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Pneumatology of Luther
이창승
2006년 6월 5일
목 차
I. 서론 ---------------------------------------------------- 1
II. 성경과 성령 ---------------------------------------------- 1
A. 정경성의 기준이신 성령 ----------------------------------- 1
B. 성경을 통해 오시는 성령 ---------------------------------- 2
C. 성경해석의 중심이신 성령 --------------------------------- 3
D. 말씀을 선포하시는 성령 ----------------------------------- 4
E. 성경 박사를 만드시는 성령 --------------------------------- 5
III.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령 ------------------------------------- 6
A. 내재적 삼위일체 ----------------------------------------- 6
B. 경세적 삼위일체 ----------------------------------------- 7
IV. 그리스도와 성령 ------------------------------------------- 8
A. 성령으로 잉태되신 그리스도 -------------------------------- 8
B. 성령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 -------------------------- 8
C.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성령 ------------------------------ 8
D.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성령 -------------------------------- 9
V. 구원과 성령 ----------------------------------------------- 9
A. 율법의 기록자이신 성령 ----------------------------------- 9
B. 율법의 요구와 성령 -------------------------------------- 10
C. 마음에 계셔야하는 성령 ----------------------------------- 10
D. 성령의 증거와 가르치심 ----------------------------------- 10
E. 성령의 의 ---------------------------------------------- 11
F. 성령으로 난 사람 ---------------------------------------- 11
G. 믿음과 성령 -------------------------------------------- 12
H. 사랑과 성령: 감성과 성령 ---------------------------------- 13
I. 믿음과 성령의 자유 --------------------------------------- 14
J. 확신과 성령 -------------------------------------------- 14
VI. 성화와 성령 ---------------------------------------------- 14
A. 세 가지 영과 성령 --------------------------------------- 14
B. 성화자 성령 -------------------------------------------- 15
C. 선행과 성령의 자유 -------------------------------------- 15
D. 영적인 사람의 열매(o& karpoV" tou' pneumatikou')와
성령의 열매(o& karpoV" tou' pneumatov") ------------------------ 16
E. “성령의 처음열매”와 "성령 충만”: 성화의 시작과 완성 ------------ 17
F. 성령의 첫 열매와 육의 열매들 ------------------------------ 18
G. 성령의 싸움 ------------------------------------------- 19
H. 성령과 원죄 ------------------------------------------ 20
I. 성령을 떠남 ------------------------------------------ 21
J. 성령 모독 -------------------------------------------- 22
K. 성령을 잃음 ------------------------------------------ 22
L. 성령의 의분 ------------------------------------------ 23
M. 성령의 성화 사역의 도구 -------------------------------- 23
N. 성령의 구원의 서정적 사역 ------------------------------ 24
VII. 교회와 성령 ------------------------------------------- 24
A. 사람을 교회로 인도하시는 성령 --------------------------- 24
B. 교회 안의 성령 --------------------------------------- 24
C. 성령 안의 거룩한 교회 --------------------------------- 25
D. 교회의 모든 것을 효력있게 하고 창출하시는 성령 ------------- 26
E. 성령의 기름 부으심 ------------------------------------ 26
F. 유아 세례와 성령 ------------------------------------- 27
VIII. 성령 은사론 ------------------------------------------ 27
A. 은사이신 성령 ---------------------------------------- 27
B. 교회 안에서 발견되는 성령의 은사들 ----------------------- 28
C. 교황들이 가지고 있는 은사들 ---------------------------- 28
D.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영적 은사들을 주시는 성령 -------------- 28
E. 외적인 은사의 중단 ----------------------------------- 28
F. 충분한 은혜와 불충분한 은사 ---------------------------- 29
G. 안수와 성령 수여 ------------------------------------ 30
H. 내적인 영적 은사들 ----------------------------------- 30
I. 성령에 의해 행해지는 특별한 행위들 ----------------------- 30
J. 성령의 명령 ----------------------------------------- 31
K. 성령의 지혜 ----------------------------------------- 31
L. 판단력의 근원이신 성령 -------------------------------- 32
M. 성령 침례 ------------------------------------------ 32
N.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하도록 돕는 성령 --------------------- 33
O. 신자들을 깨우치는 성령의 은사들 ------------------------- 33
IX. 성령과 사단 ------------------------------------------- 33
X. 결론 ------------------------------------------------- 34
I. 서론
루터는 조직적인 성령론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성령론을 전체적으로 조직신학적으로 파악하는 데는 한계와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의 글들을 살펴보면 여러 다양한 말들 가운데서 그만큼 성령에 대한 언급들도 등장하는 것을 볼 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루터의 성령론은 주로 구원론과 관련되지만 구원론에만 머무르지 않고 조직신학의 다른 여러 주제들과도 관련되어있다. 루터의 성령론은 주로 구원론과 관련된다. 그러나 루터의 성령론은 이미 프렌터가 밝힌 대로 구원론적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또한 구원론에 있어서도 필립 멜랑히톤의 지도력 아래서 명확히 표현된 이신칭의라는 법정적 교리로만 루터를 이해하는 것은 이제 일방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루터교회는 1970년에 동방정교회와 대화하기 시작하면서 풍부한 성령론적 자료들을 찾기 위해 루터의 글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1970년에 출현하기 시작한 마네르마 학파는 당시까지 칭의(Justification)와 대칭되는 것으로 여겨졌던 “신화”(Deification, theōsis)를 루터에게서도 찾으려 한다. 그리고 최근 루터교 내에서도 구원의 성령론적 이미지인 “신화”를 루터에게서 찾고 있다.
성령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인간에게 역사하신다. 첫째는 보편적인 활동을 통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 그분은 하나님이 다른 피조물에게 하듯 그들을 유지하신다. 두 번째는 성령은 그리스도로부터 믿는 자에게 주어진다.
이 모든 것들이 성령의 사역이요 열매이다. 즉 아이를 낳고, 부인을 사랑하고, 정부에 복종하는 것들은 성령의 열매이다. 교황주의자들에 의하면, 이러한 것들은 육적인 것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피조물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II. 성경과 성령
A. 정경성의 기준이신 성령
루터는 야고보서가 정경성을 갖지 않는 이유들을 제시했는데, 그 이유들 중 하나가 야고보서가 “성령에 관해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처럼 루터는 성령에 대한 가르침을 어떤 책의 정경성을 가늠하는 척도로 여겼다.
B. 성경을 통해 오시는 성령
루터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나 인간의 행위와 공로 때문에 성령을 주시지 않고, 복음, 말씀을 통해 성령을 수여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복음을 통하여 성령을 주셨지 율법을 통하여서나 또는 그들 자신의 행위와 공로 때문에 성령을 주시지는 않았다.
또한 루터는 성령께서 도구, 방법인 성경을 통해 사람에게 오셔서 우리의 구원의 은총을 위해 가르치신다고 말한다.
그분[성령]은 이것을 내적으로 또한 외적으로―내적으로는 믿음과 다른 영적 은사들을 통해, 외적으로는 복음, 세례, 그리고 단의 성례를 통해 수행하신다. 이 세 가지 수단 혹은 방법을 통해 그분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구원의 은택을 위해 그리스도의 수난을 깨우쳐 주신다.
그러나 그 교회 속에서 성령은 보존하시고 교회를 통하여 말씀을 선포하시며 말씀으로 여러분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십니다.
루터에게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역사하신다(Spiritus operatur in verbo). 하나님께서는 외적인 말씀을 통해서만 성령과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은 먼저 외적인 말씀을 통하지 않고 결코 어느 누구에게도 그의 성령과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
루터는 성령께서 두 가지 방식으로 사람에게 오셨고, 오신다고 말한다. 첫 번째 방법은 “가시적인 모양”으로 오시는 것이다. 루터에게 이런 가시적인 성령의 오심은 불신자들에게 이적이나 방언을 통해 불신자들에게 표적을 보여주어야 했던 초대교회 시대에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교회가 성립된 후에는 성령의 가시적 오심이 그쳤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성령이 오시는 두 번째 방식은 가시적 표적이 없이 말씀을 통해 보내시는 것이며 초대교회 이후에 성령이 오시는 방식이다.
성령은 두 가지 방식으로 보내어진다. 초대교회에서는 분명하고도 가시적인 모양으로 보내졌다. 요단강에서 성령은 비둘기같이 그리스도께 임했다. 그리고 사도들과 다른 신자들에게는 불과 같이 임했다. 성령은 처음에 이런 식으로 오셨으며, 이는 초대교회에 필수적이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증거했듯이, 불신자들 때문에 교회가 많은 이적을 통해서 세워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말했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었다. 그러나 이적을 통해서 교회가 모여지고 확립된 후에는 성령의 가시적인 보내심이 더 이상 계속될 필요가 없어졌다.
둘째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영을 보내신다”고 여러 곳에 기록된 것처럼, 성령은 믿는 자들의 마음에 말씀을 통해 보내진다. 이런 오심에는 가시적인 모양이 없다. 외적인 말씀을 들음으로써 내적인 열정과 빛을 받게 될 때에 우리는 변화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며, 나아가서 새로운 판단력과 새로운 감정과 새로운 감동을 받게 된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 . . 성령은 선포된 말씀과 함께 오셔서 믿음으로 우리 마음을 정결케 하시며 우리에게 영적이 활동을 일으키신다.
루터의 이런 주장은 성령의 직접적 계시를 주장한 뮌쳐를 향한 것이었다. 토마스 뮌쳐(Thomas Müntzer)는 “어떤 사람이 그의 살아생전에 성경을 읽지도 듣지도 못했다 할지라도 성령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뮌쳐에게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 없이도 역사하신다(Spiritus operatur sine verbo). 그런데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성경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성령의 역사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린도 후서 3장 3절에서 6절을 근거로 성경의 문자적 의미보다 영적 의미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외적인 말씀에 대한 이성적 지식보다도 “살아 있는 말씀”인 하나님의 계시를 중요시했다. 영은 하나님 인식의 유일한 기초가 되고 성령이 홀로 인간의 심령을 움직일 때 단순한 문자로서의 성경은 외적인 형태로 머물게 된다. 뮌쳐는 성경은 하나의 증거를 주지만 신앙은 주지 못한다고 보았다. 반면에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인간의 육비에 그의 말씀을 쓰신다. 뮌쳐는 만일 성경을 읽지 못했다 해도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 후 바로 “비록 당신이 성경 한 권을 통째로 삼킬지라도,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오로지 당신은 날카로운 고통을 경험하여야 할 것이고, 이런 방법이 아니라면, 당신은 어떤 신앙도 가질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분리되어 있는가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을 성령을 체험한 옛 사람의 기록이라고 보았다. 루터와 뮌쳐는 서로의 방향으로 너무 극단으로 치우져 있었다. 루터에게서 공적 계시를, 뮌쳐에게서 사적 계시를 찾는다면 그들의 주장은 서로 충돌을 멈추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
C. 성경해석의 중심이신 성령
루터는 명확한 성경해석을 위한 전제조건은 성령의 내재라고 말한다. 루터는 성경의 명확성은 외적인 것으로서는 모호하거나 애매한 것이 없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 안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그 명확한 말씀이 모호하게 된다고 말한다. 루터는 그 마음의 상태를 좌우하는 것을 “성령의 내재”라고 본다. 그는 독자의 마음에 성령이 계시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성경이 명확해지기도 하고 모호해지기도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을 지니고 있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성경에 있는 것을 조금도 보지 못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 . . 성령은 모든 성경과 성경의 각 부분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
루터는 또한 성경 해석자가 성령으로부터 깨달음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할 수 없다며 성경 해석자의 전제조건을 말한다.
이 거룩한 찬가를 바로 이해하려면, 복된 동정녀 마리가아 성령에 의해 깨우침을 받고 알게 된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이 찬가를 읊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성령으로부터 직접 그러한 깨달음을 받지 않았다면, 아무도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할 수는 없다.
루터는 시편들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면서 그러한 기독론적 해석의 근거를 “성령의 증거”에 둔다. 그는 더 나아가 “성령이 그리스도가 되어 시편들에서 말하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이처럼 루터에게 성경해석의 중심과 주체는 바로 “성령”이시다. 그래서 그는 성령께서 이해력을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권면한다.
즉, 하나님의 어린 양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짊어질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무엇을 짊어지는가? 궤변론자들은 대답한다: 벌 받아야 할 것. 아주 좋다. 그러나 어째서 그리스도께서 벌을 받는가? 그리스도가 죄를 짊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그리스도께서 죄를 짊어지셨다고 성령은 시편 40편[:12]에서 증거한다: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도 많으므로”; 또한 시편 41편[:4]과 69편[:5]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편들에서 성령은 그리스도가 되어 말을 하고 있으며 자기가 죄를 지녔다는 것을 분명한 말로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하는 아드님을 통해 그분의 성령님을 주셔서, 당신을 비춰주시고, 당신을 인도하시고, 당신에게 이해력을 주시도록 당신의 골방에서 무릎을 꿇고 진정한 겸손과 진지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D. 말씀을 선포하시는 성령
루터는 말씀의 선포와 말씀으로 사람들을 교회로 그리스도께로 전도하는 것을 성령의 사역으로 돌린다.
그러나 그 교회 속에서 성령은 [여러분을] 보존하시고 교회를 통하여 말씀을 선포하시며 말씀으로 여러분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여러분을 거룩한 교회로 인도하여 기독교회가 선포하는 말씀을 여러분에게 선포함을 통해 거룩케 하십니다 . . . 성령께서는 복음의 설교를 통해 여러분을 교회로 인도하십니다.
교회를 통하여 성령께서는 설교하며 여러분을 불러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며 신앙을 여러분에게 불어넣으며 성례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어 이 땅에서 전적으로 자유롭게 되게 하십니다.
그러자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직책과 역사를 분명하게 정의하심으로, 또한 그들에게 사도들의 말을 통하여 성령께서 전세상에 죄를 깨닫게 할 것임을 말씀으로 답변하신다.
성령께서는 로마서 서두에서 바울을 통하여 이 심판을 선포하신다. 거기서 바울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모두 죄 아래 두고 복음이 하늘로부터 계시되었다는 것, 전세상은 이제 그 죄에 대한 책임 때문에 호소해야만 할 것을 말씀하신다[롬 1:18이하].
성령의 전도 사역에 대한 루터의 언급은 대단히 중요하다. 루터가 살던 시기는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되고 국교가 된 후 1200여년이 지난 때였다. 당시 기독교세계의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유아세례를 통해 그 자신의 신앙에 관계없이 공식적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래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여 신앙인이 되게 하시는 사도행전적인 성령의 강력한 사역이 거의 소멸된 상황이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기 전에는 신앙인들이 불신자들을 전도하기 위해 성령의 강력한 사역에 의지하였다. 그러나 일단 기독교가 국교가 되자 기독교세계(Christendom)가 된 제국 안에서는 적어도 공식적으로 불신자가 사라져버렸다. 예수 믿으라고 전도할 불신자들이 형식적으로 사라지자 신앙인들은 불신자를 전도하는 성령의 강력한 “은사적 사역”을 무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령은 주로 신앙인을 보다 성숙시키는 성화시키는 성령의 “성화적 사역”에 한정되게 되었다. 그런 상황이 더욱 깊어진 때에 루터가 “성령의 전도사역”을 언급한 것은 그 의미가 크다. “성령의 전도사역”은 훗날 국교를 거부하고 종교의 자유를 성문화하고 분파주의를 택한, 불신자와 신자가 뚜렷이 구분되는 신대륙 미국의 부흥운동의 전도운동에서 꽃을 피운다. 고전 오순절주의 지도자들은 “중생의 영”이신 성령을 자신의 사역에 의해 거듭난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성화의 영”이실 뿐만 아니라 강력한 능력으로 불신자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선교의 영”으로 대했다.
E. 성경 박사를 만드시는 성령
루터는 성경 박사는 오직 성령께서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성령께서 계층이나 연령, 직분에 상관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성경 박사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교황과 황제와 대학교들은 문학박사, 의학박사, 법학박사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하늘로부터의 성령 이외의 그 누구도 성경 박사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라.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 6[:45]에서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 . . 이제 성령께서는 붉은색이나 갈색의 비레타, 다른 장식들, 또는 그가 젊었는가 늙었는가, 평신도인가 사제인가, 수도사인가 속인인가, 독신인가 기혼자인가 대해서 묻지 않으신다. 아니, 성령께서는 옛날에 나귀를 탄 선지자에게 그 나귀를 퉁하여 말씀하셨다. 우리는 평신도이든 사제이든, 결혼한 자이든 독신이든 이러한 박사들을 가질 수 있을 자격이 되기를 하나님께 바란다.
III.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령
루터는 “우리는 신성과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이신 성령과 우리에게 주어진 분으로서 성령을 구분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 고백에서 내재적 삼위일체론적 성령과 경세론적 삼위일체론적 성령을 언급한 것이다. 이러한 루터의 언급은 과거의 루터의 성령론 연구가 도외시한 점이었다.
A. 내재적 삼위일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 중의 한 위이신 성령의 내향적(ad intra) 사역을 말한다. 루터는 “내재적으로 삼위일체”(Immanent Trinity) 하나님의 한 위격으로서의 성령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그는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고 믿는다. 이와 관련하여 루터는 세 위가 하늘에 거하신다고 말한다.
셋째로, 나는 성부와 성자와 함께 참된 한분 하나님이시며,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시며(proceeds eternally), 그러나 하나의 신적 본질과 본성 안에서 한 구별된 위이신 성령님을 믿는다.
그러나 여러분은 사도신경을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 있다는 사실을 기초로 하여 주요 부분들을 나누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성부 하나님을 믿고 성자 하나님을 믿으며 성령 하나님을 믿는데 이 분들은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나는 나의 전심으로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장엄한 조항인,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위격들은 본질적으로 한분 진정한 참 하나님, 하늘과 땅의 조물주이심을 믿는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그들과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거하는 하늘나라이어야 한다고 그들에게 직설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루터는 세례 형식과 관련해 성령을 삼위의 한 위로 인정하면서 동시에 성부, 성자와 더불어 삼위일체를 이루는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그는 세례와 관련해 세례 수행자가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네게 세례를 베푼다”라고 말하는 것을 “내가 행하고 있는 이것을 나는 내 자신의 권위로써 행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를 대신하여 행하는 것이다”라고 해석한다. 이때 그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을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해석한다. 즉 그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하나님이란 존재로 대체한 것이다. 이렇게 루터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한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그는 이러한 고백을 명백한 문장으로 정리하여 “성 삼위일체의 이름”이라고 말한다.
세례를 베풀 때 선포하는 말씀 자체가 이러한 것을 나타내준다: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네게 세례를 베푼다. 아멘.” 집례자는 “나는 나의 이름으로 네게 세례를 베푼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는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내가 행하고 있는 이것을 나는 내 자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를 대신하여 행하는 것이다 . . . 나는 이러한 견해를 기쁘게 채택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간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의식을 성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행하는 인간을 대리인으로 하여 성 삼위일체 자신에 의해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알 때 . . .”
B. 경세적 삼위일체
루터는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이신 성령의 외향적(ad extra) 사역을 말한다. 루터는 “경세적 삼위”(Economical Persons)에 대해, 즉 세계와 관련된 각 위의 특유 사역을 시간적, 순서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루터에게 “지금” 사역하는 위는 성령이시다.
성부가 나의 창조주이시며 성자가 나의 주이듯이 성령은 나를 거룩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나는 성부에게서 창조를, 성자에게서 구속을, 성령에게서 성화를 받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되 하나님께서 나의 창조주이심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되 그분이 나의 주이심을 믿으며, 성령을 믿되 그분이 나를 거룩케 하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창조하셨고 내게 생명과 영혼과 육신과 모든 선한 것들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육신을 통해 나를 자신의 주권 아래 두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교회 가운데 있는 말씀과 성례들을 통해 나를 거룩케 하시며 마지막 날에 우리를 온전히 거룩케 하실 것입니다.
창조는 오래 전에 있었고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의 직임을 성취하셨지만, 성령은 지금도 활동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죄사함은 아직까지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여전히 이것을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성령이 와서 그것을 그에게 가르쳐야 했습니다.
루터는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터툴리안의 “한 실체에 세 위격들”(Una substantia tres personae), 오리겐의 “질이 서로 다른 1위, 2위 삼위의 세 위격들”, 사벨리우스의 “한 위격에 세 기능”, 아리우스의 “조물주이신 성부의 한 위격에 피조물인 성자 성령의 상이한 본질”,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의 “한 본질에 세 본체들”(mia ou*sia trei" u&postasi")도 아닌 어거스틴의 “한 본질에 세 위격”(Una Essentia tres Personae)를 택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의 신적 본질과 본성 안에서 한 구별된 위이신 성령님”을 말한다.
IV. 그리스도와 성령
A. 성령으로 잉태되신 그리스도
루터는 그리스도를 마귀가 주장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셔야 했으며,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주가 되시고 나를 구속하기 위해 어떤 죄도 없이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나의 주가 되시기 위해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그분을 주장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나는 성경이 신성에 있어서 두 번째 위이신 성자, 홀로 참 사람이 되신, 인간의 협력 없이 성령으로 잉태되신, 순결하신 분 거룩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고 . . . 가르치시는 것을 믿고 안다.
B. 성령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의하면서 “성령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C.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성령
사람이 율법의 요구를 행하려면 마음속에 성령이 계셔서 기쁨으로 속박 받지 않는 사랑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주셔야만 한다. 문제는 어떻게 성령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실 수 있느냐이다. 루터는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다고 말한다. 루터는 이런 의미에서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의 첫 단락에서 말했듯이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다.
8장에서 바울은 이러한 싸움[육과 영의]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면서 육은 그들을 정죄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육과 영의 본질을 보여주고 영이 우리에게 자신의 성령을 주시는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것을 설명한다.
나, 그리스도는 아버지께로 가노니, 나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는 나, 바로 내가 그 사람을 위해 고난을 받았고 또한 높은 곳으로부터 성령을 그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리스도를 통한 성령수여”는 서방신학의 전통이었다. “필리오케”(Filioque)논쟁에서 이미 서방신학은 성령께서 “성부를 통해 그리고 또한 성자를 통해” 오신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동방신학은 “오직 성부”를 통해 오신다고 주장했다.
D.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성령
루터는 또한 성령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분으로 소개한다. 루터는 “인간의 영의 선포”와 “성령의 선포”를 대립시킨다. “인간의 영”은 사람이 행위를 통해 구원받는다고 선포한다. 반면에 “성령”은 사람이 자신의 행위 없이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선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주의 지위를 얻었으나, 그 주되신 그리스도의 사역이 감춰진 채 있다면 사람이 주께로 다가갈 수 없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열어서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시고, 사람들을 구원자이신 주님께 인도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주의 지위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나는 그 주되심에 다가갑니까? 만약 [그리스도의] 사역이 감춰진 채 있다면, 그것에 다가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감춰진 채로 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오셔서 누가 여러분을 구속하시는지를 전하시는 것입니다. 즉 성령께서는 여러분을 주께로 인도하십니다 . . .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성령에 의해 행해집니다. 교황권 아래에서는 나는 나의 행위 없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의미로 그리스도는 나의 주라고 설교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거기에서 설교하는 것은 인간의 악한 영이었습니다. 그러한 영이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 아울러 행위를 통하여 사람은 구원받는다고 설교합니다.
루터의 기독론에서는 "영-기독론"(Spirit-Christology)을 찾아보기 힘들다. 다시 말하면 루터의 기독론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시며, 병든 자를 고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들을 놓아주셨던 역동적인 기독론을 찾아볼 수 없다.
V. 구원과 성령
A. 율법의 기록자이신 성령
루터는 성령께서 율법을 모세의 두 번째 책으로서 돌비에 새겨주셨다고 말한다. 즉 루터에게 성령은 율법의 기록자이시다. 그가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반율법주의자들 때문이다.
그분은 율법을 모세의 두 번째 책으로 돌판에 자신의 손가락으로 새겨주신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시다.
B. 율법의 요구와 성령
루터는 율법을 영적이라고 판단하고 그런 영적인 율법을 지키려면 인간이 영적이어야 하는데 인간의 그런 영적인 상태는 오직 성령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즉 그는 성령께서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능력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율법이 영적이기 때문에 당신이 행하는 모든 것이 당신의 내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면 아무도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 그런 마음은 오직 하나님의 영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며, 이 영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들을 감당할 수 있게 만든다.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요구사항들을 기쁘고 사랑스럽게 충족시켜야 한다. 마치 율법이나 그 형벌들이 존재하지 않는 양 율법에 대한 속박감을 느끼지 않고 덕스럽고 올바른 삶을 살아라. 그러나 이 기쁨, 이 속박 받지 않는 사랑은 성 바울이 5장[:5]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성령에 의해 우리 마음속에 부어진다.
C. 마음에 계셔야하는 성령
그런데 루터는 성령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계셔야만 인간에게 율법의 요구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고 말한다. 만약 성령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계시지 않다면 인간은 율법의 요구를 행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죄는 여전히 존재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영적이기 때문에 율법이 마음들에 의해 사랑을 받고 율법이 그런 유의 마음을 요구할 때 그 영이 우리 마음속에 있지 않다면 죄는 그대로 존재한다.
그는 또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기 시작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D. 성령의 증거와 가르치심
루터는 “마음 안에서의 성령의 증거”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에게 성령은 마음 안에서 증거하시는 분이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증거하신다. 나아가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깨닫도록 가르쳐 해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원하시며,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원하시며,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이 성령의 증거를 우리 마음 안에서 느낀다면 . . .
그분[성령]은 오셔서 우리에게 나타내진 그리스도의 공로를 이해하도록 우리를 가르쳐 주신다.
루터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은총을 가르쳐주시고, 깨닫게 해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지키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도록 도와주신다고 말한다. 루터에게 그리스도의 공로가 감추어져있지 않고 인간에게 열려져 적용되려면 반드시 성령의 사역이 필요하다.
그분은 . . .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받아들이고 지키도록 . . . 우리를 도와주신다.
E. 성령의 의
루터는 “성령의 의”라는 문구를 사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나는 나 자신과 하나님의 율법으로 인한 모든 능동적 의를 포기하고 오로지 은혜와 자비와 죄사함의 의인 수동적 의만을 부여안는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행하지 않고 단지 경험하며 가지지 않고 단지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의를 [신뢰한다].
F. 성령으로 난 사람
루터는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라는 말씀을 인용한다. 그는 이 말씀을 은혜와 율법과의 관계에서 사용한다. 그는 양심이 율법에서 놓여진 상태는, 즉 양심이 은혜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놓임 받아 자유로운 상태는 “성령으로 난 사람”의 상태와 같다고 말한다. 루터는 성령으로 난 사람은 율법과 양심으로부터 자유하게 된 사람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 . . 베드로가 감옥에서 놓여남으로써 감옥에 대하여 죽었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갔듯이, 양심은 은혜로 말미암아 율법으로부터 놓여난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서 원래 성령으로 낳아지는 것의 초월성과 불가해성을 말한 것이다. 바람이 임의로 불기 때문에 사람이 그것이 어디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성령으로 난 사람이 어디서 어떻게 낳아졌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그 본문을 그러한 원래의 맥락에서 떼어내어 그 의미를 “초월성과 불가해성”을 “자유함”으로 대체한다. 물론 성령께서 사람을 다시 낳게 하시는 역사는 사람의 이성을 초월하는 성령 자신만의 의지와 방법에 의한 자유로운 역사이기에 그 본문을 “자유함”으로 풀이해도 무관할 것이다. 즉 사람 편에서 성령으로 사람이 낳아지는 역사는 초월적이고 불가해적인 것이고, 성령 편에서 자기로 말미암아 사람이 낳아지는 역사는 자유로운 것이다. 루터는 본문의 맥락에서 “자유”라는 의미를 유추해낸 것이다.
G. 믿음과 성령
루터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깨닫도록 우리를 가르쳐 주시고, 그 공로를 받아들이고 지키도록 도우시기 위해 “믿음”이라는 “내적인” 방편을 사용하신다고 말한다.
그분은 그것을 . . . 내적으로(inwardly) 신앙과 다른 영적 은사들의 방편을 통해 수행하신다.
루터는 성령이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또한 사람의 믿음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믿음이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얻어진 성령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그는 그렇게 사람에게 오신 성령께서 이번에는 사람에게 율법이 바라는 행복과 자유를 주고 사람을 기쁘고 활기차게 만들어 하나님 및 모든 인류와의 관계에서 열심을 내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한 편, 루터는 성령에 의해 모든 믿는 자들에게 믿음이 장식된다고 말한다.
믿음에는 성령이 동반된다.
우리는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며 율법을 성취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얻어진 성령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성령은 우리에게 율법이 목표로 삼고 있는 행복과 자유를 준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살아있고 흔들림 없는 신뢰이자 신앙인데 그것이 너무도 확고하기 때문에 사람은 믿음을 인하여 천 번이라고 죽을 수 있다. 이런 유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뢰, 이런 유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지식은 우리를 기쁘고 활기차게 만들며 하나님 및 모든 인류와의 관계에서 열심을 내도록 만든다. 이것이 성령이 믿음을 통하여 역사하는 것이다.
성령에 의해 . . . 모든 믿는 자들은 믿음으로 . . . 장식된다(adorned).
루터는 믿음이 성령을 사람의 마음속에 오시게 할 수 있는 요인이기 때문에, 즉 불신앙은 성령을 거부하는 요인이기 때문에 성령은 “불신앙”이라는 세상의 죄를 책망하신다고 간파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불신앙을 따로 지적하여 그것을 죄라고 불렀다. 요한복음 16장[:8f]에서 그리스도는 성령께서 오셔서 “죄에 대해 세상을 책망할 것인데 . . .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말씀하신다.
H. 사랑과 성령: 감성과 성령
루터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를 깨닫는다면 성령에 의해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반대로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런 체험(to taste or feel)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루터는 머리에서 깨달아진 은혜가 성령에 의해 마음속에 체험된다고 말한다. 루터는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사랑을 “마음의 가장 소중한 감성”이라고 평가한다. 그 성령에 의해 주어지는 “소중한 감성”인 “사랑”은 인간의 영혼을 풍부하게 하고 깊게 한다. 루터는 성령의 역사는 지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감성적인 것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크고 귀중한 것들을 깨닫는다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롬 5:5] 우리의 마음은 성령에 의해 우리를 자유롭고 기쁘고 전능한 일군, 모든 고난의 정복자, 우리 이웃의 종이자 모든 것의 주로 만드는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은혜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나신 것이 된다. 그들은 자의적인 행위로 행하며 결코 이러한 것들을 체험(taste)하거나 느끼지 못할 것이다.
신앙은 그리스도가 이러한 말씀의 신실하심을 믿으며 또한 이 무한 한 축복이 신앙에 주어졌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 신앙에는 즉시 마음의 가장 소중한 감성 즉 인간의 영혼을 풍부하게 하고 깊게 하는 사랑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하여 주어진다 . . . 만일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약속이 자기에게 속한다는 것을 확고하게 의심없이 믿는다면 . . . 성령이 그들에게 보내어질 것이며, 성령은 그들이 이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이 위로를 실제로 체험할 수 있게 가르치실 것입니다. 그가 이 기회에 말씀하려 한 것은 이런 것 같습니다:내가 지금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면서 너희를 위해 내가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었던 것을 다하였다 . . . 그러나, 그말들은 나의 말이나 연설로만 머물러서는 안되고, 너희 자신의 체험의 한 부분이 되도록 해야 한다.
루터가 사람이 믿음 때 성령을 통해 내면에서 기쁨과 눈물 등이 동반되는 “마음의 가장 소중한 감성”을 체험하게 된다고 파악한 것은 그가 마음에서의 성령 체험을 추구했던 신비주의적 영향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믿음 때,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강한 내면적인 정서적, 의지적 체험은 종교개혁이후 복음주의의 핵심이 된다. 그런 성령 체험을 “구원론적 체험”(Salvific experience)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오순절주의는 그런 “구원론적 체험”에 “은사적 체험”(Charismatic experience)을 더한다.
I. 믿음과 성령의 자유
루터는 짐에 내리눌리고 있는 옛 사람이 “성령의 자유”를 누리려면 먼저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옛 사람을 새 사람이 되게 하고, 그 후에야 비로소 사람은 “성령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 옛 사람에게는 나귀에게와 마찬가지로 그를 내리누르는 짐이 지워져 있음에 틀림없고, 그는 먼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새 사람을 입지 않는다면 성령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J. 확신과 성령
에라스무스가 신자가 확신을 갖는다는 것에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자, 루터는 “확신에 찬 주장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심장을 보여주는 표지가 아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이라면 확신에 찬 주장들을 기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루터가 “확신에 찬 주장”을 할 수 있는 내용은 세속적인 것이 아닌 “위로부터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그는 “확신에 찬 주장들을 버리라. 그러면 당신은 기독교를 버리게 될 것이다”라고 역설적으로 강하게 말한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강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유를 제시한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확신의 근원을 “성령”의 사역에 둔다. 루터는 성령께서 세상에 싸움을 거는 것처럼 세상의 죄를 지적하며 주장한다고 말한다. 그는 단정적으로 성령은 회의론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왜, 성령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그리스도인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죽을 때까지 고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고 있지 않은가 - 당신이 고백하고 주장하는 것을 위하여 죽은 것은 확신에 찬 주장이 아닌가? 또 성령은 온 세상에 침투하여 마치 세상에 싸움을 거는 것인 양 세상으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할 목적으로 강하게 주장한다.
성령은 회의론자가 아니며,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새긴 것들은 의심이나 의견들이 아니라 확신에 찬 주장들이다.
VI. 성화와 성령
A. 세 가지 영과 성령
루터는 “성령”이란 말의 의미를 규정하면서 세 가지 영들을 제시한다. 그는 “인간의 영”이 있으며 “악한 영”이 있고 “거룩한 영”이 있다고 말한다. 루터는 이 “거룩한 영”이 곧 “성령”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우리는 “성령”이란 말, “성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 악한 영, 거룩한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성령은 “거룩한 영”으로 불립니다.
B. 성화자 성령
루터는 성령의 사역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과 “생명을 불어넣는 것”으로 규정한다.
성령의 직임은 거룩하게 만들거나 생명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나를 거룩케 하셨고 지금도 거룩케 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성부가 나의 창조주이시며 성자가 나의 주이듯이 성령은 나를 거룩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루터가 말하는 “성령께서 거룩케 하시는 사역”의 수단은 포괄적이다. 그 수단에는 “죄사함”도 포함되며, 나아가 “육체의 부활”, “영원한 생명”까지 포함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죄사함, 육체의 부활, 영원한 생명”이라는 사역들을 통해 나를 거룩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성령을 “성화자”(Sanctificator) 또는 “살리는 자”(Vivificator)라고 칭한다.
“기독인의 성결”(christian holiness) 또는 “우주적 기독교 세계의 성결”(the holiness of universal Christendom)은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주신다. 즉, 사도행전 15장에 따라 그분이 마음과 영혼과 몸과 행위들과 삶의 방식을 새롭게 하시고, 고린도후서 3장에 따라 하나님의 명령들을 돌비가 아닌 심비(육의 마음)에 기록해 주신다 . . .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주요한 덕목들”(tres virtutes theologicas)이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들을 주시며, 수행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그것들을 행하신다. 그래서 성령은 “성화자” 혹은 “살리는 자”라고 불리신다.
C. 선행과 성령의 자유
루터는 그리스도인들이 선행을 행하는 것은 그런 행위가 그들을 의롭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 가운데서 그렇게 행한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정부의 권세에 복종하고 모든 선행을 기꺼이 행해야 한다. 그들은 이미 신앙으로 의롭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의롭게 되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자유 가운데서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권세를 을 섬기며 자유한 가운데서 사랑으로 그들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다.
선행을 가능하게 만드는 자유는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그리스도인을 자유롭게 만드는 사랑이 충만하게 될 때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크고 귀중한 것들을 깨닫는다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롬 5:5] 우리의 마음은 성령에 의해 우리를 자유롭고 기쁘고 전능한 일군, 모든 고난 정복자, 우리 이웃의 종이자 모든 것의 주로 만드는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D. 영적인 사람의 열매(o& karpoV" tou' pneumatikou')와 성령의 열매(o& karpoV" tou' pneumatov")
루터는 때로 “성령”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의역하기도 한다. 그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제시한 열매들을 “성령의 열매”(oJ karpo;" tou' pneuvmatov")라기보다는 “영적인 사람의 열매”(oJ karpov" tou' pneumatikov")라고 부르기를 선호한다. 그는 자기가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그 구절에 언급된 행위들이 하나님의 행위라기보다는 사람의 행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바울이 그 구절에서 “영적인 사람”을 “성령”이라고 부른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라 그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첫 번째 의, “외래적 의”(iustitia aliena), “그리스도의 의”가 아닌 두 번째 의, “우리 자신의 의”의 범주에 넣는다. 이렇게 루터는 “성령”(pneu'ma)을 “영적인 사람”(pneumatikov")으로 의역한다.
이 의는 첫 번째 유형의 의의 산물인데, 실제로 그 열매이자 결과입니다. 갈라디아서 5[:22]에는 “오직 성령(즉, 그의 존재 자체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존해 있는 영적인 사람)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언급된 행위들은 사람들의 행위들이기 때문에 이 구절에서 영적인 사람을 “성령”이라고 부른 것이 분명합니다.
루터가 그 말만 했다면 혹 그가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을 존재론적으로 혼동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루터는 곧바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라는 말씀을 인용한다. 그는 아마도 그 말씀을 육은 “육적인 사람”을 낳고, 성령은 “영적인 사람”을 낳는다는 것으로 해석했을 것이다. 즉 루터는 “바울이 이 구절에 ‘영적인 사람’대신 ‘성령’이라고 기록한 이유는 성령께서 영적인 사람을 낳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구절은 ‘오직 영적인 사람의 열매는 . . .’이라고 기록되어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그 열매들은 사람들이 맺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루터는 그 열매들의 최초 원인은 성령이시지만 그분이 그 열매들을 직접 맺는 것은 아니고, 성령에 의해 영적인 사람이 낳아지고, 그 “영적인 사람”이 그 열매들을 맺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루터는 여기에서 “사람의 영”과 “하나님의 영”을 존재론적으로 혼동하는 우를 범하는 것은 아니다.
루터가 “‘성령’을 ‘인간의 영’으로 혼동한다”는 비판을 받을 우려가 있음에도 “성령”을 “영적인 사람”으로 의역을 시도한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 측의 노력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루터는 “성령”을 “영적인 사람”으로 의역함으로써 그 열매를 맺기 위한 인간 측의 노력을 강조하는 것이다. 아마도 루터는 이렇게 의역함으로써 자기가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자기의 말을 듣는 사람들 사이에서 선한 행위가 위축될 것을 우려하고,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믿음”이후의 인간의 적극적인 선행을 강조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E. “성령의 처음열매”와 "성령 충만”: 성화의 시작과 완성
루터는 신자는 부활의 날에야 완전한 영적인 속사람이 될 것이며, 그때까지는 어느 정도 진보를 이루어나간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바울을 따라 신자의 현 상태를 “성령의 처음 열매”라고 칭한다. 루터는 “성령의 첫 열매는 믿음으로 갖게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이 “성령의 처음 열매”는 미래에, 즉 마지막 날에 “성령의 충만”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즉 의는 실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시작되며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성령의 첫 열매를 갖는다.
만약 우리가 완전히 영적인 속사람들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지당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만 마지막 날, 죽은 자들의 부활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우리가 육 가운에 사는 동안에는 우리는 장래의 삶에서 완성될 것에 있어서 어느 정도 진보를 이루어나가기 시작할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로마서 8[:23]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얻는 모든 것을 “성령의 처음 열매”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우리가 참으로 더 큰 부분인 성령의 충만을 장래에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고 권고한 것을 부활의 날에나 성취될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은 원 독자들에게 현실적으로 “술 취함”의 대안으로 “성령의 충만함 받음”을 제시하고 있다. 바울은 본문에서 “성령의 충만함 받음”을 부활의 날에나 성취될 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 세대에 성취 가능한 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루터가 “성령의 첫 열매”와 “성령의 충만”을 생물학적인 성장 개념의 틀에 넣고, “성령의 충만”을 마지막 날에나 가능한 일로 제시한 것은 설득력이 없다.
루터는 성령께서 “지금” 성화 사역을 시작하고 계시며, 신자가 개인적 종말을 맞을 때, 또한 우주적인 종말을 맞을 때 그분의 성화 사역이 완성된다고 말한다. 루터는 개인적인 종말을 “우리가 죽었을 때”라는 말로 표현하며, 우주적 종말을 “육체의 부활”과 “영생”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루터는 성령께서 “육체의 부활”을 통해 신자의 성화를 완성시키실 것이라고 말한다. 루터에게 신자의 성화의 시작과 완성을 이루는 주체는 성령이시다.
즉 성령을 소유한 개인은 즉시 완전해져서 모든 점에서 순전하며 율법과 죄를 더 이상 느끼지 않는다는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과 그의 직능에 관하여서 성령께서 모든 것을 완전 성취하셨고 완료하셨다는 식으로 설교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그는 그 일을 착수하셨고 쉬임없이 계속하여 작용하시고 더욱 그것을 강화시키심을 설교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지금 거룩케 하시는 사역을 시작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죽었을 때, 성령께서는 “육체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통해 이 성화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F. 성령의 첫 열매와 육의 열매들
루터는 신자는 성령의 첫 열매를 받았지만 아직 다는 받지 못했으며, 거기에다가 아직도 완전히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이성, 탐욕과, 진노, 참지 못함 등의 육의 열매, 불의가 여전히 신자 안에 남아 있다고 분석한다. 그는 신자가 비록 성령의 역사로 자유롭게 양선과 자비, 충성, 사랑 등의 열매들을 맺어가고 있지만 반면에 육의 열매들도 여전히 맺고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 안에는 기쁨도 있지만 그 기쁨은 아직 완전하고 지속적이지 못하고, 때로는 슬픔과 갖가지 부정적 감정들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결점들이 신자들의 책임이 되지 않는 것은 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루터는 만약 신자들이 그런 것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면 모두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루터는 그런 연약하고 불완전한 신자들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완전하게 만들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의의 전가”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이렇듯 루터는 신자 안에는 그리스도의 날까지 “성령의 첫 열매”와 “육의 열매들”이 함께 공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성령의 첫 열매를 받았지만 아직 다 받지 못했다. 이 세상의 삶에서 이성은 완전히 죽여지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탐욕과 진노와 참지 못함에 의해 드러날 수 있고, 육의 열매들과 불의도 여전히 우리 속에 남아 있다. 그렇다, 가장 거룩하게 살고 있는 사람도 아직 하나님 안에서 완전하고 지속적인 기쁨을 지니고 있지는 못하고 성경이 선지자들과 사도들에 관하여 증거하고 있듯이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기쁜 갖가지 감정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결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들의 책임으로 돌려지지 않는다. 만약 그러한 것들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면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즉 의는 실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시작되며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성령의 첫 열매를 갖는다. 그러나 믿음은 연약하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전가 없이는 완전해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믿음과 더불어 의는 시작되지만 전가가 믿음을 그리스도의 날까지 완전하게 만든다.
G. 성령의 싸움
루터는 성령의 열매와 육의 열매와의 관계를 바울을 따라 또한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라는 말로도 표현한다. 그는 그러한 두 소욕이 신자 속에서 싸운다고 말한다. 그는 그 대립, 싸움을 간략하게 육체와 성령의 싸움이라고 표현한다. 루터는 그런 신자 안에서의 싸움의 근거를 로마서 7장에 둔다. 루터는 로마서 7장의 싸움을 불경건한 자들, 즉 불신자들의 싸움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몇 교부들의 해석을 거부하고, 그것을 경건한 자들, 즉 신자들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으로 해석한다. 루터는 그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육체를 따르지 말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고 권면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린다고 바울이 말할 때 그는 우리에게 우리가 육체의 정욕, 즉 육적인 욕구만이 아니라 교만, 분노, 침체, 조급함, 희의 등등을 느낄 것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에게 그것들을 느낄 때 그것들에 동의하거나 그것들을 이루지 말라고 한다 . . . 마치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육체가 너희를 충동질하여 화나게 하고 시기하게 하고 의심하게 하고 회의하게 하는 것을 안다. 그러나 너희가 범죄하지 않도록 성령으로써 육체에 저항하라.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버리고 육체를 따른다면,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말하고 있듯이 너희는 육체의 소욕을 이루게 되고 너희는 죽게 될 것이다 . . . 이 두 주장 또는 인도자들, 육체와 성령은 너희 몸에서 서로 대적하여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한다. 그리고 이 구절은 바울이 이러한 것들을 성도들, 즉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고 의롭게 되고 새로워져서 온전히 죄사함을 받은 교회에 쓰고 있음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바울은 스스로에 관하여 로마서 7장에서 말하고 있다 . . . 여기서 다시 한 번 그들은 사도가 불경건한 자를 대신하여 말하고 있다고 대립한다. 그러나 불경건한 자들은 그들의 육체의 반란, 죄의 싸움이나 갈등, 죄에 의해 사로잡혀 묶이는 것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는다 . . . 그러므로 그러한 편안한 구절들(이것들을 통해 바울은 자기 자신의 육신 속에서의 육체와 성령과의 싸움을 묘사하고 있다) . . .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외적으로도 의롭게 되려고 애써야 한다. 즉, 언제나 우리를 유혹하여 악을 범하게 하는 육체에 동의하지 말고 성령으로써 육체에 저항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그들 자신이 부분적으로는 육체를, 부분적으로는 성령을 갖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지배하고 육체가 복속되며 의가 지배하고 죄가 섬긴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바울의 이러한 가르침에 의해 큰 위로를 받는다. 이 가르침을 모르고 믿는 자는 아무 결점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자기 속에서 그 반대의 모습을 보는 사람은 결국 침체의 영에 의해 삼켜지고 절망에 빠져버릴 수밖에 없다.
루터는 신자가 육체의 소욕을 이기고 성령의 인도를 따르려면 그리스도를 붙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루터에게 신자가 되는 때에도 신자가 된 후에도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결코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성령의 지배의 권능은 아주 크기 때문에 경건한 자들이 실제로 죄인 것을 범한다고 할지라고 그들을 고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깨달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아무 죄도 없으시며, 따라서 율법은 그를 고발할 수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꼭 붙잡고 있는 한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율법으로부터 자유롭다.
성령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그리스도인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죽을 때까지 고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고 있지 않은가
H. 성령과 원죄
루터는 바울을 따라 신자 안의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치열한 싸움을 파헤친다. 그리고 루터는 육체, 육체의 소욕의 뿌리를 발견한다. 그는 그 근원으로 “원죄”를 지목한다. 이 “원죄”가 신자 안에도 남아 있어서 선에 대항하여 싸움을 일으키고 파멸시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경건한 사람들 속에서도 원죄가 선에 대항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신자 안에서 성령은 인간의 원죄와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즉 신자 안에서 성령의 싸움은 인간의 원죄와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경건한 자들 속에서조차도 원죄는 선에 대항하여 싸움으로써 많은 괴로움을 일으킬 정도로 원죄는 우리를 파멸시켜 왔다는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성령이 없는 사람 속에는 악만을 향할 뿐 선을 향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과연 신자 안에 원죄가 없을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일까? 그리스도의 피로 전적으로 부패되었던 인간의 본성이 치유되고 살려졌다면 신자 안에는 원죄가 없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신자 안에서 성령의 소욕에 대항하는 육체의 소욕은 육체 안에 뿌리처럼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처럼 신자 안에 들어와 거하는 악령이 일으키는 것일 수 있다. 즉 신자 안의 싸움은 원죄가 없어진 치유된 본성이 악령이 주는 소욕을 거부하고 성령이 주는 소욕을 붙잡으려는 싸움일 수 있다.
육체의 소욕 ↔ 성령의 소욕 ← 성령
↖
원죄로 부패된 본성
루터의 신자 안의 싸움 이해
악령 → 육체의 소욕 ↔ 성령의 소욕 ← 성령
그리스도의 피로 치유된 본성
필자가 제안하는 신자 안의 싸움 가능성
I. 성령을 떠남
루터는 신자가 진보만 이루는 것이 아니라 때로 죄에 빠지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루터는 그런 상태를 “성령을 떠나”라고 규정한다. 믿음에 의해 성령을 받고, 성령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도 때로 성령을 떠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받으심 또는 전가는 아주 필요하다: 첫째, 우리는 아직 완벽하게 의롭지 않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죄는 여전히 우리의 육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남아 있는 죄를 하나님은 우리 속에서 몰아내신다. 더욱이 우리는 때로 베드로, 다윗을 비롯한 다른 성인들이 그러하였듯이 성령을 떠나 죄에 빠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신조에 매어달린다: 우리 죄는 덮어졌으며 하나님은 그 죄들을 우리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 로마서 4장
“성령을 떠난다”는 표현은 어떤 의미를 갖는 가? 루터는 성령께서 “마음속”에 계셔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번에는 사람이 성령을 떠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령을 떠난다”는 표현은 신자가 마음속에 계시는 성령을 순종하지 않고, 그분의 음성을 무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성령을 떠난다”는 표현은 바울의 용어인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다”(고전 2:14) 혹은 “성령의 소욕을 거스린다”(갈 5:17)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J. 성령 모독
루터는 “성령을 모독하고”라는 문구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는 여러 가지 교황주의자들이 자기들이 만든 여러 제도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피를 밟으며, “성령을 모독”한다고 말한다.
베드로는 이 장 전체에 걸쳐 복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무시하고 멸시하며 행위들과 사람들의 유전을 가르쳤던 교황 제도를 아주 생생하게 그려놓았다: 부합과 자격있음의 공로, 날들의 차이, 고기와 사람, 맹세, 성인들에게 기도하는 것, 순례, 연옥 등. 이 허구적인 견해들 속에서 교황주의자들은 그릇 인도되어 그들이 복음, 믿음, 그리스도를 한 마디라도 이해할 수 없다 . . . 이러한 수단들을 통하여 그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피를 발로 밟으며 성령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한다.
“성령 모독”(blasfhmevw ei*" toV a@gion pneu'ma, h& blasfhmiva tou' pneuvmato")이라는 표현은 복음서에서 마태복음 12장 31절에서 32절, 마가복음 3장 28절에서 29절, 누가복음 12장 10절에 나타난다. blasfhmevw는 개역성경에서 “모독”, “훼방” 등으로 번역된다. 마태와 마가는 “성령 모독 죄”를 예수님의 귀신추방 사건에 위치시킨다. 예수께서는 귀신을 추방하셨는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축귀를 바알세불을 힘입은 것으로 격하시켰다. 이에 예수께서 자신은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말하시고는 인자를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누가는 “성령 모독” 말씀을 귀신추방 사건이라는 정황에서 떼어내어 일반화시킨다. 루터는 “성령 모독”이라는 표현을 마태와 마가로부터 보다는 바로 이 누가가 일반화 시킨 것으로부터 빌려왔을 것이다. 루터는 “성령을 모독하고”라고 말함으로써 사실은 그런 제도를 만든 교황주의자들은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루터는 성령을 모독하는 자를 “배교자”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교황은 미사의 참된 사용을 없애버렸고 그것을 장사 수단으로 만들어 돈으로 사고팔므로써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교황은 미사를 올리는 사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성령을 모독하는 배교자는 제단에서 스스로를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 전체를 위해서 빠르고 확실하게 선행을 하고 있다고, 그것도 다른 수단이 아니라 오직 수행되는 행위를 통하여 그렇게 하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K. 성령을 잃음
루터는 신자가 자기 안에서의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실제적으로 느끼는데 성령으로써 육체의 소욕을 대항하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반대로 육체에 복종하여 육체의 소욕을 이룬다면 믿음과 성령을 잃는다고 단정한다. 그런 상태에서도 신자가 죄를 혐오하고 그리스도께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죄 가운데서 죽게 된다고 말한다. 물론 루터는 성령을 잃은 사람이 그리스도께 다시 돌아온다면, “타락한 자들을 받고 일으키는 열쇠”를 교회에 주셨기 때문에 믿음과 성령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루터는 일단 신자가 성령을 잃어버리고 죄 가운데서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그리고 바울 자신도 자기가 “죄 아래 팔렸다[롬 7:14]고 한탄하며 여기서 육체는 성령을 거스르고 대항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으로써 육체의 행위들을 극복하기 때문에, 이러한 죄들은 그들을 해하거나 정죄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육체에 복종하여 그 소욕을 이룬다면, 그들은 믿음과 성령을 잃는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죄를 혐오하고 그리스도(타락한 자들을 받고 일으키는 열쇠를 자신의 교회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믿음과 성령을 회복할 수 있다)께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들은 자신의 죄 가운데 죽는다.
L. 성령의 의분
루터는 “성령의 의분”이라는 문구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마치 그는 성령의 의분으로 마음이 움직인 듯이 은혜 자체를 율법이라 부르면서 율법은 칭의에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거짓 사도들과 모세의 율법을 경멸하는 가운데 은혜의 효력과 역사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격렬한 열심과 영의 의분으로 바로 은혜 자체를 율법이라 부르지만 그 율법이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은혜의 자유이다.
M. 성령의 성화 사역의 도구
1. 거룩한 교회
그리스도인의 교회를 통하여, 즉 그 교회의 사역을 통해 여러분들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여러분을 거룩케 하기 위해 교회의 사역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결코 그리스도를 알거나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2. 성례들
그러므로 이 그리스도인의 교회에서 여러분은 “죄사함”을 받습니다. 이 용어는 세례, 임종시의 위로, 제단에서의 성례, 사죄 모든 위로의 구절들을 포함합니다. 이 용어 속에는 법령이나 전통들이 아니라 복음이 설교되는 곳에서 교회가 죄를 사하는 모든 영역들이 포함됩니다. 이 교회와 이런 성례들 및 바깥에는 어떤 성화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례를 베푸는 목회자는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세례를 베푸는 자는 내가 아닙니다. 나는 단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도구일 따름입니다.
3. 복음 설교
이 용어 속에는 법령이나 전통들이 아니라 복음이 설교되는 곳에서 교회가 죄를 사하는 모든 영역들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교회 가운데 있는 말씀과 성례들을 통해 나를 거룩케 하시며 마지막 날에 우리를 온전히 거룩케 하실 것입니다.
N. 성령의 구원의 서정적 사역
루터는 소요리 문답에서 성령의 사역을 구원 서정적으로 규정한다. 그는 성령은 부르시며(calls), 모으시고(gathers), 비추어 깨닫게 하시고(enlightens), 성화시키시고(sanctifies), 보존하신다(preserves)고 말한다. 루터는 성령께서 인간을 부르시되 복음을 통해 부르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성령께서 지상의 전 기독교 교회를 성화시키신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성령은 그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신다. 또한 그는 성령은 날마다 신자들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말한다.
그런데 성령은 나를 복음을 통해 부르셨고, 나를 그분의 은사들을 통해 비추어 깨닫게 하셨고, 나를 진정한 믿음으로 거룩하게 만드셨고 보존해 주셨다. 그것은 마치 그분께서 지상의 전체 기독교 교회를 부르시고, 모으시고, 비추어 깨닫게 하시고, 거룩하게 만드시고 그것을 하나의 진정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보존하시는 것과 같다. 이 기독교 교회 안에서 성령은 날마다 그리고 풍성하게 나의 모든 죄들과 모든 신자들의 죄들을 용서하신다.
VII. 성령과 교회
한편으로 칭의와 성화와 관련하여 개인의 내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말하는 루터는 다른 한편으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말한다.
A. 사람을 교회로 인도하시는 성령
루터는 성령과 복음과 교회와의 관계를 서로 상반되게 말한다. 성령께서 복음 설교를 통해 사람을 교회로 인도하신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한 사람을 먼저 교회로 인도하시고 그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해 말씀을 선포하시며, 말씀으로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다고도 말한다. 비록 위의 언급들은 서로 상반되지만 성령께서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일과 복음을 전하는 일의 주체라는 것에는 일치를 보인다.
먼저 성령께서는 여러분을 거룩한 보편 교회로 인도하셔서 교회의 품안에 두셨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 속에서 성령은 보존하시고 교회를 통하여 말씀을 선포하시며 말씀으로 여러분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십니다 . . . 성령께서는 복음의 설교를 통해 여러분을 교회로 인도하십니다.
B. 교회 안의 성령
루터는 그 안에서 참된 죄 용서가 제공되고, 획득되고 받아들여지는 복음과, 세례, 그리고 성례들이 발견되는 교회에 그리스도와 그의 영과 하나님께서 계신다고 말한다. 루터에게 그런 교회 밖에는 어떤 구원도 없다. 즉 죄 사함이 선포되고, 사함 받는 교회 안에 성령께서 계신다는 것이다. 루터는 또한 성령께서 우리가 죄 사함을 깨닫고,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확대하고 확장하도록 도우시기 위해 내적으로 믿음과 영적 은사들의 방편들을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외적으로” 복음과 세례와 제단의 성례라는 방편들을 사용하신다고 말한다. 즉 성령께서 교회의 성례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이다.
그런 기독교 교회 안에서, 어디든 그것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죄 용서가, 즉 은혜와 나라와 참된 용서가 발견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사죄가 제공되고, 획득되고, 수용되는 복음, 세례, 그리고 제단의 성례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와 그의 영과 하나님께서 거기 계신다.
그분[성령]은 그런 일을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 내적으로는 믿음과 다른 영적 은사들이라는 방편들을 통해, 외적으로는 복음, 세례, 그리고 제단의 성례를 통해 수행하신다
루터는 성령께서 사람을 거룩케 하기 위해 “교회의 사역을 사용하신다”고 말한다. 루터에게 성화는 오직 교회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교회 밖에서는 “어떠한 성화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성화를 가능케 하는 교회는 법령이나 전통에 메인 교회가 아니라 복음이 설교되는 교회다. 루터는 복음이 설교되는 교외 한에서만 성화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루터에게 거룩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교회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다.
이전에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리스도인의 교회는 그리스도를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 . . 그리스도인의 교회를 통하여, 즉 그 교회의 사역[officium]을 통해 여러분들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여러분을 거룩케 하기 위해 교회의 사역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결코 그리스도를 알거나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그리스도인의 교회에서 여러분은 “죄사함”을 받습니다. 이 용어는 세례, 임종시의 위로, 제단에서의 성례, 사죄 모든 위로의 구절들을 포함합니다. 이 용어 속에는 법령이나 전통들이 아니라 복음이 설교되는 곳에서 교회가 죄를 사하는 모든 사역들이 포함됩니다. 이 교회와 이런 성례들 및 바깥에서는 어떤 성화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성령은 나를 거룩케 하십니까? 나로 하여금 하나의 거룩한 교회가 존재함을 믿게 함으로써 입니다. 이 교회를 통해 성령께서는 나를 거룩케 하시며 말씀하시며 설교자들로 하여금 복음을 설교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비밀장소들로 기어들어가는 광신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교회 밖에서 여러분을 의롭게 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시되 모든 것을 기독교 세계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 하시기 때문에 사도들은 성령을 거룩한 영이라 불렀습니다. 반면에 악한 영은 그 정반대로 행합니다.
그런데 루터가 말하는 그 안에서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는 교황과 추기경들과 주교들을 중심으로한 교회, 교황옹호론자들의 교회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참된 기독교회”다.
그러나 그들에게 기독교회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교회는 교황와 추기경들과 주교들을 바라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가짜의 소리지름과 대조적으로 참된 기독교회를 묘사할 때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 . . 거기에는 성령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C. 성령 안의 거룩한 교회
루터는 “거룩한 교회”는 안에 죄가 없는 교회가 아니라, 안으로는 죄가 있는 교회가 거룩한 것은 교회가 “성령 안에” 있어서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성령 안에”라는 표현을 “하나님께서 숨기고 덮고 계시다”로 바꾸어 말하기도 한다. 즉 루터는 교회가 거룩한 것은 실제로 교회 안에 죄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교회의 죄를 덮으시고 숨기시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신조[사도신경] 속에서 우리는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고 올바르게 고백하고 있다. 거룩한 교회는 아무도 닿을 수 없는 곳에 보이지 않게 성령 안에 있으므로 그 교회의 거룩은 볼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교회를 연약함들, 죄, 잘못들, 다양한 형태의 십자가와 걸림돌들로 숨기고 덮고 계시기 때문에 이성의 판단을 따라서는 어느 곳에서도 거룩한 교회는 볼 수 없다.
D. 교회의 모든 것을 효력있게 하고 창출하시는 성령
루터는 성령께서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을 효력있게하고 창출해내신다고 말한다.
그분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있으시기를 바라십니다. 여기에 성령이 거하셔서 기도교회 내에서 모든 것을 효력이 있게 하고 창출해냅니다.
E. 성령의 기름 부으심
루터는 로마교회의 서품성사를 비판하면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에 대해 말한다. 그는 로마교회가 서품성사를 통해 사제의 직분을 받은 사람만 성례를 집행하게 하고 평신도들의 성례 집행을 차단하는 것을 비판한다. 그리고 그는 그런 비판의 근거로서 성령에 의한 진정한 서품성사를 든다. 그는 사제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기름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에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몸과 영혼이 거룩해졌다. 그는 “성령의 기름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란 말을 ‘성령께 서품성사를 받았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는 인간에 의해 손가락에 발려지는 기름보다 성령의 기름으로 기름부음 받는 것이 더 중요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에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았으며, 성령의 기름 부음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진정한 사제로 만든다.
그렇다면 평신도에게 동일하게 속하지 않은 것으로서 사제인 당신에게 어떤 직무가 남아 있는가? 삭발과 예복인가? 삭발과 예복만으로 이루어진 사제는 초라할 뿐이다! 아니면 당신의 손가락에 발려진 기름인가?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기름으로 기름부음을 받았고 몸과 영혼이 거룩해졌다. 이전에 평신도들은 사제들이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주 성례들을 집행하곤 하였다.
F. 유아 세례와 성령
루터는 유아 세례의 정당성을 버나드, 보나벤투라, 게르송, 후스 등의 의견에서 찾으면서, 그들이 성령을 받았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유아세례가 참되다”고 말한다. 즉, 루터는 유아 세례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성령의 권위를 사용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버나드, 보나벤투라, 게르송, 후수에게 성령을 수여하시고 그들이 성령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매우 확실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에 유아 세례가 참되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VIII. 성령 은사론
A. 은사이신 성령
루터는 성령을 하나님의 은사(gift)와 선물(endowment)이라고 부른다.
활기있고, 영원하고,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에 의해
B. 교회 안에서 발견되는 성령의 은사들
루터는 성령의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령에 대한 항목 바로 뒤에 성령의 모든 은사들이 발견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교회가 있습니다.
C. 교황들이 가지고 있는 은사들
루터는 교황들이 면죄보다 더 큰 은혜인 복음과 “영적인 능력들, 병 고치는 은사” 등등을 지니고 있다고 인정한다.
우리는 그 정반대를 단언하는 바, 베드로 그리고 그 밖의 교황들은 면죄보다 더 큰 은혜 즉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선언되고 있는 복음과 영적인 능력들, 병 고치는 은사 등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D.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영적 은사들을 주시는 성령
루터는 성령에 의해 모든 믿는 자들에게 “다른 영적 은사들”이 주신다고 말한다. 그가 어떤 의미로 “다른”이라는 말을 사용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다른”을 “다양한”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다는 의미로 “서로 다른”이라고 해석해야할 지, 아니면 앞에서 언급된 “믿음과는 다른”이라고 해석해야할지 본문만으로는 판단하기 힘들다. 어쨌든 루터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영적 은사들”이 주어진다고 말한다.
성령에 의해 . . . 모든 믿는 자들은 신앙과 다른 영적 은사들로 장식되며 . . .
여러분은 이미 유아들이 믿는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열매들, 즉 성령의 은사들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E. 외적인 은사의 중단
루터는 방언과 같은 표적을 동반하는 외적이고 가시적인 은사들은 초대교회에나 필요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런 외적인 은사들은 교회가 확립된 후에 그 필요성을 상실했다고 본다. 즉 그는 외적 은사 중단론(Cessationism)을 펼치는데 그 이유를 “교회 확립”에 둔다.
초대교회에서는 분명하고도 가시적인 모양으로 보내졌다. 요단강에서 성령은 비둘기같이 그리스도께 임했다. 그리고 사도들과 다른 신자들에게는 불과 같이 임했다. 성령은 처음에 이런 식으로 오셨으며, 이는 초대교회에 필수적이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증거했듯이, 불신자들 때문에 교회가 많은 이적을 통해서 세워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말했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었다. 그러나 이적을 통해서 교회가 모여지고 확립된 후에는 성령의 가시적인 보내심이 더 이상 계속될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나 루터가 말하는 것처럼 외적 은사가 중단되어도 될 정도로 교회가 완전히 확립되었는가? 그는 구원론에서 그리스도의 피가 인간의 죄를 이 세상에서는 실제로 완전히 사하지 않는다고, 다른 말로하면 미완성이라고 말한다. 그런 데 그는 교회론에 있어서는 교회가 이 세상에서 확립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방언은 믿지 않는 자를 위하는 표적”이라고 말한다. 오늘날에는 방언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불신자가 없는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외적인 표적과 이적,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 교회가 세워질 필요가 있다. 루터의 교회의 확립을 통한 성령의 외적 은사중단론은 설득력이 없다.
F. 충분한 은혜와 불충분한 은사
루터는 “은혜”(grace)와 “은사”(gift)를 구분한다. 그는 “은혜”를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지니시는 인자 또는 호의라고 정의한다. 즉 그에게 은혜는 하나님께서 “지니고 계시는 것”이다. 은혜는 사람의 죄를 제거하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한다. 반면에 루터에게 성령과 “은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다. 즉 그에게 성령과 은사는 사람이 받는 것이며, 사람 속에 새 마음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준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는 전체적으로 완전하고 충분하다고 말한다. 반면에 “은사”는 파편으로 나뉘어 오기에 날마다 받아야 하는 불충분한 것이다. 사람이 성령과 은사를 날마다 받아도 부족한 이유는 옛 욕망과 죄악들이 여전히 사람 속에 아른거리며 성령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은사는 은혜로 인해 사람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다.
은혜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선택에 의해 우리를 향하여 지니시는 인자 또는 호의이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꺼이 그리스도를 주고 우리 위에 성령과 하나님의 축복을 부어주신다고 할 때 은혜(grace)와 은사(gift)는 서로 다르다고 하겠다 . .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은사와 영을 날마다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할지라도 오히려 그것들은 부족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로마서 7장과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옛 욕망들과 죄악들이 여전히 우리 속에 아른거리며 영에 대항하여 싸우기 때문이다. 또한 창세기 3장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원수 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전체적으로 완벽하게 의로운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을 정도로 은혜는 충분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다른 많은 은사들처럼 파편으로 나뉘어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완벽하게 사로잡아 우리의 중보자인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게 하며 은사들이 우리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5:15)에서 구별하고 있듯이, 이것들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두 가지 것, 곧 은혜와 은사입니다. 은혜는 죄를 제거하고, 사람의 양심을 위해 위로와 평강을 확보해 주며, 신적 긍휼의 나라에 사람이 들어가게 해줍니다. 이 나라는 시편 117편 2절에서 불리우고 있는 대로, 인자(仁慈)의 나라입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러나 은사라고 하는 것은, 성령께서 새로운 사상들을 불어넣어 주시고 사라 속에 새로운 마음과 심령을 창조하시며, 사람에게 위로와 힘과 생명을 주시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G. 안수와 성령 수여
루터는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안수를 통해 “성령을 나누어주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로마교도들이 견신례를 실시하면서 “안수”하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사도들이 안수를 통해 성령을 나누어 주었다고 말한다.
성경에는 그리스도께서 아이들을 그런 식으로 만지셨으며, 안수를 통해 사도들은 성령을 나누어주고 장로들을 세웠으며 병든 자들을 고쳤다.
H. 내적인 영적 은사들
루터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적용시키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편들 중 내적인 것들 중에 “다른 영적 은사들”(other spiritual gifts)을 언급한다.
그분은 그것을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 내적으로는 믿음과 다른 영적 은사들이라는 방편들을 통해 . . . 수행하신다.
I. 성령에 의해 행해지는 특별한 행위들
루터는 “성령의 특별한 행위”를 말한다. 루터는 서약과 관련하여 “성경의 예에 의해 밑받침될 수 있는 행위들”과 “성령에 의해 행해지는 행위들”을 구분하여 언급한다. 그는 성경의 예에 의해 밑받침되는 행위들은 대중의 보편적 생활양식으로 확립되어져야 하고, 반면에 성령에 의해 행해지는 특별한 행위들은 보편적 생활양식으로 적용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루터는 이 언급을 통해 성령께서 특정한 사람 가운데서 특별하게 행하시는 행위들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는 그런 성령의 특별한 행위가운데서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에게 하신 일을 예로 든다. 그리고 그는 경건한 생활을 서약과는 상관없이 성령에게만 맡겨놓는 것이 좋다고 결론짓는다. 즉 그는 성령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특별한 상황에서 특별한 행위들(평생 정절 등)을 행하시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루터는 “성령의 특별한 행위”를 “성령의 은사”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성경의 예에 의해 밑받침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나 위험으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서 결코 아무에게도 강요되어서는 안 되며 인정받는 생활양식으로서 대중에게 일반적으로 확립되어져서는 더더욱 안 된다. 반면에 어떤 사람이 위험을 무릎 쓰고 서약을 감행하고자 한다면 이는 허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특별한 행위들은 성령에 의해 몇몇 사람 가운데서 행해지나 그런 행위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본보기나 생활양식으로 인용되어서는 안 된다 . . .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왕의 궁전에서 사무를 보고 있었던 다니엘과 하나냐와 아사랴와 미사엘을 모두 다 보존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위험으로 가득 찬 삶을 영위한 저들을 거룩케 하실 수 있고 성령의 어떤 기이한 역사로써 저들을 인도하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J. 성령의 명령
루터는 결혼 문제와 관련하여 정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은 “성령의 명령이자 열매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만약 수도회들 가운데 하나에 들어가겠다는 서약이 어떤 사람의 자기처분권을 앗아가는 것이라면, 왜 정혼은 그렇지 아니한가? 이것은 정말 갈라디아서 5[:22]에 따라 성령의 명령이자 열매 중의 하나이다. 반면에 그 서약들은 인간의 뜻으로부터 나온다.
루터가 제시한 본문에서 정혼 약속과 관련된 성령의 열매는 아마도 “충성”일 것이다. 그런데 루터의 말에는 정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성령의 명령”이라고 말한 근거는 제시되지 않는다.
K. 성령의 지혜
루터는 성례에 대해 말하면서 성례 또는 비밀은 “성령의 지혜”인데 그 것은 비밀 속에 감추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는 그것의 근거로 고린도전서 2장 7절 이하를 제시한다. 그런데 그 본문에는 “성령의 지혜”라는 말이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라는 말이 나타난다. 그는 “하나님의 지혜”를 “성령의 지혜”라고 바꾸어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바꾼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바울에 의하면, 성례 또는 비밀은 성령의 지혜로서 비밀 속에 감추어져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에서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 . .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 . .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라고 말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성령이 지혜와 더불어 나타나는 본문은 총 여섯 개다. 그 가운데에서는 직접적으로 “성령의 지혜”라고 언급한 것을 찾아볼 수 없다. 누가는 초대교회의 첫 집사들로 추천될 수 있는 조건으로 “성령과 지혜”를 들고 있다(행 6:3). 또한 누가는 그런 기준에 의해 집사가 된 스데반은 “지혜와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전했다고 말한다(행 6:10). 누가는 성령과 지혜를 종속관계가 아닌 대등관계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도 3차례 성령과 지혜를 함께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두 경우에 “지혜”는 세상의 지혜 또는 사람의 지혜, 즉 부정적인 지혜에 해당하며 성령과 대조된다. 바울은 자기가 고린도를 전도할 당시 전도를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않고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했다고 말한다(고전 2:4). 또한 바울은 자기가 고린도교회에 권면하는 말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이 아니고 “성령의 가르치신 것”이라고 말한다(고전 2:13). 바울의 언급 중에 성령과 지혜가 긴밀하게 나타나는 것이 하나있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들을 언급하면서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이라고 말한다(고전 12:8). 즉 바울은 지혜를 성령의 은사들 중 하나로 언급한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즉 지혜를 성령의 은사로서 언급하는 것이라면 “성령의 지혜”라는 말이 가능할 것이다.
L. 판단력의 근원이신 성령
루터는 교회의 교리 결정과 승인에 대해 언급하면서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는 영”에 대해 말한다. 그는 “성령의 조명”에 의해 교리들이 생겨나는데 그런 교리들을 교회가 결정하고 승인할 때 입증될 수 없는 “성령의 임재”를 “인식”한다고 말한다. 그는 판단에 있어서 마음은 그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예속되어 있는 상태에서 재판석에 앉아 있는 진리 자체에 의해 선언되는 평결을 받아들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그 예로서 셋에 일곱을 더하면 열이 된다고 말할 수는 있고, 그 진리성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왜 그것이 참된지 그 이유를 댈 수는 없다는 것을 든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인간에 의해 판단되지 않는 진리 그 자체이면서 교회를 사로잡고 교회의 모든 판단의 근원이 되는 진리를 성령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성령을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영”이라고 말한다.
사실은 마음은 그 자신이 판단자인 것이 아니라 예속되어 있는 상태에서 재판석에 앉아 있는 진리 자체에 의해 선언되는 평결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조명에 의해 교리들이 생겨나 결정과 승인ㅇㄹ 요구할 때, 교회는 비록 입증할 수는 없지만 성령의 임재가 확실하다는 “인식”을 소유한다. 어떤 철학자도 상식의 개념들을 평가하려고 하지 않고 그것들에 의해 판단되듯이 우리들 가운데에도 사도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아무에게도 판단 받지 않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영이 있다.
M. 성령 침례
루터는 물 침례에 상징적 의미만을 부여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가운데 “성령 침례”를 언급하지만, 그에 대해서 자세하게 부연하지는 않는다. 그는 물 침례에는 구원의 효력이 없고 성령의 침례만이 그 효력이 있다는 반대자들의 주장을 비판한다.
그러므로 세례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여러분은 광신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세례는 한 줌의 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선하지도 않으며 성령, 곧 성령이 세례를 행해야 하고, 목욕탕의 하인인 성직자가 주는 세례는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N.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하도록 돕는 성령
루터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우리가 받아들이고 지키도록 도우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확대하고 확장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고 말한다. 즉 성령은 그리스도의 선포와 전도를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그분은[성령] 그리스도의 공로를 받아들이고 지키고, 우리를 위해 그것을 사용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공로를 나누어주고, 확대시키고, 확장시키도록 도와주신다.
O. 신자를 깨우치시는 성령의 은사들
루터는 성령께서 우리를 비추시어 깨닫게 하시는데 그분의 은사들을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고 말한다.
그런데 성령은 나를 복음을 통해 부르셨고, 나를 그분의 은사들을 통해 비추어 깨닫게 하셨고 . . .
IX. 성령과 사단
루터는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항하는 이 세상의 임금을 사단이라고 지목한다. 그리고 그는 인간을 “그의 죄수”들이라고 규정한다. 왜냐하면 사단이 그들을 올가미 씌우고 있기 때문이다. 사단은 자신의 죄수들을 괴롭힌다. 그런데 루터에 의하면 사단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죄수들이 있는데 그들은 바로 “성령의 권능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사단은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나라를 올가미 씌우고 반대하는 이 세상의 임금이며 그는 자신의 죄수들이 성령의 권능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 한 그 죄수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자유 의지”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다시 한 번 명백하다.
X. 결론
살펴본 바와 같이 루터의 성령론은 구원론에만 머무르지 않고 조직신학의 다른 주제들과도 관련된다. 루터의 성령론은 “정경론”, “신론: 삼위일체론”, “기독론”, “구원론”, “성화론”, “교회론”, “은사론”, “악령론” 등 조직신학의 여러 주제들과도 관련되는 것이다.
물론 루터의 저작들을 다 보지는 못하여서 루터의 성령론의 전체적인 모습을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현재까지 살펴본 것만으로도 구원론에만 초점을 맞추는 루터의 성령론 연구는 그 초점을 다양화해야만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루터의 성령론은 루터의 신학의 전체적인 성격상 구원론에 그 무게를 더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성령론 연구는 이제 구원론을 벗어나 보다 폭넓게 펼쳐져야 한다.
루터의 글에서 필자는 사람들을 부르셔서 교회로 인도하시고, 비추어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언급을 주목했다. 신약교회, 즉 초대교회와 비교될 대 중세의 성령론은 이 부분이 매우 약화되었었다. 중세의 성령론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신비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성화에 치중한 성령론과 교회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성례를 통한 성령의 사역을 강조했다. 그런데 루터에게서 전도하시고 선교하시는 성령의 사역의 회복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연약하게나마 중세의 딱딱한 땅껍질을 뚫고 올라오기 시작했던 루터의 “전도 사역 성령론”의 새싹은 대중을 상대로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웨슬리에게서 그 꽃을 활짝 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열매는 오순절 운동에게서 풍성하게 맺어졌고 또한 맺어지고 있다.
루터가 이제는 중단되었다고 잘라냈던 성령의 외적 은사들은 오늘날 오순절 운동을 통해 풍성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는 신기루 같은 “기독교세계”(Christendom) 속에 안주하면서 성령의 사역들을 판단하고 제한했다. 하나님께서는 국교를 기반으로 삼은 로마제국과 신성로마제국의 기독교세계의 신기루를 제거하시고 폭풍우가 몰아치고 파도가 산처럼 덮쳐 집어삼키려는 갈릴리 호수로 배를 띄워 고기를 잡으라고 신자들을 다그치고 계시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주님의 말씀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그러므로 루터의 성령의 외적 은사 중단론은 그야말로 “중단”되어야 한다. 중단되어야 할 것은 성령의 은사들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들을 중단시키는 잘못된 신학이다.
루터가 주로 언급한 성화자 성령론은 계승하여 더욱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반면에 루터의 말씀만을 통한 성령의 간접적 사역은 계승하되 그것에 성령의 임재를 통한 직접적 사역을 더하여 균형을 잡아 계승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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