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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역사

누가 오순절적 아주사 부흥을 위한 불을 최초로 붙였는가?

한오신 2024. 11. 30. 17:11

흑인 오순절의 어머니, 루시 패로우:

오순절적 아주사 부흥 불길을 최초로 붙인 기폭제

 

Mother of Black Pentecost, Lucy Farrow:

Catalyst for the first Fire of Pentecostal Azusa Revival

 

 

 

 

이창승

2024121/202412월10

 

 

루시패로우(이창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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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는 말

 

    1901년 토페카에서 찰스 F. 파함(Charles F. Parham)에 의해 시작된 오순절 운동은 118년 전인 19064월에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확장되었다. 로스앤젤레스의 오순절운동은 아주사 거리 부흥”(Azusa Street Revival)으로 잘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주사 거리 부흥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휴스턴에 있던 윌리엄 시무어(William J. Seymour)가 로스앤젤레스로 갔고, 그곳에서 아주사 거리 부흥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고 알고 있다.

    필자도 오순절적 아주사 부흥이 190649일 보니 브레가에 있는 에즈베리의 집에서 시무어의 인도하에 기도하고 있던 소수의 무리에게 갑자기 성령이 임하여 그들이 동시에 방언을 말하며 성령침례를 받음으로써 시작되었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아주사 부흥의 발발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기보다는 시무어가 주도한 아주사 부흥에 함께 동참했던 사람들 가운데 중요한 그러나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을 알리고 싶었다. 그런 사람을 생각하다가 루시 패로우(Lucy Farrow)라는 여성을 생각해 내었다. 그리고 인터넷 상에 올라와 있는 그 여성에 대해 쓴 글들을 모아 번역하고, 그 글들 중에서 가장 잘 정리된 글을 한국오순절연구소 사이트에 올려, 후에 공개하려고 비공개로 저장해 놓았었다.

    그런데 패로우에 대해 쓴 글들을 비교하다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아주사 부흥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것과 관련된다. 보다 상세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최초로 성령침례를 받고 방언을 말하게 되는 오순절적 역사에 대한 기술이 글들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저자들은 자기의 글이 다른 글들과 그 점에서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또한 그 다른 견해들을 한데 모아 논하는 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발견은 필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일으켰다. “아주사 부흥의 불길을 최초로 당긴 존재는 누구였는가?”

    본 글은 루시 패로우의 생애를 기술하고, 그 과정에서 위 질문의 한 대답으로서 아주사 부흥에서 수행했던 그녀의 역할에 대한 4가지 설들에 필자 나름대로 이름을 붙이고, 그 주장자들을 연대 순으로 정리하고, 그 역할을 보다 명확하게 규명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루시 패로우가 흑인 오순절의 어머니: 아주사 부흥을 위한 기폭제”(Mother of Black Pentecost: Catalyst for Azusa Revival)였다는 것을 드러낼 것이다.

 

 

II. 탄생과 성장, 성결교회 목회자

 

    루시 패로우(Lucy Farrow)1847년에 버지니아, 노퍽시, 노퍽(Norfolk, Norfolk City, Virginia)에서 태어났다. 패로우는 서너 살 어린아이일 때 노예로 팔렸다.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시녀(God’s anointed handmaid), 루시 F. 패로우 부인(Mrs. Lucy F. Farrow)은 지금 버지니아, 노퍽으로 돌아가는 길에 휴스턴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곳은 그녀의 고향인데, 그녀는 소녀 시절에(as a girl) 남부로 노예로서 팔려가면서 노퍽을 떠났었다.

 

 

 

 

    그녀가 16세가 되던 해인 186311일에 에이브러햄 링컨 미합중국 대통령이 노예 해방 선언을 했다. 그 선언은 북부에 대하여 반란 상태에 있던 남부 여러 주의 노예를 즉시 전면적으로 해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노예 해방의 근본적인 실현은 남북전쟁이 종식된 후, 그녀가 18세가 되던 1865년에 미국 헌법 수정 제13조가 비준됨으로써 이루어졌다.

    빌스에 의하면 쉐리 듀프리(Sherry DuPree)는 패로우가 노예제철폐론자 프레데릭 더글라스(Frederick Douglas)의 조카였다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더글라스는 1818214일에 태어나 1895220일에 사망했다. 그는 미국 사회 개혁가, 노예제철폐론자, 연설가, 작가, 그리고 정치가였다. 그는 19세기에 아프리카계 미국 시민 권리를 위한 운동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가 되었었다. 듀프리가 바로 보았다면, 패로우의 할머니이기도 했을 더글라스의 어머니는 아프리카계 노예였고, 패로우의 할아버지가 될 그의 아버지는 그녀의 주인으로서 백인이었다. 더글라스에 따르면, 그녀의 어머니의 이름은 헤릿 베일리(Harriet Bailey)였고, 그녀는 그에게 프레데릭 아우구스투스 워싱턴 베일리(Frederick Augustus Washington Bailey)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주사 집회들에 참석했던 마크 브라운(Mark K. Brown)은 패로우를 흑인과 백인 혼혈 여성”(a mulatto woman)이라고 묘사했다.

 

 

Frederick Douglas

 

 

    사라 파함(Sarah Parham)에 의하면 릴다 콜레(Rilda Cole)는 패로우를 “Auntie”라고 불렀는데, 그 용어는 종종 존경을 받는 흑인 여성들에게 사용되었다. 콜레는 여성으로서 파함이 19065월에 공식적으로 설립한 사도적신앙운동”(The Apostolic Faith Movement)의 여성 두 명과 남성 두명, 총 네 명의 스텦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캔사스 지역 관리자였었다. 패로우는 또한 부인”(Mrs)으로 불렸는데, 그 호칭은 그녀가 결혼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는 미망인”(widowed)으로 표기되었는데, 이는 그녀가 결혼했었으나 남편과 사별한 것을 드러낸다. 로우렌스는 그녀에게 자녀들이 있었다는 그 어떤 흔적도 없다고 썼다. 그런데 크래프트는 결혼한 패로우가 1871년에 미시시피에서 살았고, 1890년에 텍사스, 휴스턴으로 이주할 당시 일곱 명의 자녀와 함께 했었고, 그 자녀들 중에서 겨우 두 명만이 생존했다고 전했다.

    1905년에 58세의 패로우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회중들로 구성된 휴스턴의 한 성결교회를 목회하고 있었다. 오순절 운동의 기반의 많은 부분은 웨슬리안 전통을 이어받았던 다양한 성결운동들이었다. 1905년 여름에, 이 작은 선교 교회에 한 젊은 성결주의 사역자인 윌리엄 시무어(William J. Seymour)가 다니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지구적 영향력을 행사한 우정의 시작이었다.

 

 

III. 첫 흑인 오순절주의자

 

    그즈음에, 한 순회 전도자가 전도집회”(crusade)를 열기 위해 휴스턴에 왔다. 찰스 폭스 파함은 캔사스, 토페카에 열었던 벧엘 성경 대학을 닫고는 방언을 말하는 경험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라는 새로운 오순절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파함이 이끌던 캔사스 부흥에서는 흑인들이 참석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휴스턴에서는 흑인들이 그 부흥집회에 자유롭게 참석했다. 휴스턴 크로니클(The Houston Chronicle)은 한 나이 많은 흑인이 고침을 받고 파함 박사의 명령에 따라 그의 목발들을 던져버렸다고 전했다. 콜레(Rilda Cole)는 첫 브라이언 홀 집회에서 적어도 두 명의 흑인 여성들이 고침을 받았다고 썼다. 둘 중의 하나는 루시 패로우였을 것이다. 패로우는 파함의 전도집회에 합류하고는 그 사역을 위해 음식 조리로 봉사했다.

    파함은 19055월에 패로우에게 그와 그의 아내와 함께 캔사스로 돌아가자고 청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그들의 어린 자녀들의 가정교사로서 그들을 도왔다. 패로우는 이런 기회의 이점을 취하고, 그녀의 새 회중을 동역자 윌리엄 시무어에게 맡기고 파함 가족과 함께 떠났다. 루시 패로우는 파함의 집에 거하면서 성령침례를 받고 방언을 말하는 경험을 했다. 이렇게 패로우는 성령침례를 받으며 방언을 말한 최초의 흑인 오순절주의자가 되었다. 

    패로우는 그녀의 새롭게 발견한 경험을 가지고 10월에 그녀의 회중에게 그리고 그녀가 신뢰하는 그 동료, 시무어에게 돌아왔다. 찰스 파함도 그의 사역에 있어서 최근 풍성한 결실을 맺는 경험을 했던 곳인 휴스턴으로 돌아왔다. 파함은 휴스턴에서 머물 곳을 정한 후 단기 성경 훈련 학교를 열었다. 파함의 가르침들을 받아들인 패로우는 윌리엄 시무어에게 그 학교에 다니기를 권했다. 오순절운동을 일으킨 찰스 파함과 오순절운동을 국제적으로 파급시킨 윌리엄 시무어의 연결고리가 바로 루시 패로우였던 것이다

    파함의 성경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동안 시무어는 로스엔젤레스로부터 한 편지를 받았다. 몇 달 전에 아프리카계 여성, 닐리 테리(Neely Terry)가 친족들을 만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부터 휴스턴으로 왔었다. 테리는 패로우가 사람들에게 안수하면 방언을 말하며 성령침례를 받는 것을 보았다. 그때 테리는 패로우의 교회에서 시무어의 설교를 들었다.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간 테리는 한 성결주의 회중을 이끌고 있던 줄리아 허친스(Julia Hutchins)에게 소개했고, 그 그룹은 시무어를 그 회중의 목회자로 삼기로 결정했다. 여섯 주간 그 학교에서 공부한 윌리엄 시무어는 아직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경험하지 못했었지만, 오순절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로 가라는 소명에 답했다. 패로우는 시무어와 아주사 사이의 연결고리였던 것이다.

    시무어는 19062월 말에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해서 한 성결교회에서 그의 첫 설교를 했고, 1906224일에 마지막 설교를 했다. 시무어의 메시지는 줄리아 헛친스(Juilia Hutchins) 목사와 그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공격적인 것이었다. 시무어가 성령침례의 증거로서 방언을 말하는 것의 필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시무어가 그다음 34, 주일에 그 교회로 갔지만, 그 교회의 문들이 잠겨 있었다.

 

 

IV. 오순절적 아주사 부흥의 기폭제

 

    시무어와 그와 함께 했던 소수의 사람들은 로스앤젤레스의 노스 보니 브래 스트리트 216 번지 있는 리차드와 루스 에즈베리(Richard and Ruth Asberry)의 집에서 그 새로운 사역을 계속하도록 초청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침례에 대한 시무어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지만, 아무도 시무어가 묘사한 그 경험을 하지 못했다. 시무어는 그의 회중에게 그의 친구, 루시 패로우에 대해 말했고, 그들은 패로우가 로스앤젤레스로 와서 시무어와 함께 사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녀에게 기차표를 사주는데 충분한 돈을 모음으로써 응답했다. 시무어는 루시 패로우와 워렌(J. A. Warren)49일에 로스앤젤레스로 오도록 주선했다.

    59세의 패로우가 190649일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직후 사람들이 성령침례를 받고 방언을 말함으로써 그 유명한 아주사 거리의 불타는 듯한 오순절적 역사가 시작되었다. 여기까지는 아주사 부흥에 대해 쓴 모든 글들이 동의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오순절적 불길을 최초로 붙여 타오르게 한 존재는 누구였는가와 그 장소에 대해서는 몇 가지 다른 견해들이 서로 엇갈리고 있다. 그 견해들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견해는 에드워드 리(Edward Lee)에게 어떤 사람이 안수했고, 그러자 리가 방언을 말함으로써 그 불이 붙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견해는 사람 안수론이라고 명명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견해는 그 어떤 사람의 안수도 없었는데, 성령께서 몇 사람에게 동시에 방언을 말하게 하심으로써 그 불이 붙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견해는 성령 역사론이라고 명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 안수론에는 한 사람 안수론두 사람 안수론으로 나누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 안수론패로우 안수론시무어 안수론으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두 사람 안수론패로우와 시무어 동시 안수론으로도 명명될 수 있을 것이다.

 

1. 성령 역사론

 

    맨 처음으로 제기된 설은 성령 역사론이었다. 윌리엄 시무어가 편집자로 펴냈던 아주사 부흥 소식지 사도신앙(The Apostolic Faith)19069월 호에서 루시 패로우가 안수한 많은 사람들이 오순절[성령침례]과 방언 은사를 받았다고 썼다. 물론 그 기사는 패로우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최초로 안수하여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은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패로우와 그녀의 안수 사역을 인정하며 언급한 것이다.

 

루시 패로우 부인은 약 넉 달 전에 텍사스, 휴스턴에서 순복음(the full Gospel)을 들고 로스앤젤레스로 왔다.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크게 사용해 오셨고, 그녀가 안수한 많은 사람들이 오순절과 방언 은사를 받아 왔다.

 

    그런데 190612월호 사도신앙많은 사람들이 아주사 선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누가 설립자(the founder)라고 묻고 있다. 주님(the Lord)이 설립자이시고, 주님이 이 운동의 발기자이시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49일에 보니 브레에 있는 한 집에 그 어떤 사람, 심지어 시무어의 안수도 없이 하나님의 불”(the fire of God)이 떨어졌다고 썼다.

 

그들은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속 성령침례를 받기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다. 드디어 49일 하나님의 불이 보니 브레에 있는 한 집에 떨어졌다. 오순절이 사역자들과 성도들 위에 부어졌다. 삼일 후 시무어 형제가 그의 오순절을 받았다.

 

    동일한 글은 루시 패로우를 언급하기는 했지만, 그의 안수 사역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휴스턴에서 그와 함께 사역했었던 두 사람이 오순절이 떨어지기 직전에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그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왔다. 둘 중 하나인 루시 패로우 자매는 그녀의 개인적 오순절을 받았었는데, 주님께서 이 소중한 진리를 지지해 주도록 우리와 합류하라고 그녀를 보내셨다고 말했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그분의 온전함 안에서 붙들고 사랑과 능력과 함께 왔다.

 

    1961년에 칼 브럼백(Carl Brumback)은 미국 하나님의 성회에 대한 역사책을 썼다. 그 책에서 그는 그 어떤 안수도 없는 상태에서 주께서”[성령께서] 임하시자 시무어 그리고 함께 기도하던 일곱 사람이 함께 동시에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고 기술했다.

 

49일 저녁에, 시무어와 다른 일곱 명이 주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때, 주께서 갑자기 그의 교회에 오셨다. 그들 모두는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의자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일곱 명은 여러 종류의 방언들로 말하면서 하나님을 높이기 시작했다.

 

    브럼백은 시무어가 49일에서 삼일이 지난 후 성령침례를 받았다는 사도신앙의 언급도 무시했던 것이다. 브럼백은 오순절운동이 파함이나 시무어 등 그 어떤 사람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시작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그런 관점에서 아주사 부흥의 촉발도 사람의 안수가 아닌 성령의 역사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칼 브럼백

 

 

    1971년에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역사책을 썼던 윌리엄 멘지스(William W. Menzies)는 아주사 부흥의 촉발에 대해 브럼백의 말을 그대로 인용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성결적 오순절 전통에 대해 단행본을 펴낸 빈슨 사이난(Vinson Synan)도 패로우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고, 에드워드 리의 집이 아닌 보니 브레에 있는 에즈베리의 집에서 그 어떤 안수도 없던 상태에서 시무어와 일곱 명이 동시에 방언을 말했다고 썼다.

 

190649일까지 며칠 동안 에즈베리의 집에서 기도회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 시무어와 다른 일곱 명의 사람들이 황홀경 속에서 방언을 말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1960년대에서 시작하여 1970년대 그리고 이후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대표적 저자들은 아주사 부흥의 불길이 그 어떤 사람의 안수가 아닌 성령 하나님에 의해 붙여졌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2. 패로우 안수론

 

    그런데 성령 안수론과 상반되는 사람 안수론”, 더 좁히면 한 사람 안수론”, 더 좁혀 패로우 안수론이 등장했다. 1939년에 엠마 코튼(Emma Cotton, 1877 December 27, 1952)은 리에게 안수한 사람은 패로우 자매였다고 증언했다. 29세의 코튼은 1906년에 아주사 부흥에서 약한 패와 코에 발생했던 암을 치료받고 성령침례를 받으며 방언을 말했었다. 그녀는 19394월에 “19064월 아주사 거리에서 성령의 부어주심에 대한 내부 이야기”(The Inside Story of the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 - Azusa Street - April 1906)를 편집하고 출판했다. 그 글은 그녀가 펴냈던 소식지 사도신앙 메지시(Message of the Apostolic Faith) 1호에 실렸다. 그 글은 아주사 거리 부흥에서 발생했던 일들에 대해 그녀가 목격한 상세한 사항들을 포함했다. 그녀는 그 글에서 루시 패로우와 줄리아 헛친스(Julia Hutchins)와 같은 아주사 선교회에서의 여성들의 활약을 강조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그때의 상황을 기술하며 증언했다.

 

어느 날 저녁 퇴근한 리 형제는 시무어에게 말했다. “지금 저에게 안수해 주신다면, 성령침례를 받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시무어가 말했다.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갑자기 안수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날 저녁에 시무어가 리 형제에게 형제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안수합니다라고 말했다. 시무어가 리 형제에게 안수하자 리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능력 아래서 넘어졌다. 리 자매는 너무도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제 남편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라고 말했다.”

몇 분 후 리 형제는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 시무어는 후에 자신이 주님께 기도해서 리 형제가 일어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모두 너무 놀랐기 때문에, 주님의 사역을 마저 끝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리 형제는 이후 그는 밤낮으로 주님을 구했다.

시무어는 텍사스에서 만난 패로우 자매에 대해 알려주었다. 패로우는 시무어에게 사도행전 24절 말씀에 대한 빛을 던져준 사람이었다. 리 형제가 이런 경험을 한 터라 사람들은 성령 안에서 놀라운 경험을 한 이 여인을 간절히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돈을 모아 그녀를 초청했다.

어느 날 저녁 리 형제는 집에 돌아와 패로우 자매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무릎을 꿇고 말했다. “자매님, 저에게 안수해 주신다면, 지금 당장 성령침례를 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말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저녁 식탁에서 패로우 자매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리 형제에게로 가서 말했다. “주님께서 성령을 받기 위해 지금 안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안수하자 그는 의자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처럼 되었고,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리 자매와 그녀의 남동생은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주님은 리 형제를 통해 많은 많은 역사를 하지는 않으셨고, 그는 단지 몇 분 동안 방언을 말한 후 일어났다.

그들은 에즈베리 자매의 집에서 열리고 있던 기도회에 갔다. 리 형제가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여섯 명의 사람들이 이미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가 방안으로 들어서면서 손을 높이 들고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자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에게 임하고 여섯 명 모두가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런 뒤에 아주 큰 소리가 났고 그 소리는 멀리까지 퍼졌다.

 

엠마 코튼

 

 

    코튼은 시무어가 먼저 리에게 안수했지만, 리가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지 못했었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후에 휴스턴에서 도착한 패로우가 리에게 안수하자 리가 성령침례를 받고 방언을 말했다고 전했다. 코튼은 오순절적 아주사 거리 부흥의 불길을 최초로 붙인 기폭제 또는 촉매는 루시 패로우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194646일에 미국 하나님의 성회 소식지 펜타코스탈 에반젤(Pentecostal Evangel)로스앤젤레스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 한 목격자의 증언”(When the Spirit Fell in Los Angeles: An Eye-Witness Account)이라는 제목으로 엠마 코튼의 증언 전체를 그대로 게재했다. 미국 하나님의 성회는 적어도 1946년까지, 그리고 브럼백이 1961년에 성령 역사론을 주장했을 때까지는 아주사 부흥의 불길을 최초로 댕긴 기폭제는 바로 루시 패로우였다고 본 것이었다.

    1947년에 프랑크 J. 에와르트(Frank J. Ewart, 1876 August 13, 1947)는 패로우가 리에게 안수하자 리가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에와르트는 1876년에 호주, 빅토리아, 벤디고에서 출생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 후 어느 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환상 가운데 보았다. 캐나다로 이민한 그는 1908년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요양 차 미국 오레곤, 포틀랜드를 방문했다가 한 오순절적 캠프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21일간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기 위해 기도에 전념하다가 마침내 방언을 말하며 오순절적인 경험을 했고, 병고침을 받았다. 1911년에 로스앤젤레스로 간 그는 1912년에 윌리엄 H. 더함이 소천하자 그 교회(Seventh Street Mission)의 목사가 되었었다.

 

 

 

 

    에와르트는 세상을 떠나는 해인 1947에 자서전적으로 오순절 역사를 기술한 오순절 현상(Phenomenon of Pentecost)이라는 책을 펴냈다. 에와르트에 따르면, 패로우가 오기 전에 리는 먼저 시무어에게 성령침례를 위해 안수기도해 주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리는 강력한 역사에 쓰러지기는 했지만,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지는 못했다. 후에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패로우는 리의 집에 묵었다. 그리고 그녀는 리의 요구에 따라, 기도한 후, 그에게 안수했고, 그는 그때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을 터트렸다.

 

어느 날 저녁에 리는 일에서 돌아와 시무어 형제에게 말했다. “저에게 안수하면, 제가 성령침례를 받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무어 형제는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누구에게도 갑자기 안수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저녁 이후에, 시무어 형제는 리 형제에게 다가가 말했다. “형제여, 예수 이름으로 형제에게 안수하겠습니다그 즉시 리 형제는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 아래서 마치 죽은 것 같이 쓰러졌다. . . 리 형제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으나, 그것은 오래지 않아 받을 강력한 침례의 서곡이었다.

얼마 후, 패로우(Sister Farrar) 자매가 텍사스로부터 왔고, 리 형제는 그녀에게 성령침례를 받을 수 있도록 안수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그가 요구한 그대로 했고, 리 형제는 다시 한번 바닥에 죽은 사람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다른 방언으로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일어난 리 형제는 에즈베리의 집에서 이미 진행 중이던 저녁 기도 집회에 갔다. 리 형제는 그 방에 들어가면서 손을 들고 다시 한번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나님의 능력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던 여섯 사람에게 떨어졌고, 그들은 즉시 성령이 말하라고 주시는 대로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일은 190649일에 일어났고, 오순절날에처럼 아주 큰 소리가 났고 그 소리는 멀리까지 퍼졌다.

 

    1908년에 로스앤젤레스에 왔던 에와르트는 코튼 등 아주사 부흥 초기부터 그 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눈으로 보았던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이렇게 기술했을 것이다. 에와르트의 이런 기술은 마치 엠마 코튼의 증언을 요약한 것처럼 보인다. 에와르트에게 있어서도 아주사 부흥의 오순절적 불을 최초로 지핀 기폭제는 루시 패로우였다.

    1947년 에와르트의 그런 주장 이후 53년이 지난 2000년에 알렉스 빌스(V. Alex Bills)는 루시 패로우가 에드워드 리에게 안수하여 성령침례를 받고 방언을 말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빌스는 2000년에 북미 오순절 신학 협회 주최로 열린 29차 연례 발표회에서 토페카 이후 그리고 아주사 이전 시대에 휴스턴의 역할에 대해 발표했다. 그는 그 발표를 오순절 운동에 있어서 첫 주요 흑인은 한 여성이었는데, 그는 루시 패로우였다”(The first major black personality in the Pentecostal movement was a woman, Lucy Farrow)라는 말로 시작했다. 그리고 빌스는 에와르트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아주사에 불이 처음으로 붙여졌던 상황을 묘사했다.

 

리의 요구에 따라, 기도한 후, 그녀는 그에게 안수했고, 그는 방언을 터트렸다. 그는 즉시 에즈베리의 집에서 열리고 있던 보니 브레 거리 기도회로 갔다. 그리고 그가 그 집의 문에 들어서면서 손을 들고 방언으로 말하고 있을 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 위로 불이 떨어졌다,

 

    빌스는 1961년 이후 무성했던 성령 역사론에 반대하며, 1939년과 1947년에 주장되었다가 약화되어 있던 패로우 안수론을 학문적으로 다시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1960년대 이래로 성령 역사론만 붙들고 있던 미국 하나님의 성회에 경종을 울린 것이었다.

    2005년에 에스트렐라 알렉산더(Estrela Alexander)는 루시 패로우를 캘리포니아 남부에 성령의 불들을 붙인 중심적 선지자”(the central prophet igniting the Holy Ghost fires in Southern California)라고 불렀다. 그리고 2006년에 에디 하얏(Eddie L. Hyatt)은 더욱 분명하게 패로우가 리에게 안수함으로써 그가 성령침례를 받고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고 적었다.

 

에디 하얏

 

 

하얏은 오랄로버츠대학교(Oral Roberts University)에서 오순절-은사주의 연구 전공으로 목회학 석사를 획득하고 리젠트 대학교(Regent University)에서 교회사와 영적 갱신을 전공하고 목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얏은 아주사 부흥 발발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6년에 아주사 거리 부흥(The Azusa Street revival: the Holy Spirit in America: 100 Years)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 책에서 하얏은 엠마 코튼과 프랑크 에와르트의 뒤를 이어 에드워드 리에게 안수하여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게 한 사람, 아주사 부흥의 불을 최초로 붙인 사람은 바로 패로우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하얏은 아주사 부흥의 불길이 최초로 붙었던 곳은 에즈베리의 집이 아닌 에드워드 리의 집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얏은 2000년에 빌스가 상자 안에 잠겨 있던 패로우 안수론을 꺼내어 세상에 내어놓자 그것을 2006년에 다시 언급하여 강화시킨 것이다.

 

며칠 후 에드워드 리는 일과 후 집으로 돌아왔을 때, 휴스턴에서 막 도착한 패로우를 만났다. 그는 성령침례를 받기를 너무도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간단한 인사 후 패로우에게 요청했다. “자매님, 저에게 안수해 주시면, 지금 당장 성령침례를 받을 것 같습니다.” 그녀는 주님께서 그러라고 말씀하시지 않는 이상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후, 저녁을 먹고 있을 때, 패로우가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리에게 와서는 주님께서 성령을 위해 안수하라고 내게 말씀하십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리에게 안수했고, 그는 즉시 그의 의자에서 떨어졌고, 바닥에 누운 그는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3. 시무어 안수론

 

    “성령 역사론1906년에 주장되기 시작되었고, “패로우 안수론1939년에 등장하여 1946년에 미국 하나님의 성회에게 받아들여졌으나, 미국 하나님의 성회는 1961년부터 성령 역사론을 다시 꺼내 들기 시작했고, “성령 안수론1970년대에 절정에 달했다. 그런데 1981년에 영국, 버밍햄 대학교에서 시무어 안수론이 탄생했다.

    1981년에 더글라스 넬슨(Douglas J. Nelson) 박사학위 청구 논문에서 에드워드 리가 시무어의 안수를 받고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넬슨은 카틀리, 셤웨이, 그리고 코튼의 말을 인용하면서 리가 시무어에게 오순절날 그랬던 것처럼 방언이라는 표징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보았다. 그러자 시무어는 리의 집에서 리에게 안수했고, 리는 새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7번가와 스프링가가 만나는 곳에 있던 은행에서 건물 관리인으로 일했던 에드 리(Ed Lee)는 지하실로 사라져 몇 시간 동안 기도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 다락방에서 사도 베드로가 보았던 환상과 같은 환상을 보았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에게 나타나 그를 보며 그들의 손을 들고는 하나님의 권능 아래서 떨며 다른 방언으로 말한 것 같았다. 환상은 그쳤지만 리의 몸 전체는 떨고 있었다. 그는 그 환상이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임하실 때 일어나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믿었다.

리의 경험은 모든 사람들을 고무시켰다. 그들의 기도는 강렬해졌다. 한 저녁에 시무어는 성령침례를 위해 리에게 안수했다. 리는 마치 죽은 것처럼 몽환(trance)에 빠졌고, 그의 아내가 두려워하자 시무어는 그 모임을 마쳤다. . . .

그즈음에 시무어는 기차표값을 모아서 휴스턴에 보내면서 그의 친구들, 루시 패로우 부인(Mrs. Lucy Farrow)과 워랜(Mr. J. A. Warren)에게 와서 사역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부활절이 다가오면서, 시무어와 다른 사람들은 구하던 그 하나님의 축복[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을 받기까지 기도에 더 힘쓰기로 작정했다. 성금요일 일주일 전인 46, 금요일에 그 기도 그룹은 영적 목적을 위해 음식을 먹지 않기로 결정하고 열흘 간의 금식기도에 돌입했다.

종려주일 다음 날인 49, 월요일에, 리는 시무어에게 와서 병으로부터 회복하도록 그래서 몇 블록 떨어져 있는 보니 브레에서 열리는 저녁 집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요청했다. 6시에 시무어가 도착해서 리에게 기름을 붓고 그의 머리에 안수하며 기도했다. 리는 즉시 호전되었다.

그러자 리는 시무어에게 그가 오순절날처럼 성령과 방언을 받도록 기도해달라고 요청했다. 시무어는 다시 한번 안수했다. 시무어가 기도하고 있는 때 리는 새 방언을 열광적으로 터뜨렸다. 리와 시무어는 환하게 웃었다. 리가 외쳤다. “드디어, 이것은 저것입니다!(This is that)[오순절 날의 이 현상은 요엘이 예언했던 바로 저것이 성취된 것이라는 베드로의 설교 중의 한 구절, 역자 주]”

그 두 행복한 사람들은 그 저녁 기도회가 열리고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그들이 730분 경에 에즈베리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 방들과 거실들이 접해있는 커다란 더블룸은 이미 간절한 흑인들로 꽉 차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세탁 여성들, 건물 관리인들, 그리고 철도 짐꾼들이었다. 백인들은 그날 밤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었다. 시무어는 주도권을 잡고 기도회를 시작시켰다. 그들은 한 찬송가를 불렀고, 세 사람이 기도를 인도했고, 몇 사람은 간증했다. 그리고는 시무어가 일어나 사도행전 24절을 읽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주시는 것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시무어는 초저녁에 있었던 리의 경험을 말하며 설교를 시작했다. 가이사랴에서 사도 베드로의 설교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놀라운 방언 소리로 갑자기 중단되었던 것처럼, 시무어의 설교도 그렇게 놀랍게 끝났다. 그가 설교의 도입 부분으로 방금 전에 일어났었던 것을 말하자마자, 에드 리가 자기 양손을 높이 들고는 입을 열어 방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기도회에 모인 사람들 모두는 어떤 막대한 힘에 의한 것처럼 즉시 무릎을 꿇었다. 적어도 일곱 명이, 그리고 아마도 더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여 놀라운 조화를 이루며 생소한 새 방언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제니 에반스 무어(Jennie Evans Moore)는 피아노 의자에서 떨어져 무릎을 꿇고는 그렇게 방언을 말하는 첫 여성이 되었다. 몇 사람은 모든 이웃이 들을 수 있게 외치며 방언으로 말하며 현관문 밖으로, 마당으로 거리로 뛰어나갔다. 리틀 윌렐라 에즈베리(Little Willella Asbery)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부엌에서 뛰어왔다. 그녀의 오빠, 열 한 살 난 모르톤(Morton)은 무서워서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10대의 버드 트레이너(Bud Traynor)는 현관에 서서 예언하며 설교했다. 제니 에반스 무어는 피아노로 돌아가 일련의 여섯 가지 언어들과 통역들이라고 여겨진 것을 그녀의 아름다운 음성으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 집회는 오후 10시까지 계속되었고, 그들 모두는 그들이 초대 오순절이 회복되었다고 믿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넬슨은 패로우가 리에게 안수하여 리가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는 코튼의 증언을 참고했으면서도, 그녀의 증언을 무시하고 시무어가 리에게 안수하여 리가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고 기술했다. 넬슨은 오순절운동의 기원 안에서 찰스 파함의 역할은 사이난-발드포겔과 앤더슨 각본 모두에서 역사가들에 의해 과장되었다고 주장하고 시무어를 한 영웅적인 종교 운동의 절대적인 창시자”(unqualified founder)로 규정했다.

    넬슨과 같은 맥락에서 1998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교회”(the Church of God in Christ) 교단 역사서를 쓰기도 했던 로버트 오웬스(Robert R. Owens)는 시무어가 리에게 안수하자 리가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고 기술했다.

 

그리고 리는 시무어에게 성령침례를 받을 수 있도록 자기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요청했다. 그들은 함께 기도했고, 그러나 리는 성령침례를 받으며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시무어 장로가 기도할 때 성령침례를 받은 사례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일어난 것이었다.

 

    작가 로버츠 리어든(Roberts Liardon)2006년에 펴낸 아주사 부흥에 관한 책에서 시무어가 리에게 안수하자 방언이 터졌다고 적었다. 그리고 리어든은 윌리엄 시무어에게 오순절 운동의 기폭제”(The Catalyst of Pentecost)라는 말을 붙여주기도 했다.

 

4. 시무어와 패로우 동시 안수론

 

    2002년에 풀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시무와 패로우 동시 안수론이 태어났다. 2005년에 바바라 카바니스(Barbara Cavaness)어셈플리즈 오브 갓 헤리티지가 기획한 아주사 부흥 발생 100주년 기념호에서 시무어와 패로우가함께 에드워드 리에게 안수했다고 썼다. 그런데 카바니스는 그 장소는 에즈베리의 집이 아닌 에드워드 리의 집이었다고 주장했다. 그 글은 그녀가 세실 로벡(Cecil M Robeck)의 지도하에 2002년에 풀러신학교에 제출한 박사학위 청구논문에서 인용된 것이었다. 카바니스(Barbara Cavaness)는 루시 패로우를 파함의 가르침들과 아주사 부흥 사이의 중요한 연결고리였다라는 정도로만 평가했다.

 

 

바바라 카바니스

 

 

    2006년에 풀러신학교의 교수인 로벡도 코튼이 기술한 것처럼 시무어의 첫 안수에도 리가 방언을 말하지 못했음과, 리의 첫 안수 요구에 패로우가 거절했던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로벡은 에드워드 리가 방언을 말했을 때, 시무어와 패로우가 함께 안수했다고 기술했다.시무어와 패로우 안수론은 표면적으로 카바니스가 먼저 주장한 것 같지만, 사실 그녀의 주장은 그녀의 논문 지도 교수였던 로벡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었을 것이다. 로벡은 브럼백의 성령 안수론은 배제하고, 코튼의 패로우 안수론과 넬슨의 시무어 안수론을 절충한 시무어와 패로우 동시 안수론을 주장한 것이다. 오순절운동은 특정한 아버지가 없고 세계 곳곳에서 자생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만들려 하는 로벡은 아주사 부흥의 불길도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 시무어와 패로우가 함께 안수하여 일으켜진 것으로 만들려 하는 것이다. 그만큼 로벡에게 루시 패로우는 결코 무시할 수 없이 중요한 인물이었다.

 

세실 로벡

 

 

    위키피아(Wikipedia)는 윌리엄 J. 시무어에 대한 항목에서 세실 로벡을 따라 시무어와 패로우 동시 안수론을 주장했다.

 

49일에, 에드워드 리는 시무어와 새로 도착한 루시 패로우어가 리의 집에서 그에게 안수한 후 방언을 말했다. 기쁨에 찬 그 무리는 저녁 집회를 위해 에즈베리의 집으로 걸어갔다. 시무어는 성경의 본문을 택했는데, 예상할 수 있듯, 그 본문은 사도행전 24절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성령께서 말하라고 주시는 대로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에드워드 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했다. 그가 설교를 끝내자마자. 어떤 사람이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저녁에 다 지나가기 전에 제니 에반스 무어를 포함하여 다른 몇 사람도 방언으로 말했다.

 

    에디 하얏은 1960년대부터 미국 하나님의 성회에 성령 안수론이 팽배해 있고, 1981년에 시무어 안수론이 등장하고, 2006년에 절충적인 시무어와 패로우 동시 안수론이 등장하자 1939년에 등장했다가 1960년대부터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다가 알렉스 빌에 의해 2000년에 주장되었던 패로우 안수론2006년에 다시 부상시켰다.

    오순절적 아주사 거리 부흥의 불길을 최초로 붙인 존재에 대한 견해는 이렇게 4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두 가지 견해에 루시 패로우가 포함되어 있다. 루시 패로우는 그만큼 아주사 부흥의 촉발에서 배제될 수 없는 인물인 것이다. 따라서 루시 패로우에게 오순절적 아주사 부흥의 기폭제”(the Catalyst for Azusa Revival)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것은 합당한 것이다.

 

  성령역사론 패로우 안수론 시무어 안수론 시무어/패로우 안수론
1906 아주사 선교회      
1939   엠마 코튼    
1946   미 하나님의성회    
1947   프랑크 에와르트    
1961 칼 브럼백      
1970 윌리엄 멘지스      
1981     더글라스 넬슨  
1998     로버트 오웬스  
2000   알렉스 빌스    
2002       바바라 카바니스
2005       미 하나님의성회
2006   에디 하얏 로버츠 리어든 세실 로벡

 

 

아주사 선교회 스텦들과 오른쪽 끝에 59세의 루시 패로우

 

 

 

 IV. 아프리카로 간 오순절 여성

 

    190649일에 서남부 로스앤젤레스 사역을 시작했던 루시 패로우는 그해 8월에 남부 휴스턴으로 돌아왔다. 파함은 휴스턴 캠프 집회에 패로우를 객원 강사로 세웠다. 아주사 거리 부흥의 최초의 불길을 일으키고 막 돌아온 패로우는 안수를 통해 방언을 동반하는 오순절적 침례를 일으키는 그녀의 능력으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고스는 그녀가 안수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강단 앞에 긴 줄들을 이루었고, 그녀가 기도해 주는 사람 모두는 방언으로 말했다라고 그녀의 사역을 전했다. 패로우가 휴스턴에서 수행했던 오순절 사역의 열매들 중 한 사례는 1906년에 15세였던 줄리아 로빈슨의 간증에서 발견된다.

 

저는 값없이 받는 온전한 구원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저는 구원받았고, 성화되었고, 그리고 성령침례를 받았습니다. 저는 회심하기 전에 15세였습니다. 저의 여자 친구들은 모두 교인들이어서 저도 교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아버지가 하나님의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교회에 갈 것을 권하기까지는 교회에 가지 않았었습니다. 우리는 패로우 자매가 설교하는 것과 방언을 말하는 것을 들으러 같습니다. 우리는 그 집회에 매일 밤에 갔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발목이 부러졌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갔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제단으로 갔습니다. 패로우 자매는 어머니에게 안수했고, 어머니는 다시 신앙을 회복하고, 성화되고, 성령침례를 받고 방언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즉시 발목을 고침받았습니다. 또한 저의 자매도 그 밤에 성령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회심했습니다. 다음 날 저녁에, 저는 다시 제단으로 갔고 성화되었습니다. 그 밤에 저는 성령침례를 받았습니다.

 

    남중부 휴스턴을 떠난 패로우는 자기의 고향 동북부 버지니아로 향했다. 그녀는 그 여정 중에 차를 갈아타기 위해 뉴 오를레앙(New Orleans)을 경유했다. 그 경유지에서도 그녀는 병자들에게 안수하며 복음을 전했다. 그 후 패로우는 버지니아 포츠머스(Portsmouth)로 갔다. 그녀는 글라스켄 스트리트 907번지(907 Glasken St.)에서 머물면서 오순절적 사역을 계속하여 총 200여명의 사람들이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게 했다. 패로우는 시무어에게 다음과 같이 포츠머스의 사역의 긴급함과 어려움을 알리며 도움을 청했다.

 

우리는 지난 밤에 영광스러운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날은 여섯째 밤 집회였고, 여섯 명이 방언을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그분을 믿는 자녀들과 함께 역사하고 계시는지를 보는 것은 놀라운 것이지만, 여기에는 해야 할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여기에는 성도들답게 성경을 읽지 않는 성도들의 한 무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불신자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성경을 전혀 읽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 누군가 도와주십시오. 가능하다면, 가능한 한 빨리 당신이 오셔서 도와주지 않으시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 세상에 급박한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곧 세상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동네들을 다 다니지 못했을 때 인자가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안부를 전해주십시오. 그들에게 저를 위해 많이 기도해 달라고 전해주십시오. 저는 모든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수 없으니, 당신이 그들 모두에게 저의 안부를 전해주십시오. 그들에게 버지니아 사역을 위해 기도를 부탁해 주십시오. 이곳 사역은 필요한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얼마나 오래 이곳에 있게 하실지 저는 모릅니다.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 후 패로우는 뉴욕에서 아프리카로 선교하러 간다는 소식을 아주사에 전하며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패로우는 바트맨 부부(Bro. and Sister Batman)와 헛친스 부부(Bro. and Sister Hutchins)와 함께 영국 잉글랜드에서 출발하여 190612월 말에 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 몬로비아(Monrovia, Liberia, Africa)로 갔다. 그리고 그녀는 몬로비아에서 25마일 떨어진 존슨빌(Johnsonville)로 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오순절적 메시지를 전했고,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성령침례를 받고 방언을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토착어인 그루어 방언으로 두 번의 설교를 하기도 했다. 사도신앙은 존슨빌에서 그녀의 그런 사역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매 패로우는 로스앤젤레스에 오순절을 가져다준 첫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프리카로 가서 라이베리아, 몬로비아에서 25마일 떨어져 있는 존슨빌에서 일곱 달을 보냈다. 그곳의 기후는 가장 살인적이다. . . . 20명의 영혼들이 그들의 오순절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성화되고, 고침을 받았다. 주님께서 그녀에게 그루어(the Kru Language)을 말할 수 있는 은사를 주셨었고, 그녀는 그들의 방언으로 그 사람들에게 두 번의 설교를 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그 이방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오순절을 받고는 영어로 말했고, 어떤 사람들은 다른 방언들로 말했다.

 

 

 

 

    체파스 오메뇨(Cephas Omenyo)2006년에 시무어와 패로우가 서아프리카, 라이베리아와 가나 오순절주의자들에게 끼친 영향을 추적했다. 그 추적은 시무어와 루시 패로우 그리고 윌리엄 와드 헤리스(William Wade Harris) 사이의 연결성을 규명함으로써 칼루(Ogbu Kalu)의 견해에 반대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패로우와 다른 아주사 선교사들은 아프리카 역사상 가장 예외적인 복음 전도자 헤리스의 동족인 그루 족 가운데서 사역했었다. 칼루는 오순절운동이 그 어떤 선교사들의 사역이 아닌 전 세계 각 지역의 원주민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발생했다는 자생/동시발생설을 주장했다. 그런 칼루의 견해에 반대하며 오메뇨는 오순절적 경험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보통 인간 대행자를 통해 경험된다고 주장했다.

 

 

체파스 오메뉴

 

 

V. 미국으로 돌아온 오순절 전도자의 소천

 

    60세의 패로우는 190711월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노스캐롤라이나, 리틀턴(Littleton, North Carolina)에 있는 한 사도신앙선교회에서 집회들을 인도했다. 19085월에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아주사 선교회 뒤편에 있는 작은 집의 한 방에서 기거했다. 그녀는 그 집에서 기도와 가르침의 사역을 수행했다.

 

주님께서 선교회 뒤편에 있는 작은 신앙의 집 안에서 사람들에게 성령침례를 주었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사랑하는 패로우 자매를 사용해 오셨다. 그분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성령의 부으심의 시초에 그녀를 텍사스에서 로스앤젤레스로 보냈다. 그녀가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이래로 그 집의 그녀의 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다 크게 성령충만을 받아왔으며, 몇 사람이 병 고침을 받고 성령침례를 받아 왔다.

 

    결핵(intestinal tuberculosis)에 걸린 루시 패로우는 64세인 1911221일 오전 730분에 휴스턴, 헤리스 카운티(Harris County), 3525 Williams St.에서 소천했다. 패로우의 사망의 원인과 사망을 의학적으로 확인하고 사인한 사람은 흑인 의사 벤자민 코빙턴(Benjamin J. Covington)이었다. 그녀의 남은 몸은 텍사스, 휴스턴, 1300 Court Street, Summer St.에 있는 올리브우드 공동묘지(The Olivewood Cemetery)에 묻혔다. 올리브우드 묘지는 1875년에 휴스턴에서 가장 먼저 법인화된 아프리카계 미국인 묘지이다.

 

 

 

 

 

 

 

    어떤 사람은 루시 패로우가 연루되지 되었든 연루되지 않았든 오순절적 아주사 부흥은 일어났을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섭리 안에서 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을 후에 한 세기를 넘게 계속 밝게 밝힐 아주사의 오순절 불을 위한 기폭제(a catalyst)가 되도록 능력을 부여하시고 부르심으로써 장애물들을 극복하기에 적합한 인물로 보셨다.

    현재 루시 패로우의 묘비에는 오순절의 어머니: 휴스턴, 로스앤젤레스, 그리고 세계의 오순절적 부흥을 위한 기폭제”(Mother of Pentecost: Catalyst for Pentecostal Revival in Houston, Los Angeles, and the World)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패로우는 오순절의 어머니는 아니다. 패로우를 오순절의 어머니로 보는 시각은 아주사 부흥을 오순절운동의 시초로 보는 시각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오순절운동의 아버지가 사람이 아닌 성령이라고 주장하는 오순절운동의 성령 기원설이나 오순절운동의 아버지는 시무어라고 주장하는 시무어 기원설은 아주사 부흥을 오순절운동의 시발점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오순절운동의 기원은 찰스 F. 파함과 토페카의 벧엘성경학교다. 그러므로 파함의 집회에서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은 최초의 흑인이었으며, 윌리엄 시무어에게 파함의 휴스턴 성경학교에 다닐 것을 권하고, 에드워드 리에게 안수하여 오순절적 성령침례,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게 하여 오순절적 아주사 부흥을 촉발시켰던 루시 패로우는 흑인 오순절의 어머니”(Mother of Black Pentecost)라고 명명되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패로우의 묘비의 문구의 부제인 휴스턴, 로스앤젤레스, 그리고 세계의 오순절운동의 기폭제”(Catalyst for Pentecostal Revival in Houston, Los Angeles, and the World) 오순절적 아주사 그리고 존슨빌 부흥의 기폭제”(Catalyst for Pentecostal Azusa and Johnsonville Revival)로 수정해야 할 것이다.

 

 

 

 

 

 

 

 

VI. 나가는 말

 

    루시 패로우(Lucy Farrow)1847년에 버지니아, 노퍽에서 태어나 1911년 텍사스, 휴스턴에서 64세에 세상을 떠났다. 58세의 미망인 패로우는 1905년에 찰스 F. 파함이 이끌던 집회에서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고 최초의 흑인 오순절주의자가 되었으며, 윌리엄 J. 시무어에게 파함의 휴스턴 성경학교에 입학을 권유하고, 그녀가 목회하고 있던 교회에서 시무어가 설교하도록 허용함으로써 시무어와 로스앤젤레스를 연결해 주는 고리가 되었다.

    아주사 부흥을 위한 불을 최초로 붙인 존재에 대해 성령 역사론,” “시무어 안수론,” “시무어 패로우 안수론등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지만, 59세의 패로우는 190649일 로스앤젤레스의 에드워드 리의 집에서 에드워드 리에게 안수했고, 리는 성령침례를 받고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오순절적 아주사 부흥에 최초의 불을 붙였다. 그녀가 로스앤젤레스, 휴스턴, 포츠머스, 아프리카의 존슨빌 등에서 성령님의 지시하심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 안수하면, 그 사람이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나곤 했다.

    그런 역사를 일으켰던 하나님의 여종, 루시 패로우(Lucy Farrow)흑인 오순절의 어머니: 아주사 부흥을 위한 기폭제”(Mother of Black Pentecost: Catalyst for Azusa Revival)라고 명명되는 것은 지극히 합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