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ological Studies, 32 no 1 Mr 1971, p 3-29.
TOWARD A THEOLOGY OF "SPEAKING IN TONGUES"
James Massingberd Ford
University of Notre Dame [로마 가톨릭 계통]
이창승 역
로마 가톨릭과 다른 기독교 교단들 안에서 “방언” 현상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이 영적 은사의 “신학”(theology)의 밑그림을 그리도록 도전한다. 모르톤 켈시(M. Kelsy)는 심리학 분야에서 중요한 공헌을 해왔다. 그러나 심리학적 조사들은 타당하고 흥미롭기는 하지만, 그 조사들은 초자연적 현상에 적절한 빛을 거의 비춰줄 수 없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서 16절: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은 순전히 성경적 관점에서 방언을 접근할 것이다.
먼저, 적절한 성경 본문에 대한 대표적인 주석들을 간략하게 개관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그 후에 우리는 “방언”을 (a) 개인적 입장에서 그리고 (b) 공동체적 입장에서 논의할 것이다. 방언에 관련된 모든 논문들을 모은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주요 관심은 이 영적 경험의 타당성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보다 최근의 주석들 가운데 “방언”을 무아지경(ecstatic)이나 열광적(frenzied) 상태에서 발화되는 “횡설수설”(gibberish)보다는 비무아지경적 상태에서 발화되는 진정한 언어들로 해석하는, 한 가지 일반적인 경향이 있다는 사실에 있다.
대표적인 주석들
방언에 대한 주석들은 대략 네 가지 종류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1) “방언을 어떤 정서적 상태에서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소리들(unintelligible sounds in an emotional state))로 간주하는 주석들; (2)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음(intelligibility)을 인정하는 주석들; (3) 방언을 진정한 언어로 보는 주석들; (4) 최근 십년 사이에 써진 논문들. 첫 번째 부류에 클레멘스(Clemens, 1898), 드와르(Dewar, 1924), 톰슨(Thomson, 1926), 신지(Synge, 1934), 그리고 마틴(Martin, 1944) 등을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칼 클레멘스는 오리겐과 이레니우스에서 발견되는 2세기에서 3세기 자료들을 개관하고 그들이 “방언”을 “외국어”(foreign languages)로 말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이레니우스가 그의 시대의 “방언”을 오순절 날의 “방언”과 동일시하는 것 같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이레니우스가 방언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클레멘스는 이것이 완전히 새로운 언어를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한다. 사도행전 10장 46절과 19장 6절에서 “방언”(tongues)이라는 단어는 외국어를 지시하지 않고 사용된다. 이 본문들을 오순절의 이야기와 비교해 보면, 사용된 문구는 “방언”(tongues)이지 “다른 방언”(other tongues)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그 오순절 현상이 “다른” 방언들로 말해진 이적이었는가를 묻는다. 아마도 이 “다른” 방언들로 말하는 것은 미드라쉬를 모방한 후대의 첨가였을 것이다. 그 미드라쉬에 따르면 일곱 가지 목소리들이 시내산에서 칠십 가지 방언들로 변했다. 이 첨가 이전에 그 본문은 사도행전 10장 46절과 19장 6절처럼 “방언들”로 읽었다. 그는 마가복음의 종결부분은 명확하지 않다고 말한다.
클레멘스는 터툴리안이 다른 입장을 취한다고 생각한다. 터툴리안은 마르시온이 찬송과 환상과 기도와 방언을 만들어 낸다고 힐난한다. “방언”은 무아지경 속에서의 기도로 이해되는 것 같다. 그렇지만, 클레멘스는 터툴리안이 아마도 방언에 대한 몬타누스주의적 개념에 대해 말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이 언급으로부터 초기 기독교들에 대한 추정들을 끌어낼 수 없다고 주장한다.
클레멘스는 이어서 예언과 방언을 비교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예언은 “보편적으로 이해 가능”(universally intelligible)한 반면에 방언은 그렇지 못하다는 구별되는 특징을 발견한다. 그러나 클레멘스는 이것이 불명료한 소리들로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로마서 8장 26절은 다른 것처럼 보이고, 12장 3절은 이해할 수 있는 말(intelligible utterance)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하지만, 비록 어떤 단어들이 이해되었다 할지라도, 일반적으로 방언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다음 클레멘스는 “통역”(interpretation)을 다룬다. 그는 “아마 그 문제와 관련된 실행과 친숙함이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말하는 사람의 얼굴 표정들과 몸짓들을 동시에 통역할 수 있도록 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은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방언을 통역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러나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조금 더 의식이 남아 있어서 자신들의 방언을 통역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의 결론은 (1) 방언을 말하는 것은 의식이 없는 무아지경 상태에서 발생했고, 보통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2) 각 개인마다 차이가 있었고, 같은 사람에서도 때에 따라 다르기조차 했다는 것이다. 때때로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후에 자신이 말한 것을 기억할 정도로 의식이 있었지만, 다른 때에는 자신의 의식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잃어서 자신의 말의 내용과 정확히 반대로 표현하고 싶다고 느꼈다. 만약, 이것에 더하여, 우리가 무의미한 소리 결합들이 연결되지 않는 단어들과 문장들로 교체된다면, “각종 방언”(kind of tongues)(롬 12:10)이라는 사도 바울의 표현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추측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클레멘스는 이 신약적 방언과 이교도의 무아지경적 발화, 대부분 신들의 이름으로 구성된 영지주의적 기도들, 불명료한 소리들과 새롭게 창조된 단어들로 구성되었던 17세기 말과 18세기의 까미싸드(Camisards)의 발화, 그리고 발성 기관들이 다른 힘에 의해 통제된다고 믿었던 1731년의 젠센주의자들(Jansenists)의 열광적 운동과 대조한다. 그는 또한 스웨덴에서 “설교-병”(sermon-sikness)이 발생했을 때, 불명료한 소리들, 무의식적인 찬양, 때때로 무서운 저주로 구성된 40인의 발화들과도 대조한다. 특히 이것은 어빙주의자들 가운데서 발생했던 방언 말하기와 비교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현상은 처음부터 인위적이었기 때문이다. 클레멘스는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 말하기는 전적으로 꾸밈없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오순절의 방언, 고넬료의 집의 방언, 에베소의 방언들은 비록 연결되지 않는 단어들과 문장들이었다 할지라도 놀라운 감동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 사도들은 베드로가 침묵을 요구받았을 때 스스로를 통제하고 있었다. 게다가, 바울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막지 말라고 말한다(고전 14:39). 클레멘스는 방언으로 말하기는 곧 사라졌으며, 그래서 외국어로 말하는 것과 혼동되지 말아야 한다고 결론짓지만, 둘 사이의 유사성 때문에 어떤 관련성이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순절의 개념이 나타났다.
클레멘스의 논문은 불분명함을 남긴다. 그는 그 경험의 타당성을 인정하는 것과 그 경험을 무아지경적인, 모호한, 그리고 감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렇게 많은 저자들의 글들에서 발견되는 방언에 대한 대대적인 비난은 없다.
린드세이 드웨어(Lindsay Dewar)는 다른 접근방식을 취한다. 그는 오직 사도들만이 다른 방언으로 말했다고, 사도행전 2장 9절에서 11절은 편집된 것(an editorial)이므로 그 구절들은 외국어들이 들려졌다고 제안하기 위한 지침으로 사용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방언으로 말하기는 “사도들의 무의식에 갑작스런 어떤 억압이 가해짐”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억압은 그들이 그 십자가 처형에서 받았던 충격에서 기인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십자가가 두려움으로서가 아닌 하나님의 계획으로서 언급되고 있는 베드로의 말에 유의시킴으로써 그의 견해를 뒷받침하려 한다. 그러므로 그 사도들은 정서를 통해 아마도 예루살렘에 있는 다양한 언어 공동체들로부터 배웠을 또는 히브리어 성경의 파편들이었을 의미 없는 음절들을 쏟아냈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그분의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구약에 주목하셨다는 것에 주의한다. 드웨어는 사도들의 발화의 어떤 부분은 “횡설수설”(gibberish)로 나타났겠지만 다른 부분은 하나님의 큰일을 선포했다고 제안할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히브리어는 “그들이 그 안에서 태어난 방언”으로 간주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번 그 갈릴리 사람들은 그들의 발화가 평소에는 그것에 굴복된 특별한 장애, 즉 그들의 통용어에서 후음들의 혼란 없이 말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드웨어는 위그노 성경으로부터 훌륭한 불어로 권고한 까미사드들과 비교한다.
드웨어는 고넬료 이야기로 관심을 돌리고서 다시 한 번 억압(repression)을 주장한다. 고넬료는 회당예배에 온전하게 참여할 수 없었던 개종자였기 때문에 이 억압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는 히브리어나 헬라어 성경 낭독을 들어왔을 것이고, 그래서 어구들의 파편들을 말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성령은 오순절 후에 그 공동체 안에 거하셨고, 그의 부으심은 사람들의 수용적 능력의 증진이었다.
그러므로, 드웨어는 진정으로 방언을 “자연스러운”(natural) 것으로 여기지 않고, 그보다는 비정상적인 행위(abnoraml behavior)로 간주한다. 그의 논문은 그가 그 경험에서 진정한 영성을 거의 보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할 것이다.
톰슨(W. S. Thomson)은 “방언 말하기”를 일종의 “종교적 고양”(religious exaltation) 상태로 간주한다. 그것은 향상된 또는 자신을 초월한(above oneself) 느낌과 함께 시작하며, 강해지고, 그 다음에 무아지경과 열광을 지나 완전한 몽환의 경지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열광적이고 몽환적 상태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14장에서 그 사도에 의해 묘사된 갑작스럽게 질러내는 불분명한 소리들, 탄식소리들, 그리고 중얼거림들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톰슨은 이것들을 광기어리고, 뒤죽박죽이고, 유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들은 발화자에게는 영적 유용성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통역자가 없다면 무익하다는 것이다. 그는 사도행전 2장을 조사하면서, 십자가형의 그리고 순례자들의 큰 군중의 정서적 영향력을 언급한다(그는 네로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유월절에 250만 명의 순례자가 예루살렘을 찾았고, 오순절은 더 중요한 절기였다는 것을 진술한다). 술 취했다는 비난은 어떤 무질서한 상황을 암시한다. 그는 그 방언들이 외국어들이었다는 설은 “오랫동안 버림받아왔다”고 밝힌다. 그 본문은 열아홉 개 지방이나 나라들의 목록을 제시한다. 그 외국 순례자들이 도착했을 때, 사도들은 그 순례자들을 보고는 그들의 찬양을 그들이 상기해낸 외국어들로 바꾸었다.
그러므로, 톰슨의 견해는 드웨어의 견해보다 더 헐뜯는 것 같다. 조용한 기도 모임에서 방언으로 부르는 세련되고 아름다운 합창을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절대 이것을 “광기어린”(bedlam) 것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 찬양은, 비록 다른 언어들, 선율, 음조들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가장 불가해한 방식으로 조화를 이룬다.
신지(F. C. Synge)는 사도행전 2장을 이사야 59장 21절과 요엘서 2장 28절에서 30절의 성취로 본다. 그는 구약성경에서 성령의 역사의 예들을 인용하며 말한다.
인용된 예들은 모두 비정상적인 행위와, 그리고 아마도 그 말의 배후에 물활론(animism)의 힘과 관련된다. 깊은 잠에 빠진 정신에서 나오는 것 같은 이사야 29장 10절이나 성미가 꼬인 것에서 나오는 것 같은 19장 4절의 문구들은 사울의 예언과 발작의 원인과 같은 비정상적인 행위의 동일한 원인에서 기인한다. 사무엘상 16장 14절에서 23절에서처럼 부분적인 실체화는 부분적으로는 고대의 물활론적 사고에서 기인하며, 부분적으로는 새로운 사고에 기인한다. 그 새로운 사고란 사단의 인격화에서 절정에 이르는 악의 문제를 풀기위한 시도였다.
그는 신약에서 성령의 부으심은 유사한 비정상적인 또는 초정상적인 행위를 발생시켰다고 말한다. 그는 갈라디아서 4장 6절,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과 데살로니가후서 2장 2절과 같은 본문들을 무아지경적 발화로 해석하려고 애쓰며, 이것은 “사도행전 2장 10절에서 14절의 해석을 위한 소위 실마리”라고 단언한다. 그는 로마서 8장 26절, 27절; 에베소서 5장 18절을 같은 범주로 분류한다.
이렇게 신지 역시 방언을 심리적 비정상(psychological abnormality)으로 치부한다.
마틴(Ira Jay Martin)은 그의 논문을 1944년에 썼지만, 그의 참고문헌들은 주로 1913년에서 21년의 것들로 보인다. 마틴은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42절에서 방언은 성령에 의해 사로잡힘과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과 베드로가 이 관련성을 입증하기 위해 요엘서를 인용했다고 주장한다. “무아지경적 발화(ecstatic speech)는 적어도 어떤 기독교 집단들에서 이 [성령의] 점유에 대한 최고의 증거가 되었다.”
사도행전 4장 31절에 대해서 그는 (하르낙과 함께) 이것은 아마도 이중적인 것일 것이라고 쓴다. 방언은 특별하게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방언은 무아지경적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는 사도행전 8장 14절부터 24절의 방언에 대해 말하면서 베드로가 방언을 성령께서 오신 것에 대한 하나의 증거(proof)로 간주했으며, 사도행전 10장 44절부터 48절과 11장 15절에서 17절에서 베드로는 성령이 “처음에 우리에게 그러셨던 것처럼”(행 11:15) 강림하셨다고 말한다고 쓴다. 즉, 그는 고넬료의 이야기를 오순절과 동일시한다. 사도행전 19장 2절부터 7절에서 회심자들은 방언을 말하고 예언했다. 약 이십 오년 후에, 방언은 은사들 중의 하나로 발견된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고린도전서 13장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시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마틴은 그리고 나서 방언은 기독교에 제한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예를 들면, 그것은 엘닷과 에닷 이야기에서(민 11-12), 바알 선지자들에서(왕상 18:16-46), 아론의 경우에서(민 12:1-2), 헬라 시들, 꾸메안 신탁(the Cumean Sibyl), 버질의 아에네이드, 거라서 광인에서(눅 8:26-39)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참조한 것들은 방언을 언급하는 것 같지 않다. 그는 계속 “그것은 적당한 자극을 받으면 어느 때나 어디서든지 발생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영국의 어빙주의자들, 세벤느의 어린 예언자들(the Little Prophets of Cevennes), 오늘날의 거룩한 구르는 자들과 오순절주의자들이다. “또한 정신 착란과 이상으로 통제되지 않은 지껄임의 헤아릴 수 없는 예들이 있다.”
마틴은 방언(glossolalia)이 성령의 점유의 객관적 표징을 갖고 싶은 욕구로부터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이 “말하기는 이따금씩 이해할 수 있고 이치가 닿는 것이었지만, 거의 대부분 열광적인, 불분명한, 이치가 닿지 않는, 무아지경적 발화로 구성되었다”고 단언한다. 그 회심자들은 신망을 얻었으며, 그래서 신적 능력과 사람들의 총애를 굳게 지키기를 바랐다.
마틴의 논문은 드웨어, 톰슨, 그리고 신지의 논지들을 더욱 과장된 방식으로 진술한다. 그러나 그의 논거들은 그의 분별없는 참조들과 언어적 분석의 결여로 인해 전혀 강력하지 않다.
이 모든 논문들은 그들이 평가하려는 현상을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 같다. 방언은 심리적 비정상에서 기인한다는 주장은 임상 실험을 해보고 경험적 증거를 얻었던 켈시(Kelsey)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반박 당한다. 거기에는 어떤 비정상적인 사례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러나 현대의 직접적 경험은, 예를 들면 성경에 대한 어떤 가설을 확증하는 고고학적으로 경험적인 증거와 유사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객관적으로 보자면, 성경 본문은 그 저자들이 말하는 무아지경이나 극렬한 감정을 증언하지 않는다. 자아를 잊어버리는 몽환의 경지(trance)의 의미로서 엑스따시스(Ekstasis)는 단지 사도행전 11장 5절과 22장 17절에서만 발생하지, 방언(glossolalia)에 관련된 본문들에서는 아니다.
두 번째 부류로 에드워즈(Edwards, 1928), 테일러(Taylor, 1928), 그리고 스톨(Stoll, 1943)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에드워즈(Hubert E. Edwards)는 헬라어는 로마제국의 만국공통어였고, 그래서 시리아로부터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이해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낸다. 사도행전 2장에 제시된 나라들의 사람들 대부분은 헬라어를 이해해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성령이 “다른 방언들”(other tongues)로 말씀하셔야 했겠는가? 그는 베드로의 선포는 헬라어나 아람어로 말해진 것이 아니었다고 암시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아마도 “방언”(tongues)은 그 군중들에게 연설하는 데 사용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군중 자체가 예루살렘에 최근에 왔다는 말이 없고, 다만 그들이 예루살렘 거주자들이었다는 말이 있다. 칠십인역과 파피루스 사본에서 katoikein은 기술적 의미에서 “외국인으로서 거주하는” 사람들 혹은 “체류자들” (paroikountes)로부터 그 지역의 영구 거주자들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된다. 베드로는 그들이 유대와 예루살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왜 그 본문은 그들이 “세계 각국에서” 왔다고 말하는가? 에드워즈는 로마의 평화가 여러 나라로 흩어졌던 많은 유대인들을 그들의 나라에 거주할 수 있도록 돌아오게 했으며(행 23:6 그리고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자라났다는 것과 비교하라), 그 기적은 얼마 전에 떠나왔던 고향의 사투리(dialects)들을 들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에드워즈의 글은 보다 더 지지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들은 언어들 안의 사투리들(dialects in languages)이었다는 것을 밝힐 수 있는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할 것이다.
테일러(R. O. P. Taylor)는 그 이적은 오직 듣기(해석)의 일종이었지 말하기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본문은 이 견해에 맞선다. 그러나 그 극복된 장애는 언어(language)의 장애이지 지방 사투리(dialect)의 장애가 아니었을 수 있다 (위의 에드워즈와 비교하라). 방언으로 말하는 것과 그 군중들의 듣기 사이에는 시간적 간격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그 이야기의 부차적인 것으로 끌고 갈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우리는 방언으로 말하기라는 어구가 등장하는 다른 모든 경우들에서, 그것은 큰 정서적 억압 아래서 불분명한 외침을 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화자는 아주 극심한 격정을 통해 그것들을 분명한 단어들로 내어 놓을 수 없었으며, 그래서 이것은 그의 감정의 원인을 분별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수행 되어야만 했다.” 그는 라벤(Canon Raven)을 인용한다. 라벤은 통역을 “생각-전이”(thought-transference)라고 말했다. 테일러는 사도행전 2장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다른 방언”이 외국어를 의미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 선포는 대부분 성경, 아마도 메시아 본문들의 인용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며, 그래서 사람들은 그 뜻을 이해했을 것이다.
스톨(R. F. Stoll)은 불의 모양과 색을 갖는 방언들의 현상을 언급하며, 그것들은 성령을 통해 그것에 의해 새 법이 수여된 연설과 설교를 상징했다고 말한다. 스톨은 사도행전 2장의 목록에 오른 종족들에 현대적 이름들을 부여하고, 약 다섯 개내지 여섯 개 언어들이 기술되었다고 산정한다. 그런데 각 언어는 다른 지방 사투리들을 갖고 있었는데, 대략 열다섯 개의 다른 사투리들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신약성경에서 dialektos는 오직 사도행전 1장 19절(예루살렘 거민들의), 21장 40절, 21장 2절, 그리고 26장 14절에서만, 각 경우에 히브리인들에 의해 말해진 한 언어에 대한 언급과 함께, 사용된다. 스톨은 그 발화자들은 자신을 통제하고 있었고, 그 언어는 그것을 아는 사람에 의해 이해될 수 있었고, 그것은 중얼거리는 소리들의 무의미한 뒤범벅이 아니었다는 견해를 취한다.
그러므로 스톨은 방언은 언어들보다는 사투리들로 구성된다는 에드워즈와 테일러의 주장을 지지하는 것 같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세 학자들은 방언에 대해 보다 실제적이고 영적인 견해를 취한다. 그들의 견해는 (테일러의 불분명한 외침들과 격한 감정에 대한 언급을 제외하고) 성경 본문과 일치한다.
브라운(Brown, 1875), 빌(Beel, 1935), 리온네(Lyonnet, 1944), 그리고 지르크스(Sirks, 1957)은 세 번째 부류에 속한다.
브라운(David Brown)은 사도행전의 언어들은 그 사도들이 배운 바 없는 “명확히 표현된 진정한 방언들”(real articulate tongues)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고린도 공동체의 방언은 사도행전의 방언과 어느 정도 달랐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는 동사 apophtheggomai는 칠십인역에서 감동된 말들(대상 25:1), 그리고 감동되었다고 거짓되게 공언하는 말들(겔 13:19, 미 5:12, 슥 10:2), 둘 모두에 사용되었다는 것, 그리고 또한 방언 은사는 성, 연령, 계급에 관계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에 주목한다.
빌(A. Beel)은 그 은사의 특성에 대해 쓰고, 그 말하기(the speech)는 사도들의 출생지의 방언들(native tongues)과 다른 것이었다는 것에 주의한다. 그것은 듣기 이적이 아니었고 말하기 이적이었으며, 뒤죽박죽이거나 뜻을 알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비록 이것이 생각이 명확하게 표현된 그리고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할지라도, 술 취했다는 비난은 거기에서 120명의 사람들이 종교적 열심을 가지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었다. 그는 또한 방언 은사의 목적과 범위를 검토하고는 그것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었고(행 14:11이하 참조),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것은 상습적이거나 영구한 은사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스따니슬라오 리온네(Stanislao Lyonnet)는 여러 주석가들의 견해들의 요약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의 주요 관심사는 그가 ebrietas spiritalis나 iubilum mysticum이라고 언급하는 그리고 아빌라의 성 테레사(St. Teresa, Life 16), 끌레보의 성 베르나르드(Bernard of Clairvaux, In Cant. 67, 3) 그리고 성 알퐁수스 리구오리(St. Alphonsus Liguori, Homo apostolicus, Appendix 1, 15)를 인용하는 사실이다. 이것은 방언과 유사한 현상인 것 같다.
지르크스(G. J. Sirks)는 방언들은 성경 본문의 빛나는 면들의 해석들이라고, lalein은 “인용(perico-pae)의 정연한 암송”을 의미할 수 있다고, “방언”은 일반적으로 인정받은 것들과 상반되는 성경 해석들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인용들과 새로운 해석의 변이에, 특히 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지목한 것 때문에 놀랐다. 만(C. S. Mann)은 “지르크스는 사도행전 2장에 glossae와는 별개로 ‘언어들’(languages)을 위한 전혀 다른 하나의 단어(dialektoi)가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베드로의 행동이 조금도 정신이상인 사람의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을 올바르게 진술한다”고 말한다.
이 네 저자들은 방언 은사의 해결 실마리를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즉, 방언 은사는 감동을 받은 은사, 기도 또는 찬양의 은사, 그리고 성경이나 아마도 교훈과 결합된 은사다. 그들의 논문들은 이전에 거론된 저자들에게서는 언제나 발견되지 않았던 공감을 가지고 본문을 다룬다. 고전 예언자들과 성령의 개념은 무아지경적 예언자들이 사라진 이후에 발생했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유사한 관측이 고전 오순절주의와 신오순절주의에 관련하여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십년 동안 방언의 은사에 대해 글을 써온 학자들에는 베어(Beare, 1964), 큐리(Currie, 1965), 건드리(Gundry, 1966), 스위트(Sweet, 1967)가 포함된다. 방언 은사가 역사적 교회들 위에 보다 풍부하게 주어진 때, 즉 신오순절주의가 태어난 때는 십칠여 년 전이었다.
베어(Beare)는 몇 가지 중요한 의견을 제시한다. 첫 째, 그는 마태복음 안의 권고에 올바르게 주의를 기울인다. 그 권고는 의미 없는 소리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그는 우리는 정경적 복음서들 안에서(만약 마가복음 16장 9절 이하를 첨가부분으로 받아들인 다면) “방언으로 말하기”에 대한 언급을 하나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셋째, 비록 요한복음서에 성령에 대한 많은 언급이 있지만, 방언에 대한 언급은 없다. 넷째, 사도행전 2장에는 많은 상징이 존재하며, 사도행전의 방언들은 다른 곳, “그 곳에서 이것이 발화자의 생각을 전혀 내포하고 있지 않은, 이해할 수 없는 발화라고 여겨지는, 그리고 외부인들에게 발화자가 미쳤다는 인상을 줄 수 있을 정도”인 방언들과 다른 것 같다. 사도행전 2장은 7장 9절과 같은 장면의 전조다. 다섯째, 그는 “예수는 저주받은 자” (고전 12:3: anathema Jesus)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말을 더한다. “현대 선생은 아마도 그런 ‘정신’을 의식의 통제가 무아지경적 생태에서 작동하지 않을 때 말로 터져 나오는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무의식적인 적의의 증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베어(Beare)는 고린도전서에 심리학적 접근을 취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신약의 나머지 부분에 관한 그의 단서들은 방언에 대한 오순절적 강조의 입장에 빛을 비춰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큐리(S. D. Currie)는 “방언으로 말하기”라는 어구는 인간의 언어가 아니거나 또는 발화를 의미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연결된 담화의 의미에서, 그 소리들이 어느 면에서 의미 있다 할지라도” 전혀 언어들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그 어구는 인간의 언어를 의미할 것이다. 그는 크리소스톰을 인용하는데, 그는 그 어구는 배우지 않은 인간의 언어들을 의미한다고 믿는다. 그는 또한 이레니우스를 인용하는데, 그는 “예언 은사를 갖거나 성령을 통해 모든 방언들로 말하며 공동의 선을 위해 사람들의 비밀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비밀들을 설명하는 교회 안의 많은 형제들 . . .”이라고 말한다. 이레니우스의 진술은 또한 유세비우스의『교회사』(5, 7, 6)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라틴어 본문이 더 오래된 것일 것이다. 헬라어 본문은 단지 “우리는 많은 형제들이 . . .다는 것을 들었다”라는 곳에서 과거형 대신 현재형을 사용하는 것만 다르다. 이레니우스는 또한 glossais lalein은 배우지 않은 인간 언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누가와 이레니우스 사이에는 방언으로 말하기에 대한 암시가 거의 없다. 복음서 위경들조차, 인간 언어를 말하는 동물들은 언급하면서도, 그 현상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방언 은사는 “이적, 병 고침, 표적, 은사들, 가르침, 다스림, 회복, 섬김, 지식, 찬양, 호의, 확신, 나눔”을 담고 있는 요한행전(106장)의 성령의 능력 목록에 들어있지 않다. 방언은 은사들이 기재된 저스틴의『트리포와의 대화』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큐리(Currie)는 고린도 “방언들”이 천사의 말일 수 있는 지(고후 12:3-4 참조, 그곳에서 바울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들었다)를 고찰한다. 에녹서 40장은 천사들의 여러 말들을 언급한다. 아브라함 묵시록 17장에서 아브라함은 한 천사의 노래를 배운다. 그리고 그 노래는 전해진다. 이사야의 승천 6장부터 11장에서 천사들의 각 계급은 고유한 음성을 갖는다. 이 본문을 레위의 증언 3장과 유다의 증언 25장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큐리가 인용하는 가장 흥미로운 것은 욥의 증언 45장부터 50장이다. 욥의 딸들은 천사의 소리를 낼 수 있는 능력을 받는다. 헤메라는 마음을 바꿀 수 있는 능력과 “천사의 방언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받는다. 카시아는 “권품의 천사들의 방언”이 주어진다. 셋째 딸은 “높은 존재들의 방언을 받는다. 그녀는 케루빔의 언어로 말했다. 나호르는 이 찬양들을 기록했다.
큐리는 방언으로 말하기는 “일종의 신탁적 발화, 해석을 요구하는 비밀스런 진술”이었을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방언으로 말하기가 일종의 발성의 운율이라면, 허풍과 혼동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1세기와 2세기의 침묵은 불가사의하다. 몬타누스주의의 탈선은 카리스마적 은사들을 소멸시켜왔을 것이다.
이것은 흥미롭고 중요한 논문이지만, 그가 쿰란, 특히 최고 왕자들에 의한 일곱 가지 축복의 말, 세 가지 불의 혀들, 에스겔 1장 10절에 기반을 둔 문구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놀랍다.
방언 신학에 있어서 큰 전환은 건드리(R. H. Gundry)의 논문에서 이루어 졌다. 건드리는 그의 논지를 데이비스(J. D. Davies)보다 더 발전시킨다. 그는 영어 새번역성경이 이 문구를 “무아지경적 발화”(ecstatic utterance)라고 번역한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런 번역은 그것이 “오래된, 낯선, 난해한, 비밀스런 발화들”로 혹은 “놀라운, 천상적 언어들”로 “종교적 무아지경에 빠진 사람들이 내뱉는 뜻이 통하지 않는 말(broken speech)”이라고 암시한다(바우어 아른트 깅그리히, Glossa 3a). 그는 인간의 말로서 방언과 관련된 아래와 같은 논거들을 제시한다.
1. Glossa는 신약성경에서 인간의 말을 위해 사용된다. “그 용어를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의미하는데 사용한 것은, 특히 성경 헬라어에서, 이해할 수 없는 담화를 위해 사용한 것보다 훨씬 많다.” 이것이 모호한 담화를 위해 사용된 예는 오직 이사야 29장 24절과 32장 4절(칠십인역) 두 가지 뿐이며, 그 두 경우는 무아지경이 아닌 더듬거림과 관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언어를 가리킨다.
2. Hermêeia(해석)이라는 단어에 관하여는, 보통 이것은 어떤 언어를 통역하는 것을 의미한다(고전 12-14에서 일곱 번 등장하는 것을 제외하고). 한 경우는 비꼬는 것과, 둘은 설명과, 열일곱은 통역과 관련된다.
3. 사도행전 2장 6절부터 11절까지에서 glossais lalein은 반드시 언어들을 의미한다.
4. 이 정황에서 “천사의 말”에 관하여, 바울은 또한 사람의 말을 언급한다. 더욱이, ean은 가정법과 함께, “만약 내가 천사의 말을 한다 할지라도”는 반드시 사실에 입각한 실재를 가리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 가정은 바울이 모든 예언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 것처럼 등등 천사의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5. 28절 하반절에서 “비밀” 뿐만 아니라 “성령 안에서”도 무아지경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통역자의 부재이다. 그 부재가 방언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 것이지, 방언의 무아지경적 본질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다. 참으로, 그 “믿을 만한 표징으로서 글로솔라리아의 유효성(신적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있어서 그 유효성뿐만 아니라 - 14장 6-12, 특히 23절을 보라)은 그것이 헬라 종교에서의 무아지경적 알아듣기 힘든 표현과는 다르다는 것에 좌우되었다.”
6. “방언”은 설득력 있는 이적이지 의사소통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은 아닌 것 같다.
7. 바울의 lalein 사용은 방언이 인간의 언어라는 논거에 반하는 것이 아니다. Lalein은 논리력이 없는 담화일 수 있지만, 그리 통상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린도전서 14장 6절에서 바울은 lego를 사용하며, 그리고 고린도전서 14장 9절에서 마음으로 말하는 것이 주제일 때 lalein을 사용한다. 고린도 전서 14장 29절에서 lalein은 교회 안에서 아내들의 말하기 금지와 관련하여 사용된다(14:34이하). lalein을 glossolalia를 위해 사용하게 한 것은 아마도 칠십인역 이사야 28장 11절 이하에서 lalein의 사용일 것이다.
8. 술 취했다는 비난은 그 담화가 반드시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난했던 사람들은 바로 “다른 사람들”, 즉 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었다.
9. 고린도전서 14장 5절에서 바울은 통역이 동반되는 방언은 예언과 동등하게 귀중하다고 말한다.
10. 방언과 관련하여 질서가 지켜져야 한다는 가르침들은 예언과 질문하는 아내들을 위한 가르침들과 동일하다. 마지막으로 언급된 두 가지들 중 그 어느 것도 사리가 맞지 않는 담화(speech)와 관계없다.
11. 바울이 오직 두 세 사람만 방언으로 말해야만 한다고, 통역자가 없다면 방언도 없어야 한다고 규정한 사실은 화자가 자신을 통제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2. 고린도전서 14장 10이하에서 바울은 틀림없이 언어 은사로서 방언을 말하고 있었다.
건드리의 논문은 고린도적 방언으로 말하기는 무아지경적이 아니라는 것과 그 은사는 언어적이라는 것에 전혀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건드리의 논문은 스위트(Sweet)가 현대 오순절적 현상의 빛에서 고린도전서 12장부터 14장을 논하고 있는 보다 광범위한 논문에 의해 보충된다. 반 오순절주의자들은 바울의 방언에 대한 바울의 불만을 강조하고 싶겠지만, 그러나 그는 단지 방언이 성령의 배타적인 표징이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방언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고, 다만 공적으로 과시된 방언을 반대했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전적 침례를 통해 영적인 사람들(pneumatikoi)이 되며, 오직 그들이 그리스도를 부정할 때만 이 자질을 잃는다고 단언했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은사들의 다양성과 “동등한 신빙성”을 강조한다. 바울은 이사야 28장 11절부터 12절까지의 적용을 통해 그 편지를 받는 자들에게 “방언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위한(=향한) 표적이지, 신자들의 유익을 위한 표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린다. 그래서, 구약에서처럼, 이것은 신실한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이었다. 스위트는 마지막 사항에 있어서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논문의 나머지 부분에 동의하지만,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만 다룬다.
스위트는 고린도교회의 게바파는 성령의 이런 나타남을 지나치게 주장해 왔을 것이라고 느낀다. “그 요구는 게바파의 지도자들로부터 나왔고, 팔레스타인적 경건과 관행을 고린도교회에 주입시키려는 집단 움직임의 일부였다”(p. 246). 그렇지만, 스위트는 방언의 실행은 베드로에 의해 고린도교회에 소개되지 않았다는 것과 다른 곳에서부터 존재했다는 것을 인식한다. 스위트는 그의 중요한 논문을 현대 오순절적 현상들과 관련하여 안내를 위해 일곱 가지 “바울의 취지들”을 제공하면서 끝낸다.
1. 방언이 아닌 침례가 그리스도인의 기준이다.
2. 방언은 귀신들림에 의한 것이 아니다.
3. 고린도전서 12장부터 14장의 논쟁적 성격을 인식해야만 하며, 바울이 방언을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4. 바울은 방언을 사적 은사로서 높게 평가했지만, 다른 은사들보다 낮게 분류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공동체에 그렇게 많이 기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5. 바울은 방언을 부정적인 뜻으로 유치한 것으로 보지 않고, 다만 긍정적인 뜻으로 어린아이 같은 것으로 본다.
6. 바울은 구체적인 나타남들 없이 성령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예수의 영과 구별되는 삼위일체의 셋째 위격으로서 성령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을 더하고 싶다.
7. 그렇지만, 로마서 12장에서 방언에 대한 언급의 부재는 중요한다. 바울의 권위는 방언을 기독교적 삶의 필수적인 요소로 보는 것을 위해 요구될 수 없지만, 그는 성령의 한 나타남을 소멸시키기 원하지 않았다(살전 5:19-22 참조).
그 조사의 결과는 방언의 문제는 복잡하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 같다. 그러나 최근의 주석 대부분은, 그 은사를 소유하거나 증언해 온 사람들의 현대적 경험에 의해 안내를 받으며, 인간적 수단에 의해 배운 적이 없는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언어들의 비무아지경적 발화라는 해석을 지지할 것이다. 우리의 다음 고려대상은 이 은사의 (1) 개인을 위한 그리고 (2) 공동체를 위한 유용성이 될 것이다.
개인과의 관련성
“방언”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새 창조”로서 그 은사의 오순절과 관계성을 고려해야만 한다. 인간 창조에 대한 어떤 전통들에 대한 탐구는 어떤 강조가 말하는 존재로서 인간에 놓여 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예를 들면, 이것은 탈굼들에서 발견된다. 옹켈로스 탈굼은 다음과 같이 읽는다. “그리고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땅의 흙으로부터 아담을 창조하셔서, 그의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으며, 그리고 생기는 아담 안에서 분별의 영이 되었다 . . .” 팔레스타인 탈굼은 다음과 같이 읽는다. “그리고 아담의 몸 안에 눈의 계몽과 귀의 청취까지 말하는 영의 감화가 있었다 . . .”(예루살렘 탈굼은 덧붙여 말한다. “그리고 아담은 산영이 되었다.”).
말하기(speech) 또는 언어(language)는 고대인들에게는 신비학이었다. “하나님은 사람이 말하기 이전에도 말들을 아셨고 그것들의 의미를 정하셨다.” 그러므로, 말하기는 야훼의 영의 직접적인 감동의 결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사실 “계시” 또는 “신적 감동”은 때때로 “말하기”(speech)로 간주된다. 그래서 그를 동물들로부터 구별하고 부분적으로 지적인 영들이나 천사들에 속하는 존재로 분류하는 것은 사람의 말하기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어떤 지혜를 말하고 그분에 대한 찬양을 언명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위에서 인용된 팔레스타인 본문은 신적 감동이 말하기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고, 또한 “눈의 빛과 귀의 듣기”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포함하는 것 같다. 이것은 그저 육체적 감각 기관들만 언급하지 않고, 영적 감각의 사용도 언급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동물들도 또한 눈과 귀를 가지고 있고, 게다가 혀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적 감각들에 관해 더 알고 싶다면, 인간의 창조에 관한 시락서 17장과 비교할 수 있다. 관련 구절은 다음과 같다.
그(하나님)분이 그들에게 자신의 것과 같은 능력을 부여하시고, 그들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다(3). 그분은 그들을 위해 [Syr., GK.: 성향과] 혀와 눈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에게 귀와 생각을 위한 마음을 주셨다. 그는 그들을 지식과 이해로 채우시고, 그들에게 선과 악을 보이셨다(6-7). 그들의 눈은 그분의 영광스러운 위엄을 보았고, 그리고 그들의 귀는 그분의 음성의 영광을 들었다.
이 본문은 시내산 위의 신현을 언급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창조기사의 문맥에서, 인간이 그의 영적 감각들을 온전히 향유 했다고 믿어졌을 때, 이것은 타락이전 인간의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언급하는 것이라는 것이 보다 그럴 듯하다. 반항과 죄로 인한 영적 눈 멈과 귀 멈의 개념은 구약과 랍비문헌들에서 아주 변치 않는 주제이고, 쿰란문헌에서 다시 등장한다. 가장 주목할 만한 구약 본문은 이사야서 6장 9절부터 10절까지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 본문에 대한 탈굼은 이 두 절에 보다 더 빛을 밝혀주지 않지만, 보다 더 주목할 만한 교체는 6절부터 8절까지에서 행해진다.
그리고 거기서 섬기는 천사들 중의 하나가 내게로 날아왔는데, 그의 입은 그분 앞에서 받았던 말하기였다. 그분의 임재는 제단 위 가장 높은 하늘에서 영광의 보좌 위에 있고, 그는 말하기를 내 입에 놓고, 말했다. 보라, 나는 너의 입에 나의 예언의 말을 놓았으니, 너의 범죄들은 사라질 것이고, 너의 죄들은 속죄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주님의 멤라의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에게 예언을 보내며, 누가 가르치러 갈꼬? 그래서 내가 말했다. 제가 여기 있사오니, 저를 보내십시오.
예언에 대한 신적 감동은 여기서 말하기로 묘사되지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예언 말하기는 죄 된 인간의 “눈의 빛과 귀의 듣기”를 위한 것이 아닐 것이다.
동일한 이사야 주제가 쿰란에서도 등장한다. 예를 들면,『공동체규약서』(the Community Rule)에서, 두 영 교리에 관한 부분에서, 사악한 영 또는 도착의 영(spirit of perversity)은 그 옷자락에 수많은 악덕들을 가지고 다니는데, 그런데 그것들 중에 “모독하는 혀, 눈 멈, 귀 멈, 목 곧음, 마음 아둔함이 있으며, 그것들은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어둡고 해롭고 교활한 길들을 걷게 한다”(Rule 4, 11). 또한 “게다가, 그들[벨리알, 즉 사탄을 추중하는 자들]은 그들의 성령을 모독해 왔고, 모독하는 혀로 그들의 입을 열어 하나님의 언약의 교훈들이 진정한 것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그 교훈들을 대적했다”는 것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CD 5, 11-12).
그러므로, 항거는 “신성모독적 말하기”를 유발시켰지만, 그 언약을 신실하게 고수하는 자들은 [지적인 이해 . . .로] “그 교훈에서 배우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공경 받는 (존재) [하나님이나 의의 교사]의 음성을 들으며, 거룩한 천사들을 본다. . . . 그 귀는 열려있어 심오한 것들을 듣는다”(M 10, 10-11; cf. Sir 17).
또한, 신실한 자들은 말하기와 음악의 신적 기원을 인정한다.
혀에 활기를 불어넣어 오시고, 혀의 말들을 아시고, 그것들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입술의 열매를 맺게 하신 분은 바로 당신이십니다. 또한 당신께서는 그들의 신비한 (법들)에 따라 소리들을 보내 오셨고, 그 조화에 따라 숨을 불어 넣으시어, 당신의 영광이 알려지게 하십니다(Hymns Scroll 1, 28-30).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그 의의 교사에게 “모든 이해하는 자들에게 지식의 샘”을 여는 특별한 직무를 부여하셨다(Hymns 2, 18). 그러나 무가치한 자들에게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입술을 위해 그리고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의 외국어 방언을 위해 팔아버리게 해서, 그들이 그들의 탈선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게 하셨으며”(Hymns 2, 18-19), 거짓 선지자들은 “미개한 입술과 생소한 혀로(외국 방언으로)” 그 백성에게 말함으로써 그들을 속이게 하셨다(Hymns 4, 16). 한편, 그 방언에 대한 현명한 반응은 성령이나 선한 영들에 관련된다. 예를 들면,『감사찬양서』17장 17절, “저에게 넣어 주신 영들 때문에, [오 주님,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그 방언(the tongue)에 화답하여 말하겠습니다 . . .” 『감사찬양서』18장 10절 이하에서 유사한 생각이 발견된다. “[왜냐하면] 당신께서 [당신의 종의 입 안과 혀 위에 샘]을 여셨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다림줄에 [당신의 교훈]을 주셨고, [그래서 그]는 그의 이해 때문에 그것들을 피조물들에게 선포할 수 있으며, 저 자신과 같은 먼지에게 이것들의 해석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흥미로운 언급들 중에 하나는 CD 14, 10에서 발견된다. 그곳에서 캠프 전체를 관장하는 감독은 모든 “사람들의 비밀들과 그들의 다양한 족속들이 말하는 모든 방언들”을 통달해야만 한다는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듀퐁-조머(Dupont-Sommer)는 이것은 “사람의 마음 통찰과 ‘방언으로 말하기’의 은사”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15절에 관해 언급한다. 나는 이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이것은 고려할 가치가 있다. 아마도 이 기술을 언어들의 통역이나 천부적(즉, 배운) 언어지식의 은사로서 보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렇지만, 후기 미드라쉬 모음(Agadat Bereshit 14)은 이사야를 가장 위대한 예언자로, 말해지고 있는 모든 언어들을 알고 있는 오바댜를 가장 시시한 예언자로 생각한다. 더욱이 요셉이나 모르두개와 같은 유명한 인물들은 칠십 개의 말이나 세상의 모든 말들을 안다고 한다. 이것은 분명 심한 과장이다. 그렇지만, 쿰란의 그 교사의 직무와 유사함이 있는지 물을 수는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 감독이 예언자나 위에서 언급된 인물들과 같은 부류로 분류되는 것을, 그리고 그가 그 공동체에서 말해지는 언어들에 대해 완벽하게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요약하면, 쿰란 구성원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기 위해 자신을 정화하려고 노력했으며, 성령에 의해 영적 시력, 청력, 이해력을 촉진시키려 했다. 그러면 그들의 혀는 하나님의 지혜와 율법을 말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그러나 악한 자들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영적으로 눈이 멀고 귀가 멀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말하기, 예언, 율법 해석이 “신적 감동”에 돌려질 지라도, 방언 은사를 위한 준비를 볼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은사의 실제 소유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1세기의 쿰란이나 에세네파 그리고 바리새파 가운데서 비전적이나 신비적인 전통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나는 이것을 요한 계시록에 대한 앵커 바이블 주석에서 보다 상세하게 논의할 것이다).
영적 눈 멈과 귀 멈의 주제는 사복음서에 걸쳐 등장하며, 또한 사도행전에도 등장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사도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의 눈이 열려졌으며, 그래서 그들은 성경과 구원사를 이해하게 되었다(눅 24:31 참조). 성령 강림 후 그들은 재창조되었고 다른 영적 차원으로 들어갔으며, 그 결과 그들은 의의 교사와 유사한 역할을 받아서 사람들을 기독교 공동체 안으로 이끄시는 성령을 통해 담대한 가르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선포했다. 방언 은사를 이 배경에 놓을 수 있을 것이다. 방언 은사는 하나 더 회복된 영적 “감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방언 은사는 하나님께 올리는 음성적 찬양과 신적 감동을 타인들에게 소통하기 위해 필요한 기관의 회복 또는 재창조일 것이다(고전 12:8의 지혜의 말과 지식의 말을 참조하라). 새 언어는 하나님의 개입의 증거로서 주어진다. 오순절은 창세기와 시락서 17장을 재현한다. 참으로, 요한적 오순절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실 때, 저자는 칠십인역 창세기 2장 7절과 동일한 단어(emphysan)을 사용한다. 요한복음 3장 1절부터 15절은 고려중인 동일한 창조기사를 갖고 있을 것이다. 방언 은사는 구체적 표징(a concrete sign)일 것이다. 배우지 않은 말이 주어짐으로써 말하기의 기능이 재창조되고, 다시 사람에게 주어진 신적 감동의 상징이 된다. 신지(F. C. Synge)는 누가의 말하기에 대한 관심에 대해, 그리고 “그가 사도행전에서 가장 빈번하게 기록하고 있는 그 성령의 표징이 어떤 방식으로 말하기와 관련 된다”는 사실에 대해 말한다. “사도행전에서 스물세 번 그리고 복음서에서 다섯 번 [원문 그대로] 그는 pneuma hagion을 말하기와 관련하여 사용한다.” 그렇다면, 새 말하기 은사는 기본적인 카리스마적 은사들 중에 하나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방언”(tongues)은 가장 작은 은사이지만, 시나 음악이나 예언과 같은 다른 것들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두루마리들에 더하여, 다른 성경외 전통들은 말하기뿐만 아니라, 시와 음악을 성령의 감동으로 돌린다. 성령(Ruah Hakodesh)은 “하나님의 대리자,” “헬라 로고스”였다. 그리고 Ruah Hakodesh에 사로잡힘의 결과는 어떤 받은 자들은 “예언자가 되고, 다른 자들은 현인이 되고, 다른 자들은 시인과 음악가들이 . . .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Sukk 5, 4에서 장막절의 헌수(water libation)는 경건한 사람들에게 기쁨을 가져다주었고, 노래, 춤, 그리고 다른 기쁨의 표현들의 쏟아 부음의 기회였다(누가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입에 놓는 노래들과 기쁨이 성령과 관련되는 횟수를, 예를 들면 마 11:15-30, 참조하라).
그렇지만, 성령의 가장 큰 은사는 예언이었다(고전 14:1을 참조하라). 예언은 반드시 예보는 아니고, 그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말씀이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다. 파르젠(Parzen)은 “Ruah Hakodesh가 예언으로 한정되는 본문들에 대한 고찰은, 우리가 믿기에, 사건들을 예고하는 능력, 사건들을 예견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을 아는 능력이 예언에 의해 이해된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유대교 전통들에 의하면, 모든 선하고 현명한 사람은 예언 은사를 소유한다. 그러나 탈무드에 의하면, 오직 육체적으로 강하고, 정신적으로 현명하며, 부유한 자가 그 은사를 소유한다(Shab 92a, Ned 38a). 그런데 그것은 또한 그 세대의 유덕함에 의해서도 좌우된다. 그 세대가 덕스럽지 못하다면, 성령은 오실 수 없으실 것이다. 그렇지만, 미래에 모든 남자들과 여자들이 신적 감동아래 놓일 것이다(욜 2:28; 3:1 이하; 사 44:3; 59:19-21 참조).
그래서 하나님에 의해 감동된 말하기 은사는 “영적이고 배양하는 활동”의 기관이다. 이것은 영적인 사람을, 어떤 의미로, “다재다능한” 사람으로 만드는 어떤 것이다. 방언 은사의 사용은 이 활동들 중 많은 것들을 실현시키지만, 우리가 아래에서 살펴볼 것처럼, 종종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기 위해 사용되었을 때, 그리고 이따금씩 다른 영적 감각들의 사용을 경험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때 그렇게 한다. 왜 이것은 이런 종류의 일들에 쓸모 있는가?
방언 은사는 본질적으로 기도, 특히 찬양 그리고 사랑의 은사다. 보통 마음은 능동적이지 않지만, 그 기도는 종종 하나님의 임재의 경험이 동반되는 단순하고, 사랑스러운 관심이다. 방언 은사가 “주입된 응시의 접촉”을 일으킬 수 있는, 영적 특성들의 세움에 공헌할 수 있는 이유를 알기 위해 방언의 파괴적이고 폭파시켜버리는 힘에 반대하여 방언 은사 안에서 건설적인 사랑의 힘을 측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할례 받지 못한” 방언 또는 잘못된 방언은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또한 공동체에도 매우 큰 위험의 근원이다. 이것은 야고보서 3장 1절부터 12절에서 잘 설명된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이 사실은 또한 복음서에서도 언급된다. 그곳에서 예수께서는 “더러움”의 근원으로서 마음을 말씀하신다(막 7:21). 만약 이것을 숙고한다면, 방언은 거짓말, 비방, 무자비, 분노, 아첨, 교만, 다툼, 부정, 신성모독 등등 많은 죄들을 실현하는 방편인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개인과 공동체에 파괴적인 영향력을 끼친다. 잠언 18장 21절이 말하는 것처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다.” 그러나 반대로 잠언 15장 4절은 “온전한 혀는 생명나무다” 그리고 잠언 12장 18절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다”고 말한다. 잠언 10장 20절은 더 나아가 의인의 혀는 순은과 같다는 것을 밝힌다. 이것들은 단순히 비유적 진술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방언은 의의 도구이며(시 35:28), 지혜를 가르치기 위한 수단이며(시 37:30), 친절을 표현하는 방편이며(잠 31:26), 정의를 선포하는 매개이며, 화평과 용서를 확증하는 방편이며, 요컨대, 공동체를 세우고 간접적으로 개인을 세우기 위한 수단이다. 왜냐하면 방언에 의해 표현된 선함은 인격 전체를 나타내는 선함이기 때문이다. 방언의 잘못된 사용의 비윤리적 결과를 알고 있지만, 이와 반대로 그것의 올바른 사용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힘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의해 고무 된 사용은 얼마다 더 선한 결과를 낳겠는가?
이런 유형의 생각은 바울이 “방언”은 개인을 유익하게하거나 세운다고 말했을 때 그의 마음에 품은 것이었을 것이다(고전 14:4). 참으로, “방언”은 매우 유용한 은사다. 방언은 자신의 언어로 하나님을 적절하게 찬양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사용될 수 있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려는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 영혼의 기쁨, 평화, 그리고 사랑을 회복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방언은 또한 분노와 같은 죄에 대항하기 위한, 그리고 “악령들”의 영향력에 대항하기 위한, 심지어 말하는 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불화하게 하는 영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유익한 무기다. “방언”은 종종, 특히 기도하는 자가 기도 사이에 침묵이 개입하도록 허락한다면, 어떤 영적 진리의 갑작스런 깨달음을 동반한다. 때때로 이런 생각들은 “통역”이다. 더욱이, 방언은 중보기도(intercessory prayer)에서 특별히 효험이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영적 방언은 “세운다.” 그렇지만, 그 은사를 받은 자는 이런 방식으로 이 은사를 사용할 책임을 갖는다. “방언”을 처음 사용할 때는 심적 고양이 경험된다. 그러나 이후에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믿음을 유지하면, 선한 결과를 얻을 것이며, 이것은 기도에서 무미건조함에 큰 도움이 된다.
더 나아가, 방언으로 말하다가 시와 음악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방언 찬양, 특히 방언 합창은 매우 아름답고 평안을 준다. 심지어 선천적으로 가락에 맞춰 노래하지 못하거나 시나 음악을 작시, 작곡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그 은사로 그렇게 할 수 있다. 통역은 때때로 시로 주어진다. 상당한 성령으로 감동된 노래가 작곡되어 왔고, 출판되어 왔다.
사도 바울은 통역하기 위해 기도해야한다고 분명하게 말한다(고전 14:13-19). 이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해 없이 계속 말하는 것은 영적으로 미성숙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방언에 대한 첫 충일함이 사그라져 통역을 위한 갈망을 품게 되는 것은 좋은 일일 것이다. 사적 방언의 통역은 예를 들면 고난을 받아들이거나 관용을 이루도록 격려하는데 유익할 수 있다. 사적으로 통역을 받는 것은 권고의 예언을 받는 것과 같다.
따라서 우리는 개인에게 방언 은사는 다른 영적 차원으로 들어가는 통로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와의 관련성
방언 은사의 공동체적 국면은 사도행전 1장과 고린도전서에서 발견된다.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첫 기독교 오순절 기사를 바벨탑(창 11)의 반전으로 보이기를 의도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언어들의 다양성을 창조하셔서(탈굼에 의하면, 칠십 개) 인류를 나누심으로써 세상이 하나님이 만드신 것으로부터 사람이 만든 것이 되는 것을 막으셨다는 것과 관련된다. 오순절에 방언 은사는 국제적 일치를 회복시키기 위해 주어진다. 데이비스(Davies)는 창세기의 칠십인역 기사와 오순절 기사 사이에 축어적인 유사성이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자, 내려가서 그들의 말(glw'ssan)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자(sugcevwmen), 그래서 그들이 다른 사람의 말(fwnhVn)을 이해할 수 없게 하자.” 사도행전 기사에 의하면, 그 제자들이 “성령께서 말하라고 주시는 것을 말하기 시작했을 때” 하늘 아래 만국의 대표자들이 예루살렘에 있었다. 그래서 “이 소리(fwnh'")가 들렸을 때, 그 군중은 모여들었고, 당황했다(sunecuvqh).”
그 두 어구들에서 단어들의 병행적 사용은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 둘 사이에는 대조가 존재한다. . . 이것은 성령의 역사다. 그분은 “나라들을 산산이 흩어버리셨던(diemerizen)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이 ‘산산이 가르는’(diamerizomenai) 불의 혀의 모양으로 그분의 오심을 교회에 나타내심으로써 이전의 창조의 일치의 분열을 뒤집으신다.” 사람들은 바벨에서 흩어졌었으나(diespeiren),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에서 흩어졌다(diesparëan). 더 나아가, 굴더(M. D. Goulder)는 창세기 10장의 종족들은 사도행전 2장 8절부터 11절의 사람들의 목록과 병행을 이룬다고 논증해왔다. 다른 논문들뿐만 아니라 이 두 논문은 “방언”은 국제적 일치(international unity)를 상징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렇지만, “방언”은 또한 “국제적 계시”(international revelation)를 보인다. 이것은 누가적 오순절과 시내산에서 율법수여에 대한 전통들 사이의 일치에 의해 제안된다. 율법이 선포되는 동안 모든 자연이 숨을 죽이고 멈춰있었고, 하나님의 음성이 세상의 칠십 언어들로 나누어져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셨다는 통속적 전통이 존재했다. 적절한 언급들이 긴즈베르크(Ginzberg)에서 발견된다. 그는 이 모든 자료들에서 “시내산에서 들려진 ‘일곱 음성들’(즉, 소리들 또는 음조들)은 언급된다. 반면에 Berakot 6b와 BHN v. 33에서는 언급은 오직 다섯 음성들로 구성되며, BHM vi. 41에서는 그 수가 네 개로 줄어든다. 부활에서 나팔의 일곱 소리들은 세상의 모든 언어들을 상징한다 . . .”고 말한다.
필로는 율법은 불꽃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사람의 음성이 그런 것처럼 거리 때문에 별로 명확해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새로운 불가사의한 음성은 움직이도록 조정되어 그 위에 불어넣어진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계속 불꽃에 쌓여 그것을 사방에 퍼뜨려, 그것을 각 사람의 영혼 속에 일으킴으로써 그리고 귀가 듣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모든 다른 종류의 듣기를 일으킴으로써 그 처음보다 그 끝이 더욱 분명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굼뜬 감각은 공기의 영향력으로 깨어날 때까지는 비활동적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 사로잡힌 마음의 듣기는 최초의 전진을 일으키고 발해진 말씀과 합류하기 위해 날카롭고 민첩하게 밖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Spec. leg. 2, 189에서 그는 또 다시 그 음성은 땅 끝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한 통역자를 통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일반적인 법들, “특별한 법과 같지 않은 법들에 대해 말한다. 특별한 법은 그 나라에게 특별히 중요하다. 뒤따르는 것은 모든 인류에게 일반적인 것이다.”
무엇이 정확한 전통이든지, 그 상징은 명확하다. 그 유대 교사들이 전달하고자 했던 요점은 시내산에서 내려진 율법 또는 계시는 보편적이었지만, 그러나 오직 이스라엘만 그것을 받아들였고, 다른 나라들은 그것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또한 확실한 역사적인 또는 선과 같은 연속성이 있다. 왜냐하면 모든 예언자와 여예언자 또는 현명한 남자 또는 여자는 그들의 권위를 시내산에서 끌어낸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 . .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 예언자들은 그들이 다음 세대들에게 예언해야만 했던 그 메시지를 시내산에서 받았다 . . . 모든 예언자들이 그들의 예언을 시내산에서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세대에서 일어난 모든 현인들도 그의 [지혜를] 시내산에서 받았다 . . .(Exodus Rabbah 28, 6; 욜 2:28-29과 행 2:16-21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시내산과 오순절 둘 다에서 제안되는 것은 거의 국제적 일치를 예언하거나 산출해내는 예언적 oth(toa 역동적 상징)로서 의사소통의 극복이 아니다. 말하기가 이해되지 않을 때, 거기에는 불일치가 있고, 말하기가 이해되었을 때, 소통과 행동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 후에 하나의 토라가 일치의 핵심이 될 수 있었으며, 또는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선포와 침례가 일치의 기초가 되었다(갈 3:23-29).
더욱이, 우리는 “방언”이 설교를 위해 사용되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그보다, 우리는 사도들에 의해 말해진 “방언”을 찬양으로 제한하고, 소통의 매개라기보다 “불신자들”에게 한 “표징”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기운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행전적 “방언”이 고린도전서적 방언과 다른 차원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결부되는 개념은 apistos이다. 스위트에게는 실례지만, 나는 다른 곳에서 apistos는 반드시 “불신자”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해왔다. 이것은 믿음에 약한 자나 순수하지 못한 자를 가리킨다. 동일한 의미가 고린도전서 14장 22절에도 적절할 것이다. 예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아마도 유대인들이나 개종자들에게는 사도행전이나 이사야 28장 11절부터 12절에서처럼 한 표징이다. 이것은 유대-기독교 신앙이 그들(유대인들이나 이전에 비율법적인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표징이다. 이것은 고넬료의 오순절(행 10)이나 사마리아 오순절(행 8)에서도 다르지 않다. 그곳에서도 역시 방언은 성령께서 유대인, 혼혈 유대인, 또는 이방인 사이에서 그 어떤 구별도 보지 않으신다는 예언적 표징이다. 그렇지만, 이 경우들에서, 그 표징은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뿐만 아니라 그 은사를 받는 자들에게도 효험이 있다.
나는 “예언적 표징”(prophetic sign)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왔다. 왜냐하면 나는 방언과 예언 사이에 그 어떤 명확한 구분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경적 정보와 실존적 경험은 예언이 종종 방언으로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방언-예언”(tongue-prophecy)의 가치나 교훈은 말하는 자나 이차 부류(하나나 그 이상의 사람들)에 의해 주어지는 통역에 놓여 있거나 또는 듣는 자가 인간적 방법으로 그 언어를 알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 놓여있다.
그렇지만, 예언적 표징에는 다른 국면이 있다. 두 사람이나 그 이상이, 즉, 예언자와 통역자가 표징에 포함될 때,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다른 지체들 사이의 내적관계(interrelationship)를 보여주는 것 같다. 기도 모임이나 예전에는 “공동체 응시”(community contemplation)라는 행동이 존재한다. 회중은 메시지 듣기를 위해 이중 행위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이외에 자신에게 충분한 분이 없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즉흥적인 기도로, 다른 사람은 성경 읽기, 방언, 예언, 영상, 간증으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역할을 감당할 때, 성령께서는 전체 그림이나 주제가 공동체 전체의 교화와 격려를 위해 세워질 때까지 모자이크나 타페스트리와 같은 일을 하시는 것 같다. 이 상호 의존은 말씀의 가장 깊은 의미에서 하나의 진정한 공동체를 형성시킨다. 그런데 이것이 또한 일종의 안전장치이다. 그 공동체는 사랑을 유지하고 지나침이 없는지 살피기 위해 구성원들에 의해 수행되는 부분들의 진정성을 판단할 의무를 갖는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이 고린도전서의 이 부분에서 눈에 띄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방언”은 실존적 차원에서 그 예언적 상징성을 존속시킨다.
그러므로 나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은 신앙을 재창조해내는 역동성을 갖는 예언적 표징이라고 말함으로써 이 부분을 요약할 것이다. (1) 유대인들을 시내산의 성취의 실현에로 이끄는 것이다. (2) apistos가 유대-기독교의 충실함을 위해 붙여진다. (3) 사도의 표처럼 apistos가 교회의 온전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다는 표이다. (4) 개인이나 공동체의 믿음을 세우는 것을 위한 보편적이고 역동적인 표징이다. (5) 국제적 일치의 표징, 하나님에 의해 일어난 바벨이 하나님에 의해 반전되었다는 표징이다.
우리는 내가 둘 째 논문에서 확장시킬 한 가지 점을 더 말해야겠다. 성경시대에 “방언”은 국제적 일치의 표징이었고, 모든 사람들에게로 기독교적 메시지의 확장의 표징이었다. 오늘날에도 방언은 동일한 심오하고 역동적인 예언적 상징 - 국제적 일치의 예언적 oth일 수 있다. 이것은 기독교 교파들에게 그들이 서로 주고받을 것이, 또한 공유할 것이 많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다. 은사적 갱신이 일치를 위한 비 - 로마 가톨릭 기도인 교황 레오 13세의 성령에 관한 회칙, 그리고 새 오순절을 위한 교회의 진지한 기도와 함께 열렸던 제2회 바티칸 공회 직후에 시작되었다는 것은 의의가 없는 것이 아니다.
'방언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인적 제의로서 방언 (0) | 2023.01.28 |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탄식: 방언 신학을 향해 (1) | 2023.01.28 |
새 하늘? 새 땅?: 오순절주의와의 대면 (가톨릭적 방언신학) (5) | 2023.01.24 |
표징으로서 방언: 오순절적 경험에 대한 예전적 이해 (1) | 2023.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