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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F. 파함의 글들/찰스 F. 파함의 글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찰스 F 파함의 글: 모든 것을 포기함과 공유함

한오신 2023. 2. 8.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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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포기함과 공유함

(FORSAKING ALL AND ALL THINGS IN COMMON)

 

 

Bryan Hall, Houston, Texas (1905)

 

이창승 역

 

    지금과 같은 회복의 시대에(in these times of Restitution) 이 책에 있는 다른 주제들처럼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서 길을 찾고 있는 다른 모든 진리들처럼, 위의 주제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자기들 주변에 내고 있는 구름에 휩싸여있는 광신주의(fanaticism)의 한 가운데서 나왔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팔아 일정한 건물들을 차지하고 있는 어떤 종교적 단체에 합류해야만 한다는 가르침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이런 운동의 어리석음은 곧 밝혀집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그렇게 제휴하여 비록 자신의 집을 포기하고 곧 한 종교적 집단으로서 그들이 차지하는 건물들에 부속되면, 그것은 그들에게 말 그대로 실제로 집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그들은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He that goeth a waring for His Lord doth not entangle himself with the affairs of this world)[딤후 2:4]라는 말씀을 순종하는데 실패합니다. 그리고 거칠고 투기적인 상업주의로 달려 들어가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데 사용되어야할 하나님의 돈을 장식품들과 교회건물들을 위한 불필요한 지출에 낭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의 헌신(devotion)은 사람들과 천사들의 승인을 받지만 이기심은 언제나 실패합니다. “성경학교”(Bible Schools), “시온시”(Zions), “부락”(Colonies) 등등의 한 사람의 가르침을 추종하는 종교적 단체들은 곧 편협해지고, 이기적인 분파주의에 기울고, 스스로 높아져, 급기야 다른 모든 사람들을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공공연히 비난하게 되고, 스스로를 유일한 기독교인들이라고 믿기에 이릅니다. 그들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추종자들의 외적 일치와 광신적 순종에 고무되어 겸손을 잊고 스스로를 이런 저런 선지자(prophet)라고 요란하게 선언합니다.

    그러면 가장 비극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그들은 로마 교황도 감히 시도하지 않았던 신적 권위를 주장하고 나서서 하나님을 모독하며 신성을 강탈하여 자신의 무오성을 선포합니다. 그 지도자들과 추종자들은 땅과 하늘과 하나님을 지나 우주의 무중력 속에서 길을 잃습니다.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입니다(1:13).

    아마도 다음 세대에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아직 미숙한 별의 역사가들이 자신들의 하늘에 나타난 그 기적 행사자들의 출현을 기록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forsaking all)은 버리는 것(desertion)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떤 선생들은 여러분의 가족들이 여러분에게 동조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그들을 완전히 포기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예수님의 생각이었다면, 그분은 모든 것을 버렸던 [사도]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돌보도록 맡기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의 눈이 죽음으로 생기를 잃어가고 있을 때, 자신의 어머니와 가장 사랑하던 그 제자를 내려다보며 그분은 그녀를 자신의 가장 사랑스러운 돌봄에 맡겼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당신의 아들이니이다. 아들이여 보라 너의 어머니라”[19:26-27].

    우리는 만약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려 하는데 그러나 아버지나 어머니 같은 우리를 의지하고 있는 가족들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이 그들을 부양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있도록 허락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신앙으로 존재하고 살아가는 기관이나 개인은 하나도 없고, 어떤 출처에서건 수입을 갖고 있습니다.

    가장 부끄러운 장면이 매일, 안식일에서 안식일까지 목격되고 있습니다. 천국시민들이라고, 주님을 위한 사업을 하라고 그 나라로부터 보냄 받은 대사들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길 모퉁이에서, 홀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자신들의 불쌍한 굶주린 영혼과 몸을 함께 유지하기 위해 몇 푼의 돈을 그리고 자신들의 각 기관들을, 기계들을 계속 돌리기 위한 기름을 가장 측은하고 애처롭게 구걸합니다.

    미국과 같은 부유하고 훌륭한 나라의 장관이 영국 관헌들에게 자신의 증명서들을 제시하면서 저는 미국의 장관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저에게 일 년에 오천 달러를 주어서 저에게 관사를 제공해 주셔야 한다는 것을 양해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에드워드 왕(King Edward)는 무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의심할 것도 없이 그 장관은 최저 요금 객실에 태워져 정중하게 미국으로 돌려보내질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천국에서 온 이기적인 대사들에게 질려서 외면하고 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은 한 마을에 내려와서는 자기들의 증명서들을 제시하면서 그 양떼를 먹이는 대신 그 털들을 모으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우리의 필요들을 말하거나 그것을 조금이라도 내 비출 수 없다는 말씀을 주시면서 우리를 모으셨습니다. “너희 대화를 탐욕이 없게 하라라는 말은 말 그대로 보채고 있는 전도자들이나 기독교 사역자들에게 어울릴 것입니다. 그들은 걸인들처럼 길가에 서서 자신들의 갖가지 필요들과 부족한 것들을 큰 소리로 외쳐 애처롭게 구걸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 방법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사업을 수행하라고 천국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대사들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다함이 없는 공급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모든 세상은 동이 날지라도, 그분은 우리의 모든 충족하심이 되십니다.

    우리는 치료를 받으러 우리의 치료의 집(Home)에 오는 병자들에게 요금과 헌금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언제나 빚에 쪼들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사랑의 빚 이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13:8], 그리고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8]”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리라고 결심하자 1센트도 빚지지 않고 지불해 왔으며, 전에는 십 원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백 원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신뢰했던 어린 시절의 단순함으로 돌아가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 때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고 우리의 지상의 부모님들이 제공해준 음식과 의복 그리고 잠자리를 누렸습니다. 우리는 이제 걱정이나 부담 없이 하나님께서 모든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들을 채우시는 것을 생생하게 실감하고 있습니다.

깊은 종교적 진리의 회복을 위협하는 위험들을 무릎 쓰고, 남자들과 여자들이 그 위에서 광신자들이 걸려 좌초되어 부서진 모래톱들과 바위들을 주의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 지혜로운 자 몇 사람이 쇠패하여 무리로 연단되며 정결케 되며 희게 되어 마지막 때까지 이르게 할 것입니다(11:35).

    그들이 쇠패할 때에 도움을 조금 얻을 것이나 많은 사람은 궤휼로 그들과 친합할 것입니다(11:34). 그런 종교적 지도자들 중에 엘리야(그들이 닮으려고 하는)와 같은 어떤 이들은 자신들과 그의 추종자들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비할 바 없이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분파에 사로잡히지 않는 그 신앙의 수호자들이라고 결론 지어왔습니다. 여러분이 그들을 이런 스스로 결정한 위엄으로 용납하고 그들의 사적인 해석과 인증(물 침례 또는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여러분은 완전히 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인 우리는 엘리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응답을 소개할 수 있기를 겸손하게 청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

    하나님에게는 비 분파적인 정신’(a non-sectarian spirit)으로 무장한 수천의 온전한 사랑과 순복음의 남자들과 여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았으며, 표적과 기사들과 여러 이적들과 성령의 은사들을 동반하는 순복음(full gospel)을 믿습니다. 그들은 결코 스스로 높아진 사람의 리더십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그분과 함께 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럴만하기 때문입니다.

    수년 동안 우리는 모든 것을 공유해왔습니다. 우리는 어느 것이라도, 우리의 옷들조차도, 우리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습니까(요일 3:17).

    하나님 앞에서 순전하고 흠 없는 종교란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1:27). 이 말씀을 순종하려면 곧 달라하는 자에게 주고, 주린 자를 먹이며, 벗은 자를 입히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법을 배웁니다. 많은 사람들은 말합니다. “,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곧 거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주님께 꾸어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9:17). 나는 의인이 버림받는 것과 그의 자손이 구걸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37:25).

    자주 집에 있는 모든 음식과 거의 모든 우리와 가족들의 옷을 남에게 주는 등의 수년 동안의 성경 말씀 실천 후에도 우리는 결코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광으로 필요한 것을 모두 채워 주시기 때문입니다(4:19). , 주님께서는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낌없이 내려 주십니다(84:1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마십시오(6:31).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면서”[고후 6:10], 우리는 노숙자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울 수 있었으며, 병자들과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돌보고, 목사들과 선교사들을 훈련시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식비나 학비를 받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증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삶을 따르는 표적들에 의해 확증하십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19:29).

    이생에서 우리는 천막이나 허름한 오두막에서 살든지, 아니면 아름다운 대 저택에서 지내든지 큰 기쁨과 만족을 누립니다.

    독자들이여, 예수님을 위해 그 어떤 사람의 가르침들이라도, 비록 그것들이 완전해 보일지라도, 여러분을 그 어떤 이름, 분파, 또는 집단의 모든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지 못하게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주님께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 성경은 우리가 그 누구도 미워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지만, 그들은 우리의 가르침과 삶을 대적할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22:37). 우리의 이웃은 우리가 무엇이든 돌려받기를 바라지 않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죄를 범한 한 형제라도 우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그에게 개인적으로 가거나, 두세 명의 형제를 보내거나, 그를 교회 앞에 불러낼지라도 우리는 그를 추방하지 말고, 우리도 죄인이 될 수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주실 때 보여주셨던 그런 사랑으로 그를 대해야합니다. 필요하다면 우리 자신의 생명을 그를 위해 내놓아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한 죄에 빠졌습니다. 그가 진심으로 회개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다윗이 현대 교회의 한 일원이거나, 소위 성결운동의 한 일원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실지라도, 그의 형제들은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그에게 고칠 기회도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 대신에 그들은 가장 불결한 추문을 퍼뜨리며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그를 추적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은 고결한척 다른 타락한 사람들을 구원하려 할 것입니다. 올바른 길에서 그저 한 걸음 벗어난 사람을 돕는 것이 바리새인이 그러는 것처럼 그를 밑으로 차버리고는 깊은 수렁에서 건저 내려는 것보다는 더 쉬운 일일 것입니다.

    헌신(consecration)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왔습니다. 마음으로만 헌신하는 사람들과 실제로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의 목록을 만들어 왔으며, 또는 주님을 서약과 동일한 것으로 삼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말에 따라 그들에게 성화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행하기로 약속한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간을 오직 그 경험의 귀중함만을 누리는데 사용했습니다. 좋으신 주님께서는 그들로부터 떠나시거나 그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신들의 서약을 실제로 행할 때까지 일종의 심적 황홀경 상태에(in a sort of ecstatic state of mind) 두셨습니다. 시온의 병거 바퀴들은 오늘날 단지 형식적인 기독교인들에 의해서만 방해받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모르는 성결 선생들에 의해서도 방해받고 있습니다. 그 선생들은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고전 13:1]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그 경험을 계속 증언하면서도, 편협한 분파주의자들이 되어 보다 깊은 진리의 빛 속에서 걷기에 실패하였고, 오래전에 자신들의 헌신서약에 따라 사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성결의 과정은 그 내부의 끔찍한 정체(stagnation)가 없다면, 비판자들과 적대자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께서는 성결 운동을 시험하고 계시며, 자신들이 서약 노트에 기록한 것,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맡김으로써 보호를 받겠다는 것을 실제로 행하도록 모든 곳에 있는 남자들과 여자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19:21). 이 말씀은 여러분이 어떤 단체에 속하거나 또는 빠져나오거나, 혹은 어떤 종교적 거류지(colony)의 일원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는 이기적이고 편협한 분파주의자가 됩니다. 대신에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그분의 사역을 행하기 위해 여러분의 생명을 단호하게내던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유익을 위해 친구들과 집과 모든 것을 포기하는 수녀들과 수사들의 헌신서약을 연구한 후, 우리는 남자들과 여자들이 그리스도와 영혼들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더라면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도록 남자들과 여자들에게 권해왔습니다. “, 우리가 가려고 마음먹은 곳으로 설교하도록 부름을 받는다면 좋으련만!” 아하, 그러나 억지로 징발된 병사들은 결코 싸움을 잘하지 못합니다.

    캐나다와 미국을 여행하면서 우리는 아내와 자녀들과 친구들에게 안녕을 고하고 같은 인간과 싸우는 군대에 자원입대하는 남자들을 보았습니다. 그 스스로 임명된 살인자들은 땅과 바다를 건너 수 천 마일을 돌아다니며, 거의 굶주리며 하루 종일 뙤약볕 밑에서 늪지대나 산악지대를 걷다가 밤에는 젖은 땅위에서 잡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합니까?

     같은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그렇게 합니다! 은 삼십도 못 되는 돈을 받기 위해, 더 소심한 시골 사람들과 우둔한 나라의 갈채와 명예를 얻기 위해 목숨을 취합니다. 그 나라는 전쟁이라는 싸움의 공훈들을 통해 계속 존재하려 할 정도로 우둔합니다. 우리는 기독교 국가들과 개인들이 명예를 제 1 신조로 삼는 애국심이라는 몰록 신에게 자신을 양도하는 것을 보고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박애와 인류애는 그 사망의 싸움에 먹히고, 그 제 1 신조를 세우기 위해, 그런 미덕들을 삼키기 위해 수백만 달러가 허비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의는 쇠약해지고, 천국은 쇠하고 지옥은 그 입을 열고 있습니다. 소위 기독교 국가들이 (전쟁에 의해) 자신들의 게걸스런 식욕을 채우고 있습니다.

    만약 나라들과 개인들이 자신들이 따르기로 공언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진심으로 젖어 들어서 수백만 달러와 사람들을 세계의 복음화에 사용한다면, 그 영향력이 얼마나 더욱더 멀리, 시간과 영원까지 미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명예를 위해 지상적 전쟁의 고통과 궁핍을 자원해서 당하려고 하는 반면에, 참으로 소수의 사람들만이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영광을 위해 조금의 궁핍조차도 자원해서 견뎌내려 하고 있습니다. , 형제들이여, 여러분의 믿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께서 오시면 세상에서 믿음을 보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가 부끄러워 바위들과 산들에 우리 자신을 숨겨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일으켜 우리의 사역들을 통해 우리의 충성심을 증명하겠습니까? 표준을 높이십시오. 왕이신 임마누엘의 피로 물든 깃발을 높이 드십시오. 이 세대의 마지막 큰 전쟁을 위해 입대하십시오. 그 마지막 큰 복음의 전쟁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승리한 구속받은 군대와 나란히 또는 함께 왕 중의 왕의 웅대한 열병식에서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