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세계의 오순절신학을 위해 KIPT

방언신학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탄식: 방언 신학을 향해

한오신 2023. 1. 28. 12:35

Shighs Too Deep for Words: Toward a Theology of Glossolalia

 

 

 

프랑크 마키아

Frank D. Macchia

 

 

Journal of Pentecostal Theology 1 (1992): 47-73;

 

 

 

목 차

 

방언에 대한 현대의 신학적 관점들

종말론적 신 현현으로써 방언

하나님 현존 하의 언어로써 방언

방언과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

방언과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

방언과 새 창조

나가는 말

 

 

    허쉘(Abraham Heschel)은 알터(Alter)라는 한 랍비가 약 100년 전 어떤 구두수선공이 아침 기도 시간에 해야만 했던 일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고민했는지를 전하고 있다. 구두수손공의 고객들은 가난해서 단지 매 번 한 켤레의 신발만 지닐 수 있었다. 구두수선공은 그들이 다음날 일하기 전에 낡은 신을 사용할 수 있도록 밤새 일해야만 했다. 구두수선공은 그의 고객들에게 더 잘 봉사하기 위해, 그저 오 슬프도다라는 탄식과 함께 그의 망치를 들어올렸다. “가끔씩 아침기도를 빠뜨려도 괜찮을까?” 허쉘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아마도 그 탄식이 기도 자체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었으리라.

 

 

    어떻게 탄식이 기도보다 가치 있을 수 있을까? 하나님에 대한 이성적이고, 명료한 반응으로써 기도는 예배 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인가? 어떤 면에서, 교회는 이런 질문에 대해 항상 긍정적으로 답변해왔다. , 노래, , 그리고 침묵은 항상 언어를 사용하는 이성적 의사소통으로써 기도를 초월하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응답의 예로 소개되어왔다. 특별히 방언은 사실 상당히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응답의 하나이다.

    방언에 대한 연구는 주석적, 역사적 연구, 사회심리학적 연구에 집중되어왔다. 밀스(Watson Mills)역시 방언에 대한 그의 연구 안내서에서, 신학적 연구 역할을 언급하긴 하지만, 다른 접근법의 풍부하고 긴 논의에 비하면, 이 방법에 대해서는 단 하나의 짤막한 단락으로 다루었을 뿐이다. 밀스는 오순절 그룹은 방언 신학을 발전시키고 명확히 하는 데 더 창조적일 필요가 있다고 언급한,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에서 방언과 관련된 신학적 숙고가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방언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모호한 측면이 있었다. 대부분의 오순절파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통역이 수반된다면) 모두에게 덕이 되기 위해 사용되는 은사의 하나로서 방언을 언급한다. 이런 용례는 방언이 개인들 속에서 기도시간에 그리고 모두에 의해 사용될 수 있는 방언과는 구별된다. 방언이 성령 침례의 필수적인 증거라는 널리 받아들여지는 설은, 비록 이런 교리를 엄격하게 고수하지 않는 오순절파가 있지만, 논쟁이 되고 있다. 이런 교리는 표적과 기사에 대한, 그리고 종교적 경험의 모범과 선례로써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하나님 체험에 대한, 종말적 부흥운동의 강조와 같은, 요소들이 결합해 발생했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만남을 상징하는 사도행전적 패턴의 필수 조건으로 여겨지는 최고의 표적이나 기사는, 오순절파의 해석에 의하면, 방언이다. 증거 방언 교리 배후에는 방언이 하나님의 현현 즉, 임의적이고 극적인 그리고 표적과 기사로 특징지어지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상징한다는 전제가 있다.

    도날드 기(Donald Gee)는 모든 오순절파가 성령침례의 증거로 방언의 필수적인 역할을 취하는 것은 아니라는데 동의하지만 모든 오순절주의자들이 이러한 성령체험이 의식을 초월한 즉각적이고 초자연적인 현현으로 특징지어 진다고 믿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기는 다른 곳에서 오순절을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현현한 것과 비교한다. 그는 시내산의 초자연적 현현이 어떻게 유월절 어린양의 도살을 성취하는지(구약)와 오순절 방언의 초자연적 현현이 어떻게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의 죽음을 성취하는지를 예증하고 있다.

 

 

유사하게, 브럼백(Carl Brumback)은 방언이 떨리는그리고 두려운하나님 체험을 상징하기 때문에, 그것이 오순절파에게는 중심적인 가치라고 주장한다. 방언 그 자체는 오순절파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나, 방언이 그들에게 상징하는 바, 즉 임의롭고 자유로운 그리고 놀랄만한 하나님의 현현과의 만남이 중요했다.

 

 

 

    오순절주의자들 사이에서 방언에 대한 이런 이해는, 그것이 표적과 기사에 대한 선정적이고 무비판적인 추구로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면, 비평적인 신학적 숙고를 요구한다. 더욱이, “증거교리는 우리의 하나님 체험에 대한 임의성과 자유성을 강조하는 오순절주의와 상충하는 종교적 경험에 대한 독단적이고 엄격한 기준을 설정하는 것으로 후퇴하는 것일지 모른다. 방언은 또한 교회나 사회에서 타인에게 충격을 주지 않은 채 행복한 감정을 만들 수 있다. 성경 안에서 체험을 둘러싼 풍부한 신학적 전제의 맥락에서 방언이 의미하는 바가 무시되어왔다. “능력,” “포기,” “깨달음,” “더 깊은 찬양또는 더 큰 완전함의 감정과 관련해 방언을 경건하게 숙고하는 것은 그런 것들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중요한 가치를 지닐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묘사는 그것들을 해석하는 더 풍부한 신학적 문맥 없이는 그 내용과 방향이 결여된다.

    그러나 우리는 방언과 역동적인 영적 체험의 다른 형태들에 대한 신학적 주의 부족이 오순절주의자들에게서만 눈에 띄는 것이 아님을 상기해야 한다. 브루너(Emil Brunner)는 그의 책 교회의 오해(Misverständnis der Kirche)에서 성령을 의붓자식으로 간주했다. 이는 신학이 신앙의 논리를 강조해왔기 때문에 비이성적인 것과 가까운 다양한 영적 경험에 대한 반응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학은, 신학자들에게 기피대상”(bug-bear)으로 종속해 온, 성령의 독창적인 현시를 피하고 억누르는 역할만 해왔다. 브루너는 성령의 독창적인 현시가 신학적 엄격주의에 의해서 억압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벌콥(Hendrikus Berkhof) 역시 은사 체험과 학문적 신학 사이의 방수벽과 같은 구분을 언급하면서, 그것이 제거되길 바란다고 했다.

    방언에 대한 오순절파의 신학적 숙고는 두 가지 논점에서 기여할 수 있다. 첫째, 그런 숙고는 오순절주의자들이 종교적 경험에 대한 그들의 관점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다. 비록 오순절주의가 방언 운동이상의 그 무엇이지만, 그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본질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로써 이 은사에 주목한 첫 번째 운동이다. 이것은 분명히 오순절신학이 어떤 모습으로 이해되어야 마땅한가를 바라는 오순절주의자들에게는 중요한 부분이다. 둘째, 오순절주의자들은 은사 체험과 학문적 신학 사이의 틈을 연결시키는 창조적인 방법을 제안함으로써 학문적 신학에 기여할 수 있다.

 

방언에 대한 현대의 신학적 관점들

 

    방언의 신학적 의미를 창조적으로 다룬 산발적인 시도들이 있었다. 흥미롭게도, 이런 시도의 대부분은 오순절 외부에서 비롯되었다. 많은 학자들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소진시키는, 이성적이고 의식적으로 명료하게 표현하는 언어의 무력함의 예로 간주한다. 밀스(Watson Mills)는 방언을 표현할 수 없는 것, 즉 성령의 내주를 표현하는 우리의 무력함의 상징으로 본다. 밀스는 방언의 외형적인 면과 상징적인 면을 구분 짓는다. 언어 현상으로써 방언의 외형적인 면은 대부분의 현대 신자들에게 의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 응답하는 이런 방법을 비신화화하고, 사람들과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더 의미 있는 방법을 추구하는 것이 이들에게 더 소용이 있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밀스는 원초적인 방언의 표현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에 대해서 관대하다. 방언의 원초적인 속성에 관한 이런 가정은, 특히 종교적 체험에서 이성적인 것의 우위성에 대해 점점 만족하지 못하는 서구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가 있다. 그러나 방언의 중요성을 그것이 상징하는 바에 두었다는 면에서 밀스의 말은 옳다. 그러나 그는 오순절주의자들이 이와 같은 직관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들을 위해서 방언이 상징하는 바를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엘룰(Jacque Ellul)은 방언이 본질적으로 모든 기도의 비소통적인 속성을 상징하기 때문에, 그것이 문화적인 경계와 상관없이 하나님에 대한 의미 있는 응답이라고 생각했다. 엘룰은 기도가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 언어 탓에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대한 반응이라는 면에서, 방언을 간결하지만 도발적으로 언급한다. 엘룰은 기도가 언어적 의사소통이 아니라는 데, 즉 사용되는 언어 기호의 의미에 대해 사람들 간의 동의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데에 반대 한다. 기도는 오히려 절대자에 대한 전적인 자기 반응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구성된다. 엘룰은 기도를 방언, 종소리, , 그리고 향처럼 말을 초월해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방법으로 보고 있다. 엘룰은 말하기의 목적은 알려주는 것이고, 기도의 목적은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는 말하기가 아니라고 한 허쉘의 주장에 동의했을 것이다. 엘룰에게, 기도는 그 즉, 지금 여기에 있겠다고 약속한 하나님이 그렇게 하기를 구하면서, 알 수 없고, 우리의 이해 너머에 있고, 다가갈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과 함께 하려고 분투하는 것이다.

 

 

    켈시(Morton Kelsey)같은 학자들은 방언의 비이성적인 측면과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접근을 연결시키려 했다. 켈시는 방언을 영적 영역, 즉 융 학파의 용어로는 집단무의식에 직접적으로 접근하기위해서 이성적이고 의식적인 방어를 완화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방언을 꿈꾸는 상태 즉, “일종의 깨어 있는 동안의 몽유병, 성대의 몽유병에 비유했다. 비록 켈시가 영적 영역에 대한 조급한 혹은 부주의한 접근을 경고했지만, 그것에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치유와 변화의 경험이 될 수 있다. 켈시는 인간이 하나님에게 매개를 통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현대 신학에서 결여된 부분을 인식했다는 점에서 신학적 의미를 찾았다.

 

 

    비슷한 어조로, 배어(Richard Baer)는 방언을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개방성을 위해, 인간의 다른 차원 즉, 우리가 막연히 인간의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을 자유롭게 해주는”, 분석적인 마음의 유쾌한 휴식으로 간주했다. 배어는 켈시처럼 주정주의(emotionalism)보다는 오히려 살아계신 하나님의 즉각적인 임재에 대해 반응하도록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퀘이커식 침묵과 가톨릭, 성공회 예식에서 이런 과정의 유비를 찾는다. 이런 방식의 사고는 어느 정도 유익한 통찰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무의식을 통해 접근하는 영적영역에서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것은 문제 있는 가정이다. 우리는 오순절주의자들이 하나님을 신적 측면에 속하는 신과 인간의 만남에서 주도권을 가진, 육체적, 영적 영역 모두의 주관자로 여겨왔다고 주장할 수 있다. 성령에 사로잡힌 전인은 소위 무의식의 가장 깊은 부분에 맞닥뜨려 모든 권리를 저당 잡힌다.

 

 

    방언에 대한 더 일반적인 이종문화적인 접근에서 윌리암스(Cyril Williams)는 방언이, 인간 존재의 깊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소리가 신적 존재와의 만남을 상징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신학적으로 소리의 신비적 체험이라고 간주한다. 수피교의 성가, 불교의 나무아미타불과 같은 주문, 또는 동방정교의 예수 기도처럼, 방언은 이성적인 마음에는 아무 것도 전달하지 않으나, “보통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반향을 일으킨다. 그런 신비적인 소리들은 소리들로 구성된 성상처럼, 신성이 울려 퍼지는 형태와 같다. 윌리암스는 방언이 가짜 소리(pseudo sounds)와 인간의 집단 기억으로부터 나온 영감의 어떤 상징이 혼합되어 구성된 것일지 모른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윌리암스는 방언이 의미론적인 뜻을 지니지 못했고, 덜 구조화 되었으며, 일반적인 신비 체험의 정황과는 다른 신학적 정황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다른 유사한 형태의 언어적 신비체험과는 차이가 있다고 경고한다. 방언에서 하나님과 나 - 당신 관계는 신비적 합일에 의해 초월되거나 희미해지지 않는다.

    종교적 체험을 강조하지 않는 측면에서, 인류학자인 사마린(William Samarin)은 방언을 집단적인 예배 시 신성한 것에 대한 언어적 상징이라고 흥미롭게 이해하고 있다. 이것은 오순절주의자들에게 항상 중요했던 신 중심적 관점의 출발을 대변한다. 사마린은 방언을 언어 혹은 말하는 사람으로부터 신의 임재로 주의를 돌린다. 방언은, 중세의 성당이 하나님은 장엄하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고 말한다. 더욱이 그는 방언의 이런 상징적 기능을 성례적인, 즉 인간의 말의 변화는 하나님의 임재를 표명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사마린에게 방언은 반()언어(anti-language)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에게 종교의 본질과 그 안에서 언어의 위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기하며, 예배 속에서 지적인 표현의 중요성을 상대화시켜 버린다. 불행하게도, 사마린은 이런 통찰을 정교히 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에게 방언이 가난한 자들의 성전을 의미한다고 독창적으로 주장한 홀렌베거(Hollenweger)를 이해하는 배경을 마련해 주었다.

 

 

    지금까지 설명한 대부분의 견해들은 방언이 이해되지 않는 언어를 나타낸다고 가정했다. 포드(J. Massyngberde Ford)는 바울이 방언을 배우지 않고 터득한 외국어로 간주한 누가에 동의한다는 소수의 견해를 취했다. 포드는 고대의 유대 문헌들이 거짓 혹은 진실을 수용하고 소통할 수 있는, 말하는 존재로 창조된 인간에 무게를 두었다는 데서 의미를 찾았다. 오순절과 방언은 진리의 언어가 사람들을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 연합시키고 신앙 공동체를 교화시킴으로써, 새 창조의 상징이 되었다. 방언이 사도행전 2장에서 영감 받은 설교의 형태로써 예언과 관련되어 있지만, 포드의 분석은 언어와 관련된 방언의 성경적 이해의 모든 뉘앙스를 포괄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포드는 새 창조라는 문맥에서 방언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했다.

    뎀스터(Murray Dempster)는 사도행전에 묘사된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삶에 나타난 방언을 신학적으로 가장 통찰력 있게 분석하고 있는데, 방언의 기능을 강조한다. 그는 방언과 성령침례의 공동체적으로 윤리적인 의미를 강조한다. “언어의 개조로써 방언은 역사를 개조하는 성령의 역사의 표지이다. 누가가 초대 교회의 종말론적 모티브를 구원역사로 대체했다고 주장하는 콘첼만과 달리, 뎀스터는 사도행전에서 역사의 개조를 그리스도의 새로운 구속 질서와 관련된 교회의 정체성이라는 종말론적 정황에서 추진되는 것으로 본다. 성령침례에 대한 이와 같은 종말론적 문맥은 초대 교회를 옛 질서인 편견과 분열과 대조시킨다. 뎀스터는 교회의 선교 범위가 증가하고, 인종, 종교, 경제적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방언이 출현한 것에 대해 강조한다.

 

 

    어떤 방언 신학도 지금까지의 가장 중요한 창조적 저작인 위 논문을 중요하게 취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많은 저술가들은 여전히 성경의 다양한 목소리를 설명할 수 있고, 현대 크리스천의 경험과 선교에 적절한 방식으로, 오순절주의적 사고의 특징을 끌어낼 수 있는, 방언에 대한 통합적 시각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이 간단한 논문은 단지 그런 방언 신학이 취할 수 있는 한 가지 방향을 약술한 것이다. 특히 나의 과제는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이 느끼듯이 하나님의 현현에 대한 경험에서 방언이 상징하는 신학적 함의를 비평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방언 신학을 만드는 작업이다.

 

종말적 신 현현으로써 방언

 

    이 현상(방언)을 신 현현의 표적이나 신의 자기계시라는 이적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오순절파의 이해는, 위에서 언급한 방언에 대한 신학적 숙고가 대체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항상 사도행전에서 자유롭고, 임의적이고, 극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을 발견했다. 2장에서는 성령은 갑자기불과 함께 그리고 커다란 소리와 함께 바람 같은 하나님의 체험 가운데, 4장에서는 기도 후 지진 가운데서, 8장에서는 설교와 침례가 있은 후 오랜 뒤에 눈에 보이는 표적과 함께, 10장에서는 침례 전 설교 중에서 방언과 함께, 19장에서는 설교와 침례 후 즉시 방언과 예언과 함께 임했다. 이런 하나님의 현현과의 만남에서 보이는 임의성과 이적의 요소는 항상 방언을 사모하는 오순절주의자의 영성에서 동경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런 맥락에서 스피틀러(Russell Spittler)는 성화라는 주제에 대해 단지 지나가는 언급으로, 영성의 관점에서 대화에 대해 썼는데, 오순절파의 최근의 공헌으로 흥미로운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오순절파의 주장에 대한 우드(Laurence Wood)를 필두로 한 웨슬리안의 반응이다. 그는 오순절주의자들이 성화에 대해서 더 강조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웨슬리안의 성결은 오순절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성령의 역동적인 채우심(infilling) 없이는 생명력 없는 형식적인 윤리 개념으로 쉽게 퇴보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우리는 여기서 황홀한 경험을 교리적이고 도덕적인 구조로 대신하는 개신교의 세속화에 대한 틸리히(Paul Tillich)의 말을 상기하게 된다.

    사도행전의 하나님 체험에 대한 오순절파의 이해는 독일의 성서학자 궁켈(Hermann Gunkel)이 저술한 성령에 대한 이전의 고전인 1879년 저작과 어느 정도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궁켈은 사도행전에서 신비스럽고, 강력하고, 억제할 수 없는성령 체험을 발견했다. 이런 압도적인 성령 체험은 믿음으로 이어졌고, “방언으로 가장 선명하고 뚜렷하게 나타났다.” 궁켈에게 방언은 초대 교회에서 성령의 역사의 가장 현저한특징이었다. 그것은 압도적이고, 경험적으로 느껴지는,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 체험을 증거했다. 궁켈에 의하면, 방언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그 경험을 기독론적으로 고정시키고, 그것을 공동의 윤리적 목표로 인정함으로써, 사도행전에서 묘사된 대중적인 시각을 변경했다.

    더 최근의 성경학은 사도행전의 기독론적이고, 종말론적이고, 윤리적인 모티브를 발견함으로써, 궁켈의 견해를 다소 중요한 방향으로 변경시켰다. 그러나 궁켈의 통찰에 대한 오순절파의 정교화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오순절과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지는 동안 하나님의 현현했던 것 사이의 연결([Donald Gee] 역시 만들었던 연결)과 함께 시작될 것이다. 오순절 축제와 시내산 사건을 연결시키는 초기 유대교적 입장은 2세기에 두드러졌고, 예수 시대에도 존재했을지 모른다. 사도행전 2장의 바람과 불은 구약의 시내산 묘사와 유사하다. 클라인(Meredith Kline)은 구약의 신 현현에서 발견되는 큰 음성, 혹은 소리의 특징을 강조한다. 이것은 오순절의 강력한 바람소리와 유사하다. 필로는 방언이 불의 이글거림이라는 보이는 형태를 취했다는 누가의 묘사와 유사하게, 시내산의 강한 소리가 모든 사람에게 보여 졌었다고 쓰고 있다. 방언이 세계 각지에서 온 유대인들에게 모국어로 이해되었다는 누가의 언어 이적은, 시내산의 소리가 세계 모든 나라의 언어로 들렸다고 추측한 랍비의 생각과 비슷하다.

 

 

    오순절과 재림에 대한 신약의 묘사는 구약의 신 현현과 관련되어왔다. “주의 날하나님의 마지막 임재는 구약에서 시내산과 같은 이전 신 현현에서 묘사된 자연적 요소의 분열을 수반한 최후의 신 현현으로 그려지고 있다. 글라손(T. Glasson)은 신약에서 불, 성자, 영광의 구름과 함께 인자가 내려오는 지각 변동으로 묘사된 재림은 (바이스와 불트만이 말하듯이) 초기 유대 묵시문학이 아니라, 구약의 신 현현 이미지(특히 최후의 신 현현의 이미지)를 본뜬 것이라고 주장한다.

    신 현현을 강조하면서 오순절과 재림을 암시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베드로가 오순절의 최후의 신 현현 혹은 재림과 연결시킴으로써, 사도행전 2장에서 분명해졌다(2:19-20). 이런 의미에서, 오순절은 재림 때 나타날 하나님의 최후의 현현을 미리 맛보는 것이요 그 막을 여는 것이다. 차일즈(Brevard Childs)는 히브리서 12장에서 상당히 종말론적인 어법으로 시내산 전통이 재구성되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쿰란 공동체 역시 자신들을 시내산 어법으로 최후의 심판 전에 서 있는 것처럼 그리고 있다. 사도행전 2장에 있는 오순절에 대한 묘사는 이런 빛 아래 해석되어 왔음에 틀림없다. 거기서 (그리스도 사건으로 완성된) 오순절은 이전의 신 현현을 다시 언급하고, 최후의 재림을 미리 지적하는 종말론적 사건으로 여겨졌다. 오순절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현현으로 명명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방언은 신의 자기 계시의 통로로 언어가 변형되는 것을 포함하는 카이로스적 사건으로써, 이러한 신 현현의 일부였다.

    그러나 우리 오순절주의자들은 어떻게 방언으로 상징되는 신의 자기 계시라는, 이러한 신 현현적인 측면을 비평적으로 숙고해야 하겠는가? 성경의 신 현현 전통의 핵심에는 우리의 시야를 변화시키고, 우리의 지평을 넓혀주기 위해, 극적이고 뜻하지 않은 방법으로 우리들을 만나주는 성령의 자유라는 개념이 여전히 무시되고 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그들을 존재 깊은 곳에서 사로잡았기 때문에, 그것이 근본적으로 말할 수 없이 깊은 것임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영혼의 깊은 곳에 주의를 많이 기울이지 않았다. 신오순절주의자들은 많은 긍정적 결과들로 그러한 요소를 오순절파의 신앙에 더해 주었다. 그러나 정통 오순절주의자들에게 언어의 위기는 주로 하나님의 역사의 자유, 신비, 능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나는 대학원생일 때 오토(Rudolf Otto)가 그의 신 이해에서 떨리면서도 매혹시키는 신비(Mysterium tremendum et fascinosum)와의 만남에 대해 서술한 것을 보고 충격 받았던 기억이 난다.

 

 

오토는 경이롭고, 압도적이고 그것이 없이는 종교 체험의 핵심을 놓치는 낯선 신비에 대해서 기록했다. 우리가 우리의 예배와 기도 생활에서 신비, 경외심, 패기를 상실했다는 엘룰의 지적은 이런 맥락에서 의미가 있다.

 

만약 기도가 참으로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어째서 우리는 여전히 상투적이고 비참한 입원환자인 채로 남아있는가? 왜 하나님의 이런 임재가 우리 안에서 변혁을 일으키지 않는가? 우리는 너무나 익숙하게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기도에 의해 변화되지 않는다. 우리는 막연하고 진부하게 그에게 익숙해져있다. 우리는 그를 무관심하게 대한다.

 

교회 안에서 상징들, 즉 우리 모두를 압도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새로운 통찰을 얻었던 그 강력한 신비가 쇠퇴했다. 교회는 경이로움을 상실했다는 리쉬(Kenneth Leech)의 진술은 매우 중요하다. 방언은 하나님의 신비, “우리 모두를 압도할 수 있는, 그리고 우리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통찰을 주는 신비의 상징이다.

    어떤 저자도 종교사회학자 벨라(Robert Bellah)보다 강력하게 이런 방향의 사고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에게 예배는 일상적이고 실용적 상식으로 무장한 철저히 세속화된 세계를 돌파하는 것이고 현세적인 장소를 이탈함으로써 평범하고 흔한 것의 영향력을 깨는 것이다.

 

 

대부분의 예배에서 문제는 전통적인 미적 조작이 황홀한 상태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사물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도록 인지 구조를 돌파한다는 의미에서, 우리들을 변화된 의식 상태로 옮겨가도록 돕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기독교 예배해서 우리는 문자가 아니라 예배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그것이 교훈적이든 아니든 말이다. 그 결과 종교적으로 거의 변화시키지 못한다. 예배는 경험의 상징적 재정리와 자아의 경계에 대한 정의에 변화를 이끌어주어야만 한다.

    예배에서 자발성과 환희를 통한 초월성의 개념이 앞서 전개한 종말론적 모티브와 반드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역사에 대한 책임에 의해 지배되는 종말론은 우리들을 역사적 유산에 대한 수동적인 수용자로 만듦으로써 그리고 우리에게서 역사의 흐름에 새로운 무엇을 소개할 능력을 앗아감으로써, 가혹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오순절파의 종말론은 초월적인 경험을 역사의 미래를 자유롭게 하는 책임과 결합시킬 필요가 있다. 방언이, 초월적 경험과 교회 선교의 확장의 상징을 모두 의미함으로써, 사도행전에서 이런 기능을 하고 있다. 역사상 교회를 통해 성령이 자유롭게 운행했다는 데에 뿌리를 둔 그런 종말론은 미래에 대한 엄격하고 숙명적인 세대주의자들의 시나리오와 모순 될 것이다.

    방언에 대한 종말론적 이해는 실로 중요하다. 우리는 방언에 대한 바울의 진술 역시 이런 관점으로 관찰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바울은 방언을 높은 영성의 최고의 표지, 즉 실현된 종말론이라고 느끼는 신령한 자들(pneumatics)에게 대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2장에서 바울은 방언을 은사의 광범위한 다양성 속에 둠으로써 그것을 상대화하고 있다. 바울은 13장에서 종말론적으로 여겨지는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사랑의 문맥에서(방언을 포함한) 모든 은사들을 극단적으로 상대화시키고 있다. 불완전하게 알았고, 희미하게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는 어린 시절의 유비(13:11-12)는 방언을 하나님을 향한 종말론적인 사모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 놓았다. 현재 그러나 아직, 가까운 그러나 여전히 도달할 수 없는, 계시된 그러나 여전히 가려진 신적 존재와의 만남이라는 역설은 언어로 표출된 신비로써의 방언에 필수적인 것이다(14:2).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을 로마서 8:26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으로 바르게 이해하고 있다. 그들만 이런 해석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오리겐과 크리소스톰은 방언과 로마서 8:26을 결부시킨 최초의 주석가들이다. 궁켈(Hermann Gunkel), 쉬니빈트(Julius Schniewind), 케제만(Ernst Käsemann), 스탕달(Krister Stendahl), 로빈슨(John A. T. Robinson)과 같은 현대 학자들 역시 로마서 8:26을 방언에 대한 언급으로 해석했다. 케제만은 특히 8:26의 신음이 암묵적이지 않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적었다. 케제만이 지적했듯이 말할 수 없는 탄식은 바울에 의하면 역설적인 진술로 여겨진다. 이러한 탄식을 말할 수 없는 욕망을 깊이 느끼는 것으로 보는 견해는 바울이 종말론적 맥락에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취급하면서 자주 사용한 역설을 놓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이 모든 지식을 능가하는 것처럼(3:19), 바울은 말로 표현될 수 없는 표현된 탄식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이 여기서 방언적 탄식을 우리의 종말론적인 연약함과 다가올 구속과 해방에 대한 우리의 갈망과 관련시킨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는 여기서 초월적 경험과 우리가 피조된 그리고 역사적인 실존이라는 사실을 통합시키는 종말론을 갖게 된다. 이 실존을 모든 피조물을 포함하는 구속의 약속으로 변형시킴으로써 말이다. 우리는 또한 방언에 대한 오순절주의자의 관심에서 자기중심적인 감정적 행복감 또는 표적과 기사에 대한 선정적 추구를 피하는 신 현현의 요소를 발전시킬 수 있다. 나는 이 주제를 뒤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하나님 현존 하의 언어로써 방언

 

    지금까지 논의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각도에서 방언의 기능을 특징지어 보았다. 이러한 접근은 방언을 주로 인간 경험의 역동성이라는 관점에서 다룬 일반적인 방법과 다르다. 오순절주의자 호르톤(Harold Horton)이 주장한 것처럼 방언의 첫 번째 목적은 하나님과 인간의 초자연적인 교제로 기능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이해된 방언은 어떤 종교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의지로 이용되는 인간의 잠재력으로 여겨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나님과의 모든 참된 만남이 그러하듯 그것은 주로 하나님의 결단의 결과로 발생한다. 발타자(Hans Balthasar)가 기도와 관련해 말한 것처럼, 방언이 신의 자기 계시 행위로 주어진 때에만 이해될 수 있는 분야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일단 인정되면 방언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경험에 관한 매우 심오한 것을 계시해주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예수가 성령을 신비스럽고 자유로운 바람이라고 말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가 이어서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3:8)고 한 것은 더욱 흥미롭다. 방언이 신비롭고 자유로운 하나님의 행동을 상징한다면, 하나님에 대하여 열려있는 인간 존재에 대해서도 같은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부버가 황홀경의 의미에 대해 적은 것은 방언에도 적용된다.

    나는 달의 어두운 면이다. 당신은 나의 존재를 알지만, 이 밝은 면에 정해 놓은 것은 나에게 유효하지 않다. 나는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방정식의 나머지다. 당신은 나에게 신호를 줄 수 있지만, 나를 쫓아버릴 수는 없다. 당신은 나의 신비에서 마음을 뽑아내려 하는가? 방언에는 인간을 정의, 조작 혹은 억압하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반하는 숨겨진 저항이 있다. 방언은 분류할 수 없고 자유로운 하나님에 대한 반응이라는 면에서, 분류할 수 없고 자유로운 언어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의 언어이다. 케제만에 따르면 자유를 향한 외침이다. 부버와 엘룰같은 저자들에 의하면. 이성적 소통수단으로써 언어는 하나님의 신비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신비 사이의 만남의 깊이로 들어간 사람들을 따라올 수 없다. 언어는 또한 하나님과의 만남의 깊이를 다른 사람에게 표현하는 데 적당하지 않다. 이러한 통찰은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을 묘사하는 데 신 현현 이미지의 역과 관련된다. 카시러(Ernst Cassirer)는 신화적 표상은 사상과 경험을 표현하는 언어의 무능력으로부터 발전되었다고 주장한다. 방언을 수반한 오순절의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신 현현의 이미지는, 이와 같은 언어의 위기로부터 발전하였다. 와이트(Helen White)는 시인은 표현하려는 충동에 저항할 수 없으면서도, 그가 말해야만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언어 너머에 있다는 역설에 시달리면서 출발한다고 말했다. 방언은 예술 형태, 즉 추상화나 즉흥 음악처럼,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는 전통적 형태의 결함을 상징하는 다른 창조적 수단에 비유되어 왔다.

    그러나 방언은 허쉘이 말하듯이 다른 어떤 행위에서도 인간은 표현하려는 욕구와 표현 수단 사이의 불균형을 그렇게 자주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기도에서 이러한 시도를 찾아냈다.” 사람이 하나님의 신비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자신을 표현하려는 시도는 더 절박해지고, 동시에 적당한 표현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더 적어진다. 이것이 방언이 일시에 쏟아져 나오는 위기이다. 경험을 이성적으로 숙고하고 전달하는 것은 이미 방언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놓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경험을 전하려는 이성적인 시도는 결국 방언으로 끝난다. 방언은 경험을 파괴시키지 않은 채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경험과 표현은 하나가 된다. 이것은 이성적이고 지식적인 신학과 예배가 그 때문에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방언 신학은 용어 자체가 모순이 된다. 허쉘이 지적했듯이, 표현 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는 분투는 예술과 학문의 모든 창의성의 뿌리이기 때문에, 그리고 표현할 수 없는 의미의 세계는 영혼의 육아실이고 우리의 모든 사상의 요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에 대한 언어적 시도의 포기는 마음에 충실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방언이 분류될 수 없는 언어이긴 하지만, 성경학은 신약에서 방언의 본질을 분류하고 정의하려는 시도로 상당히 나뉘어져 있다. 가장 인기 있는 견해는 초대교회에서 방언이, 고대 그리스 종교의 황홀경 또는 구약의 예언자적 황홀경과 유사한, 무아경의 이해할 수 없는 말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의 습득하지 않은 외국어로써의 방언에 대한 누가의 묘사는 복음의 보편적인 호소를 상징하는 기존 자료로부터 작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13의 사도들이 술 취한 것이라는 비웃음이 존재 하는 것과 사도행전의 다른 부분에서 이적적으로 습득된 외국어가 사도들에게 더 이상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최초의 방언 사건을 무아경의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한 기존 자료가 그 자료에 대한 누가의 상징적 재작업 아래서도 여전히 발견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른 한쪽 끝에서는 데이비스(W. D. Davies)와 건드리(Robert Gundry)가 방언이 단 한 번도 무아경의, 이해할 수 없는 말로 규정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방언의 "종류"(고전 12:10)와 다양한 알 수 없는 인간의 언어(고전 14:10-11)에 대한 바울의 언급은 그가 누가와 동일한 현상 즉, 습득되지 않은 외국어를 다루고 있는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만약 바울이 습득되지 않은 외국어를 통해 하나님을 증명하는 초자연적 능력을 다룰 의도였다면, 우리는 그에게서 방언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말해지는 신비(고전 14:2)라고 한 주장이나, 통역이 없다면 불신자들은 그 말을 미친 말이라 여겼으리라는 진술을 기대할 수 없다. 방언은 불신자들에게 주는 표징이라는 고린도전서 14:22의 진술은 불신자들이 방언이 아니라 예언에 의해 죄를 깨닫게 될 것이라는 23-25절의 진술과 완전히 모순된다. 14:22은 바울이 이어지는 구절에서 논박한 고린도교인들의 슬로건이었다는 입장을 취한 요한슨(B. C. Johanson)에 의해서 이 모순은 가장 잘 해결된다.

    초대 교회에서 방언은 때때로 이해의 정도에 따라 구성된 혼합된 현상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그들의 모국어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들은 사람들과 술 취한 소리로 그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로 구성된, 사도행전의 유대인 청중들의 혼합된 반응을 설명하려했을 것이다(2:13). 포이쓰레스(Vern Poythress)는 방언이 고정된 패턴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고린도서의 방언에 대해서도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방언으로 말하는 것처럼 드린 것과 방언으로 말하는 것처럼 작용한 것은 무엇이든 방언으로 말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방언이라는 용어 아래 언급된 '언어들'의 정확한 본질에 대한 모든 질문은, 초대 교회의 구성원에게는 관심사가 아니었던 것이고, 이것은 현대의 분석적인 질문이다. 중요한 것은 방언의 기능과 영향이다. 방언과 "황홀경"에 대한 모든 질문은 연구할 필요가 있다. 문자적으로는 자아의 이탈(coming out)을 의미하는 황홀경은 대개 격렬한 춤, 다양한 몸 비틀기, 신과의 합일에 흘림 혹은 신적 합일에 관한 플라톤적 비상, 약이나 음악을 통해 이러한 마음 상태를 이끌어낼 가능성을 수반하는, 다양한 그리스 종교 형태에서 일종의 열광적 행동과 관련된다. 초기 가나안의 예언의 황홀경과 그 영향 아래 있는 방랑하는 예언자 무리는 본질상 유사했다. 나는 우리가 방언의 황홀경과 고대 그리스 종교에서 묘사된 일종의 최면 경험을 구분해야 한다는 켈시의 주장에 동의한다. 황홀경은 의식적인 자아 통제력을 잃지 않고 자신의 상태를 초월하는 의미 있는 방법일 것이다. 만하임(Karl Mannheim)의 황홀경에 대한 정의를 여기에 옮겨 본다:

 

그것은 때때로 우리 자신의 처지로부터 참된 인간 존재로서 인간의 근본적인 특성의 하나인 세상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가 당면한 상황을 넘어서는 아무 것도 그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황홀경이라는 용어로 이런 이상을 나타내야 한다.

 

허쉘은 기도가 인간이 자신을 초월하는 사건이라고 기술했다. 방언도 그런 사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방언과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

 

    이미 지적했던 것처럼, 바울은 방언을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그리스도의 몸 안의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의 영적 은사로 보았다. 퀘니히(John Koenig)는 은사들(charismata)이 하나님의 선물들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매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어떤 개인도 모든 은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완전성은 오직 다른 사람과의 교제 속에서 일치할 때 경험 된다 바울이 말했듯이 "온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 듣겠는가? 또 온몸이 다 귀라면, 어떻게 냄새를 맡겠는가?"(12:17). 바울은 다른 곳에서 우리는 모든 성도와 함께'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채워지고(3:18, 19), 은사들을 통해서 우리는 "함께"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에까지 자라간다고 했다(4:10-11). 이것은 개인 기도에서 방언의 효력이나 개인적인 하나님 체험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영적 충만과 신약의 교제 사이의 기본적인 연결은 부정될 수 없다.

은사들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존재가 결코 홀로 완전해지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본회퍼가 성도 교제에서 진술했듯이 손을 뻗는 것”(reaching out)은 인간 존재의 진실에 속하는 것이라고 주석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각자성(Jemeinigkeit)의 일부이다 이런 의미에서, 관계는 인간 존재에서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다. 따라서, 영적 충만은 오직 코이노니아의 연결 속에서만 실현된다. 방언은 따라서 개인적 경험일 뿐만 아니라 집합적인 것이다. 그것은 통역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우리 존재의 신비와 자유가 단지 하나님의 자유일 뿐만 아니라 서로를 향한 자유임을 드러내주는 공유된 경험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22-24에서 성도의 교제가 개개 구성원이 가치 있다는 식의 사회적 관습을 따르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덜 중요하고 덜 존경받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후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자유와 가치를 인정해주기 위해, 바깥세상에서 덜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사람들과 동일시함으로써, 경의와 존경을 다한 대접을 해야 한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한 이후로, 베드로는 언어 이적의 의미가 젊은이와 노인, 자유인과 노예, 남성과 여성이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는 동등한 권리를 가졌다는 말로 분명해졌다고 묘사하고 있다(2:17-18). 사도행전에서 방언이 경험되는 곳은 어디서나 사람들 사이의 장벽이 무너졌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2),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10), 그리스도인과 침례 요한의 추종자들 사이(19)의 장벽이 무너졌다.

    이런 맥락에서 방언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자유의 감추어진 신비, 즉 성, 계급, 문화의 차이를 제거해서, 우리 자신의 존재에 본질적인, 그리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서 우리에게 드러난, 일치를 밝혀주는 분류할 수 없는 언어로 보인다. 그것은 서로 매우 다른 사람들 사이의 최소한의 공통분모이고 부정될 수 없는 그리고 성, 계급, 인종에 근거한 어떤 차별도 거부하는 깊은 의미의 평등을 보여준다. 초기 오순절주의에서 인종 간 교제와 여성의 성직임명이 성령 침례와 방언의 현대적 경험의 결과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오순절주의 안에서 인종 간 교제와 여성의 성직 참여가 쇠퇴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심상치 않은 문제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영적 충만과 코이노니아가 이렇게 완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자기 덕을 세우는 교화(敎化)를 위한 방언과 교회공동체 교화를 위한 예언을 선명하게 구분하려 했던 것처럼 보인다는 점은 실로 당혹스럽다. 그런 구별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방언은 개인이 영적 혹은 심리적인 이기적 치료법으로 하나님 앞에서 홀로 즐기는 것이라고 해석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방언을 개인적으로 사용할 때 치유력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주로 치료법으로 간주되는 어떤 형태의 기도도 (다른 모든 치료 기술과 함께) 다른 더 바람직한 것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엘룰의 경고를 주목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교화”(edification)라는 용어는 물리적 구조물을 세우는 행위에서 파생되었다. 그것은 건축물을 세움(building up)을 의미한다. 59) 이 개념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 모든 성도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의 충만에까지 세워짐을 강조하는 관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4:12-13). 그것은 좋은 느낌의 자기중심적 행복감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 은혜의 통로로 변화되기 위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다. 홀로 사용하는 경우라도, 방언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적어도 간접적으로 기여하는, 코이노니아 속에서 타인에게 다가가는 능력을 내포하는 것이다. 바울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기술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를 암시하고 있다! 이는 어떤 은사도, 개인적인 기도에서 즐겨 사용되는 것일지라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타인에게 다가가는 목적과 분리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궁극적으로, 자기 교화와 타인의 교화 사이에는 구분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 방언이 예를 들어 성찬식과 같은 예배에서 물리적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더 구조화된 다른 방법들과 관련되는가? 배어(Richard Baer)는 방언과 성찬식 모두 이성적 교제를 초월하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물리적 방법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관찰하였다. 그러나 성찬식이 구조화되고 계획적인 것이라면, 방언은 구조화되어있지 않고 자발적인 것이다. 신의 자기 계시에서 자발성과 자유라는 요소는 명백하게 방언 사건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신의 자기 계시에서 자발성과 자유는 구조화된 예식이라는 배경 속에서도 의미를 갖기 때문에 이러한 요소들은 주의 만찬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예전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자동적인 만남을 가정할 수 없다. 바르트가 말했듯이 미리 예상된 영은 분명히 성령이 아닌데, 어리석은 교회가 그 자신의 존재 속에서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예상한다.” “성령을 위해 탄식하고 부르짖고 기도하는 곳에서만, 성령은 임재하고 역사한다.” 유사하게 큉(Hans Küng)은 성령에 관하여 "가르침과 실천에 관한 어떤 교회의 명령도, 어떤 교리와 의식도 성령에게 지금 역사하라, 지금 역사하지 말라고 강요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획된 체계적인 의식의 한가운데서 역사한다는 것은 오순절주의자에게 하나님의 실재가 구조화되지 않고 평범치 않은 것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그러한 것 속에 늘 임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상기시켜 준다. 체계적이든 아니든, 자유롭게 역사하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한 분명한 매개체가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그것은 뭔가를 계시로 만드는 것이다.

 

 

방언과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

 

    하나님과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에 대하여 방언이 상징하는 신비와 자유는 근거 없는 것이 아니고, 그 의미와 방향을 제시하는 구체적인 실제적 배경이 있다. 개인의 신앙행위와 교회 내의 코이노니아는 방언이 의미를 갖는 유일한 배경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개인적 기도와 교회의 코이노니아에 제한했다면, 우리는 우주의 주님이요 창조자로서 그리스도에게 결코 충실하지 않은 우리 자신들 속에 "주되신 예수"(Jesus-as-Lord) 집단을 만들었다는 죄의식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임하는 하나님 나라, (블룸하르트가 강력히 주장하는 것처럼) 세상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자기중심적이고 교회중심적인 신앙행위로부터 우리들을 불러내는 하나님 나라에 덜 충실하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오순절주의자들 사이에서 흔히 무시되거나 오해되는, 영적 경험과 방언에 대한 중요한 기독론적 의미 제한이 필요하다. 이러한 기독론적 의미 제한은 오순절주의자들 사이에서 흔히 방언 체험과 혼합되는 피상적이고 감상적인 예수 신앙보다 훨씬 깊은 것이다.

    오순절주의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회심과 성령침례를 극단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널리 퍼져있다. 비록 이것들이 한 사람의 영적 성장에서 두 개의 다른 단계를 나타낸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속하는, 사제의 직무(ordo clericorum)로부터, 성령의 시대에 속하는 사유의 직무(ordo contemplantium)로의 요아킴(Joachim of Fiore)의 운동과 유사한 것을 여기서 내재화시키게 된다. 그것은 오순절주의자들이 그들의 신앙행위와 신학으로부터 기독론을 제외했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침례에서 경험되고 묘사된 능력의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 생애, 죽음에서 계시된 하나님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능력은 오순절주의자들에게, 십자가의 그늘 아래서 바울이 말한 약함의 강함으로 보다는, 초자연적인 영역에서 자연적 질서에 대한 승리주의적인 지배로 규정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신 현현의 특성은 우리에게 십자가의 신학이 우리의 구체적인 정황에서 느껴지는 변화 없이, 완전히 숨겨진 하나님의 행동을 의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이러한 변화는 그리스도 사건 안에서 그 뿌리를 가지고 있다. 오순절 사건은 단순히 구약에서 묘사되고 있는 신 현현의 계승이라는 차원에서 단순한 또 하나님의 현현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화하고 그리고 오순절의 신 현현을 종말론적 사건으로 가능케 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중요한 무엇인가가 발생한 것이다. 예수께서 침례 받을 때 성령이 내려오고 이어서 예수께서 복음을 선포하고 포로 된 자를 자유케 하는 첫 설교를 행한 것과(3-4),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고 이어서 베드로가, 예수의 (방언, tongue; [한글 개역 성경에는 입술로 번역되었다-역주])가 즐거웠다고 설교한 것(2:26-27,36) 사이에 누가-행전의 병행이 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언급한 예수의 즐거운 혀는 십자가 죽음이후 음부로부터 말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즐거운 혀는 동시에 단지 그리스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 음부로부터의 구원을 부르짖는 방언이었다. 베드로가 음부로부터의 예수의 즐거운 혀를 오순절의 즐거운 방언의 병행구로 언급했기 때문에, 방언 찬양은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고립된 찬양이 아니다. 그것은 고통 받는 피조물의 구원을 위한 갈망의 말이기도 하다(8:26).

    이것은 방언이 단순히, 하나님 앞에 있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드러내는, 분류되거나 조작될 수 없는 하나님과의 역동적인 만남에 대한 찬양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해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속박과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하는, 우리를 위한(pro nobis) 해방이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해방은 또한 "십자가에 못 박힌 형제와 자매"로 그리스도를 모방하려고 함으로써 고통 받는 피조물의 해방에 헌신하는 해방이 되어야 한다. 방언은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영광스런 경험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무시할 수 없다. 바울은 영광스런 하나님 체험을 증언했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실제로 타인을 위해 고통의 연약함 속에서 경험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후 12). 고린도 교회의 신령한 자들에 대한 반응에서,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외에는 알려 하지 않았고, 그는 약할 때 능력의 말씀을 전했다(고전 2:2-5). 같은 메시지가 로마서 8장에서 발견될 수 있는데, 거기서 신령한 자들의 간절한 부르짖음은 해방과 다가 올 구속에 대한 갈망으로 보인다.

    블룸하르트(Johann Blumhart)는 십자가에서 죽기를 바란 예수의 탄원을 속박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는 고통 받는 피조물의 '탄식'으로 해석한다. 우리가 탄식할 때, 우리는 세상의 구속과 해방을 바라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이다. “당신의 기도는 항상 모든 신음하는 피조물을 표현해야 한다. 그 결과 당신은 피조물의 대표가 된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하나님 나라의 아이처럼 기도한다. 카르멜회의 수녀인 예수의 성 마리아가 바로 말했듯이 "세상을 구하는 것은 고뇌의 기도다." 본회퍼는 십자가에서 죽기를 바란 예수의 탄원에서, 그리스도가 세상을 위해 하나님께 복종한 최고의 순간을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이 가장 깊이 임재 했던 순간으로 보았다. 어떻게 우리 오순절주의자들이 세상을 위한 십자가 정신으로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 채, 방언을 통해 우리들 속에 임재한 하나님의 충만을 표명할 수 있겠는가?

    예언자적 황홀경을 예언자적 연민으로 대체하려는 허쉘의 바람은 이런 맥락에서 계몽적이다. 허쉘에 의하면 예언자는 하나님께 붙잡혀 황홀경의 열광적 상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비통함을 공유하는데 다가가려고 한다. 내가 말했던 것처럼 방언 예배에서 황홀경을 위한 고귀한 자리가 있다면, 그것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연민을 공유하려는 우리의 열정이 빠진 열광이 아니다. 발타자(Balthasar)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그에게 완전히 사로잡히는 데에 우리가 동의하는 것이야말로 황홀한 것인데, 그것은 열광(enthusiasm)의 황홀경이 아니라 봉사(Service)의 황홀경이라고 쓰고 있다.

 

방언과 새 창조

 

    방언은 다가올 구속과 해방에 대한 갈망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이미 시작되었고 현재 진행 중이라는 증거다. 하나님이 변화시키고 해방시키려 활동한다는 이러한 증거는 성경에서 신 현현의 필수적인 요소다. 뎀스터에 의하면 방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역사를 재창조하는 것이라는 표징으로써 언어의 재창조이다. 사도행전에서 방언이 증거 되는 곳은 어디서든지, 사회적 관계가 변혁되었다. 신유와 마찬가지로 오순절주의자들에게 방언은 단지 영혼의 해방뿐 아니라 인간 존재의 모든 면: 영혼, 마음, 육체, 사회적 관계에서의 해방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표징이다. 라너(Karl Rahner)는 그의 독창적인 글, 새 땅의 신학적 문제(Über die theologische Problematik der neuen Erde)에서, 개인적 종말론의 수준에서 신유에 대한 신앙과 교회의 사역을 통한 사회적 관계의 치유에 대해 어떤 희망도 제공해주지 않는 묵시적 종말론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적고 있다. 방언이 복음을 통해서 세계를 변혁하는 하나님의 역사의 "최초의 육체적 증거"라면 오순절주의자로서 우리는 율법주의자의 종말론에 매료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방언을 증거로 여기는 것에 대해 재고해야할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지금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령이 우리의 중심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 속에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고 있다는 가시적 표징으로 우리를 소유하고 계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많은 오순절주의자들이 아담 안에 부어진 하나님의 숨결과 사도들을 향한 예수의 호흡(20:22) 속에 내포된 창조 모티브를 오순절의 방언의 원형으로 사용해온 것은 흥미롭다. 그들은 또한 마가복음 16장의 "새 방언"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새 창조 모티브를 암시한다. 헹헨(Ernst Hänchen)은 오순절을 새 창조로 묘사했고, 클라인(Meredith Kline)은 첫 창조의 일곱째 날의 영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의 영이라는 상징으로써 영이 칠중적이라고 말한다(: 1:4). 오순절에 전적 타자(Das Ganz Andere)"만물을 전적으로 새롭게 하는 이"(Das Ganz Aendernde)가 되었다.

    홀렌베거는 하나님의 행동을 단지 초자연적인 혹은 창조 외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오순절주의의 경향에 대해 비판하면서 창조의 영을 언급한다. 그는 이적적인 사건을 하나님이 창조 안에서 그리고 창조를 통해서 예외적으로 예기치 않게 역사하는 것이라고 보려 한다. 멕도넬(Killian Mcdonnell)은 인간의 참여를 무시하는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에 대한 "잽 이론"(zap theory)을 반대하면서 방언을 단지 다른 세계의 것 혹은 초자연적인 것으로 여긴다. 오순절주의자 스피틀러 역시 방언을 하나님에 의해 영적 은사로 변형된 인간의 자연스런 표현양식으로 본다. 이것은 오순절주의에서 방언과 신유가 인간의 참여도 사회의 갱신과 창조의 갱신에 필수적 부분임을 보여주는 표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의 선포뿐만 아니라 의료적 도움, 사회적 행동, 환경적 조치도 만물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이 될 수 있다. 서구에서는 자연이 무시되고, 심지어 착취된 역사적 운명을 너무나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오순절 종말론은 방언, 신유의 충격과 마찬가지로 새 창조의 맥락에서 역사의 해방이라는 역할을 받아들여야할 것이다.

 

나가는 말

 

    어떤 면에서 방언은 매우 개인적인 경험이고,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 사이에서 다양한 뉘앙스를 지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방언을 이해하도록 일반적인 방향을 제시해주는 성경으로부터 추출된 신학적배경이 있다. 하나님의 현현에 대한 오순절주의의 연구는 문자 그대로 표적과 기사에 대한 선정적인 탐구에 항복하도록 허락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유롭고, 예상할 수 없고, 신비스런, 그러나 우리의 중심에서 느껴지고, 인식되고, 입증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성경 안에서 방언체험의 신 현현적 특성 아래 있다. 방언을 둘러싼 신 현현적 전통은 오순절주의자들이 해방, 하나님, 인간에 대한 신학을 전개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존재의 신비와 해방을 느끼게 하고, 분류할 수 있는 언어가 따라가지 못하는 반응을 촉진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현현은 공허한 자기중심적인 감정적 행복감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방언이 상징하는 이러한 하나님과의 만남은 기독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십자가는 영광의 통로가 되고, 억압받는 창조물의 신음으로써 방언은 찬양이라는 방언의 통로가 된다. 이러한 완전한 경험은 종말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방언은 다가올 해방과 구속을 바라는 갈망으로써 또한 그것이 우리 안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를 통해 세상 속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증거다. 랍비 알터의 구두수선공 친구가 탄식하도록 내버려두자. 우리도 그와 함께 탄식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