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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 오순절 선교사들의 농인 선교: 베티 헤이니, 맥신 스트로브리지

한오신 2026. 1. 10. 12:52

Pentecostal Missionaries to the Korean Deaf:

Betty S. Haney, Maxine Strobridge

 

 

베티 헤이니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맥신 스트로브리지

                                                                                

 

이창승

2025.12.14./2026.1.8.

 

내한 오순절 선교사들의 농인 선교(이창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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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는 말

 

    대한민국의 정부수립과 6.25 전쟁 이후 정책결정과 자원배분은 주로 경제분야에 집중되었고, 사회보장제도의 도입과 복지지출은 최대한 억제되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회적 소외계층에 대한 구호는 첫째 민간독지가들의 희생과 동정심, 둘째 외국의 선교단체들에 의한 원조물자 등에 의존되었었다. 한국전쟁 이후 소외계층들에 대한 구호는 주로 미국에서 건너온 개신교 선교단체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 선교단체들은 주로 전쟁고아나 난민들을 수용 보호 하는 고아원이나 보육원을 설립하고 운영했다. 그런데 원생들이 성인이 되어 원을 떠나게 되자 사회복지시설의 대부분은 1970년대를 전후로 점차 장애인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더 이상의 구호물자는 중단되었고 또한 선교단체들도 본국으로 귀국하게 됨으로써 복지시설들은 구호활동에 참여했던 한국인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한국 오순절 교회의 대표 교단인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도 그와 유사한 길을 밟았지만, 그 양상이 조금 달랐다.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는 19548월에 녹원영아원(錄原嬰兒原, Green Meadows Baby Home)을 설립하여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영아원은 장애인시설로 전환되지는 않았다. 그 교단의 장애인 선교 중 농인들에 대한 선교는 시설에서 시작되지 않았고, 오순절적 순복음 전파 집회에서 탄생한 교회를 중심으로 시작되었으며, 그 후 농인들을 위한 시설이 더해졌다.

 

녹원 영아원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는 200350주년을 앞두고 교단의 50년을 빛낸 기하성 희년 50인을 선정했다. 켓참(Maynard Ketcham), 맥신 스트로브리지(Maxine Strobridge), 배리 헨리, 죤 스텟츠(John Stetz) 선교사, 박정근, 서병렬, 최성규 목사는 교단발전기여자로 선정되었다. 그들 중에서 맥신 스트로브리지는 오직 청각장애인, 즉 농인(聾人, deaf)들을 위해 내한한 선교사였다. 그런데 스트로브리지 이외에도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농인 사역에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은 베티 헤이니(Betty S. Haney)였다. 본 글은 베티 헤이니와 맥신 스트로브리지의 생애를 간략하게 복원하고, 그 두 내한 농인 선교사들에게 수어를 가르쳐 주었던 로티 리크호프(Lottie L. Riekehof)에 대해 간략하게 기술하며, 한국 농인들에 대한 오순절적 순복음 전도에 의해 탄생한 교회를 중심으로 시작되어 농인시설이 더해졌던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국내농인선교의 역사를 간략하게 그려내 보려 한다.

 

*

농아(聾啞)라는 표현도 있는데 (귀머거리 롱)은 듣지 못하는 사람, (벙어리 아)는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듣지 못하는 사람은 말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농아인(聾啞人)이라고 묶어서 말하는 셈이다. 말하는 데 문제가 없고 청각에만 문제가 있으면 농인(聾人)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엄격하게 구분하여 쓰지는 않고 보통 농아인을 줄여서 농인이라고 한다. 귀머거리, 벙어리라는 단어는 비하하는 느낌이 있다는 의견들로 인해 요새는 주로 농아인, 농인, 청각장애인이라고 칭하는 것이 주류다. 반대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비장애인은 건청인(健聽人)이나 청인(聽人)이라고 칭한다. 건청인이라는 말은 청인은 건강하다는 뉘앙스가 있어 가치중립적인 표현이 아니기 때문에 쓰지 않는 것이 좋다. 농아인 사회와 관련 업계에서는 보통 농인과 청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편이라 한다. 법률적으로는 과거의 형법과 형사소송법은 농아자(聾啞者)라는 표현을, 한국수화언어법은 농인(聾人)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으나 대개의 법령들은 청각장애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 “청각장애인,” 출처: 나무위키 ---

 

 

II.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농인 국내 선교: 로티 리크호프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농인 사역은 1919년 엘시 피터스(Elsie R. Peters)라는 청인에게 임한 농인 사역 소명으로 시작되었다. 그때 그는 성령충만했던 설리반(Sullivan)과 에디 체니(Addie Chainey)라는 두 농인에게 수어(手語, sign language)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1930년에 폴 메첨(Paul Meachum)은 국내선교국에 의해 첫 번째로 동서부에 복음을 전하도록 임명을 받았다. 페른 나탄(Fern Nathan)1948년에 전국적으로 농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첫 여성 사역자가 되었다. 1950년대에 미 하나님의 성회 실행위원회는 전국 농인 사역 대표자 직을 설치하고 농인 폴 칼스트롬(Paul W. Carlstrom)을 첫 전국대표로 임명했다.

 

1930년 로스엔젤레스의 농아 제일순복음교회(the First Full Gospel Church for the Deaf)에서 수어로 설교하고 있는 엘시 피터스
1939 엘시 피터스와 농아 제일순복음교회(the First Full Gospel Church for the Deaf) 모델을 들고 있는 그녀의 남편

 

왼쪽에서 두 번째의 페른 나탄, 제일 오른쪽의 리크호프
페른 나탄
폴 카스토르롬

 

    농인 사역을 미 하나님의 성회 소속 신학교 차원에서 시작시키고 많은 농인 사역자들을 길러낸 인물은 로티 리크호프(Lottie Louise Riekehof)였다. 리크호프는 1949년부터 미 하나님의 성회의 농인들을 위한 국내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미주리, 스프링필드에 있는 센트럴 바이블 인스티튜트(Central Bible Institute)에서 수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1920813일에 독일에서 태어났다. 1945년경, 리크호프는 워싱턴 D.C.의 칼바리 가스펠 처치(Calvary Gospel Church)에서 기독 여성들을 위한 홈을 감독하는 선교사와 찬양사역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1946년에 그 교회 교인이며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던 한 농인 여성으로부터 그녀는 일주일에 몇 개씩 수어(ASL)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리크호프는 수어를 본격적으로 배울 필요를 느꼈고, 1947년에 워싱턴 D.C.에 있는 갈라우뎃 칼리지(Gallaudet College)에 등록했다. 그 학교는 1864년에 청각장애와 시각장애를 가진 어린이들을 위한 문법 학교로 세워졌다. 그 학교는 그 분야 교육에서 세계 최초 그리고 유일의 기관이었다. 그 학교에서 그녀는 엘리자베스 피트(Elizabeth Peet)에게 수어를 배웠다. 이 무렵, 리크호프는 화학 회사의 비서로도 7년 동안 일했다.

 

엘리자베스 피트

 

갈라우뎃 칼리지
로티 리크호프



    1948년경, 그녀는 학사 학위를 받기 위해 센트럴 바이블 인스티튜트(CBC)에 진학했다. 리크호프는 그 학교에서 학생으로서 배웠을 뿐만 아니라 수업을 받는 중 다른 농인 학생들에게 통역했으며, 수어를 배우기 원하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49년 센트럴 바이블 인스티튜드 앨범은 다음과 같이 리크호프를 처음으로 소개했다.

 

주여, 내 마음에 영혼을 놓으소서는 로티 리크호프 양의 수어 수업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합창곡 중 하나로, 학생들이 수어를 배울 뿐만 아니라 농인의 영혼에 대한 부담도 받는다. C.B.I.에 오기 전, 리크호프 양은 동부에서 농인을 위한 사역에 참여했었다. 그녀의 은혜로운 태도는 이 독특한 수업을 학교에서 가장 즐거운 수업 중 하나로 만들었다. 학생들은 수어의 흥미로운 기법을 익히는 것 외에도 그리스도를 위해 농인들을 얻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리크호프 양에게서 배우고 있다.

 

수업중 수어로 통력하고 있는 리크호프

 

    센트럴 바이블 인스트튜트의 1950년 앨범은 리크호프의 사역을 더 확대하여 소개했다.

 

C.B.I.S는 올해도 1948년에 설립된 농인들을 위한 학교를 기독교 농인 협회와 협력하에 지속시키고 있다. 로티 리크호프 양은 통역 겸 강사인데 침묵의 세상에서 사역하기를 준비하고 있는 농인 학생들에게 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는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 그녀는 학습과 토론 시간에 통역하는 것은 물론, 수어를 배우고자 하는 청인 학생들을 위한 과정에서 학생들을 돕고 있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수어의 배경과 메카닉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복음을 농인들에게 효과적으로 제시할 수 있게 하는 다른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리크호프는 그 후 센트럴 바이블 인스티튜트에서 12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수어를 가르쳤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농인들 가운데서 전임 사역을 감당했다. 리크호프는 1963년에 수어 교재 Talk to the Deaf를 출판했다. 그녀는 뉴욕 유니버서티(New York University)에서 석사학위를 그리고 그 학교에서 수어를 가르치며 1968년부터 1970년까지 박사학위 과정을 밟았고, 그의 학위논문은 1971년에 출판되었다. 그녀는 1970년에 갈라우뎃 칼리지로 돌아가 수어로 석사과정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센트럴 바이블 인스티튜트에 이어, 수어는 또한 플로리다, 레이크랜드에 있는 사우스이스턴 바이블 인스티튜트(South-Eastern Bible Institue), 미네소타,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노스 센트럴 바이블 칼리지(North Central Bible College), 그리고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즈에 있는 베다니 바이블 칼리지(Bethany Bible College)와 같은 다른 하나님의 성회 소속 성경학교들에서도 가르쳐졌다.

 

 

    펜테코스탈 에반젤의 19605월 판은 농인 캠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맥신 스트로브리지의 보고를 다음과 같이 실었다.

 

여름 갬프들에서 수어를 통해 난생 처음 복음을 듣는많은 농인들의 삶의 변화를 증언하는 것은 참으로 감격적인 것이다. 그만큼 놀라운 것은 농인들도 또한 성령침례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고, 영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도 없지만, 그들은 정상인들이 그러는 것처럼 다른 방언으로 말한다.

소통 부족은 50만 명 이상의 정상인을 조용한 세상에 가두는 보이지 않는 장애물이다. 많은 농인들, 특히 청각장애 어린이들은 지극히 적게 또는 전혀 종교적 가르침을 받지 못해왔다. 그들 중 많은 어린이들이 농인 학교에서 성경 이야기들을 듣기 시작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순복음(full gospel)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성회 캠프들에 참석하는 장애인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은 처음 참석하기 시작했을 때 구원받지 못한 상태였지만, 그곳에 있는 동안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알게 된다.

내가 농인을 위한 미시간 캠프의 두 번째 날 저녁에 한 청각장애 소녀의 객실에 들어갔을 때, 그 소녀는 저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어요라며 흐느꼈다. 그날 저녁에 수어로 제시된 메시지가 마리(Marie)를 감동시켰었고,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하늘나라로 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구원의 길을 설명해주자, 그녀는 마치 바싹 마른 땅이 기나길게 기다리던 비를 쪽쪽 빨아들이듯이 내 말을 들이켰다. 울상이던 그녀의 얼굴이 우리가 함께 기도했을 때 기쁨과 평안의 얼굴로 바뀌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경건 시간에 다른 캠프 참가자들을 방문하기 위해 마리를 떠났을 때, 대부분의 객실들에서 그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날 저녁에 많은 새로운 이름들이 하늘에 기록되었다. 부흥의 불길이 그 주간 전체에 걸쳐 계속 타올랐다. 후에, 캠프 강사가 성령침례를 설명해주자 제단 주변은 오순절적 경험(Pentecostal experience)에 목마른 사람들로 가득 찼다.

 

    미 하나님의 성회 국내선교국 농인과 맹인 사역 담당자 맥신 스트로브리지는 1960년에 열렸던 농인 대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미주리, 스프링필드에서 1960512일에서 15일까지 열린 농인 대회에서 사역자들은 농인들 가운데서의 성공적인 사역에 대해 고무적으로 보고했다. 125명 이상의 농인 교역자들과 대표들이 하나님의 성회 농인회(Assemblies of God Deaf Fellowship)의 사역을 논의하고자 모였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주님을 섬기는 데 드리겠다고 결심했다.

하나님의 성회의 농인 사역은 작은 시작으로부터 뻗어 나왔다. 1948년까지는 지극히 적은 개척 사역들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그해에 수어 과목이 센트럴 바이블 인스티튜트에 개설되었다. 현재 미국의 50만 명 농인들을 섬기는 41명의 국내 선교사들과 28명의 평신도들이 있다. 비록 이 소외된 그룹이 그들의 육적 귀로 들을 수 없지만, 그들은 그들의 영적 귀로 복음을 듣기를 갈망하고 있다. 이 선한 사역을 확대하기 위한 길을 논의하기 위해 그 대회에서 특별 회의들이 열렸다.

금요일 아침과 저녁 채플 예배들은 센트럴 바이블 인스티튜트의 학생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뉴욕과 뉴저지 청각장애자들을 돌보고 있는 크로프트 펜츠가 강사였다. 음성과 함께 수어가 그 대회 내내 사용되었다. 간증들과 농인들의 수어 찬양은 영감과 축복의 원천이었다. 모든 활동의 특별한 목적은 잃어버린 청각장애 영혼들을 위한 전도 열정에 불을 지피기 위한 것이었다.

토요일 아침 예배 때, 한국, 서울에 파견된 정부 고용인 베티 헤이니(Betty Haney)가 보낸 편지가 읽혀졌다. 그녀는 수어를 센트럴 바이블 인스티튜트에서 배웠고, 지금은 서울농아학교에서 매주 약 200명의 소년들과 소녀들을 위한 토요일 성경 반을 이끌고 있다. 비록 그 학생들 중 많은 사람들이 불교도들이었지만, 이제 예수가 구원자인 것을 알아가고 있다. 최근 한국, 부산에서 청각장애 성인들을 위한 주말 예배들에서 35명이 구원을 받았다.

그 대회에서 가장 최고의 예배는 주일 오전 예배였는데, 그때 성령의 멋진 임재가 참으로 실제적이었다. 그 예배 말미에 주의 만찬이 선교사들, 대표들, 그리고 방문자들에게 베풀어졌다.

그 대회의 주제 성구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2:10)이었다. 참석한 사람들은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순복음을 농인들에게 충성스럽게 전하기를 작정하며 떠났다.

 

    스트로브리지는 미 하나님의 성회의 농인 사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농인 영혼들의 열매가 무르익고 있다. 현재 기독교 전체 교단 안에 농인을 위한 사역자들은 약 250명이 있다. 하나님의 성회는 약 45명을 제공하고 있다. 농인들을 위해 더 많은 선교사들이 긴급하게 필요하다. 모든 헌금은 국내선교국으로 보내주시라, 그리고 농인 기금으로 지정된 돈은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사용될 것이다.

 

    정통 오순절주의(Classical Pentecostalism)의 핵심은 성령침례가 방언 말하기라는 첫 육체적 증거를 동반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순절주의의 정체성인 것이다. 그렇다면, 농인들이 성령침례를 받을 때도 목소리로 방언 말하기라는 증거가 동반되는 것인가? 미국 하나님의 성회는 그 부설 소식지 펜테코스탈 에반젤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했다. 펜테코스탈 에반젤의 19595월 판은 1958년 여름에 미시간 농인 캠프에서 발생했던 농인들의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목소리로 방언 말하기를 보고했다.

 

기도와 찬송 중에, 뉴저지에서 온 청년 클리포드 토네센(Clifford Tonnessen)이 갑자기 독일어를 아주 유창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독일어를 아는 한 청인 여성이 그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 이전에 독일어가 말해지는 것을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한 농인이 성령의 영향력 아래에서 독일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클리포드는 앉아서 몇 시간 동안 그저 다른 방언으로 주님을 찬양했다.

 

    펜테코스탈 에반젤의 19603월 판은 다시 한번 성령침례를 받고 다른 방언을 말한 농인에 대한 글을 게재했다.

 

그 농인들이 성령침례를 받았을 때, 그들은 성령께서 말하라고 주시는 대로 [목소리로] 다른 방언으로 말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그전에 자신의 음성을 정상적으로 사용할 수 없었었다. “저는 1958112일에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경험을 했었습니다. 내 목소리는 수년 동안 사용되지 못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대화할 때면 언제나 판과 연필을 사용했었습니다. 제가 맨 처음으로 성령을 구하기 시작했을 때, 저는 저의 목소리를 사용하지 않고 수어로만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저에게 값진 것입니다! 토마스 B. 리드(Thomas B. Reed)”

 

 

III.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농인 선교 기원: 베티 헤이니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농인 사역의 창시자는 베티 S. 헤이니(Betty S. Haney)였다. 그녀는 193398일에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에서 태어났다. 헤이니는 1955년에 센트럴 바이블 인스티튜트에 들어갔다. 그녀의 자매가 농인이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그런 유형의 사역에 관심이 있었다. 센트럴 바이블 인스티튜트 학생 시절에 그녀는 리크호프에게서 수어(the language of signs)를 배웠다. 그리고 성경”(Bible)을 전공한 그녀는 1958년에 그 학교를 졸업했다.

 

센트럴 바이블 인스티튜트의 1955년 앨범 속의 헤이니

 

1957년 앨범 속의 헤이니

 

 

    헤이니는 195810월에 미국 정부 고용인으로 한국을 향해 떠났다. 그녀는 U.S.O(United Service Organizations, 미국위문협회) 사무국장으로 일하며 미 하나님의 성회 선교부에서 농인과 맹인 사역조정을 담당했다. USO는 미군 및 미군 가족들을 위한 편의 시설 운용, 위문공연단 순회 등을 하는 군 장병 복지를 위한 조직이었다. 군인에 대한 후생 복지 업무를 하기 때문에 군인공제회나 재향군인회와 역할과 거의 같았다. 미군 본토 부대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일본 등 해외 주둔 미군 기지에도 USO 서비스 지사가 파견되어 있었다. 한국에는 용산기지 내 캠프 킴에 입점해 있었고, 기지 폐쇄 전까지 주기적으로 주한 미군 및 미군 가족의 한국투어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1958년의 헤이니

 

    헤이니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서울농아학교를 방문했다. 학생들의 큰 영적 필요를 보았을 때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국어 수어를 배우겠다고 하자 한 불교인 임호익(Lim Ho Ik)이 그녀의 교사 겸 통역을 자청했다. 그녀는 그가 그녀에게 한국어 수어를 가르치기 위해 성경 구절들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그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곧 그녀는 그 학교 학생들에게 성경공부반을 개설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녀는 매주 토요일 아침에 약 165명의 한국 농인 소년들과 소녀들에게 한 과목을 가르쳤다. 한 반에서 35명의 아이들이 구원을 받기도 했다. 헤이니 양에게 가장 짜릿한 경험들 가운데 하나는 임호익을 구원의 경험으로 이끈 것이었다. 임호익은 1962년에 설립된 한국특수교육협회(현 사단법인 한국특수교육총연합회) 총무로 봉사하기도 했다.

 

1960년 농아학교. 수어로 말하고 있는 여성은 헤이니로 추정된다.

 

 

    그녀가 한국어 수어를 익힌 직후인 1960년에 부산의 한 농인의 청인 아내가 헤이니 양에게 부산 서대신동에 와서 농인들을 위해 사역해달라고 요청했다. 주말 집회가 열렸고, 많은 농인들이 구원을 받았다. 그 집회에 참석한 청인 목회자, 최성만(Sung Man Chey)은 농인들에 대한 부담을 갖게 되었고, 수어를 익힌 후 부산에서 농인들을 위한 정기 예배들을 이끌기 시작했다. 헤이니의 집회는 부산 에바다 농아교회가 되었다. 미국 하나님의 성회 농인 WMC 그룹들은 한국 농인들의 물질적 필요들을 채워주는 것을 도왔다. 외복, 피복 등이 헤이니에게 보내지고 그녀에 의해 배포되었다.

    최성만은 1965년에 자기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써서 펜테코스탈 에반젤에 기고했다.

 

커다란 B-29 폭격기들이 일본 본토를 점점 더 자주 폭격하고 있었다. 한밤중에 사이렌 소리가 울리면, 크리스챤 부모와 다섯 형제들과 자매들과 함께 방공호로 피했다. 기독교는 나와 상관이 없었다. 부모님과 나의 태도 사이의 현저한 차이를 깨닫기까지 기독교는 내게 전혀 의미가 없었다. 우리는 지하 방공호에 있었는데, 불빛의 밝기는 겨우 내가 예배하고 찬송가를 부르는 부모의 얼굴에서 빛나는 평안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고, 내 몸의 모든 근섬유질을 파고드는 공허함과 공포의 그 어떤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하나님이 실제적이었다! 그때 그곳에서 나는 그들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삼기로 작정했다. 즉시 나고야에 있는 일본 방공호 안에서 그들의 예배와 찬양에 합류했다.

전쟁이 끝난 후 부모님은 그들의 조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아버지가 태어난 항구도시 포항에서 살 곳을 찾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지역 장로교성경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 년 동안 그 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나서 다른 학교로 전학했다.

하루는 아버지가 성령침례를 주의 깊고 끈기 있게 설명하셨고, 마침내 나는 그것이 내가 추구해야 할 경험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 놀라운 경험은 내 삶의 소명으로 이끈 두 번째 이정표였다.

하나님의 성회가 성경학교를 서울에 세웠다는 것을 안 후, 즉시 등록했다. 그 과정을 마치자, 남원에 있는 한 교회의 목사로 파송되었다.

세 번째 놀라운 경험이 내가 부산 근처에 있는 안락 성회에서 목회하고 있던 19601월에 일어났다. 그 지역에서 사역하던 리차드(L. P. Richards) 선교사가 어떤 주일 저녁에 나의 교회로 두 명의 미국 여성을 데리고 왔다. 그는 그들 중의 하나를 베티 헤이니(Betty Haney)라고 소개했다. 그녀는 미국 정부에 고용되어 서울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활발하게 농인 사역을 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헤이니 양은 한국 수어로 요한복음 316절을 반복했다.

그 예배 후 우리 교회 성도들 중 하나인 윤 여사(Mrs. Yoon)가 내게 와서 헤이니 양이 사용한 수어의 모든 단어를 이해했다고 매우 흥분해서 말했다. 윤 여사의 남편은 농인이어서 그와 수어로 소통하는 법을 배워야 했었다. 다음 날 아침 윤 여사는 나를 보기 위해 와서는 그녀의 구원받지 못한 남편이 기꺼이 그의 모든 농인 친구들을 모아 헤이니 양이 그들에게 사역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헤이니 양과 접촉했고, 그녀는 그 초청을 즐거이 수락했고, 그날은 219일에서 21일로 잡혔다.

외국인 헤이니 양이 농인인 나의 동족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한국 수어로 설교하기 시작한 첫 시간 이후로 나는 전과 같을 수 없었다. 나는 그녀가 그 특별 집회들을 위해 부산으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그 집회 동안 하나님께서는 내가 수어를 배워 한국 농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내게 확실히 하셨다. 배우기에 어렵지 않았던 수어를 기꺼이 배웠다. 윤씨 부부는 나의 선생이었다.

일 년 안에 설교 전체를 수어로 할 수 있게 되었다. 헤이니 양의 지도아래 농인과 함께 전임사역자가 되기 위해 목사직을 사임했다. 농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각 도시에 지교회들을 열기 위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갔다. 그렇지만 여섯 개의 다른 도시들에서 여섯 회중을 목양한다는 것은 너무도 힘들었다. 우리의 유일한 해결책은 사도 바울이 했었던 것과 똑같이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각 지역 평신도들을 훈련시켜 그들 각자의 그룹들 위에 세우는 것이었다. 농인 평신도로 구성된 우리의 첫 성경 세미나는 196212월에 열렸다. 그 세미나는 베티 헤이니가 후원하고 관리했다.

곧 더 많은 문들이 우리에게 열렸고, 우리는 수원, 인천, 영등포에 지교회들을 세웠다. 나는 서울에 있는 하나님의 성회 성경학교에서 수어를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것은 우리의 필요에 대한 한 응답이었다.

 

최성만에게 수어를 가르쳐 준 윤 여사

 

    19613월에 최성만은 농인들을 위한 전임사역을 시작했다. 다음 해 그는 부산 지역에 다섯 개의 농인 그룹들을 세우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1962년 지도 책무를 더 감당하기 위해 서울로 갔다. 최성만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농인 프로그램 전임 당당자였다. 그는 부산뿐만 아니라 다른 네 개 도시에서 농인들을 섬겼다. 미국의 농인 그룹들은 매월 35달러가 드는 그의 생활비를 지원해 주었다. 어떤 그룹들은 또한 그의 사역에 도움이 되는 시청각 자료들이나 다른 도구들을 지원했다.

    1961년에 짧은 휴가를 떠나기 직전, 헤이니는 서울에 있는 성인 농인들을 위한 특별 집회를 열어야 한다고 느꼈다. 이백 명의 한국 농인들이 그 집회 시작 한 시간 전에 마룻바닥 위에 앉았다. 그 예배실이 꽉 찬 후, 교회 사무실과 예배실 사이의 창문들이 제거되었고, 그 방도 역시 꽉 찼다. 400명이 서울의 성인 농인들 위한 첫 예배에 참석했다. 초청 시간 동안 40명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겠다며 일어섰다.

 

한복을 입고 있는 헤이니

 

    정(Chung) 씨의 농인들에 대한 부담 때문에 인천에 농인 그룹이 형성되었다. 그는 농인들을 모으고 헤이니 양에게 그들을 위해 예배를 인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그렇게 했고, 또한 정 씨가 그 그룹의 지도자가 되어 그들이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한 건물을 찾아냈다. 오래지 않아 정 씨와 다른 농인 김 씨가 수원에 있는 농인들에 대한 부담을 갖게 되었다. 김 씨는 이 그룹의 목사가 되었다.

 

1961년 한국 농인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하고 있는 미국 WMC

 

미국 WMC의 선물을 받은 서울농아교회 성도들

 

 

    196212월이 되자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농인 목회자들의 수가 20명으로 늘어났다. 사역자들과 그룹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재정적 지원의 필요가 또한 증가했다. 헤이니 양은 그 성장하는 사역을 위해 그녀의 월급의 대부분을 희생적으로 기부했다. 미국의 농인 그룹들이 그 필요를 들었을 때, 몇몇이 매월 헌금을 보내기 시작했다. 미국 WMC 농인 그룹들은 의복, 피복, 그리고 다른 유용한 물건들의 많은 꾸러미들을 보내왔다.

 

1964년 농인 첫 캠프

 

 

1965년 영등포 농아교회

 

1965년 헤이니와 최성만

 

열차를 타고 있는 헤이니와 최성만 부부

 

1965년 헤이니와 농인 사역자들

 

 

 

 

 

한 그룹은 196610월에 의복 163파운드를 보냈다. 다섯 한국 농인 목사들은 스피드 더 라이트(Speed-the Light)가 제공한 자전거들을 받았다. 그 자전거들은 서울, 인천, 영등포, 부산, 그리고 대구에서 사용되었다. 그 자전거들은 그들이 그들의 지역들에서 더 많은 농인들을 방문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헤이니가 1965년에 한국을 떠난 이래로 그 사역은 최성만과 선교사 아더 숄티스와 루스 숄티스의 유능한 지도력 아래에서 계속 성장했다. 한국을 떠난 헤이니는 인도, 뉴델리에서 정부 고용인으로 일하면서도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농아 프로그램의 고문으로 계속 섬겼다.

    최성만은 1966년의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농인 사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더하여, 우리는 지금 우리의 사역자들을 위한 주 1회 수어 반을 열고 있고, 외딴 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통신 과정도 진행하고 있다. 우리는 3개월마다 우리의 사역자들을 위한 특별 훈련 세미나를 열고 있다. 올해 우리는 두 방학 성경학교를 열었다. BGMC가 보내준 주일학교 교재들과 라이트 포어 더 로스트가 보내준 쪽 복음이 우리의 문서 프로그램을 가능하게 만들어 왔다. 우리는 특별히 한국 농인들을 위해 준비된 50,000부의 소책자를 배포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전체에는 약 500명의 농인들이 참석하고 있는 10개의 농인 교회, 17명의 훈련된 사역자들이 있다. 19647월에 한 그룹이 크리스챤 컨퍼런스 그라운드에서 열린 첫 농인 캠프에 참석했다. 그 이전에는 한국 전체에서 한 그룹이 그런 집회를 위해 모인 적이 없었다. 그들은 5일 동안 함께 살고, 공부하고 그리고 예배했다.

추수 때가 되었다. 그러나 60,000명 이상의 한국 농인들 중에서 지극히 적은 수만이 복음에 열려있고, 그리스도께로 인도되었다. 우리가 많은 기회의 문들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기도해 주시라.

 

침례받기 전 한국 농인들

 

 

    한 농인 연합 집회가 3년간의 여름에 한국, 서울 근처에서 열려왔었다. 1966년 캠프는 장마철에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127명의 농인들과 스텝들이 등록했다. 이들은 아홉 개의 한국 도시들에서 왔다. 미 하나님의 성회 소속 선교사 웨인 샤니펠트(Wayne Shaneyfelf)1962년 이래로 필리핀에서 농인 사역을 감당해 왔는데, 그 캠프의 강사였다. 그는 들을 수 있게 설교했고, 미국어 수어를 사용했다. 이희석이라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문서선교국 사역자가 한국어로 들을 수 있게 통역하면, 최성만이 한국어 수어로 통역했다. 이 흥미로운 과정은 아주 빠르게 달성되었다.

 

2004년 헤이니 소천

 

IV.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농인 선교 확장: 맥신 스트로브리지

 

    베티 헤이니에 이어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농인 선교를 이끈 선교사는 맥신 스트로브리지(Maxine Strobridge)였다. 스트로브리지는 1933년 미시간, 머스케건 헤이츠(3017 Highland Avenue. Muskegon Heights, Michigan)에서 태어났다. 머스케건은 머스케건 카운티에 위치한 도시이자 군청 소재지이다. 미시간 호수 항구 주변에 위치한 머스케건은 낚시, 보트 타기로 유명하며, 미시간호수 동부 연안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이다.

 

 

    그녀는 15세인 머스케건 헤이츠 고등학교(Muskegon Heights High School, Muskegon Heights Academy High School) 9학년생일 때(1948), 주님께서 그분을 위한 봉사로 자기를 부르시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여러 직업들을 탐색하는 과목을 공부하고 있었다. 자기가 행했었던 선택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그녀의 마음에 그분의 일을 위해 준비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8세인 1951년에 센트럴 바이블 인스티튜우트(Central Bible Institute)에 들어갔다. 성경 학교에서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그녀에게 주어진 약속은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데살로니가전서 524)였다. 이 약속은 그녀의 삶 속에서 진정으로 이루어졌다. 스트로브리지는 성경학교 2학년 때 리크호프에게서 수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주님께서 농인들 가운데서 일하도록 자기를 부르시고 계시다고 느꼈다. 그녀가 그분의 뜻에 라고 대답했을 때, 그녀는 놀라운 평강을 느꼈다. 그녀는 그분께 그분이 그녀가 가기 원하시는 곳에 가겠다고, 그리고 그분이 그녀가 하기 원하시는 것을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센트럴 바이블 인스티튜트의 1951년 앨범 속의 스트로브리지

 

 

    여름방학이 되어 그녀가 머스키건으로 돌아갔을 때, 농인들이 내게 매주 그들을 위한 예배를 인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그룹은 단지 한 달에 한 번 만나고 있었다. 스트로브리지는 전에 본적이 없는 필요를 보았다. 농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 소외되어왔었고, 그리스도인들은 농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깝다는 것을 말해주는 데 실패해 왔었다. 미국에 있는 수 천 명의 농인들이 복음을 듣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었다.

    성경학교 4학년 때,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주신 소명은 이전 어느 때보다 더 강했다. 그녀는 농인들이 몰랐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해줄 수 있도록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했다. 마지막 학기 동안 그녀는 한 농인 소녀와 같은 방을 쓰는 특권을 누렸다.

    1953년에 센트럴 바이블 인스티튜우트에서 선교학을 배우고 졸업한 스트로브리지는 농인 사역을 위해 머스키건으로 돌아갔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녀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일 년 후, 그녀는 주님께서 그녀를 전임 복음전도 사역으로 이끄시고 계시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그분에게 온전히 라고 말했고, 교사직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믿음은 곧 시험을 받았다. 그녀는 다음 주에 50달러가 필요했고, 주님께 그것을 아뢰었다. 그 돈이 필요한 바로 그날, 수표 하나가 우편으로 왔다. 반복하여 모든 필요가 그분의 풍성한 손에 의해 채워졌다.

    19553월경에 스트로브리지는 주일 아침에 플린트(Flint)에서, 주일 오후에 사지노(Saginaw)에서, 그리고 수요일 저녁에 머스키건에서 농인들을 위한 예배를 인도했다. 국내 선교부(the National Home Missions Department), 미시간 지방회(Michigan District), 그리고 목사님들이 최선을 다해 협력했다. 주님께서는 또한 농인들을 위한 미시간 주립 학교(Michigan State School for the Deaf)에서 사역하도록 그녀를 이끄셨다. 플린트 어린이 전도 국장과 그녀는 그 농인을 위한 학교를 방문해서 교장과 어린이 전도 과목 개설 가능성을 논의했다. 그 문은 닫히는 듯했지만, 하나님께서 이적적으로 그 길을 여셨고, 매주 토요일 아침에 그 학교에서 한 과목을 이끌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전혀 듣지 못했던 농인들에게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정말 짜릿했다. 한 가톨릭 소녀가 최근 복음 예배에 처음으로 참석했다. 그녀는 스트로브리지가 그 과목 수강생들에게 구원을 길을 제시하는 것을 주의 깊게 보았다. 그 예배 후, 그녀는 재빨리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19561월경 트로브리지의 주소는 미시간, 사지노, 노스 포스 스트리트 114(114 North 4th Street, Saginaw, Michigan)이었다. 195910월에 스트로브리지는 신설된 청각 시각 장애인 사역 국내 담당”(National Supervisor of the Deaf and Blind Ministries)이라는 첫 전임직책으로 미 하나님의 성회의 국내선교국에 합류했다. 그녀는 1962년에 센트럴 바이블 인스티튜트에 농인을 위한 반이 개설되었을 때 자원 교사로 봉사하기도 했다.

 

1959년 미국 하나님의 성회 국대선교국 청각 시각 장애인 사역 국내 담당자 스트로브리지

 

    스트로브리지는 19619월에 손의 사역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간략하게 자신의 농인 사역 신학을 피력했다.

 

그리스도의 펼친 손은 사랑과 불쌍히 여기심을 보여준다. 오병이어 이야기에서 그리스도는 배고픈 무리의 필요에 직면하셨다. 어머니들이 그들의 자녀들을 축복하심을 바라며 주님께 데리고 왔을 때, 그분은 그들을 자신의 팔로 안고 안수하시며 축복하셨다(1:16).

예수님의 손들의 가장 놀라운 사역은 그 손들이 여러분과 저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개인들에게 사역하기 위해 자기 손들을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많은 다른 사례들이 있다. 예수께서 팔복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군중으로부터 한 문둥병자가 그분에게 나아왔다. 그러자 예수께서 손을 뻗어 그를 만지셨다. . . .(8:3). 즉시 그 문둥병자는 온전히 나았다.

한 관리에게 중병에 걸린 딸이 있었다. 그는 예수님께 자기 딸에게 안수하시면 그녀가 살 것이라고 말하며 믿음을 표현했다. 예수께서는 방으로 들어가셔서 그녀의 손을 잡자 그녀가 일어났다(9:25). 예수께서는 바쁜 중에도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 그분의 손을 뻗으셨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우리의 손을 사용할 수 있는 많은 길들이 있다. 농인들을 위한 선교사들은 수어로 의사소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역하기 위해 손을 사용하고 있다. 그 결과 수 백 명의 농인들이 구원을 받아왔다. 그리스도인 농인들은 전 세계의 농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듣기를 염원하고 있다. 미국의 몇 농인 그룹들이 세계의 다양한 곳에서 농인들과 청인들 가운데서 신실하게 일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돕기 위해 우멘스 미셔나리 카운슬즈(Women’s Missionary Councils)를 조직해 왔다. WMC 회원들은 그들의 손을 주님의 쓰심에 맡겨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을 돕기를 바라고 있다.

모든 WMC 그룹들의 가장 중요한 사역들 중에 하나는 기도이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28절에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한다. 오직 우리의 마음이 정결할 때, 우리는 거룩한 손을 들고 하나님께 중보기도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가나안땅으로 가는 여정 중에 아말렉이 그들을 가로막아 싸우게 되었다. 그 전투 중에 모세, 아론, 그리고 훌이 그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모세는 하늘을 향해 그의 손을 이스라엘을 위해 중보기도했다. 모세가 기도하면, 이스라엘이 이겼다. 그의 손이 무거워지면, 아론과 훌이 그의 손을 받쳐주었다. 이 세 사람의 신실함으로 결국 승리했다.

선교사들은 오늘날 전 세계에서 어둠의 권능을 대항해 힘든 싸움을 싸우고 있다. WMC 그룹들은 중보기도를 통해 선교사들의 손을 받쳐주어야 한다는 책무를 인식하고 있다.

외국의 농인들의 영적 필요는 그 청각장애 여성들의 마음에 부담이 되어 왔다. 이 큰 필요의 한 사례는 한 청각장애 필리핀인이 최근 보낸 편지에서 드러났다. 그는 필리핀 섬들에 65,000명의 농인들이 있는데, 이 몇만 명의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개신교 교회는 단 하나도 없다고 썼다.

멕시코에 있는 한 선교사의 편지는 어떻게 우리가 이 나라의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 농인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요?”라고 묻고 있다.

 

    정상문 목사가 20대인 1960년대부터 장애인 사역에 뛰어들어 지난 60년 동안 장애인 사역을 붙들고 온 계기는, 그 자신이 장애인이었다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치유 받고 목회자로 헌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2세 때 양잿물을 먹은 뒤 4세 때 포도막염으로 양쪽 시력을 잃을 위기에 처했고, 1년에 3~4차례 눈의 백태를 걷어내는 치료를 받아야 했던 정 목사는 중학교 3학년 때인 1960년에 전도되었다. 당시 시력을 회복하고 자유로운 언어 구사 능력을 주시면 장애인을 위한 목사가 되겠다고 눈물로 기도하던 그는 19631월 김제 신풍교회에서 조용기 목사가 인도하는 부흥회에 참여해 설교 중 은혜를 받고 기적적으로 고침 받았다. 그해 3월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해 농인부에서 수어를 배우고, 1964년 스트로브리지 선교사의 지원으로 인천에 농아교회를 개척했으며, 신학교를 마친 후에는 1971년 전주에 에바다 농아교회를 설립했다.

 

정상문

 

    맥신 스트로브리지는 1967년 한국의 농인들에게 선교하기 위해 8년 동안 감당했던 미국 하나님의 성회 국내선교국의 농아사역 전임담당 직책을 사임했다. 그녀의 한국 선교를 위한 사임 소식은 Advance19674월 판에 실렸다. 1967515일에 발간된 미 하나님의 성회 목회자 선교사 인명부는 스트로브리지라는 이름을 해외선교사 부분에 올리고 그녀의 주소를 한국, 서울, 중앙 사서함 385, 하나님의 성회 선교회(Assemblies of God Mission, Central P. O. Box 385, Seoul, Korea)라고 표기했다. 그녀는 196712월에 한국으로 향했다. 미국 하나님의 성회 국내 선교국에서 제일 유능했던 농인 사역 전임 담당자가 저개발국가 한국에 왔다. 스트로브리지의 한국명은 서복지였다.

 

1967년 스트로브리지

 

    스트로브리지는 주로 미 정부의 일을 수행하며 사적으로 한국 농인을 위해 일했던 헤이니 보다도 본격적인 농인 전도사업을 시작했다. 그녀는 부산을 중심으로 전국에 에바다농아교회를 개척하는 것을 주도하고 돕기 시작했다. 그녀의 노력은 2010년이 되자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농아교회 지방회인 특수지방회에 소속된 교회는 42개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되었다.

 

1970년 한국 농인 선교 지원 요청 포스터

 

    197246일에서 9일까지 미주리, 스프링필드에 있는 센트럴 바이블 칼리지와 하나님의 성회 본부에서 이년마다 열리는 농인 집회의 제9차 집회가 열렸다. 미국 전역으로부터 350여명이 모였다. 그 집회의 주제는 성령으로 충만케 하소서였다. 농인 공동체와 그들의 지도자들의 삶 안에서 그리고 그 삶을 동해 성령의 역동적인 사역이 특히 강조되었다.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은 해외선교국과 국내선교국의 농인부의 협력 워크샵이었다. 한국 농인을 위한 선교사 스트로브리지와 델머 균즈(Delmer Guynes), 켓참(M. L. Ketcham), 그리고 에드로렌스(EdLawrence)가 그 워크샵의 주요 페널들이었다.

    스트로브리지가 전국적인 에바다농아교회 개척 이외에 그녀의 역량을 쏟아부었던 것은 에바다농아원의 운영이었다. 미국인 더글라스 크레이머(Douglas Cramer)1964년 평택에 고아들을 수용하는 사회복지법인 어린이 동산 보육원을 설립했었다. 어린이 동산 보육원은 1970121일에 에바다농아원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농아들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4년 후인 1974년에 스트로브리지가 그 법인의 이사장이 되었다. 이때 최성만 목사가 이사로 참여했다.

 

 

초기 에바다 농아원 모습

 

 

    1977특수교육진흥법이 제정돼 특수교육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촉구하는 내용이 마련되면서 특수교육대상자를 선정하고 국가 및 지방자치 단체는 특수교육진흥을 위한 시책을 강구하도록 했다.

 

1977년 단기선교팀과 스트로브리지

 

    스트로브리지는 1982년에 한국을 떠났다. 그 고아원을 방문했던 한 미국인 단기선교사는 스트로브리지와 그녀의 사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맥신은 우리에게 이 고아들은 대부분 버려진 아이들이라고 말했다. 어떤 한국 부모는 그들의 아이가 듣기와 말하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아이를 유산시키려고 한다. 그게 성공하지 못하면 그들의 갓난아이를 철도나 버스 정류장에 버리거나, 어떤 사람이 그 아기를 데려가기를 바라며 공공장소에 두고 가기도 한다. 한국에는 그런 아이들이 수천 명에 이른다. 하나님께서는 이 불행한 아이들을 위한 부담을 맥신 스트로브리지의 마음에 두셨다. 그녀는 몇 개의 건물들이 있는 수 에이커의 땅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 땅과 건물들을 고아원으로 개조하는 것은 많은 믿음과 재간을 요구했다. 그녀는 고아들을 하나씩 모았다. 그 아이들은 음식과 피난처를 제공받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양육과 권고 안에서 자라나고 있다. 스트로브리지는 그들 중 많은 아이들을 입양시킬 수 있었다. 사실 그녀는 극도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일했다. 몇 번은 도둑들이 그 집에 침입하여 그녀의 세간과 물건들을 훔치려 했다. 어느 날 저녁에 그녀는 그 고아원에 맞닿은 그녀의 집의 거실에서 들려오는 어떤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스트로브리지가 재빨리 일어나 거실을 바라보았을 때, 두 남자가 그녀의 물건들을 챙기고 있었다. 한 남자가 돌아서서 그녀를 보고는 한마디 말도 없이 도망쳤다. 다른 남자는 그녀를 보지 못하고 계속 훔치려는 물건들을 모았다. 감히 고아원에서 물건을 훔치려는 그 도둑들에 화가 치밀어 오른 그녀는 그의 뒤에 조용히 다가가 팔을 들어 올려 손날로 그의 목을 내리쳤다. 깜짝 놀라 거의 정신이 반쯤 나가 그 남자는 소리를 지르며 팔에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떨어트리고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 고아원을 방문한 후 종종 무엇이 스트로브리지를 그런 한국 고아원과 같은 곳에 있게 하는지 궁금했다. 이외에 다른 대답이 없을 것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이 그녀에게 주신 소명에 대한 헌신이다.

 

    최성만은 스트로브리지가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기증한 약 6,000평의 땅과 전국 에바다 교회에서 출연한 2,000만원, 기타 기부금 4,000여만원으로 법인을 재설립, 이사장이 되면서 명칭을 사회복지법인 에바다농아복지회로 바꾸고 현재의 위치인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하북4129-23으로 이전했다. 그 복지회의 설립 목적을 장애인재활시설 설치운영 사업, 특수학교 설치운영 사업, 기타 장애인 복지에 관한 사업으로 정했다. 1986년 농인 특수교육시설인 에바다학교(Ebada學校)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1995년에 에바다장애인종합복지관을 건립했다. 법인명칭도 에바다복지회로 바뀌었다. 현재 에바다복지회 산하에는 고아 농아를 수용하는 에바다농아원(현 에바다마을)과 농아들의 교육시설인 에바다학교, 장애인 이용 ­요양­재활시설인 에바다장애인종합복지관이 있다.

 

 

에바다 마을

 

현재의 아베다학교

 

 

V. 나가는 말

 

    이렇게 한국 농인들에 대한 오순절적 순복음 전도에 의해 탄생한 교회를 중심으로 시작되어 농인시설이 더해졌던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국내농인선교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1953년에 결성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는 1958년에 농인 국내선교를 시작했다. 그 기원은 미국위문협회(U.S.O)의 한국지부 사무국장으로 195811월경에 내한했던 베티 헤이니(Betty S. Haney)였다. 헤이니의 한국 농인 사역은 1959년부터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국내선교국 농인사역 전임담당자로 사역하다가 1968년 초에 내한하여 1982년에 떠난 맥신 스트로브리지(Maxine Strobridge)에 의해 확장되었다. 헤이니의 농인 순복음선교는 부산에바다교회를 형성시켰고, 청인으로서 한국 농인 목회와 사역에 뛰어든 최성만을 길러내었다.

 

스트로브리지의 농인 선교는 에바다교회 개척을 전국적으로 확대시켰으며, 에바다농아원이라는 농인시설을 탄생시켰다. 미 정부의 고용인으로서 공적 직무를 감당하면서 한국 농인 선교를 동시에 수행했던 베티 헤이니와는 달리 맥신 스트로브리지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에서 국내선교국 농인담당 전임사역을 수행하며 길러진 그녀의 역량과 모든 시간을 한국 농인 선교에 쏟아부었다.

    로티 리크호프에게서 수어를 배웠던 베티 헤이니와 맥신 스트로브리지의 한국 농인 사역은 전후 복구기인 1958년부터 개발과 고속 성장기인 1982년까지 24년간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농인 선교의 뼈대를 만들고 살을 붙여 한국 농인 오순절적 순복음선교의 자립 기반을 형성시켜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