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thel Bible School, the Birth Place of Pentecostal Movement:
Its Relationship with American Bible School Movement
이창승
2023년 7월 8일
I. 들어가는 말
오순절운동은 한 성경학교(a Bible school)에서 시작되었다. 오순절운동은 어떤 부흥회나 교회가 아닌, 성경을 읽고, 읽은 것을 실천하도록 훈련시켰던 한 성경학교에서 탄생했다. 오순절운동의 아버지 찰스 F. 파함(Charles F. Parham)은 1900년 말엽에 미국 캔사스주 토페카에 벧엘성경학교(Bethel Bible School)를 세워 학생들을 모집하여 훈련시켰으며, 그 성경학교에서 옛 세기가 가고 새로운 세기가 열리는 1901년에 오순절운동이 발생했다. 오순절운동의 요람은 벧엘성경학교였다.
그곳에서 오순절운동이 시작되었던 벧엘성경학교의 모태는 1880년대부터 시작된 미국 개신교 성결주의/보수주의/근본주의 성경학교운동(the Bible School/Institute Movement)이었다. 벧엘성경학교는 성경학교운동의 흐름 안에서 설립되었으며,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과 모더니즘적 교육 기관의 대체라는 그 성경학교운동의 특징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벧엘성경학교의 유일한 교과서는 성경, 그것도 모국어인 영어 성경이었는데, 성경학교운동 안에 있던 성경학교들의 제일 중요한 교과서도 역시 영어 성경이었다. 벧엘성경학교나 성경학교운동 안의 성경학교들은 성경에 대한 편집비평 양식비평 등 역사비평이라는 고등비평을 거부하고 정경 그대로의 영어 성경을 교과서로 삼았다. 벧엘성경학교는 그 모더니즘적 신학교육기관들을 대체하기 위해 성경학교들을 설립했던 성경학교운동의 맥락 안에서 탄생했다.
그런데 넓게는 한국 신학계에서 미국 성경학교운동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좁게는 한국 오순절 신학계에서 오순절운동을 촉발시켰던 벧엘성경학교에 대한 연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경학교운동에 대한 연구도 거의 없고, 벧엘성경학교에 대한 연구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 개신교도들은 미국의 성경학교운동에 대해 잘 알 수 없었고, 한국의 오순절주의자들은 벧엘성경학교가 성경학교운동 안에서 잉태되고 탄생했다는 것을 인식할 수조차 없었다. 성경학교운동에 대해 잘 몰랐으니, 벧엘성경학교가 그 안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본 논문은 19세기 말엽부터 발생한 미국 성경학교운동과 20세 초에 일어난 오순절적 성경학교운동의 모든 세세한 역사를 살펴보지 않고 다만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을 기반으로 삼는 모더니즘적 교육 기관에 대한 ‘대체설’과 ‘보완설’ 등 그 설립목적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그것과 오순절운동을 촉발시킨 벧엘성경학교 사이의 연관성을 규명해 보려 한다. 그럼으로써 ‘모더니즘에 대항하는 사관들을 길러내던 성경학교운동은 벧엘성경학교의 모태였으며, 벧엘성경학교는 오순절운동의 요람이었다’는 논지와 씨름해 볼 것이다.
II. 기존의 성경학교운동 연구들: 대체설과 보완설
성경학교운동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은 그 관점에 따라, 특히 기존의 모던적 교육기관들과의 관계성에서 보자면, 크게 ‘대체설’(Substitution Theory)과 ‘보완설’(Complement Theory)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본 장에서는 먼저 보다 넓은 성경학교운동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후에 오순절 성경학교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개관하기에 앞서 성경학교운동을 정의해 보자. 엘론에 의하면, 성경학교(Bible school/institute/college)들은 개인적 경건과 성별된 봉사를 강조하는 교과와 보조 교과를 갖춘 성경에 대한 광범위한 학습을 특징으로 하는 고등 교육기관들이다. 성경학교운동은 미국의 제 3 차 대각성 시기 동안 발생했다. 초기 성경학교들은 부흥과 선교 운동의 산물로서 또한 그것들을 위한 촉매로서 출현했다. 그런 초기 성경학교들은 1882년에 심슨(A. B. Simpson)에 의해 설립된 나약 선교 훈련 학교와 1886년에 무디(D. L. Moody)에 의해 설립된 무디 성경 학교를 포함한다. 이들 초기 성경 학교들은 19세기 말엽의 이십 년 동안 그리고 20세기 초엽의 삽 십 년 동안 북미 대륙에 걸쳐 번식했던 다른 그런 학교들의 특징과 이유의 기원을 대표한다.
이런 성경학교운동에 대한 연구는 1930년에 시작되었다. 쿡(J. W. Cook)은 그의 석사 학위 논문 “성경학교운동”(The Bible Institute Movement)을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노스웨스턴 복음주의 신학교(Northwestern Evangelical Seminary)의 대학원에 제출했다. 비록 성경학교들은 미국에 거의 오십 년간 존재해왔었지만, 그리고 수천 명의 사역자들과 선교사들을 훈련시켜 왔었지만, 쿡은 분명 성경학교의 역사, 영역 그리고 목적에 관해 공식적 연구를 수행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후에 레니스 리드(Lenice F. Reed)가 1947년에 위튼 대학(Wheaton College)에 동일한 주제로 석사학위 논문을 씀으로써 쿡의 연구의 대열에 합류했다. 두 연구들은 이후의 학자들의 연구의 견고한 기반이 되었다.
1947년 이래로, 성경학교운동의 역사에 관한 학위논문들과 단행본들이 써졌다. 그것들 대부분은 쿡과 리드의 연구들처럼 비평적이기(critical) 보다는 묘사적(descriptive)이었다. 예외적인 것은 버지니아 브레레톤(Virginia Brereton)의 “하나님의 군대 양성: 1880년에서 1940년까지의 미국 성경학교”(Training God’s Army: The American Bible School 1880-1940)이다. 이 비평적 연구는 컬럼비아 대학교(Columbia University)에 제출된 박사학위 논문이었으며, 성경학교운동의 전반적인 역사와 설립이유를 제공한다. 이것은 분명 이 미개척분야에 있어서 표준적인 연구다. 이 연구가 다른 연구들과 다른 것은 브레레톤이 외부인의 관점, 즉 그 어떤 성경학교도 다녀보지 않은 역사가로서 쓴다는 것이다. 그는 성경학교운동이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보수주의/근본주의적(conservative/fundamental) 운동이었고, 성경학교들은 기존의 모더니즘적 신학 대학들과 세미나리들을 대체하기 위해 설립되었다고 분석했다. 브레레톤의 견해는 ‘대체설’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교육학에 집중한 실천신학자 조다난 N. 티그펜(Jonathan N. Thigpen)의 관점은 단지 묘사적이거나(descriptive) 비평적이기(critical) 보다는 자신의 규정처럼 해석적(interpretive)이다. 그는 왜 성경학교운동이 시작되었는가, 왜 성경학교가 번성했는가, 그리고 왜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들의 창설자들이 품었던 것과 사뭇 다른 학교들로 변했는가에 관심이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성경학교운동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 한다. 티그펜은 성경학교들이 처음부터 평신도 지도자 훈련을 목적으로 제한된 재정적 역량 하에서 설립되었다고 주장한다. 티그펜은 성경학교들이 기존의 대학들과 세미나리들을 대체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고, 현장의 긴급한 필요를 채우기 위해, 즉 대학들과 세미니라를 졸업한 전문적인 목회자들과 평신도 사이의 틈을 메우는 평신도 지도자 양성을 위해, 그 학교들을 보완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온전한 체계를 가진 대학들과 세미나리를 세울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과정적으로 세워졌다고 본다. 티그펜의 견해는 ‘보완설’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티그펜의 보완설보다 브레레톤의 대체설이 초기 성경학교의 모습에 더 부합하는 것 같다. 성경학교운동은 브레레톤이 정확하게 갈파하는 것처럼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보수주의/근본주의의 교육운동이었다. 그리고 성경학교들은 모디너즘에 물든 대학들과 세미나리들을 대체하기 위한 보수주의/근본주의의 효과적이고 적합한 교육기관이었다. 브레레톤은 “근본주의자들은 몇 예외를 제외하고 성경학교들을 대학들과 세미나리들의 대체로 여기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왜 그가 그런 말을 했는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피상적으로 보면, 브레레톤이 대체설을 택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의 글을 잘 들여다보면 그 말은 역설적인 것으로 오히려 대체설을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브레레톤은 초기 성경학교 설립자들도 전체적인 체계를 갖춘 대학이나 세미나리를 세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고 보았다. 그들이 그런 희망에도 불구하고 대학이나 세미나리를 세울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그렇게 하려면 자기들의 “교육적이고 종교적 요구사항들”을 포기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요구사항들은 모더니즘적 교육체계, 예를 들면,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을 가하지 않을 것 등을 포함한 것이었다. 브레레톤은 그 설립자들이 그런 자기들의 요구사항들을 “포기하지 않고도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면(and get them accredited without abandoning their educational and religious requirements), 그들은 대학들과 세미나리들의 전체적 체계를 세웠을 것이다”라고 썼다. 즉, 대학교 세미나리들을 세우려면 그런 신학적 요구사항들을 포기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들은 설혹 대학과 세미나리를 설립할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들을 세우지 않았을 것이고, 성경학교라는 새로운 교육 시스템을 그것들의 대안으로 새롭게 고안하고 설립했다는 것이다.
티그펜은 바로 이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놓쳤거나, 그가 모더니즘적 교육 체계를 선호하기에 이점을 의도적으로 간과하는 것일 것이다. 티그펜은 설립자들이 대학과 세미나리를 세우고 싶었지만, 그럴 역량이 부족해서 그 역량에 맞추어 보다 열악한 교육 기관을 세웠고, 그 후에 세월이 흐르며 그럴 만한 역량이 생겼을 때 처음 가졌던 열망대로 성경학교를 대학이나 세미나리로 전환시켰다고 보았다. 물론 브레레톤도 “일반적으로, 그들은 19세기 초엽에 이런 규모의 일을 위한 재정적 출처들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성경학교는 가능한 한 빨리 신실한 사람들을 훈련시켜야 한다는 긴박한 욕구를 가졌지만 제한된 재정을 가졌던 집단들에게 만족스러운 교육 수단을 제공했다”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지엽적이고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티그펜의 ‘보완설’ 시각으로 보면 시간이 흐르며 성경학교들이 모더니즘적 대학이나 세미나리들로 전환된 것은 보완이라는 초기의 임무를 마친 후 이룬 진화적 발전이며 바람직한 열망의 늦은 성취이다. 반면에, 브레레톤의 시각으로 보면, 성경학교들의 모더니즘적 대학이나 세미나리들로의 전환은 ‘대체’를 위해 초기 설립자들이 놓은 길로부터의 탈선이며 초기 설립자들의 열망으로부터의 변질이다.
오순절적 성경학교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는 2008년에야 수행되었다. 그 해에 필립 더글라스 채프맨(Phillip Douglas Chapman)은 “전 세계를 위한 전체 복음: 1880-1920, 미국 오순절주의 안의 성경학교 역사”(The Whole Gospel for the Whole World: A History of the Bible School Movement within American Pentecostalism, 1880-1920)라는 제목의 논문을 미시간 주립대학교에 제출하여 평생교육학 전공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채프맨은 내부자 겸 외부자의 입장에서 오순절 성경학교 역사를 연구했다. 그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 소속 교회에서 성장하며 학부를 오순절 성경학교(미주리주 스프링필드에 있는 Central Bible College)에서 마쳤으며, 그러나 석박사 과정/원부를 다른 흐름들의 학교에서 마쳤다. 또한 그는 정통 오순절주의 관점을 연구의 바탕으로 삼았다. 그는 “오순절적”(Pentecostal)이라는 용어를 사도행전을 근거로 성령침례에 방언이 동반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규정했다. 채프맨은 오순절적 성경학교의 기원을 벧엘성경학교에 두었다.
그리고 채프맨은 성경학교운동이라는 보다 큰 맥락 안에 오순절적 성경학교들을 놓고 방대한 자료들을 찾아 연구했으며, 오순절적 성경학교에 대한 알버트 심슨의 영향력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채프맨은 모든 북미 개신교 부흥운동은 고등 교육 기간들의 설립이라는 결과를 낳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1882년에 알버트 심슨에 의해 뉴욕에 설립된 첫 성경학교인 The Missionary Trainning College for Home and Foreign Missionaries는 성결운동의 결과물이라고 분석했다.
그런데 성경학교 설립 목적에 대한 채프맨의 견해는 브레레톤 보다는 티그펜의 견해에 가깝다. 그는 첫 성경학교가 폭발적인 국내외 선교를 위한 평신도 일군들을 긴급하게 메우기 위해, 세미나리 교육을 받은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의 틈(the gap between seminary-trained clergy and the laity)을 메꾸기 위해 세워졌다고 보았다. 채프맨은 북미 성경학교들을 세 가지 범주로 분류했다. 하나는 성결주의적 성경학교(Holiness Bible School), 다른 하나는 오순절적 성경학교(Pentecostal Bible School), 또 다른 하나는 근본주의적 성경학교(Fundamental Bible School)다. 그는 근본주의적 성경학교의 범주에 무디가 1886년에 세운 무디 성경 학교(Moody Bible Institute)를 포함시켰다. 그리고 근본주의적 성경학교는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학교로 보았다. 즉, 그는 성결주의적 그리고 오순절적인 성경학교들의 특성에서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이라는 성질을 의도적으로 제외시켰다. 그럼으로써 채프맨은 전체 초기 성경학교가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으로 모더니즘적 대학들과 세미나리들을 대체할 새로운 교육체계로서 등장했다고 본 브레레톤의 견해를 삼분의 일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좁혀 놓아버렸다. 이런 면에서 채프맨의 견해는 모더니즘과의 관계성에 있어서 브레레톤과 티크펜의 중간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채프맨은 모더니즘과의 대결을 제외시킨 보완설적 관점에서 오순절운동의 요람인 벧엘성경학교를 보았다. 그럼으로써 채프맨은 고등비평을 기초로 삼는 모더니즘에 대한 거센 저항과 거부라는 설립자 파함과 벧엘성경학교의 가장 중요한 국면을 파악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그 이후의 오순절적 성경학교들의 그런 진면목을 인식하지 못했다.
II. 모더니즘적 학교 대체로서 초기 성경학교들
성경운동이 시작될 무렵에 미국에는 기존의 세미나리들과 학생들이 많이 존재했었다. 1880년에 미국에는 122개의 신학 세미나리들(theological seminaries)이 있었으며, 그 세미나리들에 등록한 학생이 5,242명이었다. 그해 세미나리 졸업생들은 719명이었다. 졸업생의 대부분은 직업적 사역의 최상위로 진출했다. 1900년에는 다른 이십오 개의 세미나리들이 설립되어 총 147개가 되었다.
그런데 성경학교와 같은 새로운 교육체계와 교육기관이 필요한 이유는 무었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 티그맨과 채프맨은, 간단히 말하자면, 제 3 차 부흥운동, 성결운동이 폭발적으로 많은 평신도 사역자들의 공급을 급박하게 요구했는데 기존 신학교육기관들의 졸업생들만으로는 그 수요를 채울 수 없어서 새로운 보완 교육기관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반면에, 브레레톤과 엔로(Ralph Enlow) 등은 그 이유를 그런 공급의 급박성에 대한 보완에 두지 않고, 모더니즘에 반발하고 모더니즘적 신학교육 기관을 대체할 교육기관의 필요성에 두었다.
성경고등교육협회(the Association for Biblical Higher Education, ABHE) 회장 엔로에 따르면, 성경학교 설립자들은 신학적 표류, 영적 불안, 그리고 세속화시키는 영향력에 반응하면서 다양한 문화적 그리고 교회적 흐름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19세기 말엽에, 북미의 신학 교육과 신학적 학문성은 벨하우젠(Wellhausen)의 문서 가설에 의해 예시되는 유럽 스콜라주의와 계몽주의적 합리주의를 수용해 왔었다. 소위 고등비평(higher criticism)과 그것의 신적 계시의 이적적 성격을 포함하는 이적들의 선험적 거부의 동반은 새로운 인식론적 그리고 방법론적 정설(the new epistemological and methodological orthodoxy)이 되었다. 과학계는 다윈의 자연 선택설은 즉각적이고 최근의 신적 창조에 대한 문자적인 성경 이해를 지성적으로 옹호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왔다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을 종말적 현상으로 해석한 증가하는 수의 구복음주의적 교회들과 교단들은 복음 전파에 있어서 종말적 긴박성과 실용주의에 보다 더 강조를 두는 스코필드 관주 성경에서 대중화된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를 수용했다. 모더니즘이 빗어낸 희망이 보이지 않는 세상을 끝장낼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 내재된 능력이 아닌 전적 타자에 의해서만, 즉 위로부터의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인식에서 급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포함하는 전천년주의가 발흥했던 것이다.
형태와 기능에 있어서, 성경학교들은 무미건조한 지성주의와 학문적 인습에 반항했다. 그 대학들의 교과과정은, 일반적으로 비학문적인 사람들에 의해 발전되었고, 경건성과 실천적 사역 계발을 강조했다. 그 대학들은 종종 성경을 연구의 중심 주제이자 대상으로 삼고 기독교인 증인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동원하려는 확고한 방침 위에 세워졌다. 한 반동 운동(a reactionary movement)으로서, 그들의 교과과정은 전형적으로 그 상대인, 스콜라적 유럽인들과 지성적 폭과 교양에 대한 식민지적 사고에 뿌리를 박은 세속적이고 기독교 교양 대학의 교과과정 인습과 아주 달랐다.
샌딘에 따르면, 성경학교는 “근본주의의 본부”(The headquarters of Fundamentalism)이었고, 근본주의의 생존은 성경학교들에 빚졌다. 성경학교는 미국 보수주의 개신교도들의 학교였다는 것이다. 이 성경학교 운동의 힘과 지구력 대부분은 근본주의-구복음주의적 전통 자체로부터 나온다. 그 전통 안에서 어떤 강력한 선교적 힘이 특별하게 왕성한 교육적 노력들을 고취시켜왔다. 근본주의자들이 개신교 교단들과 기관들에 대한 통제의 주도권 장악에 실패하자, 그들은 그 교육 기관들이 자유주의자들, 심지어 불신자들의 수중에 떨어졌다고 선언했다. 1910년으로부터 로스앤젤레스의 스튜워트 형제들은 새로운 지성적 풍토에 대한 반발로 본격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근본주의”를 선언하기 위해 고안된 『근본주의』(The Fundamentals)를 출판하기 시작했다. 사실, 근본주의자들의 글에서 가장 우려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고등비평(the higher criticism)의 결과가 예수를 사람들로부터 떼어놓는 것일 것이라는 염려였다.
교단 주도권 장악에 실패하자,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몸담았던 교단들에서 나왔다. 오순절주의자들은 다수의집단들에서 나왔다(come out). 그리고 성결주의자들은 반대에 부딪히자 감리교와 장로교를 떠났다. 이들 집단들에는 상당한 차이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대학교들과 대학교의 영향을 받은 세미나리들에 의해 대표된 모더니즘적 지성 조류들에 반대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집단들은 다음 세대의 “건전한” 종교적 리더들과 기독교 사역자의 훈련을 위한 새로운 교육 기관들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했다.
그러나 국내외 선교 현장에 재정을 쏟아붓느라 새로운 대학교들이나 세미나리들을 세우고 운영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구복음주의 진영 재정의 부족 안에서 성경학교(the Bible school)는 가장 유용한 고등교육 형태가 되었다. 성경학교 설립에는 보다 적은 재정이 들었다. 대부분의 초기 성경학교는 입학을 위해서 고등학교 졸업 정도의 수준만을 요구했다. 초기의 교원들은 대부분은 전문적인 교육자들이 아니었고, 종종 시간제 고용인들이나 자원봉사자들이었다. 일반적으로, 성경학교는 가능한 한 빨리 신실한 사람들을 훈련시켜야 한다는 긴박한 욕구를 가졌지만 제한된 재정을 가졌던 집단들에게 만족스러운 교육 수단을 제공했다.
초기의 많은 성경학교들은 소집단들의 노력으로 설립되었다. 그 이외에는 초기 성경학교들의 설립은 거의 구복음주의(Old Evangelism)를 추구하는 보수적 개인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구두수선공이었던 무디(Dwight Lyman Moody)처럼 평신도로 세상의 일을 하다가 회심하고 어떤 모더니즘적 대학이나 세미나리를 졸업하지 않고 풀타임 전도 사역자들이 되었다. 그들은 회심 후 성화 또는 신유와 같은 보다 영적인 경험을 가졌다. 그리고 물론 모든 설립자들은 열렬하게 성경을 읽는 사람들(a fervent student of the Bible)이었다.
무디는 성경에 대한 소위 고등비평(higher criticism)을 무시해 버렸다. 그는 한 기자에게 말했다. “당신은 성경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미치고 있는 고등비평의 영향에 대한 저의 생각을 알고 싶으신가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최근의 고등비평가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유대 광야에 여섯 달 동안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들 안에서 자유주의의 흥왕을 인식하면서, 주머니칼을 들고는 초자연적인 것 또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 저 부분을 베어 내는 교역자에 대해 경고했다.
무디는 기독교 신앙의 근원인 성경을 약화시키는 그 어떤 것도 참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근원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복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무디는 말씀(the Word)인 성경의 설교가였다. 그는 열심히 성경을 읽었고 그 내용에 통달했다. 그의 설교들은 그의 집회에 참석했던 보통 사람들의 용어로 말해진 성경 이야기들로 구성되었다. 그의 설교의 주요 주제들은 성경에서 발견되는 것들이었다. 성경에 없으면, 믿을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반면에 성경에 있다면, 그것을 믿는 것에 의문을 달 수 없었다. 그는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이 정보를 믿을 수 있을까요? 단지 성경 때문입니다. 말씀인 성경은 우리의 안내책이요 교과서입니다. 만약 제가 성경에 의해 인정받지 못한 말들을 한다면, 저를 믿지 마십시오. 성경은 유일한 규칙입니다. 성경을 따라, 오직 그것을 따라 사십시오.”라고 설교했다.
1873년과 1882년에 영국에서 복음주의적 집회들을 인도하는 동안, 무디는 그라탠 규니스(Dr. H. Grattan Guinness)의 사역을 접하게 되었다. 규니스는 1872년에 “동런던 국내외 선교학교”(the East London Institute for Home and Foreign Missions)를 설립했었다(Cook 1930, 11). 이 “학교”(institute)는 또한 “할리 하우스 성경 훈련 학교”(the Harley House Bible Training Institute)라고도 알려졌다. 그 학교는 무디가 보다 더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 신실한 남자들과 여자들을 반모더니즘적으로(anti-modernistically) 훈련시킬 생각을 하도록 도전했다.
무디가 시카고의 그의 고향 마을에 일종의 학교를 시작하는 꿈을 꾸고 있을 때, 오늘날 The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denomination)의 설립자로 알려진 심슨(A. B. Simpson)은 뉴욕 시에 남자와 여자 청년들을 위해 성경과 기초적 사역 기술들을 가르치는 훈련반들을 시작시키고 있었다. 심슨은 뉴욕 극장의 공간을 세내어 1882년에 그의 반들을 시작시켰다. 일 년 후, 심슨은 그의 학교 “The Missionary Training College for Home and Foreign Missionaries and Evangelists”를 설립했다. 그 학교는 후에 뉴욕, 나약(Nyack, New York)으로 이전했고, 간략하게 나약 대학(Nyack College)으로 계명했다.
심슨이 그 학교를 세운 이유들 중에 가장 핵심적인 것은 기존의 모더니즘적 대학들과 세미나리들을 대체하자는 것이었다. 엔로가 잘 파악한 것처럼, 비록 심슨이 모더니스트와 근본주의의 충돌이 일어나기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19세기 초엽에 이미 후에 근본주의의 성격이 된 투쟁성과 분리주의(separatism)를 확실히 드러냈었다. 그는 “성령께서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글에서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며 고등비평에 대항해 성경, 즉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의 편에 설 것을 독려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준을 낮추고 자유분방한 관점인 고등비평에 대항해, 우리는 순전하고 권위 있고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서 있습니까? 다른 모든 이름들을 대항해, 우리는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의 인격, 신성, 영광, 그리고 전적으로 충분한 은혜를 위해, 예수 이름의 능력을 증명하면서 서 있습니까?
그리고 심슨은 1911년에 『옛 신앙과 새로운 복음들: 기독교와 현대사상에 대해』라는 책을 펴냈다. 그는 그 책에서 진화론, 성경 비평학(biblical criticism), 그리고 신학적 자유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는 그런 관점과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higher criticism)을 받아들이고 있는 기존의 학교들, 대학들, 그리고 세미나리들을 비난하고, 그 모더니즘적 기관들을 대체할 새로운 교육기관들을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
비록 그가 그의 학교를 위해 “대학”(college)라는 이름을 차용하기는 했지만, 심슨의 마음에 있었던 것은 1800년대 후반의 표준에 의한 모더니즘적 대학 교육이 아니었다. 1883년 6월에 출간된 한 잡지 기고문에서, 심슨은 그의 이 학교를 위한 교육 비전을 상세하게 밝혔다.
이 학교는 어떤 학문적 교육을 목표로하지 않을 것이며, 전적으로 성경적 훈련, 그리고 실제 사역을 위해 어떤 특수하고 가장 주의 깊은 준비를 위한 것일 것이다. 이 학교는 남자와 여자 모두를 학생으로 받을 것이며, 과정을 마치면 모든 졸업생들에게 졸업장과 증명서를 수여할 것이다. . . 학교의 목표는 정규적인 학문적 교육을 받지 않은, 그리고 받고 싶지 않은 헌신된 남자와 여자에게 자격을 주기 위한 것이다. . . 학생들에게는 대도시가 제공하는 큰 사역지에서 집회들의 리더로서, 시찰자로서 실제적인 선교 사역에 종사하게 됨으로써 배운 원리들을 시험하고 실천할 최상의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심슨이 밝힌 그 학교의 설립목적은 비학문적, 즉 반모더니즘적인 것이었다. 심슨은 그 학교가 “어떤 학문적 교육(a scholastic education)을 목표로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그가 언급한 “학문적 교육”이란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을 기반으로 삼는 모더니즘적 교육’을 의미하는 것이다. 심슨은 이점을 다시 반복한다. 그는 다시 한 번 더 그 학교의 목표는 “정규적인 학문적 교육을 . . . 받고 싶지 않은(do not wish to receive) 헌신된 남자와 여자들”에게 자격을 주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모더니즘에 함몰된, 소위 학문적 교육의 위험성을 사전에 인식하여 의도적으로 그런 교육을 받기를 거부한 사람들에게 실제 신앙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참된 성경적 교육과 훈련을 받을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티그펜은 이런 심슨의 대안학교 설립 비전을 보완적인 “평신도 훈련”을 위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는 이 심슨의 언급을 “무디와 다른 사람들이 합류하게 된 심슨의 비전은 근본적으로 국내와 국외의 지역 교회의 사역을 위해 평신도를 훈련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평한다. 그러나 티그펜의 ‘보완설’보다는 브레레톤의 ‘대체설’이 모더니즘에 완강하게 대항했던 심슨의 일관적인 사상과 행적의 핵심에 보다 더 부합한 것일 것이다.
물론 초기의 성경학교는 큰 부흥으로 인해 감당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커진 회중이나 증가된 사역들을 담당해낼 사역자들을 가능한 한 빨리 그리고 많이 배출해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세워지기도 했을 것이지만, 이 목적은 모더니즘적 학교들의 대체라는 핵심적인 목적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었다. 고등비평을 적용한 성경주석 등의 모더니즘적 교육과정을 배제하면, 한 사역자를 기본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해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교육과정이 필요한 것도 아닐 것이기 때문에 모더니즘적 학교들보다 성경학교들은 보다 더 빠른 시간에 사역자들을 배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위트머(S. A. Witmer)는 1964년에 이런 부차적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첫 미국 성경학교들은 의도적으로 비전통적인 기관들로 시작되었다. 그 학교들은 인간의 필요를 위한 기독교적 동정에 반응하여 그리고 대위임령 수행이라는 실천적 목적을 위해 존재하기 시작했다. . . . 전통적인 세미나리들은 국내와 국외의 사람들의 거대한 필요를 위해 충분한 사역자들을 준비시키는 데는 턱없이 부족했다. 더욱이, 그 직무는 전문적인 목회자만으로는 수행되기가 너무도 컸다. 많은 훈련받은 평신도들에 대한 긴박한 필요가 있었다.
이런 훈련받은 남자와 여자들에 대한 “긴박한 필요”는 시카고에서 한 학교를 시작시키려는 무디의 마음에도 있었다. 1886년 초엽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무디가 손에 모자를 들고 시카고 아베뉴 교회(the Chicago Avenue Church) 뒤편의 공터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무디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었을 때, 그가 말했다. “한 훈련학교를 세우도록 이 땅을 내게 주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며칠 후, 무디는 지금 “사이를 채우는 사람”(the gap man)이라고 알려지고 있는 설교를 했다.
나는 우리에게 “틈 메우는 사람들”(gap men)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 사람들은 평신도와 사역자들 사이의 틈을 메꾸기 위해 훈련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역자들과 함께 그들의 삶을 기꺼이 바칠 남자와 여자들을 길러내야 합니다.
티그펜은 무디의 이런 비전을 이룰 훈련받은 남자와 여자들을 “훈련받은 평신도”로 해석한다. 그는 “무디의 비전은 전문적인 교역자가 아닌 평신도 훈련에 분명하게 초점을 맞추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무디가 꿈꾸었던 “틈 메우는 사람들”(gap-men)은 사실 평신도들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목회자인 무디 자신도 모더니즘적 학교에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평신도 출신, 비모더니즘적 목회자였다. “틈 메우는 사람들”은 성경학교에 입학 당시에는 대부분 평신도였겠지만, 성경학교를 졸업하면 평신도가 아닌 목회자 또는 지도자가 되어 기존의 목회자와 지도자들과 함께 사역하였을 것이다. 티그펜처럼 해석하자면, 모더니즘적 대학들과 세미나리들도 평신도를 위한 것이다. 그 입학생들 대부분은 평신도일 것이기 때문이다.
무디의 성경학교는 근본적으로 모더니즘적 대학들과 세미나리들을 대체하기 위해 세워졌다. 그 성경학교는 평신도 사역자를 양성하기 위해 그리고 단지 역량에 맞추기 위해 그것들보다 질을 낮추어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무디의 성경학교는 칸트의 불가지론적 인식론을 통해 성경을 찢어발기는 고등비평에 항거하여 성경 중심의 보수적 혁명이라는 거사를 위한 사관들의 양성을 위해 설립되었다. 그래서 무디 성경 학교(Moody Bible Institute)는 브레레톤의 평가처럼 그야말로 반신앙적, 반그리스도적 모더니즘을 무찌를 용감한 군대를 지휘할 장교들을 길러내는 “근본주의의 사관학교”(West Point of Fundamentalism)였다.
다수의 학자들은 1800년대 말에 성경학교들이 출현한 것은 독일 고등비평, 다윈적 진화론, 신학적 자유주의, 그리고 사회복음 등과 같은 기독교의 가치들과 상충되는 온갖 신학적 관념들이 세미나리들 안으로 침투하는 것에 대한 구복음주의적 교회의 직접적 반응에 의한 것이었다고 생각해왔다. 1927년에 데이비드 브리드(David Breed)는 “하나님께서 드와이트 무디를 영혼구원이라는 체계적 사역을 소홀히 하는 안수받은 목회자들을 꾸짖으시려고 일으키셨던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어떤 중요한 문제들을 경시하는 세미나리들을 꾸짖으시려고 성경학교를 일으키셨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채프맨은 이런 근본주의자들과 모더니스트들의 충돌은 1920년대에야 발생했으므로 그런 대체설은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런 충돌은 사실 1920년대에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그 충돌은 이미 1800년대에 시작된 것이다. 모더니즘에 반기를 든 사람들은 1878년 뉴욕 성경예언대회에서 근본주의의 주장을 담은 14개 조항으로 된 나이아가라 신조가 채택됐고, 1895년에 14개 조항을 5개 조항으로 축약한 ‘근본주의 5개 조항’을 채택했다. 이런 사실은 채프맨 스스로도 부분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는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성경학교들을 성결적 성경학고, 오순절적 성경학교, 그리고 근본적 성경학교라는 세 가지 범주로 나누고 근본주의적 성경학교의 범주에 무디가 1886년에 세운 무디 성경 학교(Moody Bible Institute)를 포함시켰다. 그리고 근본주의적 성경학교만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학교로 보았다. 그러나 성경학교의 근본주의적 성격은 대부분의 초기 성경학교에 내재되어 있었다.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이 성결운동과 오순절운동으로 나타났고, 그 반발 세력은 교단들을 세웠는데 그것에 성경학교들이 큰 몫을 담당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반발 세력은 1910년대에 “근본주의”라는 큰 세력을 이루게 된 것이다. 어네스트 샌딘은 1970년에 근본주의의 뿌리들(The Roots of Fundamentalism)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는 그 책에서 근본주의는 1800년대 초의 영국과 미국의 전천년주의와 성경 무오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브레레톤은 공격적인 근본주의가 본격적인 진영을 갖추기 전에 근본주의적 요소들이 이미 초기 성경학교운동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보았다.
심슨과 무디의 노력은 1886년부터 1915년까지 시작된 성경학교들의 쇄도의 시작들이었다. 이 삼십 년 동안, 서른 두 개 이상의 성경학교들이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이 학교들은 지리적 스팩트럼 뿐만 아니라 신학적 스팩트럼을 가졌었다. 그 학교들 중에 많은 학교들이 비록 대학들이나 세니마리들로 변질되었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비올라 대학교(Biola University), 노스웨스턴 대학(Northwestern College), 고든 대학(Gordon College) 토코아 폭포 성경 대학(Toccoa Falls Bible College) 그리고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와 같은 현대의 고등 교육 기관들은 모두 이 기간에 성경학교로 시작되었다.
1930년에 그 성경학교들은 한 집단으로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특징들을 갖고 있었다. 1) 기본 신학에 있어서 전심으로 복음전도적. 2) 그 교과과정의 핵심은 영어 성경 공부. 3) 실천적 기독교 봉사 강조. 4) 세계 선교 강조. 5) 남자와 여자들을 목사들이나 선교사로서 “전임 기독교 봉사”를 위해 훈련. 이러한 특징들은 초기의 성경학교의 특징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거의 동일한 것일 것이다. 교과과정의 핵심이 “영어 성경 공부”였다는 것은 초기 성경학교들이 고등비평을 배격하고 영어로 번역된 정경(The Biblical Canon)을 본문으로 삼아 학생들에게 성경을 읽히고 공부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성결주의자이기도 했던 무디와 심슨이 모더니즘의 인간중심적 고등비평과 신학에 반발하고, 성경 중심적 성경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을 훈련시킨 것에는 그들의 성령침례를 통해 부여되는 능력과 은사에 대한 경험들이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힘이 아닌 위로부터 부여되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능력을 부여받았으며, 다른 성도들에게 그 능력을 받기를 권했다. 심슨은 성결주의자 윌리엄 보드만의 『보다 높은 차원의 삶』(The Higher Christian Life)이라는 책을 읽은 후 1874년에 개인적인 성령침례(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를 경험했다.
Swartzentrover.com | Boardman - The Higher Christian Life - Preface
그 소책자를 자세히 읽고 있을 때, 어떤 새로운 빛을 보았다. 주 예수께서 자신을 생생하고 모든 것에 족한 현존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미래의 위험으로부터 구하시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삶의 싸움을 싸우게 하셨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를 의롭다하신 분이 우리를 성화시키기 위해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영을 가로질러 밧모섬에 있던 요한에게 오셨던 그리스도처럼 실제적인 존재가 지나가셨다. 그 순간부터 어떤 새로운 비밀이 나의 삶의 매력, 영광, 그리고 힘과 간증이 되었다. . . . 그 이래로 이것은 나의 분투, 성격, 윤리적 특성, 도덕적 선이 아닌, 다만 ‘내가 살아있으니, 너희도 또한 살지니라’라고 말씀하시는 살아계시는 분에 대한 끊임없는 의존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령침례에 대한 한 설교에서 성경이 성령침례를 불처럼 묘사한 것을 해석하며 “불(fire)은 능력의 큰 에너지 공급원”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성령도 모든 영적 능력의 근원이며, 그분 홀로 우리의 삶에 영향력을 부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심슨은 성령은 성령침례를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능력을 부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슨은 성령침례는 회심 이후(subsequent)에 할 수 있는 한 경험이라고 믿었다. 그에게 성령침례는 성결한 삶을 살게 할 뿐만 아니라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부여한다.
심슨 뿐만 아니라 무디도 또한 성령침례를 경험했고 모든 신자들이 그 경험이 필요함을 믿었다. 무디는 두 여성 성도들의 권고로 봉사를 위한 성령의 능력을 받기를 간절하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1871년 무렵에 그 성령침례를 경험했다.
뉴욕시에 있던 어느 날, 오, 참으로 멋진 날이었다! 나는 그것을 묘사할 수 없다. 그것을 언급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그것은 형용하기에는 너무나 거룩한 경험이다. 바울은 십 사 년 동안 말해보지 못했던 경험을 했었다. 나는 단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신을 드러내셨고, 하나님께 그분의 손이 나에게 계속 머물러 달라고 기도할 만큼 그분의 사랑을 경험했다. 나는 다시 설교하러 갔다. 그 설교들은 그 전의 설교들과 다른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새로운 진리들을 말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듣고 수백 명이 회심했다.
무디는 “어떤 의미에서, 그리고 어느 정도, 성령은 모든 신자 안에 거하신다. 그러나 다른 은사가 있다. 그 은사는 봉사를 위한 성령의 은사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그 은사를 추구하지 않아서 능력이 없는 사람과 함께 일하시지 않는다고 말했다. 무디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것과 성령께서 우리 위에 계시는 것은 다른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구별은 신자 안에서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내주사역과 신자 밖에서 성령의 능력을 부여하는 성령침례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신자들에게 “우리 모두는 그것이 필요하다. 그러니 그것을 받을 때까지 밤낮 쉬지 말자.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는 위로부터 능력을 받기까지 쉬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간구하자”라고 권고했다.
이렇게 성경학교들을 설립한 무디와 심슨 등 웨슬리적 또는 개혁주의적 성결주의자들의 인본주의적 모더니즘에 대항하여 위로부터 부어지는 회심 이후의 역사로서 능력이 부여되는 성령침례에 대한 이해와 경험은 이후 찰스 파함의 벧엘성경학교 설립과 그곳에서 오순절운동의 탄생의 모태와 영양분이 되었다.
III. 모더니즘 교육기관 대체로서 오순절운동의 발생지 벧엘성경학교
성경학교들은 오순절주의자들을 포함하는 미국 보수주의 개신교도들의 학교였다. 오순절운동은 보수주의/근본주의 안에 있었다. 근본주의자들은 세대주의적 은사중단론을 내세우며 은사지속론을 주장하는 오순절주의자들을 꺼려했지만, 오순절주의자들은 자신들을 근본주의자들이라고 생각했다. 미국 오순절진영에서 가장 큰 교단인 하나님의 성회는 설립기인 1914년 그리고 ‘세계기독교근본주의연맹’(World’s Christian Fundamentals Association)이 결성된 1919년부터 근본주의연맹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은사지속론 문제로 1928년에 근본주의연맹에서 탈퇴했고, 고립을 면하려고 1942년에야 비로소 국제복음주의연맹에 가입했다. 따라서 1901년부터 1928년까지 초기 오순절주의 성경학교들은 보수주의/근본주의적이었다. 신학적으로 오순절주의자들은 그들의 종말론적 관점에 있어서 다른 집단들보다도 더 근본주의에 가까웠다.
브레레톤은 성경학교 설립자들의 종교적 토양 네 가지에 오순절주의를 포함시켰다. 그는 그 네 가지 토양을 “회심, 성경, 신유, 전천년주의, 그리고 오순절주의”라고 보았다. 제3차 대각성운동이 대부분 성결운동에 의해 주도되었고, 성결운동으로부터 오순절운동이 발생했다. 그리고 성결운동과 오순절운동은 크게는 근본주의 안에 있었다. 브레레톤이 그 토양으로 제시한 “회심, 신유, 전천년주의”는 성결운동의 사중복음에서 온전한 성화가 제외된 것이다. 성경읽기 중심으로 성결운동이 발생했고, 웨슬리안 성결운동과 개혁주의적 성결운동이라는 성결운동의 두 흐름 중에서 웨슬리안적 성결운동으로부터 오순절운동이 발생했으며, 따라서 “회심, 신유, 전천년주의”라는 주제들은 오순절운동의 사중복음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그리고 초기 오순절적 성경학교는 다른 성경학교들처럼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을 거부했다.
채프맨은 성경학교운동이 20세기에 오순절주의를 형성시켰다(shaped)고 보았다. 그는 그런 주장의 증거로서 현대 오순절 운동이 찰스 파함에 의해 캔사스주의 토페카에 설립되었던 벧엘성경학교(Bethel Bible School)에서 시작되었고, 오하이오 주 신시네티에 세워졌던 하나님의 성경학교(God’s Bible School)와 찰스 파함에 의해 텍사스 주, 휴스턴에 설립되었던 성경 훈련 학교(Bible Training School) 출신의 윌리엄 시무어가 로스앤젤레스의 아주사 거리에서 그 유명한 오순절적 부흥을 일으켰고, 그 이후의 오순절적 역사들이 수많은 성경학교들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그리고 이 오순절적 부흥의 불길이 셀 수 없이 많은 성경학교 설립자들과 교원들 그리고 학생들의 전도와 선교 노력들을 통해 전 세계로 번져나갔다는 것을 제시했다.
채프맨은 1880년부터 2008년까지의 오순절적 성경학교와 관련된 시대를 다음과 같이 다섯 시기로 나누었다.
제 1 기, 1880-1920, 성경학교운동의 출현
제 2 기, 1920-1945, 교단적 성경학교들의 발생
제 3 기, 1945-1980, 교양 교육의 성장
제 4 기, 1980-2000, 포괄적인 대학교들의 설립
제 5 기, 1995-2008, 실천적 사역 훈련의 재발
채프맨이 오순절적 성경학교의 기원을 벧엘성경학교에 두었는데도 불구하고 오순절적 성경학교운동의 출현을 1880년대부터 잡은 이유가 있었다. 그 시기에 설립되었지만, 1900년대부터 오순절주의로 돌아선 성경학교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채프맨은 성경학교들을 세 가지 범주로 나누었고, 오순절적 성경학교들을 근본주의적 성경학교들과 나누어 따로 다루었다. 그는 성경학교들을 “성결주의 성경학교,” “오순절주의 성경학교,” 그리고 “근본주의 성경학교”로 크게 나누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모더니즘적 학교 대체라는 성경학교의 설립 목적을 근본주의 성경학교에만 가두어 버리고, 성결주의 성경학교와 오순절주의 성경학교의 설립 목적에서는 모더니즘적 학교 대체라는 목적을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다.
그러나 채프맨의 의도적 위치설정과는 달리, 초기 오순절 성경학교, 좁혀서 오순절운동의 발생지인 찰스 파함의 벧엘성경학교는 반모더니즘(Anti-modernism)에 있어서 무디나 심슨의 성경학교들과 동일한 맥락 안에 있었다. 파함의 벧엘성경학교는 무디나 심슨의 다른 초기 성경학교들처럼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을 기초로 삼는 모더니즘적 성격을 철저히 배격한 성경공부에 집중하고 오순절운동의 발생지가 되었다.
성결운동가였던 찰스 파함은 성결운동가 프랭크 W. 샌드포드(Frank W. Sandford)의 “성령과 우리 성경 학교”(Holy Ghost and Us Bible School)를 벧엘성경학교를 위한 가장 중요한 모델로 삼았으며, 그 외에도 심슨 등의 성경학교들을 또한 참고했다. 프랭크 W. 샌드포드(Frank W. Sandford)는 1893년에 자유 침례교에서 전도양양한 이력을 버렸고, 성결운동이라는 변종의 독립 사역자가 되었다. 그는 파함처럼 무디와 하이어 라이프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신유와 전천년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미국 그리스도인들은 재림 전에 세상을 복음화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로서 자연스럽게 그 “신부”의 후보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종말의 시작 전, 마지막 세대들 동안 불신자들을 회심시켜야 할 큰 책무를 수행해야 했다. 샌드포드는 재림이 매우 임박한 때에 신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직무를 더 잘 수행하게 만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은사를 받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 은사는 성령침례이며, 그것은 선교사들과 전도자들에게 특별한 능력과 능변을 갖게 할 것이었다. 1894년에 샌드포드는 활발하게 그 경험을 추구했고, 8개월 간의 자기 평가 후 수동적 수령을 주장했다. 그 경험은 샌드포드의 사역에 새로운 모델을 제공했다. 1895년 가을에 그는 실로(Shilo)를 세웠다. 더함 북부에 세워진 실로에는 전도자들과 선교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성령과 우리 성경 학교”(Holy Ghost and Us Bible School)가 들어섰고, 그곳은 그의 간헐적인 해외 복음 전도 여행들을 위한 기지였다.
파함은 샌드포드의 운동을 전적으로 지원했다. 나아가 파함은 실로에 있는 샌드포드의 성경학교에 등록하기로 마음먹었다. 1900년 6월 하순에 메인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떠난 그는 시카고를 지나서 미시간 불바르에 있는 도위의 큰 규모의 사업과 “복음전도자 켈리”(Evangelist Kelly)가 이끄는 보다 적은 규모의 “개안 사역”(Eye-opener Work)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는 또한 오하이오, 신시네티에 있는 “말론의 사역”(Malone’s work)과 뉴욕, 나약(New York, Nyack)에 있는 심슨(A. B. Simpson)의 성경학교(크리스찬 미셔나리 얼라이언스)를 살펴보기도 했다. 여름 중순에 실로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서 6주를 보내며 샌드포드의 강렬한 활동을 살펴보았다. 파함에게 실로의 방식이 잘 맞았고, 강연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그는 특별한 성령침례가 깊이 헌신한 신자들에게 주어진다는 것과 그 은사는 재림 전 마지막 날들에 세계 복음화를 위해 주어졌다는 샌드포드의 확신을 공유하게 되었다.
찰스 파함은 1900년 9월에 토페카로 돌아왔다. 그는 자기가 이 늦은 비의 목격된 나타남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확신했다. 그는 의식적으로 실로에서 보았던 것을 자신의 학교의 모델로 삼았고, 그가 방문했던 심슨 등 다른 성결운동 지도자들의 것들과 같이 중요한 사역들을 설립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파함은 또한 자신의 소명은 독특한 것이라고 확신했고, 토페카 학교가 이 종말의 부흥을 보이는 데 있어서 보다 더 큰 성취를 이루기를 기대했다. 그는 여전히 자기가 살펴보았던 그 모든 운동에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직 그 절정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 년 후 그는 복귀 직후 토페카 신문기자들에게 표현했던 것보다 덜한 낙관으로 자신의 북부 여행을 상기했다.
연구를 위해 우리는 깊은 종교적 사상을 가진 기관들을 방문했다. 그 기관들은 성령의 권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런데 이 모든 기관들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과 일치하는 데 실패했다. 주의 깊게 연구한 후, 우리는 이 시대에 아무도 개인적인 오순절의 권능(the power of a personal pentecost)을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과 일치하게 받지 못했다는 확신을 갖고 캐나다와 동부를 아우르는 여행에서 돌아왔다. . .
1900년 가을에서부터 1901년 가을까지 파함의 평가의 변화는 그 새로운 성경학교의 교장으로서 그의 경험을 반영했다. 1900년 10월부터 1901년 4월까지 여섯 달은 심지어 샌드포드와 같은 급진적 성결운동 지도자들로부터 그를 충분하게 분리시켰을 것이다. 그의 지배적인 성결운동 이론가들의 성령론으로부터의 분열의 조각에서 오순절운동이 나왔다. 파함은 1900년 10월 즈음에 토페카에 벧엘성경학교를 설립했으며, 이 벧엘성경학교에서 오순절운동이 발생했다.
오순절운동의 발생지, 파함의 벧엘성경학교는 새롭게 설립된 또 하나의 모더니즘적 신학교육기관이었는가? 아니면, 모더니즘적 신학교육기관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역자들에 대한 수요를 보완해주기 위한 보다 열등한 학교였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심슨과 무디의 성경학교들처럼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을 기반으로 삼는 모더니즘을 배격하고 모더니즘적 대학과 세미나리들을 대체하기 하기 위해 세워진 사관학교적 학교였는가? 단정적으로 말하자면, 파함의 벧엘성경학교는 모더니즘 교육 기관을 대체하기 위한 학교였다. 이런 단정은 그 학교의 설립자 파함의 성경에 대한 경외와 고등비평에 대한 비판과 완강한 거부, 그리고 벧엘성경학교가 유일한 교과서로서 성경, 그것도 영어 성경을 택했다는 것에 그 근거를 둔다.
벧엘성경학교가 대체설에 부합했는지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보완설에 부합했는지를 살펴보자. 벧엘성경학교는 전문적 교역자들을 길러내는 대학과 세미나리를 보완하여 오직 평신도 사역자들을 길러내기 위해 성경학교를 세웠다는 티그펜과 채프맨의 주장했던 것과 부합했는가? 이 질문에 대답은 “아니다!”이다. 파함은 “늦은비: 사도적 또는 오순절 운동의 기원 이야기”라는 글을 썼다. 그는 그 글에서 벧엘성경학교의 입학대상자들을 제시했다. 파함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1900년 10월에 캔사스주 토페카에 그 성경학교를 열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진 것을 팔아, 나누어 주고, 공부와 기도를 위해 그 학교에 기꺼이 들어오려는 모든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초청했다.
설립자 파함이 밝힌 벧엘성경학교의 입학대상자들은 “그리스도인”(Christians)이라고 표기된 평신도에 제한되지 않았고, 안수받은 목회자들(ministers)도 포함했다. 벧엘성경학교의 학생들의 구성은 평신도 일색이 아니었고 평신도와 목회자가 혼합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벧엘성경학교는 성경학교들이 평신도만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티그펜과 채프맨의 보완설에 부합하지 않았다.
이제 벧엘성경학교가 모더니즘적 대학과 세미나리를 대체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주장의 근거를 찾아보자. 그 근거를 좁혀서 초기 성경학교운동의 공통적 특징들 가운데 영어 성경 공부에 중점을 두었던 것과 동일하게 벧엘성경학교가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을 거부한 영어 성경 공부 중심의 교과과정을 개설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서 살펴보자.
벧엘성경학교와 성경적 초대주의(Biblical Primitivism)
파함에 의해 설립된 벧엘성경학교에서 시작된 오순절 운동의 신학의 가장 근저에는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Sola Scriputra)의 원리를 따라 혹은 교회사 속에서 오직 성경을 따라 생활했던 흐름을 따르면서 성경의 축자적인 영감을 강조하고, 신앙과 실천에 대한 유일한 기준으로서 성경의 완전한 권위를 수호하고자 하는 ‘성경적 초대주의’(Biblical Primitivism)가 자리 잡고 있다. 원시주의(primitivism; 원시공동체의 이상을 찾자는 사상) 혹은 회복주의(restorationism; 원시공동체로 되돌아가자는 사상)를 연관시키면서, 이 회복주의란 “역사에서 삶의 타락 이전의 황금시대로 되돌아감으로써, 즉 이전 시대로 되돌아감으로써 역사를 부인하거나 역사적 실존의 연속성을 부인하는 것”이라 정의된다. 이와 맥을 같이하여 ‘성경적 초대주의’는 교회사가 발전의 맥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초대교회로부터 퇴보 내지는 변질되었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성경적 초대주의는 성경적인 초대교회의 모습을 회복하자는 ‘회복주의’(Recoverism) 혹은 ‘복구주의’(Restorationism)의 형태를 띈다. 그것은 이성의 한계 내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그 결과 성경에 나타나는 초월적인 사건들을 인간의 자기 투사나 신화로 전락시키려는 역사주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해 성경 속에서 증언하는 초대교회에서 발생했던 초자연적 사건들이 현대에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파함의 토페카의 벧엘 성경학교는 오직 성경을 교과서로 삼았었으며, 그 학생들이 만장 일치로 방언이 성령 침례의 최초의 증거임을 인정하게 된 것은 바로 철저한 성경 연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믿었고 곧 이를 직접 체험하게 됨으로써 현대 오순절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파함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성경의 오순절 경험을 현대에 회복하여 오순절적 경험으로 재경험하는 것을 오순절 운동의 모토로 삼았다.
사도행전 2장에서 제자들이 가졌던 동일한 경험을 여러분에게도 주십사고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우리는 여러분이 그와 동일한 경험을 한다면, 그와 동일한 증거(the same evidence)를 받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경험을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 . 우리가 주장하는 모든 것은 여러분이 성령침례를 받으면, 그것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경험과 일치할 것(it will correspond to the experience in the Second chapter of Acts)이라는 것입니다.
존 카펜터는 현대 오순절 신학의 전통을 크게 ‘성경적 초대주의’(Biblical Primitivism)를 기반으로 하는 복음주의 안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부르스 셀리(Bruce L. Shelley)는 복음주의에는 다음과 같은 7개의 그룹이 있다고 주장한다: (1) 개혁파 복음주의(크리스챤 리폼드 교회), (2) 복음주의(나사렛교회), (3) 오순절 복음주의(하나님의 성회), (4) 흑인 복음주의, (5) 평화파 복음주의(퀘이커), (6) 남부복음주의(남침례교회), (7) 독립교회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구복음주의 교회는 성경을 신앙의 유일한 권위로 받아들이고, 중생을 신자의 참된 표시라고 믿으며, 선교를 신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생각하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이 파함이 시작시킨 현대 오순절 운동은 부흥 집회나 캠프 집회가 아닌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벧엘성경학교에서 출발했으므로 오순절 신학은 그 기초가 감정적 경험이 아닌 바로 성경에 기록된 경험을 현대에 회복시켜 재경험하자는 성경적 신학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파함의 벧엘성경학교는 성경적 초대주의권 안에서 설립되었다.
파함의 문자적 성경 읽기
파함은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읽었다. 그러나 파함의 어렸을 때의 성경읽기는 비종교적인 환경에서 진행되었다. 첫째, 그의 부모가 비종교적이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부모는 종교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는 부모를 따라 교회에 나갈 기회나, 부모로부터 성경을 읽는 관점을 전해 받을 기회도 없었다. 둘째, 그가 살던 지역에는 교회와 주일학교가 없었다. 이런 교회의 부재는 13세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이런 비종교적 환경 속에서 성경을 읽었다.
파함의 비종교적 환경에서 성경읽기는 기존 신학의 틀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는 그런 비종교적 환경 속에서, 그의 말대로, “그 어떤 선입견도 없이, 신조들과 교리들이 의미하는 것에 대한 그 어떤 지식도 없이, 그것을 통해 바라볼 수 있는 그 어떤 전통적인 안경도 없이” 성경을 읽어 내려갔다.
파함의 비종교적인 상황 하에서의 성경읽기는 문자적 읽기, 나아가 자기 나름대로의 창조적인 성경읽기를 가능케 했다. 그의 지속적인 성경읽기는 그로 하여금 “성경을 구석구석까지” 잘 알게 만들었는데, 이때 그의 성경읽기는 “성경을 기록된 대로 읽었다”는 그의 진술처럼, 문자적이고 기성의 해석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은 읽기였다. “기록된 대로 읽었다”는 진술은 일차적으로 문자적으로 읽었다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기존의 해석적 틀에 영향을 받지 않은 읽기, 더 나아가 자기 나름대로의 창조적 읽기를 의미할 것이다. 물론 파함의 “기록된 대로 읽었다”는 말은 그의 성경읽기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읽은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파함 나름대로 성경을 읽었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파함의 문자적이고 창조적인 성경읽기는 성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기초를 두는 새로운 신학적 운동의 탄생을 가능케 했다. 그의 말대로, 그는 “성경을 기록된 대로 읽고, 그리고 선입견으로 물든 생각이나 해석들에 의해 휩싸이지 않음으로써 신학적 폭풍들을 뚫고 나갈 수 있었고, 돛을 찢어버리려고 그리고 그것을 오직 하나의 기관의 교리적 한계에 가두어 버리려고 애쓰는 목사들을 벗어날 수 있었다.” 즉, 그는 성경에 대한 문자적이고, 창조적 읽기를 통해 기존의 특정한 교리적 한계와 그 교리를 기초로 삼는 특정한 교단을 벗어나 새로운 오순절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파함의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 배격
요즈음의 소위 오순절 신학자라고 칭해지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은 성경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보수적이고 반-고등비평적(anti-higher critical)이었다는 점은 종종 지적되어 왔다. 1924년에 프로드샴은 오순절주의자들은 인간의 진화를 주장하며 성경 안에 기록된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비웃는 모더니스트들의 이론들에 동조하지 않으며, 성경의 절대 무오류(the verbal inspiration and the absolute inerrancy of Scripture)를 믿는다고 말했다. 오순절주의자들에게 성경적 기록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점에서 윌리엄 멘지스와 러셀 스피틀러가 잘 간파한 것처럼 오순절주의자들은 근본주의자들과 유사하게 성경을 전-비평적이고(pre-critical) 문자적으로 읽어왔다. 브리지스에 따르면 미 하나님의 성회 산하의 학교들의 설립자들도 역시 다윈적 진화 개념과 독일 고등비평에 대항했다. 오순절주의자들의 성경해석은 모더니티의 근간인 고등비평에 저항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오순절주의자들의 고등비평에 대한 반감이나 저항이 벧엘성경학교 설립자, 오순절 운동의 창시자 파함의 유산이었다는 점에 대해서 그리고 그 근거에 대해서는 정확한 언급이 부족했다. 심지어 소위 오순절 학자들 가운데는 초기 오순절주의가 자유주의 신학과 관계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파우펠은 오순절주의의 미래를 가늠하기 위해 오순절주의의 정체성을 논했다. 그는 자기 박사학위 논문에서는 오순절주의가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발생했다고 주장했었는데, 후에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의 자료들을 더 조사하면서 그와는 반대로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은 신학적 자유주의에 대한 그 어떤 의식도 없었다는 것을 발견했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오순절주의자들이 자유주의를 의식하기 시작한 때는 근본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의 논쟁이 극심해졌을 때였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과는 달리 오순절주의는 그 시작부터 자유주의의 고등비평을 거부했다.
파함이 확실하게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을 비판하고 완강하게 거부했다는 사실은 그의 글들에서 드러난다. 파함은 1891년부터 3년여 동안 사우스웨스트 캔사스 대학(Southwest Kansas Conference College)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다. 아마도 그는 이때 고등비평을 접했을 것이다. 그는 1901년 오순절 운동을 일으키고 그 다음 해인 1902년에 쓴 첫 책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서 고등비평(higher criticism)을 마귀의 입이라고 통렬히 비판하며, 고등비평가들(higher critics)을 “과학자”와 “불신자”와 함께 “동일한 족속들의 삼위일체”라고 평가했다.
파함이 이렇게 고등비평을 비난하며 거부하는 이유를 그의 글들 가운데서 유추해 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고등비평은 과학자들이나 불신자들과 함께 “전기, 중력, 공기, 열기와 한기 등의 보이지 않는 힘들을 시인한다.” 반면에 그들은 하나님의 개입에 의한 “이적적이고 초자연적인 것을 소리 높여 비난한다.” 이런 파함의 분석은 인간의 순수이성은 초월적인 것, 본질을 알 수 없다는 칸트의 계몽주의적인 불가지론적 이성관에 따라 성경의 초월적인 언급들을 초월적인 것이 개입될 수 없는 역사에 가공되어 첨부된 신화로 격하시키는 고등비평의 근본적 성격에 대한 것이다.
파함은 마귀가 고등비평이라는 입(the mouth of higher criticism)을 통해 요나의 이야기를 비웃는다고 판단한다. 아마도 그의 이런 발언은 고등비평이 요나서의 기록을 사실이 아닌 허구, 하나의 이야기적인 문학작품으로 격하시키는 것에 관한 것일 것이다. 파함은 고등비평이 요나서를 단순한 허구적 문학작품으로 격하시킴으로써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나의 이야기를 사실로 전제하고, 요나의 이야기를 “요나의 표적”(cf. 마 12:39-40)으로 삼아 자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부활을 설명하신 것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부활이라는 신성적 측면을 또한 허구로 만들어 버린다고 비판한다. 그에게 요나의 이야기는 그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라는 상부 구조적 가르침(the superstructural teaching)이 세워져 있기에 그것을 치는 것은 모퉁이의 머릿돌을 치는 것”이 된다.
파함은 이런 고등비평을 “불신앙으로 가는 대기실”(the ante-room to infidelity)이라고 빗대어 말했다. 이런 비꼼은 고등비평이 초월성과 예수의 신성을 파괴하여 결국은 불신앙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꼬집는다. 그에 따르면 고등비평은 신학교의 강의실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할 뿐만 아니라, 그런 신학교에서 배운 목회자들의 설교들에 심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 영향력은 “교회의 사역을 훼손시키는 것”이다. 그의 눈에는 “지옥의 불가지론적 도깨비들(agnostic imps of hell)이 고등비평의 모습으로 교회들의 설교단들을 차지하고 가능한 한 주님의 양들로부터 평안과 믿음의 모든 흔적들을 탈취하며 파괴하고 있다.” 그런 사악한 영향력은 과거 성경시대의 하나님의 초월적 역사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현재적인 강력한 하나님의 초월적 역사도 부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파함은 조만간 하나님께서 고등비평가들을 심판하고 형벌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고등비평가들은 “악한 자들”과 동등한 사람들이다. 그에 따르면,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는데, 재림 때 하나님께서 “‘영원한 복음 사역’(the everlasting gospel crusade)을 방해하는 모든 악한 자들과 고등 비평가들을 처리하실 것이다.”
파함과 성경의 영감성
파함은 성경의 신적 영감을 적극적으로 인정하였다. 그는 “성경의 신적 영감(Divine inspiration)은 . . . . 거의 모든 복음주의자들이 그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복음주의”는 오늘날의 고등비평을 수용하며 성경의 영감성을 격하시키고 의심하는 신복음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근본주의와 성격이 같았던 당시의 구복음주의를 거론한 것이다.
벧엘성경학교의 성경 중심 신학방법
초기의 다른 성경학교들처럼, 성경은 벧엘성경학교의 신학방법에서 첫 번째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런데 다른 성경학교보다도 더 파격적이게 파함의 성경학교의 교과서는 오직 하나였는데 그것은 바로 “성경”이었다. 파함은 그것이 당시로서는 비인습적이었고 비현실적이었지만 오직 예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회고했다.
1900년 10월 15일 우리는 캔사스주의 토페카에 후에 “벧엘 대학”(the College of Bethel)이라고 널리 알려지게 된 성경학교를 열도록 인도되었다. 그것의 독특한 특징과 가르침들은 그 지역 전역에 걸쳐 일간지의 주제가 되었다. 그 학교의 유일한 교과서는 성경이었다(Its only text-book was the Bible). 그것은 오늘날과 같은 세상에서는 비인습적이고(unconventional), 비현실적(impractical)인 것 같았겠지만 그 유일한 목적은 예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완전히 버리는 것이었다.
그 성경학교의 목적은 성경에 있는 갖가지의 것들을 머리로만 배우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아는 것이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주신 모든 명령을 문자적으로 순종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 목적은 문자적 성경 해석과 실천적이고 경험적 이해였다.
이 성경학교에서 우리의 목적은 성경에 있는 것들을 단지 우리의 머리로만 배울 뿐만 아니라 그것들 각각을 우리의 마음으로 아는 것이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모든 명령은 문자적으로 준행되어야 했다.
파함은 40여명의 학생들에게 “회개”, “회심”, “성별”, “성화”, “신유” 그리고 “재림”이라는 신학적 주제들에 관해 가르쳤다. 그리고 학생들은 1900년 12월에 그 주제들에 관한 시험을 치렀다. 그런데 한 가지 주제에 문제가 제기 되었다. 그것은 “성령침례의 성경적 증거(the Bible evidence of the Baptism of the Holy Ghost)는 무엇인가?”였다. 당시 성결주의 등 다양한 운동들은 성령침례의 증거로 “외치기”, “껑충껑충 뛰기”, “뛰어 오르기” 등등을 제시했다. 그러나 파함에게 그것들은 사도행전 2장이 제시하는 모습에는 무언가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파함은 학생들에게 성령침례의 증거를 성경에서 찾도록 과제를 내주었다.
12월에 우리는 회개, 회심, 성별, 성화, 신유 그리고 주님의 임박한 재림이라는 주제들에 관해 시험을 치렀다. 우리는 우리의 연구에 있어서 한 가지 문제에 봉착했다. 사도행전 2장은 어떤가? . . . 매우 다양한 단체들이 오순절적 침례(Pentecostal Baptism)를 받음에 대한 증거로서 서로 다른 것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나는 학생들에게 성령침례의 성경적 증거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열심히 연구하게 했다.
벧엘 성경학교의 학생들은 그 과제를 받고 성경과 씨름했다. 그리고 삼일간의 집회에서 돌아온 파함에게 연구결과를 제출했다. 그런데 40여명의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에 대한 답은 동일했다. 그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성령침례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는 곧 “방언”이라고 결론지었다.
나는 삼일 동안의 집회를 위해 캔사스 시에 가야만 했기 때문에 삼일동안 학교를 떠난 후 1900년 송구영신예배 인도를 위해 그 날 아침 학교로 돌아왔다. 아침 10시경에 나는 학교 종을 울려 학생들을 예배실로 모으고 숙제의 답을 제출하게 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 같은 대답을 했다. 비록 오순절적 축복이 내렸을 때 여러 가지 것들이 다양하게 나타났지만, 각 경우에 반박의 여지가 없는 증거(the indisputable proof)는 다른 방언을 말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날 저녁 약 75명의 사람들이 예배실에 모였다. 저녁 10시 30분경에 오즈만(Agnes N. Ozman)이라는 자매가 파함에게 자기 머리에 안수해주기를 요청했다. 그녀는 성령침례를 받아 해외선교지에 가고자 했다. 처음에 파함은 자신이 방언을 말하는 체험이 없었으므로 안수를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곧 예수 이름에 자신을 낮추고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파함이 몇 마디도 채 말하지 않았을 때 오즈만 양은 중국어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후 3일 동안 영어를 말할 수 없었다.
40명의 학생들을 포함한 약 75명이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였다. 강력한 영적 힘이 학교 전체를 덮고 있었다. 오후 10시 30분경에 아그네스 오즈만 자매가 자신은 해외선교지로 가고 싶기 때문에 성령침례를 받고 싶으니 자기에게 안수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처음에는 나 자신이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거절했다. 그러나 계속 요청을 받으며 나 자신을 낮추어 예수 이름으로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 내가 30마디도 말하기도 전에 영광이 그녀에게 떨어졌으며, 빛이 그녀의 머리와 얼굴 주위를 둘러싸는 듯 했다. 그리고 그녀는 중국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으며, 3일 동안 영어를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경험을 알리기 위해 영어로 글을 쓰려고 했을 때 그녀는 중국어를 썼다. 그 사진이 당시에 발간된 신문에 지금도 여전히 실려 있다.
파함을 비롯해서 그 놀라운 오순절적 능력의 회복의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다락에 있는 기숙사의 방에서 침대들을 들어내고 2박 3일 동안 밤낮으로 성령강림을 기다렸다. 1901년 1월 3일 파함은 토페카 시에 있는 자유 감리교회에서 간증집회를 한 후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그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면서 가장 놀라운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가 그 방의 문을 열었을 때 그는 그 방이 램프 빛보다 밝은 흰 빛으로 가득 찬 것을 보았다. 12명의 사역자들은 성령으로 충만해 다른 방언을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불의 혀(tongues fo fire)가 임했다. 파함이 한 테이블 뒤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그들은 “예수 나의 사랑”이라는 찬양을 적어도 여섯 가지 언어로 부르기 시작했다. 파함은 자기에게도 동일한 축복을 주시기를 기도했다. 그 때 그의 혀가 뒤틀리며 스웨덴어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다음 날 아침까지 여러 언어로 방언을 말했다.
방언현상은 파함의 사역이전에도 성결운동 현장 등에서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연구를 통해 “성령침례의 증거”가 “방언”이라는 신학적 원리가 세워지고 그 신학에 따라 기도하여 성경과 동일한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오순절적 방언을 경험한 것은 파함의 사역에서 처음 발생했다. 그럼으로써 현대 오순절 운동이 촉발되었던 것이다.
그 일련의 사건 속에서 벧엘성경학교의 신학방법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파함의 신학의 첫째 단계는 신학 주제를 선정하는 것이었다. 이 단계에서 파함은 “성령침례의 증거”라는 신학 주제를 학생들에게 제시했다. 둘째 단계는 그 주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이 단계에서 학생들은 오직 사도행전을 놓고 성령침례에 대한 증거를 찾았다. 그런데 이 성경연구는 고등비평을 가하지 않은 것이었다. 완강하게 고등비평을 비판하고 거부한 파함이 벧엘성경학교 학생들에게 고등비평을 가르치고 그 방법으로 성경을 난도질하게 했을리가 만무하다. 셋째 단계는 성경연구를 통해 그 주제에 대한 신학적 원리를 세우는 것이었다. 이 단계에서 학생들은 성경연구를 통해 “성령침례의 증거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는 신학적 원리를 세웠다. 넷째 단계는 그 성경적인 신학적 원리를 적용하는 것이었다. 이 단계에서 파함의 공동체는 그 원리를 적용하여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기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다섯째 단계는 성경적 원리를 경험을 통해 확증하는 것이었다. 이 단계에서 맨 처음 오즈만 양이 방언을 말하는 성령침례를 경험하고 이후 사역자들과 학생들 그리고 파함 자신도 그것을 경험하게 됨으로써 그들은 성경 연구를 통해 세웠던 신학적 원리가 올바른 것임을 확인했다.
파함의 벧엘성경학교가 성경을 유일한 교과서로 삼았는데, 그 성경은 영어 성경이었을 것이다. 벧엘성경학교의 교과과정에는 히브리어나 헬라어 원어 과목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벧엘성경학교의 성경의 역본은 영어역이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론 추론이 맞다면, 벧엘성경학교의 영어성경중심 공부 교과과정은 성경학교운동의 공통점인 영어성경공부 중심 교과과정과 일맥상통한다.
이렇게 벧엘성경학교는 보완설보다는 대체설에 부합하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벧엘성경학교는 모더니즘적 신학 교육기관들을 보완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다. 벧엘성경학교는 모더니즘적 공격에 대항하여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을 거부하고 성경공부 중심, 실천 중심의 대체 신학교육 기관의 설립을 목표로 삼았던 성경학교운동의 맥락 안에서 세워져 오순절운동의 발상지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학교운동은 벧엘성경학교의 모태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채프맨은 벧엘성경학교에서의 성령강림이 다른 곳에서와는 다른 독특한 점들을 분석했다. 첫째, 기존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성령강림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둘째, 비종교적인 지역 신문들이 이 경험을 세상에 알렸다는 것이다. 셋째, 경험자들이 파함을 중심으로 느슨한 조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넷째, 방언이 성령침례의 증거라는 것을 발견해 냈다는 것이다. 그가 파악한 벧엘성경학교의 특이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네 번째일 것이며, 이것은 그가 잘 파악한 것이다.
벧엘성경학교가 성경학교운동이라는 태반에 잉태되고 태어났음에도 다른 성경학교들과 다른 점은 벧엘성경학교가 성령침례의 증거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는 명제를 내걸음으로써 오순절주의라는 독특한 모습으로 자라났다는 것이다. 다른 성경학교들도 무디나 심슨의 경험과 신학을 따라 봉사를 위한 능력을 받기 위해 성령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으나, 그 학교들은 그 증거가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가르치지는 않았다. 이와는 다르게 벧엘성경학교는 성경공부를 통해 성령침례의 성경적 증거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는 신학적 명제를 세우고 그것을 경험함으로써 오순절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IV. 나가는 말
본 논문은 지금까지 미국 성경학교운동에 대한 기존의 ‘대체설’과 ‘보완설’을 살펴보았고, 심슨과 무디 등의 초기 설립자들이 고등비평을 수용하는 교육기관들을 대체하기 위해 고등비평을 배제한 영어성경공부 중심의 교과과정을 갖는 성경학교를 세웠다는 것에 집중했으며, 오순절운동의 발생지 벧엘성경학교를 그런 성경학교운동의 맥락 안에서 발견하고 그 양자 사이의 긴밀하게 닮은 관계를 도출해 내었다.
초기 성경학교는 고등비평을 기반으로 삼은 모더니즘과 이에 대항한 반모더니즘의 신학적 전쟁터에서 승리할 수 있는, 성령침례를 통해 위로부터의 능력을 부여받은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정병들과 사관들을 길러내기 위해, 모더니즘적 신학교육기관들을 대체하기 위해 세워진 사관학교들이었다. 이 사관학교들은 고등비평을 배제한 정경적 영어 성경 공부를 중심으로 실전에 강하게 사관생도들을 훈련시켰다. 찰스 파함이 설립한 벧엘성경학교는 이런 사관학교들 중에 하나였으며, 이 사관학교에서 오순절운동이 발생했다. 또한 질적 대체가 성경학교의 주요 설립 목적이었으며, 사역자의 단기간 대량 배출을 위한 보완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초기 설립자들은 온전한 모더니즘적 대학이나 대학교, 또는 세미나리를 꿈꾸었으나, 현실적인 긴박한 많은 사역자의 수요에 응하기 위해, 그러나 그것을 이루기 위한 재정적인 역량이 부족하여 그것들보다 열등한 성경학교들을 세우는 데 만족해야만 했다고 주장하는 보완설은 초기 설립자들의 비전과 능력을 왜곡시키고 격하시키는 것이다. 사실 초기 설립자들의 마음에는 모더니즘적 교육기관들을 대체하는 성경중심의 학교들을 세워 위로부터의 능력을 부여받은, 참된 복음을 전파하여 교회와 세계를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충성된 일군들을 길러내자는 원대한 비전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수 많은 장애물들을 극복하여 전진하며 그 비전을 이루어 갔다. 그 비전과 실천은 거대한 흐름을 이루어 운동이 되었다.
찰스 파함은 그 모더니즘에 대항하는 사관들을 양성하던 성경학교운동의 대열에 합류하여 벧엘성경학교를 세웠고 그 벧엘성경학교에서 오순절운동이 발발할 수 있었다. 찰스 파함은 무디나 심슨 처럼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을 비판하고 완강하게 거부하고 배격했으며, 벧엘성경학교에서 고등비평을 배제하고 오직 성경만을 교과서로 삼아 학생들을 교육하고 실천적으로 훈련시켰다. 파함은 벧엘성경학교 학생들에게 성령침례의 성경적 증거를 성경연구를 통해 찾으라는 과제를 내주었고, 학생들은 주로 사도행전 연구를 통해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는 답을 제출했으며, 이후 파함과 학생들은 방언을 동반하며 위로부터의 능력을 부여하는 성령침례를 실제로 경험하게 되었다. 이렇게 벧엘성경학교에서 현대 오순절운동이 발발했다. 그러므로 고등비평/역사비평을 대항하는 사관들을 길러내던 성경학교운동은 벧엘성경학교의 모태였으며, 벧엘성경학교는 오순절운동의 요람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학교들이 고등비평을 수용하는 대학이나 대학교 또는 세미나리로 전환되는 것은 진화적 발전이 아닌, 초기 설립자들의 학교 설립목적으로부터 탈선이나 그들의 비전의 왜곡, 악의적 수정, 또는 변질이다. 이제는 발전이 아니라 회귀가 필요한 상황이다. 무디와 심슨과 파함 등이 고등비평, 은사중단론 등 성경으로 회귀하는 것에 장애가 되는 것들을 제거하고, 성경과 독자 사이에 그 어떤 불순물도 제거하여, 순전한 성경적 믿음과 거룩한 삶과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부터 부어지는 봉사의 능력을 갈구하여 체험하고 성경학교들을 세워 사관들과 정병들을 길러내어 부흥의 파도를 일으켰던 그 정신과 능력에로 회귀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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