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Pentecostal Missionary to South Korea,
Richard Lawrence Johnston

이창승
2025.7.2./2025.9.19.
I. 들어가는 말
리차드 L. 존스턴(Richard Lawrence Johnston) 내한 선교사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가 2003년에 발표한 “희년 50인” 중 일반 선교사 부문에 선정되었다. 그가 한국에서 이룬 업적을 고려할 때, 그는 마땅히 아더 B. 체스넛처럼 “교단 발전공로자” 또는 존 스테츠 처럼 “교단 발전기여자” 정도로는 추대되었어야 했다. 체스넛이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라는 교단이라는 대지와 기초를 마련했다면, 존스턴은 그 대지 위에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재단법인이라는 기둥과 순복음신학교이전과 신축, 글로벌컨퀘스트의 파일럿 프로그램 시동 등 벽들을 세우고 그 안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존 스테츠가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공식적인 첫 내한 선교사였고,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재단법인을 추진하기 시작했었지만, 그 혼자의 역량으로는 그것을 이루어낼 수 없었고, 존스턴이 합류하여 밀어붙였을 때 비로소 이룰 수 있었다. 그만큼 존스턴의 업적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발전에 결정적이었다.
그동안 존스턴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해왔던 이유를 추정해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이유는 그가 활동했던 당시에 대한 자료가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존스턴의 그런 중요한 업적은 1956년과 1957년 사이에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안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한 보다 상세한 상황 자료가 주어졌을 때 정당하게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그 자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그의 업적은 제대로 평가될 수 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그가 비교적 단기간 내한했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에 체스넛처럼 3년 정도, 다른 오순절 내한 선교사들에 비교해 단기간 내한했다가 소천했기 때문에, 이후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공식 역사기록들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소홀하게 여겨졌다.
본 글은 최대한 당시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최대한 확보하여 존스턴의 내한 선교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해 보기를 시도한다. 이 시도는 그의 탄생에서부터 소천까지의 전 생애에 대한 고찰과 함께 병행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재단법인화 과정에서 발생했던 존스턴과 허홍 목사 사이의 마찰 또는 줄다리기, 힘겨루기가 드러날 것이며, 그의 갑작스런 소천의 시기와 이유에 대한 추정이 수행될 것이다.
II. 탄생과 성장
리차스 L. 존스턴은 딕 존스턴(Dick Johnston)으로도 불렸다. 딕 존스턴은 1919년 7월 29일에 태평양 연안에서 케스케이드 산맥 너머 고원지대 계곡, 워싱턴 주, 왈라왈라(Walla Walla, WA)에서 태어났다. 왈라왈라(Walla Walla)는 미국 서북부의 캐나다와 접하고 있는 워싱턴주 왈라왈라군의 군청 소재지이며, 군 최대 도시다. 1920년 왈라왈라의 인구는 15,503명이었다. 워싱턴주 남동쪽에 위치하며, 시애틀에서 차로 약 4시간 거리이며, 오레곤 주 경계에서 34km 거리에 위치한다. 여름에는 무더운 지중해성 기후를 띄고, 겨울에는 매우 추운 곳이며, 농업도시로 그곳 양파가 유명하다.



경건한 랄프 존스턴 부부(Mr. and Mrs. Ralph Johnston) 슬하에서 그는 어린 나이에 하나님을 위해 봉헌되었다. 그리스도의 나라의 증진은 그의 삶의 열망이 되었다. 현재 왈라왈라 1919 Fern Ave에는 퍼스트 어셈블리 오브 갓(First Assembly of God)이 존재하는데, 그 교회가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그리고 존스턴이 그 교회에 다녔는지는 파악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 교회에 다녔을 가능성은 높다.




존스턴은 1939년 2월에 왈라왈라 고등학교(Walla Walla high school)를 졸업할 때까지 워싱턴 주 동부에서 살았다. 왈라왈라 고등학교는 퍼스트 어셈블리에서 남쪽으로 300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1889년에 개교했고, 1936년에 새로운 체육관이 지어진 그 고등학교는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공립학교다. 그는 왈라왈라 고등학교 1937년 앨범 37쪽에서 ROTC 학생들 가운데서 소총수들 가운데 등장한다. 그리고 1938년 앨범 51쪽에서 4학년 학생들(Seniors) 가운데 등장한다. 그의 이름 밑에는 “Legislative Assembly Future Craftsmen of America, Fisher Body Craftsmen Guild”라는 그가 학생시절에 속한 단체들이 열거되어 있다. 앞 단체는 학생들의 지도력과 기술 증진을 학문적으로 추구하는 전국적 단체다. 뒤 단체는 제너럴 모터스가 젊은 디자이너들을 위해 마련한 프로그램이다.








존스턴은 20세가 되는 1939년에 미국 하나님의 성회 북서부 지방회 산하 노스웨스트 성경학교(Northwest Bible Institute)에 입학하여 학생 기숙사에서 지냈다. 그 학교는 1934년 10월 1일에 시애틀, East 69th Street and 8th Ave. N. E.에 1927년부터 자리 잡고 있던 교회, 할리우드 템플(Hollywood Temple, 현재 Calvary Christian Assembly)의 시설을 사용하여 설립되었고, 1949년에 Northwest Bible College로, 1962년에 Northwest College of the Assemblies of God로, 2005년에 Northwest University로 명명되었다.
그의 사진이 그 학교의 1939년 앨범 32쪽에서 1학년 학생들(Freshmen) 가운데 “딕 존스턴”(Dick Johnston)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 앨범 53쪽에는 선교사가 되기 원하는 학생들이 자원하는 선교지별로 묶어져 제시되는데, 존스턴은 동양(Orient) 파트에 올려져 있다. 또한 58쪽에는 학교 성가대 테너 파트 대원 목록에, 그리고 59쪽에는 오케스트라 트럼본 연주자 목록에도 올라있다. 존스턴은 음악적 자질이 풍부한 동양선교를 지향하는 신학생이었던 것이다.





그 학교 앨범 1941 - 1942년 판 29쪽에는 3년 과정의 3학년 학생들 가운데 워싱턴 주 남동부에 위치한 왈라왈라(Walla Walla, Wn) 출신의 “Johnston, Richard L.”이 라는 인물의 이름이 비로소 등장한다. 그는 1941년에 노스웨스트 바이블 인스티튜트(Northwest Bible Institute)를 졸업했다.


존스턴은 신학교 졸업 즉시 고향 왈라왈라에서 남동쪽으로 직선거리로 100Km정도 떨어진 오레곤 주, 월로와(Wallowa, Oregon)에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시작했다. 현재 월로와 702 W. Hwy 82에는 월로와 어셈블리 오브 갓(Wallowa Assembly of God)이 존재하지만, 홈페이지가 없고, 페이스북에 개정을 갖고 있으나 그 역사가 파악되지 않는다.





존스턴은 1942년 3월 31일에 헤릿 캠퍼(Harriet Kampfer)와 알바니에서 결혼했다. 헤릿 캠퍼는 오레곤 주, 알바니(Albany, Oregon)에서 1920년 6월 12일에 아버지 존 캠퍼(John Kampfer)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태어나 이민 온 어머니 인게보그 피니스타드 캠퍼(Ingeborg Finstad Kampfer) 사이에서 넷째로 태어났다. 현재 알바니, 2817 Santiam Hwy. SE에는 Hope Church가 존재한다. 그 교회는 1922년에 설립되었고, 1925년에 The Full Gospel Assembly, 1930년에 Pentecostal Full Gospel Assembly, 1943년에 Albany Assembly of God, 1967년에 Albany First Assembly of God, 1985년에 Albany First Assembly, 2016년에 Hope Church of the Assemblies of God로 변경되었다. 캠퍼는 아마도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그 교회(Pentecostal Full Gospel Assembly)에 다녔을 것이다.






캠퍼는 노스웨스트 바이블 인스티튜트의 1939년 앨범 32쪽에 존스턴과 함께 1학년 학생으로 등장한다. 즉, 그녀는 존스턴과 그 학교의 동기동창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녀는 그 앨범 56쪽에서 성가대 소프라노 파트 대원으로 등장하며, 57쪽에서는 학교 오케스트라 바이올린 연주자로도 등장한다. 즉, 그녀는 존스턴과 함께 같은 학교 채플 성가대와 오케스트라에서 연주 활동을 한 것이다. 그런데 53쪽에 나타나는 선교그룹에서는 동양선교를 꿈꾸던 존스턴과 달리 캠퍼는 아프리카 선교를 꿈꾸는 것으로 나타난다. 1940년 앨범 44쪽에서 그녀는 2학년 부회장으로 나타나는 것에서 그녀가 매우 사교적이고 활달하고 지도력이 있는 여성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63쪽에서 그녀의 선교그룹이 동양으로 바뀌고, 그 그룹 명단에서 존스턴 이름 바로 다음에 그녀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음악적 취향과 재능이 유사하던 존스턴과 캠퍼가 학교 성가대와 오케스트라에서 함께 활동하면서 서로에게 끌리게 되었고, 급기야 캠퍼가 선교그룹을 아프리카에서 존스턴이 있는 동양으로 바꾸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존스턴은 1943년에 하나님의 성회 북서 지방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미 하나님의 성회 목회자와 선교사 명부에 의하면, 1945년에서 1949년까지 그의 주소지는 Box 130, Wallowa, Oreg이었다. 그런데 1950년 3월에 발간된 그 명부에 따르면, 그의 주소지는 Box 102, Glendale, Oreg으로 바뀌었다.
III. 일본 선교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존스턴 부부는 일본의 영적 필요들에 큰 부담을 갖게 되었다. 떠나기 전, 그들은 일본어를 배우도록 유니버서티 오브 캘리포니아(University of California)로 보내졌고, 거기서 그들은 비범하고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다. 그들은 1950년 10월, 한국에서는 치열했던 낙동강 전투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종료되고 서울이 수복되고 있을 즈음에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탔다. 1951년 2월에 발간된 미 하나님의 성회 목회자와 선교사 명부에 따르면, 그는 일본 선교사였고, 그의 주소지는 東京都 武蔵野市 西久 保105(105 Nishikubo, Musashinoshi, Tokyo-to, Japan)이었다. 아마도 그는 그곳에서 일본어 익히기에 매진했을 것이다.

당시 일본기독교단은 우상숭배로 인한 죄의 책임과 전쟁 책임을 자각하지 못한 채, GHQ(패전 후 일본에서의 미군정 사령부) 점령하에서 기독교 붐을 맞이했고(1946-48년), 신일본 건설 기독교 운동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전쟁기에 하나로 통합되었던 일본기독교단으로부터의 탈퇴도 이어졌다. 이윽고 붐은 잦아들고, 전후 프로테스탄트는 NCC 계열의 교회와 복음주의 계열로 양분되어 성장해 오면서 기독교 신자는 1948년 20만 명에서 1968년에 40만 명으로 증가했다.
존스턴 부부는 1951년 늦가을에 동경에서 서북쪽으로 90마일 떨어진, 아마산(浅間山) 부근의 한 작은 마을로 이동했다. 1952년 2월에 나온 미 하나님의 성회 목회자와 선교사 명부를 고려할 때, 그곳은 휴양지로 알려진 가루자와(軽井沢)였을 것이다. 그 명부에 따르면, 1952년 2월 이전에 그의 주소지는 “662 Karuizawa, Nagano Ken, Japan”(662 長野県 軽井沢市)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마을 주민들과 더 가까이 지내며 일본어를 보다 더 익힐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곳에서 기독교 선교에 큰 장애가 되는, 전후 한 동안 눌려 있던 일본의 전통적 우상숭배의 재흥을 경험했다. 일본의 우상숭배의 재흥의 원인은 아마도 한국에서 일어난 전쟁의 군수기지로 기능하면서 경제적인 안정을 찾게 되면서 겸손해졌던 일본인들이 자만, 거만해지고 자기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진 것이었을 것이다. 세계 2차 대전 종전 후 패전국으로서 일본 경제는 만신창이였다. 이런 일본 경제를 기사회생시킨 일등 공신은 6·25 전쟁이었다. “이것은 일본을 위한 천우신조(天佑神助)다!” 1950년 한국에서 전쟁이 터지자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당시 일본 총리가 무릎을 치며 이렇게 말했다. 미군 중심의 유엔군은 한국전쟁에 투입된 전쟁 물자와 서비스 등을 조달하기 위해 일본을 병참기지로 활용했다. 일례로 미군은 전투 중 파괴된 차량의 80%, 무기의 70%를 일본으로 옮겨와 수리했다. 군수물품 생산을 전담한 일본 내 공장도 860곳에 달했다. 한국전쟁 병참기지 역할을 하며 한국전 발발 직후 1년 동안 일본이 누린 경제적 이익은 3억 1,500만 달러(일본 경제안정본부 통계)에 달한다. 기계·자동차 등 물자 부문에서 2억 2,200만 달러, 기지 공사·병참 수리 등 용역 부문에서 9,300만 달러 수익을 거뒀다. 1950년 일본의 외화 수입 중 한국전쟁 관련 항목이 차지한 비율은 14.8%에 달했고, 1951년 26.4%, 1952년 36.8% 등 매년 10% 이상 올랐다(일본 외무성 통계). 이 덕분에 일본은 패전 7년 만인 1952년, 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의 경제 규모를 회복했다. 즉, 6.25 전쟁은 “後方基地日本”에게 “朝鮮特需”를 가져다 준 것이다.
신토(일본어: 神道), 혹은 신도는 일본 지역에서 발생한 애니미즘 신앙을 바탕으로 한 토착 신앙이다. 초기에는 자연물과 자연 현상 등을 신처럼 섬겼으나, 점차 조상이나 죽은 천황 등의 실존 인물들 또한 신으로 모시기 시작했다. “신토”라는 용어는 《일본서기》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는데, 처음에는 종교 의식이나 신, 신들을 모시는 장소인 신사(神社)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었다. “신토”라는 용어가 현재와 같은 일본 고유의 애니미즘 신앙을 가리키게 된 건 12세기 이후의 일이다. 에도 시대 이후 들어온 주자학 사상과 만나 교리가 체계적으로 정립되었으며,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국가의 주도로 신토의 교리를 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GHQ의 민주화 정책에 따라 교리 교육은 폐지되었고, 지역의 신사를 중심으로 종교 행사를 치르는 신사 신토로 남게 되었다. 전후 일본 종교는 신토, 불교, 기독교, 신흥 종교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며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특히 신토는 일본의 전통 종교로서 국가신토의 해체 이후에도 여전히 일본인들의 삶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존스턴은 이 일본의 우상숭배의 재흥을 『펜테코스탈 에반젤』을 통해 다음과 같이 미국에 알렸다.
우리는 일본, 도쿄도, 무사시노(武蔵野)로부터 서북쪽 90마일 거리에 있는 한 작은 마을로 이동했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 공부에 더 시간을 할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일본의 알프스로 불리는, 험준한 산맥들이 겹치며 우리의 작은 계곡을 둘러싸고 있는 일본에서 가장 경치 좋은 곳들 중의 하나에 거주하고 있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 아사마산(浅間山)이 있는데, 그 산은 일본에서 가장 활동적인 화산들 중의 하나이다. 그 산은 지금 언제든지 분화할 수 있고, 실제로 1년 내내 검은 유황 연기가 그 커다란 분화구에서 피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많은 미국인들은 일본이 옛 우상 숭배 관례를 버렸을 것이고, 그래서 더 또는 덜 기독교 국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진실에서 먼 것이라는 것을 알리게 되어 유감스럽다. 비록 얼마간 그들의 오래된 우상숭배 관례가 어느 정도 억제되었지만, 일본 사람들은 지금 그것은 이방신 숭배와 함께 옛 일본으로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해마다 8월이면 [13일부터 16일까지] 오본 축제(Obon Festival)가 열린다. [“오본”(お盆)은 양력 8월 15일에 기념하는 조상의 영을 기리는 일본의 명절이다. 메이지 유신 전 음력을 사용했을 때에는 음력 7월 15일에 기념하였지만, 음력을 완전히 폐지하고 양력을 사용하는 현대 일본 사회에서는 양력 8월 15일을 전후로 명절을 기념한다. 다만 오본절은 일본의 달력에서 공휴일로 표시되지 않는데, 이는 이 명절이 법정공휴일로 지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기간 관공서들은 업무를 보지만, 대부분 기업이나 관공서 부처에서는 오봉야스미(お盆休み)라 하여 직원들에게 명절 휴가를 준다. 현재는 오본 명절의 종교적 색채가 많이 옅어졌다. 오본절의 기원은 일본의 불교행사였던 우라본(盂蘭盆)이 신토와 결합하여 탄생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본”(盆)이라는 일본어 단어는 “식판, 쟁반”(tray)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본인들은 자기 집이나 신사에 그들의 사망한 조상들의 영혼들이 “연례 방문”을 위해 돌아올 때 먹을 수 있도록 음식을 담은 커다란 쟁반들을 놓는다. 신사에서 벌어지는 축제에는 많은 북을 두드리고, 섬뜩한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춘다. 얼굴에 가면을 쓰고 이방종교적 의상을 입은 사제는 사람들이 제를 올릴 때 그들에게 부채질을 하며 특별한 복을 빈다. 그는 신사 마루를 가로질러 앞뒤로 춤을 추면서 정령들의 귀환을 환영하며 쌀이나 다른 음식들을 던진다. 그리고 또한 악령들을 쫓아내기 위해 신사의 구석구석으로 화살들을 쏜다.


신사에서 그 제례가 진행되는 동안, 옆 건물의 교회에서는 복음적 선교사들이 그들의 연례회를 열고 있었다. 우리가 찬양하며 예배하며 진실하시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찬송할 때, 일본인들은 이방신을 숭배하고 있었다.
지금 일본은 이방신 숭배의 재흥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참된 말씀은 전진하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 증진을 주실 것이다. 일본 전역에 걸친 성령의 부흥을 위해 그리고 우리 선교사들이 이 어려운 일본어를 습득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라.
켓참에 의하면, 존스턴 부부는 일본에서 아마가사키(Amagasaki, 尼崎市)에 교회를 개척했고, 고베(神戸市)에 있는 보육원과 교회에서 사역했다. 1953년 3월 미 하나님의 성회의 목회자와 선교사 명부는 존스턴 부부가 “1-1743 Aza Tesaki, Sumiyoshi Cho, Higashinada Ku, Kobe”(1-1743 神戸市 東灘区 住吉町 字手崎)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준다. 그곳은 플로렌스 바이어 부부(Florence M. Byers, フローレンス・M・バイヤス)가 태평양 전쟁 전에 세운 “하나님의 사랑 보육원”(the God’s Love Children’s Home, 神愛子供ホーム)이었다.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을 떠났던 그들은 昭和 22年 8月, 즉 1947년에 8월에 다시 돌아와 神戸市 東灘区에 대지 668평, 건평 171평의 보호시설을 건축했다. 그 보육원은 昭和 25年, 즉 1950년 7월 18일에 효고현(兵庫県) 지사에 의해 “神愛子供ホーム”라는 명칭으로 아동 양호시설(정원 20명)의 허가를 받았다. 그리고 가정예배를 드리던 바이어스 부부는 1950년에 神戸市 東灘区 住吉 山手에 보육원 병설로 東灘神愛基督教会(현재 1-chōme-7-15 Mikage Nakamachi에 위치한 御影神愛キリスト教会)를 설립하고 일본 하나님의 성회 교단에 가입시켰다. 『펜테코스탈 에반젤』 1952년 9월 호에 고베의 보육원 사역에 대한 존스턴의 보고가 실렸다. 그는 그 보육원 사역을 통해 일본인들이 치유받고 복음화되는 것을 알렸다.





우리는 한 달 조금 넘게 고베(神戸市)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보육원에 있었다. 그 보육원은 1950년 초에 플로렌스 바이어 부부에 의해 개원되었다. 이미 열다섯 명의 아이들이 우리의 마음에 자리 잡았다. 그 보육원에 있는 아이들은 정말 고아들이다. 몇은 버림받은 아이들이었다. 나머지는 일시적으로 위탁되었었다. 지난달 네 살 먹은 신찬(Shin-chan)이 보육원에 들어왔다.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사망했고, 머물 집이 없이 남겨졌다. 보육원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는 더럽고 기가 죽어있었다. 그러나 목욕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다른 아이들과 접촉한 후, 그에게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다. 매일 저녁에 그 보육원 가족은 함께 모여 찬양하고, 간증하고, 그리고 기도했다. 신찬은 처음에는 다른 아이들이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나 이제는 힘을 다해 찬양한다. 그가 기도하는 것을 듣는다면, 당신은 감동할 것이다.
우리 보육원에서 얼마 전에 일하기 시작한 젊은 여인은 최근 여기 고베에 있는 다른 교회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녀가 불교도들인 그녀의 가족에게 마음에 들어오신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자, 그들은 그녀에게 집에서 나가라고 말했다. 그 가족들 중 그들이 그녀에게 소중한 것보다 더 그리스도가 그녀에게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젊은 여인은 그곳에서 그녀가 구원을 받은 교회의 목사의 집에 머물기 위해 갔다. 그녀는 그곳에 짧게 머물렀다.
그녀가 우리 보육원에 온 후에 그녀의 스물여섯 살 형제가 죽기 직전까지 갔다. 그는 암에 걸렸다. 의사들이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석가모니가 자기를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그 형제는 그녀의 신에게 기도해 달라고 그의 자매를 부르러 사람을 보냈다.
우리 중 몇 사람이 그 자매와 함께 그 병든 사람을 보기 위해 그 병원으로 갔다. 그는 말씀을 잘 받아들였다. 기도 후 그의 체온이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보다 나아진 것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그의 몸이 완전히 치유되고, 그의 가족 전체가 그리스도께 인도되도록 함께 기도하자.
존스턴은 『펜테코스탈 에반젤』 1953년 1월 호에 1952년 여름 집회의 끝 무렵에 있었던, 아마사키(Amagasaki, 尼崎市)에서 진행되었던 천막 집회와 그 결과 한 교회가 세워진 것, 그리고 교회건물이 긴급히 필요함에 대해 보고했다. 아마사키(Amagasaki, 尼崎市)는 고베에서 동쪽으로 약 10마일 거리에 그리고 오사카 서쪽에 접해있는 도시로서 효고현에서 인구 수로 네 번째이다. 주로 남부에는 공업 지역, 중남부에는 상업 지역, 그리고 중부에서 북부에 걸쳐 주택지가 펼쳐진 형태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 보고에서 존스턴은 조상신숭배의 견고함과 공산주의의 확산이라는 짙은 영적 어두움 속에서 영혼을 구출하려는 지난한 노력을 소개했다.
무더운 여름이 끝나고, 우리는 이제 우리의 겨울 사역의 한 가운데 있다. 우리의 여름 활동들은 아마가사키에서 열린 놀라운 천막 집회로 종결되었다. 아마가사키 시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고베에서 약 10마일 거리에 있다. 아마가사키의 인구는 40,000명이며, 이 지역에는 그 어떤 교회도 없다. 그 사람들이 밤마다 복음을 얼마나 열중하여 듣는지! 우리의 자그마한 천막은 말씀을 들으려고 더 가까이 오려고 밀어붙이는 군중을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작았다. 우리의 마음은 기뻐했고, 우리는 매일 밤, 하늘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의 이름들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둠의 보물들 또는 어두운 곳들에 숨겨져 있는 보물들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누구든 이 이방인의 땅에 오면, 그 사람들의 영적 어두움을 실감할 것이다. 모든 고지와 모든 작은 숲에는 이방신들을 숭배하는 장소, 신사가 있다. 모든 가정에는 또한 신을 모시는 선반이 있어서 가족 각 구성원은 아침을 먹기 전에 절해야만 한다. 어둠은 짙지만, 우리는 아마가사키 천막 집회 동안 육십에서 칠십 영혼들을 얻어 새 생명을 얻게 한 것으로 인해 감사한다. 이 사람들은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고 있고, 주님을 섬기기 위해 주일마다 모이고, 한 작은 사람들로 꽉 차는 방에서 매 주일 모이고 있다. 빠른 시일 안에 전임 사역자가 세워지기를 우리와 함께 기도하자. 수요일 예배에 더해 정기적인 주일 예배들을 드릴 수 있는 교회 건물이 매우 필요하다.
자, 여기 일본에서는 여름이 가고 이제 풍성한 곡식을 거둘 때가 다가오고 있다. 높이 뻗은 줄기들은 곧 갈색이 될 것이고 무거운 이삭들은 일본의 팔천삼백만 명을 먹이기 위해 거두어질 것을 기다리며 고개를 숙일 것이다. 곧 추수가 끝날 것이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해마다 보면서,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소중한 영혼들을 추수할 시간이 될까 생각하게 된다.
사단은 일본 사람들의 영혼을 차지하려고 별짓을 다하고 있다. 그와 그의 사악한 세력들은 종말이 오기 전에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공산주의가 크게 확산되고 있고, 공산주의의 끔찍한 원리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전개될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많은 젊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의향을 갖고 있지만,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경우 미래에 핍박을 받을 것을 겁내고 있다.
고개를 숙이고 추수를 기다리고 있는 벼 이삭들처럼, 일본 사람들도 사단의 핍박 아래 머리를 숙이고, 생명과 소망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너무 늦지 않게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해주기를 바란다. 우리 함께 해 돋는 땅에서 이 소중한 영혼들을 추수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자.

존스턴은 『펜테코스탈 에반젤』의 1953년 9월 호에 1953년 5월부터 3개월 동안 진행된 전도자 하비 맥알리스터(Evangelist Harvey McAlister)의 집회들의 결과를 보고했다.
일본은 성령의 엄청난 부으심의 복을 받았다. 5월에 도쿄에서 열린 정기 총회에서 칠십 명 이상의 일본인들이 성령침례를 받았다. 그리스도의 대사들 캠프 집회에는 일백 명의 청년들이 참석했다. 그 이전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했었던 이십사 명 모두가 그 삼일 동안 충만함을 받았다. 우리의 많은 일본 교회들이 성령의 은혜로운 부으심을 경험했다. 전도자 하비 맥알리스터(Evangelist Harvey McAlister)가 우리 가운데서 사역하던 지난 삼 개월 동안 삼백 명도 훨씬 넘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고 다른 방언으로 말해왔다.
유미야마 선생은 일본 하나님의 성회의 총회장이며, 도쿄에 있는 일본 중앙 성서 학교의 교장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칠백 명 이상의 일본 신자들이 커다란 기둥 네 개 천막 아래서 볏짚 멍석에 앉아있다. 분위기는 기대로 들떠있다. 일본을 두 번째로 방문한 하비 맥알리스터 형제는 강단으로 올랐다. 넘치는 기쁨으로 탄성이 청중들로부터 자연스럽게 터져 나왔다. 왜냐하면 우리 일본인들은 맥알리스터 형제를 알고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몇 청년이 그 집회 첫날 저녁에 영광스럽게 성령 침례를 받았다. 중년의 목회자 호리카와(Horikawa)는 일 년 전에 교단에 가입했었다. 그의 머리는 은백색인데, 그것은 우리 나라에서 높은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아들은 우리 성경학교의 학생인데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었고, 이 아들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질이 호리카와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기를 고대했었다. 그가 오랫동안 간절하게 하나님을 구한 것이 헛된 것 같았다. 그는 좌절하고, 거의 단념했었다. 그러나 성령을 구하는 구도자들에게 주어진 단순한 가르침들을 들으면서, 그는 많은 잘못된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앙에 대한 새로운 고취에 붙들린 그는 어린아이 같은 단순함을 가지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집회의 마지막 날 저녁에, 쉽게 그는 다른 방언을 터뜨리는 아름다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의 아내는 같은 집회에서 성령을 받았다. 그들은 자기 교회의 교인들을 그 경험으로 인도하리라고 결심했다. 한 주간 동안 세 명을 제외하고 참석자들 모두 성령을 받았다. 오랫 동안 목회한 성결교회 목사는 그가 듣고 본 것에 감동을 받아 그와 그의 교회가 우리 교단으로 가입하는 것을 문의했다. 그는 열 개의 지교회를 가지고 있다. 그의 사역지는 쿠슈 섬인데, 최근 큰 홍수가 났다. 맥알리스터 형제가 고베에 있을 때, 이 성결교회 목사는 바라던 것을 받았다. 그는 어느 날 아침 다른 두 일본인 목사들과 함께 기도하다가 오순절적 충만함으로 성령 충만을 받았다. 그의 두 딸은 그리스도의 대사들 캠프 집회에서 성령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보육원과 연계된 고베(神戸市)에 있는, 존스턴이 이끄는 미카게 교회(御影 教会)에서 구원하고 치유하는 능력으로 놀랍게 역사하셨다. 치유의 한 현저한 사례가 있다. 한 젊은 일본인이 전 생애 동안 색맹이었었다. 그는 녹색을 분간할 수 없었다. 그에게 녹색은 흐린 회색으로 보였다. 그러나 기도를 받았을 때, 그의 시력은 곧 정상이 되었다. 꽃병 안의 꽃들의 녹색 잎들을 보고는 감격했다.
또 다른 청년은 등뼈에 발생한 심각한 질병 때문에 너무도 어두운 미래를 갖고 있었는데, 온전하게 치유되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그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바치기로 작정했다. 류마티즘으로 고통을 받고 절뚝거리며 겨우 걷던 한 중년의 부인은 즉시 구출을 받았다. 모든 고통에서 해방된 그녀는 가파른 산을 오르며 집으로 걸어갔다. 주일 아침 예배에서 열다섯 명이 성령충만을 받았다. 일본인 목사 키쉬베(Kishibe) 선생은 맥알리스터의 풍성한 말씀 사역을 마음을 다해 칭찬했다.

『펜테코스탈 에반젤』의 1954년 11월 호에는 1954년 여름에 토바산(鳥羽山)과 반다이산(磐梯山)에서 열렸던 일본 그리스도의 대사 캠프 집회에 대한 존스턴의 보고가 실렸다. 토바산은 시즈오카현, 하마마스시에 있다. 서쪽으로 맞닿아 있는 텐류강이 거의 반원으로 굽이쳐 흐르는 곳에 절벽처럼 접해있으며, 그곳으로부터 산악이 시작되는 그렇게 높지 않은 산이다. 토바산과는 달리 반다이산(磐梯山)은 일본 후쿠시마현의 본격적인 산악지역에 있다. 일본 백명산 중 하나로, 현재도 활동하는 활화산으로 알려져 있다. 화구는 1888년 대분화로 인하여 대량의 화쇄류가 발생하여 분화구가 함몰되어 지금의 모습이 형성되었다. 총 461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이 분화로 인하여 2개의 호수가 형성된 걸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계속해서 여러 분기공들에서 연기를 분출하고 있다.


어느 늦은 오후에 우리는 일본, 하마마쓰(浜松) 근처에 있는 토바산(鳥羽山)에 도착했다. 우리는 먼지를 뒤집어썼고, 그리스도의 대사 캠프장(Christ’s Ambassadors campgrounds)에 이르는, 거의 통행할 수 없는 길을 달리는 험하고 긴 여로로 지쳐있었다. 집회를 위해 우리의 복음 천막을 치면서 예수님께서 친히 임재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베드로가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막 9:5]
올해 여름 캠프의 주제는 사도행전 1장 8절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네 증인이 되리라”였다. 우리는 미국 프로그램과 연계된 “원 – 에잇 개인 전도 프로그램”(One-Eight personal evangelism program)을 강조했다. [미국 그리스도의 대사(Christ’s Ambassadors) 전국총회는 1954년 4월 25일에 “원-에잇” 프로그램(One-Eight program)을 시작시켰다. “원-에잇” 프로그램의 성경 본문은 사도행전 1장 8절이었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은 그리스도의 대사 회원 한 명이 일주일에 여덟 부의 소책자를 배포하는 활동을 기본으로 삼았다.] 일본어로 된 적합한 소책자들의 부족 때문에, 우리는 일주일에 여덟 부의 소책자를 배포하는 것을 많이 강조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들 개개인이 일주일에 여덟 명의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증거한다면, 교회들은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 비전은 폭발적인 환영을 받았지만, 그러나 그 청년들은 효과적인 증인들이 되려면, 먼저 하나님의 권능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메시지들이 죄, 십자가, 그리고 성령에 하루 하루에 할당되어 전해지자, 그 청년들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그리고 재충만함을 받기 위해 자신들을 십자가 밑에 “던졌다.” 성령께서 백팔십사 명의 청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자, 프로그램들이 변경되었고, 찬양과 설교들이 보류되었다. 그들은 집회들 사이 사이에 하나님께서 계속 역사하시는 동안 캠프장 곳곳에서 찬양하며, 기도했다.
그 캠프 마지막 저녁에 고베 주재 선교사 폴 버그(Paul Berg)가 분발시키는 헌신 메시지를 전했다. 우리는 캠프파이어 시간을 가졌다. 그 청년들, 일본인 목회자들, 그리고 선교사들은 자신의 삶을 헌신의 제단에 드리는 마음으로 솔방울과 장작을 불 속에 던졌다. 각자는 일본에서 주님을 위한 보다 나은 봉사의 삶을 살 것을 다짐했다.




우리는 다음날 짐을 싸 이 거룩한 축복의 산을 떠날 것을 생각하니 아쉬웠다. 받은 복이 그저 또 다른 하나의 곧 잊혀질 산정 경험이 되지 않기를 기도했다. 하나님을 위한 일상의 봉사라는 평지에 복귀했을 때도 그 받은 복이 계속되기를 바랐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우리가 떠나는 날 이른 아침에 기도와 경배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우리의 오두막 바로 위에 있는 커다란 소나무 아래서 나이 든 일본인 목회자 한 사람이 성령 충만을 구하는 한 청년과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 그 청년은 그의 마음이 원하는 것을 받을 때까지 그 거룩한 곳을 떠나지 않으리라 결심했었다.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그때 그곳에서 그를 만나주셨다!
며칠 후, 우리는 일본 북부에 있는 아름다운 반다이산(磐梯山) 기슭으로 여행했다. 그곳에서는 그 지역 그리스도 대사 연례 캠프가 열렸다. 거기에는 토바산에서 보다 청년들이 덜 참석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러 가는 분이 큰 능력과 영광 속에서 그곳에 계셨다.
이 그리스도의 대사 캠프에서도 우리는 개인전도를 강조했고, 많은 사람들이 원-에잇 프로그램의 비전을 붙들었다. 캠프가 끝나고, 우리 교회에서 온 청년 세 명은 멀리 일본의 “알프스”라 불리는 산악지역[아마도 닛코 국립공원]까지 복음 소책자들을 배포하며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증거하며 여행했다. 예수께서 그들을 돌보신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던 사람들에게 생명의 소식을 전했을 때, 그들의 경험들은 다양했고 흥미를 보였다.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청년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대사(Christ’s Ambassadors)는 1926년에 총회의 승인을 받아 전국적 조직으로 결성되었었다. 존스턴은 1954년 일본 하나님의 성회 총회에서 그리스도의 대사 회장으로 지명되었다. 1955년 1월에 발간된 미 하나님의 성회 목회자와 선교사 명부에 따르면, 존스턴 부부의 주소지는 아마사키시의 서쪽에 접해있는 니시노미야시 “2-103 Watarise, Naruo Cho, Nishinomiya Shi”(2-103 渡瀬, 鳴尾町, 西宮市)이었다.


존스턴 부부는 1955년 10월에 휴가차 5년 만에 귀국했다. 1956년 2월에 발간된 미 하나님의 성회 목회자와 선교사 명부는 일본 선교사인 그가 아내의 고향, 오레곤 주, 알바니(Albany, Oregon)에서 휴가 중이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1957년 3월에 발간된 그 명부는 존스턴의 휴가지 주소를 보다 상세하게 “1520 Calapoosia St, Albany, Oreg”으로 표기했다.




IV. 한국 선교
그런데 5년간 누적되었던 긴장과 피로를 풀면서 일본 선교의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을 존스턴에게 예상치 못했던 급격한 변화가 닥쳐왔다. 미 하나님의 성회 해외 선교국장 퍼킨은 존스턴에게 급하게 한국행을 요청했다. 당시 극동지부장이었던 켓참에 따르면, 그가 황급하게 한국 선교사로 재배치된 이유는 그의 일본어 실력 때문이었다. 켓참에 의하면, “비록 한국에서의 오순절적 간증의 특별한 영향이 경이로운 발전을 일으켜 왔었었지만, 하나님의 성회의 사역은 너무 빠르고 얼마큼 난잡한 성장(slightly indiscriminate growth)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에 어떤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었다. 그런 위기 상황에서 “한국에서 넓게 말해지고 있는 일본어와 다른 동양어[아마도 한문]에 대한 그들의 지식 때문에, 존스턴 부부는 특별히 한국에서의 사역에 적임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퍼킨과 켓참의 판단에는 한국인 교역자들과 통역을 거치지 않고 자유롭게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선교사에 대한 요구가 절실했다는 것이 반영되어 있었다.
종합해보자면, 해외선교국은 당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심각한 문제는 영어를 한국어로, 한국어를 영어로 통역하는 사역자와 관련된 것이라고 진단했으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런 문제가 되는 통역을 거치지 않고, 한국인 사역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선교사를 찾다가 일본어로 어느 정도 소통할 능력을 갖고 있고, 5년간의 선교 경험을 갖고 있는 일본 선교사 존스턴을 투입하기로 처방,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당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목회자들과 교역자들 대부분은 일본 치하에서 일본어로 교육을 받고 일본어로 생활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존스턴은 퍼킨으로부터 예상치 못했던 선교지 변경 통보를 받고 무척 당황했을 것이다. 오직 일본 선교에 초점을 맞추고 전력을 다 해왔는데, 그리고 어느 정도 성과를 내기 시작한 상황에서 생각하지 못한 때에, 생각해 보지 않은 한국으로 변경배치는 처음에는 존스턴을 화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곧 일본 선교의 미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을 것 같다. 극복하기에 너무도 견고한 장벽 같은 일본의 영적 어두움은 그의 전력투구에도 불구하고 선교적 열매를 미미하게 만들었었다. 그런 어려움은 미래에도 계속될 것 같았을 것이다. 여러 가지 사항들을 신중하게 숙고했을 존스턴은 마침내 한국 선교를 수락했다.
존스턴 부부는 1957년 1월 한국에 도착했다. 미 하나님의 성회 목회자와 선교사 명부의 1958년 1월 판은 선교지가 한국(Korea)인 존스턴의 주소를 “Assemblies of God Mission APO 301, San francisco, Calif”라고 표기했다. 이런 표기는 1957년에 존스턴이 내한했지만, 아직 한국에 정확한 주소지를 갖지 못한 정착 과정 중에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메리 C. 럼시는 1957년 3월 2일에 허홍에게 쓴 편지에서 “존스턴 형제가 한국에 도착했을 것 같습니다. 당신과 스테츠 형제와 모두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라며 존스턴의 한국 도착을 언급했다.

그리고 1957년 4월 20일에 열린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제6차 총회에서 불과 3개월 전에 내한한 존스턴이 새 총리로 선출되었다. 존스턴은 불과 3개월 동안 일본어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교역자들과 비교적 자유롭고 광범위하게 소통하며 미 하나님의 성회의 의도와 계획을 알렸을 것이고, 그에 동조하는, 존스턴이 총리가 되는 데 필요한 수의 교역자들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켓참은 존스턴이 총회장으로 사역하면서 했던 일들 중의 하나를 “한국에서의 사역 재편을 도왔다”(Dick Johnston helped reorganize the work)라고 기술했다.
허홍은 1930년에 내한했던 메리 C. 럼시이래로 내한 선교사들과 한국인 교역자들 간의 때로는 유일하고 중요한 통역자였다. 미 하나님의 성회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문제가 허홍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판단하고 존스턴을 한국에 급파하여 허홍이 계속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총리가 되는 것을 저지한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주도권과 조직을 선교사 중심으로 재편한 것이다. 미 하나님의 성회는 그렇게 하는 것이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발전에 좋은 길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당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교회에 일어났던 문제는 무엇이었으며, 미 하나님의 성회가 허홍을 그 문제의 원인으로 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표면적으로 그 문제는 선교사 주도의 재단법인 설립을 계획하고 추진했고, 그에 대해 사적인 물욕에 빠진 허홍과 그의 추종자들이 그것에 반대하여 생긴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선교사와 한국인 교역자의 주도권을 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초대 총리 체스넛은 1955년 봄에 휴가를 간 후 돌아오지 않았고, 기둥 같았던 박성산이 1956년 3월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허홍은 그런 상황에서 정기총회일보다 한 달 전인 1956년 4월 26일에 열린 임시총회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총리가 되었다. 사실, 허홍은 이미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1940년에 선교사들이 모두 떠난 기독교오순절교회의 제3대 포교관리자가 되었었다. 미국 하나님의 성회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총리가 된 허홍을 스프링필드 총회본부로 초청했고, 허홍은 1956년 8월 27일에 비행기로 미국 시애틀을 향해 떠나 미주리 스프링필드에 있는 미 하나님의 성회 본부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체스넛의 갑작스런 공백으로 예상치 않게 총리대행이 되었었으나 자신의 고사와 허홍의 강력한 주도로 총리직을 허홍에게 넘겨준, 선교 경험이 너무도 부족하고, 통역을 통하지 않고서는 한국어로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고, 상황파악과 주도권 장악에 어려움을 겪던 스테츠(John Stetz)는, 아마도 미 하나님의 성회의 정책을 따라, 재단법인을 만들어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산하 교회들의 재산을 재단법인에 귀속시키고 이완식에게 맡기려 했다.
재단법인(財團法人, Foundation)은 사단법인이 사람에 의해 구성된 것과 달리 일정한 목적에 바쳐진 재산에 의해 구성된 법인을 말한다. 설립자가 생전에 재산을 내놓는 경우 그 재산은 법인이 만들어짐과 동시에 법인의 것이 된다. 설립자가 유언에 따라 재산을 내놓아 재단법인을 설립하면 유언의 효력이 발생함과 동시에 재산은 법인의 것이 된다(민법 48조). 재산이 법인의 본체(本體)인 점에서 사람의 집단을 본체로 하는 사단법인과 다르다(제32조). 사단법인은 영리 사단법인과 비영리 사단법인이 있으나, 재단법인은 모두 비영리 재단법인이다(민법 제32조). 재단법인을 설립하는 데에는 법인의 구성원이 아닌 설립자가 재단의 근본규칙인 정관에 의하여 법인의 조직을 정하고 주무관청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 법인설립자(재산을 출연한 기부자)의 의사에 의하여 정관에 정해진 대로 운영, 활동하며 의사결정기관을 별도로 갖지 않는다. 즉 재단법인에는 사원은 없으며 따라서 사원총회도 없다. 법인의 운영은 이사가 업무를 집행하고 감사(監事)가 이것을 감독한다.
이런 계획에 한국인 교역자들의 핵심, 1세대 한국인 오순절 교역자이며,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총리 허홍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업무는 스테츠 선교사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도 너무도 버거운 것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미 하나님의 성회는 일본어로 한국인 교역자들과 자유스런 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하고, 보다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조직력이 있는 존스턴을 한국으로 급파했을 것이다.
스테츠에 동조하는 한국인 교역자들은 1957년 5월에 열린 제6차 총회에서 한국인 허홍 대신 내한 한지 겨우 3개월 된 존스턴을 새 총리로 선출하고 재단법인 설립을 승인했다. 이 결정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났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반대했고 그 실행을 거부했다. 그 재단법인 설립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교회 재산을 그 법인에 귀속시키기를 거부했다. 그들을 이끈 사람이 허홍이었다. 존스턴과 스테츠를 중심으로 한 선교사들과 한국인 교역자들의 완강한 재단법인 설립 추진에 허홍과 그 추종자들은 한국인들만으로 기독교오순절교회를 재건하여 1957년 9월 11일 재단법인 기독교대한오순절회(財團法人 基督敎大韓 五巡節會)를 세웠고, 허홍이 총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 법인 사무실은 서울시 용산구 한강로에 있던 남부교회에 있었다.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선교사들과 교역자들은 이완식을 통해 1957년 10월에 재단법인을 설립했다. 창립 당시 그 법인은 서울에 있는 선교사들의 집들, 신학교 재산, 그리고 서울에 있는 한 교회를 귀속 재산으로 갖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허홍을 사적인 욕심을 부려 교단의 재산을 사유화하려 한 사람으로 보았다. 스테츠는 당시의 분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보다 작은 위기는 새롭게 설립된 재단법인에 자신의 교회의 재산을 귀속시키는 것을 반대하는 지도적인 목사들 가운데 한 사람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 목사는 서른 개 교회들의 모든 재산을 훔치려는 계획을 잘 세웠었다. 이 계획은 교단의 재산을 지키려는 스테츠 형제에 의해 드러났고, 그 모든 재산문서들은 안전하게 지켜졌다. 그렇지만 이 지도적인 목사는 하나님의 성회를 떠날 때 추종하는 몇 목사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다른 오순절 집단을 형성했다.
스테츠는 허홍이 하나님의성회의 재산을 사유화하려 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허홍이 재단법인 자체를 반대했다고 생각한다. 순복음가족신문은 “개교회의 재산은 개교회가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허홍 목사 측과 개교회의 재산은 교단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선교사 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고 당시를 묘사했다. 그러나 허홍은 재단법인 설립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에 그가 다른 재단법인을 세웠기 때문이다.
허홍은 교단의 재산을 사유화하려 하지도 않았으며, 재단설립 자체를 반대하지도 않았다. 그가 반대한 것은 선교사 주도의 재단법인 설립이었으며, 하고자 했던 것은 한국인 주도의 재단법인 설립이었다. 김익진은 허홍이 그 재단법인 설립을 반대했던 이유 세 가지를 추정했다. 첫째로, 다른 교단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정점에 있는 한 사람이 모든 재단의 재산을 차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둘째로, 허홍 자신의 법인을 만들기 위해. 셋째로, 허홍이 3월에 총회장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김익진은 그 모든 추정을 통합하여, 허홍이 당시 선교사가 주도하는 재단법인을 반대했던 이유는 독립적인 한국인 재단법인을 세워서 한국인들이 미국인 선교사들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 그 운동을 이끌어가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보았다. 김상호는 허홍이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초청을 받고 미국 총회에 다녀온 후 자신이 선교사들 없이도 교단을 더 잘 유지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보았다. 체스넛은 허홍의 독립 시도는 당시로는 무모했으며, 그 결과는 독립이 아닌 분리였다고 평가했다.
순복음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며, 1960년에 허홍이 시무했던 서울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기도 했던 최요열에 따르면, 허홍의 형제, 즉 허영이 고아원 하나를 세웠다. “그러자 선교사들이 자신들이 그것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니 자기들에게 고아원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그 문제는 법적 다툼으로 번졌다.” 그런데 사실은 그 고아원은 체스넛 총리 때 세워졌던 사회복지 기관이었다. 그 “녹원영아원”(錄原嬰兒原, Green Meadows Baby Home)이라고 명명한 원치 않는 아기들을 위한 집이었다. 녹원재단법인 승인을 위해 제출된 서류에는 녹원영아원의 이사장 체스넛(최스낱), 이사 허홍과 이영석, 원장 허난경(許蘭卿, 허홍의 자매)이 등장했다. 당시 서대문구 대조동 88-34호 부지는 기부를 받았고, 골조 건물이 지어졌다. 녹원영아원은 1954년 8월 9일에 개원되었다. 허홍은 그 영아원의 초대 이사들 중 하나였고, 그의 자매 허난경은 원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체스넛이 떠난 후 허홍이 그 영아원의 이사장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선교사들은 미 하나님의 성회의 기부로 그 영아원이 세워졌으므로 영아원을 재단법인에 귀속시킬 것을 요청했을 것이고, 허홍은 거부했을 것이다. 그리고 법적 다툼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존스턴은 교단이 분립된 후에도 허홍이 시무하고 있던 남부교회와, 영아원 등을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재단법인으로 귀속시키려는 시도를 계속한 것 같다. 아마도 존스턴은 그 재산들이 미 하나님의 성회의 지원의 혜택을 받아 설립되거나 유지되었으니, 마땅히 재단법인으로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 같다. 이에 허홍은 미 하나님의 성회 선교사들이 구제품을 미끼로 한국 교역자들을 자기들 뜻대로 조종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허홍은 미 하나님의 성회의 도움은 순수하게 한국인 교역자들과 교회의 성장을 위해 값없이 주어진 것이므로, 다시 회수하려 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 같다. 이러한 첨예한 대립은 해소되지 않았고 결국 교단의 분립에 이르렀다.
분명히 녹원 영아원 설립에는 미군정과 미 하나님의 성회의 측의 도움이 있었다. 그 영아원의 설립을 위해 미군정은 자재를 공급했다. 그리고 1957년에 제출된 녹원영아원 재단법인 설립신청서에 의하면, 체스넛의 활동으로 인한 오하이오 주의 하나님의 성회 교회들의 성도들의 1,000불, 시애틀 교회 성도들의 헌금 등이 그 설립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녹원 영아원의 설립에는 한국인들의 도움도 있었다. 그 신청서에 의하면, 미국 한인들이 5.000불을 헌금했고, 선명회에서 스폰서를 소개하여 매월 정기적으로 원조했다. 특히 허홍 목사의 자매이며 녹원영아원의 초대 원장이었던 허난경은 영아원 부지를 제공했다. 이렇게 녹원영아원의 설립에는 미국 측의 원조뿐만 아니라, 한국 측의 원조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미 하나님의 성회 내한 선교사가 미국 측의 원조를 빌미로 녹원 영아원의 단독 소유권을 주장했다면, 그것은 과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극동지부 지부장 켓참과 미 하나님의 성회는 존스턴과 스테츠가 이끄는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와 허홍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대한 오순절회가 더 이상 대립과 서로 간섭없이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을 택했다. 켓참은 허홍이 구제품을 팔아 사적인 용도로 사용한 것으로 그리고 기독교대한 오순절회는 민주적 절차가 아닌 사적 파당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파악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는 허홍에게 기독교대한 오순절회 산하의 교회들이나 기관들의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재단법인으로의 귀속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런 미 하나님의 성회의 판단과 결정은 켓참이 1957년 10월 24일에 허홍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난다.
미 하나님의 성회 총회 해외선교국
아시아 지부
지부장, M. L. 켓참(M. L. Ketcham)
1957년 10월 24일
허홍 목사
대한민국, 서울시, 용산구, 한강로 1가 65번지
허 형제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퍼킨 형제에게, 푸트 형제에게, 그리고 저에게 보낸 형제의 10월 14일 편지는 스프링필드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퍼킨 형제는 출타 중이어서 제가 형제의 편지에 답합니다. 퍼킨이 돌아오면, 그가 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허 형제, 제가 형제의 편지에 실려있는 여러 가지 상세한 사항들에 일일이 답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유형의 문제들에 있어서는 “글자”보다는 “담긴 뜻”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저 나름대로 그 상황을 판단하건데, 한국 상황에 대한 여러 가지 국면들에 대해 형제와 논쟁하거나 논의할 것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당신과 당신의 동료들 사이에서 그리고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주류 사이에서 분규가 일어난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이런 형태의 분규가 존재하는 것은 비극입니다.
제가 한국을 방문했었고, 당신과 다른 형제들과의 저의 사적인 접촉들 때문에, 저는 그 상황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제가 이해하는 한, 이 문제는 상대적으로 단순합니다. 그 사역은 허 형제와 친척들 그리고 개인적으로 설립한 재단법인을 중심으로 진행되는가요? 아니면 그 사역은 하나님의 성회의 민주적으로 선출된 실행위원회와 민주적으로 선출된 재단법인 이사회를 중심으로 진행되는가요? 형제도 인식할 수 있듯이, [미국] 하나님의 성회는 그 가치 있는 재산을 재단법인에 귀속시키고 전적으로 지지하는 한국 하나님의 성회에 신뢰를 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성회와 선교적 대리인들은 스스로 그 어떤 특권적 위치를 차지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문제 전체를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목회자들과 대표들에 의한 자유로운 투표로 해결하게 하려 합니다. 무엇이 이것보다 더 공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무엇이 그렇게 하는 것보다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더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건데, 저는 형제가 이 문제를 “구제 프로그램”의 문제라고 언급한 것이 정말 흥미롭습니다. 형제는 우리가 구제품을 줌으로써 한국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하고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 형제와 구제 위원회의 어떤 위원들의 징계 사유는 형제가 값없이 배포하라고 보내진 구제품들을 팔았고, 형제 자신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그와 동일한 과정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허 형제, 형제는 “구제품들”의 문제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는 형제와 형제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은 여러분 자체의 길을 가서 여러분이 바라는 프로그램이 그 어떤 것이든 해보는 것이 현명하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우리가 형제와 싸우거나 또는 경쟁하려 하지 않을 것을 당신에게 보증합니다. 그보다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길을 모색하고, 민주적으로 조직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를 더 강력하게 만들겠습니다. 한국은 기독교를 기초로 삼고 있고, 매우 훌륭한 한국인들 위에 성령께서 운행하고 계십니다. 저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앞날이 밝다고 확신합니다. 다시 한번 더 형제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교사들이나 우리 자신을 위해 우월하거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의향이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한국에서의 그 사역의 발전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형제가 형제의 노력들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복음화하는 것에, 그리고 아직 오순절에 대해 듣지 못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오순절적 메시지를 전파하는 것에 집중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입장에서 그와 같이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서로 분리된 길을 가서, 모든 다툼과 마찰을 피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의에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형제와 가졌었던 사적인 만남들에 감사하고 있다는 것을 형제에게 확실하게 말합니다. 저는 형제의 집에서 가졌던 교제와 형제의 집에서 예배드리던 성도들에게 설교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당기는 데 우리를 사용하시기를.
그리스도인의 교제 안에서
M. L. 켓참
아시아 지역장

그런데 이런 미 하나님의 성회의 입장과는 달리 존스턴은 허홍이 이끌던 남부교회와 고아원의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로의 귀속을 계속 요청했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법적 소송에 들어가려한 것 같다. 이런 상황은 허홍이 1957년 11월 22일 자로 타자기로 쳐 작성한 격렬한 편지에서 드러난다. 허홍이 이 편지를 실제로 존스턴에게 보냈었는지는 불확실하다. 그 편지가 존스턴의 유물이 아닌 허홍의 유물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허홍은 이 편지에서 미 하나님의 성회가 한국에 투입한 물질은 이자나 원금을 회수하기 위한 경제적 투자가 아닌 그야말로 순수한 원조에 그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익을 위한 무역이나 사업에서처럼 투자한 원금을 회수한다거나, 이자를 받아내려하는 것은 양의 탈을 쓴 이리가 하는 짓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와 기독교대한 오순절회가 서로 각자의 길을 가자는 켓참과 미 하나님의 성회의 입장을 근거로 법적 절차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존스턴 씨:
11월 18일 자 내용증명으로 보낸, 당신의 법적 절차들의 최후통첩(ultimatum)을 잘 받았습니다. 저는 당신이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은 법의 사람이군요. . . . 당신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너무도 어리석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려고 이 나라, 한국에 왔습니까? 당신 같은 치사한 사람은 예수 이름을 부끄럽게 하고, 당신 주변의 한국인들에게 미국인 전체에 대한 나쁜 감정을 갖게 하고, 교회들을 파괴합니다. 당신은 바보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아버지께 당신들이 회개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양의 탈을 쓴 노략질하는 이리들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베어져 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회개하십시오, 천국이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도끼가 나무들의 뿌리에 놓였습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당신은 여기에 장사하러 왔습니까? 어떻게 “원금”(capital) 그리고 “신용 관리”(control in trust)라는 말을 한단 말입니까? 나는 당신으로부터 그 어떤 신용 관리를 요청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신에게서 그 어떤 돈도 빌린 적이 없습니다. 미국 교회들이 한국 교회들에게 원조한 것이 원금이라면, 이자를 받으시고, 나에게 말고 남부교회에 요구하십시오. 당신이 신용회사 사장입니까? 미 하나님의 성회가 신용 사업을 하고 있습니까?
저는 그저 초라한 하나님의 종이고 그분의 교회를 섬길 뿐입니다. “최후통첩”은 싸우는 전쟁을 의미합니다. 당신은 마음껏 싸울 수 있습니다. 제가 지켜 보겠습니다.
남부교회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집이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 교회는 당신의 것도 나의 것도 아닙니다. 그 어느 누구의 것도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이 그분의 몸을 고소하다니, 그 얼마나 건방집니까? 당신은 벌을 받을 것입니다. 당신의 말대로라면, 당신은 돈을 투자했습니다. 도대체 얼마를 투자했습니까? 그렇게 조금 투자해 놓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우리에게 이것저것을 명령할 수 있습니까? 심지어 진짜 사업가도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적은 기부금도 끝까지 기부금입니다. 법적 절차와 최후통첩이 웬 말입니까? 비기독교인들이 당신의 말을 듣는다면 당신을 비웃을 것입니다. 당신이 거룩한 헌금들을 허비하는 것은 너무도 큰 죄입니다!
이제 당신에게 이것을 묻습니다. 대답해주십시오. 최후통첩이 당신의 행동입니까 아니면 소위 미국에 있는 몸통의 행동입니까? 이것을 당신에게 묻는 이유는 내가 켓참에게서 온 편지를 갖고 있는데, 그 편지는 당신의 행동과 정 반대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어리석은 행동을 계속한다면, 나는 당신의 최후통첩을 사람들에게 공개할 것입니다. 저는 참았고, 가능한 참을 것입니다. 내가 당신의 범죄를 공개하면, 교회는 큰 충격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교회를 위해서 참고 있는 것이지 당신을 위해 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당신에게 경고합니다.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들지 마십시오.

허홍은 왜, “미국 교회들이 한국 교회들에게 원조한 것이 원금이라면, 이자를 받으시고, 나에게 말고 남부교회에 요구하십시오”라고 썼을까? 이 허홍의 글과 관련된 사항이 1957년 5월 26일에 정순주 포함 8인의 한강로 1가에 있던 남부교회 대표자들에 의해 작성되고 날인된 “결의서”(決意書)에 담겨있다. 그 결의서가 밝혀주는 중요한 사실들 가운데 하나는 그 남부교회 대지와 건물의 소유주에 대한 것이다. 지금까지 30년사나 50년사 등의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공식 문서들에서 남부교회는 허홍의 소유로 기술되어왔다. 그래서 필자도 이 결의서를 처음 접했을 때 그 소유주의 성함 부분에서 그 기술과 고정관념에 따라 함자 부분를 “홍”으로 읽고, 한자사전에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결의서의 그 함자 부분과 유사한 한자가 없었다. 그래서 무척 당황스러웠었다. 고정관념이 없는 4차 판독에 이르러서야, 그 함자가 “홍”이 아닌 “영”(鍈)으로 확정되었다. “허영”(許鍈)은 누구일까? 허영은 허홍의 형이었다. 2023년 12월 8일에 발행된 허홍의 아버지 허곤(許坤)의 제적등본에 따르면, 허영은 “장남”(男子長), 즉 큰 아들이었고, 허홍(許銾)은 “이남”(男子二), 즉 둘째 아들이었다. 그 결의서는 한강로 1가에 있던 남부교회의 대지와 건물의 소유주가 허홍이 아닌 그의 형, 허영이라고 밝혔다. 허영은 본부의 명령에 따라 전국 목회지를 옮겨 다녀야 했던 구세군 사관이었다. 그래서 그 건물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고, 또한 목사인 동생의 목회도 돕기 위해 허홍이 그 건물을 관리하고 사용하게 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이 결의서에 따르면, 허홍은 한강로 1가의 남부교회 대지와 건물의 소유주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에 귀속시킬 수 있는 권리 자체가 애초에 없었다. 허홍이 남부교회의 소유주였는 데, 사리사욕에 가득 차서 남부교회를 설립될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재단법인에 귀속시키려 하지 않았다는 비난은 큰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던 것이다.


그 결의서는 서두에서 남부교회가 한강로 1가 토지를 매입하기로 계약했었다는 것을 알린다. 계약의 목적은 “교회건축”이었다. 남부교회는 한강로 1가에 교회를 신축하기 위해 소유주 허영과 토지 매입계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그 결의서는 남부교회가 체결 당시 허영에게 땅값을 지불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정황을 보아 토지대를 후에 지불하기로 하고, 계약을 체결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계약 체결 후 두 가지 변수가 생겼다. 하나는 한강로 1가의 장소적 문제였다. 남부교회는 한강로 1가의 신축예정 장소가 “대도로변으로서 전차, 자동차의 소음으로 예배장소로는 부적당”하다는 현실적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그 결의서에 따르면, 남부교회는 새로운 부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미 하나님의 성회의 “노드 웨스트”, 즉 북서 지방회(Northwest district)의 소속 교회들이 그 부지매입과 신축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여 한국으로 보냈다. 그 금액이 당시 미화 3,000불이었다. 그 결의서는 “노드 웨스트 주(州)” 각지 교회에서 헌금을 보내왔다고 썼는데, 미국의 주들 중에 “노드 웨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노드 웨스트 주”가 아닌 “노스 웨스트 지방회”가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변수가 발생했다. 결의서에 따르면, 남부교회는 미화 3,000불의 지원금을 “하나님의 성회 선교사의 불건전한 고찰과 행동”으로 수령하지 못했다. 노스웨스트 지방회는 남부교회 신축 헌금을 남부교회에 보낸 것이 아니라, 미 하나님의 성회 극동 지부, 한국지소가 관리하는 통장으로 보낸 것 같다. 그리고 재단법인 문제가 발생하자, 그 내한 선교사가 그 통장의 돈을 남부교회에 인출 해 주지 않고 공금으로 사용하려 한 것 같다. 이 두 가지 변수의 발생 때문에, “자금관계의 지극한 빈약으로 당분간 신축의 여력도 없기로” 다른 보다 좋은 장소에 신축하려는 남부교회의 신축계획은 좌절되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남부교회는 교회의 신축을 포기하지 않고, 차선책을 모색했다. 남부교회는 큰 소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현재 오년 간 우리의 예배처이든 한강로 일가 육십오 소재 터”에 신축하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그런데 문제는 한강로 1가 토지와 건물의 소유주는 담임목사 허홍도 아니고 남부교회도 아닌 허영이었다는 것이었다. 1차 계약에 따른 매입금을 지불하지 못하게 된 남부교회는 2차 계약을 시도했다. 그 2차 계약은 현물과 돈이 아닌, 현물과 현물을 맞바꾸자는 것이었다. 남부교회는 허영에게 다른 토지와 건물을 제공하고, 허영은 남부교회에 기존 토지와 건물을 양도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맞교환은 매우 불균형적인 것이었다. 허영의 기존 토지는 대로변 요지에 있었으며 크기는 백이십 평, 건물은 이층 팔십 평이었다. 남부교회가 맞교환하자며 들이민 토지는 어디에 있는지도 제시되지 않은 육십 평, 건물은 단층 삼십 평이었다. 그런데 허영은 그 불균형적인 교환을 불이익을 감수하고 받아들였다. 허영이 양해하고 남부교회 대표부가 이 계약을 승인 결의함으로써 한강로 1가의 토지와 건물은 1957년 5월 26일자로 남부교회의 소유가 되었다.


따라서 남부교회의 토지와 건물의 소유주가 아니었던 허홍은 하고 싶어도 그 토지와 건물을 재단법인에 귀속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허홍은 그 토지와 건물을 재단법인에 귀속시키라는 요구에 “미국 교회들이 한국 교회들에게 원조한 것이 원금이라면, 이자를 받으시고, 나에게 말고 남부교회에 요구하십시오”라고 대답한 것이다. 남부교회는 미국 교회의 원조로 그 토지와 건물을 매입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미 하나님의 성회가 남부교회를 재단법인에 귀속시키라는 요구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토지와 건물은 남부교회의 것이니, 남부교회의 재단법인 귀속은 허홍이 아닌 남부교회의 소관이라는 것이다.
결의서에 따르면, 노스웨스트 지방회가 남부교회의 신축을 위해 보내준 헌금을 남부교회가 수령하지 못한 것은 “미 하나님의 성회 선교사”의 오판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결의서는 “미 하나님의 성회 선교사들”이라고 복수를 쓰지 않고, 단수를 썼다. 당시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선교사는 1954년 1월에 한국에 온 스테츠와 1957년 1월에 온 존스턴, 두 사람이었다. 노스웨스트 지방회의 남부교회 신축헌금의 인출을 가로막은 선교사는 누구였을까? 허홍의 편지로 보았을 때, 존스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남부교회가 그 토지와 건물을 재단법인에 귀속시키기를 거부하자, 존스턴은 그 신축헌금을 남부교회에 투입시킨다면, 그 헌금이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가 아닌 허홍과 남부교회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 판단에 따라 존스턴은 그 건축헌금을 남부교회에 전달하지 않았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동안 허홍은 남부교회의 재단법인 귀속에 반대만 했던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결의서는 “단기 사천이백구십 년 삼월 십일일에 허홍 목사가 자기로서는 하나님의 성회 유지재단에 양도할 수 있다는 의사 표시에 날인한 바 있다 하나”라고 썼다. 허홍이 1957년 3월 11일에 남부교회를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재단법인에 귀속시킬 의사가 있다고 도장을 찍었다는 것이다. “자기로서는”이라는 문구는 남부교회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 귀속 날인이 허홍 목사 개인의 사적 의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 결의서에 따르면, 허홍은 재단법인에 남부교회를 귀속시킬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남부교회는 “전일에 협의한 바와 같이 가히 목사는 교회재산처리 자격이 없는 바라. 또한 교회에 협의 또는 의사 표명도 없이 개인적 주장의 의사표시에 불과하고 우리는 그와 일절 무관함을 확언함”이라고 못 박았다. 다시 말하면, 남부교회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재단법인에 그 토지와 건물을 귀속시키지 않은 것은 허홍의 의사가 아니라 남부교회의 의사였던 것이다.
그 결의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決意書
本 南部敎會는 敎會建築을 目的으로 하야 漢江路 一街에 土地를 取得한 바 皈屬財産의 買入契約이 完了되였으나 大道路辺으로서 電車, 自動車의 暴音으로 禮拜場所로는 不適當할 뿐이라 노드 웨스트 州[지방회] 各地 敎會에셔 一年間을 두고 獻金하여 우리의게 約束한 대로 敎會 新築에 援助次 送金하여온 美貨 約 參阡弗은 하나님의 聖會 宣敎師의 不健全한 考察과 行動으로 收得치 못하였기로 資金關係의 至極한 貧弱으로 當分間 新築의 餘力도 없기로 次土地와 現在 五年間 우리의 禮拜處이든 漢江路 一街 六十五 所在垈 一二O坪 及建物 八O坪의 所有主 許鍈 氏의 諒解下에 垈 六O坪과 建物 單層 木造 參拾坪과 交換하기로 함. 其讓渡 方式은 各自 所有物의 拂下代 殘額은 前所有主此를 淸算하여 讓渡하기로 함. 이제 우리 敎會 代表部는 此를 決意함과 同時에 此를 積極 追陳키로 함.
追이 檀紀 四二九O年 三月 十一日 許銾 牧師가 自己로서는 하나님의 聖會 維持財團에 讓渡할 수 잇다는 意思 表示에 捺印한 바 있다 하나 前日에 協議한 바와 같이 如히 牧師는 敎會財産權 資格이 없는 바라. 또한 敎會에 協議 또는 意思 聽取도 없이 個人的 主張의 意思表示에 不過함 우리는 此와 一切 無關함을 確言함.
檀紀 四二九O년(1957년) 五月 二六日
南部敎會
鄭順周 崔未女 盧蔤心 張연鉉 咸相君 金英喜 崔聖道 李大成*


본 남부교회는 교회건축을 목적으로 하야 한강로 일가에 토지를 취득한 바 귀속재산의 매입계약이 완료되였으나 대도로변으로서 전차, 자동차의 소음으로 예배장소로는 부적당할 뿐이라 노드 웨스트 주[지방회] 각지 교회에셔 일 년간을 두고 헌금하여 우리의게 약속한 대로 교회 신축에 원조차 송금하여온 미화 약 삼천불은 하나님의 성회 선교사의 불건전한 고찰과 행동으로 수득치[받지] 못하였기로 자금관계의 지극한 빈약으로 당분간 신축의 여력도 없기로 차토지와 현재 오년 간 우리의 예배처이든 한강로 일가 육십오 소재 대[터] 일백이십 평 급건물 팔십 평의 소유주 허영씨의 양해하에 대[터] 육십평과 건물 단층 목조 삼십 평과 교환하기로 함. 기양도 방식은 각자 소유물의 불하대 잔액은 전소유주 차[이것]를 청산하여 양도하기로 함. 이제 우리 교회 대표부는 차[이것]를 결의함과 동시에 차[이것]를 적극 추진키로 함.
추이 단기 사천이백구십 년 삼월 십일일 허홍목사가 자기로서는 하나님의성회 유지재단에 양도할 수 잇다는 의사 표시에 날인한 바 있다 하나 전일에 협의한 바와 같이 여히 목사는 교회재산권 자격이 없는 바라. 또한 교회에 협의 또는 의사 청취도 없이 개인적 주장의 의사표시에 불과함 우리는 차와 일절 무관함을 확언함.
단기 사천이백구십 년(1957년) 오월 이십육일
남부교회
정순주 최미녀 노밀심 장연현 함상군 김영희 최성도 이대성
* 이 문서의 원문은 한문과 국문 혼합으로 손글씨로 기록되어 있는허홍의 유물인데, 한문은 대부분 흘림체로 되어 있어서 많은 부분의 판독이 어려웠다. 그런데 필자가 1차 판독하고, 서정석 목사가 2차 판독 수정했고, 서정석 목사의 요청으로 장학사와 초등 교장을 역임한 최정혜가 3차 판독 수정하고, 30여 년간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를 역임한 심호택이 4차 판독 수정하여 최종 판독본이 산출되었다. 세 분께 감사드린다. 또한 이 유물을 보존한 정문균 장로와 디지털화한 송하종 목사에게도 감사드린다.
존스턴은 1958년 11월에 『펜테코스탈 에반젤』을 통해 미국 하나님의 성회 회원들에게 한국 선교에 대한 첫 보고를 했다. 1957년 1월에 내한한 후 거의 2년 만에 첫 보고를 올린 것이다. 이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를 교단이 둘로 나누어지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재단법인화 해야 했던, 갑작스럽게 주어진 1957년의 직무가 존스턴에게도 너무 감당하기 버거운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아마도 교단 분열의 상처가 점차 아물어가고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와 존스턴 본인이 안정을 찾아가자 2년 만에 선교보고를 했을 것이다. 그 보고의 첫머리는 재단법인 소식에 할애되었다. 존스턴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에 잔류한 교역자들 간에 일치와 조화가 점점 더 강해졌고, 그에 따라 소속 교회들의 재산들이 재단법인에 귀속되기 시작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그는 한국 정부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를 하나의 재단법인으로 승인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존스턴의 보고에서 스테츠와 존스턴, 그리고 미국 하나님의 성회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를 법인화하려 했던 이유를 엿볼 수 있다. 스테츠는 그 이유를 밝힌 적이 없었다. 존스턴은 그의 보고에서 상세하지는 않지만 그 이유를 유추해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했다. 존스턴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가 법인화된 것을 “기초”(foundation)라고 비유했다. 존스턴은 이어서 “우리는 한국에서 강력한 사역을 구축하기 위해 전진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썼다. 여기서 “우리는”은 존스턴 자신과, 스테츠라는 내한 선교사와 미 하나님의 성회를 포함하는 어구일 것이다. 선교사들과 미 하나님의 성회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재단법인화를 한국 선교의 필수적인 기초라고 여겼던 것이다. 재단법인화라는 기초가 깔려야만 그 위에 한국선교라는 집을 지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내한 선교사들과 미 하나님의 성회는 앞으로 지극히 가난하고 미미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에 역량과 자금을 투입할 것인데, 그 투입이 사적인 욕심에 의해 손실되지 않고 계속 보존되고 축적되어 강력한 선교사역을 구축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제6차 총회는 [1957년] 일 년 간의 많은 풍성한 축복들의 절정을 이루었다. 그 일 년 동안, 진정한 사역자들 간의 일치와 조화가 분명하게 존재했다. 일치가 더 강해지면서,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그들의 교회의 재산들을 재단법인에(to the incorporated church body) 귀속시키기 시작했다. 그해[1957년]의 절정은 한국 정부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를 하나의 법인으로(as an incorporated body) 승인했다는 것이었다. 이 기초 위에서, 우리는 한국에서 강력한 사역을 구축하기 위해 전진할 수 있게 되었다.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가 재단법인으로 승인됨으로써, 미 하나님의 성회가 급하게 일본 선교사 존스턴을 한국으로 선교지를 바꾸어 파송했던 목적이 달성되었다. 존스턴은 미 하나님의 성회의 명령을 수행해낸 것이다. 그 임무를 수행해내는 과정에서 존스턴이 허홍과 남부교회에게 오해에서 비롯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과도한 요구를 했던 것은 옥에 티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추진력으로 재단법인화를 밀어붙였기 때문에 그는 재단법인화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주도권이 존 주르겐센과 럼시 등이 키워낸 허홍, 배부근 등의 1세대 한국 오순절 교역자들로부터 스테츠, 존스턴, 리차드, 허스톤 등 미 하나님의 성회 선교사들이 키워낸 조용기를 비롯한 2세대 교역자들에로 이양되는 기초를 놓았다. 그리고 1958년에서 1960대 초까지 약 5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미 하나님의 성회가 글로벌 컨퀘스트의 파일럿 프로젝트를 세워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에 그 인적 그리고 물적 역량을 집중적으로 쏟아부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수 있었다.
존스턴의 1958년 11월 선교보고는 1957년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재단법인화 언급 후 1958년 여름에 이루어진 랄프 버드와 존 허스톤의 전국적인 집회들과 그 집회의 마지막 주간에 열렸던 총회와 순복음신학교의 대조동 부지 봉헌식 소식으로 이어졌다. 아마도 존스턴과 스테츠가 협의하여 랄프 버드와 존 허스톤을 한국으로 초청했을 것이다. 물론 스테츠는 랄프 버드 그리고 허스톤과 함께 미 하나님의 성회의 남동지방회 소속이었기 때문에 북서 지방회 소속이었던 존스턴보다 더 버드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지만, 그 초청을 최종 결정할 권한은 존스턴에게 있었을 것이다. 총회장 존스턴이 이끄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는 기독교대한 오순절회와의 분열의 아픔을 극복하며 재단법인화를 성취한 후 그 토대 위에서 본격적으로 완벽한 일치와 열려 있고 갈급한 마음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며 영적인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새롭게 하면서 오순절적 교리와 순복음 메시지를 급속하게 전파하고 성장할 준비를 마친 것이다.
랄프 버드 부부(Brother and Sister Ralph Byrd)와 선교사 존 허스톤(John Hurston)과 함께 지난 [1958년] 여름 여섯 개 도시에서 열었던 집회들의 서울 집회의 마지막 주간에 정기 총회가 열렸다. 그 총회는 목회자들의 회합과 행정처리가 결합된 것이었다. 매일 아침 버드와 허스톤 형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 아래서 집회를 이끌었다. 이것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목회자들에게 우리의 오순절적 교리에 대한 가르침에 기반을 둔 회합을 가진 첫 사례였다.
완벽한 일치와 열려 있고 갈급한 마음들의 58명의 목회자들과 대표들은, 성령의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종들에게 부으시는 풍성한 기름 부으심을 더하여, 우리에게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짧은 역사에서 가장 복된 총회를 선사했다. 각 예배는 영광으로 점철되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런 말을 들었다. “이것은 우리가 가졌던 총회들 가운데 가장 복된 총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순복음 메시지를 지금 모든 한국인에게 전하라고 몰아붙이고 계십니다.”
그 총회는 새로운 성경학교 부지에서 드린 봉헌 예배로 마쳐졌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서울시 근교에 8에이커를 주신 것은 하나의 이적이다. 주의 영광이 버드와 허스톤 형제가 봉헌예배 설교하고 기도를 인도할 때 참으로 실제적이었다. 버드 형제가 이 부지를 봉헌할 때, 그는 아틀란타에 있는 (그가 담임목사인) 페이스 메모리얼 처치(Faith Memorial Church)가 이 새 성경학교에 첫 천 달러를 기부할 것이라고 알려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존스턴은 5개월 후인 1959년 4월에 『펜테코스탈 에반젤』을 통해 두 번째 선교보고를 했다. 이 보고서는 그의 관심이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재단법인화와 교단의 재편이라는 행정적 사역에 대한 집중으로부터 목회 현장에로 전환되었음을, 또한 그런 전환이 가능할 정도로 심적 여유와 안정을 찾게 되었음을 드러내었다. 그는 이 보고에서 내한 선교사들이 교육한 성경학교 출신 한국인 교역자들의 활동의 한 사례, 그리고 그 열매로 맺힌 한국인 신자들의 놀라운 헌신을 전했다. 존스턴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재단법인화를 통해 물적 역량을 쏟아부어도 새어나가지 않을 안정성을 확보하고, 인적 역량을 하나로 결집시켜 성령으로 충만하게 했을 때 이루어낼 수 있는 한국 선교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한 교회의 사례를 통해 알려주었다. 존스턴에 따르면, 순복음신학교를 졸업한 한 교역자가 전통적인 우상숭배가 사라지지 않은 한 마을에 가서 예배당을 짓고 아무도 없는 빈 성전에서 설교했으나 그 설교 소리가 이웃집들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성령께서 병자를 치유하심으로 마을 사람들이 교회에 대거 출석하기 시작했으며, 그 성도들은 가난 속에서도 적극적으로 물질을 드려서 담임 교역자를 부양하고 교회를 유지시켰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성도들을 물질적으로 축복하셔서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되었다.
존스턴은 이 과정을 “이것이 모든 교회가 그 위에 세워져야 할 진정한 기초다”(This is the true foundation upon which every church should be built)라고 평가했다. 그는 한국 오순절 교회에서 표준적이고 모범적이면서도 폭발적인 성장 가능성을 본 것이다. 전력투구에도 미미한 결과만을 얻을 수 있었던 일본선교와는 비교할 수 없게 한국 선교는 투입한 물질적, 인적 역량이 아깝지 않게 풍부한 결실을 맺는다는 것을 확인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집중적인 대량의 역량을 한국에 투입한다면, 엄청난 결과를 산출해 낼 것을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보고서를 쓰면서 존스턴의 마음은 미래에 일어날 한국 선교의 풍성한 결실을 내다보며 설레었을 것이다.
서울시 북쪽 외각에 평온하고 울퉁불퉁한 언덕들 가운데 한 작은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그 마을은 현재 남한에 남아 있는 우상 숭배를 실행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견고한 성들 중의 하나다. 그 마을의 이교도적 실행들의 깊은 잠은 한 열심 있는 성경학교 졸업생이 주님께서 자기를 이 버림받고 그러나 도발적인 마을로 이끄신다고 느꼈던 몇 달 전에 갑자기 방해를 받았다. 그는 신들을 노하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단순한 농부들에 의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가 (순전히 믿음으로) 잠시 거주지로 또한 한 교회 건물로 사용할 수수한 건물을 짓기 시작했을 때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그 집이 예배드릴 장소로 준비되고, 개척 예배가 알려졌다. 그 목사는 잃어버린 자들을 위한 메시지를 준비했지만, 한 사람도 기독교 예배에 참석함으로써 자신의 조상들의 전통을 감히 깨려 하지 않았다. 그 목사는 그의 준비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빈 공간을 향해 열정적으로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것은 몇 집회들 동안 계속되었다. 집회마다 목사의 목소리는 근처 집들에서 사는 반항적인 그러면서도 호기심에 찬 청중들에게 생명의 메시지를 싣고 크고 분명하고, 강력하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선포된 말씀은 헛되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들었고 서서히 다가왔고, 드디어 몇 사람이 실제로 가정 교회 안으로 과감하게 들어왔다.
미신의 봉쇄를 깨트린 그 폭발은 한 이적적 치유였다. 그 마을의 최고 우상 숭배자는 자포자기하여 그녀의 심각하게 아픈 딸을 기도 받게 하기 위해 그 교회로 데리고 갔다. 그 젊은 목사의 마음에서는 의심할 것 없이 이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이 자신들의 이방신들을 버리고 참되시고 살아계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실, 이 사람들 가운데서 그 사역을 시작시키기로 정하신 시간이었다.
기도에 응답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병든 아이를 치료하셨고, 이 즉각적인 치유 소식은 빠르게 그 마을 전체로 퍼졌다. 마을 사람들은 호기심 때문에라도 그 교회 예배에 오기 시작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더 알고 싶다는 갈망이 그들 마음 안에서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이 (네 시에)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들이 따를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시는가? 그 목사는 이 약속을 믿고 있으며, 강력한 이적들이 멀리 사는 자 또는 가까이 사는 자, 부자 또는 빈자, 병자 또는 죄의 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 날마다 일어나고 있다. 중풍환자들이 고침을 받았고, 종기가 말랐고, 암들이 제거되었고, 술중독자들이 죄의 힘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말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신들에게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기도들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던 사람들에 대한 간증은 얼마나 놀라운지!
이 마을 사람들은 무서운 가난 속에서 겨우겨우 생존하고 있었다. 그들이 한 교회를 어떻게 부양할 수 있는가? 그 목사는 생존을 위해 도움을 줄 다른 출처들을 찾아야 하는가? 아니다! 그 목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복들을 받는 성경의 모범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에게 가난 중에도 아낌없이 드리는 것도 가르쳤다.
최근 그 교회를 방문한 우리는 그 목사의 재정 보고를 받고 감동했다. “L 부인은 등불을 위해 등유를 드렸고, K 형제는 초 한 상자를 드렸습니다. 다른 자매는 자신의 생일을 기념하며 1달러에 해당하는 헌금을 드렸습니다. 한 여성은 그녀의 목사에게 헌금을 드리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는데, 그녀가 줄 수 있는 방법은 금식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10센트에 해당하는 돈을 절약할 수 있었고, 허약해진 상태에도 그 목사의 집에까지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연약해져 세 번이나 넘어졌지만, 그녀는 기다시피 가까스로 목사의 사택에 도달한 후, 그녀의 값진 헌금을 기쁘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간증들 중에 가장 강렬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드림 때문에 그들을 재정적으로 축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엄청난 학비 때문에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은 이제 다닐 수 있다. 실직했던 아버지들은 이제 일터로 나가고 있다. 전에 비었던 식탁들 위에는 그들이 먹을 음식이 놓여있다. 그들은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의미를 잘 배웠다. 이것이 모든 교회가 그 위에 세워져야 할 진정한 기초다.

존스턴은 그로부터 1년 후, 휴가를 떠나기 직전, 1960년 6월에 그의 세 번째 한국 선교 보고서를 『펜테코스탈 에반젤』을 통해 제출했다. 그 보고서는 순복음신학교 교사 신축에 대한 것이었다. 존스턴은 3년간의 사역을 통해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열정을 잃지 않는 한국인들은 좋은 교육을 받는다면, 기대에 부응하여 좋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경험을 통해 그는 보다 풍성한 선교적 열매를 맺기 위해 보다 많은 오순절적 한국인 교역자 양성이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는 첫 선교보고서에서 밝혔던 것처럼 1958년에 필수적인 한국인 교역자 양성을 위해 순복음신학교의 신축계획을 세우고 서울 북서쪽, 대조동에 8에이커의 부지를 매입했었다. 그는 세 번째 보고서에서, 그 매입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는 점과 그 부지에 신축건물을 짓기 시작했음을 알렸다. 그리고 그 신축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미 하나님의 성회 소속 성도들과 교회들의 원조가 필요함을 호소했다.
물론 그 신축은 미 하나님의 성회의 글로벌 컨퀘스트, 파일럿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미 하나님의 성회는 1959년 말에 한국을 글로벌 컨퀘스트의 파일럿 프로젝트 대상국으로 선정했다. 당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총회장이었던 존스턴의 긍정적인 한국선교보고도 그 선정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존스턴은 또한 스테츠, 리차드, 그리고 새롭게 합류한 허스톤과 함께 그 파일럿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진수시켰다.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를 재단법인화하고, 교단을 재편하고 회원들을 하나로 만들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고, 대조동에 순복음신학교 부지를 마련함으로써 미 하나님의 성회가 그 파일럿 프로그램을 시행하여 물적, 인적 역량을 대량으로 마음껏 투입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 사람은 바로 존스턴이었다.
그리고 그 보고서는 존스턴이 당시 한국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순복음신학교의 새로운 교정이 “자유의 최전방에서 불과 25마일 떨어진 곳”(Twenty-five miles from freeedom’s frontier)에 있음을 보고서의 표제어구로 삼으며, 말미에서 재언급하여 강조했다. 이는 미 하나님의 성회가 1950년 6.25 전쟁의 발발 후, 그리고 글로벌 컨퀘스트의 파일럿 프로그램의 대상 국가로 한국 선정 과정에서 보여준 한국에 대한 지정학적 이해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존스턴은 그 보고서를 통해 한국은 전 세계의 자유주의를 지키는 최전선, 최후의 보루이므로 이 곳이 공산-사회 전체주의에 무너지지 않도록 오순절적 순복음으로 기독교화 해야하는데, 이 목적을 위해서라도 그 최전선에서 불과 25마일 거리에 지어지고 있는 순복음신학교 건축을 마무리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 것이다.
“최 형제, 왜, 성경학교에 들어오려 하십니까?”
“저는 . . . 해야만 합니다 – 저는 저의 것이 아닙니다! 저는 예수님의 것입니다!” 최 형제는 소심하지만 명확하게 대답했다. 그는 한국, 서울에 있는 우리의 하나님의 성회 성경학교 입학시험 때에 시험관들의 질문에 더듬거리는 영어로 말했다. 입학에 지원하는 학생들마다 동일한 질문에 반복해서 유사하게 대답했다.
가장 놀라운 일들 중에 하나는 우리 선교사들이 처음에는 별 볼 일 없던 젊은 학생들이 순복음의 가르침에 반응하기 시작하다가 성령충만함을 받고, 순복음의 성령충만하고, 유능한 전도자로 피어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참으로 이것이 우리 선교지에서 가장 보람 있는 것이다.
지난 6년간, 한국 성경학교는 비좁은 기숙사와 단 하나의 교실이라는 극도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운영되어왔다. 우리는 지난날 때문에, 그동안 성취된 것들로 인해, 그리고 각 젊은 목사가 하나님을 위해 일을 잘 감당하고 있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제 그 학교를 확장시키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신다고 믿는다.
이 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존 스테츠와 내가 서울 중심가에서 4마일 거리에 있는 땅을 사도록 이끄셨다. 열여덟 명의 농부들과 협상하는 것과 관공서 서류들을 살펴보는 것은 길고 긴 과정이었다. 우리는 당시에는 이 부지가 얼마만큼의 가치를 갖게 될지 몰랐다. 우리는 $6,000을 지불했다. 오늘날 그 새로운 성경학교 부지는 $60,000의 가치를 갖는다. 그 부지는 서울 근교에 있는 신도시의 중심에 있다.
우리는 이미 모래를 날랐고 시멘트 벽돌들을 만들고 있다. 건물 짓기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교사, 기숙사, 교회, 그리고 강사 숙소를 짓는 전체 프로젝트는 최하 $20,000가 소요될 것이다. 조지아, 아틀란타의 랄프 버드 목사는 이미 $2,300를 보냈다. 다른 헌금들을 포함해 총 $3,500가 준비되었다. 이 자금으로 우리는 40 x 100피트 2층짜리 학교 건물의 지붕선까지 시멘트 벽돌을 만들고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자유의 최전방[Freedom’s Frontier, 휴전선]에서 단지 25마일 거리에 있는 이 요지에서 우리의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를 빨리 완결할 수 있기 위해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하다.


V. 갑작스런 소천
존스턴 부부는 1960년 6월에 휴식을 위해 미국으로 갔다. 1957년 1월에 내한했으니, 만 3년 만의 휴식이었다. 그때는 글로벌 컨퀘스트의 파일럿 프로젝트가 막 시작된 매우 중요한 시점이었다. 그 중요한 때에 그 현장을 떠난 것은 존스턴이 그 3년 동안 얼마나 심적 그리고 육체적으로 힘들었으며, 그래서 그 스트레스의 해소가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했는지를 대변해 준다.
그런데 그들은 휴가 중에도 쉬지 않았다. 그들은 곧 오레곤 여름 캠프 집회에서 사역했다. 그곳에 그들이 나타나고 참석한 것은 선교에 대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들은 오레곤 지방회(Oregon District)와 북서 지방회(Northwest District)에서 순회 선교 강연을 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
1961년 7월경 그는 아내의 고향 알바니에서 가까운 오레곤 주, 융티온 시, 서부 6번가(120 West Sixth Ave., Junction City, Oregon)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7월 10일, 월요일 저녁에 41세 리차드 L. 존스턴은 갑자기 심장마비(a heart attack) 후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 소천했다. 50년사는 존스턴이 “다음 사역을 위해 미국에 돌아가려고 귀국을 준비하던 중에 갑자기 소천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그는 다음 사역을 위해 미국에 돌아간 것이 아니라 휴가를 위해 돌아갔고, 귀국을 준비하던 중에 소천한 것이 아니라, 귀국 1년 후에 소천했다. 1961년 7월 10일 휴가 중이던 그와 그의 아들 케이스(Keith)는 그 월요일에 왈라왈라에 있는 고향 친구들을 만나러 갔었는데,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는 사역지,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상태였을 것이다.
그의 심장마비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원숙하지는 않았다 해도 어느 정도의 경험과 충분한 활력을 가졌을, 겨우 불혹의 나이에, 아직도 20여 년을 더 힘차게 일할 수 있는 그의 심장을 멈추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심장마비의 제일원인은 아마도 한국에서 받았던 심적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특히 허홍과의 줄다리기는 그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였을 것 같다. 그는 선교사의 입장에서 허홍과 관련된 남부교회와 녹원영아원을 재단법인에 귀속시키려 했고, 허홍은 현지인의 입장에서 그것을 거부하고 주도권을 잡으려 했다. 존스턴은 허홍을 법적으로 처리하려 했고, 허홍은 그에 맞서 존스턴을 “양의 탈을 쓴 이리”로 묘사하며 비판했다. 그 줄다리기는 끝내 줄이 끊어져 두 교단으로 분리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마도 그때 그의 마음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분리에 대한 책임감, 자책이 그를 짓눌렀을 것 같기도 하다. 그 고통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도 커 마침내 그의 심장이 마비되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의 장례식은 피숴 퓨너럴 홈(Fisher Funeral home)에서 주관하여 금요일 오후 2시에, 존스턴의 아내 해릿의 모교회였을 알바니 어셈블리 오브 갓 처취(Albany Assemblies of God church, 현재의 Hope Church)에서 열렸다. 알바니 어셈블리의 담임목사 레이몬드 북(Rev. Raymond Book)과 오레곤, 브룩스에서 목회하던 데이비드슨 목사(Rev. N. D. Davidson)가 주례했다.

하관식은 2640 Old Salem Rd Ne, Albany, OR에 있는 빌라메트 메모리얼 파크 세메터리(Willamette Memorial Park cemetery)에서 거행되었다.
미 하나님의 성회 해외선교국 동양지부장 켓참은 1961년 8월에 『펜테코스탈 에반젤』을 통해 존스턴의 소천을 알렸다. 켓참은 그 부고에서 딕 존스턴은 “전 세계에 걸쳐 기독교와 오순절을 위해 불을 살라온 하나님의 성회의 영웅적인 개척자의 반열에 올랐다. 딕은 선한 싸움을 싸웠고 그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렸다”고 그의 생애를 평가했다.





그녀의 남편이 소천한 후, 헤릿(Harriet)과 그녀의 세 자녀, 케이스 레로이(Keith Leroy), 루이스(Louise), 그리고 리차드 로렌스(Richard Lawrence)는 그녀의 고향 알바니에 정착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공군 군무원으로 일했다. 그 후 그녀는 워싱턴 주에 있는 포르 르위스에 배속되었다. 헤릿은 타코마(Tacoma) 지역에 정착하면서 타코마 라이프 센터(Tacoma Life Center)에 다니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 교회의 오랜 성도였고 1966년에 아내를 사별했던 케네스 아더 오아스(Kenneth Arthur Oas)를 만나, 존스턴의 소천 10년 후인 1972년에 재혼했다. 케네스와 헤릿은 오랜 동안 우정을 발전시키면서 그 교회의 사역과 교제들에 깊이 참여해 왔었다. 그들은 워싱턴, 올랄라(Olala)로 은퇴했고, 그곳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정원 가꾸기를 즐겼다. 그들의 집은 따뜻한 환대의 센터가 되었다. 노스뷰 테라스(Northview Terrace)로 이사한 후에도 그녀는 계속 옥상에서 정원 가꾸기를 즐겼다. 재혼한지 10년 후 2003년에 오아스가 소천하고 헤릿은 1938 Fairview Avenue E #300 Seattle, WA에 있는 유니온 호숫가의 메릴 가든스(Merrill Gardens)를 거쳐 2015년 3월 9일에 보다 남쪽에 있는 2901 Bridgeport Way West University Place, WA에 있는 프란시스칸 호스피스 홈(Franciscan Hospice Home[House])에서 편안하게 소천했다. 그녀의 남은 몸은 존스턴의 몸이 묻힌 알바니의 빌라메트 메모리얼 파크(Willamette Memorial Park)에 묻혔다.


VI. 나오는 말
리차드 L. 존스턴(Richard Lawrence Johnston)은 1919년 7월 29일에 태평양 미국 워싱턴 주, 왈라왈라에서 태어났다. 1939년 2월에 왈라왈라 고등학교를 졸업한 존스턴은 20세가 되는 1939년에 미국 하나님의 성회 북서부 지방회 산하 노스웨스트 성경학교에 입학했고, 1941년에 신학교 졸업 즉시 오레곤 주, 월로와에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시작했다. 1942년 3월 31일에 헤릿 캠퍼와 알바니에서 결혼하고, 1943년에 하나님의 성회 북서 지방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존스턴은 1950년 10월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탔고, 아마가사키에 교회를 개척했으며, 고베에 있는 보육원과 교회에서 사역했다. 존스턴 부부는 1955년 10월에 휴가차 5년 만에 귀국했다. 그때 미 하나님의 성회 해외 선교국은 존스턴에게 급하게 한국행을 요청했다. 존스턴 부부는 1957년 1월 한국에 도착했고, 존스턴은 4월 20일에 열린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제6차 총회에서 새 총리로 선출되었고,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재단법인 설립을 승인했다. 그러자 허홍과 그 추종자들은 한국인들만으로 기독교오순절교회를 재건하여 1957년 9월 11일 재단법인 기독교대한오순절회를 세웠고, 허홍이 총회장이 되었다. 존스턴이 이끄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는 1957년 10월에 재단법인을 설립했다. 존스턴은 스테츠와 함께 1958년에 필수적인 한국인 교역자 양성을 위해 순복음신학교의 신축계획을 세우고 대조동에 8에이커의 부지를 매입했다. 존스턴 부부는 1960년 6월에 휴식을 위해 미국으로 갔다. 그리고 1961년 7월 10일 41세의 존스턴은 고향 왈라왈라에서 심장마비로 소천했다.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가 재단법인으로 승인됨으로써, 미 하나님의 성회가 급하게 일본 선교사 존스턴을 한국으로 선교지를 바꾸어 파송했던 목적이 달성되었다. 존스턴은 미 하나님의 성회의 명령을 수행해낸 것이다. 그 임무를 수행해내는 과정에서 존스턴이 허홍과 남부교회에게 오해에서 비롯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과도한 요구를 했던 것은 옥에 티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추진력으로 재단법인화를 밀어붙였기 때문에 존스턴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재단법인화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주도권이 존 주르겐센과 럼시 등이 키워낸 허홍, 배부근 등의 1세대 한국 오순절 교역자들로부터 스테츠, 존스턴, 리차드, 허스톤 등 미 하나님의 성회 선교사들이 키워낸 조용기를 비롯한 2세대 교역자들에로 이양되는 기초를 놓았다. 그리고 1958년에서 1960대 초까지 약 5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미 하나님의 성회가 글로벌 컨퀘스트의 파일럿 프로젝트를 세워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에 그 인적 그리고 물적 역량을 집중적으로 쏟아부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수 있었다.
존스턴이 41세라는 불혹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것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의 갑작스런 소천은 그가 한국행을 놓고 얼마나 심적으로 고민했고,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재단법인화 과정에서 얼마나 큰 심적 고통을 받았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발전은 그의 고귀한 분투와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국오순절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내한 오순절 선교사들의 농인 선교: 베티 헤이니, 맥신 스트로브리지 (0) | 2026.01.10 |
|---|---|
| 내한 오순절 선교사 마가렛 에마 칼로우: 전주대학교 초대학장 (1) | 2025.12.10 |
| 1956년 미국비자신청서에 나타난 허홍의 연보 (2) | 2025.07.23 |
| 내한 오순절 선교사 존 웨슬리 허스톤: 조용기 목사의 조언자이며 동역자 (3) | 2025.06.25 |
| 내한 오순절 선교사 존 스테츠: 조용기 목사의 오순절적 아버지 (8) | 2025.05.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