. Archer)의 시무어의 성경해석 묘사들에 대한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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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경의 본성, 권위, 그리고 기능에 대한 그의 접근 고찰 그리고 그의 신학적 틀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에 대한 간략한 설명들을 포함하는 시무어의 성경해석에 대한 한 대안적 해석

이 글에서 사용하는 방법은 비교적(comparative)이 아닌 귀납적(inductive and not comparative)이 될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논문은 일차 자료를 광범위하게 인용할 것이다.

    사용 가능한 자료에 대한 탐사는 시무어가 외면상 단순해 보이지만, 그러나 성경의 권위에 대한 철저한 순종과 사중 복음에 대한 그의 믿음에 의해 특징 지워지는 아주 정교한 해석을 사용했음을 보여줄 것이다. 나아가, 시무어의 해석 방법은 구약성경을 신약성경에 비추어서 읽는 강한 경향과 함께 선택적(eclectic), 실용적(practical), 직접적(immediate)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지배적인 목적은 시무어의 글들에서 드러나는 그의 해석에 대한 보다 상세하고, 포괄적이고, 그리고 나은 실증적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다.

 

 

자료들과 방법(Sources and Methodology )

 

    시무어의 성경 해석에 대한 분석에 돌입하기 전에, 독자에게 자료를 소개하고 이 글에서 채택된 방법론의 한계들을 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사도신앙은 아주사 거리 선교회의 공식 기관지였다. 그 기관지는 19069월에 발간되기 시작하여, 그 절정에 5만 부가 보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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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매월 발간될 예정이었으나, “우리는 비용이 확보될 때 소식지를 발간하지 그 이전에는 하지 않습니다라고 한 서명이 없는 기사가 솔직하게 밝힌 것처럼, 인쇄 스케줄은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그 소식지의 발간 목적은 적어도 삼중 적이었다. 첫째, 아주사 거리에서 발생하고 있는 부흥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 그 목적을 위해, 그 소식지는 오순절을 받은 사람들의 간증들, 방언을 통해 오는 메시지들에 대한 해석들, 방문자들로부터 온 편지들, 그리고 그 집회들에서 불렸던 찬양들의 가사들을 포함시켰다. 둘째, 잠재적 후원자들과 지원자들과의 접촉을 유지하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 셋째, 그리고 아마도 역사적 관점에서 가장 중요할 목적은 그 선교회의 가르침들을 유포하기 위한 광장을 제공하는 것.

    그 기사들은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의 머리와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일종의 창문을 제공했고, 기고자 명단은 그 운동의 인명록과 같았다. 독자들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소식지가 열정적으로 써졌고, 신학적이었고, 발아기의 오순절 운동 안에서 그것의 역할에 대해 자각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편집자들은 정확성을 위해 그 어느 누구도 어디서든 기사를 보내려면 과장하지 말고 오히려 축소해서 보내기를 바랍니다라고 썼다. 그 선교회의 목사였던 시무어는 또한 그 소식지의 편집장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일상적인 관리와 편집 실무는 대부분 그 선교회의 한 젊은 백인 지도자 클라라 럼(Clara Lum)의 책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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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의 자료는 19069월부터 19085월까지 그 선교회의 소식지에 등장한 20개의 글들이다. 그것들 중에 많은 것은 설교들이거나 설교 발췌물들이고 적어도 두 개는 편지들이다. 권위를 위해, 이 글은 시무어의 서명이 있는 글들 또는 시무어의 글이라고 입증될 만한 글들만을 고려한다. 서명이 없는 많은 기사들의 문제는 폭넓은 주제들에 대한 시무어의 관점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문제다. 편집자들은 진정한 오순절적 방식으로 우리는 그 어떤 인간 저자도 영광을 받지 않기를 바라며, 다만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만 할 것이다라고 명확하게 말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특별히 힘든 것은 그 서명이 없는 글들 중 어떤 것들은 시무어의 회화체의 그리고 어느 정도 설교 스타일과 아주 유사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19071월에 한 기사가 등장했는데, 그것은 성령침례를 받았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경고했다. 이 주장은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전형적인 시무어와 닮은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진위성은 확인될 수 없는 것이다. 한 결과로서, 이것은 유혹적이지만, 설득력 있는 시무어의 해석의 재건은 이 글들에 의존할 수 없다. 그래서, 만약 서명이 없는 글들이 포함되는 것을 용인한다면, 객관성을 잃을 것이다. 윌리엄 시무어의 개인적 신학적 견해들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그런 것들 위에 세워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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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무어의 성경 사용에 대한 정량적 분석

(Seymour’s Use of Scripture by the Numbers)

 

    시무어의 성경해석에 대한 논의를 위한 한 가지 유용한 시작점은 그가 인용하는 성경본문들에 대한 정량적 분석을 실시하는 것이다. 시무어는 20개의 글들에서 성경의 명확한 본문들 대략 151개를 인용한다. 그것들 중 130개는 신약성경에서 온 것이고, 21개는 구약성경에서 온 것이다. 시무어는 개신교 구약 정경 39권 중에서 단 7개만을 인용하며, 신약 책 27권 중에서 17개를 인용한다. 그는 다 합하여 66권 중에서 단지 24권만을 인용한다. 시무어는 복음서들에 대한 강한 선호를 보이면서 그것들에서 51회 인용한다. 놀랍게도, 오순절주의자들은 누가복음을 편애한다는 넓게 수용된 견해와는 다르게, 그가 가장 자주 언급하는 책은 마태복음서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마가복음은 단 두 번 그리고 종종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을 위한 증빙전(a proof-text)으로 인식되는 본문인 마가복음 169절 이하를 단 한 번만 사용한다. 아마도 또 다른 기대하지 않은 발견은 시무어가 요한복음, 히브리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고린도전서보다 더 자주 인용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요엘서가 아니라 이사야서가 가장 자주 사용되는 구약 책이다.

    이러한 패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나중에 다룰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는 더 우회할 필요가 있다. 시무어의 해석에 대한 두 가지 현존하는 두 가지 묘사들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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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무어의 해석에 대한 연구들

(Portrayals of Seymour’s Hermeneutic)

 

    시무어의 성경 해석에 대한 연구는 납득할 수 없게 드물었다. 그의 영향력과 그의 삶과 사상에 대한 관심의 재기를 고려할 때, 그런 연구들이 몇 가지 있었을 것이라고 기대할 것이다. 필자가 최선을 다해 찾아보았지만, 세 개에 불과했다. 두 개는 세실 로벡 주니어(Cecil Robeck Jr.)가 쓴 것이고, 나머지 한 개는 케네스 아처(Kenneth J. Archer)가 쓴 것이었다. 그런데, 그 세 개 모두는 포괄적이지 못하고 그래서 불충분한 것이다.

 

3.1 세실 로벡의 연구

 

    시무어의 해석에 대한 로벡의 아주 짧은 연구는 너무 일반화하고 부정확한 경향이 있다. 그는 그의 2001년 논문에서 시무어의 해석 방법은 그의 이사야서 강조와 누가복음 4:18-19 사용에 있어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적 접근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시무어는 설교할 때마다 마가복음 16장과 사도행전 24절을 인용했다고 주장했다. 가장 최근에 쓴 책에서, 그리고 그 문제에 관한 그의 이전 진술들을 철회하지도 않은 채 시무어가 사복음서들 전체,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전서, 에베소서, 히브리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반복적으로 끌어왔다고 보고했다. 그에 따르면, 시무어는 또한 창세기, 출애굽기, 열왕기상 하, 사무엘상, 시편, 이사야서, 요엘서, 그리고 스가랴서에서 많이 끌어왔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그의 그런 분석에는 몇 가지 문제들이 있다.

 

 

 

    먼저, 아프리카계 미국인적 해석 전통과 시무어의 방법 사이의 연결은 실제와는 거리가 멀다. 물론, 시무어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적 종교성이 그의 성경 본문들의 다룸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는 있을 것이지만, 그런 주장은 유효한 자료들에 기초하여 쉽게 입증될 수 없으며 측량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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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아프리카계 미국인 성경 학자들 가운데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해석의 자료들과 그 자료들에 대한 비평적 분석의 결여에 대한 인식이 존재해 왔다. 윌리엄 마이어스(William H. Myers)비록 아프리카계 미국인 신앙 공동체들이 수 세기 동안 성경을 해석해 왔지만, 그 방법은 유럽중심적 방법처럼 문헌에서 조직적으로 표현되거나 기술되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한다. 현대 성경 해석을 기술하는 것이 여전히 힘든 직무라면, 고정관념에 얽매일 수 있는 총체적인 일반화 수준을 제외하고 어떻게 시무어와 아프리카계 미국인 전통 사이의 견고한 연결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기껏해야 그 자료들은 선동적이고, 직설적이지만, 근본적으로 결정적이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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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로벡은 시무어가 성경의 다른 어떤 책보다 더 자주 이사야서를 인용했다고 합당하지 않게 진술했다. 서명된 글들에서는 분명히 그렇지 않았다.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마태복음이 그 특권을 누렸다. 사실, 이사야서는 단지 아홉 번째로 선호되는 책이었다.

    더하여, 로벡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시무어는 서명된 글들 안에서 누가복음 4:18-19을 단지 한 번 인용했다. 이것은 그 어떤 패턴의 종류를 제안하기에는 분명 충분하지 않다. 가장 자주 인용되는 누가복음 본문은 2449절이다. 그 구절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머물라는 명령을 담고 있다. 시무어는 설교할 때마다 마가복음 16장과 사도행전 24절을 인용했다는 주장은 합당하지 않은 것 같다. “보배로운 속죄라는 사도신앙에 첫 번째로 기록된 설교에서는 그 두 본문 모두 언급되지 않으며, “성결에 이르는 길,” “돈 문제에 관해등등에서도 언급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로벡의 가장 최근의 책에서 받은 인상에 대응하기 위해 실제적인 문제 두 가지가 주의를 요구한다. 첫째, 시무어가 서명한 설교들에 대한 분석은 시무어가 네 개의 복음서들 모두에서 반복적으로 끌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계속 마가복음서를 제외시켰다. 둘째, 39권 중에서 10권에서 끌어내진 21개의 인용들은 구약성경에서 많이 끌어낸”(drawing heavily) 것을 나타내지는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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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오류들은 로벡의 연구를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기껏해야 시무어의 해석 이해를 위해서는 불충분한 자료로 만든다.

 

3.2 케네스 아처의 연구

 

    시무어의 해석을 기술하려는 보다 신중하고 가치있는 시도는 케네스 아처(Kenneth j. Archer)21세기를 위한 한 오순절적 해석: 성서, 성령, 그리고 공동체에서 나타난다. 아처는 시무어를 소위 성경 읽기 방법”(Bible Reading Method)의 세 가지 실례들 중의 하나로서 오순절적/성결적 해석 스펙트럼 안에 놓았다. 그는 이 방법을 증빙전 체계(a modified form of proof-text system)의 한 수정 형태로 묘사했다. 그 증빙전 체계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단계로 구성된다. 1) 성구사전을 사용하여 성경 안에서 한 특별한 단어를 찾기; 2) 그 특별한 단어에 대한 모든 언급들의 모아 한 목록을 만들기; 그리고 3) 그 읽기에 기초하여 교리를 구성하기. 이 방법은 그 접근에 있어서 공시적(synchronic)이고, 귀납적 추론과 연역적 추론 둘 다를 사용한다. 아처의 관찰들은 중요하다. 그는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이 성경을 사용한 방법에 대해 (적어도 문자상으로) 스스로 말하게 하려고 노력해왔던 소수의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그는 오순절 첫 세대를 이끌었던 중심적 서사에 대한 관심”(Central Narrative Concerns)[중생 온전한 성화 성령침례 신유 그리스도의 재림-역자 주]을 그리고 그 관심이 그들을 근본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로부터 구별시켰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총괄적인 틀을 제공해 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 논의를 상당히 진전시켜왔고, 그래서 그의 연구는 추천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렇지만 시무어와 관련해서는 그의 분석에 몇 가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아처의 분석에서 드러나는 첫 번째 문제는 그가 성경 읽기 법”(Bible Reading Method)이라는 부르는 범주는 설명할 능력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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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보수 복음주의적 해석 방법들은 성경을 읽는 것(to read the Bible)이라고 표방하고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주어진 주제에 대해 하나님의 의도 전체를 선포하는 것”(to “declare the whole counsel of God”)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데이터를 모으는 과정이 중요하다 해도, 그것은 그 방법 전체는 아니다. 무엇이 출발점일까? 무엇이 지배적인 전제들일까? 무엇이 중심적 해석 주제들일까? 이 모든 것은 이 방법의 세 번째 단계로 통합되며, 그래서 그 패러다임의 설명적 능력을 저해한다.

    아처의 견해가 가지고 있는 두 번째 문제는 지지하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는 시무어를 이 범주 안에 넣는 것을 위한 그 어떤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시무어의 해석법에 대한 그 어떤 설명도 찾지 않았다는 것을, 그저 독자들이, 자기처럼, 시무어의 글이라고 가정한, 19069월에 올려진 표적으로서 방언”(Tongues as a Sign)이라는 글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 같은 성경 읽기법을 볼 것이라고 추정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글에 대한 보다 신중한 읽기는 다른 결과에 이른다. 먼저, 그 글은 시무어의 저작이라는 특징들을 갖고 있지 않는 것 같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써졌거나 그의 글에 대한 심한 편집 본인 것 같다. 그 글에는 저자를 명시하는 서명이 없다는 사실은 그 사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하여, 어휘, 구문, 그리고 문제는 시무어 자신의 것이라고 판명된 글들과 아주 다르다. 로벡은 시무어의 글에 스며있는 어떤 어조, 독자가 특수한 글이 시무어에게서 왔을 뚜렷한 가능성을 제공하는 어조에 대해 옳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처는 시무어가 그 선교회의 지도자로서 그 글의 내용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을 갖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당시의 기준에서 볼지라도 어떤 편집자가, 심지어 종교적 편집자라도, 논거가 전개되는 과정을 세세하게 관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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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으로서 방언이 시무어에 의해 써진 것이라는 것을 용인할지라도, 여전히 다른 문제들이 남아있다. 아처는 그저 이 단 하나의 글을 취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주장했고, 시무어가 썼던 다른 글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더 심각한 것은 아처가 선택한 글은 그가 묘사하는 것처럼 성경 읽기법을 반영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방법에 잠재되어있는 특징들 중 하나는 그것의 본문에 대한 공시적 읽기(synchronic reading of the text)[본문의 배후를 보기보다는 본문 자체를 집중하여 보는 독법-역자 주]이다. 다른 특징은 데이터를 모으기 위해 성구사전을 사용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어떤 교리를 세우는 것이다. 얼핏 보면, 이 글은 공시적, 성구사전 접근을 사용한 것으로 보여질 수 있지만, 그러나 다른 설명이 보다 더 설득력을 가질 것이다. 그 설교의 정황에서 볼 때 그리고 그 설교자가 성경 본문들을 인용하는 체계를 고려할 때, /그녀는 제자들에게 그 약속을 위해 머물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시작하여 누가 문서 안에 있는 성령침례에 대한 언급들을 통시적(diachronic)으로 다루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누가복음서와 사도행전 사이의 정경적 연결성을 인식한 상태에서 증거 방언 교리(the doctrine of evidential glossolalia)를 강조할 목적으로 최초의 오순절 사례를 재언급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 글은 시무어의 해석에 대한 결정적인 표본이 될 수 없고, 특히 스무 개의 다른 글들이 주목을 요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진짜 시무어는 성경해석 방법에 대해 그 어떤 설명도 제공하지 않지만, 이 권위 있는 글들은 그의 해석의 거칠고 시험적인 재건을 위해 충분한 자료를 제공한다. 다음 장은 이 직무를 수행할 것이다.

 

 

4. 시무어의 해석 재건

(Reconstructing Seymour’s Biblical Hermeneutic)

 

    본 장은 가용한 출처들을 사용하면서 시무어의 해석의 한 온당한 재건을 시도한다. 분명히, 어떤 내재적인 한계들이 그런 시도를 어렵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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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요약한 이유들 때문에, 그 재건은 시무어의 글이라고 확실하게 인정받는 글들에 근거해야 한다. 더하여, 그 재건은 시무어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던 1906년에서 1908년까지 출판된 사도신앙에 등장하는 글들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다른 하나의 심각한 한계는 그 글들이 이제는 접근할 수 없는 진본들의 잘려진 편집본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를 제기하자면, 그 글들은 시무어의 설교들, 강연들, 편지들 등등의 대다수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이런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그 소식지의 편집장으로서 그의 역할로 인해 시무어에 의해 유포를 위해 택해진 원자료들의 한 표본이,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그의 글들을 대표하는 한 표본이 존재하게 되었다. 여기서 제시되는 기술은 그의 지배적인 신학적 틀의 윤곽을 잡고, 그의 해석 방법의 현저한 특징들을 제시하며 요약함으로써 성경의 본성, 권위, 그리고 기능에 대한 시무어의 견해를 밝히기를 시도한다.

 

 

4.1 성경의 본성

(Nature of Scripture)

 

    시무어의 글들을 표면적으로 읽는 사람들 대부분조차도 성경에 대한 그의 강한 애착을 발견할 것이다. 그가 성경을 일컬을 때 자주 사용하는 용어들 가운데 하나는 보배로운 말씀”(precious Word)이다. 성경은 시무어에게 보배로운데, 그 이유는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나오기 때문이다. 그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찾아보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에 부응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해 봅시다라고 권고한다. 그 소식지의 다른 곳에서 그런 진술이 보다 더 선명해진다. “이 성경은 성령침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책이 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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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하나님의 입에서 직접 나오는 성경을 고르거나 자름 없이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의미는 분명하다.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말씀들이며, 그래서 그 기원이 하나님께 있다.

    삼위일체론적으로 말하자면, 시무어에게 성경은 동시에 하나님(성부)의 말씀이며, 예수의 말씀이며, 그리고 성령의 수단이다. 그가 가르치고 있는 것을 주목해 보라. “[온전한] 성화는 우리의 영혼에 쉼과 달콤함과 고요함을 가져다 준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 예수님과 연합되었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라는 그분의 보배로운 말씀을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 학도들은 이 구절은 예수께서 신명기 8:3절을 인용한 것으로 알고 있다. 시무어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단순히 성경의 본성에 대한 그의 이해에 대해 무언가를 드러내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더 외친다.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 예수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하고 있다면,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는 데, 우리는 그 땅의 좋은 것으로 먹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합니다.” 시무어는 여기에서 그가 성경이 성부 하나님께 속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아마도 이 용어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겠지만, 이것은 삼위 상호내재성(circumincession)과 삼위 간 속성 교류(communicatio idomatum)라는 오래된 삼위일체 개념들을 반영하는 것 같다.

    성경은 성부와 성자에게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성령과의 조화 속에서 역사한다. 먼저 성령은 말씀을 조명하기 위해 온전한 성화를 얻은 신자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신다. 시무어는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화를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우리의 성화를 위해 성령의 증거를 받을 때, 성경은 우리에게 열리며, 우리는 성경을 이해하고, 우리의 눈은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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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적으로 그리고 어느 정도 신비하게, 성경은 신자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와 은사들을 활성화시킨다. 시무어는 그리고 그분의 능력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영원히 거해야만 하며, 그러면 우리는 성령의 보배로운 열매들을 가질 수 있고, 열매들뿐만 아니라 성부께서 그분의 작은 자들을 위해 가지고 계시는 보배로운 은사들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나아가, 성령과 성경은 영혼의 중생에 있어서 협력한다. 마치 인간의 탄생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영적 아이들의 탄생을 위해서는 말씀과 성령이 필요합니다. . . .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그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인간 대행자들을 택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탄생, 즉 신생을 주십니다.”

성경은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이런 삼위 간의 친밀한 연결은 필연적으로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이해에 이른다.

 

 

4.2 성경의 권위

(Authority of Scripture)

 

    시무어는 이 권위를 몇 가지로 묘사한다. 첫째, 그는 디모데후서 3:14-17이라는 표준적 성경 본문을 사용한다. 둘째, 그는 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덮개들 안에 거하라고 권고하며 양동이 은유를 사용한다. 그와 같이, 시무어는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기술하면서 바울은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 안착시켜야 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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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양동이 은유의 한 결과로서, 성립될 수 없는 믿음이나 행위는 그 선교회에서 체계적으로 배척되어야 했다. 그는 교회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메시지에서 우리가 성경에 반하는 잘못된 것들을 발견할 때, 그것이 아무리 소중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제거되어야만 한다라고 명확하게 말한다. 이 원리는 방언을 쓰는 행위에 대한 그 선교회의 처리에 나타난다. 그 행위는 처음에는 어느 정도 관심을 끌었고 명백하게 승인을 받았지만, 그러나 19079월 이후에 그 선교회의 지도력은 그 정책을 갑자기 바꾸었다. 그 이유는 그 말씀은 우리에게 배우지 않은 언어들을 쓰는 것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방언을 쓰는 것을 우리의 집회들에서 권하지 않는다.” 시무어가 성경의 권위에 접근하는 네 번째 방법은 성경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겪을 결과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성령께서 남자와 여자들에게 죄, , 그리고 심판을 깨닫게 하는 일을 하고 계시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려 자기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드는 모든 남자들과 여자들은 멸망할 것입니다.” 다섯째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무어는 성경을 일종의 평행장치(equalizer)로 제시한다. 그는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들 중에서 가장 은사를 많이 받은 교회였고, 오늘날에도 그런 것처럼, 은사가 넘치는 어떤 교회에서 미혹의 영들로부터 광신주의(fanaticism)를 제거하기 위한 유일한 안전장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올바르게 분별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것들은 깍아 내리고, 다른 것들은 추켜 세우고 싶어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균형 잡히기를 바라십니다라고 썼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시무어의 이해에 관한 한 명확한 모습은 앞에서 말한 것에서 드러난다. 그에게 있어서, 성경은 인간의 신앙과 행위를 위한 유일하고 진정한 경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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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순종하는 것은 복을 가져오지만, 성경에서 벗어나는 것은 이생에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심판 날에 화를 초래할 것이다. 시무어는 아주사 선교회가 그것 때문에 유명해졌던 그 행위에 관해서 조차도 그의 회중에게 다음과 같이 상기시켰다. “종종 하나님께서 복된 파도를 우리에게 보내실 때, 우리는 모두 잠시 방언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가 진행되고 있을 때에는 계속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 순종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는 후에 다음과 같이 권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오른 눈이나 오른 손을 붙드실 때, 우리 모두 순종합시다.”

 

 

4.3 성경의 기능

(Function of Scripture)

 

    시무어게 있어서, 성경은 권위 있는 것에 더하여 어떤 규정되지만 상호연결된 방법들로 기능한다. 이 항은 이 기능들 중에서 네 가지를 논한다. 성경의 일차적 기능은 광신주의를 일소하고 영적 성장을 증진시킬 건전한 가르침의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쪼개고, 성경을 성경과 비교하여 그 어떤 혼돈과 그 어떤 미혹의 영 또는 잘못된 가르침이 안으로 기어들어 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한 초기 출처 불명의 기사는 모든 것을 말씀으로 평가해보자. 그래서 모든 광신주의(fanaticism)가 사역에서 제거되게 하자라고 썼다. 그는 목회자의 직무를 기술하면서 우리는 그들[새신자들]을 하나님의 보배로운 말씀으로 먹여야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그리고 죄의 뿌리를 제거하시는 그들의 성화자로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령님을 영접하라고 가르쳐야 한다라고 권했다.

    또 다른 일차적 기능은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위한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다. 시무어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지만, 그러나 교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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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를 반대하는 자들의 말을 인용하며 그들은 우리 모두 하나가 됩시다. 교리에 있어서는 하나가 아니더라도, 영적으로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라고 강력하게 응수했다.

    시무어에게 있어서 성경의 또 다른 기능은 신자들을 위한 확고한 기준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그는 결혼을 위한 교훈을 제공하면서 성경이 결혼에 대한 에덴적 표준”(Edenic standard of martimony)을 제시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성령침례에 대한 아주사의 표준은 사도행전 1:5, 8; 2:4; 그리고 눅 24:49에 따른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는 모든 신자에게 자신의 진정한 개인적 오순절을 구하기를, 구차한 변명을 멈추기를 그리고 예수께서 사도행전 2장을 통해 우리에게 정해주신 표준을 따르기를촉구했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의 이야기들, 가르침들, 그리고 권고들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불가능한가는 관계없이 신자들이 지키고 추구해야 할 규정과 목적이 된다. 아마도 아주 적절하게, 사도신앙에서 시무어의 것이라고 인정되는 마지막 글은 하나님에게는 이 위대한 구원에 있어서 성경적 표준에 부합한 사람들이 있습니다라고 대담하게 썼다.

여기서 논의되어야 할 마지막 기능은 신자의 [온전한] 성화에 있어서 성경의 역할이다. “우리가 진리를 통해 성화되면, 그리고 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고, 그리고 성령의 은사나 능력을 구하기 위해 하나가 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강하고 급한 바람처럼 오셔서 모든 각 사람의 마음을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케 채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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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가르침은 그 소식지의 여러 호들에 등장하는 교리적 진술에서도 나타났다. 그 교리적 진술은 성화와 관련하여 성화는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씻어내는 것이다. 그 제자들은 오순절 날 이전에 성화되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연구해 보면,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다’(15:3; 13:10).”진리로 저들을 거룩하게 하옵소서, 당신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라는 요한복음 17:17은 이런 신학적 주장의 기초가 된다. 시무어는 서명이 된 글들 그 어디에서도 성경이 신자를 성화시키는 방법을 정확하게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사실은 시무어의 해석을 지배하는 신학적 틀(the theological framework)의 한 중요한 국면이다. 이 틀은 아래에 간략하게 제시될 것이다.

 

4.4 신학적 틀

(Theological Framework)

 

    시무어의 신학적 틀은 대단히 복잡하지는 않다. 시무어와 많은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은 칭의와 그에 후속하는 성화[보다 온전하게 말하자면, “온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역자 주]에 대한 표준적인 성결 교리들에 신유와 제자들이 오순절 날 경험했었던 것처럼 배우지 않은 언어들을 말하는 것으로써 증거되는, “성화된 삶에 주어지는 능력의 은사로서성령침례를 더했다. 이 모든 것은 종말론적 급박성과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믿음의 맥락 안에서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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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전한 성화는 전체 구원 과정, 또는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에서 한 중요한 단계이다. 그것이 없이는 신자는 구원을 온전하게 확신할 수 없고, 성령에 의해 권능을 받을 수도 없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의 복을 받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경은 성화를 초래하기 때문에, 성경의 적합한 사용은 구원론적, 성령론적, 그리고 종말론적 함의들을 가질 것이다. 어떻게 그 주제들이 이 한 예에 엮여 있는지 주목하라. “사람들은 구원받고, 성화되고, 고침받고, 성령과 불로 침례를 받을 것입니다. 성령침례는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의 말씀을 믿음으로 옵니다. 우리는 성령침례를 받기 위해 먼저 성화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땅끝까지 이르러 그분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개인적인 오순절 또는 성령과 불 침례를 받기 전에는 사도행전 2416, 17절에 부합하는 경험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틀은 시무어가 성경에 헌신적이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비록 아주사 거리 부흥이 많은 점에서 성령의 운동으로 특징지워져 왔지만, 또한 성경 운동(Bible movement)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In many ways, though the Azusa Street revival has been characterized as a movement of the Spirit, it probably might just as well be considered a Bible movement).

    어떻게 그 선교회의 교리들이 시무어의 성경 사용에 반영되어 있는지는 이 연구에 중요하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된 예기치 않은 성경 사용들의 어떤 것들을 설명해줄 것이다. 시무어는 대부분 이사야 본문을 칭의와 속죄(치유는 속죄의 한 중요한 부분이다)에 대한 그의 견해를 위한 기초로 사용한다. 복음서들은 예수와 초대교회를 현대의 성화되고 성령침례를 받은 공동체의 원형들로 그려낸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께서 일으키시는 성화를 기술하는데 거의 전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와 계시록은 시무어의 종말론을 뒷받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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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방법론적 특징

(Methodological Features)

 

    사용 가능한 자료들에서 시무어의 해석의 몇 가지 방법론적 특징들을 끌어낼 수 있겠지만, 가장 지배적인 것 네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 가운데 첫 번째 것은 시무어의 선택주의(eclecticism)이다. 그는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자주 문자적 해석을 택했다는 것은 진실이다. 그렇지만, 그는 풍유(allegory)나 예표(typology)를 자주 사용했다. 가장 분명한 예는 그의 리브가: 그리스도의 신부의 예표라는 제목의 설교이다. 그 제목 자체가 결정적 증거이지만 그의 엘리에셀 묘사는 매혹적이다. 엘리에셀이라는 이름의 의미(그가 하나님의 돕는 자”)를 설명해주면서 그는 엘리에셀은 성령의 예표라고 제안했다. 마치 엘리에셀이 아들 이삭을 위한 신부를 찾았었던 것처럼, 그렇게 또한 성령도 그리스도를 위한 신부를 찾고 있다. 더욱이, 엘리에셀이 아브라함과 이삭이 주는 보석 장신구를 줌으로써 리브가의 친절에 보상한 것처럼, 성령도 교회에 성부와 성자가 주는 보물을 드러내신다. 시무어는 다른 곳에서도 예표론적 접근을 사용했다. 그는 사도행전 2장에 대한 한 다른 문자적 해석 가운데서 바람은 언제나 성령 또는 생명의 예표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마태복음 25장에 등장하는 처녀들의 등불 안의 기름을 성령으로 이해했다. 풍유 경향성에 더하여, 시무어의 해석은 귀납적 또는 연역적(inductive or deductive), 주제적 또는 강해적(topical or expositional)일 것이다. 이 모든 범주들을 가로지르고 있는 한 가지는 그의 증가하고 있던 회중의 필요들을 위해 성경을 최대한 바르게 해석하려는 그의 바람이었다.

    이것은 시무어의 해석의 두 번째 지배적인 특징, 문제해결에 초점이 맞추어진 실용성(a problem-focused practicality)을 드러낸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시무어가 분출하고 있던 새로운 철학들[고등비평과 그 전제가 되는 칸트의 이성관 등, 역자 주]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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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성경적 숙고는 그의 회중의 일상생활 속에서 영적 열매를 맺는 것 주위를 맴돌고 있다. 이것의 한 예는 주님을 섬기기 위해그들의 재산을 팔고는 그들의 가족을 버리는 아주사 거리 공동체 안의 어떤 신자들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시무어는 그들의 열정을 칭찬했지만, 실용적인 균형을 잡아주기 위해 고린도전서 161절을 사용했다. 그는 그 어구의 마지막 부분(“하나님께서 번영시키신 대로,”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개역개정])에 따라 드리도록, 드리되 자유롭게 드리게 신자들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분은 성령이심을 강조했다. 나아가 그 어떤 다른 지도자의 입장에서의 그 어떤 강요도 부적절할 것이다.

    시무어의 실용성 고수는 또한 그 선교회의 교리적 그리고 선교적 진술에서도 빛난다. “ 우리는 사람들이나 교회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죽은 형식과 신조들, 그리고 거친 광신주의를 생생한 실용적 기독교로 대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시무어의 해석의 또 다른 특징은 신약을 통해 구약을 읽는 것이다. 이 특징은 그의 신약성경의 많은 어울리지 않는 사용에서 드러난다. 심지어, 시무어는 아마도 무심코 요엘서 문구 자체보다는 베드로의 요엘서 2:28-29 인용의 지속적인 선택에 의해 이 경향을 드러낸다.

    시무어의 해석의 마지막 지배적인 특징은 그리고 비평적 관점에서 가장 꺼내기 어려운 것은 그것의 직접성(immediacy)이다. “오순절이 도래했다”(Pentecost Has Come)는 그저 구호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시무어와 초기 오순절 공동체들이 갖고 있던 깊은 확신이었다. 그들은 교회의 그것의 성경적 뿌리에로 회복이 마침내 이루어졌었다는 것을 믿었다. 결과적으로, 성경 본문들은 그들에게 직접적으로(directly) 말했고, 그들이 역사를 도외시하거나 무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성경 역사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성경 본문들의 진리는 초-문화적, -공간적, 그리고 초-시간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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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욱이, 그들은 초대 기독교 공동체들이 경험한 것과 동일한 초자연적 현상을 경험하고 있었고, 그런 경험들은 그들의 성경 본문의 사람들 그리고 사건들과의 연대감을 증대시켜다. 진실을 말하자면,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 12장에서 14장은 그들의 이야기가 되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들은 수 천 년이 지났어도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생활을 위한 개인과 공동체에 명령들이 되었다. 성경이 말했던 것은 참으로 진정한 것이며, 거의 1900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 메시지를 믿음으로 받는 현대의 신자들을 위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과거에 본문이 의미했던 것오늘날 의미하는 것이다.” 비평적 학자(critical scholar)가 적어도 두 개의 해석적 지평들을 보는 곳에서, 시무어와 그의 그의 대응자들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성령의 인증적 현존에 의해 다리가 놓여 연결된 단 하나의 지평을 보았다. 아처는 비평적 관점에서(from a critical perspective) 이것을 융합된 지평”(confused horizon)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학문적 관점에서는 그가 옳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은 성경 본문의 역사나 본질에 대한 비평적 학자의 관점을 공유하지 않았다. [, 고등비평을 사용하지 않았다. 역자 주]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에게, 이 본문들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였다.(From an academic perspective, he is probably correct, but early Pentecostals did not share the critical scholar’s view concerning history or the nature of the text. For them, these texts were the very words of God). 앞에서 인용했던 것처럼, 아주사 거리의 신자는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당신 자신의 판단을 접어야 한다. 말씀을 재단하거나 잘라내지 말고 통째로 먹으라로 말했다.

    물론 그런 천진난만한 성경주의(a naïve biblicism)는 장기적으로 보면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몇 가지 점에서, 다양하게 다른 문화적, 상황적, 그리고 다른 문맥적으로 본문적 문제들의 실체가 드러난다. , 독자의 지평은 본문의 지평과 상충하고 해석적 위기를 초래한다. 그래서, 해석자는 어떤 본문(text)이 적용 가능한지, 어떤 본문이 우선하는지, 각 본문의 범위와 한계는 무엇인지에 대해 엄격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 격심한 각성은 오래지 않아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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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더함(William Durham)의 완성된 사역에 의해 촉발된 신학적 위기는 1911년에 그 운동을 분열시켰고, 결국 아주사 거리 선교회와 윌리엄 조셉 시무어를 잊혀지게 했다.

 

 

5. 요약과 평가

(Summary and Observations)

 

    본 연구는 윌리엄 조셉 시무어의 성경 해석에 대해 기존의 연구들보다 더 상세하고 체계적인 분석 제공을 시도했다. 시무어는 오순절운동의 처음 몇 년 동안 그의 선교회 안에서 일어난 부흥집회들을 통해 또한 그의 소식지, 사도신앙의 폭넓은 유포를 통해 오순절 운동의 전파와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 간행물에 실린 그의 것이라고 증명된 글들에 대한 한 조사는 일반적으로 신약성경에 초점을 맞추고, 보다 특수하게는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 초점을 맞추면서 성경 구절들의 어느 정도 제한된 다양성과 보다 선택적으로 상호작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무어는 또한 하나님-융합된 본문의 권위(the authority of a God-infused text)에 확고한 헌신을 보여주었다. 그의 방법은 대부분 문자적(literalistic)이었지만, 선택적(eclectic)이고, 실용적(practical)이고, 직접적(immediate)이었고, 신약을 통해 구약을 해석했다. 그의 기획의 중심에는 칭의/속죄, [온전한] 성화, 그리고 글로솔라리아(방언)으로 증거되는 성령침례라는 세 가지 국면의 구원의 서정의 보존이 놓여있다.

    시무어의 해석에 대한 이 탐사는 한 현대적 해석의 창출에 적용될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평가들을 산출한다. 첫째,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의 해석을 재건하는 데 있어서 보다 주의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학문적 경로에 대한 그들의 공헌은 빈정거리고 피상적인 연구에 방치되게 하는 것에 너무도 중요하다. 대체적인 연구들(general surveys)도 분명히 도움이 되지만, 그러나 매우 자주 공간의 제한은 유감스런 고정관념들로 이끌어갈 수 있는 축소적 접근에 빠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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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현재의 학자가 오순절 공동체를 위한 유기적인 해석 방법(organic hermenutical strategies)을 발전시키기를 바란다면, 그 운동의 위대한 개척자들 스스로 말하게 허용하면서, 그 현존하는 자료들을 연구하기 위한 시간과 노력을 기꺼이 투입해야만 한다. 이전에 노예였던 사람의 아들이며 공식적인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던 윌리엄 시무어와 같은 사람이 인상적인 유산을 남겼지만, 그는 단지 그들의 오순절주의에 대한 해석적이고 신학적 공헌들이 아직도 연구되지 않은 많은 다른 사람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둘째, 첫 관찰의 결과에서 보건대, 이 기획은 일반적으로, 오순절 신학은 역사학적 또는 사회학적 분석의 대상들로서를 제외하고 흑인 오순절주의자들에게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은 채 진행되어 왔다는 아모스 영(Amos Yong)의 관심과 공명한다. 그가 질문하는 것은 전지구적 신학을 위한 아프리카계-오순절주의의 공헌은 무엇인가?이다. 초기 아프리카계 미국인 오순절주의자들은 신학을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들은 비평적 연구를 할 만한 가치가 없는가? 흑인 신학은 무시되어 오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시무어의 성경해석과 신학 방법은 한 중요한 기준점(reference point)으로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며, 그리고 그 소외된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이 연구의 세 번째 평가는 성경의 두 책, 신약과 구약 모두를 적절하게 파악하기 위한 갱신적 성경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본 기획의 아이러니들 중의 하나는 한 편으로 시무어의 성경에 대한 높은 견해(high view of Scripture)이며,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그가 얼마나 구약 본문들을 드물게 사용했는지를 양적으로 계산한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그가 두 가지의 해석적 지평들의 존재를 거의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연구에 내포된 복잡성을 다룰 준비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친숙한 것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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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위한 갱신적 해석은 이 감시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융합된 또는 붕괴된지평의 위험과 약속(the danger and promise of the fused or “collapsed” horizon)이라는 한 가지 마지막 평가에 대한 논의를 일으킨다. 확실히, 직접성(immediacy)은 해석학에 어떤 효력 있는 긴박성(urgency)을 부여한다. 그렇지만, 필수적인 노력 없는 빠른 보상의 유혹이 존재하며, 너무도 자주 이것은 저것”(this is that)그것은 이것”(that is this)이 되며, 궁극적으로 스티브(Stibbe)은사주의적 해석학”(Charismatic hermeneutics)에 대한 리용스(Lyons)의 비판이 사려 깊은 경고로 판명된다. 시무어의 지평들의 융합을 끌어낸 직접성은 현대 해석에, 오순절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본문은 살균된 학문적 환경 안에서 해부된 사체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보다는, 성경은 살아있고그리고 교회, 학계, 그리고 세계의 갱신을 위해 성령에 의해 사용된다(4:12).

    시무어의 글들은 초기 오순절 개척자들의 신앙과 행위에 대한 탐구에 있어서 비옥한 자료라고 판명되었다. 오순절적 전통 안에 있는 성경 해석자들은 성경 본문들에 대한 그의 접근에 의해 속박을 받는다고 느끼지 말아야 한다. 그보다는 그들은 시무어의 글들로부터 정보를 받아야만 하며, 그들은 아마도 이 거인의 어깨 위에 섬으로써 21세기를 위한 오순절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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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의 평가와 견해]

 

    브레이스웨이트의 시무어의 성경해석 연구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시무어는 성경에 대해 소위 고등비평(Higher Criticism)을 가하지 않았다는 것일 것이다. 이점은 찰스 파함과 윌리엄 더함에게도 동일한 것이었다. “초기 오순절 지도자 파함과 더함의 두 가지 신학적 전선들이라는 번역자의 논문을 참고하라. 브레이스웨이트가 아주사 거리 부흥을 성령운동 보다는 성경운동”(Bible movement)으로 평가한 것은 아주 훌륭한 것이다(20). 또한 그는 시무어가 성경을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긴 것을 성경주의”(biblicism)라고 평가했다(23). 이 점은 그가 잘 본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 성경주의를 천진난만한(naïve)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한 것은 비판받아야 한다.

    브레이스웨이트는 비평적 관점을 가진 아처를 따라 시무어의 성경해석이 두 지평의 융합적이라고 평가하는데,(23) 이는 브레이스웨이트가 저자의 지평과 현대 독자의 지평을 전혀 다른 것으로 보는 고등비평의 전제인 칸트의 비평적 이성관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다. 시무어의 소위 두 지평의 융합(confused horizon)을 부정적인 것, 부끄러운 것, 천진난만한 것, 무식한 것, 있어서는 안 될 것으로 보는 것, 이것이 브레이스웨이트의 한계다. 브레이스웨이트는 시무어가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 두 세계 간의 연결성이라는 아프라카적 전통 안에서 성경을 해석했다고 보았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 아프리카적 전통 안에서 신학적 작업을 하지 않고 있다. 그가 받은 계몽주의적 교육이 그를 그런 이원론적 모순과 혼란에 빠트렸을 것이다. 현대의 독자의 눈에서 고등비평이란 안경을 제거하면, 두 지평 간 차이가 사라진다. , 두 지평 간의 상이는 실제하는 것이 아니라, 칸트의 이성관과 그것을 바탕으로 삼는 고등비평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리고 파함의 벧엘성경학교에서의 성경해석은 성경에서 원리를 찾아내기 위한 것이었고, 그 이후의 오순절 성경해석은 그 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