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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F. 파함 전기(고프)

오순절운동의 아버지 찰스 F. 파함 전기 9 (고프)

한오신 2024. 8. 4. 20:37

결론

오순절과 찰스 파함의 유산

 

 

 

    찰스 파함의 사망으로 작은 사도신앙회(The Apostolic Faith fellowship)는 혼란에 빠졌다. 부흥회들과 연례 캠프 집회들은 그의 카리스마적 현존에 그리고 특히 그가 삼십 년 동안의 설교를 통해 맺어 놓았었던 우정에 크게 의존했었다. 응집력 있는 조직력의 부재는 그 제휴를 유지하는 것을 만만치 않은 일로 만들었다. 파함의 아내 사라는 지도적 지위를 거의 물려받았다. 그녀는 사도 신앙회 전체의 존경을 요구했고, 가끔 스스로 강단에서 설교했다. 남편이 죽자, 그녀는 사도신앙의 편집인이 되었고, 순회 전도자들과 지역 교회들을 섬기고 있던 목회자들을 위해 그 소식지를 제공했다.

 

Sarah Thistlewaite Parham

 

 

    그런데 사라 파함은 혼자가 아니었다. 마침내, 그녀의 네 아들들 중에서 세 아들들이 목회자가 되었다. 1923년에, 윌프레드 파함(Wilfred C. Parham)은 그의 아버지와 함께 활동적인 사역자와 사도신앙 설교가로서 순회 전도를 시작했다. 2년 후, 그는 앨리스 윌슨(Alice Wilson)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캘리포니아, 포모나(Pomona)에서 포스퀘어 가스펠 처치의 목사였었다. 그 신혼부부는 전도 팀을 이루어 미국 전역을 순회했고, 가끔 도시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집회들에서 원로 파함과 팀을 이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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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윌프레드 파함은 공식적으로 [에이미 샘플 맥퍼슨이 세운] 포스퀘어 가스펠 교단에 합류했지만, 사도신앙 진영에 정기적인 설교가로 남았다.

 

 

 

Wilfred C. Parham

 

 

성지순례를 떠나기 전 윌프레드 파함 부부와 함께 선상에서

 

 

파함의 막내 아들, 로버트(Robert Lee Parham)1929년에 설교하라는 사명을 받아들였고, 그때 찰스 파함은 병상에 누워있었다. 로버트는 아내 파울라인(Pauline)과 함께 그의 아버지의 연례 일정을 대신 취하고 그야말로 전국에서 부흥회들과 캠프 집회들을 열었다. 장남 클라우드 월레이스 파함(Claude Wallace Parham)은 비교적 늦게 1930년대에 그 사역에 합류했는데, 그때 그와 그의 아내 룰라(Lula)는 자신들의 전도 캠페인들과 함께 로버트 파함을 보충하기 시작했다.

    그 어느 누구보다 더, 로버트 파함 (Robert Lee Parham) 은 그의 아버지의 사역의 외투를 받아들였다. 그 전도 사역에 더하여 그는 교회 일들을 조정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사도신앙을 발간하는 데 있어서 그의 어머니를 도왔다. 1937년 초에 파함의 집은 새로운 목회자들을 훈련시키고 평신도 사역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단기 성경학교로 변환되었다. 로버트는 그의 어머니와 유명한 오클라호마 전도자 게일 쉴츠(Gail Shultz)의 도움을 받으며 그 성경학교를 감독했다. 1937년에 사라 파함의 소천과 함께 그 젊은이는 완전한 편집적 책무를 취하게 되었고, 그의 부모의 지도력을 채우기 위한 논리적인 후계자로 섰다.

 

로버트 L. 파함의 결혼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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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 파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도신앙운동의 영광스러운 과거는 재생되지 못했다. 구성원 수는 1930년대의 불황 동안 어느 정도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작은 채로 남아있었다. 찰스 파함의 조직화에 대한 반감은 그 분파의 평범한 성장에 일조했다. 대부분의 오순절 교회들은 여러 해에 걸쳐 교단으로 조직화 되었었다. 조직화된 구조는 그들이 불황시기에 왔던 교회 성장을 조정하게 했다. 로버트 파함은 그와 같은 종류의 행동을 고려했다. 그는 또한 악인들의 멸절그리고 조건적 불멸과 같은 비정통적 생각들을 적극적으로 촉진시키지 않았다. 그렇지만, 조직화는 세상적인 것과 영적 파산을 가져올 것이라는 철학을 가졌던 오순절주의자들의 한 세대가 중앙집권적 통제와 가짜경험을 붙들고 있었던 사람들과 함께 하는 예배를 갑자기 포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주어졌다면, 로버트 파함은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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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같은 2세대 오순절주의자들은 더욱 원만한 변화가 필요함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파함의 막내 아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는 겨우 서른여덟 살이 되는 1944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940년 후반에, 사도신앙 운동은 로버트 파함이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를 바랐던 문제를 놓고 분열을 겪었다. 그즈음, 신유 전도자들의 새로운 한 세대가 오순절주의의 탁월함을 전국에 걸쳐 보여주고 있었다. 윌리엄 브란햄(William Branham), 오랄 로버츠(Oral Roberts),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수십 년 전에 찰스 파함이 설교했던 것과 같지 않은 신유와 성령의 능력의 복음적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나 사도신앙의 나이 든 구성원들에게, 그 새로운 종류의 오순절주의는 최악의 감정주의였다. 그들은 이들 먼지가 날리는 부흥회들과 그들이 수십 년 전부터 알아 왔었던 것들 사이에는 진정한 차이가 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보다 젊은 목회자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오순절 신자들의 유익을 위해 이 인물들을 통해 역사하고 계시다고 주장하며 그 전도자들의 사역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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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증가되는 조직도 또한 문제가 되었다. 젊은 목회자들은 선출된 임원들과 구조화된 재정 체계를 갖춘 더 강력하게 중앙집권적인 기반을 요구했다. 나이 든 사람들은 그 어떤 종류의 조직적 끈들도 없는 순수하고 철저한 지역 교회의 자율성을 선호했다.

    1950년대에, 이 의견 불일치들은 사도신앙회(The Apostolic Faith fellowship) 안에서 공개적인 불화로 이어졌다. 가입 교회들의 대표자들이 이 문제를 풀기 위해 1951년에 텍사스, 스피어맨(Spearman)에서 만났다. 양측이 팽팽하게 맞섰고, 결국 분열되었다. 로버트 파함의 미망인 파울라인을 비롯하여 많은 젊은 목회자들은 그 회를 탈퇴하고, 사도신앙과 백스터 스프링스에 있는 성경학교와의 관계를 끊었다. 그 후, 그들은 순복음전도회(Full Gospel Evangelistic Association)를 형성하고, 신유 전도자들에 대한 관용적 입장을 취했으며, 예배 중 조직화된 헌금을 포함하는 보다 큰 조직을 허용했다. 136명의 목회자들과 13개 주의 83개의 교회들이 절반보다 조금 적은 사람들과 함께 분열하여 새로운 조직을 이루었다.

 

Full Gospel Evangelistic Association, Tulsa, OK

 

    30년 이상 후에, 그 두 집단은 그대로 나누어져 있었다. 순복음전도회(The Full Gospel Evangelistic Association)134명의 목회자들과 31개의 회원 교회들과 선교회관들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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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그와 같은 수의 제휴 교회들이 있다지만, 그 집단에 대한 통계는 없다. 그 협회에 가입된 교회 구성원들에 대한 추정은 자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수는 또한 목록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천오백 명은 아마도 적정한 산출일 것이다. 가입 교회들은 해외 선교 협동과 텍사스, 휴스턴에 있는 Midwest Bible Institute의 후원이라는 목적을 위해 느슨하게 조직화 되어 있다.

 

 

 

 

비록 미국 남중부지역에 집중화되어 있지만, 그 조직은 그 선교 활동에 있어서 지구적이며, 다른 오순절적 집단들과 아주 협조적인 접근을 유지하고 있다. 신학적으로, 그 협회는 웨슬리적 오순절주의 교단들의 신조와 거의 같은 신앙진술을 유지하고 있다.

 

 

 

털사에 있는 Full Gospel Evangelistic Association 총회회관

 

 

 

    백스터 스프링스에 있는 파함의 이름을 내건 협회(The Apostolic Faith fellowship)는 약간 작은데, 109명의 목회자들과 약 50개의 교회들이 가입되어 있다. 그 협회의 회원 수는 약 삼천오백 명 정도일 것이다. 이 교회들도 또한 미국 서중부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이 교회들은 총회 임원들 또는 매년 모이는 총회도 갖고 있지 않지만, 백스터 스프링스에 있는 사도신앙 성경대학(the Apostolic Faith Bible College)을 지원하며, 백스터 스프링스와 오클라호마 주의 라번(Laverne)에서 번갈아 가며 연례 캠프 집회를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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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앙회(The Apostolic Faith fellowship)는 조직적인 헌금에 대한 파함의 완강한 비난을 유지하고 있으며, 진정한 방언은 제노글로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오순절주의자들 가운데서 독특한 것은 그들의 악인들의 멸절조건적 불멸교리 보존이다.

 

 

 

 

현재의 the Apostolic Faith Bible College

 

 

 

 

 

 

    찰스 파함의 직접적인 유산은 적다. 전 세계의 오천백만 명의 오순절주의자들 중에서 만 명 못 되는 사람들이 그의 삼십육 년 사역에서 마지막 이십 년 사역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그러나 파함의 중요성은 그런 숫자에 의해 가늠될 수 없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그는 20세기 후반에 피어났던 그 운동을 형성시켰다. 파함은 19세기 후엽의 복음전도적 성령 시대에 의해 영향을 받았던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갈망하던 많은 사역자들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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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그는 소외된 사람들에게 희망을 약속하는 급격한 회심의 메시지를 전했다. 진보주의의 정치적 방법들과 사회의 표준에 환멸을 느낀 그는 그와 동시대인들로부터 종교적 교리들의 세 가지 주제들, 죄된 인간 본성의 성화, 모든 육적 연약함의 신유, 그리고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천년 정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방언을 성령침례의 최초 증거로 삼는 독특한 관념적 공식으로 명확하게 표명한 사람은 오직 파함 밖에 없었다. 그 발견은 오순절 운동을 창출해 내었다. 그것은 오순절주의자들을 보다 강경한 신학적 신조에 묶어 줌으로써 그들을 성령적 부흥 전체와 구별시켜준다. 그것은 다른 그 어떤 특징보다 기독교 교단들이라는 적대적 공동체 안에서 그들을 식별시켜주는 배지로 이바지했다.

    파함은 또한 선교에 대한 열정을 그 운동에 불어넣었다. 제노글로사적 방언은 하나님의 역사적 세대들의 마지막 단계인 교회시대를 마감시킬 종말적 선교 노력에 열쇠를 제공했다. 방언을 통한 오순절 설교는 불신자들을 영광스러운 열한 시 부흥 안에서 복음적 진리에로 이끌 것이었다. 그 후 하나님의 종말은 신실한 자들에게 영원한 기쁨을 부어주실 것이었다. 후에 오순절주의자들은 그 규정을 글로솔라적 방언을 포함시킴으로써 약간 수정했다. 그러나 최초 증거의 본질적 특징들은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았다. 그 결과, 20세기에 태어난 오순절주의는 20세기의 잠자는 종교적 거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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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순절 전도자들과 선교사들은 시간이 없고 세계 선교지들은 익을 대로 익어서 이제 영혼 추수기에 접어들었다고 확신했고, 제한된 자금과 거친 재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일했다. 그들의 메시지는 영적 능력의 실증적 전시(demonstrable displays)에 의해 뒷받침받으면서 회심자들을 얻었다. 반세기 동안, 그들은 전 세계적으로 상당한 크기의 교단들과 기관들을 창출해 내었다. 성장의 1960년 이후의 부산물은 은사주의운동(the Charismatic movement)이었지만, 그 운동은 근본적으로 다른 운동(fundamentally different movement)이었다. 은사주의자들은 오순절주의의 몇 가지 원리들을 받아들였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최초 증거 방언 교리에 내재 된 신학적 엄격함을 거부했다. 이들 주류 교단 사람들은 비록 급속하게 성장하는 오순절주의자들에 대한 관심에의해 탄생했지만, 신학적으로는 파함의 선배들인 성령시대의 구복음주의적 제자들[무디, 토레이, 그리고 심슨 등]과 더 유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20세기 교회 생활 안에 은사의 다양성 수용은 오순절주의자들에게 증가되는 존경심을 가져다 주었고, [복음으로] 전지구 정복이라는 그들의 목표를 강화시켰다.

    찰스 파함은 또한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는 오순절적 성장의 복잡한 기원들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성경주의(biblicism)의 지적 뿌리들과 긴밀하게 융합된 성결신학, 신유, 그리고 전천년주의들은 사회적 세력들과 필적하는 세트였다. 성결 신학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동시대의 삶의 양식으로부터 결별을 전제했다. 미국 사회 안에서 신유에 대한 매력은 육체적이고 심리적인 고통의 존재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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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운동들과 후보자들이 사회적 정의에 대한 일종의 영적 번역에 자리를 내주면서 전천년주의는 정치적 불만을 뒤따라 번성했다. 파함과 그의 오순절 계승자들은 그래서 이념적이고 사회적 세력들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전통적인 성경 주석의 권위와 초대교회의 관례에 뿌리박은 신학을 추구했다. 그 원천들에 대한 그들의 해석은 글로솔라리아에 의해 증거되는 성령침례에 대한 경화된 신학적 규정을 확증하기 위한 그들의 헌신적 경험과 융합되었다. 그들은 그동안 줄곧 사회적 유동성 안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필요를 충족시킬 메시지를 전파했다. 그 사회적 논제는 오순절 기원들 안에서 강력하게 커지고 있다. 모든 미국인들은 19세기 안에서 실망과 급속한 변화의 세력들에 의해 다양한 정도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종교적 진리에 대한 확신과 결합되었을 때, 그 세력들은 하나님을 접촉하려는 증가하는 의욕을 제공했다. 종합해 보자면, 그것들은 오순절주의와 같은 현상이 어떻게 많은 사람들을 끌어당겼고 위안을 얻게 했는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마지막으로, 찰스 파함은 개인적인 종교적 정신의 결단을 상징한다. 그는 연약하게 태어났지만 수많은 육체적 장애들을 극복하여 역경을 이겨나가는 인간 능력의 한 사례가 되었다. 종교적 현상 유지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독자적인 신유 사역을 위해 확고한 교단적 구조의 안정성을 떠나 완전한 영적 경험을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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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덕에 대한 당황스러운 풍문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국 중서부의 상당히 큰 지역에서 명백한 명성을 유지했다. 그리고 오랜 후에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은 종말적 선교를 위한 제노글로사에 대한 그들의 시각을 완화시켰지만, 파함은 하나님에 의해 영감된 사자들에 의한 지구 정복에 대한 낙관주의를 흔들림 없이 붙잡았다. 용기 있고, 혁신적이고, 타협하지 않고, 그리고 도전적이었던 그는 미국 복음전도자들 세대들의 존경할만한 특성들의 한 본보기이다.

    자기가 종말적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을 확신했던 찰스 파함은 성령침례에 대한 급진적인 새로운 경험을 20세기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규범적인(normative) 것으로 과감하게 선포했다. 그는 19세기 후엽 전도자들에 의해 약속되었던 종말적 능력에 대한 기대들을 흡수하고, 성령침례의 최초 증거로서 방언 교리의 신학적 확고함으로써 그의 새로운 경험을 동력화했다. 궁극적으로, 첫 삼 세대에 걸친 그 새로운 운동의 성공은 파함을 중요한 역사적 인물로 만들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것은 파함에게 그의 메시지에 대해 확신시킨 종교적 동기이다. 쉽게 정의하기 가장 어려운 동기부여 요소인 이 충동은 그 어떤 종교적 예언자에게도 근본적인 것이다. 이 종교적 충동은 그 예언자가 논리를 무시하고 잦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견뎌내게 해준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그의 삶은 평범한 인간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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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뚝 솟은 삶에서는 그 어떤 어려움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고, 모든 성공은 커지는 것 같다. 찰스 파함은 오직 어려움, 실의, 그리고 실망의 일생 가운데서 성공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 이전과 그 이후의 다른 사람들처럼, 그는 오직 성공만을 인정했다. 하나님과 이야기할 때, 성공은 예상 밖의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방법으로 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