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ngues as a Sign: Towards a Sacramental Understanding of Pentecostal Experience
프랑크 D. 마키아
Frank D. Macchia)
이창승 역
PNEUMA Vol. 15, No. 1, (Spring 1993): 61-76.
사이몬 턱웰(Simon Tugwell)은 대부분의 정통 오순절주의자들은 침례와 주의 만찬을 “성례전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턱웰에게, 오순절주의자들 가운데서 침례와 주의 만찬 의식은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임재의 가시적 표적들(visible signs)로 기능하는 대신, 회개라는 인간의 행위와 신앙 간증과 더욱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것은 오순절적 방언 말함에 대한 턱웰의 “성례전적”(sacramental) 성격의 인식이다. 그는 오순절주의자들에게 방언은 여기서 지금 하나님의 임재를 표시했다(signified)는 것에 주목했다. 방언은 단순한 감정주의를 대표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오순절주의자들에게 특별하고, 청취가능하게 증명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임재하심을 의미한다. 턱웰은 가톨릭교회의 일원으로서 오순절적 예배의 그런 국면에 편안함을 느꼈고, 방언이 미래의 오순절과 가톨릭의 대화를 위한 효과적인 출발점을 제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윌리암 사마린(William Samarin)이나 발터 홀렌베거(Walter Hollenweger)와 같은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glossolalia)의 오순절적 사용에 있어서 어떤 성례전적 요소에 주목해 왔다. 사마린은 오순절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방언은 예전적 공동체들에서 주의 만찬(the eucharist)에 대한 반응에서 정상적으로 느끼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고도의 인식”(heightened awareness of God's presence)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성스러운 것의 언어적 상징으로서 방언은 “하나님께서 여기 계시다”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홀렌베거는 방언이 고딕교회적 환경에서 예배드릴 수 없는 처지의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장엄한 임재를 지시하는 측면에서 “가난한 자들의 대성당”(the cathedral of the poor)이라고 도발적으로 말했다.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례”(sacrament)라는 말에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용어가 성령의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 또는 “형식적인”(formalistic) 예전 전통들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개신교(특히 즈빙글리)의 성례주의에 대한 비판의 영향으로, 많은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례”라는 용어의 사용은 원인론적이고 역학적이고 본질적인 것에 의해 그 요소들에 수반되는 것으로서 성례전적 효력에 대한 이해를 포함할 것이라는 것과 그것이 성령의 자유 또는 하나님의 은혜를 제도화하거나 형식화할 것을 염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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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믿음은 오순절주의자들에게 성령에 의해 신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하나님의 비중재적 은혜로운 임재에 대한 그들의 소중한 믿음에 대한 부인을 의미할 것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은 하나님 경험에 대한 그런 견해를 계속 유지할 것인가? 모르톤 켈시(Morton Kelsey)는 긍정적으로 대답할 것이다. 그는 오순절주의는 비중재적이고 직접적인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옹호한다고 믿고 있다. 켈시에게 방언은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직접성은 이성적이고 예전적 중재 형식들을 거치지 않는 것이다. 동일한 의미에서 칼 라너(Karl Rahner)는 “열광적”(enthusiastic) 예배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제도적이고 합리적인 성례전적 중재 형식들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에 의해서 가능한 제도적 갱신을 위한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 경험을 얻는 한 방법으로 보았다. 그런 견해들은 성례전적 중재를 위한 예전 형식들을 피하고, 심지어 의문시 하는데 있어서 방언이 수행하는 역할에 우리의 주의를 적절하게 이끌어 준다. 그러나 그런 견해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일으키는 청각적 방법으로 그리고 “성례전적”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방언의 역할을 충분하게 고려하지 못한다.
위에서 언급된 “성례”(sacrament)라는 용어에 대한 오순절적 염려들은 역사적 혹은 신학적 근거를 전혀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순절주의는 온건과 급진 종교개혁과 경건주의운동으로부터 하나님의 영의 제도화나 형식화의 위험성에 대한 날카로운 의식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런 염려들은 일방적이고, 주로 성례에 대한 신 스콜라 가톨릭적 이해와 관련하여 정당화된다. 성례에 대한 신 스콜라 가톨릭적 이해는 칼 라너(Karl Rahner)나 쉴레벡스(E. Shillebeeckx) 같은 현대 가톨릭 신학자들에 의해 철저하게 비판받아 왔다.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그런 보다 최근의 가톨릭 성례전신학은 성례들을 주로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인격적 만남(personal encounter)을 위한 기회들(occasions)로 본다. 라너는 성례의 효력을 요소들에 의해 수반되는 일종의 물질적 원인에 두지 않는다. 도리어, 그는 성례의 효력 문제를 성례의 표징적 가치(sign value of sacrament)의 정황에서 다룬다. 그런 재정의는 라너가 경험되어야 할 다른 실제(reality)에 대한 지적 언급으로서 표징(sign)에 대한 지극한 단순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라너에게, 지시된 실제는 지시 과정에서 시각적 표징을 통해 현존하고 경험된다. 지시된 실제는 지시 과정에서 현실로 나타난다. 그것은 마치 “영혼”으로서 우리가 “몸”으로 현존하게 되는 것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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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종말적 임재는 성례적 지시를 통해 신자들 가운데서 실현된다. 우리는 그 유비를 성례적 지시(sacramental signification)가 그 안에서 구체화된 영혼으로서 우리가 언어에 의해 다른 사람들에게 현존하게 되는 방법과 유사하다고 말하는데 까지 확대할 수 있을까? 오순절주의자들은 하나님을 방언적 지시(glossolalie signification)를 통해 독특하게 현존하는 분으로 보지 않는가?
성례에 대한 라너의 견해는 오순절주의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방언을 신자들에게 봉사를 위해 능력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실현을 위한 중요한 매개수단(medium)으로 이해하는 이유를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지 않겠는가? 아마도, 방언과 관련된 “성례”라는 용어에 대한 오순절적 평가는 하나님의 능력부여를 “현존 시키는”(making present) 의미에서 방언에 지시적 역할(role of signification)을 아낌없이 부여하면서 하나님의 주도(divine initiative)에 대한 강한 강조에 의해 도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하나님의 자유스런 자기 현시(free self-disclosure)와 그 안에서 그런 자기 현시가 상응하는 기회가 되는 물질적/청각적 실제 사이의 필수적 관계에 대해 언급했던 것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틸리히는 하나님의 계시와 물질적/청각적 표징 사이의 필수적 관계는 하나님께서 그 표징을 자신의 자기 현시로 채택할 때 하나님의 주도에 의해 실현된다고 주장한다. 틸리히는 그 과정을 “카이로스” 사건이라고 부른다.
방언은 오순절주의자들에게, 비록 우리가 성례를 폭넓은 또는 유비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을지라도, 라너와 틸리히의 “성례”에 대한 서술들과 유사한 방법으로 작용한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오순절주의자들에게 성령침례의 경험에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능력부여와 치유를 위한 하나님의 임재를 실현시키는 청각적 매개수단이다. 그런 성례적 중요성에 대한 이해에는 성령침례의 최초 증거로서 방언의 역할에 대한 오순절적 이해에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그런 통찰들을 통해 우리 자신의 영성에 관한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들의 예언적 전통들에 대한 거부감은 최근의 성례 신학들로부터 얻은 통찰들을 오순절적 전통들에 가입시키기 위해 무시되거나, 쉽게 열광주의로 처리되지 말아야 한다. 방언은 형식화되고 구조화된 예전들과는 다른 종류의 “성례”다. 방언은 하나님의 영의 자유롭고, 역동적이고, 예기치 못하는 움직임(free, dramatic, and unpredictable move of the Spirit of God)을 강조한다. 반면에 예전적 전통들은 성령과의 질서정연하고 예기할 수 있는 만남(ordered and predictable encounter with the Spirit)을 강조한다. 예전적 예배에 대한 오순절주의자들의 과민한 반응은 일방적일 수 있지만, 그러나 예배에서의 성령의 자발성과 자유에 대한 귀중한 강조를 드러낸다.
오순절적 예배에는 예전적 의식들 안에서 그 어떤 성령의 형식화나 사물화 시도에도 대항하기 위해 대상화된 (objectification) “무질서한”(chaotic) 혹은 “미발달의”(inchoate) 성례인식(sacramentality)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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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통찰은 오순절주의자들 가운데서의 침례와 만찬이라는 예전적 의식들에 대한 비성례적 접근을 설명하는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또한 방언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현시 안의 성례전적 요소의 존재를 설명하는데도 도움을 준다. 필자는 가톨릭과 개혁 신학자들 사이의, 특별히 성령침례의 최초의 증거라는 방언의 기능과 관련된, 대화중에서 하나의 성례전적 표징(a sacramental sign)으로서 방언에 관한 숙고는 오순절 신학과 영성에 많은 공헌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사도행전 2장 4절의 방언이라는 역동적 표징은 2장 42절의 신자들 가운데서 “떡을 뗌”(breaking of bread)이 뒤따른 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례적 전통들은 사도행전을 읽으며 떡을 뗌을 강조할 것이고, 반면에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을 강조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다양한 사도행전 2장 읽기들에서 서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사도행전에서 최초 증거로서 방언
Tongues as Initial Evidence in the Book of Acts
성령침례에 대한 “최초 증거”(initial evidence of Spirit baptism)로서 방언은 아마도 정통 오순절 신앙에 있어서 가장 불가해하고 논쟁적인 것일 것이다.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에게 방언은 사도적 표적(an apostolic sign)으로 이해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 표적은 오순절 신자들을 봉사를 위한 최초의 사도적 기름 부으심과 연결시켜 주는 봉사를 위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의 증거를 지시한다(signal). 그런 증거적 논리를 위한 주석적 논거는 사도행전 2장에 등장하는 오순절의 최초의 유대적 성령침례에서 방언의 현저함에 기초를 둔다. 주요 이방인 성령침례 사건들(행10, 19)에서 방언의 출현은 성령에 대한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경험을 뚜렷하게 연결한다. 사도행전 10장 44절에서 46절은 이방인 성령침례를 오순절 날의 최초의 유대인들의 경험과 연결시키는데 있어서 중요하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방언 양식”(pattern of tongues)을 주장해왔다. 그 양식은 위에서 언급한 초기 유대인과 이방인 공동체들 사이의 현저한 연결들의 본질을 포함한다. 그 양식은 참으로 사도행전에 방언과 성령침례 사이의 특별한 연결이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 연결은 널리 행해지고 있는 오순절 예배에서 추구되고 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에 대한 초기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연결시켰던 사도행전 양식의 일부에 참여하기를 원한다. 오순절주의자들은 그 고대 공동체들에 연결됨으로써 자신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바란다. 최초 증거로서 방언은 그런 예배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장 낯설고 위협적인 것이 된다. 그런 “무질서”는, 질서를 위한 필요를 제처 놓고, 성령은 우리의 완전한 통제 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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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는 지속될 수 있다. 오순절주의자들이 그 결론에 도달했던 과정은 그것이 오순절적 예배의 정황에서 사도행전과의 창조적인 상호작용인 것인 만큼 성경 해석에 대한 합리적이고 귀납적인 방법은 아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사도행전을 존속시키려는 그들의 노력에서 한 양식을 발견해 왔다. 그들은 그 양식으로서 성령이 자유와 능력으로 움직이실 때 예배 가운데서 어떤 것을 기대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기본적인 기대는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봉사를 위한 능력을 부여하실 때 발생하는 방언이다.
성경 이야기로부터 신학적 결론을 이끌어 내는 오순절주의자들의 관례는 더 이상 주요 논쟁점이 아니다. 논쟁점은 사도행전 이야기로부터 방언 양식을 이끌어 내오는 것의 정당성 여부다. 에드워드 슈바이처(Eduard Schweizer)는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성령의 경험을 어떤 이데올로기나 교회 관례에 의해 사전에 결정하려는 어떤 해석도 거부한다고 주장했다. 누가에게 성령은 예수 이야기가 말해지고 믿음에 의해 받아들여질 때마다 새롭게 경험된다. 사도행전을 위한 성령의 경험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예수 이야기다. 성령은 오직 기독론적 결단에 따라 움직이신다. 슈바이처는 예수와 초대 교회 사이에서 “경험의 유비”(analogies of experience, Erfahrungsanalogien)을 발견한다. 그 경험의 유비는 성령이 경험되는 순간마다 성령에 의해 새롭고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창조되었다. 그런 유비는 슈바이처가 근본적으로 사도행전에 반영된 경험의 양식을 반대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 경험의 양식은 초대 교회 공동체들에게 예수와, 확대하여, 자신들 가운데서 어떤 밀접한 유대감을 준다. 슈바이처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적절한 기독론적 결단을 무시하고 성령의 움직임을 결정지으려는 인간의 형식적인 노력들을 거부하고 있다.
방언은 슈바이처가 주장한 성령에 의해 예수와 교회 사이에서 창조되는 경험의 유비의 관점에서 고찰될 수 있는가? 베드로가 부활 때 예수의 마음이 기뻤고 그의 혀는 즐거워했다는 2:26절의 진술로서 사도행전 2:1-13의 성령침례/방언 현상에 대해 반응했다는 것은 흥미롭다. 누가는 사도행전 2:4절의 사도적 방언이 예수의 즐거운 혀의 유비였음을 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증거 방언은 누가에게 있어서 급박한 파루시아와 자신의 부활 전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서 자신의 임박한 승리를 즐거워했던 그리스도의 승리의 예기로서 유대와 이방 교회들의 찬양들 사이에 어떤 유비를 제공함으로써 특별한 역할을 수행하지는 않는가? 그 질문들에 긍적적으로 대답하는 것은, 비록 그런 보다 급진적인 행보가 방언을 흉내 냄으로써 또는 그 은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성 판단을 내림으로써 성령침례 받음을 보증 받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오순절주의자들에 의해 존재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을 부인하는 성령에 대한 고정된 이데올로기나 사이비적 법(cultic law)을 창조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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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주의자들은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다양한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성령에 대한 경험들 사이에 분명하고 기독론적으로 확정된 연결들을 부여하는 데 도움을 주는 방언의 특별한 역할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런 분명한 연결들을 고무시키는 성령의 역사와 그 역사에 참여하려는 믿음의 성향은 다양한 교회들에게 공간과 시간의 간격을 넘어 예배 속에서 뚜렷한 유대감을 부여한다. 그런 분명한 연관은 우리의 하나님과의 만남에 “성례적” 속성을 부여한다. 성령의 임재를 묶고 보증하려는 목적을 위한 어떤 일정한 법으로 발전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가능하다. 그 임재가 방언에서 실현되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대신 방언을 신뢰하려는 유혹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런 유혹은 성령에 대한 그 어떤 성례적 경험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오순절적 예배에서 최초 증거는 그런 식으로 해석되지 말아야 한다. 성령에 대한 다양한 경험들 가운데서 사도행전의 뚜렷한 지속성은 성령을 조종하려는 이데올로기적 또는 제도적 시도들과 동일한 현상이 아니다.
물론 방언은 사도행전에서 성령에 대한 경험들로 인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유일하고 분명한 연결은 아니다. 거기에는 신유와 같은 다른 은사적 표적들(charismatic signs)이 존재한다. 그 은사적 표적들은 누가에게 있어서 교회의 다양한 증거 안에서 그리고 그 증거를 통해 성령의 자유와 능력을 드러내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의 능력부여를 의미하는 은사적 표적들 가운데서 방언에 우월성을 부여한다. 헤르만 궁켈(Hermans Gunkel)과 제임스 던(James Dunn) 처럼 누가가 성령에 대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험들을 연결하는 특별한 역할을 방언에 부여하는 것 같다고 주장해온 비 오순절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누가에 의해 방언에 부여된 그 역할은 진위가 의심스러운 오늘의 교회에 아무런 신학적 의미가 없는 누가 신학의 열광적 요소로 추정되어 왔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사도행전을 다르게 읽어왔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최초 증거 양식에 대한 논쟁은 누가의 본래 의도나 신학에 관한 질문으로 그칠 수 없다. 성경 이야기를 읽는 과정과 그 다양한 요소들과 상호작용하는 것은 저자/편집자의 본래 의도에 대한 단순한 역사적 탐구보다 더 복잡하고 창조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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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오순절주의자가 성령의 “표적들”이나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들으면, 즉시 오순절의 불의 혀 같은 격렬한 경험을 떠 올린다. 우리가 언급해 온 것처럼, 사도적 떡 뗌에서 발견될 수 있는 사도행전 2장의 다른 표적들의 질서에 대한 누가의 언급은 중요하다. 그 사도적 표적은 오순절의 하나님에 대한 격렬한 경험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임재의 극적인 현현이 아니다. 그것은 맹렬한 바람 소리의 정황에서 등장하는 불의 혀와는 사뭇 다른 외침이다. 그러나 떡을 떼는 것은 사도행전 2장에서 그 어떤 신학적 해석이나 설명 없이 방언 같은 극적인 표적들과 나란히 놓여진다. 오순절 신학자들로서 우리의 직무는 그것들을 통합하는 것이다.
최초 증거를 위한 신학적 토대
그래서 우리의 논의는 여전히 오순절주의자들 가운데서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최초 증거 교리에 충분히 이르지 못했다. “최초” 그리고 “증거”라는 용어들은 사도행전의 증언에 기초하면서도 그것을 넘어 서는 신학적 뉘앙스를 풍긴다. 최초 증거는 오순절주의자들에 의해 오직 성경적 근거 위에서 방어된 적이 없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고립된 사도행전 본문들에 대한 극히 단순한 해석으로 완전히 개화된 최초 증거 교리를 이끌어 낸다는 비난은 지극히 단순한 것이다. 필자는 심오한 역사적이고 신학적 영향력들이 오순절주의자들 가운데서 최초 증거의 역할에 공헌해 왔다고 믿는다. 이것은 그 어떤 교회의 예배나 성례전적 전통에게도 해당되는 것 아닌가? 만약 주요 교단들의 대표자들이 성찬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오직 신약 성경의 증언에 기초해서 방어하려 할 때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제기될 수 있는지 상상해보라.
신학적으로 오순절주의자들은 보통 성령침례와 방언 경험 사이의 필수적 관계에 의해 최초 증거를 정당화 시켜왔다. 가스톤(W. T. Gaston)은 1918년에 “방언은 성령침례라는 보다 넓은 경험에 포함되고 고유한(inherent) 것인 것 같다”고 말했다. 도날드 존스(Donald Johns)는 동일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대적 주장자들을 대표한다. “나에게 방언 말하기는 본질적으로 성령과의 접촉에서 일어나는 경험의 일종인 것 같다. 그런 접촉이 최초로 발생하는 때는 성령으로 침례 받음이라는 입문적 사건(initiatory event)이다. 존스에 의하면, 방언이라는 경험을 일으키거나 포함하고 있는 성령과의 접촉은 성령의 인격과 능력에 의한 인간의 영혼의 저항할 수 없는 잠김(overwhelming immersion) 또는 침례이며, 인간의 능력 범위를 넘어서는 경건한 반응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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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은 방언을 성령침례를 통한 성령 안으로의 잠김에 필수적인 전인격적 양도(necessary yielding of the total person)로 보아왔다. 여기서 가정된 것은 전인격 혹은 성령침례라는 압도적인 경험에 의해 수반되는 일종의 항복에 최후까지 저항하는 가장 하나님께 굴복하기 어려운 “혀”를 표현하는 언어의 힘이다. 필자는 방언을 성령의 자유롭고 초월적인 움직임에 대한 자유롭고 초월적인 반응으로 그려왔다. 머레이 뎀스터(Murray Dempster)는 방언을 성령침례에서 하나님께서 행하고 계시는 것을 지시하는, 즉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증거 하는 새로운 통합된 공동체를 창조해내는 새 언어(new language)로 본다. 방언과 성령침례 사이의 필수적인 관계들에 대한 목록은 더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오순절주의자들이 일시적인 외적 법에 의해 방언을 성령침례와 연결시켜온 것이 아니라, 방언을 그 경험의 필수적 국면으로 포함시키는 성령침례신학을 통해 연결시켜 온 것이다. 이것이 오순절주의자들이 방언이 아닌 성령이 우리의 하나님과의 만남의 증거라는 람세이 미첼(J. Ramsey Michaels)의 주장을 낯설게 느끼는 이유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침례에 있어서 방언을 성령에 대한 최초 경험과 떼어 놓을 수 없다. 이 점을 통해 우리는 왜 도날드 기(Donald Gee)와 같은 정통 오순절주의자들이 만약 최초 증거 교리가 포기되면 성령에 대한 오순절적 경험의 영광과 능력이 떠날 것이라고 주장하는 지 이해할 수 있다.
오순절주의자들이 가시적/청각적 현상(visible/audible phenomenon)을 성령에 대한 그들의 경험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삼으려 하는 것은 흥미롭다. 이것은 “증거적”보다는 “성례적”이지 않은가? “증거”(evidence)라는 용어는 오순절주의자들이 방언과 성령침례 사이에 설정하는 연결들에 의해 함축된 신학적 뉘앙스들 모두를 포착하기에는 너무 과학적이고, 극단적이고, 피상적인 것 같다. “성례”라는 용어는 표적과 그것에 의해 지시된 하나님의 행위 사이의 필수적 관계를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한 표적으로서 사용되는 물질적/청각적 실제 사이의 필수적 관계를 함축하는 성례적 요소의 기독교적 필요에 관한 폴 틸리히의 주장을 주목해 왔다. 틸리히에 따르면, 개신교 전통에 의해 가장 지속적으로 적용된 “개신교 원리”(Protestant principle)는 성령의 자유에 대한 극단적 강조에 의해 기독교의 성례적 요소를 뿌리 뽑으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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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히에게 심지어 개신교 원리는 가시적 형식들로 인한 성령의 “악마적”이고 우상적 대상화(objectification)를 피하기 위한 시도로서 표적을 하나님의 자유스런 자기 계시와 통합하는 합당한 성례적 요소를 위협하기 조차한다.
사실, 틸리히의 “카이로스” 사건이라는 개념은 형식 자체로 하나님의 행위를 악마적으로 대상화하는 것과 가시적 형식으로부터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분리시키는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극단적 개념 사이에 길을 놓으려 한다. 틸리히의 생각에, 카이로스 사건은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가시적인 인간 반응을 취하실 때 발생한다. 비록 하나님은 카이로스 사건에서 사용되는 인간이나 피조물적 현상과 결코 동일시 되지 않지만, 그 현상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행위에 참여하도록 허락된다. 이런 성례전적 의의에 대한 이해는 “임재를 산출해내는 것”(making present)과 의미를 관련시키는 표적들에 대한 사상을 세우려는 최근의 노력들과 모순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주도와 자유가 주목받는다.
필자는 오순절주의자들이 방언을, 틸리히가 언급한 성례적 요소의 중대한 국면으로서, 이런 의미로 이해한다고 믿는다.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을 그 안에 참여하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서 성령의 능력부여를 지시하는 일종의 원초적 성례 또는 카이로스 사건으로 간주한다. 방언은 토마스 바렛(Thomas Barratt)에 따르면 “기독교 교회의 새로운 표적”(new sign of the Chrisitan Church)이고, 에드워드 어빙(Edward Irving)에 따르면 그곳으로부터 다른 모든 영적 은사들이 자라나는 “뿌리와 줄기”이고, 단일성 오순절주의자 할(J. L. Hall)에 따르면 “새 언약의 영적 휴식”이다. 만약 그런 특성들이 성례전적이 아니라면, 그 무엇이 성례전적이란 말인가?
필자는 “성령의 자리”(the place of the Spirit, Ort des Geistes)로서 교회에 관한 발터 카스퍼(Walter Kasper)와 게르하르트 샤우터(Gerhard Sauter) 사이의 가톨릭/개신교 논의를 기억한다. 그들은 은혜의 가시적 수단들에 대한 가톨릭적 강조와 성령의 주권과 자유에 대한 개신교의 강조 사이의 긴장을 논의했다. 그 논의는 실제로 성령의 자유와 성례전적 은총 수단들에 대한 극단적 강조 사이의 전통적 난점(impasse)을 극복하기 위한 지난 수 십 년 동안의 보다 넓은 가톨릭/개신교의 시도의 일부일 뿐이다. 틸리히는 그 난점이 교회일치신학을 위한 중심 과제가 될 것이라고 예견 했었다. 예를 들면, 개혁주의 신학자 제임스 화이트(James F. White)는 개신교는 우리 인간은 그런 수단들을 필요로 한다는 칼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가시적이고 실체적인 수단의 필요성을 간과해 왔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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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칼빈은 우리 모두가 틸리히에 의해 묘사된 가시적 은총 수단과 성령의 주권적 자유 사이의 난점을 극복하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틸리히가 한탄했던 개혁주의 신학으로 하여금 "개신교 원리"의 극단적 사용에 가장 취약하게 만든 것은 바로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쯔빙글리의 영향이었다.
필자는 최초 증거에 내포된 오순절주의의 예전적 영성은 우리로 하여금 틸리히가 언급한 난점을 극복하도록 도울 수 있다고 믿는다. 방언은 전형적인 개혁주의적 강조, 또는 틸리히가 "개신교 원리"(Protestant principle)라고 언급했던 성령의 자유와 종교적 경험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도의 중요성에 대한 철저한 강조를 의미한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들에게 성령에 대한 경험은 가시적/청각적인 인간의 반응을 포함한다. 그런 반응은 하나님의 임재를 실현시키는데 실제로 관여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지시한다. 표적으로서 방언은 하나님의 자유에 의해 주어지지만, 또한 그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수용되고 나타나는 가시적인 환경이다. 방언은 자유로우며 동시에 예전적이다.
대부분의 비오순절 학자들이 오순절 영성을 극단적 주관주의로 부당하게 매도한 것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침례와 방언은 교회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능력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주관적 회심에 몰두하는 복음주의적 보수주의자들과 의견을 달리해왔다.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은 사도행전을 읽을 때 개인적 영혼의 구원의 서정(ordo salutis)도 강조하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교회에 복음 확장을 위한 능력을 부여하는 중재수단(mediation)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 또한 오순절주의자들 가운데서 예배의 신체적 차원에 주어지는 현저함에 대한 피터 호켄(Peter Hocken)의 주목도 타당하다. 순복음의 필수적 요소로서 육체적 치유에 관한 오순절주의자들의 강조도 여기에 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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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신체적 강조는 방언에 내포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철저한 자유를 배제하지 않으면서 오순절 영성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제 오순절의 특징은 예배의 신체적 차원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독특한 예전적 영성 안에서 성령의 자유를 포함한다는 것이 분명해진 것 같다. 종말적 맥락 안에 자리 잡은 방언은 새롭고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반응하도록 우리를 자유케 하는 "오는 세대"의 철저하게 자유로운 능력을 지시한다(히6:4). 그러나 철저하게 자유로운 성령은 숨겨진 것도 아니고, 현재적이고 가시적인 성취 없이 되는 것도 아니다. 방언은 세계를 향한 복음 증거를 위해 변화되고 능력 받은 새로운 관계들과 공동체들을 지시한다. 예배의 정황 안에서 성령침례의 최초 증거로서 혹은 그보다는 표적으로서 방언 말하기는 삶 전체로서 자유롭게 하는 증거 안에서 실현된다. 어떻게 방언을 판에 박힌 프로그램들과 고정된 사회적 삶의 구조 안에서 자유케 하는 증거와 연결하는 가는 오순절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과제다. 교회의 예전들에 대한 새로운 초점은 오순절주의자들이 과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교회의 예전들과 방언(Tongues and Ecclesial Sacraments)
필자는 주의 만찬과 침례라는 개인적이고 "주요한" 예전들을 넘어서는 보다 넓고 혹은 은유적 의미에서 "성례"라는 용어를 사용해 왔다. 최근 가톨릭 신학 안에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근원적인 성례로서 그리스도에 기초한 그리고 파생적인 의미에서 성례로서 교회에 기초한 폭넓은 성례적 영성을 주장하는 흐름들이 있다. 또한 거기에는 주요 성례들과 세상 안에서 일상적 삶 사이의 연결에 관심 있는 갱신 가톨릭 신학이 있다. 이 연결의 배후에는 교회 중심적 신학을 피하고 그 성례들을 새 창조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자유케 하는 사역에 개방시키려는 노력이 존재한다. 성례에 있어서 종말론에 대한 새로운 강조는 성례적 예배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해에 상반되는 보다 역동적이고 인격적인 이해로 귀결되어 왔다. 그 성례들은 정적인 실체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담아내는 대상들로서 새로운 가톨릭 성례적 사상 안에서 이해되지 않는다. 그 성례들은 지금 하나님과 인간의 역동적이고 인격적 만남을 위한 환경들로 이해된다. 그런 흐름들은 성례들에 관한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보다 큰 동의를 위한 문을 열어왔다. 예를 들면, 리마 문서(BEM)에서 그런 동의의 분위기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폭넓은 성례적 영성에는 개신교 원리와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다. 예를 들면, 융엘(Eberhard Jüngel)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성례로 보지만, 그러나 그것을 교회나 예배로까지 확장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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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예배를 성례인 그리스도에 대한 축하와 해석으로 본다. 그 논쟁에서 오순절 신학자들은 개혁주의자들의 성령의 철저한 자유에 대한 강조에 동의하는 것만큼이나 새로운 가톨릭 성례 신학과 동의하는 자신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의 가톨릭 성례 신학과의 대화는 지난 수 십 년 동안의 방언에 관한 광대한 연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방언에 대한 연구는 그 은사의 인간적인 속성뿐만 아니라 전례적 속성(ritualistic quality)을 드러내 왔다. 비록 방언이 진정한 의미에서 즉흥적이고(spontaneous), 예기치 못하는(unforeseen) 것이지만, 그 사용을 고무시키는 다양한 집단 심리과정들이 발견되어 왔다. 그 심리과정들은 종종 비의도적이고 참여자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 집단 자극은 방언이 가톨릭주의자들 가운데서 그렇게 높게 평가되는 예전적 성례들과 완전히 다르지는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리차드 베어(Richard Baer)는 방언과 가톨릭 예전은 둘 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만 인간의 사상이나 언어의 능력을 초월하는 예배 중에 하나님과의 만남을 상징한다.
그러나, 최초 증거로서 방언에 내포된 성례적 예배와 가톨릭 성례 신학에 포함된 것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언급해 왔던 것처럼, 방언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자유롭고 예기치 못하는 국면을 강조하는 즉흥적인 은사적 표적(spontaneous charismatic sign)을 상징한다(represent). 반면에, 예전적 예배는 잘 발달된 지침들에 따라 계획되고 조율된다. 역사적으로, 방언과 같은 성령의 즉흥적인 은사적 표적들은 지배적인 교회들의 형식적 예전들에 전혀 만족하지 못한 주변적 공동체들 가운데서 교회 안의 대항 문화적인 성례적 예배의 일종으로서 번성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그런 자유스런 성례적 예배에서 목회자와 평신도, 남성과 여성, 그리고 인종 간의 차이들은 덜 중요해지는 경향이 있어왔다. 주류 예전 전통들에서 은사적 표적들의 증가와 다양한 자유 교회 운동들에서 질서정연한 예전들의 창조는 그 그림을 복잡하게 만들고, 우리를 은사(또는 무아지경)와 제도(institution) 사이의 관계라는 완전히 복잡한 문제와 연루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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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탐구는 오순절 신학의 미래를 위해 아주 중요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오순절주의는 저항과 미발달의 성례를 대표하지만,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전통들과 의미심장한 유사성을 갖고 있다.
가톨릭과 오순절 성례전 사이에는 고려해야할 중요한 신학적 차이점들이 있다. 예를 들면, 가톨릭 성례 신학은 여전히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제도적 구체화로서 그리고 성육하신 말씀의 역사 안으로의 확장으로서 교회의 정황 안에서 개발된다. 가톨릭 신학자들 가운데 교회의 제도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것으로 만드는 감탄할 만한 노력들이 있다.
그러나 성례전적 예배의 제도적이고 교회적 국면들에 대한 지배적인 강조는 교회로 하여금 성령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편협하고 고백적인 영역에 제한되고, 무감각하고 혹은 정체된 방법으로 기능하도록 조종되는, 예견할 수 있고 조종 가능한 제도적 형식들에 노출시킬 위험에 빠지게 한다.
최초 표적으로서 방언에 내포된 성례적 오순절 영성은 성육신적이기 보다는 “신현적”(theophanic)인 신학에서 일어난다. 오순절 날의 극적인 성령 강림은 강함 바람 소리와 불의 혀를 동반하는 일종의 신현이었다. 그런 오순절 하나님의 자기 현시는 구약의 시내산 하나님 현현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죽음, 그리고 부활 안의 극적이고 생생한 하나님의 임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오순절의 신현은 또한 피와 불과 연기라는 땅의 징조들과 함께 파루시아에 있을 궁극적 하나님의 현현을 앞서 가리켰다(행2:19). 오순절 영성은 하나님의 영의 표적들과 기사들을 향한 열렬한 기대로 특징 지워지는 교회 삶을 발전시키면서 성경에 등장하는 그런 신현적 주제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틀 안에서 교회는 성육신하신 말씀 안(the incarnate Word)에서가 아니라, 악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세우는 일에 표적과 기사로 여전히 역사하고 계시는 영-그리스도 안(the pneumatic Christ)에서 그것의 기독론적 편향을 발견한다. 오순절 신학은 한스 큥(Hans Küng)에 의해 채택된 견해인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능동적인 임재라는 원초적 중심으로 그려내는 역동적 성육신 개념과 일치될 것이다. 여기서 교회는 성육신하신 말씀의 영원한 구체화로서가 아닌, 우리의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순종적 참여의 정황에서 지속적으로 갱신되어야만 하는 “사건”(event)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그 안에서 가톨릭 성례 신학의 다양한 흐름들이 아직 발전중인 오순절 신학을 밝혀줄 수 있고 또는 대조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논의 할 것이 많다. 오순절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임재를 성령을 통해 역동적이고, 개방적이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촉진시키는 가톨릭 신학 안의 흐름들을 긍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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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회 안에서 성령을 위한 피할 수 없는 “분투”를 촉구하는 이브 콩가(Yves Congar)의 호소에 진정으로 “아멘” 할 수 있다. 오순절주의는 그런 분투(struggle)를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교회 안의 한 운동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다. 그런 분투 배후에 우리의 전례들과 성례들은 탄원적(petitionary) 혹은 보다 더 정확하게는 기원적(epicletic)이라는 가정이 놓여있다. 우리는 성례의 요소들이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필수 부분을 형성하여서 그것들이 “객관적인” 의의를 갖는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주도권의 자유와 경험된 실제로서 “성례”(sacramentum)의 본질과는 별개로 그 객관성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필자는 예배의 성례적 요소에 대한 틸리히와 라너의 견해가 그 모든 국면들을 포함할 성령에 대한 성례전적 경험에 이르는 데 큰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주로 표적으로서 방언에 기초한 성령의 즉흥적 표적들과 기사들은 오직 정연한 예전들에 내포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자유와 초월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칼 라너는 그런 열광주의의 등장들은 제도적 교회를 잠시 일시적이고 의심스럽고 그것이 지시한다고 가정된 의미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만듦으로써 전례 체계에 충격을 준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해하고 표현하고 또는 조종하는 우리의 능력을 뛰어 넘는 하나님과의 만남에 갑자기 의지케 된다. 그런 과정은 예전적 갱신(liturgical renewal)과 교회의 제도적 차원의 제한적 의미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위해 필수적이다. 라너에 따르면, 열광주의의 등장들은 비록 이생에서 확장될 필요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적인 언어, 성례들과 법을 포함하는 교회의 제도적 구조 전체는 하나님의 출현 앞에서 스스로를 해체하고 사라지도록 운명 지어진 하나의 표적임을 보여준다. 방언의 종말론적 의미는 그런 맥락에서 특별한 의의를 갖는다. 방언은 여기서 그리고 지금 하나님의 새 창조와 해방을 지시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제도적 울타리들과 신학적이고 제의적 표현들의 일시적이고 제한된 본성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여기에 교회일치적 예배와 논의를 위한 중요한 암시들이 존재한다.
한편 라너는 교회적 성례들의 중요성을 그것들의 삶 전체와의 연속성에 놓는다. 칠성례는, 특히 세상에서 자유케 하는 영향력을 끼치기 원할 때, 삶 전체에 내포된 하나님의 은혜를 주목케 하는 상징들과 제의들을 대표한다. 예전적 성례 안에서 신자를 만나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임재는 타인들과 관련된 우리 삶의 일상들과 프로그램들 안에서 불분명한 것을 분명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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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너가 은사적 현시와 교회적 성례들에 대해 주장해 온 것들은 우리의 논의를 위하여 매우 중요하다. 만약 방언이 교회 제도들과 형식화된 예전들에 이의를 제기하고, 하나님의 영과의 자유롭고 예기치 못하는 만남을 강조한다면, 교회적 성례들은 우리의 교회적 일상들, 구조들, 그리고 프로그램들은 또한 하나님의 자유케 하고 치료하시는 은혜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주목케 한다. 마찬가지로, 만약 방언이 세상에서 교회의 증거 가운데서 해방과 치유를 향한 즉흥적이고 예기치 못하는 전환들을 지시한다면, 하나님의 자유케 하는 은혜가 계획되고 구조화된 개인 간의 그리고 사회적인 변화 시도를 통해 일어나는 것처럼, 교회적 성례들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유케 하는 은혜와 접촉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은사적 표적들에 대한 강조는 "구원하시는 성령"(Spiritus Redemptor)의 종말적이고 자유로운 움직임에 대한 강조로 보인다. 그것은 위로부터의 성례다. 교회적 성례들은 특히 그것들의 일상생활과의 연속성에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구조화된 반응들 안에서 일하기 시작하는 “창조하시는 성령”(Spiritus Creator)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그 성례 이해를 아래로 부터의 것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단지 강조의 차이를 다루고 있다.
그런 신학적 강조들은 모순된다는 것(contradictory)보다는 보충하는 것(complementary)일 수 있을 것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은 그렇게 종종 보다 나은 세상을 창조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들로부터 성령의 역사를 떼어놓는 이적들을 강조하지 않는가? 우리의 제도들, 예전들 그리고 사회 프로그램들이 은혜 없는 세상을 위해 거룩하게 된 수단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교회적 성례들에 관한 새로운 평가는 오순절주의자들을 위해 그들의 은사적 영성과 프로그램들과 제도화된 구조들을 통한 사회적 해방을 위한 노력들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지 않을까? 반면에, 오순절주의의 저항적인 또는 “미발달의”(inchoate) 성례는 우리에게 예배와 사회적 갱신은 해방과 치유와 우리의 프로그램들과 제도적 구조들에 문제를 제기하고 갱신할 필요성 요구를 향한 즉흥적이고 예기치 못하는 전환들을 요구한다는 것을 상기시킴으로써 가톨릭 성례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담당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오순절주의자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성례들에 관한 가톨릭과의 대화에서 타협할 수 없는 차이들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대화를 통해 지속적으로 축복하고 축복을 받는데 개방적이어야만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요청되는 다양한 개혁주의 전통들과의 대화에 있어서도 참이다.
결론적으로, 오순절 영성은 하나님과의 비중재적/직접적 만남만을 주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은혜의 객관적 수단들과 관련 없는 주관적 감정주의만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런 판에 박힌 성격규정들은 오순절적 예배 안의 어떤 경향들에 의해 조성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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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런 성격 규정들은 “여기서 지금” 하나님의 자유로운 종말적 임재로 하여금 능력을 부여하고 해방시키고 치유하도록 하는 가시적/청각적 표적들에 대한 오순절주의자들의 현저한 강조를 고려할 수 없다. 성령침례에 대한 최초 증거로서 방언은 신유와 함께 오순절주의자들 가운데서 그런 의미로 역할을 다하며, 위에서 언급된 상투적인 성격 규정들에 이의를 제기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사이몬 턱웰(Simon Tugwell)의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 사용에 존재하는 성례적 요소의 발견에 놀라워해야 하는가? “성례”라는 용어는, 주의 깊게 규정된다면, 오순절 영성의 중심에 새로운 빛을 비출 수 있으며, 다른 교회 전통들과의 효과적인 교회일치 대화를 위한 문을 열 수 있다. 일치의 영이시여, 오시옵소서!(Veni, Spiritus unitat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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