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Heaven? New Earth?: An Encounter with Pentecostalism.
Simon Tugwell OP,
Springfield, Missouri: Templegate Publishers, 1976 : 121-159.
이창승 역
서언: 유익한 대화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사 28:16)
아리스토텔레스는 첫 눈에 사랑에 빠질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가 가장 인정한 것은 어떤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즉각적인 욕구를 품을 수는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 사람의 친구가 되는 것은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그들을 알게 되는 것, 진정으로 알게 되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그것은 첫 인상을 통해, 외모를 통해, 심지어 진정한 통찰들을 통해 간파된다. 왜냐하면 디킨슨(Emily Dickinson)이 자연과 그녀의 시누이에 대해 썼던 것처럼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그녀를 잘 모르지만,
그녀에게 가까이 갈수록 그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오직 그렇게 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사람을 만나고, 타인의 신비를 각각 접촉하는 신비, 오직 그렇게 하는 진정한 사랑만이 순전한 상호 이익과 이용을 대체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이 교회 일치적 대화와 반드시 관계된다.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일치라는 과제를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만든다고 자주 비난받는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이 최선을 다해 시도하고 있는 것은 그 대화가 진정한 것이기를, 피상적이고 편파적인 일치를 극복하는 것이기를, 그래서 교회들과 신앙고백들이 서로 전체로서, 진정한 모습으로 만나기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만약 교회 일치가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의 사랑 안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저 상대방 교회를 유람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닮은 점들이나 진기한 점들을 수집하면서 돌아가며 다른 교회들을 방문만 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각 요소가 수행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 요소가 다른 사람의 소신이나 실천의 전체 체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질문해야만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만남은 참되고 정중한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교회 일치적인 특별한 회합에는, 더 헤아릴 수 없이 중요한 요인이 존재한다. 그것은 어떤 교회의 진리는 그 교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이다. 어떤 교회도 그 어떤 진리도 갖지 못하며, 오직 그분만이 갖고 계신다. 그렇지만 단지 우리의 모든 다양한 교파들로부터 도막들과 조각들을 취하여 우리 자신이 고안한 한 교회만을 조립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편할 것이다. 그분의 교회를 한정하고 식별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만약 우리의 대화가 진정으로 기독교적이려면, 우리 자신의 것에 대한 존중과 상호간의 보전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경청과 충실함도 포함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저 듣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넉넉하고 철저하게 귀담아 들어야만 한다. 이것은 제2차 바티칸 공회가 대화 없이는 그 어떤 진정한 교회 일치도 있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주장하는 이유다. 이것이 무엇일 수 있든, 교회 일치 운동은 돌아가자는, 그리스도, 우리 모두의 주님께로 돌아가자는 부름이다.
만약 교회 일치라는 도전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시는 방법들 중에 하나라면, 그렇다면 경청은 교회 일치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바티칸 공회는 이것을 정확하게 말한다.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에서, 내쫓기 남용과 상호간의 비난 대신, 우리는 이제 서로로부터 듣기를 준비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의 갈라진 형제들 가운데서 성령의 은혜에 의해 획득된 것은 그 무엇이든 우리의 건설에 공헌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으로 기독교적인 것은 어떤 것이든 참된 신앙의 보물에 결코 적대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진정으로 기독교적인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를 더욱 온전하게 실현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 간의 분열 때문에, 교회가 스스로 모든 면에서 실제 삶에서 자신의 보편성의 충실함을 나타나내는 것이 더욱 힘들다.
그렇다면 우리는 경청해야 한다. 성령께서 다른 교파들의 그리스도인 가운데서 행하시고 계시는 것 안에서 우리 자신의 함양을 위해 무엇을 가지고 계시는지 경청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함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우리를 더욱 엄밀하게 보편주의자들(catholics)로서 보다 낳게, 보다 어울리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다른 교회들 안에 있는 선한 것은 무엇이든 이미 우리의 것, 비록 우리가 간과해왔을 수도 있는 또는 심지어 없애 버리려 했을 수도 있는 우리의 보편주의의 부분으로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외부에서 우리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또한 언제나 우리 자신의 유산 안에서 보편적인 것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발견될 것이다. 이것은 왜 서로 다른 종교로부터 도막들과 조각들을 그저 모으는 것보다, 그것들을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의 관련 속에서 발견하는 것, 그것들이 우리 자신의 신앙에서 기인하는 것을 보는 것, 성질이 다른 몸체들로가 아닌 새롭게 발견된 한 근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은혜의 경로로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이유다. 주님께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약속하셨던 것은(요 7:28) 우리 자신 안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이것이 언제나 그분의 진정한 일하심의 특징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교파들로부터 배우는 것을 언제나 가톨릭으로서 우리 자신의 신앙의 정황 안에 놓는 것을 필요로 한다. 또한 그것이 어떻게 다른 교회들의 전체 신앙 안에 맞추어지는지 보려는 시도를 결코 중단하지 말자. 바티칸 공회는 다른 기독교 단체들이 더 이상 단지 가톨릭의 파편들의 우발적 수집들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 단체들은 틀림없이 구조로서, 체계로서 구원을 위해 실제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인정된다. 우리 자신의 살아있는 전체의 국면들을 재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성령에 의해 도전 받을 살아있는 전체로서 다른 교회들을 만나는데 있다.
이것을 우리의 오순절주의와의 대화와의 관계 안에서 기억해 내는 것은 아마도 특별히 중요하기도 하고 특히 어렵기도 한 것일 것이다. 깜짝 놀랄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떤 국면들은, 적어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매우 매력 있고 흥미롭기는 해도, 그곳에서 그 전체는 매우 파악하기 어렵고 생소하다. 하나나 두 조각을 주워들고는, 그것들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주 면밀히 고찰함 없이, 가능한 한 빨리 달아나 버리는 일종의 ‘깨뜨리고 붙잡는’ 교회 일치의 유혹이 강하다. 나는 그들이 지금 ‘은사주의 운동’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는 것과 관련하여 교회들 안에서 매우 애처롭게 발생해온 문제들 중 어떤 것들이 부분적으로, 그 문제가 이미 해결된 것 같이 꾸밈으로써(‘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다’), 또는 그것 전체를 배척함으로써 그 교회 일치적 차원을 이렇게 지나치게 성급하게 포기[혹은 묵살]한 탓이라는 것을 감지한다. 이것은 내가 최근에 칠십에서 팔십 마일 떨어진 가톨릭 오순절 집단에 얼마간의 관심을 표명하는 한 부인을 만났는데, 내가 그녀에게 그녀의 집 바로 옆에 있는 엘림 오순절 교회를 말하자 그녀가 ‘오, 그들은 진정한 오순절주의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그런 파당들(sects)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부분적으로 아주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깨뜨리고 붙잡는 교회 일치에 내포된 그 무례함을 제쳐두고, 이것은 또한 고향에 전리품으로 수송된 조각들로 이해하는 심각하게 외부자극이 거의 없는 이해에서 비롯된다. 오순절주의는 이해심이 없는 증인들 가운데서 전 세계적인 그리고 아주 정당하지 못한 심령현상과의 혼동이라는 몰이해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심지어 그 친구들조차도 때때로 성급하게 결론짓는 경향이 있다. 세계 오순절주의에 대한 권위자로 알려진 홀렌베거 교수가 지적했던 것처럼, 그와 동일한 종교적 행위가 다른 상황들에서 매우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저 이제 가톨릭주의자들이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그들이 반드시 오순절주의자들과 동일한 것을 행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얼마나 쉽게, 우리의 오순절주의자들과의 만남에서, 우리는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은사들과 은사적 갱신이라고 가정하는지 모른다. 얼마나 쉽게, 그리고 얼마나 공정하지 못하게 그러는가! 유명한 오순절 목사 조지 캔티(George Canty)는 “우리는 성령에 의해 배우지 않은 언어들로 말하는 것 이외에 많은 것들에 관심을 갖는다. 우리는 그저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썼다. 그렇지만 “방언”이라는 사실은 기독교 신조의 모든 부분에 중요하다. 오순절은 “은사적 갱신”(charismatic renewal) 그 이상이다(‘오순절’은, 오순절주의적 어법에서, 종종 첫 성령강림절이라는 역사적 사건보다는 오순절주의의 경험을 지칭한다). “방언은 오직 오순절주의의 방아쇠일 뿐이다. 만약 진리가 하나의 전체라면, 오순절적 진리는 우리가 진리를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방언은 기독교적 신앙 전체를 위한 일치의 새로운 가닥들을 제공할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방언(tongues)을 단순히 은사적 구조의 중추로만 취급한다면, 우리는 성령께서 오순절주의와의 만남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잃고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오순절주의자들에게 방언(glossolalia)은 은사들의 중추는 아니지만, 기독교 교리 전체 안으로 들어가는 한 길이기 때문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이 방언을 그렇게 아주 중요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은 그들이 방언 그 자체를 독특하게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 아니고, 방언이 기독교 진리 전체를 드러내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오순절주의와의 만남으로부터, 우리가 자신으로 하여금 분명 획득할 가치가 있는 한 접촉점인 방언을 말하기를 시작하게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양쪽 다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발견해야만 하는 것은 우리가 기독교 통합, 기독교 진리의 완전과 응집력이라는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 나는 가톨릭적 입장에서 방언을 본질적으로 한 현상으로가 아닌, 기독교 실천과 신앙의 체계 전체의 부분으로 탐구하기를 꾀한다. 이 탐구가 우리로 하여금 방언 말하기라는 논제에 의해 보통 일으켜지는 최초의 황홀감 혹은 혐오감을 넘어서게 할 수 있기를, 우리가 성령께서 이 시대에 교회들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의 부분을 분별할 수 있는 길을 밝히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먼저, 나로 신중하게 선정한 이야기를 통해, 고대로부터의 한 사례를 통해 방법에 대한 나의 소견을 설명할 수 있게 하라. 이것은 우리가 너무 급히 결론으로 비약하는 것이 얼마나 쉽게 그르칠 수 있는 것인지 확실하게 나타낼 것이다.
한 4 세기 시리아 저자, 아파라핫(Apharahat)은 그의 논증에서 어떤 지역 침례 의식으로부터, 또는 적어도 전통적인 침례 설교 자료의 어떤 영향으로부터 온 한 예전적 단편으로 지금 보통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을 우리를 위해 보전한다. 그 단편은 한 동안 적어도 페르시아의 어떤 교회에서, 오직 독신자들에게만 침례 받는 것이 허락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물론 그것은 이미 안전하게 사문화 되었지만, 그러나 우리가 그런 교회와 교회 일치적 대화를 해야 한다고 가정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착수할 수 있겠는가?
첫 번째 그리고 가장 쉬운 맹목적인 길은 그 격리된 현상 자체를 단순히 취하는 것, 그리고 아마도 그것에 대해 아주 흥미를 갖는 것일 것이다. 물론 우리는 너무 쉽사리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그리고 오직 세례 주는 것이 아주 좋은 생각일 것이다. 엄밀히 독신자들이 아닌, 사람들이 참으로 전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열심을 내고 헌신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제 구원에 대한 편협한 개인주의적 개념 너머로 전진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개인적으로 교회에 명백히 소속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만들었다 . . . 어떤 그런 맥락에서, 고대문헌에서 분명히 계속 힌트를 얻을 수 있겠지만, 진정으로 그것에 경청하지 않을 수도 있다.
더욱 가능한 것은 우리가 단지 “허튼 소리 마!”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여러분이 그런 엘리트에게만 침례를 한정짓는 교회를 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토론의 최후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모든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성욕을 두려워했는가, 결국, 그들 모두가 진정 마니교인들 아닌가라고 쉽게 비난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가 결론으로 비약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며, 결국 독신은 우리에게 오히려 신경을 거스르는 것이 된다. 그리고 사실 우리의 아파라핫 문구의 특성을 처음으로 인식해낸 위대한 에스토니아 학자 아더 뵈부스(Arthur Vööbus)는 한 때 도마 행전에서 발견되는 파혼의 관점에서 그것을 해석했다. 그곳에서 결혼은 단지 추행으로 비난받는다. 그래서 결혼이라는 추악한 성교에 그리스도와의 일치라는 영적 교통을 비유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 어떤 문의도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보통 그렇듯이, 결론으로 비약하는 것은 그릇된 결론으로 이끈다. 우리의 문구는 아주 분명하게 결혼을 추악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결혼하기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가서 그렇게 하기를 권유한다. 그리고 특히 그렇게 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말한다. 오직 그들이 결혼하기를 원한다면, 침례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문구 전체는 성전에 대한 신명기적 교훈(신 20:5이하)의 밀접한 모방 안에 있다. 그 곳에서 오직 그들을 혼란케 하는 절박한 걱정거리가 없는 전사들만이 거룩한 전쟁 참여 허락을 받는다. 예를 들면, 재산이나 아내를 막 얻은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전의가 꺾일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는 그분의 전쟁에서 싸울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전사는 전심을 다해야 하고 그분을 신뢰함으로 두려움이 없어야만 한다.
초기 시리아 교회는 매우 기꺼이 기독교적 생활을 영적 악에 대항하는 주님의 전쟁의 관점에서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진기한 것 보다는 불합리하지 않은 것, 이 개념의 세례에 대한 적용을 본다. 결혼하는 것은 악한 것이라는 그 어떤 암시도 없다. 단지 이것은 바울도 말한 것처럼(고전 7:32이하) 정신을 흐트러지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문구가 말하고 있는 것은 아무도 결혼을 살 수 없다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세례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생활은 본질적으로 성전(the Holy War)의 관점에서 해석된다. 모든 사람이 전사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서명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몸과 영혼 모두를 성전에 걸을 수 있어야만 한다. 자신을 후퇴시키는 다른 서약들은 없어야 한다. 이 사실에서 침례 후보자들에게 주어진 가난과 독신의 의무가 유래했다. 특히 만약 폰 라트(von Rad)가 “신앙이라는 성경적 요구는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에서 그 적절한 근원을 취한다”고 말한 것이 옳다면, 이 모든 것에 어떤 설득력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현대 신화들의 관점에서, 누군가가 떠나서 모르도르의 군대와 싸워야 하지만, 그들의 자질의 바람직한 결과는 대부분의 호빗들이 집에 머물면서 자신들의 비교적 비감동적인 문제들을 대하고, 보다 큰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마 5:13), 발견만 되었다면 그들의 존재가 멸망으로부터 심지어 소돔과 고모라도 구해낼, 상상 속의 소수의 의인들처럼 전 세계를 멸망으로부터 지키는 보존자들이 되어야 한다.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는 한 유명한 문구에서 동일한 생각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마루(H. I. Marrou)는 그의 주석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함께 세상을 지킨다는 이해가 얼마나 철저하게 전통적인지를 논증한다. 세상을 위한 그들의 첫째가는 봉사가 그들의 충성(fidelity)이다. 그들이 매우 소수일지라도, 전 세계가 그들로부터 유익을 얻을 것이다. 교회의 충성스러운 제자도는 교회의 크기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심지어 그들 구성원 모두가 완전히 충성스러운 것에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사실적으로 직면해야만 한다. 유대인들은 모든 세대에 그를 위해 세상이 보존되는 적어도 의인 한 사람, 하나의 zaddiq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든 이교도든, 교회 안의 어떤 선택된 소수의 성결에서 유익을 얻는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마루는 예를 들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를 언급한다. 그는 선택된 소수를 제시한다. 그들의 숨겨진 삶들은 세상에게 감명을 주지 않지만, 그들은 전 세계의 행복의 원천이다.
우리의 기독교 페르시아 고대문헌과의 대화는 그래서 비록 세례와 영적 전쟁 사이의 연결 고리가 전통적이고 중요하지만, 우리가 기대할 것 같은 세례에 대한 많은 토론으로 이끌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그 대화는 간접적으로는 제외하고 독신도 아닌 성도들의 즐거움과 교제, 세상과 교회 안에서 명상의 중요성의 영역에로, 그리고 우리 모두가 소수의 충성이라는 숨겨진 방식에서 얻는 유익에로 이끈다. 이 대화는 또한 우리의 세상에 대한 가장 중요한 봉사는 보다 분명한 사도적이거나 사회적 과업들로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회심하고 우리의 제자도에 충실하는 것이라는 것을 고려하는 데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이 명백히 보다 색다른 사례는, 내가 생각하기로는, 어떻게 깊은 대화가 효과가 있는지를 분명하게 만드는 것에 도움을 준다. 피상적인 문제 너머를 보는 것은 그 모임으로부터 최초의 극심한 신랄함과 의심을 제거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우리를 기독교 생활 전체에 대한 비전으로 인도할 수 있다. 그 비전은 그곳으로부터 우리가 출발한 특별한 점에 대한 우리의 최후의 태도가 무엇이든지 가치가 있을 것이다.
나는 오순절주의의 예에 있어서 방언에 대한 용건 전체는 우리가 고려해 온 사례에서 독신 세례의 문제와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방언 자체는 정말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너무 많은 감정적 에너지를 쏟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들에게 방언의 중요성은 대단히 큰 문제이다. 만약 우리가 기독교의 전체 비전과의 심도 있는 대화에 참여한다면, 만약 조지 캔티가 제안하는 것처럼 오순절주의 체계에서 방언이 우리를 “기독교 신앙 전체를 위한 일치의 새로운 가닥” 안으로 인도할 수 있다면, 확신하건데, 우리 모두는 그것으로부터 유익을 얻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이다.
I “성령께서 그들에게 말하라고 준 것처럼”
1. 말하기를 주시는 성령
목을 채우는 말씀
Sermone ditans guttura
(오소서 창조주 성령이시여Veni Creator Spiritus 라는 찬미로부터)
잘 알려진 것처럼,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으로 말하기를 그들이 말하는 대로 한 사람이 “성령으로 침례받았다”는 적어도 정상적인 표징(the normal sign)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방언의 분출은 오순절에 성령의 강림의 즉각적인 결과였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을 때 유사한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한다.
“성령침례” 교리 전체에 반대하는 입장이 자주 충분하게 논의되어 왔다. 그리고 특별히 오순절 기사를 성령의 최초 증거로서 방언 교리로 일반화함에 반대하는 설득력 있는 성경적 주장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대화가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이 감동된 말하기를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삶에 행하시는 성령의 통전적 역사, 성육신의 특징적인 열매의 징후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 무언가 눈치 채고 있다고 생각할 충분한 이유가 성경적 증거로부터 또한 교부적 전통의 증거로부터도 존재한다.
신앙에 대한 실제적인 음성적 고백이 우리의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은 로마서 10장 9절 이하에 의해 제창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이것은 바울이 애호하는 매우 집약된 문구들 중의 하나이며, 그 문구들은 번역의 해악[bane]이다. kardiva/ pisteuvetai ei*" dikaiosuvnhn stovmati deV o&mologei'tai ei*" swthrivan).
우리는, 비록 보다 일반적이지만, 이와 유사한 권고를 솔로몬의 송가(the Odes of Solomon) 중의 하나에서 발견한다. 솔로몬의 송가는 고대 시리아 찬미들의 주목할 만한 수집이며, 가장 최근의 편집자는 그 연대를 1세기 후반만큼 오래된 것으로 잡는다.
열어라, 열어라 너의 마음을 주님의 환희를 향해,
충만하게 하라, 너의 사랑이 마음으로부터 입술까지,
주님을 위해 열매들을, 거룩한 생활을 맺기 위해;
그분의 빛 안에서 주의 깊게 말하기 위해.
일어나 똑바로 서라,
너 이따금 비천해졌던 자여.
너 침묵 속에 있던 자여, 말하라,
너의 입이 열려 졌나니. (8:1-4)
찬양은 하나님의 진리가 성육신을 통해 우리의 세상으로 오시는 것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다.
노래하는 자로 지극히 높으신 주님의 은혜를 찬양하게 하라,
그들로 그들의 노래들을 짓게 하라.
그들의 마음들로 그날과 같게 하라,
그들의 부드러운 음성들로 주님의 장엄한 아름다움 같게 하라.
거기에 숨 쉬는 사람이 없게 하라,
지식이나 음성 없이 숨 쉬는 사람이 없게 하라.
주님께서 그분의 피조물에게 입을 주셨기 때문이니.
주님을 향해 그 입의 소리를 열게 하시려고,
주님을 찬양하게 하시려고. (7:22-25)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받는 하나님의 성령이라는 생생하고, 취하게 하는 물은 “말하는 물”(speaking waters)로 특징 지워 진다(11:6). 그 물은 우리 안에서 말하기를 연다.
그분은 진리의 말씀으로 나를 채우셨으니,
이는 나로 그분을 선포할 수 있게 하려 하심이다.
(여기서 “선포”(proclaim)라고 표현된 말은 사실 시리아어에서 앞의 인용들에 등장하는 “말하다” 그리고 “이야기 하다”와 동일하다)
물줄기처럼, 진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오며,
내 입술은 그분의 열매들을 선포한다.
그분은 그분의 지식을 내 안에 충만하게 채우시나니,
이는 주님의 입은 참된 말씀이기 때문,
그분의 빛의 입구이기 때문 . . .
그분으로 인해 세대들이 서로 이야기하였고,
침묵했던 자들이 이야기를 얻었도다.
(12:1-3, 8)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침묵은 중립적인 침묵이 아니다. 성령은 침묵으로 얼어붙어 있던 사람들을 녹이시기 위해 그분의 열과 함께 오신다. “열은 지겨운 굴레를, 입술 위의 서리라는 얼어붙은 침묵을 풀고는, 그 제자들 위에 머물렀던 불의 혀처럼 그 입과 혀에 스며든다. 성령은 방언에 의해 가해진 그분의 열로서 그 제자들로부터 침묵을 몰아내버리셨는데, 그 침묵은 겨울에 의해 위협당해 감히 말하지 못했던 그 지겹고, 얼어붙은 침묵이었다. 겨울의 표징, 서리의 상징으로서 그 사람들(즉, 적대적인 유대인들)은 모두 그 제자들을 대항하는 어둠이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불의 혀로서 그 한파의 힘을 누그러뜨리고, 그 제자들로부터 두려움을 몰아내셨다. 그러자 침묵이 그 혀들(방언)이라는 방법에 의해 그들의 혀에서 도망쳐버렸다. 겨울처럼 사람들을 괴롭히던 사단은 겨울처럼, 어둠처럼 정죄 받았다. 거기서 높이 날아 오른 작은 새들이 새로운 목소리로 노래하기(문자적으로 ‘말하기’ - 솔로몬의 송가에서처럼 동일한 단어) 시작하며, 매와 겨울을 멸시한다.”
성탄에 대한 그의 찬미가들 중에 하나에서, 바위의 이미지의 다양한 적용들에 대한 미드라쉬적 문구에서, 에프렘(Ephrem)은 외치는 돌들에 대한 우리 주님의 말씀들을 언급한다. 그는 그것을 마음이 돌같이 굳어버린 사람들의 회심에 적용한다. “그 돌들은 그 바위이신 분을 통해 부드러워졌고, 말할 수 있는 혀를 얻었다.”
굴복하지 않는 돌들, 얼어붙은 땅, 이것들은 하나님 없는 죽음 같은 삶에 대한 그럴듯한 이미지들이다. 그리고 그런 삶의 결말은 영원한 침묵으로 내려가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오직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아야,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살아야한다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목적에 의해 그 영원한 침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주님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내려 갔으리로다.
(시 94:17, Grail)
죽은 자들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침묵 속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아무도 찬양하지 못하리로다.
그러나 우리 산자는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이제부터 영원까지.
(Psalm 115:17f, Grail)
사실, 후기 유대교 전통에서 침묵(Duma)은 “게힌놈을 주관하는 천사”를 위한 적합한 이름에 해당했다.
이것은 솔로몬의 송가의 저자가 아래와 같이 주장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사망은 내 얼굴 앞에서 파괴되어 왔으며,
스올은 내 말에 의해 정복당해 왔도다. (15:9)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능력은, 특히 수도원 집단들 안에서, 마귀의 맹공격에 직면해 있는 사람의 필수적인 생명의 표징으로 간주된다. 아꼬이메떼스(Alexander Akoimetes) 찬송을 수도승의 “전신 갑주”라고 일컫는다(그리고 psalmody는 찬양을 의미한다. 시편 115에서 “찬양”을 위한 히브리어는 ‘psalm’을 위한 말과 관련된다). 그리고 에프렘에게 돌려진, 순례하는 삶에 대한 한 시리아 시는 변절한 사람에 대해 말한다.
그러면 그의 혀는 침묵하고,
사단은 그의 무기들을 빼앗았다.
바나바서에 있는 한 명백하게 모호한 문구에 우리의 입을 여시는 주님과 그분이 우리로 그 안으로 들어가게 하시려 하늘 성전의 문을 여시는 것 사이에 만들어진 동일시가 실제로 있는 것 같다(16:9).
우리를 위해 성전의 문을 여시는데, 그것은 우리의 입이라,
우리로 회개하게 하심으로써, 사망의 종이었던 우리를
영원한 성전 안으로 이끄시도다.
그 문맥은 어떤 종류의 말하기는 이해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안에 거하시는가? 믿음에 대한 그분의 말씀, 그분의 약속의 부름, 그분의 교훈들의 지혜, 교리의 명령들 - 그분께서 친히 우리 안에서 예언하시며, 그분께서 친히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 . .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을 여셔서 우리로 그분의 말씀을 말할 수 있게 하신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의 말하기는 우리가 그것으로 영원한 성전으로 이끌림 받는 수단이라고 말하는 것일 것이다. (솔로몬의 송가 12:3으로부터 이미 인용된 문구와 비교하라: “주님의 입은 참된 말씀이며, 그분의 빛의 입구이다.”)
다른 보다 불분명한 문구에서, 이번에는 발렌티안 진리의 복음으로부터, 우리는 유사한 생각을 발견한다. “진리는 안으로 오셨다. 진리의 모든 방사물들은 그것을 알았다. 그것들은 모두가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진리는 성부의 입이기 때문에 자신들을 성부와 결합시킨 진리와 완전한 힘 안에서 성부를 맞이했다.
메나드(J. E. Ménard)가 그의 주석의 이 부분에서 오순절의 방언과의 모종의 관계를 본 것은 분명 옳다. 성령은 우리를 성부의 입(성부의 진리, 말씀이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중심에 오셨다)과 연합시키셔서, 우리로 그분과 연합 안에서 그분의 말씀을 말하게 하신다.
당신은 나의 하나님, 거짓과 죽음은 당신의 입 안에 없습니다.
오직 온전함만이 당신의 뜻입니다.
무익한 것을 당신은 모르시는데,
그것이 당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오류를 모르시는데,
그것이 당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지는 마치 먼지와 같고,
바다의 거품과 같습니다.
헛된 사람들은 그것이 위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바라던 것같이 되어 곤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들은 이해하고 심사숙고했으며,
헛된 자들의 생각들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마음 안에 거하면서,
오류 안에서 걷고 있는 자들을 아랑곳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말했는데,
지극히 높으신 분이 그들 안에 불어넣으신 진리로 말했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찬양과 큰 영광을 돌립니다.
할렐루야.
(솔로몬의 송가 18:8-16)
그렇다면, 초기 교회 안에, 비록 중심적이거나 잘 표현된 것은 아닐지라도, 한 전통이 존재했었던 것은 분명해지는 것 같다. 그 전통은 성육신과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에 의해 세상 안으로 오신 성령에 의해 우리의 입이 열림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과의 연합 안에서 그분을 찬양하고 선포함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도록, 그래서 사망과 파멸이라는 혐오스런 침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구원을 보았다.
그리고 얼핏 보기에는 이 전통과 오순절주의의 전통 사이에는 현저한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캔티 목사가 방언과 관련성에 대해 제안하는 것처럼 방언이 기독교 진리와 실천의 전체 비전을 위한 한 “일치의 가닥”을 제공할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살펴보는 것은 적어도 가치 있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우리는 다음 장에서 사람의 창조와 본성 안에서 말하기의 역할을 신학적으로 그리고 심리학적으로 조사해야만 한다.
2. 말씀 담지자로서 인간
Eala seo wlitige heofoncund þrynes,
þa mid ryhte sculon reordberende,
earme eordware ealle moegene
heregan healice . . .
오, 아름다운, 영광으로 충만한, 높으시고 거룩하신, 천상의 삼위일체시여,
말하기를 얻은 비천한 땅에 거하는 자들로 그들의 모든 힘을 다해 그분을 드높이 찬양하도록 넉넉한 평원 널리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강림절 찬미, 378이하)
사람은 말하는 동물이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며, 그래서 우리는 그것에 흥분할 이유를 거의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고대 시인들이 끊임없이 그것에로 돌아간다는 것은 캐묻고 싶은 사실이다. 호메르에서 사람들은 보통 메로뻬스(mevrope") 또는 아우덴떼스(au*dhvente")로 특징지워 진다. 두 단어는 평이하게 “말하기에 타고난”(endowed with speech)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그리고 아마도 독립적으로, 우리 앵글로-색슨 시들은 종종 사람을 reordberend, “말하기 담지자”(bearer of speech)로 간주한다. 니시비스의 주교 아브라함에게 보낸 한 시에서, 에프렘은 그의 신도들을 “말하기를 받은 양떼”(speech-endowed sheep)로 언급한다.
유대교 사상에서, 사람의 말하기 능력은 무시할 수 없는 신학적 중요성을 갖는다. 그 연대를 적어도 2세기로 잡을 수 있는 한 랍비 전통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네 가지 보다 높은 존재들(즉, 천사들)의 속성들과 네 가지 보다 낮은 존재들(즉, 짐승들)의 속성들로” 창조하셨다고 가르친다. “그 네 가지 보다 높은 존재들의 속성들은 섬기는 천사들처럼 똑바로 서는 것, 말하는 것, 이해하는 것, 그리고 보는 것”이다(이 마지막 속성은 천사들과 같고 짐승과는 달리 곁길들을 볼 수 있도록 개발된다!). 말하기는 천사적, 초자연적인 천부적 재능이다. 이것은 탈무드의 대체로 병행 본문 안에서 보다 더욱 명확하게 제시된다. 그 본문은 인류는 “섬기는 천사들처럼 거룩한 혀로(Holy Tongue) 대화한다”고 말한다. 사람의 말하기 능력은 무언가 불가사의한 것, 무언가 기대할 수 없는 것, 그러므로 무언가 하나님의 개입의 영향을 명백하게 가리 것이라는 것은 발렌띠누스의 한 단편에서 진술된다. “이 피조물이 그 자신의 창조물보다 더 큰 것을 말했을 때, 천상적 성질의 씨앗을 그 피조물 안에 보이지 않게 넣은 한 존재 때문에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고(parrhsiazovmenon) 있을 때, 공포가 이 피조물 앞에 있던 그 천사들에게 엄습했다.” 그것의 영지주의적 창조설을 벗기고 나면, 그것은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사람의 능력은 그가 천사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한 유대교 전통에서 유래한다. 그는, 한 각색에서, 당황하여 후퇴한 후 그의 타락을 꾀하기 시작한다.
창세기 2장 19절의 한 고대 유대교 해석에 따르면, 사람이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이 재주를 “성소의 언어로”(in the language of the sancturary) 수행한다. 사람은 성소의 언어를 말하는 특권을 갖고 있으며, 그리고 이번에 성소의 언어는 “창조의 방언”(tongue of creation), “태초에 세상이 그것에 의해 창조되었던 거룩한 말”과 동일시된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바로 그분의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그 말씀의 말하기에 있어서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었던” 바로 그 언어를 말하기를 하나님과 나누도록 초청받는다. 이것은 피조물들의 이름 짓기가 그렇게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는 이유이다. 그리고 한 기사가 아담 또한 자신의 이름을 짓는 것에 대한 세부사항을 특별히 덧붙인다는 것을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 기사는 사람이 하나님 자신의 창조적 행위를 함께 나누도록, 어떤 의미에서 심지어 섬기는 천사들의 역할을 능가하는 유일무이한 특권을 부여받은 것을 드러낸다.
그러나 사람은 죄를 범함으로써 그가 그것을 위해 창조된 하나님과의 친교를 버렸다. 그럼으로써 결국 그는 하나님의 언어를 나누는 능력을 잃었다. 유대교 전설에 의하면, 바벨에서 사람들의 언어의 혼란으로 거룩한 방언에 대한 지식이 상실되었다.
그래서 창조의 언어는 아브라함이 그것을 다시 배울 가치가 있다고 발견될 때까지 세상에서 침묵에 빠지게 되었다. 희년의 책이 그 이야기를 말하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어느 날 밤에 갑자기 점성술의 무익함을 깨닫고는 기도한다. “나의 하나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당신 홀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당신과 당신의 나라를 택하였습니다. 당신께서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당신의 손의 작품입니다. 저를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들의 손에서 건져주십시오. 그래서 그것들이 저를 나의 하나님, 당신에게서 벗어나게 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자 한 천사가 “그의 입과 귀를 열었다. 그랬더니 그가 들을 수 있었고, 계시되어 온 그 언어를 그의 입으로 말할 수 있었다.” 그 천사는 그렇게 행했고, “창조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그와 말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그 천사의 감독아래 “족장들의 책”을 공부하기 시작하기 위한 길을 열었다. 사람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진리와 그분의 명령들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구약에서 사람에게 주어졌다면, 그 말씀, 창조, 계시, 교훈 그리고 약속을 포함하는 말씀이 실제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실 때, 신약에 얼마나 더 온전하게 주어지겠는가. 이제 우리를 그분과 하나가 되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에 의해, 우리는 그분의 살 중의 살이요, 그분의 뼈 중의 뼈이다(엡 5:19, 불가타역과 몇 헬라어 사본들)
교회는 전통적으로 오순절을 바벨을 위한 결정적인 하나님의 치료제(divine remedy)로 보아왔다. 예를 들면, 자신의 오순절 찬미(kontakion)의 시초에, 감리교도 로마노스(Romanos)는 다음과 같이 쓴다.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사람들의 구음(tongues)을 혼잡하게 하셨을 때,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나라들을 나누셨다. 그러나 그분이 불의 혀들로 갈라지게 했을 때, 그분은 만민을 하나 됨으로 부르셨다.” 유대 전설의 배경에서, 이것은 보다 선명한 중요성을 갖는다. 사람들은 더 이상 언어 장벽으로 인해 서로 분리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충분히 놀랍다. 그러나 더욱 놀랍게도,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언어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함한 세상이 그것에 의해 창조된 그 언어로 하나님과 실제로 말할 수 있는 특권을 우리에게 돌려주신다. 사람은 더 이상 창조의 가장 깊은 진리, 그 자신의 피조물성의 가장 깊은 진리와의 조화에서 제외되는 판결을 받지 않는다. 사람은 다시 한 번 그 자신의 이름과 그의 동료 피조물들의 이름을 부를 수 있고, 그리고 그 이름들이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자신을 알게 하신 그 이름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제나 효력 있고, 결코 헛되이 돌아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사 55:11 참조). “그분의 모든 말씀은 일하는 것이다”(에녹 14:22, 헬라어, Pa''" lovgo" au*tou' e!rgon).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능력을 탐낼 때, 그는 “단순한 말들”, 실제로는 아무 중요한 것도 나르지 않는 말들, 그러므로 아무 것도 표현하지 않고 사람을 무의미하고 무익한 채 남겨두는 말들만 말하는 형을 선고받는다.
사람은 정확히 하나님과의 이런 나눔을 위해, 아타나시우스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대화”를 위해 창조되었다. 이것을 박탈당할 때, 그는 자신의 의미를 박탈당한다. 그리고 사람뿐만이 아니다. 우주의 시인, 우주의 연설자가 되어 우주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은 우주 안에서 사람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사람의 죄 때문에,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되었고,” 그래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롬 8:20, 22).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창조 되었고, 한 번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그가 그것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창조된 그 말씀을 말하도록 창조된 사람은 그가 스스로 획득할 수 없는 어떤 말하기(utterance)를 말하자면 잉태한다. “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산고를 겪으며 부르짖음 같이 우리가 주 앞에서 그와 같으니이다 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사 26:17이하).
솔로몬의 송가는 정확하게 이 산고의 이미지를 진리의 말을 말하기를 하지 못하는 무능력과 결합시킨다.
그 틈들은 열리고 닫혔다.
그리고 그들은 막 아이를 낳으려 하는 사람들처럼 주님을 바라고 있었다 . . .
그리고 부족한 사람들 모두는 멸망했으니,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그 말을 표현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간계를
진리를 갖고 있지 않는 모든 자들의 간계를 파괴하셨다.
(24:5, 9이하)
그러나 이제 출산의 시간이 왔다. “땅이 그 열매를 내었으니, 하나님의 말씀이 한 처녀의 신실함에 의해 우리 인간으로 태어나셨다. 그리고 또한 우리 안에, 성령의 첫 할부금을 받은 우리 안에 또한 그 말씀께서 착상되기 시작하셨고, 말해지기 시작하셨다. 지옥의 무시무시한 침묵이 정복되었다.
* * *
우리가 잉태한 그 말씀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그 말씀,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재로 부르기 위해 말씀하셨던 말씀, 우리의 정체성의 비밀인 말씀은 또한 우리 자신의 말이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자신의 충만함과 그분의 창조의 충족함을 말씀하시는 그 한 말씀의 독특한 반향(echo)이다. 우리의 말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한 그 말씀을 발견하고 말하는 것은 삶에서 우리의 역할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침묵으로부터 말해진, 우리 자신인 그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망과 파멸의 침묵으로 내려앉는 경향이 있다.
“표현은 내 영혼의 필요다”라고 돈 마르키스의 유명하고 유쾌한 바퀴벌레 시가 선언한다. 자기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어느 정도의 자유는 인간의 성숙과 정신건강에 있어서 필수 요소라는 것은 더욱더 인식되고 있다. 우리의 깊은 정서적이고 심리적 문제들 중에 상당수가 우리가 결코 감히 말할 수 없었던 것을, 아마도 아주 오래 전에 “우리 마음에서 뱉어내야할” 필요가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무언가를 우리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 같다. 그것은 종종 아주 어린 아이일 때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던 무언가 일 수 있으며, 그것을 말하는 것은 매우 근본적이고 모호한 것, 아더 자노브(Arthur Janov)가 “원초적 비명”(primal scream)이라고 일컫는 것일 것이다. 그 개념은 기묘하게도 죄에 의해 무익과 공허와 허구에 굴복하는 모든 피조물의 “탄식”에 대한 바울의 언급을 생각나게 한다.
또 다시, 보통 정신분열증이라고 불리는 것은, 단순히, 어떤 사람이 그 안에서 무자비하게 자신이 될 권리를 부정당하고, 결국 그가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무엇인지,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자신의 경험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는 어떤 사회적 상황에 대한 격렬한 반응만큼 개인의 정신 체계의 기능장애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좋은 증거가 있다. 레잉(Laing)과 에스터슨(Esterson)에 의해 연구된 사례들 중 하나에서 언제나 “다른 누군가의 말을 도구로 취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아채는 것은 우리의 논점들을 위해 흥미로운 것이다.
주요한 인격 장애들은 아주 별문제로 하더라도, 우리들 가운데 대부분은 때때로 무언가 말하고 싶은 욕구를 갖게 되지만, 한 가지 이유나 다른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심각한 좌절을 경험하지 않는가?
우리가 상처를 받을 때, 우리를 경멸하거나 괴롭히지 않을 것이라고 신뢰할 수 있는 동정적인 누군가에게 그저 그대로 말할 수 있는 것이 매우 종종 도움이 된다. 그리고 또한 큰 기쁨의 순간에도 우리가 그것을 어떤 친구와 공유할 수 있다면 우리의 기쁨은 더욱더 커진다. 비록 우리가 혼자 있을 때라도, 우리는 “이것 좋지 않잖아?”라고 중얼거림으로써 간신히 도울 수 있다. 사람은 혼자 있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말은 생각만큼이나 우리에게 기본적인 것이다. 생각은 내면화된 말이라고 말하는 것은 말을 외면화된 생각으로 보는 것만큼 참되다.
그러나 아주 종종 우리는 감히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것, 참되게 말하는 것, 마음으로부터 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선물이 경멸당하거나 하찮은 것으로 취급당하면, 우리는 곧 그것을 다시 시도할 용기를 잃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말은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 대신 단지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비위를 맞추려는 우리의 욕구만을 표현하기 위해 왜곡될 것이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말하도록 기대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만 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선물은 주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비극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오직 자신을 줄 수 있을 때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왜 우리가 받아들여질 것인지 언제나 걱정스럽게 생각함 없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동료, 친구, 형제에 의해 복을 받을 때 그렇게 좋은 이유이다. 랍비적 잠언이 말하는 것처럼 “교제 아니면 죽음”이다. 말동무가 없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
성령은 우리를 말을 하지 못함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시기 위해 오셔서 말할 수 있다는 확신을 회복시키신다. 에프렘이 이미 언급된 시에서 침묵을 몰아내는 것은 반드시 두려움을 몰아내는 것과 함께 가야만 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것은 우리의 자신이 있는 하나님께 접근에 대한, 신약성경에서 사용되는 용어들 중의 하나에서 아주 정확하게 표현된다. 빺페시아(paffhsiva)는 문자적으로 “어떤 것과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성부와의 그런 신뢰 관계를 갖는다. 그 관계 안에서 우리는 금지 또는 억제의 공포 없이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을 자유롭게 그분과 말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이 얼마나 난폭하든지 하나님의 사랑은 그것에 의해 좌절되지 않는다.
성령은 우리를 언제나 좋은 모습으로 치장해야할 필요, 얼굴에 아무 것도 쓰지 않은 채로 발견되지 않도록 언제나 간편한 몇 개의 가면들을 가지고 있어야할 필요에서 해방시키신다. 우리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마 6:5이하) 기독교 기도는 유창한 공적 연기이지 않아야 한다. 기도는 골방의 친밀함과 비밀 안에서 해야 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불러주시고, 그분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초청하신 분께 수줍고 투박하게 말할 수 있다.
홀렌버거(Hollenweger) 교수는 오순절주의의 주요한 공헌은, 사실 사람들에게 쉽게 자연스럽게 오는 의사전달/소통의 수단을 사용할 수 있는 오순절주의의 능력에 있다고 제안해 왔다. “다른 교회들에서는 결코 성취할 수 없었던 놀라운 정도의 의사전달/소통이 그들의 예배에서 발생하고 있다.” “오직 무관심한 방관자만이 체계적이지 않고 비예전적이라고 묘사할 오순절적 예배에서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 뜻대로 말하기의 수단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 그 기준은 개념적 명료함이 아니고, 소통성이다 . . . 내게는 오순절 운동이 가장 중요하게 공헌해온 영역은 끊임없이 그리고 아주 잘못 추측되어 온 것처럼 성령론의 영역이 아닌 바로 예전과 설교의 영역이다.”
만약 홀렌베거 교수가 옳다면,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옳다는 확증을 얻는다. 우리의 대화를 위해 근본적인 것은 어떤 것이든지 사람들이 자기 뜻대로 갖고 있는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방언의 역할이다. 그 근본성에 있어서 방언에 대한 성령론적 해석은 방언의 그런 역할에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아마도 사도 바울이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세운다”(고전 14:4)고 말한 것과 관련될 것이다. 결국, 우리가 말하기 원하는 무엇이든지를 말할 수 있는 확신을 잃음으로써 우리는 심지어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더 이상 알지 못하는 단계에 아주 빠르게 나아간다. 이것이 왜 때때로 소통으로의 돌파가 격렬한 울음이나 “원초적 비명”의 형태로 오는 이유다. 왜 소통이 또한 때때로 방언(glossolalia)의 형태로 오지 않겠는가?
그러나 소통이 어떤 방식으로 발생하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신을 적어도 하나님께 말하는 것을 배운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속들이 알아서 우리의 상황에 대한 완벽한 진단을 가지고 하나님을 뵈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다! 레페브르(Dom Georges Lefebvre)가 최근에 쓴 것처럼, “우리는 단순하고 확신을 가지고 제공하기 위해 우리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분명하게 볼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은폐를 멈추고 자신을 하나님의 아심에 공개하는 것을 의미한다. (갈라디아서 4장 8절 이하에서 바울이 신자가 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이제 우리가 이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주목하라)
3.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
나의 교훈은 내 것이 아니니라
Mea doctrina non est mea
(요 7:16)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을 잉태하고 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말하도록 창조되었다. 원리적으로는 자기표현을 위한 우리의 분명한 필요 이면에 가장 깊은 신뢰가 있어야만 한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어떤 긴장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 긴장은 원형과 복종(oritinality and obedience), 독립과 피조물적 수용(independence and creaturely receptivity) 사이에 있는 것이다.
이 긴장은 때때로 호의적인 복종에 의해 크게 해소되어 왔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죽음(mortification)의 중심성, 우리 자신을 부정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많이 듣고 말하곤 했던 것이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고는 우리는 아마도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것이 의심의 여지없이 아주 온순하고 겸손하고 보통 순진한, 그러나 실제로는 살아있지 않은 사람들만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주님께서 약속하셨던 더 풍성한 삶은 어떻게 된 것인지, 그리고 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명령은 그렇게도 안중에도 없는 것인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시계추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제 그 큰 명령은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오직 확실히 짐승같이 될 수 있을 뿐일지라도 진실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아마도 과감히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것이 자신을 많이 생각하고 아주 크게 외치는 사람들, 우리에게(또는 자신들에게?) 가능한 한 자주 그들이 얼마나 자유롭고 개화되었는지를 깨닫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들을 많이 생기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풍자적인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쨌든 그 안에 어떤 진리가 있다면, 이것은 그저 우리가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자신을 잃을 것(마 10:39)이라는 우리 주님의 고도의 역설의 중요성을 파악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을 가를 드러낸다.
거기에는 분명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는 잘못된 길이 있다. 숨 막힐 것 같은 벙어리/모형들의 단정하고, 정돈되고, 새침 떠는 치장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도된 결과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어떤 추상적인 모형에 대한 일치를 위해 우리의 정체성을 희생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려면, 우리는 반드시 또한 우리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도 각오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그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배웠다는 것도 큰 신비였다. 그는 바리새인이었고, 그것도 아주 성공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회고해 보면 바리새인으로 가졌던 온전함은, 그 자체의 방식으로 진정으로 충분히 온전함은 너무도 시시했다. 그래서 그는 바울에게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하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의를 위해 단지 그 자신의 의를 벗어 던져버렸다(빌 3). 그래서 그는 그렇게 말하기를 배웠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오, 오직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신다”(갈 2:20). 우리 주님이 자신을 찾는 것과 자신을 잃는 것을 기묘하나 힘 있는 통합 안으로 밀어 넣으시는 것처럼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오”와 정확하게 균형을 이룬다.
자기주장과 자기부정 너머에 하나님과 사람의 함께 일함, 함께 함이라는 굉장한 상승작용이 놓여있다.
캔티는 오순절주의자들에게 방언으로 말하기는 “인간의 본질, 창조의 본질, 하나님의 사람과의 교제 방식 등 전체 교리를 포함하는 엄청나게 암시적인 주제다”라는 것을 증언한다. 오순절주의자들에게 방언은 어거스틴의 유명한 문구에 의해 표현된 진리를 드러낸다. “주님은 저의 가장 내밀한 곳보다 더 안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셔야 한다. 하나님께 우리 마음 안에 거하시는 것, 그의 성전으로서 거기에 그의 거처를 정하시는 것, 그분의 영으로 거기서 다스리시는 것은 “안으로부터 성전의 영광스러운 점유만큼 밖으로부터의 침입이 아니다.” 캔티가 말하는 것처럼, “말하기는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의 감미로운 동의의 표징으로 오며, 우리가 생소한 힘에 의해 침입당할 때 오는 압박감이 전혀 없이 긴장을 풀어주는 것이다.” “방언으로 말하기는 신부가 신적 신랑의 포옹 안으로 이끌려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자기표현 안에 뿌리를 두지 않는 자기표현은 모두 처음부터 사형판결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자유의 깊음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어리석은 것이며, 심지어 신성모독일 수 있다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발해야만 하는 말은 우리 안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 말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택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하시는 말씀이다.
어거스틴은 우리 주님의 얼핏 보면 모순되는 진술에 대한 그분의 논의에서 그 점을 잘 지적한다. “내 교훈(doctrine)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요 7:16). “아버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틀림없이, 아버지의 말씀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자신은, 아버지의 말씀이시며, 아버지의 교훈이시다. 그러나 어떤 말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말이어야만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교훈은 자기 자신이지만, 그 말씀은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너 자신만큼 너의 것이 무엇인가? 그렇지만 너의 존재 자체가 다른 존재의 것일 때, 너 자신만큼 너의 것이 아닌 것이 무엇인가? . . . . 간단히 말하면, 나는 우리 주님께서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나는 내 자신의 근원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 안에는 그분 자체인 그 말씀과 그분이 말하시는 그 말씀 사이에 그 어떤 불일치나 부조화도 없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그 두 가지가 하나가 되려면 많은 인내와 수고가 요구될 것이다. 우리는 미성숙으로부터 성숙으로 자라나기를 기대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발화(utterance) 안에서 우리 자신을 완전히 그리고 자유롭게 발언하는 방법을 찾기 전에 우리가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아주 많은 미성숙과 공격적인 자기표현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자유와 성취로의 진보는 우리가 말하기 원하는 것(parrhsiva)은 무엇이든 말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과 단지 우리 자신의 말을 계속 하지 못하게 침묵해야 한다는 것 모두를 포함하는 이유이다. 시리아 시인 키릴로나(Cyrillona)는 우리 주님의 고별 설교에 대한 그의 자유스런 해석에서 말한다.
성령이 오시리니
그분의 혀들을 가지고 . . .
새로운 말하기가
네 안에 거하리니 . . .
너의 혀는 침묵하며
잉태할 것이다.
우리가 삶의 새로움 안에 들어가는 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다. 우리는 물과 성령에 의해 거듭나기 위해 그분과 함께 스올로 내려가야만 한다.
우리는 창조의 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고, 그 땅은 형태가 없이 공허했으며(tôhû wābôhû) . . .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창 1:1이하). 그리스도의 스올로 내려가심과 연합함에 있어서 우리도 또한 원초적 물속으로, 세상을 질서와 다양한 아름다움에로 형성시킨 그 말씀이 말해지기 이전의 혼돈 안으로 되돌려진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그 물 위에 운행하시며 우리를 새로운 세상,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세상, 그 안에서 우리가 심지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이름으로 우리 자신에게 이름을 부여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언어를 말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세상 안으로 낳으시기를 기다리신다.
신생이 오기 전에 죽음이 오고, 회복 전에 몰락이 오며, 새로운 지혜 전에 우둔함에 빠짐이 온다(고전 3:18 참조).
하나님의 방식들을 이해하는 것은 시간을 요하며, 우리가 그분에 의해 알려지는 만큼 우리가 그분을 알게 될(고전 13:12) 종말에서야 온전해질 것이다. 먼저 우리는 이해하겠다고 너무 설쳐대지 말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말하도록 준비해야만 한다.
우리 주님은 그 시대의 정상적인 교육 방식을 사용하셔서 제자들로 하여금 그분의 교훈(doctrine)을 암기하여 배우도록 하셨다는 것이 그렇듯 하게 제안되어 왔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머지않아 성령께서 그리스도께서 말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면서 그들을 모든 진리를 이해함 안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성부에 의해 그리스도께 맡겨진,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해 사도들에게 맡겨진, 다음에는 사도들로부터 우리가 교회에서 받아온 교리, 객관적 교리는 정확하게 한 수단으로서 필수적인 것이다. 그것에 의해 우리는 단순히 우리 자신의 선입견들에 의해 결정된 세계관이나 신학의 맹목으로부터 꺼내진다.
그러나, 페레 콩가르(Père Congar)가 지적하는 것처럼, 교회의 진정한 전통은 꼭 냉정하고 외적으로 관리된 교리만은 아니다. 그것은 언어가 언제나 그런 것처럼 삶의 경험 전체로부터 습득된 언어 전체이다. 교회의 전통은 결코 조각난 단어들, 교리의 항목들의 형태로 충분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있는 전체, 교리와 신학뿐만 아니라 예배와 의식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콩가르는 말한다. “아무 것도 예전보다 사람의 전체성에 있어서 사람을 위해 더 교육적인 것은 없다 . . . 예전은 ‘영혼들을 예수께 연합시키기 위해 교회에 의해 제정된 믿을 만한 방법’이다. 예전에의 개화되고 유순한 참여에 의해 다듬어진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사랑하고, 일생의 기도와 예배를 통해 믿음과 사랑의 그의 삶 안으로 신비스런 침투에 의해 그의 인간적 본성의 모든 신경조직 안에 통합된 사람이다. 일생의 기도와 예배 동안 그리스도인은 마치 그의 어머니의 무릎에서처럼 힘들이지 않고 교회의 언어, 교회의 믿음, 사랑, 소망, 그리고 충성의 언어를 배웠다. . . 이것이 무엇인가 기계적인 복종과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신랑 그리스도의 생각과 감정과 하나로 묶어주는 내적 민감성(il s'agit de ce tact intime)에 관계된다.”
우리의 심장과 마음이 교회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교훈과 예배의 말들에 의해 점점 더 스며들면서, 마치 방언이 통역에 이르는 것처럼, 믿음은 서서히 지식으로 자라날 것이다(고전 14:13). 그러나 참된 믿음은 지식에 대한 즉각적인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쉽게 되지 않을 것이다(사 28:16 참조). 무엇보다도, 적절한 시간을 기다리는 대신 지식을 남용한 것은 우리의 첫 부모의 죄였다. 적어도 그런 것은 안디옥의 테오필루스가 타락 이야기를 이해한 방식이며, 그 이해는 이레니우스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발전되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주”라 부를 수 있게 하고, 참된 믿음을 고백할 수 있게 하며, 또한 우리에게 평안과 인내를 주신다. 믿음은 하나님의 진리와 인간의 진리가 궁극적으로 하나라는 것을 이미 어렴풋이 느낀다. 완전한 이해가 있기 전에도 계시된 진리에 대한 일종의 친숙함이 있다. 칼 라너(Karl Rahner)가 말하는 것처럼 “거룩한 신비는 심지어 우리 눈에도 자기-설명적인 것이며, 그 자신의 자기-충족적 이성이다.” 이것은 시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완전히 인지할 수 없을 때조차도 그것이 우리에게 때때로 강력하게 말할 수 있는 방식과 아주 조금 닮았다. 참으로 우리는 아마도 즉시 이해되지 않지는 않지만, 어떤 신비를 간직하는 시에 의해 더욱 사로잡히고, 몰두되고, 매혹되는 것 같다.
체스터톤(G. K. Chesterton)은 계시적 역설에 대한 그의 통상적 식견으로 그의 최고의 책들 중 하나를 “정통 - 인격적 철학”이라고 칭했다. 우리의 본성에 적합한 참된 인격적 반응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진리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래야만 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진리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시면서 하나님의 진리와 우리의 진리 사이의 분리를 극복하신다. 그 결과, 우리는 자발적으로 그리고 심지어 창조적으로 일들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보기에 이른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믿음으로 갱신된 우리의 마음의 정수가 되도록 우리에게 주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입과 마음에 놓으신다.
우리가 우리의 자유 전체가 하나님의 뜻에 유순해지는 것을 발견하는 그 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창조적 독창성(creative originality)이 하나님의 진리에 유순해 지는 것을 발견한다. 판단력과 독창성을 두려워하는 정통은 아직 온전히 정통적이지 않다. 문맹정책에 의해 수호되어야만 하는 믿음은 믿음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이 그 외부에 그 어떤 원판[혹은 주인]도 용인할 수 없는 생각도 아직 진정으로 생각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람에 따라,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신적 언어인 교회의 언어를 보다 온전하게 그리고 성숙하게 이해함에 따라, 우리는 교회의 언어는 우리가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온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라는 것을, 그러나 또한 교회의 언어는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또는 서로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언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바벨의 정 반대인 언어의 통일은 메시야 시대의 특성이며, 그래서 틀림없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특성이어야만 한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당파 싸움을 극복하라고 권고할 때, 그는 그들에게 문자적으로 “모두 동일한 것을 말하라”( &Ina toV au*toV levghte pavnte")고 말한다(고전 1:10). 성령은 반드시 우리를 강제적인 “독창성”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줄 것이다. 독창성은 우리가 항상 다른 사람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금한다. 비록 교회의 언어 통일이 실제로는 이것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을 지라도, 성령은 우리가 심지어 낡은 신조들을 사용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실 것이다. 성령은 전 세계적이고 천년의 교제로서 우리를 교회와 친밀하게 하나로 묶어주면서 그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세대들을 전달해 왔던 다양한 방식들에 대한 직관적인 공감을 우리에게 갖게 할 것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은 대체로 그들이 전통에 대한 가톨릭적 견해라고 이해하는 것에 편치 못하다. 그리고 그들은 고정된 예전들을 예배를 위한 비현실적인 방식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의 방언으로 말하기 경험, 그리고 그 경험이 그 안에서 그들을 하나님과 사람의 협력을 발견하도록 이끌어가는 방식,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의 응집력이 우리에게 전통과 예전에 대한 중요한 숙고들을 제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특별히 나는 그 경험이 우리가 자발성과 예전, 자유스런 사고와 전통적 정설 사이의 용이하고 그릇인도 하는 대립을 극복하도록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4. 시인으로서 사람
마음이 어두운 사람은 말할 수 없을 것이지만,
아주 조금의 청순함이 그들을 노래하게 만들 것이다.
(커밍스, E. E. Cummings)
믿음의 말들과 시의 말들 사이의 어떤 유사성에 대해 이미 언급해왔다. 그리고 비록 이것이 오직 부분적인 유사성일지라도, 칼 라너가 그의 아름답고 정당하게 유명한 에세이 『사제와 시인』에서 분명히 말한 것처럼, 이것은 결코 그저 우연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곳에서 시인의 재능의 타고난 집중성, 그리고 사제들의 재능의 타고난 집중성을 보인다. 말들은 시인에게 특별히 맡겨지며, 사제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특별히 맡겨진다.
그는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말들은 생각들이 그 안에 싸여야만 하는 그저 없어도 되는 의복들이 아니다. “말은 구체화된 생각(the embodied thought)이지, 생각의 구체화가 아니다”(p. 295). 말들은 단지 마음대로 조작될 수 있는 진부한 수단들이 아니다. “나누는 말들과 합하는 말들이 있다. 인위적으로 꾸며질 수 있고 독단적으로 결정될 수 있는 말들과 언제나 존재해 왔거나 기적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말들 . . . 일종의 황홀함에 의해 그것들이 표현하고 있는 것을 듣는 사람 안에 만들어지는 말들 . . . 단 하나의 것을 모든 실제의 무한성에 투명하게 만드는 말들이 있다. 말들은 아무리 작다 해도 마치 무한한 바다의 소리가 들려질 수 있는 바닷조개들과 같다. 말들이 우리에게 빛을 가져다주지, 우리가 말들에게 빛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말들은 우리 위에 힘을 행사하는데, 그것은 말들이 사람들의 창조물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어떤 말들은 분명할 텐데, 그것은 그것들이 얕고 신비함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말들은 그 마음에 충분하다. 사람은 그 말들을 수단삼아 사물들에 대한 지배력을 얻는다. 다른 말들은 아마도 불분명할 텐데, 그것은 그것들이 사물들의 눈을 가리는 신비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 말들은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 찬미로 울려 퍼진다. 그 말들은 위대한 일들에게 그 문들을 열며, 영원한 진리들을 판결한다. 그런 말들을, 마음에서 우러나오고, 그 힘으로 우리를 붙들고, 우리를 황홀하게 만들고, 찬양하게 하는, 하늘로부터 보내진 말들을 나는 원초적 말들(primordial words, Urworte)이라고 부르고 싶다 . . . 그 말들이 말하는 바가 무엇이든지, 그것들은 언제나 모든 것에 대해 무언가를 속삭인다”(pp. 295-7).
이것이 왜 “모든 올바름을 참으로 반드시 모호하게 만드는” 말들이 존재하는 이유다(p. 299). “다양성 속의 통일성, 겉모양 속의 본질, 부분 속의 전체, 전체 속의 부분이라는 신비 앞에 서 있는 한 지식이 존재한다. 이 지식은 원초적 말들을 사용하며, 그 원초적 말들은 신비감을 일으킨다. 그런 말들의 지식에 의해 모호한 실제 자체처럼, 그런 말들의 지식에 의해 우리를 사로잡아 그것의 불확실한 깊음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실제 자체처럼 이것은 언제나 불분명하고 모호하다. 원초적 말들 안에서 영혼과 몸, 지시된 것과 그 상징, 개념과 단어, 사물과 표상은 여전히 생생하고 원초적으로 하나다. 이 하나는 단지 동일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 별과 꽃, 영혼과 옷, 사랑, 슬픔과 시간과 영원이여!’라고 가톨릭 시인 브렌따노(Brentano)는 외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이것은 보다 ‘분명하고’ 그리고 보다 싸구려 말들이라는 수단에 의해 그들에게 설명해야 하는 것 없이 이해해야만 하는 바로 그 원초적 말들을 쏟아냄인가?”(pp. 297이하).
사람이 하나님의 언어를 말하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든 참되다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각 사물과 그분의 마음의 침묵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그 말씀을 크게 공표하는 창조의 시-사제일 것이다. “만물은 그 말씀에 의해 회복된다. 이것은 그 말씀은 사물들의 완성이다. 그 말씀은 사물들의 영적 몸이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처음으로 자기실현에 도달한다”(p. 300).
그러나 그 시인은 말들이 거짓된 명료함 안에 속박될 때 침묵하게 된다. 고귀한 사제 아담은 폭군이 된다. 폭군의 말들은 실현을 일으키지 않고, 오직 거짓과 이용만을 일으킨다.
성령은 우리를 또다시 거짓 명료함으로부터 이끌어 낸다. 그분은 부정확하고 신비한 모호함의 매력을 통해 우리를 안전하게 이끌며, 우리에게 참된 말들, 우리를 치유하고 하나님의 창조물과의 참된 관계를 회복시키는 말들을 가르치신다.
홀렌베거 교수의 연구가 제시하는 것처럼 오순절주의가 초자연적 종교보다 자연 종교의 재발견이라는 것이 옳다면, 이것은 또한 우리의 대화가 올바른 궤도 위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재확신 시킨다. 그리고 우리는 조지 캔티가 오순절주의자에게 방언으로 말하기는 실제로 창조론 전체 안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증언한다는 것을 기억해낼 것이다.
우리의 말들은 죄로 말미암아 부패되어 왔으며,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이나 우리 자신을 참되게 보지 못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말들은 선전문구들과 상투적인 문구와 일반적으로 선전활동에서처럼 명백하지만 거짓된 지혜 안으로 너무 그럴싸하게 미끄러져 들어간다. 또는 우리가 말들을 단지 침묵을 죽이는 것으로 사용할 때, 우리의 말들은 단순히 우리가 신비, 초월, 새로움을 계속 눈치 채지 못하게 한다.
마니네(Fr. J. P. Manigne)는 우리가 다시 말하기 방식을 배우고, 말들을 뒤틀고 억눌러야함 없이 사물들을 존재하게 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은 오직 말들이 또 다시 우리를 위해 불투명해 지고, 그래서 우리가 말들을 그 타고난 권리를 갖는 사물들로서 인식할 때라고 말한다.
단지 사람의 사물들에 대한 지배, 사람의 사물에 대한 전제적인 힘을 나타내기 때문에 힘을 갖는 말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말들은 그 안에 아무런 깊이도 평온도 갖지 않는데, 그 이유는 사람의 지배는 바벨탑처럼 반드시 무너지기 때문이다.
능력의 참된 말들, 하나님의 능력의 말들은 우리가 거만하게 “사실주의”라고 부르는 우리의 거짓 체계 안에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말들의 결핍과 연약함 안에서 우리가 그것들을 재발견하도록 기다리며, 호소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의 치유가 우리를 어리석음을 통해 지혜로 이끌며, 우리의 말들의 사용의 완벽한 재검토를 포함하는 이유다. 앞에서 인용된 에프렘의 찬미에서, 오순절의 제자들은 노래를 쏟아내는 작은 새들과 비교된다.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서 풀어놓아지는 말들은 원초적 말들, 새의 노래처럼 깊고 꾸밈없고 설명할 수 없게 우리의 피조물성에서 솟아나오는 말들이다. 원초적 말들은 그것들을 말하는 자들의 마음을 그리고 그것들을 듣는 귀를 가진 자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이상한 힘을 갖는다.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하기를 때때로 이상하게도 깊은 힘을 갖는 말들을, 그리고 새들과 짐승들의 “말들”과 일치하는 말들을 말하기와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해 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시 “마법”으로, 사물들을 조작하고 길들이기 위한 새로운 방식으로 합리화되지 말아야 한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새로운 말하기의 은사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가장 고귀한 은사들을 남용할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한다. 새로운 말하기는 확신하건데 “이 세상”에서의 새로운 힘으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다른 방언”, 새로운 말하기는 바로 새로운 세계에서, 이미 우리가 그분의 힘들을 미리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다른 세계”에서 편안하다.
이것이 왜 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말하기가 그렇게 전형적으로 실용의 노래가 아닌 찬미의 노래인 이유다. 하나님을 찬양함, 하나님에 만족함은 프란시스와 십자가의 요한에서 현저하게 발견되는 연합에 대한, 피조물 전체와의 하나 됨에 대한 깊고 본능적인 의식을 통해 모든 피조물들로부터의 과격한 분리를 역설적으로 접합하는 연결고리이다. 우리가 피조물들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진정으로 들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분리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우리를 우주적인 찬양에 합류하도록, 그리고 참으로 그 찬양을 이끌도록 자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3세기 후엽에 사이몬 스탁을 뒤이어 갈멜회의 원장이 되었던 프랑스의 니콜라스의『불화살』(Ignea Sagitta)에는 이것에 대한 보다 세련된 진술이 있다. 그의 라틴어는 베르나르드의 라틴어처럼 거의 번역이 불가능한 것이어서, 우리는 여기서 그 라틴 본문을 주해로 떨어뜨리면서 가장 단순한 의역에 만족해야만 한다. “우리의 삶의 황야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이 우리를 도우려고 온다. 하늘의 아름다움은 그 행성들과 항성들의 눈부신 정렬로서 우리를 하늘을 향해 끌어당긴다. 새들은 천사들처럼 우리의 위안을 위해 노래한다. 산들은 ‘달콤함을 떨어뜨리고’ 우리의 친구들인 언덕들은 젖과 꿀을 흘린다. 헛되이 이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것들을 결코 맛볼 수 없다. 우리가 창조주를 찬양하는 시편들을 노래할 때, 산들은 우아한 대위법으로 주님을 찬양하면서 우리의 합창단이 된다. 우리의 찬양에 유쾌해져 뿌리들이 커지고, 풀들이 푸르게 자라고, 잎사귀들은 나무들 위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즐거워한다. 꽃들은, 짙은 향기로 그득한 놀라운 꽃들은 우리의 황야를 위로하기 위해 우리에게 웃어주려고 노력한다.”
시는 정확하게 세속적인 “사실주의”에 의해 납득되지 않는 것에 의해 세상을 우리에게 나타낸다. 톨키엔(J. R. R. Tolkien)이 그렇게 도발적으로 제안했던 것처럼, 환상(fantasy)은 “예술의 가장 순수한 형태”이다. “환상은 사람의 권리를 남긴다. 우리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만들어질 뿐만 아니라, 조물주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분량만큼, 우리의 모방 방식으로 만든다.”
인간의 상상하기라는 “다른 세계”는 불법적인 도피와는 거리가 멀며, 톨키엔이 주장하는 대로 사물들의 본질 안에 있는 신적 진리와 대면하기라는 가장 확실한 방식들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 다른 세계 안에서, 새로운 언어들, 새로운 말하기의 가능성들은 매우 중요한 부분을 담당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톨키엔의 훌륭한 3부작에서 한 가지 특징만을 골라야 한다면, 우리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으며 각성시키는 한 가지 요소는 적어도 톨키엔의 창조적 상상력의 힘 전체가 집중되어 있는 점들 중의 하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서 요정 같은 시들을 우리가 잘 고르지 못한다는 것일 수 있지 않을까?
오, 엘베렛 길소니엘!
보석처럼 번쩍이며 아래로 드리워 하얗게 빛나는,
별무리의 영광이여!
오, 길소니엘 엘베렛!
그 안의 우리 자신의 세계와 언어는 “이 세상 임금”의 고용살이에서 너무도 훨씬 쉽게 구출된다. 아마도 성령께서는 오직 “다른 세계들” 안에서 “다른 방언들” 안에서 우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 자신의 언어를 보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 갑자기 그는 그 샘의 떨어지는 물을 통해 그를 보고 있는 흰옷 입은 한 사람을 알아차렸다. 그들의 눈이 마주쳤을 때, 새 한 마리가 나무 가지들 속에서 크게 노래했다. 그 순간 겟은 새의 노래를, 그리고 그 샘 웅덩이에 떨어지고 있는 물의 언어를, 그리고 구름의 모양을, 잎사귀들을 흔드는 바랑의 시작과 끝을 이해했다. 그는 자기가 햇빛에 의해 발해진 말이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 . 대마법사는 하나님을 바라보다가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지혜가 세월과 섬들 사이에서 유랑하고 있는 아주 나이 많은 노인처럼 중얼거리면서 겟이 이해하지 못하는 한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중얼거림 속에는 그 새가 노래했던 것에 대한, 그 물이 떨어지며 말했던 것에 대한 말들이었다. 그는 한 자도 쓰지 않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겟의 마음을 움직이는 어떤 힘이 있었다. 그래서 그 소년은 어리둥절해졌으며, 잠깐 동안 기묘하고 거대한 사막 한 가운데서 혼자 그늘 속에 서 있는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동안 그는 볕이 드는 뜰 안에서 그 샘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II. 찬미의 제사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시 49:23)
언급한 우리의 조사는 지금까지 처음 보기에는 가톨릭주의자들과 오순절주의자들 사이에 거의 혹은 아무런 견해의 일치점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보여 왔다. 왜냐하면 최근까지 방언은 우리가 배울 것이 많은 그리고 아마도 또한 줄 것이 많은 만남의 분야들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방법이 가톨릭주의자들과 오순절주의자들이 그곳에서 견해의 일치를 갖지만, 그러나 그것에 대한 정 반대의 이해를 갖는 것으로 보이는 보다 다른 상황 안에서 우리를 또한 도울 수 있다는 것을 보자. 가톨릭주의자들과 오순절주의자들은 적어도 침례와 주의 만찬이라는 두 가지 예전을 공통으로 갖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사실, 대화를 위한 기초로서 도움을 줄 수 있는 그것에 대한 충분한 동의조차 없는 것 같은, 그 두 가지와 관련된 실천과 교리의 중대한 점들이 존재한다. 오순절주의자들은 가톨릭을 향한 호의를 가질 때조차도 우리의 세례 행위가 성례적 효험에 대한 마법적 견해를 담고 있지 않다고 보기가 어렵다고 느낀다. 반대로 우리는 오순절주의자들 가운데서 세례를 요한의 “물 침례”로 명백하게 축소시키는 경향에 의해 심하게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마찬 가지로 오순절주의자들은 화체설과 그에 수반되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 반면에 우리는 오순절주의자들 가운데서 성체성사의 완전한 주관화라고 보이는 것에 의해 아주 당혹스러워 질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저 격리된 현상이 아닌, 오순절주의와 가톨릭 종교의 구조 전체를 보다 깊게 본다면, 그 문제는 보다 다루기 쉽게 될 것이다. 우리의 어려움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가톨릭적 세례 행위의 보다 타당한 상관물은 반드시 오순절적 침례 행위일 것이라는 등등의 가정에서 온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그렇지 않다.
비록 홀렌베거 교수의 권위 책에서 성례들에 대한 장이 어떤 오순절 교회들의 발 씻기 행위에 대한 짧은 언급과 함께 대부분 주의 만찬과 침례에 할애되어 있다할지라도, 이것은 참으로 상당히 오해하기 쉬운 것이다. 왜냐하면 오순절주의자들에게는 침례나 주의 만찬은 적어도 가톨릭 신학에서 통용되고 있는 “성례”라는 말의 그 어떤 의미에서가 아니라도 결코 성례(sacraments)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법령에 의존하는 하나님의 행위로 간주되지 않고, 사람의 행위로, 사람의 믿음과 순종의 표징들로 간주된다. 이것은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은혜의 진정한 업무들로 간주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가톨릭적 의미에서 성례들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순절주의의 침례를 이해하려면, 병자 치유보다는 그것의 회개 측면에 보다 강조점을 두는 루데스의 순례자들의 침수를 고려하는 것이 보다 나을 것이다. 적어도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오순절주의자들이 침례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것에 보다 더 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오순절 목사들의 손에 의해 재침례받으려는 가톨릭주의자들이라는 긴급한 목회적 문제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길을 찾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한 편으로, 오순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성례성에 대한 강한 의식을 갖고 있다. 그들에게 유아세례는 보통 의미를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아들이 회개하거나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유아세례는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례를 단지 사람의 행위로 보지 않고, 신적 행위, 유아들이 회심한 순종하는 신자로 자랄 수 있는 여건을 창조해내는 하나님의 행위로 보기 때문이다. 유아세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총의 선행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반영한다. 그런데 오순절주의자들도 하나님의 은총의 선행을 믿지만, 그들은 그것이 성례적 세례에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아주 깊은 차원에 있는 사람의 마음에 닫고 그 후 명백한 열매를 맺기를 열망하게 하는 설교의 말의 효력에 의해 입증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으로 말하기의 성례성을 믿는다. 나는 그것이 그들에게 방언으로 말하기는 성례에 대한 완전한 가톨릭적 의미에서 성례라고 제안하는 것은 너무 잘못된 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성례 안에서 방언으로 말하기는 행하라고 사람들에게 주어진 사람의 행위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믿음에 따르면, 방언으로 말하기에서 우리는 명료하게 그리고 유보 없이 하나님 자신의 행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성육신된 말씀은 모든 성례들의 기초다. 그래서 모든 성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의 위격적 연합위에 세워지는 사람과 하나님의 연합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캔티에 따르면, “오순절에 하나님과 사람은 그 은사적 언어 안에서 하나로서 함께 즐거워한다. ‘방언으로 말하기’는 신부가 신적 신랑의 품에 안기는 것을 의미하며, 그분 안에서 완성된다. 성령 침례는 자연의 이중적 본질을 계시한다”(pp. 14이하. 나는 캔티가 무슨 의미로 이 말을 하는지 확신하지 못하지만, 문맥에서 볼 때, 피조된 본질이 신적 본질과 연합될 수 있는 능력을 언급하는 것 같다. 그가 말하는 것처럼, 그 능력은 “그리스도의 이중적 본성에서 드러내지지 않는 비밀일 것이다.)
오순절적 “성찬식적” 헌신들은 얼마간 수난에 대한 가톨릭적 고찰들을 생각나게 한다. 오순절주의자들에게 보통 성찬식은 단순히 갈보리에 대한 기념이다. 성찬식은 그리스도의 희생에서 하나님의 행위의 참된 현존을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거룩한 성찬조차 그리스도와의 참되게 체현된 친교가 아니고, 오직 영적 친교의 상징에 불과하다. 오순절주의자에게 진정으로 하나님의 행위를 여기에 지금 현존하게 체현시키는 것은 방언으로 말하기이다.
그리고 방언 말하기가 완전히 감정주의라고 가정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감정은 내포될 수도 있지만,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필수적인 태도는 신뢰다. 그들의 관점에서, 바로 여기에 하나님 자신에 의해 확인된, 그래서 안전한 하나님의 행위가 있다. 방언 말하기는 신자에게 자신의 반응에 대해, 자신의 참여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며 단지 하나님 안에서 쉴 수 있는 때를 제공한다. 만약 감정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이런 하나님 안에서 쉼에서 오는 것이며, 그러므로 보통 진정한 것이며, 자발적인 것일 것이다.
이제 우리가 오순절주의자들은 이 방식으로 방언을 신뢰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쉬울 것이다. 적어도 어떤 오순절주의자들 자신이 깨달아 왔던 것처럼,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며, 예를 들면 물론 실제로 귀신적인 것일 정령 종교에서도 발견된다. 그리고 사회학과 심리학은 또한 다른 위험요소들을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방언은 단순히 특별한 집단과 관계시키려는 억압된 결핍의 표현일 것이다. 또는 이것은 영적으로 한 걸음 앞서기에 대한 관심에서, 예를 들면 어떤 방식으로라도 특별히 신 오순절주의와의 관련해서 일어나는 모험들에서 사용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오순절주의자들이 우리의 성례들을 신뢰하는데서 오는 위험들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은 똑같이 쉬운 것이다. 우리는 게으르고 자기만족적인 방식으로 성례들의 객관적인 충분성 안에서 쉴 수 있을 것이다.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그저 모든 것을 주관화 하는 것, 그리고 모든 강조를 적극적인 참여와 온전한 포함에 두는 것은 충분한 대답이 아니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 세 째 성찬 기도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부께 드리는 선물이다.
르끌레르끄(Dom Jean Leclercq)는 “제단의 신비”(Le mystère de l'autel)에서 낙원에서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쉬운 의사소통이 한 번 죄에 의해 깨어지자, 이 소통은 오직 하나님의 주도에 의해서만 회복될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한 상징적인 제단을 주심으로써 주도하셨다. 낙원에서 사람은 제단, 하나님의 사람에게 자기-주심에 응답으로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바치는 것에 대한 아무런 상징도 필요 없었다. 그러나 이제 사람은 제단, 상징이 필요하다. 그는 하나님의 제정에 의해 희생으로, 자기 봉헌으로 간주할 것을 행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는 그는 자기 자신을 바칠 수 없으며, 자기 자신을 바칠 수 있는 방법도 찾을 수 없다. 다른 모든 제단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 명확하게 발생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하며 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며 사람이신 분 안에서 완전하게 성취된 사람의 자기-바침 안에서 회복된 연합에의 우리의 참여를 표시할 상징적 수단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우리의 자기-바침으로 삼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제정에 의해 우리의 자기-바침으로 간주하는 상징적 행위들은 단지 우리 자신에 의해 선택되고 지정되지 않은 행위들이어야만 한다. 그 행위들은 참으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행위들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행위들 안에는 아무런 접촉점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들은 그 어떤 의미에서도 그 행위들의 타당성과 효력을 위해 우리 자신에게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그 타당성 개념이 성례들에 대한 모든 논의에서 그렇게 중요한 이유이다. 그 타당성 개념은 객관성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성례적 행위가 수행되고 있는지, 되지 않고 있는지에 대한 모든 정당한 의심을 초월하여 아는 것이 가능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정들, 또는 가치, 또는 그 무엇이든지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며 믿음 안에서 참으로 안식할 수 있어야 한다.
오순절주의자들은 바로 이 정신 안에서 방언으로 말하기를 우리 자신의 노력과 무관한, 하나님께서 찬미의 제사로 받아들이는 인간의 행위로 평가한다. 우리가 실제로 어떤 자범죄나 우리 자신의 죄된 목적에 의해 그것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한, 방언으로 말하기는 “정당”하며, 적어도 그것 스스로를 감독하는 것은 신뢰받을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성례들의 객관성을 너무 가볍게 다루지 않는 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인 가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성례들은 마법적이지 않으며며, 우리가 우리의 다른 행위와 태도들로 그것들을 끊임없이 부정한다면 그것들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특별한 교정은 본질적으로 끝나지 말아야 한다(결국 우리가 진정으로 교회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교회는 언제나 상투적인 말로 “교회가 보충해준다”(ecclesia supplet)를 주장해 왔으므로 아주 불필요한 온갖 걱정의 원인이 되는). 사실, 이것은 우리를 걱정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평온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행위를 신뢰하면서, 그것을 우리 안에서 생명, 희망, 힘과 기쁨의 원천으로 삼으면서 편안해 질 수 있어야 한다.
방언이라는 오순절적 “성례”는 의식 안에서 안식의 잘못된 방식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거기에는 예를 들면, 방언이 한 사람의 바라던 집단과의 일체화 느낌을 강화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때처럼 잘못된 방향이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적어도 부분적으로 복음주의자들을 괴롭히기 위해 “미사에 가려는” 앵글로-가톨릭 유혹 또는 서로의 삶을 나누기 위해 하나님과 사람의 놀라운 교제(admirabile commercium)에 참여하려하기 보다는 자기 나라 말에 대한 항의로서 라틴 미사에 가려는 라틴 애호가 유혹과 같지 않을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거기에는 큰 만족감, 심지어 일종의 평안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히 하나님 안에서 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위험요소들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성례전에서 필수적인 것은 우리가 그 안에 주입하는 것(또는 심지어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고 계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판단을 잃도록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본적 반응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 만족과 같은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표면 아래를 보는 것은 우리가 발견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대화의 한 영역을 드러내는 것 같다. 그 영역은 참으로 우리 자신의 가톨릭성을 위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오순절주의자들과의 교회 일치적 관계들을 위해서도 무언가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가리킨다. 그것에서부터 우리는 방언으로 말하기를 배울 수 있거나 배울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방언으로 말하기를 배운다할 지라도, 우리는 방언 말하기가 가톨릭주의의 전체 맥락에서 우리의 이익이나 불이익을 위해 불가피하게 다르게 작용할 것이라는 것, 그래서 이것은 교회 일치적 중요성이 거의 없을 수 있다는 것, 우리가 오순절적 방언으로부터 가톨릭적 방언에 대해 배울 것이 거의 실제로는 거의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우리가 확실하게 우리의 대화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성례들을 주관화하려는 그리고 우리 스스로 선택하는 온갖 종류의 이차적 의미를 그 성례들 안에 끌어들임으로써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경향에 굴복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격려이다. 그 대신에 우리는 하나님의 지정에 의해 거기에 있는 의미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례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돌보게 해야 한다. 성례들은 그 안에서 사람의 말들이 말해지는 사람의 행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성례들은 또한 그것에 의해 우리가 사람의 행위들이 단순한 자기-주장을 넘어서는 한에 있어서만, 그래서 그 뿌리를 하나님 자신의 행위에서 발견하는 한에 있어서만 오직 완전히 사람의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는데 이를 수 있는 수단일 것이다. 그리고 오직 그런 사람의 말들이 스스로 성부의 침묵으로부터 영원히 나오는 하나님이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한에 있어서 우리의 유익과 복을 위해 그리고 피조물 전체의 유익을 위해 중요성을 지닌다.
This essay is based on a talk given on January 25, 1975, at Mount St. Benedict, Trinidad. I am grateful to Fr Bernard Vlaar (now the Abbot) for inviting me to speak there and for affanging to have my talk taped and transcribed; and to Mr Mrs Cuthbert Mejias and Miss Jean Gomez for actually doing the transcrib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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