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 Socialism?
A Critical Evaluation of Christian Socialist Theology
안토니 A. J. 윌리엄스
Anthony A. J. Williams
이창승 역
2019. 3.
The Evangelical Review of Theology and Politics Vol. 4, (2016): 29-44
https://liverpool.academia.edu/AnthonyWilliams
안토니 A. J. 윌리엄스 박사는 영국 리버풀 대학교(University of Liverpool)에서 정치학을 강의했고 현재는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 대학교(Manchester Metropolitan University)에서 강의하고 있다. 그는 “한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기독교 사회주의”라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했다. 그는 일반적으로 정치 이데올로기뿐만 아니라 정치에 대한 기독교 사상과 참여에 관심이 있다.
초록
기독교와 우익 정치학 사이의 보다 더 분명한 제휴들에도 불구하고, 좌익 기독교는 여러 가지 유형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들 중 하나가 영국 기독교 사회주의(the Christian Socialism of Britain)이다. 이 논문은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중엽까지 - 마우리스(Maurice)와 다른 사람들의 가족주의적 “기독교 사회주의”를 뒤따르며, 영국 노동당(the British Labour Party)의 형성과 동시에 일어난, 그리고 결국 1960년에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the Christian Socialist Movement, 현재 Christians on the Left)이 된 영국 기독교 사회주의에 대한 것이다. 기독교 사회주의는 성경(Scripture), 교회의 가르침(church teaching), 그리고 성례들(Sacraments)을 포함하는 기독교 신학 사상으로부터 이끌어내진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 사회주의의 주요 개념들: 평등(equality), 전체주의(collectivism), 그리고 민주주의(democracy)는 그 자체 하나님의 전 인류의 아버지 되심(God’s universal Fatherhood)이라는 관념으로부터 이끌어.내진 인류 형제 됨/형제애(human brotherhood)의 핵심 개념으로부터 이끌어 내진다. 그렇지만, 신학 사상에 있어서 기독교 사회주의의 기반에는 큰 결함이 있는데, 그 결함은 오역(misinterpretation), 오용(misapplication), 그리고 자의적 해석(eisegesis)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비틀고 왜곡하는 것에 대한, 그리고 그 어떤 거짓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한, 기독교 사회주의는 기독교가 전혀 아닐 수 있다(Christian Socialism may not be Christian at all)는 것을 지적하는, 성경의 경고들은 고려되어야만 한다.
들어가는 말
INTRODUCTION
기독교 사회주의라는 사상은 미국과 영국의 기독교, 특별히 복음주의적 기독교가 보다 더 기꺼이 보수적 정치와 제휴할 때 일종의 탈선(an aberration)으로 출현할 수 있다. 미국의 백인 복음주의자들은 공화당을 위한 견고한 기반을 형성하고 있으며, 보수적 정치 입장들의 다양성을 견지하고 있다. 이런 정치적 제휴는 영국 정치 안에서 기독교인들은 필연적으로 우익들(right-wing)이라는 생각의 원인이 되어 왔다. 예를 들면, 테오스(Theos)에 의한 연구는 영국 안에서 작동중인 필적하는 종교적 우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지만, 몇 가지 사례들은 대중매체들과 다른 것들이 그런 현상은 존재한다고 가정해 온 곳에서 주어진다.『새 정치가들』(the New Statesman)에서 어떤 해설가가 “여기에서 그리고 미국에서도 기독교 운동들은 분명히 우익에서 마음이 편하다,” 왜냐하면 “기독교 교회와 정치적 우익의 의제들은 동료들을 편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반 낙태(anti-abortion), 반 노조(anti-unions), 반 동성결혼(opposed to same-sex marriage), 범죄에 강경함과 같은 것들이 그런 것들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좌익 기독교는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원래 남미의 로마 가톨릭 해방 신학으로부터 미국에서 진보적 복음주의와 체류자들의 “주홍글씨” 기독교(red-letter Christianity of Sojourners), 대부분 영국의 국교도와 비국교도 기독교 사회주의에 이르기까지 교파와 문화적 경계들을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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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좌익 기독교는 종교적 얼굴을 한 세속적 현상은 아니다. 좌익 기독교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성경(the Bible), 교회의 가르침(church teaching), 성례들(the sacraments)로부터 그것을 끌어내며, 우리가 살펴볼 것처럼, 그것들은 종종 잘못 해석되고 잘못 적용된다.
1849년에 “기독교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만들었던 사람들은 마우리스(F. D. Maurice)와 킹슬레이(Charles Kingsley), 루드로우(Thomas Ludlow),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포함하는 그의 집단이다. 그렇지만 이들 초기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은 본능적으로 보다 더 보수적이었으며, “초기 기독교 사회주의 저작들은 경건하고, 간섭적이지만 그러나 인정 많은 왕당 보수주의 그 이상이 아닌 것 같다.” 예를 들면, 마우리스는 “사회적 계급, 군주제와 귀족 정치에 관한 전통적 견해들을 갖고 있었으며, 노조들에 적대적이었다.” 이 집단의 관심사는, 그들이 선택한 명칭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것이 아니었고, “기독교가 사회주의의 도전에 제공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보다는, 확실하게 좌익 기독교(left-wing Christianity)를 채택한 사람들은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엽의 그 집단의 후계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이 후기는, 마우리스와 다른 사람들의 온정주의(paternalism)를 따르는, 영국 노동당(the British Labour Party)의 형성과 동시에 일어난, 그리고 1960년대의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the Christian Soicalist Movement, 현재 Christians on the Left)의 형성을 낳았던, 기독교 사회주의 역사에서 형성기였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곳으로부터 이 논문이 이끌어내진 박사학위 논문은 기독교 사회주의의 이념적 성질을 발견하고 조직화하려 했던 이 시기에 초점을 맞추었었다. 그 연구는 연구 주제와 부합한, 기독교 사회주의를 신봉한 그리고 그들의 사상적 견해들에 대한 해석적 분석을 시도하기에 충분한 책들, 팜플렛들 그리고 강연들의 필사본들과 같은 유형의 기록물을 남긴 주요 인물들에 근거했었다. 그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넓게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개괄적으로 소개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 존 클립포드(John Clifford, 1836-1923): 침례교 목사, 기독교 사회주의 연맹 의장(President of the Christian Socialist).
. 제임스 케이어 하디(James Keir Hardie, 1856-1915): 노동 정치가, 종종 노동당의 설립자로 간주된다.
. 스튜어트 헤드람(Stewart Headlam, 1847-1924): 성공회 목사, 성 마태 조합 설립자(the Guild of St Matthew.
. 헨리 스코트 홀랜드(Henry Scott Holland, 1847-1918): 성공회 목사, 기독교 사회 조합(the Christian Social Union) 설립자.
. 사무엘 키블(Samuel Keeble, 1853-1946): 웨슬리 감리회 목사, 사회 봉사를 위한 웨슬리 감리회 조합(the Wesleyan Methodist Union for Social Service) 설립자.
. 조지 랜스베리(George Lansbury, 1859-1940): 노동 정치가, 1932년에서 5년까지 노동당 당수.
. 리차드 타우니(Richard H. Tawney, 1880-1962): 노동 정치 활동가, 경제사학자.
.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 1881-1944): 성공회 목사, 맨체스터 주교, 욕의 대주교와 캔터베리의 대주교.
. 윌프레드 웰록(Wilfred Wdllock, 1879-1972): 노동 정치가, 독립 노동당 국회의원, 독립 감리교 평신도 설교가.
. 존 휘틀리(John Wheatley, 1869-1930): 노동 정치가, 가톨릭 사회주의 협회(the Catholic Socialist Society) 설립자.
이 사람들은 교단들과 사회적 배경의 배열을 보여주며, 또한 종교의 목사들과 기본적으로 정치적 영역에서 활동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균등하게 나누어지며, 이 시기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을 대표하는 표본을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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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사회주의는, 예를 들면, 이것이 경제학, 역사의 우생학 또는 법학과 같은 과학적인(유사 과학적이라고 불릴 수도 있을 것이다) 것들보다는 기본적으로 도덕적 또는 윤리적 표준들(standards)에서 시작된 것인 한에 있어서 마르크스주의 또는 파비앙주의(Fabianism)와 같은 사회주의의 다른 유형들과 다르다. 그렇지만 이것은 또한 이것이 특별히 기독교 사상으로부터 접근하기 때문에 다른 유형의 윤리적 사회주의와도 다르다. 어떤 작가가 쓰듯이, 기독교 사회주의는 “정당하게 다른 ‘윤리적’ 사회주의들과 함께 묶여진다. 그러나 비록 이것이 윤리적 사회주의로부터 나왔고 그리고 그것들 안에 들어가지만, 이것은 독특한 토대들에 근거한다.” 이 토대들은 성경, 교회의 역사적인 그리고 현대 가르침, 그리고 성례들의 실례를 포함한다. 우리는 이 토대들 각각을 차례로 검토하고,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기독교 사회주의 해석을 비판할 것이다.
성경
THE BIBLE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이 그들의 정치적 신념들을 위한 기초로 성경을 사용하는 것은 광범위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며, 먼저 기독교 사회주의의 핵심 개념인 형제 됨/형제애(brotherhood)를, 그리고 후에 기독교 사회주의를 지지하기 위해 제시된 다른 증거 본문들(proof texts)을 검토해 볼 것이다.
(a) 인류의 형제 됨 (Brotherhood of Man)
기독교 사회주의 저작에서 하나의 중요한 주제, 참으로, 기독교 사회주의를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묶고 있는 핵심 관념은 인류의 형제 됨(the brotherhood of man)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전 인류의 아버지 되심(God’s universal Fatherhood)이라는 관념으로부터 끌어내진 것이다. 이 관념은 부분적으로 마태복음에 있는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끌어내진 것이다.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은, 조지 랜스베리가 주장하는 것처럼, 성경이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인류의 필연적 형제 됨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했으며, 제임스 케이어(James Keir)의 말로 하자면, 그들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서로 형제들이라고 선포하는 복음과 함께 보내진다고 이해했다.
이 명백한 가르침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강력한 논거로서 사용되었다. 사무엘 키블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인류의 형제 됨이라는 위대한 기독교 원리들”을 자본주의 고유의(inherent)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와 상충되는 것으로 판단했다. 키블에 따르면, 경쟁은 “기독교 종교의 가르침에 반대되는(contrary to) 것이며, 그 가르침은 이기주의를 정죄하며, 인류가 이웃을 자신들처럼 사랑하라고 요구한다. 기독교가 인류의 형제 됨을(the brotherhood of men) 선포하고 있기 때문에, 경쟁은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존 휘틀리는 가톨릭 사회주의 항변(A Catholic Defence of Socialism)인『글레스고우 평론』(the Glasgow Observer)에 보낸 글에서 “사기꾼 대 사기를 당한 자의 사회에, 어떻게 형제애가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질문하며 더욱 강력하게 그 점을 지적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성경이 선포하듯 모든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가족 관계들을 실천하는 것을 묵살했고, 그래서 그것들을 실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성경이 주장한 형제적 존재들에 역행하는 것이라는 이 부정적 논거는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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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는 그것에 의해 형제애가 실천될 수 있는 체제라는 긍정적인 논거와 동반되었다. 키블에 따르면, “사회주의라는 중대한 외침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의 외침인 형제애를 위한 것이었다.” 키블의 견해에서 “산업에서 형제애를 요구하는 사회주의자들은 ‘자유’ 경쟁(‘free’ competition)을 시끄럽게 떠드는 경제인들보다 더 그리스도의 마음에 가깝다.” 이 견해는 또한 존 클립포드의 자유 교회 사회주의 연맹(Free Church Socialist League)의 선언에서도 표현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가르쳐진 형제애라는 원리는 현존하는 산업적 그리고 상업적 상황들 아래에서는 충분하게 실행될 수 없다고, 그리고 이 원리의 충실하고 평범한 적용은 모든 자연 자원들뿐만 아니라, 생산, 분배와 교환의 수단들의 사회주의화로 귀착되어야만 한다고 믿는 연맹은 후자의 사회적 질서를 구축함에 의해 전자를 제거하는 과업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에게 사회주의는 성경적 기독교의 자연적이고 정당한 실행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버지시라는 것을 가르치며, 그리고 사회주의는 그것에 의해 세계인들 또는 특정한 사회의 사람들이 형제들과 자매들로서 살아갈 수 있는 체제라는 것이다.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그려진 사회의 주요 규정 특징들은 평등(equality), 협동(co-operation), 그리고 민주주의(democracy)였다. 이것들은 기독교 사회주의의 핵심 개념들이며, 그 각각은 하나님의 온 인류의 아버지 되심(the universal Fatherhood of God)에서 파생된 인류의 형제 됨(human brotherhood)이라는 핵심 개념에 의해 지지된다. 평등이라는 개념은 윌리엄 템플이 설명했던 것처럼 형제애라는 개념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떠나서는 인류의 평등이라는 생각을 지지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가능한 증거들에 의해 판단해보자면, 인류는 어떤 의미에서도 평등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만일 모든 사람들이(all) 한 분 아버지의 자녀들이라면,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은 신분상 평등한 상속자들이다. 그것과 비교할 때 자질과 능력의 명백한 차이들은 중요하지 않다. 가장 심오하고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있어서는 만인이 평등하다.
키블은 “인류는 부자든 빈자든, 고용주든 고용인이든, 높은 계급이든 낮은 계급이든, 백인이든 유색인이든 상관없이 형제들이다. 인류는 동등하게 하늘 아버지의 자녀들이다”라고 썼다.
경제와 산업적 문제들에 있어서 협동이라는 개념은 또한 형제애라는 개념으로부터 끌어내진다. 왜냐하면, 이 해석에 있어서, 한 가족의 구성원들은 서로 경쟁하기 보다는 협력하여 일할 것이기 때문이다. 타우니는 “잘 지휘를 받는 가족은, 불경기 때, 그 구성원들에게 다른 사람들이 부족하더라도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움켜잡으라고 권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그 가족은 그 감소된 자원들이 모든 사람들의 이익에 있어서 최선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려고 노력한다”라고 말했다. 키블은 다음과 같이 쓰면서 이것에 동의한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무언가 가르치려 오셨다면, 그리고 만약 이성과 하나님의 말씀이 타당하다면, 그렇다면 만인은 형제들이며, 인류는 하나님의 가족이고, 서로간의 봉사는 인간 혹은 산업 사회의 유일하게 참된 법칙이다.”
민주주의(democracy)라는 개념이 형제애라는 개념에서 이끌어 내진다는 것은 즉각적으로 명확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만, 만약 민주주의가 개개인이 사회의 관리에 참여하도록 허락하는 체제로 간주된다면, 인류를 한 가족으로 보는 관점에서, 가족의 각 구성원은 정치 과정에서 자기 말과 부분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은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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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은 “인류는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교제하도록 창조되었다. 먼저 하나님과 교제요 그리고 그 교제를 통해 모든 하나님의 다른 자녀들과의 교제다. 그리고 그것은 건설된 모든 체제와 제안되는 체제 안에서의 모든 변화에 적용되어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시금석이다. 이것은 우리가 인격적 교제의 온전함과 풍족함에 더 가까이 가도록 돕는가?”라고 주장했다. 이것으로부터 템플은 민주주의는 최선의 체제인데, 왜냐하면 이것이 모든 사람을 정치적 과정에 포함시킴으로써 교제의 가장 강력한 표현으로 이끌며, “다른 그 어떤 정치적 기획보다도 더 고도의 최고의 가치를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인간성과 인격적 관계성에 부여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 사회주의의 주요 정치적 개념들은 모두 성격상 기본적으로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하나의 핵심 개념으로부터 이끌어내진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b) 다른 증거 본문들
이 핵심 개념을 제외하고,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은 다양한 성경적 사상들과 증거 본문들에 호소했다. 형제애라는 개념뿐만 아니라, 이것들 중 많은 것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the teaching and example of Christ)으로부터 이끌어내진 것이었다. 어떤 역사가는 기독교 사회주의에 대해 “그리스도 중심 신앙”(Christ-centered faith)라고 말한다. 케이어 하디는 “나를 무엇보다 노동 운동 안으로 몰아붙이는 힘은, 그리고 그것을 수행하도록 이끌어가는 영감은 다른 모든 원천들을 합한 것보다도 더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으로부터 이끌어내져 왔다”라고 밝히기까지 했다. 스튜어트 헤드람의 견해는 “지금 결속, 형제애, 협동, 사회주의라는 용어 아래서 어렴풋하게 표현되고 있는 그 모든 사상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서 선명하게 표현되어 온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은 “빈자들과 실업으로 인한 빈곤층을 위한 그것의 희망의 메시지”와 함께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에게 특별한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면, 하디는 “사회주의란 산상수훈에 내포된 가르침들을 산업에 적용한 것이다. 산상수훈은 빈곤에 대한 지속적이고 강력한 논거이다”라고 말했다. 배금(Mammon)에 대한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또한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데, 그들은 자본주의가 그리스도보다는, 물질적 부(material wealth)의 형태로 돈 숭배를 신성시한다고 공격했다. 한 신문 잡지 기고가는 조지 랜스베리의 연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전했다. “사회는 그리스도의 원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돈 숭배의 원리에 근거했다.”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은 부에 대한 그리스도의 다른 비난들을 지적했다. 예를 들면, 헤드람은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그 부자는 단지 부자와 빈자 사이의 대립을 멈추게 하려는 그 어떤 수고도 하지 않고, 그 대립을 당연한 것으로 계속되도록 용인했기 때문에 지옥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 견해는『광산업자들은 어떻게 약탈당했는가』에서 존 휘틀리에 의해 상술된다. 그는 그 책에서 자본주의자들과 그들을 지지해왔던 사람들에 대한 재판을 상상한다. 고소된 자본가들을 위해 판사 앞에서 증언하기 위해 소환된 증인들 중 한 사람은 한 성직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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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 선생, 당신은 기독교가 근거하고 있는 것을 해명하면서 기독교를 손상시키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설립한 하나님인 그분께서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눅 6:24]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증인 - 판사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은 그들이 자기들의 부를 올바르게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판사 - 당신은 왜 그 말씀이 여기서 정죄하고 있는 것은 부를 잘못 관리하는 것이 아닌, 부를 소유하는 것 자체라는 사실에는 눈을 감는 것입니까?
그 비유는 또한 사회주의를 위한 논거들로 사용되었다. 헤드람에게 양과 염소 비유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사회주의자가 되라고 강요하는 것 같다.” 키블은, 하루에 한 데나리온은 하루를 살아가기에 충분한 돈으로서, 그 비유 안의 노동자들 각자는 비록 그들이 하루 전체 동안 고용되지 않았을지라도 하루 생활비를 받았다고 주장함으로써 포도원 일군 비유를 최저 임금을 보장하는 정부를 위한 논거로 만들었다. 그리스도는 또한 때때로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정치적 혁명가로 간주되었다. 헤드람에게, 그리스도는 “급진적 혁명가,” “사회주의적 목수” 그리고 “갈릴리 출신의 혁명적 사회주의자”였다. 랜스베리는 그리스도를 “당시의 가장 위대한 혁명적 인물,” “인민들을 선동하여 계급투쟁을 부추기다가 십자가에 못 박힌 외로운 갈릴리 사람 - 사회주의자, 선동가, 순교자”로 간주했다.
구약뿐만 아니라 신약의 다른 본문들도 사회주적 근거의 부분으로 제시되었다.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는 데살로니가 후서의 바울의 말들도 노동하지 않고 일 없는 자들을 위한 지급에 대항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었다.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은 그 구절을 노동 계급을 이용하며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자본 계급을 언급하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그 해석을 뒤집었다. 헤드람, 하디, 휘틀리, 그리고 키블은 그렇게 주장했다.
헤드람과 하디는 또한 야고보서에서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부자들을 정죄하는 것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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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운동의 한 역사가는 데살로니가전서 안의 “그 몸”이라는 바울의 기술과 “지체 각각이 어떤 기능을 수행하며 상호간의 의존과 교제에 의해 번성하는 몸의 이미지로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에게” 그것의 중요함을 지적한다. 키블은 그 이미지는 “사회의 견본이며, 사람들이 어떻게 지상의 모든 곳에서 더불어 살아야하는 지를 보여 준다”고 주장했다.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라고 기록하는 것도 또한 사회의 집단적, 협동적 질서를 주장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헤드람에 의하면, “첫 기독교인들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가장 단순한 의미에서 공산주의자들(communists)이었다. 그들은 모든 재산을 공동 기금 안에 넣었고 각각의 필요에 따라(according to his need) 모든 사람에게(to every man) 분배되었다.” 하디에게 여기서 그 기독교인들은 또한 “공산주의자들”이었고, 성전은 “자발적 공산주의”(voluntary communism)라는 상태를 묘사한다.
구약으로부터 끌어내진 주요 논거들은 창조론과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땅에 대한 율법들로부터 추출되었다. 형제애라는 기독교 사회주의의 핵심 개념은 명백하게 만인은 하나님에 의해 서로 동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사상과 연결된다. 그 사상은 타우니의 사상의 맥락에서 설명되어왔다. “타우니에게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공동의 인류(a common humanity)와 그 구성원 각각은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는 그의 신념”이었으며, “타우니에게 창조론은 사회는 반드시 구성원의 동등 가치에 근거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타우니는 자본주의의 귀결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가증한 유린”(an odious outrage on the image of God)이라고 보았다. 그와 유사한 주장이 윌프레드 웰록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는 사회가 자본주의적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사회주의적이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우리가 사람을 짐승으로 간주하느냐 아니면 영혼으로 보느냐, 육적 욕구들의 집합으로 보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영적 존재로 보느냐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다. 창조론의 다른 적용은 땅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사적으로 또는 독점적으로 소유되지 말아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랜스베리의 견해는 “땅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고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졌으므로, 인민 전체에게 속한 것이다. 그래서 땅은 인류의 사용을 위한 것이지 게으른 소수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만찬가지로, 훼틀리는 한 노동 계급 청중에게 창조에서 “하나님의 선물들은 여러분으로부터 훔쳐져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키블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땅의 사용을 규정하고 있는 율법으로부터 그와 동일하게 주장한다. “안식년, 땅 채무자들, 전원 주택 건설, 저당, 희년(the year of Jubliee)에 관한 히브리 법규들은 모두 ‘땅은 주님의 것이고,’ 따라서 지주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으며, 그 법규들은 모두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경제적 자유를 보호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성경에서 땅에는 그 어떤 절대적인 소유권도 존재하지 않는다.” 헤드람에 따르면, “히브리 정치에 대한 한 연구는, 특별히 희년법에 의해, 공정하게 땅을 다루기 위해, 그 공동체 전체가 그것의 진가를 누리게 하기 위해 주의 깊은 조정들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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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하디는 “땅은 완전히 매각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빚에 대한 담보로서 일정 기간 동안보다 더 소유될 수도 없었다. 심지어 채무자들은 희년이 되면 모든 채무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쓴다. 템플은 희년은 땅에 대한 독점을 방지하기 위해 회복시켜져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또 다시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정치적 강령을 방어하고 진척시키기 위해 성경을 광범위하게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의 가르침
CHURCH TEACHING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의 저작들은 그들이 성경에 더하여 자기들의 신념들을 부분적으로 교회의 가르침으로부터 끌어내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교부들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현대 교회의 가르침도 포함했다. 예를 들면, 존 휘틀리는 그의『가톨릭 노동자』(Catholic Working Man)에서 자기 주장들은 “교부들, 마닝 추기경(Cardinal Manning), 그리고 아마도 그 직접적인 지역 상황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대주교 맥과이어(Archbishop Maguire) 자신으로부터 광범위한 인용들에 의해 강화 된다.” 맥과이어는 그의 사회주의적 견해들을 위해 휘틀리를 비난해 왔었던 글래스고우의 대주교가 되었다. 타우니의 견해는 “만약 사람들이 기독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권위에 근거할 뿐만 아니라 [ㆍㆍㆍ] 우주의 도덕적 기획의 본선을 착수시키고 사람의 의무와 권리, 자유, 책임, 공의, 등등을 추론해내는 원리들의 본체를 가질 것이다”는 것이다.
역사를 통한 교회의 가르침과 실례에 대한 가장 폭넓은 취급을 제공하는 사람은 사무엘 키블이다. 그는 그의『사회 질서를 위한 기독교의 책임』(Christian Responsibility for the Social Order)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비슷하게 폭넓은 성서신학을 언급한 후 교회사를 통해 사회주의에 대한 연대기적 설명을 40쪽이 넘게 기술한다. 그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빈자들, 과부들, 그리고 고아들을 보호했다” 그리고 “노동에 종사함으로써 노동을 고귀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면서 사회적 개혁에 대한 그들의 공헌에 주목함으로써 시작한다. 제임스 케이어 하디는 “재산에 있어서 공산주의는 그리스도의 죽음이후 적어도 삼백년 동안 기독교인들에 의해 실천되었다는 것이 이제 알려졌다”는 말을 더한다. 키블은 초대 교회의 복음서와 서신서들의 위경의 몇 부분을 인용하면서, “너는 네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너의 이웃과 나누어라. 너는 무엇이든 너의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라는 바나바서신 기자에 의해 기술된 “빛의 길”을 지적하며, “과부들을 변호하며, 고아들의 주장을 판단하고, 너의 재산과 부를 이렇게 그런 일에 사용하라”는 헤르마스 목양서로부터 인용한다.
그러고 나서 키블은 교부들의 저작들에 눈을 돌리며 먼저 “마음과 영혼으로 교제하는 우리는 소유물에 있어서도 교제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라는 터툴리안의 말에 주목한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모든 인류가 동등하게 누려야 하는 본성 공통의 은사들에 있어서 하나님의 평등을 본받아”만 한다는 키프리안의 말이 인용된다. 밀란의 암브로스는 “부의 불균등한 분배는 이기주의와 폭력의 결과다”라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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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이 인용들은 평등과 공동 소유권을 강요하는 것 같다. 키블은 또한 어거스틴에 대해 쓰는데, 어거스틴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개인 재산의 소유를 삼가거나, 만약 우리가 그것의 소유를 삼갈 수 없다면, 그것을 사랑하는 것을 삼가자”라고 쓴다. 윌리엄 템플은 또한 그의『기독교와 사회 질서』(Christianity and the Social Order)에서 어거스틴을 인용한다.
키블은 그러고 나서 그의 초점을 초기 개혁과 개혁 시대로 옮긴다. 그는 먼저 존 웨클리프가 “아무도 단독의 재산을 가지지 말아야하고, 모든 것은 공동으로 소유되어야한다”고 말한 것을 인용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대인 존 볼(John Ball)이 “재화가 공유되지 않는 한, 농노들과 신사들이 있는 한 재산은 영국에서는 결코 올바로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인용한다. 키블은 어느 정도 마틴 루터를 칭송하지만, 그가 농노들에 대항한 것을 비판하며, 토마스 뮨처(Thomas Muntzer)가 “우리의 군주들과 통치자들은 모든 고리대금업자들, 장물애비들, 강도들의 수하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자기들의 소유물로 삼는다”라고 말한 것을 인용한다. 존 칼빈, 휴 라티머(Hugh Latimer) 그리고 토마스 모어(Thomas More) 같은 그 시대의 다른 교회적 인물들도 또한 사례들로 제공된다. 윌프레드 웰록도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는 “위클리프, 루터, 낙스와 같은 사람들의 정신 속에” 있었다고 주장했으며, 하디는 볼에게 “위클리프의 공산주의적 가르침들,” “공산주의자 존 후스”, 뮨처와 재침교도들과 평등주의자들을 지적했다.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은 영감을 위해 과거 교회를 되돌아보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현대 교회에서 사회주의의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 전기 작가에 따르면, 스튜워드 헤드람은 “사회주의 안에서『공동 기도서』를 한 교과서로 사용했다.” 타우니는 또한 번영하는 사회는 “협동 노력과 도덕적 원리들에 대한 협력에 의존한다. 그리고 도덕적 원리들은 이 세대의 예언자들이 경멸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계속 결핍 속에 있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도대체 무엇이 한 집에서 한 마음이 되게 하는지를 보기에는 너무 욕심이 많고 근시안적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함에 있어서『공동 기도서』를 인용한다.
가톨릭 사회적 가르침(Catholic social teaching)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존 휘틀리의 정치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것으로 파악되어 온 것이다. 한 저자에 따르면, “가톨릭 사회적 가르침”은 “정부의 목적은 개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적절한 상태의 관점에서 공동선을 진작시키는 것이다”라는 것을 명확하게 유지한다. 휘틀리의 생애 동안 써진 유일한 주요 문서는 교황 레오 13세의 1891년 Rerum novarum(새로운 사태) 또는 “de conditione opificum”(노동의 상황에 대하여)이었다. 그 문서는 산업 혁명에 의해 발생한 문제들에 응하기 위해 써진 회칙이었다. 왜 그 문서가 휘틀리같은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사회주의를 주장하기 위해, 또는 자기들의 개인적인 사회주의적 신념의 기반으로서 사용될 수 있었는지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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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레오는 “그러나 모든 사람이 대부분의 극빈자들을 이 순간에 너무도 무겁게 내리 누르고 있는 빈곤과 비참함 때문에 어떤 해결책을 찾아야만, 그것도 빨리 찾아져야만 한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그 어떤 것이든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고 쓴다. 또 다시 레오는 “사람들을 그저 돈 벌기 위한 수단들로 이용하기만 하는 욕심 많은 투기꾼들의 잔학함”을 언급하며, 통치자들에게 빈자들이 “거주하고, 입고 먹고 사는 것”을 보장하라고 요구한다. 여기서 교황 레오는 사회주의적 사상들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교회사를 통한 가르침과 사례들이 기독교 사회주의를 위한 논거로서 전개되었다.
성례들
THE SACRAMENTS
성례들은 기독교 사회주의의 주요 국면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 운동의 한 역사가는 “성례적 사회주의”(sacramental socialism), “그리스도의 사회주의의 최고의 증거와 증언은 교회의 거룩한 성례들, 특히 세례와 미사 안에 있다는 신념을 나타내는 경구”라고 썼다. 이런 성례주의는 비국교도들보다는 로마 가톨릭이나 성공회 든 가톨릭교도들에게 더 중요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로마 가톨릭 전통에서 예배의 초점은 말씀 선포보다는 성례들의 집행에 있다. 최초의 성례적 사회주의자 헤드람은 그 두 성례들을 동등하게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세례는 평등의 성례이고, 성찬은 형제애의 성례다. 이 둘은 근본적이다. 세례는 모든 계급 구분들을 철폐하고,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 때문에 만인을 기독교회 안으로 받아들인다. 성찬은 만인을 형제애의 삶을 살도록 서약시키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능력을 부여한다.”
헨리 스콧 홀랜드(Henry Scott Holland)는 그 견해를 공유했다. 그는 “인간의 사회적 결속”을 성찬에 표현되는 “교회 교제의 필수적 결속”과 연결시켰다. 홀랜드의 “기독교 사회 조합”(Christian Social Union)은 그 구성원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성례 안에서 연합의 결속”을 갖는 사람들이어야만 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는데, 그 근거는 이것이 기독교 사회 조합이 “그들의 성찬을 그 구성원들에게 서약시킨 사회적 봉사를 성체배령자들(Sacraments)로부터 요구”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윌리엄 템플은 성찬(the Eucharist)을 “기독교 사회의 완전한 그림”이라고 보았다. 조지 랜스베리는 또한 “나에게 성찬식(the Communion service)은 그리스도의 재 희생일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보다 좋게 만들기 위해 희생해온 선한 남자들과 여자들을 기억시키는 것이기도 하다”라고 말한다. 헤드람은 “성찬(Holy Communion)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거룩한 공산주의자들(communists)이어야만 한다”고 선언했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헤드람은 “우리는 모든 아기들 각자는 행상인의 아기든 군주의 아기든 상관없이 다른 모든 아기들과 평등하게 세상에 태어난다고 주장한다”고 씀으로써 성찬을 세례와 연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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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람은 다음과 같이 그 두 성례들은 서로 보완적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가장 구식 성직자가, 자기들의 정치적 성향이 또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견해가 무엇이든지, 그 어떤 프랑스 혁명이 행했던 것보다 더 원대한 방식으로 평등의 진리를 증언하면서 노동자의 갓난아기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단순한 사실에 의해 존재했던 것처럼, 당신이 가장 정숙하고 가장 경건하게 당신의 힘과 원기회복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받기 위해 부활절 아침에 무릎을 꿇었을 때, 당신은 또한, 실현되었을 때, 세상을 중생시키는 진리를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 진리는 강한 자들을 굴복시키고, 교만한 자들을 흩으며, 부자들의 지갑들을 비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에게, 그리고 특별히 헤드람에게, 성례들은 둘 다 사회의 사회주의적 질서를 위한 사례들이며 또한 논거들이었다.
비판
CRITIQUE
우리는 앞에서 논의한 것으로부터 기독교 사회주의는 종교적 명칭을 한 단지 세속적 사회주의라기보다는 기독교 사상 - 성경, 교회의 가르침, 그리고 성례들로부터 도출된 논거들 - 의 한 형태에 근거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렇지만 남은 문제는 기독교 사회주의들이 기독교 신학에 호소하는 것이 정당한가 아니면 정당하지 않은가이다. 이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기독교 사회주의의 신학적 근거가 사실은 아주 그릇된(is deeply flawed) 것이라는 것을 살펴볼 것이다.
앞에서 논의했던 것처럼, 기독교 사회주의의 핵심 개념은 형제애이며, 평등, 협동, 그리고 민주라는 다른 주요 개념들은 모두 그 핵심 개념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전 인류의 형제 됨이라는 개념 자체는 하나님의 전 인류의 아버지 되심이라는 관념으로부터 도출된다. 그렇지만, 이 관념은 쉽게 논박된다. 주요 본문은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 . .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라는 요한복음에서 발견된다. 우리는 또한 히브리서 기자의 말들을 지적할 수 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두 구절들은 기독교인들이 아닌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아버지로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지상의 만인이 하나의 커다란 가족을 형성하며, 그래서 그 가족적 토대 위에서 물자들을 나누어야한다(to share resources)는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의 논거를 논박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존 클립포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가르쳐진 형제애라는 원리는 기성 산업과 상업적 상황들 아래에서는 적절하게 작동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이 원리의 신실하고 평범한 적용은 생산, 분배, 그리고 교환 수단들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 자원들의 사회화로 귀결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가르쳐진 형제애라는 원리”는 사회의 집단(전체)주의적 질서를 위한 토대로서 전 인류적 가족을 제안하지 않는다. 사실, 이것은 인류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두 진영으로 나뉜다는 것을 주장한다.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은 지상의 만인은 하나님에 의해 평등하게 창조되어 왔으며, 그 토대 위에서 아들들과 딸들로서 하나님께 그리고 형제들과 자매들로서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며 반대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분의 피조물들이라는 의미에서는 만인이 하나님의 자녀라고는 하나, 타락한 세상에서는 만인 모두가 그 토대 위에서 하나님과 연결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졌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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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집단적/전체적(collective) 사회라는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의 비전은 비전과 목적의 일치를 요구한다. 이 일치는 공통 기독교 신앙이라는 토대에 근거한 형제애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잠재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신앙의 토대에 근거한 형제애를 나누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공동 피조물이라는 토대 위에서 형제애를 나눈다는 것이 용인된다할지라도, 이 일치는 그런 신앙의 토대에 근거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는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에 의해 모두 창조되었다는 점에서는 서로 연결되어있다. 그러나, 반복하자면, 이 타락한 세상에서는, 인류는 신자들과 불신자들로 구성되며, 이 두 무리는 서로 다른 뜻, 목적, 그리고 우선사항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이 하나의 공통 신앙의 토대 위에서 그것의 비전과 목적의 일치와 함께 형제 됨의 실재를 주장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 논거가 하나님의 피조물들이라는 공통 상태라는 토대에 근거한 형제애를 위한 것이라면, 이것은 불충분한 것이다.
의문들이 또한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의 다른 성경 사용들에도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재산소유(property)에 반대하는 일관되고 강력한 논거”라는 산상수훈에 대한 케이어 하디의 견해는 지지를 받을 수 없다. 하디는 그의 마음에 “너를 위해 보물을 땅에 쌓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에 개인 소유물은 공영화되어야만 한다(must be collectivised)는 생각을 주입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보다는 이 구절은 우리에게 일시적이고 물질적인 것들 보다는 영원하고 영적인 것들에 더 집중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 물질적인 것들에 집중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사회주의적 사회의 창조가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이 반대한 물질숭배를 제거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지 않다.
정부 의무의 최저임금을 위한 논거로서 포도원 일군들의 비유에 대한 사무엘 키블의 해석도 비판받을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비유들은 지상적 문제들보다는 “천국의 비밀들”을 말하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이 경우에, 그 비유는 신자 각자가 그들이 구원받은 삶의 시기에 상관없이 영원한 구원이라는 그들 각자가 받을 공통 상급을 언급한다. 우리는 또한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그 몸”을 검토한 것을 사회의 공정한 질서잡기에 적용하는 문제를 취급할 수 있을 것이다. 언급된 그 “몸”은 사회가 아니라 교회이다. 바울은 “같은 성령으로 우리가 모두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고,” 이 몸은 “그리스도의 몸,” “교회”라고 쓴다. 사도행전의 공동 소유에 기술은 사회의 사회주의적 체제를 강요하지 않는다. 이 제물의 관대한 줌과 나눔은 전적으로 교회 안에서 발생했지, 사회 전체에서 발생하지 않았다. 동일한 것이 이스라엘의 땅에 관한 규례들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이 규례들은 구약 신자들의 공동체에 주어졌고, 그래서 현대에 사도행전에서 예시된 것처럼 교회 안에서의 재물의 값없는 나눔을 지시한다.
혁명적 인물로서 그리스도라는 관념은 또한 성경이 그리스도께서 부당하게 혁명가로 비난받았다고 가르치는 것을 감안하여 깨끗이 사라져야만 한다.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
우리는 스스로 공관복음서를 볼 수 있고,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을 금하지 않으셨고, 그보다는 “그러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라고 가르치셨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예를 들면, “공산주의자, 선동자, 희생자, 인민들을 분발시키고 계급투쟁을 일으키다 십자가형에 처해진 고독한 갈릴리 사람”이라는 랜스베리의 예수에 대한 묘사를 부정한다.
사회주의를 주장하기 위한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의 과거와 현대의 교회 가르침의 사용도 또한 잘못된 것이다. 예를 들면, 레룸 노바룸의 사용은 교황 레오가 그 회칙 자체 안에서 “사회주의의 중심 교의인, 재화의 공동체(the community of goods)는 반드시 전적으로 거부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사람 각자는 날 때부터 자기 자신의 것으로서 개인 재산을 소유할 권리를 갖는다”라고 선언한 것을 고려하여 거부되어야만 한다. 키블에 의해 허마스 목양서와 바나바 서신 같은 출처들로부터 채용된 인용들의 어떤 것들은 경제적 단체보다는 자선이라는 개인적 행동을 옹호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예를 들면 “마음과 영혼이 하나 된 우리는 물질에 있어서 친교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라는 터툴리안 같은 교부들로부터의 인용은 공동체로서 교회에 적용되는 것이지, 사회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형제애에 관한 우리의 논의를 계속하자면, 우리는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은 “마음과 영혼이 하나”가 되지 않는다고 다시 말할 수 있다. 교회의 과거와 현대의 가르침의 많은 것들이 해석에 열려있지만, “아무도 독립된 재물을 가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모든 재물은 공유되어야한다는 이상은 남는다”라는 위클리프의 가르침과 같은 어떤 것들은 명확하게 사회주의를 제안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렇지만,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복음주의의 오직 성경이라는 교리와 함께, 과거나 현대 교회의 인물들이 찬성하든 반대하든 사회주의 문제들에 대해 극히 드물게 말해왔다고 결론짓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성례들에 주어진 잘못된 해석들은 문제가 더 심각하다. 스튜어트 헤드람이 세례를 “평등의 성례”(Sacrament of Equality)라고 본 것은 침례교 관점에서 쉽게 거부될 수 있다. 침례교의 1968년 신앙 고백은 “실제로 하나님께 회개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사람들만이 유일하게 이 의식(ordinance)에 참여하기에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침례교 관점을 취할 필요조차 없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신자의 자녀들은] 언약의 표지로서 세례에 의해 기독교회에 접붙여져야 하며, 불신자들의 자녀들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사실, 헤드람 자신의 영국 교회의 39개 조항들조차 그 성례를 “고백의 표지와 구별의 표식, 그것에 의해 기독인들이 비기독인들로부터 구별되며, 또한 중생 또는 신생의 표지이고, 그것에 의해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정당하게 교회에 접붙여지는 것”으로 본다. 우리는 침례교, 장로교, 그리고 성공회 전통에서 세례는 전 인류의 평등을 상징하기 보다는, 사실은 신자들 또는 신자들의 자녀들과 불신자들 사이를 구별시킨다는 것을 본다.
이것은 주의 만찬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39개 조항은 주의 만찬이 “모두가 형제애의 삶을 살 수 있게 한다”기 보다는 고린도전 11장에 근거하여 그 성례를 그리스도인들에 한정한다. 왜냐하면 만약 비기독교인들이 그 떡과 잔을 먹고 마신다면,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를 함께 먹는 것이 아니고, 그보다는, 판결을 내리자면, 단지 그 표지 또는 성례를 먹고 마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헤드람의 그 성례의 보편적 적용은 그 자신의 교회의 기본적인 문서들 중의 하나에 의해 거부된다. 랜스베리 또한 “내게 있어서 성찬(the Communion service)은 그리스도 재 희생일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보다 좋게 만들기 위해 희생한 선한 남자들과 여자들 모두를 기억시키는 것이다”라는 그의 견해에 있어서 또한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주의 만찬이라는 의식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 성례는 오로지 그리스도에 대한 회상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신학적 논거의 많은 것은 그래서 면밀한 조사를 견뎌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경, 교회의 가르침, 그리고 성례들에 부여된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의 해석은 잘해야 의심스러운 것일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 명백하게 그릇된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
CONCLUSION
2016년 10월 25일 주일날에, 노동당 당수로서 재선된 다음날, 제레미 코빈(Jeremy Corbyn)은 리버풀 컨퍼런스 지역 가까이에 있는 한 복음주의적 성공회 교회에서 열린 좌익 기독교 (the Christians on the Left) 컨퍼런스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날 아침에 예배를 위해 모였던 기독교인들은 코빈이 “기독교의 근본적인 교의들”을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 “나눔”(sharing), 그리고 “동정심”(compassion)이라고 설명한 것에 목소리로 찬성을 표했다. 같은 날 아침에 코빈은 BBC의 앤드류 마르 쇼에 출연하여 정부가 500조를 경제에 “출자”할 것을 주장했고, “변화된 세계” 집회인 추진력(the Momentum)에서 좌익 집단의 이상의 “중심적이고 대세적” 타당성을 주장했다. 꼭 열두 달 전에, 미국에서,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는 선거 유세차 복음주의 리버티 대학교를 방문했다. 그는 거기서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는 아모스서의 말씀에 근거하여 사회적 정의에 대한 한 비전을 제시했다. 그는 이것은 “형제들과 자매들 사랑을 찬미하지 않는, 빈자들이나 병자들 사랑을 찬미하지 않는, 그러면서 돈과 큰 부의 획득을 숭배하는 나라와 세상에서”는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샌더스의 연설은 “빈자들을 위한 정의를 선언하고, 그가 ‘이 가장 하찮은 사람들’을 위한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왔기 때문에” 목사이며 리버티 졸업자로 하여금 그 상원의원을 대통령으로 찬성하도록 만들었다.
이 사례들은 앞의 논의의 현대적 관련성을 나타낸다.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기독교인들은 계속해서 사회주의자들의 안건과 제레미 코빈과 버니 샌더스같은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영국에서, 기독교 사회주의의 주요 형성기에 있어서 조차, 사회주의를 위한 기독교 입장은 단순하게 형성되어오지 않았다. 산상수훈은 “재물소유를 반대하기 위한 지속적이고 강력한 논거”를 제공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민중을 선동하고 계급투쟁을 부추기다 십자가에 달린” 혁명가도 아니었다. 교회의 가르침은 정치나 경제의 문제에 대해서는 일관되지 않으며, 그래서 가르침은 권위 있는 것으로 간주되지 말아야만 했다. 성례들은 평등을 그려내기 보다는 구별을 비춘다. 정당하게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오직 신자들 또는 신자들의 자녀들이며, 성찬은 오직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것이다. 전 인류의 형제 됨이라는 생각은 그 어떤 정도라도 지지받을 수 없다. 그래서 만약 이것이 기독교 사회주의의 중심 개념이라고 수용된다면, 기독교 사회주의의 토대는 결딴난다.
주의해야만할 것은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진보적 입장이 아닌 보수적 입장을 지지해야만 한다는 것을 또는 사회주의 경제가 아닌 자본주의 경제를 지지해야만 한다는 것을 제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를 위한 기독교 입장에 대한 논의는 똑같이 그릇된 신학적 논거들을 생각해낼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무엘 키블은 포도원 일군들의 비유를 정부 의무의 최저임금을 위한 논거로 이용했다. 우리는 이것이 엉뚱한 것임을 알게 되겠지만, 이것은 그 포도원의 주인이 자기 개인 소유를 지배했었고 스스로 임금을 결정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삼고 동일한 비유를 정 반대의 결론을 끌어내는데 사용하는, 미국 가족 협회(the American Family Association)의 브라이언 피숴(Bryan Fischer) 만큼이나 엉뚱하다. 피숴는 “결론적으로, 예수는 자본가였다. 그 안에서 그분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경제는 생산 수단의 개인 소유권이 함축된 경제이다”라고 주장한다.
양쪽 입장의 대립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그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도 사람이 만든 그 어떤 정치적 신념 체계도 지지하기를 가르치는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만 한다. 그렇지만 그 적절한 경고와 함께, 우리는 기독교를 사회주의와 결합하는 것은 이중적인 위험을 의미한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먼저,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은 주석적 실행(exegetical exercise)보다는 자의적(eisegetical) 실행에 바쁘다. 그들은 자기들의 사회주의를 신학으로부터 끌어내기 보다는 자기들의 사회주의를 자기들의 신학 안으로 집어넣어 읽는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의 경고가 꼭 들어맞는다. 왜냐하면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은 “자기 자신의 파멸을 위해” 성서를 “비틀고” 또는 “뒤트는” 사람들 중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이라는 복음 메시지를 사회 개선의 메시지로 바꿔치기함으로써 거짓 복음(a false gospel)으로 작동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위의 목사가 베니 샌더스의 메시지를 “복음”으로 보는 것을 주의해야한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렇다면, 비록 우익 기독교의 보다 명확한 전통 때문이기도 하지만, 좌익 기독교로서 모호한 것이 있다. 좌익 기독교는 종교적 얼굴을 가진 세속적 주의가 아니고, 신학적 사고로부터 많은 것을 끌어낸다. 인류의 형제 됨이라는 기독교 사회주의의 주요 관념 자체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라는 관념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며, 평등, 전체주의, 그리고 민주라는 개념들에 도달하는데,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에 근거한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비유, 사도들의 서신들, 그리고 구약의 토지에 대한 법들은 사회주의를 위한 논거들로 변형될 수 있었다. 과거 교부들의 저작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사례들과 같은 교회의 가르침과 사례 그리고 현재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을 위한 기초로 놓인 성례적 문서들과 교황의 회칙에 대한 해석들은 또한 사회주의자들의 입장에 공헌했다. 그것은 형제 됨과 평등이라는 성례주의자들에 의해 전해진 것 같은 그 메시지들에게도 동일하게 그렇다. 그렇지만 이 신학적 논거의 대부분이 너무도 오역, 오용, 그리고 자의적 해석으로부터 끌어내진 그릇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 사회주의가 진정으로 전혀 기독교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주제어
기독교 사회주의 / 사회적 복음 / 해방 신학 / 정치학 / 정치 신학 / 자의적 해석
KEY WORDS
| Christian Socialism | Social Gospel | Liberation Theology | | Politics | Political Theology | Eisegesi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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