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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H. 더함의 글들

윌리엄 H. 더함의글: 방언에 관해 딕슨 박사에게 대답

한오신 2023. 2. 15. 12:22

딕슨 박사에게 대답

Doctor Dixon Answered

 

 

 

 

Pentecostal Testimony 1:5 (July 1910), 12-14.

 

이창승역

 

 

    지난 몇 달 동안, 무디 교회의 목사인 딕슨 박사(Dr. A. C. Dixon)가 방언을 주제로 두 번 이상 설교했고, 최근에 그 주제에 대해 소책자를 출판했는데, 그 중 한 권이 내 앞에 있다. 그가 그 주제를 공정하게 다루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그 문제에 대한 다른 견해를 들을 권리가 있다고 느껴서, 나는 그가 진술한 몇 가지에 대해 대답하려고 이 글을 쓴다. 나는 몇 가지 점들에 대해서만 겨우 건드릴 시간만 갖고 있을 뿐이며, 지면도 한정되어 있어서 아주 간략하게 써야만 한다. 나는 언제나 딕슨 씨를 매우 존경하고 있었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나는 그가 그리스도를 구주로서 신실하게 설교하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굳건하게 방어하고 있다고 믿어왔다. 나는 그에 대항하여 무엇이든 말하거나 행할 마음이 없다. 나는 단지 내가 믿기에 하나님의 명백한 진리라고 믿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쓴다. 그리고 내가 믿기에 내 형제가 그 진리를 정당하게 다루는데 실패했다.

    무엇보다도, 딕슨 씨는 사도들과 다른 사람들이 오순절 날 정말로 다른 방언들을 말했는지 또는 사람들이 단지 자신들의 언어로 들었는지 의심한다. 성경은 그들이 다른 방언들로 말했다고 분명하게 말하며,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그들이 정말로 다른 방언들로 말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1 페이지에서 반복되지 않은 것”(Not Repeated)이라는 제목으로 오순절적 경험은 결코 반복되지 않았으며, 방언 말함이 기록된 다른 사례들에서 그것의 증명을 시도한다. 이것은 그 사람들이 다른 방언들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의 의도를 파악했다면, 그들은 단지 같은 언어를 다른 방식으로 말했을 뿐이다. , 성경을 탐구해보고, 딕슨 박사의 그런 견해가 옳은지 살펴보자. 그의 견해는 오순절적 경험은 결코 반복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047절에서,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 사람들에 대해 그들은 우리처럼 성령을 받았다고 말한다. 사도행전 1115절에서 베드로는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 위에 임하셨다고 말한다. 이제 베드로와 함께 있던 사람들 모두를 확신시켰던 것, 이방인들도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시켰던 것은 바로 다른 방언들을 말하는 것, 또는 딕슨 박사가 쓰는 것처럼 다른이라는 형용사를 뗀 방언들이었다. 말해진 것은 초자연적 방언들(supernatural tongues)이었다는 것을 딕슨 박사 같은 지식인이 보지 못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오순절 날에 그가 받았던 것과 동일한 것을 받았다는 베드로의 분명하게 두 번 반복된 진술은 우리 형제의 논증 아래 있는 이 빈약한 근거를 완전히 제거한다. 우리는 가시적인 불의 혀 또는 급하고 강한 바람의 소리의 부재는 그들이 받은 것이나 따르는 방언들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볼 수 없다. 오순절 날에 주어졌던 것은 성령이었으며, 고넬료의 집에서 주어졌던 것도 성령이었다. 각 경우에서 이것은 성령이 말하라고 주신 것을 방언으로 말함에 의해 증명된다.

    딕슨 박사는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들이 따르리니,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우리의 복된 주님의 말씀들에 관련하여 동일한 빈약한 논거를 사용한다. 우리 생각에는 주님이 의도했던 것에 관하여 그 어떤 의문도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그분의 의도에 관해 제기된 그 어떤 문제도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모든 사람들이 그분께서 초자연적인 방언들을 의미하신다는 것에 동의해 왔고, 사도행전 2장에서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게 성취되었는지를 본다. 그와 동일한 것이 사도행전 196장에도 적용된다.

    2 페이지에서 딕슨 씨는 고린도전서 14장에 기록된 방언 말함의 주제를 취한다. 성령께서 말하라고 주시는 대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과 말하는 자(the speaker)가 자신을 통제하여 그가 택하는 대로 말하거나 말하지 않을 수 있다고 명백하게 말하는 고린도에서처럼 방언의 은사를 실행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는 오순절 사역에 반대하는 자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부정된 것을 인정한 후에, 그는 방언 은사와 통역의 은사라는 주제를 취한다. 우리 생각에는 우리의 형제가 이 두 주제들 모두에 있어서 아주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다. 이 점들에 대해 대답으로 나는 그의 이론들에 대항하여 성경과 사실들(Scripture and facts)을 제시하려 한다. 4 페이지, 네 번째 문단에서 그는 방언 은사에 관해 이것은 황홀경적이고 광적인 경험(ecstatic rhapsodical experience)으로서, 생각 없이 감정만 표현한(expressed emotion without thought) 것이다라고 말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4절부터 10절까지 어떤 은사들은 성령으로 주어진다고 말하며, 방언들은 그 은사들 중의 하나로 분류된다. 진정한 성령의 은사를 황홀경적”, “광적”, “감정적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성경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다. 방언은 하나님의 성령의 진정한 은사이며, 방언이 열등한 은사라거나 구하지 말아야할 것이라고 가르치는 성경 구절은 단 하나도 없다. 이 편지를 쓴 사람이 그가 우리를 방언의 은사가 별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믿도록 인도할 만큼 가치가 별로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의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사로 주실 것이라고 진정으로 믿는다는 것이 가능한가? 그는 반복해서 방언을 황홀경적”, “광적”, “황홀경적 기쁨의 은사등등으로 부르는데, 이런 행태는 방언을 어수룩하고 단순한 감정주의(emotionalism)로 만들면서 비웃거나 비난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방언을 성령의 은사라고 부르며, 말하는 자가 하나님께 말하는 것(the speaker speaks to God)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딕슨 박사가 방언 은사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것처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그분의 자녀들이 그분 자신과 소통하는 수단(a means of communication)으로 약속하시는 것이 가능한가? 삼년 전에 나는 딕슨 박사가 한 강연에서 방언은 단지 영적인 황홀경적 언어이고, 너무 행복한 나머지 자신에 대한 통제를 잃어버린 결과이고, 단지 그들의 감정들을 알 수 없는 중얼거림(uninteligible gibberish)으로 표출하는 것이며, 통역의 은사는 단지 그런 때 어떤 사람이 일어나서 방언을 말하고 있는 사람은 미친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에 대한 통제를 잃어버릴 정도로 행복한 것뿐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것은 우리가 검토하고 있는 글에서 반복된다. 그의 논점을 분석해 보면, 방언은 단지 황홀경적 발성(ecstatic utterances)이고, 미칠 듯이 기쁠 때 이성(a person)을 벗어나는 것이며, 통역은 단지 이것이 그런 경우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어떤 성령의 은사를 주시고서는 그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으신가? 나는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의 지성에 이 문제를 호소한다.

    우리의 논점은 방언은 초자연적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성령으로 비밀이 말해진다고 말한다. 우리는 통역은 말해지고 있는 것을 실제로 통역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해지는 비밀들은 사람의 이해가 그것들을 파악할 수 있는 자연의 영역 안으로 내려지는 것들이라고 믿는다. 성령은 한 사람을 통해 비밀들을 말씀하시며, 다른 사람들 통해 그것들을 통역하신다. 이 견해는 성령의 이 복된 은사들을 그것들이 속한 곳까지 높인다. 딕슨 박사의 이 주제에 대한 가르침은 방언들이 성령의 은사들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완전히 제거하며, 아주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만든다. 그가 말하는 것이 옳다면, 너무도 행복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방언을 말할 수 있고, 한 죄인이 그 어느 누구나처럼 통역할 수 있을 것이다. 독자 스스로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판결하라.

    “이 황홀경적 발화와 관련된 딕슨 박사의 진술들과 실제적 사실들과 비교해 보자. 미칠 듯이 행복(rapturously happy)할 때만 방언을 말하는 것인가? 필자는 거의 삼년 반 동안 성령으로 충만해져 방언을 말해왔고, 그래서 실제적 경험(actual experience)으로부터 말할 수 있는데 이 주제에 대한 딕슨 씨의 생각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그리고 다른 분야들에 대해서는 모든 배움과 지혜와, 지식을 쌓았겠지만, 그는 이 경험에 관한한 무엇이든 아무런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신문 5만부가 배포될 것이다. 그것들은 방언을 말하고 있는 수천 명의 사람들 손에 들어갈 것이며, 그들 모두는 이 진술에 관해 나를 지지할 것이다. 나는 190732일에 처음으로 방언을 말했다. 성령께서는 내 위에 임하셨고, 그분의 능력 아래 넘어져 있었다. 그 날이 바로 내가 성령침례를 받은 날이다. 나는 인격적인 성령(personal Holy Spirit)께서 오셔서 내 안에 그분의 거처를 취하시는 것을 의식했다(conscious). 그분은 놀랍게 나를 다루고 계셨고, 그분이 나의 음성기관들(vocal organs)을 조종하기 시작하자마자 곧 나를 통해 방언으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거기에는 딕슨 박사가 말하는 것 같은 황홀한 것이나 또는 감정적인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행복했고 계속 행복할 것이었지만, 방언을 일으킨 것은 나의 행복이나 감정들이 아니었다. 나는 그 제자들이 오순절에 그랬던 것처럼 성령께서 말하라고 주시는 대로(as the Spirit gave utterance) 말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방언을 일으킨 것도 성령의 역사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거의 매일 그리고 종종 하루에도 몇 번씩 방언을 말해왔지만, 그러나 무척 행복할 때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자들을 위한 또는 주님의 일을 위한 부담아래 있을 때 또는 진지하게 기도할 때에 방언을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그분이 원하실 때, 그리고 내가 기꺼이 그것을 해야겠다고 할 때 말씀하신다(He speak). 이것은 통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분은 시간이 지나고 다시 방언으로 말해진 메시지에 대한 통역을 내게 주어 오셨다. 그리고 다른 때에, 다른 사람들이 서서 그분이 나를 통해 방언으로 말씀하셨던 것을 통역할 때, 나는 그와 동일한 분명한 통역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믿음을 놀랍게 북돋우는 것이다. 오늘날 수천의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 속에서 경험된 실제적 사실들(actual facts experienced)과 나의 딕슨 형제에 의해 제시된 이론들은 얼마나 대조적인가.

    7 페이지 다섯째 문단에서 딕슨 박사는 방언이 신자들을 위한 표적이기 보다는 불신자들을 위한 표적이었다는 놀라운 진술을 한다. 나는 성경의 학생이 이것을 믿을 수 있을까 의심한다. 그 어느 누가 오순절 날에 사도들로 하여금 방언을 말하게 했던 것이 그들 안에 있던 불신이었다고 믿겠는가? 그 어느 누가 에베소서에서 방언을 말한 자들은 불신자들을 가리킨 것이었다고 믿겠는가?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성령께서 그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은사들 중의 하나가 그 받는 자가 불신자이거나 연약한 믿음의 사람이라는 표적이라고 기꺼이 믿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에 호소해 보자. 예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표적들이 따르리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방언은 신자들의 표적(a sign of believers)이며, 불신자들을 향한 표적(a sign to unbelievers)이다. 딕슨 박사가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옳다면, 방언은 두려운 것이 될 것이며, 아무도 세상 앞에 불신자로 낙인찍는 것을 소유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바울이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을 불신자들로 낙인찍을 때 나는 너희 모두가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며, 그러면 내가 너희 모두보다 더 방언을 말함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외치는 것은 그를 더욱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했을 때, 딕슨 박사에 따르면 그를 모든 사람들보다 가장 불신하는 자로 낙인찍는 것이지 않겠는가? 성경의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사람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으로부터의 그런 가르침에 대해 무어라고 생각하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딕슨 씨가 그런 것을 가르쳤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을 것이며, 내가 그렇게 하여 그를 비난함으로써 그의 명예를 훼손시키려 한다고 믿고 싶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딕슨이 주장하는 방언에 대해 의심을 품는 사람을 위해 시카고 라 살레 826번가 성경 연구원이라는 주소를 가르쳐 준다.

    딕슨 박사는 성령 받음에 동반되는 그 어떤 표적이든 기대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한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는 성령 침례를 받을 때(baptized in the Holy Spirit) 방언을 말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악하고 불의한 세대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지만 그 말이 옳은가? 하나님께서 그분이 말씀하시고 바라시는 것을 행하시기를 기대하는 것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결여를 드러내는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때,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란 말인가?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구원과 관련하여 구원에 대한 이 증거들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의식할 수 있는 구원(conscious salvation)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너무도 변하여 성령 침례를 받지 못했다고 성경에 의해 분명하게 확신하는 사람이 비록 그가 성령을 받는다는 아무런 지식을 갖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보혜사를 보내신다고 약속하신 것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어떤 죄인이 그와 동일하게 구원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성부께로 올라가신 후에 단순히 , 그분이 그 보혜사를 보내신다고 약속하셨으니, 그러므로 우리는 그 보혜사를 모시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다락방에 올라가 기다리는 것은 불신앙이겠지?”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성에 내려갔을 때, 사도행전 8장에 기록된 대로, 그들이 그 회심자들에게 다른 것을 받으리라 기대하지 말고 성령을 가졌다는 것을 믿어야만 한다고, 단지 그것뿐이라고 말했다고 누가 믿겠는가? 마술사 시몬이 성령을 가졌다는 것을 믿어야만 한다는 말에 너무도 감명을 받아서 자기에게 그렇게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베드로에게 돈을 주었겠는가? 그 문제의 진실은 이렇다. 사람들이 성령을 받을 때, 그 어느 누구의 구함도 없이 따르는 표적들이 있으며, 그 표적들은 오늘날 수천 건의 사례들에서 따르고 있다. 이것은 성령침례의 성경적 표적들 가운데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너무도 난처하게 만들고 있어서, 그들은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고 꼭 주께서 행하고 계시는 그 사역을 경시하거나 통째로 믿지 않기로 작정한 것 같다. 사도들은 표적과 기사가 거룩하신 아들 예수 이름으로 일어날 것을 기도했으며, 나는 그들이 그렇게 하는 데 있어서 그 어떤 잘못을 범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울은 열심히 가장 좋은 은사들을 구하라고 그리고 영적 은사들을 바라라고 말하는데, 우리 생각에는 그가 잘못하지 않았다.

    나는 딕슨 박사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만약 그가 사람들 앞에서 이 많이 논의된 주제에 대해 우호적인 논의를 위해 나를 만나기로 동의한다면, 나는 시카고 시의 중앙에 있는 큰 집회장을 빌릴 것이며, 그 비용을 지불하겠다. 나는 그 모임에 적어도 500명의 오순절 사람들이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보증하겠다. 내가 믿기로는 거기에 천 명이 참석하겠지만, 오백 명을 보증하겠다. 이것은 우리 형제에게 그 주제에 대한 그의 견해를 오순절 사람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그를 듣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이 논의는, 만약 딕슨 박사가 동의한다면, 우호적인 것일 것이며, 우리 각자에게 그 질문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제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그리고 이 주제가 오늘날 종교계에 너무도 널리 논의되고 있어서, 우리는 이것이 대중들에게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또한 유익할 것이라고 믿는다. 딕슨 씨가 해야 할 일이란 나타나서 강연하는 것일 뿐일 것이다. 그 집회를 위한 모든 것이 준비될 것이며, 모든 경비가 지불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형제가 그것이 그의 체면을 너무나 떨어뜨리는 것일 것이라고 느끼지 않는 한 그가 이 제안을 거절하기 위해 가질 수 있는 그 어떤 근거들도 볼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역사가 성장하고 너무도 빠르게 전파되고 있는 때에, 그가 너무도 많은 주의를 기우려 이 역사에 대항해 무기를 들었으니, 그는 기꺼이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중에게 동시에 양 측의 견해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려할 것이다.

    나는 이 신문 오만 부를 주문했으니, 만약 딕슨 씨가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이 땅과 해외의 설교가들과 선교사들을 포함하는 수만 명의 독자들이 왜 그가 그렇게 하는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신문의 모든 독자들은 하나님께서 그와 동행하시도록 무디 교회의 목사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해줄 것인가? 그리고 주님의 모든 종들 중에서도 가장 작은 자인 이 글의 필자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