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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오순절역사

내한 오순절 선교사 마가렛 에마 칼로우: 전주대학교 초대학장

한오신 2025. 12. 10. 06:55

A Pentecostal Missionary to South Korea,

Margaret Emma Carlow:

the First President of Jeonju University

 

 

 

이창승

2025.10.7./2025.12.14.

 

 

내한 오순절 선교사 마가렛 E. 칼로우 (이창승).pdf
0.31MB

 

 

I. 들어가는 말

 

    전라북도 전주에서 거주한 적은 없었지만, 그곳에 이모네 집이 있었다. 그래서 방학이 되면, 살고 있던 이리의 동산역에서 흰 연기를 품어내는 증기 기관차가 끄는 열차를 타고 전주에 가곤 했다. 전주천의 물살이 휘도는 돌다리를 힘겹게 건너 예수병원을 지나 다가공원에 올라 전주시를 내려다보기도 했었다. 누구에게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주영생고등학교가 미션스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초등학생때였던가 영생고등학교에서 열렸던 어떤 부흥집회에 참석한 기억이 내 머리 속에서 가물가물하다.

    마가렛 E. 칼로우, 내한 오순절 선교사들을 연구하다가 그녀가 마음에 들어왔다. 기존의 한국 오순절 역사서들은 그녀의 전주영생고 사역을 아주 짧게 기술했다. 궁금했다. 그녀가 추억이 있는 전주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오게 되었고, 어떤 사역을 했는지가 매우 궁금했다. 그래서 그녀에 대한 연구에 돌입했다. 먼저 펜테코스탈 에반젤에 실렸던 그녀의 글들을 검토했다. 이어 김익진이 박사학위 논문에서 토미 리드의 글을 기반으로 전주에서 일어났던 일을 간략하게 기술한 것을 읽었다. 또한 토미 리드가 펜테코스탈 에반젤에 기고했던 영생교회와 영생고 집회 보고서를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전체 생애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그런데 인터넷 웹서핑을 하다가 일본 오순절 역사학자 수주키가 일본 하나님의 성회 홈페이지에 칼로우에 대해 쓴 글을 발견했다. 그는 일본어로 칼로우의 생애를 비교적 상세히 기록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글의 참고문헌들을 밝히지는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수주키는 그 글의 말미에 어떤 책의 사진을 올렸다. 그 사진에는 カーロー先生のお小冊子 日本たのは』(教団出版部)(20ページ라는 첨언이 달려있다. 칼로우가 일본어로 내가 일본에 온 것은이라는 책을 낸 것이었다. 아마도 수주키는 이 책을 토대로 칼로우에 대한 글을 쓴 것 같다.

 

 

 

    필자는 이런 자료들을 바탕으로 살을 붙여 마가렛 E. 칼로우의 생애를 간략하게 복원하려 한다.

 

II. 탄생과 성장

 

    아버지 어네스트 터너 칼로우(Ernest Turner Carlow)1896721일에 콜로라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루스 란드페어 마빈 칼로우(Ruth Landphair Maben Carlow)1897618일에 뉴욕, 뉴욕 카운티에서 태어난 후 1912년에 와이오밍 주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농업 종사자(대장간 겸 수의사 견습)였고, 어머니는 교사였다. 부모는 1915년에 와이오밍(Wyoming)에서 결혼했다.

    친가는 아일랜드에서 온 이주민으로 뉴욕주에 정착하여 말일 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창설자 조셉 스미스(Joseph Smith)의 이웃이었던 것을 계기로 몰몬 교도가 되었고, 나중에 중서부나 서부로 이주했다. 외할아버지는 뉴욕주, 뉴햄프셔주, 메인주, 아이오와주에서 40년간 목회한 기독교 전도자로 은퇴 후에는 와이오밍주로 옮겨 말을 타고 성경을 판매하면서 목장에서 목장으로 순회 전도를 했다. 할머니는 여동생의 남편이 태평양 오세아니아의 미크로네시아에 있는 마샬아일랜드(Republic of the Marshall Islands)로의 의료 선교사이기도 해서 해외 선교에 짐을 지고 있었다.

    칼로우는 1917412일에 옐로스톤 국립공원(Yellowston National Park)에서 100km 남쪽에, 유타 주, 솔레이크 시에서 120Km 북쪽에 있는 와이오밍, 테턴 카운티, 잭슨(Jackson, Teton County, Wyoming)에서 태어났다. 잭슨은 로키산맥의 산간지대의 표고 1,901m(6,237ft) 지점에 위치하며, 잭슨홀로 불리는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의 중심지이다.

 

 

칼로우는 외조부모님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이다. 그녀가 처음으로 일본을 의식한 것은 이 지역에서 일본으로 파견되어 있던 선교사의 휴가 귀국 때의 선교 보고회라고 전해진다. 칼로우의 가족은 그 후 콜로라도주, 그리고 192494학년 때 친가 가족이 사는 아이다호주로 이주했다. 그녀에게는 남동생 어네스트, 여동생 메리, 남동생 로버트, 남동생 스탠리가 있었다. 그 가족은 1925년 초까지 남파-칼드웰(Nampa-Caldwell)에서 살았고, 부모가 별거를 시작하며 어머니는 하와이, 호노룰루(Honolulu)로 이사했다.

    19274월에 세 살배기 남동생 로버트가 밭에 불이 나 죽고 말았다. 1928년 가을에 가족은 아이다호주, 남파로 이사했다. 독서가였던 칼로우는 월반을 해서 19345월에 17세의 나이로 남파 고등학교(Nampa High School)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녀는 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서 가계를 지탱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녀는 아이다호주 루이스턴(Lewiston, Idaho)의 루이스턴 주립 사범학교(Lewiston State Normal School)에서 2년간 배웠다. 1893127, 윌리엄 J. 맥코넬 주지사는 루이스턴에 루이스턴 주립 사범학교를 설립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노멀 스쿨의 철학에 따라 루이스턴 노멀은 신임 교사들을 위한 실용적이고 실습적인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 학교는 현재 직업교육이라 불리는 많은 수공 훈련을 제공했다. 또한 교사들이 교실을 제대로 다룰 수 있도록 캠퍼스 내 훈련 학교를 운영했다. 실제 교사들이 실제 학생들을 가르쳤고, 실습 교사들도 경험 많은 교사 비평가들의 감독 아래 직접 경험하며 배웠다. 그녀는 고등학교와 대학 토론 팀에서 활약했다.

 

1900년대 초 루이스턴 사범학교

 

루이스턴 사범학교의 수공과목
부속초등학교에서 실습수업

 

 

 

1936 8월에 대학을 졸업한 칼로우는 9월에 19세의 나이로 아이다호주 스위트(Sweet, Idaho)의 공립학교 교사가 되어 2년간 봉직했다. 스위트에는 현재 6600 Sweet Ola Hwy에 스위트 몬튜어 엘레멘터리 스쿨(Sweet-Montour Elementary School)이라는 초등학교가 존재한다.

 

 

 

 

III. 오순절적 체험과 선교사로서의 소명

 

 칼로우의 아버지는 몰몬 교도였고, 어머니는 교회에 다니긴 했지만 그다지 열심을 내지는 않았다. 칼로우가 다섯 살 때 64세의 외할머니가 심장발작으로 돌아가신 것을 통해 그녀는 하나님을 구하기 시작했다. 14살 무렵에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선교사의 자서전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녀는 1933, 고등학교 3학년이 되는 16세 때 아직 신앙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어머니가 다니는 교회에 참석하게 되어 성가대나 교회학교 교사, 그리고 유소년 그룹의 리더로 봉사했다.

    1936년 가을에 처음 근무한 스위트에는 새로 세워진 하나님의 성회가 있었고, 그녀는 밤 집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1937320일 근무하던 학교 앞 교인 집에서 열린 수요일 밤 기도회에서 그녀는 강하게 예수님의 임재를 느끼고 구원을 체험했다. 다음 금요일에 그 교회의 R. N. 월든(Ray. N. Walden) 목사는 칼로우에게 성령을 구하라고 권했다. 그녀는 42일에 이전에 다니던 교회의 목사에게 수요일 밤의 체험을 간증하고 성령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 목사는 그 이야기를 그다지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녀의 마음은 더욱 간절해졌다.

    스위트에는 현재 하나님의 성회가 없다. 대신에 스위트 몬튜어 엘레멘터리 스쿨에서 북쪽으로 400미터 정도 떨어진 205 Sweet-Ola Hwy에 갈바리 채플(Galvary Chapel)이 존재한다. 그 교회의 신조에는 우리는 모든 신자들이 경건한 생활과 주님을 위한 우리의 증거에 있어서 담대해지기 위해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능력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We believe that all believers need to be filled and empowered by the Holy Spirit to live a godly life and to be bold in our witness for the Lord. (Romans 8:13-14, 1 Corinthians 3:16, 1 Corinthians 6:19-20, Ephesians 4:30, Ephesians 5:18)”라는 항목이 있다. 성령침례의 최초의 증거를 방언으로 삼는 하나님의 성회의 입장은 아니지만, 성령의 역사에 개방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이 교회가 하나님의 성회에서 탈퇴한 교회인지, 아닌지, 그리고 칼로우가 다녔던 교회였는지는 알 수 없다.

 

 

 

 

    193745일 월요일 밤 기도회에서 2시간 정도 친구들과 함께 기도한 후에 그녀는 갑자기 예수님의 환상을 보고 성령침례를 받고 방언을 3시간 동안 말했다. 그때 칼로우는 일본 선교사가 되는 소명을 받았다. 그 후 기후가 따뜻해지기를 기다렸다가 511일에 물침례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두 살 어린 동생 어네스트를 구원으로 이끌고 그도 전도자로 설 결심을 했다. 그 후 몇 번 그녀의 근무지는 바뀌지만, 교사 일을 하면서 열심히 전도하고 지역의 하나님의 성회에서 봉사했다.

    칼로우는 1938년에서 1939년 즈음에 아이다호의 작은 금광촌 쿼츠부르크(Quartzburg, Idaho)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이때 그녀는 미 하나님의 성회 산하 선교단체에서 펴낸 크라이스트스 앰바사도로스 헤럴드(Christ’s Ambassadors Herald)응답된 기도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녀는 그 글 서두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에 응답해 오셨다고 밝힌 후, 한 사례를 소개했다. 때는 1937년 칼로우가 성령침례를 받은 직후였다. 하루는 그녀가 가르치고 있던 학교 건물의 벽에서 누가 한지 모르는 음란한 낙서가 발견되었다. 칼로우는 평소 품행이 단정하지 못했던 4학년 여학생을 의심하여 지목했다. 그 아이는 그것을 부인했다. 칼로우는 그 아이를 체벌하기 위해 회초리를 가지러 학교 앞 자기 집에 갔다. 그런데 칼로우는 잠시 하나님께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녀가 교실로 돌아오자 여학생들 가운데서 몇 명이 자백했고, 그 여학생의 결백이 드러났다. 그러자 회초리를 꺾어버린 칼로우와 그 여학생들은 의심을 받았던 여학생에게 사과했다. 칼로우는 이렇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고, 반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그 결과 한 아이가 병고침을 받았고, 졸업반 두 명이 구원을 받기도 했다. 칼로우는 이렇게 세상 교육과 신앙 교육을 병행시키는 기도하는 교사였다.

 

1890년의 쿼츠브르크 초등학교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던 칼로우 가문에게 큰딸과 큰아들이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선교사나 전도자가 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가계를 지탱하기 위해 동생이나 여동생이 학업을 마칠 때까지 소명에 응답을 삼가기로 했다. 2년 후인 1939320일에는 뜻을 모아 미국 하나님의 성회 교단 해외선교국장 노엘 퍼킨(Noel Perkin)에게 일본에 선교사로 가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당초 칼로우는 일본에서 이미 독립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던 전 미국 하나님의 성회 소속의 헤릿 루이스 디트리지(Harriett Lewis Dithridge)와 함께 일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퍼킨과 여러 차례 서신 교환 후 1939년 여름에 아이다호 지방회를 통해 미국 하나님의 성회 해외선교국에 일본 선교사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그 무렵 미일 관계는 악화의 일로를 걸었고, 미국 하나님의 성회는 일본에 거주하는 선교사들에게 귀국을 권고하던 중이어서 그녀도 신임 선교사로 일본에 갈 수 없었다.

    194112월에 일본과 미국 사이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칼로우는 모국과 소명의 땅 일본과의 전쟁이 빨리 종식되기를 기도했다. 전시에도 그녀는 퍼킨 선교부장과의 관계를 이어가며 일본에 남겨진 디트리지의 귀국 방법을 찾기 위해 연락을 주고받았다.

    칼로우는 19428월부터 19445월까지 워싱턴주 왈라왈라의 공군기지(Walla Walla Army Air Base?)에서 정부의 라디오 기사로 일했다. 안타깝게도 동생 어네스트는 태평양전쟁에 참전해 194348일 뉴기니에서 근무하던 중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이 슬픈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일본 선교 비전은 약화되지 않았다. 그녀는 남동생의 죽음을 통해 다시 한번 일본 선교의 비전을 새롭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네스트의 죽음으로 인해 어머니가 그의 유족연금을 받게 되어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왈라왈라 공군기지

 

    아직 전시 중이었지만 일본 선교사가 될 준비를 위해 그녀는 19445월 아이다호주 남파로 돌아와 19449월부터 19466월까지 아이다호주 케임브리지(Cambridge)의 공립학교에서 일하며 미국 하나님의 성회 국내 선교국에 소속되어 하나님의 성회에서 부목사로 봉사했다. 여러 학생을 구원으로 이끌고, 일본계 미국인 전도나 걸스카우트 등에서도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45년에는 별거 중이던 부모님이 이혼했다. 19466월부터 19476월까지 대학의 보건실에서 일하면서 아이다호주 루이스턴의 북아이다호 교육대학(Northern Idaho College of Education)에서 배우고 교육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녀가 1936년에 졸업했던 루이스턴 주립 사범학교(Lewiston State Normal School)의 교육위원회는 1943년 학교를 정식 4년제 학교로 승격시키고 노스 아이다호 교사 대학(North Idaho Teacher College, NITC)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교육학 학사 학위를 수여할 수 있게 되자, 학교 지도자들은 자체적으로 노던 아이다호 교육대학(NICE, Northern Idaho College of Education)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로 결정했고, 입법부는 1947년에 이 명칭 변경을 승인했다. 그리고 후에 그 학교는 루이스-클락 주립대학(Lewis-Clark State College)이 되었다.

 

 

 

 

    칼로우는 1947년에 미국 하나님의 성회 해외 선교국으로부터 일본 선교사 인가를 받았다. 당시 미군정하에서 일반 미국인이 일본으로 입국하는 비자를 받아내려면 기본적인 일본어 능력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19479월부터 19483월까지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의 극동 러시아 언어 학부에서 일본어를 한 학기 동안 배웠다. 그 후 일본 방문에 대비해 여러 교회를 순회하며 후원금을 모금했고, 1948719일에 미국 하나님의 성회 해외 선교국으로부터 정식으로 일본 선교사 증명서를 받고, 1948827일에 일본을 향해 떠났다.

 

 

IV. 일본 선교

 

1(1948~1952)

 

도쿄 (1948~1949)

 

    31세가 된 칼로우는 소명을 받은 지 11년 만인 19489월에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았다. 이미 패전으로부터 3년이 지났지만 요코하마에서 도쿄로 향한 그녀는 부흥하기 쉽지 않고 전화의 흔적이 남은 도쿄의 모습에 놀랐다. 그녀는 도쿄 타키노가와(東京滝野川)의 신소 그리스도교회(神召キリスト教会)에 짐을 풀었다. 1948926, 주일은 칼로우가 10년간 바라고, 일하고 기도해 왔던 것의 절정이었다. 유미야마 목사의 소개에 답하며 칼로우는 일본어로 아이다호, 스위트(Sweet, Idaho)에서 성령침례를 받았을 때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기를 일본으로 부르셨었는지를 짧게 간증하는 기쁨을 누렸다. 그날 저녁 칼로우는 다시 짧은 인사말을 했다. 온종일 그녀는 일본으로 오는 동력을 제공했던 것과 동일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가득 찬 영광의 현존 안에 있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유일하고 진정한 기쁨만이, 그 예배에 참석한 초라하지만 행복한 젊은이들이 그녀로 하여금 그런 빛나는 간증들을 할 수 있게 했다. 맨발에 낡은 셔츠를 입고 영양 부족과 어두운 불빛에서 너무 공부한 것을 드러내는 눈을 가진 한 젊은 도쿄 대학 학생이 와서 일본어로 그녀를 도왔을 때, 그녀는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칼로우는 환영식에서 일본어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이신 그리스도에 관해 말했고, 이해되었다. 왜냐하면, 이어서 가졌던 간절한 기도에서 사람들은 이 능력과 지혜를 받기를 간구했기 때문이었다.

 

 

1955년 다키노가와 신소그리스도교회 앞의 마리 주르겐센
마리 주르겐센

 

    그녀는 마리 주르겐센(Marie Juergensen)과 함께 살면서 도쿄(東京) 일본어 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웠다. 교회에서는 영어나 성경을 가르쳤다. 그리고 칼로우(カーロー)1949315일 신소 그리스도 교회에서 열린 교단 창립 총회에 참석하여 일본 하나님의 성회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칼로우는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대학생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따뜻한 차 한 잔을 대접하며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1948년의 칼로우

 

일본하나님의성회창립회의록에 등장하는 칼로우 ( カーロー 師 )
1949 일본하나님의성회 창립회에 참석한 칼로우(맨 오른쪽)

 

 

센다이(仙台, 1949~1952)

 

    194812월 어느 날 칼로우는 센다이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녀는 일본어반 1학기를 마치고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19491월에 미야기현 센다이에 있는 점령군 자제의 학교에서 교사로 있던 미국인 친구 마리아 스킬맨(Maria Skillman)을 방문했다. 그리고 칼로우는 스킬맨의 초청에 응답하여 1949720일에 여름방학 중인 도쿄의 중앙성경학교(Central Bible School)의 두 여자 신학생과 함께 센다이에서의 개척 전도를 시작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많은 굶주리고 메마른 영혼들과 만났고, 몇 달 후 이백칠십 명의 아이들이 주일학교에 모이게 되었고, 많은 구원받은 영혼들이 일어나 예배 참석자가 70명을 넘게 되었다.

 

 

    칼로우는 19507월에 진전을 위한 기회들이라는 제목의 센다이 선교 보고를 펜타코스탈 에반젤에 기고했다.

 

혼슈(本州) 북동부는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준다. 이곳은 일본에서 가장 소외된 지역이다. 그 지역 안의 인구 40,000만 명의 많은 마을들과 몇 도시들에는 복음전도 사역이 전혀 없다. 인구 30,000만 명의 센다이시(仙台市)는 전략적 중심지이다.

그 지역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진취적인 일본 남부 사람들보다 50년은 뒤처져 있다. 그렇지만, 최근 미국인들과의 접촉은 그들 가운데서 진전을 촉발시키고 있다. 센다이의 한 일본 그리스도인은 태평양 전쟁 중에 일본 정부에 의해 2년 동안 투옥되었었다. 그 이유는 그가 이 도시의 사람들은 미국인들이 오지 않았을 때 50년 동안 배운 것보다 지난 2년 동안 문명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모든 미국인들이 그리스도인은 아니며, 일본은 자신의 문명을 갖고 있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적 기반이 없이는 그 어떤 문명도 설 수 없습니다라는 그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일본 정부는 북동부 지역 발전과 역사상 최초로 센다이 항구를 대양선박들을 접안시킬 수 있는 항구로 개항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내가 아홉 달 전에 센다이에 온 이후로 매주 일본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해 왔지만, 우리의 현재 시설들은 모든 결신자들을 수용할 수 없다. 우리는 신사와 조상숭배로부터 완전한 분리와 수입된 서구적 습성들을 보아왔다. 수입은 적고 세금은 많지만, 신자들은 십일조와 헌금을 시작했다. 남성과 소년들은 우리의 건물과 기초들을 개선하기 위해 노동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대사 그룹 하나가 조직되었다. 그 그룹은 대학 병원에서 방문 전도를 감당하고 있다.

우리의 정기 예배들에는 매주 약 70여 명이 참석하고 있다. 우리의 주일학교는 두 집에서 열리고 있는데, 참석인원은 보통 270명이다. 그 주일학교는 성인들을 데려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우리는 변두리 마을들에서 복음을 전할 많은 기회를 가졌었다. 예를 들면, 우리는 한 젊은 의사의 집에서 정기 예배들을 드릴 수 있었는데, 그는 암 전문가이다. 그는 토나(東明) 마을에서 20마일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다. 여러분은 그 의사의 아내와 자매는 보이즈 앤 걸스 미쇼나리 크루세이드(Boys and Girls Missionary Crusade)를 통해 제공된 자료들을 사용해 한 주일학교를 열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흥미가 생길 것이다. 주님께서는 토나 주민들 중 몇 명을 구원하셨다. 그들은 우상숭배와 미신에 절어 있었다.

51일에 한 선교사 숙소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 집의 방 두 개는 그 회중을 위한 임시 집회 장소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 회중은 이미 그 계획된 공간이 수용하기에는 너무 크다.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축복은 그 선교사 숙소에서 드린 한 간소한 착공 예배에 소환되었다. 그저 몇 년 전에 센다이 목수들은 미군 막사들이 지어지기 전에는 신사 착공 의식을 하는 것을 허용받지 못했을 때 분노하고 충격을 받았었다. 그들은 조상 영들의 선의를 깔보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은 우리의 예배에서 전에 일본 군대의 장성이었던 오오이지(Ooiji)가 그 숙소 건설을 담당할 다른 임원들과 함께 참석한 회사의 사장으로부터 근로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 것과는 너무도 대조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새 숙소로 인해 감사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것은 그 회중을 위해 적합한 장소는 아니고 단지 임시 장소가 될 뿐일 것이다. 한 새로운 교회 건물이 우리의 사역을 위해 절실하다. 우리는 남성들과 여성들, 그리고 청년들이 우리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재정적 도움을 줄 것을 여러분에게 호소한다. 새로운 교회를 위한 헌금을 센다이 교회라고 적어 스프링필드, 웨스트 퍼시픽 스트리트 434, 해외선교국에 보내길 바란다.

오오이지는 그 착공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 하나님, 센다이 하나님의 성회가 혼슈 북동부 전체를 위한 부흥 센터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우리의 사역을 위해 그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에 당신의 마음을 합해주지 않으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곳 일본 북동부에서 전진할 기회들을 제한하지 않고 계시다. 우리가 그분이 우리에게 붙들어 열고 계시는 문들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센다이교회 건축헌금 광고지

 

 

    칼로우 팀은 19501015일에는 250평의 토지를 구입해 목사관을 짓고 센다이 신소그리스도교회를 세웠다. 여러 명의 적합한 조력자들을 얻은 칼로우는 성경 모임과 영어반, 노방 전도, 주일학교 및 가정 집회에서 활발하게 사역했다. 또한 센다이 근교에 거주하는 미군들도 그녀의 활동을 지원했다.

 

 

 

센다이교인들과 함께

 

센다이교회 헌당식

 

센다이교회 주일학교에서 오르간을 반주하는 칼로우

 

현재의 센다이 하나님의 성회

 

 

195012월에 칼로우는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흥이라는 글을 펜테코스탈 에반젤에 기고했다.

 

유나이딛 에반젤리칼 액션(United Evangelicald Action)에 기재된 최근의 한 기사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더글라스 맥아더 대장은 극동에서 인류애를 위한 자유의 마지막 전쟁이 될 것을 지휘하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지도자들에게 일본의 군사상 전략적 중요성을 납득시켜 온 것 같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이 미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했던 청원에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는 더 많은 선교사들과 일본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덮어버릴 정도로 충분한 수백만 권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이 영적 캠패인은 동양인들에게 있어서 군사작전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성경 협회에서 보내준 요한복음 4,000권을 받았다. 우리는 매주 복음을 전하며 각 거리와 병원 집회에서, 그리고 우리 교회에 오는 사람들 모두에게 그 쪽복음서들을 나누어주고 있다. 그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새로운 진지함이 있다. 어떤 저녁에는 스물세 명이 구원을 위해 기도를 받으려 교회에 네 블록을 걸어왔다. 바로 지금이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때다. 지난 여름에 열렸던 복음 선교 집회(Evangelical Missionary Conference)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나라 일본과 동양(the Orient)을 복음화할 필요에 각성되었다.

나는 얼마 전에 버클리에 있는 장로교선교회(Presbyterian Missionary Court)에서 머물며 한국에 체류해왔었던 장로교 선교사들 몇 명을 만나는 특권을 가졌었다. 일본에 머물고 있는 그 친구들은 지금 진행 중에 있는 싸움(conflict)이 끝나면 그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내게 1945년에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한국의 부흥을 위해 이른 새벽에 기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의 결과로 서울에서 지난 5월과 6월에 10,000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대구 집회들은 기차역 앞의 넓은 광장에서 열렸는데, 저녁 집회들에는 수천 명이 참석했다.

한국의 한 목사는 병자들을 위한 기도를 위해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다. 그는 500명과 150명에게 기도했는데, 그들은 고침을 받았다. 그 치유들 중에서 50개의 사례들은 가시적인 것들이었는데, 마른 손이 회복되었고, 폐결핵으로 죽어갔던 사람들이 회복되어 걸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나라를 통일시켜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해 왔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수천 명이 북한에서 남한으로 왔다. 대부분이 서울에 머물렀다. 그들 중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았고, 그들은 서울의 그리스도인들과 4,000명이 앉을 수 있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교회에서 하나가 되었다. 큰 성경 공부 그룹들이 조직되었고, 그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고아원이 개원되었고, 피난민촌이 설립되었다.

약 일 년 반 전에 백오십 명의 경찰관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한국의 어떤 지역에서 살해되었다. 한국 전도자들은 나라 구하기”(Save the Country)라는 전도 캠패인을 조직하고 그 학살 직후 복음을 들고 그 지역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런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계속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피로써 그들의 고백을 증명해 왔다.

한국에 대한 이 직접적인 보고들을 들으면서, 나는 하나님께서 또한 일본에 큰 부흥을 보내실 것이라고 느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라.

 

 

    이듬해인 19517월에 펜테코스탈 에반젤에는 하나님은 무엇이든 할 수 있으시다라는 칼로우의 글이 실렸다.

 

일본 하나님의 성회 총회가 412일에서 15일까지 도쿄에서 열렸다. 영국, 스웨덴, 캐나다, 그리고 일본에서 온 많은 선교사들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 그리고 또한 군인들과 선원들도 참석했다. 첫 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다.

내가 선교해 왔던 센다이에서 열 명이 그 집회에 참석했고, 소녀들 중 한 명이 성령의 영광스러운 충만함을 받았다. 다른 세 명은 여러 시간 동안 성령의 능력 아래 있었다. 모두 이십여 명이 그 총회 동안 성령침례를 받았다.

그 총회에서 돌아온 후, 센다이 교회에 축복들에 대한 보다 큰 믿음이 있는 생긴 것 같았다. 지난주 기도회 중에, 내가 그녀의 집에서 센다이 사역을 시작했었던 나리사와 양이 세 시간 이상 성령의 능력 아래 있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의 역사에 자신을 맡기도록 기도해 주시라.

그리스도께서는 물의셨다.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나는 최근 나의 불신앙을 자책했다. 내가 그 불교인 할머니들 중 몇 명을 보아 오면서, 하나님께서 그런 굳어버린 마음들을 구원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그러나 마리 주르겐센이 그 총회 직전에 열린 특별 집회들 때문에 여기에 왔을 때, 거의 팔십 세의 한 여인이 그리스도인으로 새 출발을 했다. 그녀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인 그녀의 딸을 계속 핍박해 왔었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온 그 소녀가 그 총회에서 성령침례을 받았다. 나는 그녀를 걱정했었다. 그녀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었다. 하나님은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주려 하시는 것 같다.

우리는 이번 주에 특별 집회들을 열고 있으며, 7월에는 한 전도 집회를 가질 것을 기대하고 있다.

성령께서 그 교회에서 역사하기 시작하신 이래로 실족한 사람들이 있다. 모든 사람을 그분의 길로 인도하시기를 주님께 기도해 주시라. 내가 지혜와 지도력을 갖도록 기도해 주시라.

몇 주간 생각해 왔는데, 만약 만주가 폭격당했다면, 다음에 일본도 폭격당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상황이 진정되어서 선교사들이 계속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간절하게 기도할 필요가 있다. 나는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4:14]라고 말한 것이 바로 지금 일본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에게 해당된다고 느끼고 있다.

맥아더가 미국으로 떠나는 날, 나는 도쿄 중심가에서 전철을 탔다. 전철을 탄 일본인의 견해들을 듣는 것이 흥미로웠다. 한 여성이 말했다. “맥아더가 가버리니 너무 쓸쓸하네요.” 한 남성은 말했다. “이제 군정은 어떻게 될까 궁금하군요.” 내가 알기로 맥아더가 탄 비행기가 떠나는 것을 보러 공항으로 갈 시간이 없던 한 학생은, 그럼에도 전차 정류소로가서 공항까지 늘어선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그 학생은 간접적으로 맥아더를 배웅하는 기분을 느꼈다!

 

 

1951년에 발행된 칼로우의 선교사증명서

 

 

    19518펜테코스탈 에반젤에는 일본에서 여름 파종이라는 칼로우의 글이 실렸다.

 

지난 6월 마지막 주에 이렌 클라센 양(Miss Classen), 나카무라, 이곳의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나는 그 도시에서 성경책을 배포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쪽복음선교회(Pocket Testament League)와 함께 협력했다. 성경책 수천 권이 배포되었다.

우리 교회에 영향을 준 예배들은 이곳 근처에 있는 한 고등학교 학생 970명에게 복음을 제시한 것, 대학병원에서 예배드린 것, 1,238명의 죄수들에게 증거한 것, 사형수 20명을 다룬 것 등을 포함했다.

이 복음 전도 노력의 결과 많은 새로운 사람들이 교회로 왔다. 한 칠십 오세의 할머니가 그 학교 집회 이후 성실하게 참석해 왔다.

7월에 미스 클라센과 나는 여기 센다이에서 구원받은 한 소녀의 집을 방문하기 위해 코사카(Kosaka, 고사카마치(小坂町), 일본 북부 아키타현 북부의 가즈노군의 정()의 그 마을로 갔다. 그녀는 몇 집회들을 마련해 왔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구리 광산, 일본의 작은 아나콘다(the little Anaconda of Japan)가 여기 코사카에 있다. 나는 일본의 이 지역 방언의 발음과 문장구조가 달라서 열차를 타고 있는 사람들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또한 네노시로이시(Nenoshiroishi, 미야기현 미야기군에 설치되었던 네노시로이시(根白石村)의 시골 마을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우리는 센다이에서 구원을 받은 한 청년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는 자신의 마을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는 우리가 적어도 삼백 명이 참석한 그 마을의 회관에서 한 집회를 갖도록 주선했다. 우리는 또한 참석하기 원하는 아이들을 위해 그 학교에서 말씀을 전했고, 한 거리 집회를 가졌다.

일본의 시골집들은 아주 크고 지푸라기 지붕으로 덮여있다. 부엌은 그 위로 갈고리에 걸려있는 요리용 냄비들이 걸려있는 불로부터 연기가 나가게 하기 위해 지붕에 구멍을 갖고 있다. 우리에게 제공된 특히 맛있는 것은 오-시로-(o-shiro-ko)(おしるこ)였다. 오시루코는 팥을 물에 불린 후 설탕을 넣고 삶아서 떡이나 하얀 경단을 넣은 간식이다.

한 철도원은 여기에 있는 한 병원에서 여섯 달 동안 입원했었는데, 우리 교회에 참석하고 있는 한 여성에 의해 간병을 받았다. 그 결과, 이 남자와 그의 부인은 약 7,000명의 인구를 갖고 있는 요시오카(Yohioka, 군마현의 吉岡町)의 시골 마을에 우리를 위해 집회들을 주선했다. 한 집회는 학교 교사들과 하나님을 위한 사역에 관심이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열렸다. 그때 시청각교재가 사용되었다. 우리는 그 시청각교재를 사용하는 주일학교를 열었다. 한 거리 집회는 확성기를 사용하여 열렸다. 그 마을회관에서 열린 저녁 집회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우리는 집회들을 위한 집을 아주 적당하게 빌릴 수 있게 되면서, 하나님께서 요시오카에서 우리 앞에 열린문을 두고 계시다고 느낀다.

우리는 센다이 교회가 복음이 아직 전해지고 있지 않은 주변의 많은 시골 지역들에 이를 수 있는 전도 센터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성령의 부으심이 이곳에서 일어나기를 그래서 신자들이 세워져 그분을 위해 일을 시작하도록 기도해주시라.

이제 추수 때다! 폭우가 다가오고 있다.

 

    칼로우는 19519월에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에게 사역이라는 제목을 글을 펜테코스탈 에반젤에 기고했다.

 

주일에 나는 나의 정례적인 설교 자리에 성령충만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 중에 하나를 보냈다. 그리고 나카무라, (나와 함께 사역해 온) 이렌 클라센(Irene Classen)과 나는 쪽복음 선교회의 한 길거리 전도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센다이에서 가장 붐비는 곳으로 갔다. 클라센 양이 선포했고, 그녀의 메시지는 쪽복음 선교회의 통역자에 의해 통역되었다.

우리는 그 메시지가 거리에 있는 미군들 중 어떤 사람들에게 어필할 것이라고 느꼈다. 근처 식당의 음악이 꺼졌고, 모든 군인들과 일본인 종업원들이 귀를 기울여 들었다. 두 군인들과 영어를 말할 수 있는 두 명의 일본인들은 그 교회에서 열리는 우리의 토요일 저녁 예배에 참석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했다.

그 길거리 집회 끝 무렵에 사십 명의 일본인들이 기도하기 위해 그리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하기 위해 그 포장도로에 무릎을 꿇었다. 쪽복음 선교회는 우리에게 우리의 예배들을 소개할 기회를 여러 번 주었다.

다음 날 나는 미야기 교도소(the Miyagi Prison)에 가서 혼슈의 여섯 개 북부 관구들 중에서 가장 교정할 수 없는 1,238명의 죄수들에게 일본어로 짧게 복음을 전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셨다. 우리는 사형 선고를 받은 열여섯 명을 상대하기를 원했지만, 그러나 다른 수감자들 가운데서 너무도 많은 사형 판결들이 있어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미야기 교도소

 

교도소장이 나와 침례교 사역자에게 그 교도소에 정기적으로 와줄 것을 요청해 왔었다. 모두가 너무도 바빴지만, 나카무라 목사와 나는 사형수들 가운데 몇 명을 상대하러 이번 금요일과 다음 주 수요일에 가기로 했다. 그 수감자들 가운데 몇 명의 사형집행이 천황 어머니의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 황제에 의해 연기되었다. 황제의 모친은 지난 금요일에 매장되었다. 그 사람들은 한 번에 하나씩 우리에게 보내질 것이다.

그 교도소장은 내게 나의 사역과 기독교에 대해 많은 것을 물었다. 나는 그의 말들로 미루어 볼 때 그가 회개와 믿음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들이 죽음에 직면할 때 자신들의 어머니들을 많이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그들에게 효과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부교도소장은 불교에 철저한 사람이다. 기도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528월에 칼로우는 휴가차 귀국했다. 이때 1950년에 미국 하나님의 성회 협력 선교사로서 하와이로부터 일본을 방문해 고베에서 일본어를 배우면서 바이어스 선교사를 돕고 있던 엘렌 J. 야마다(エレン 山田, Ellen J. Yamada)가 센다이로와 칼로우의 사역을 대신했다.

 

 

1952년 요코하마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배의 승객명단에 등장한 칼로우

 

휴가 귀국(1952~1955)

 

    칼로우는 19529월부터 19536월까지 미주리주 스프링필드의 센트럴 바이블 칼리지(Central Bible College)에서 공부해 종교 교육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센트럴 바이블 칼리지의 앨범 The Cup1953년 판에는 칼로우가 특별학생”(Special Students) 일곱 명 중 하나로 등장했다. 그녀는 그 후 센다이 예배당 건축 모금을 위해 여러 교회를 순회했는데, 여독으로 심장발작에 시달렸다. 10일간의 입원과 3개월간의 요양이 필요했다. 몸 상태가 회복된 그녀는 1954325일에 아이다호주 포커텔로(Pocatello)에서 남 아이다호 지방회로부터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어 19558월에 일본을 재방문했다.

 

 

 

2(1956~1959)

 

도쿄

 

    도쿄로 돌아온 칼로우는 호야(保谷, 현 서동경시)에 살며, 1956년부터 1년간 체스넛이 세운 코엔지 교회(高円寺教会, 현 신나카노그리스도교회, 新中野キリスト教会)를 도우면서 도쿄 일본어 학교에 복학해 일본어를 배워 3년 과정을 수료했다. 그 후 중앙성경학교 교단에 서서 바울 서신과 기독교 교육 등을 일본어로 강의했다.

 

 

 

 

도쿄 중앙성경학교학생들과 교수진, 앞줄 중앙 왼쪽의 칼로우, 오른쪽의 마리 주르겐센, 유미야마



 

 

 

    19561월에 칼로우는 마리 주르겐센과 함께 쓴 도쿄에서 증가하고 있는 수고라는 글을 펜테코스탈 에반젤에 기고했다.

 

도쿄의 중앙성경학교(Central Bible Institute) 등록이 늘어나고 있다. 필요한 것들이 늘어나고 있어서 일본인 실행위원들과 선교사들은 그 필요와 그에 따른 재정을 고려하며 기도했다. 한 결과로, 주님께서 교단행정실, 성경학교, 주일학교, 그리고 문서선교국에서 필요한 사람들 중 몇 사람을 허락해 주셨다. 이 네 개의 기관들이 모두 성경학교 행정건물의 이층의 작은 공간에 빽빽하게 모여있다. 비록 라디오 우편국이 방송국으로 이전했지만, 현재의 공간은 여전히 우리의 출판물들을 선적, 보관, 그리고 편집에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일본의 증가하고 있는 오순절 단체를 적절하게 보조하기에 충분하게 확장시킬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현재 성경학교 여학생 기숙사는 그 학생들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적다. 이에 대한 일반적인 추정치를 얻고 비교한 결과, 자금이 조금만 더 있으면 새로운 2층 기숙사를 지을 수 있고, 현재의 단층 건물은 주일학교와 문서선교국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현재의 건물에서 보다 적당한 위치로 이전하기를 원한다. 성경학교 구내(the Bible School compound)에는 이것을 위해 충분한 방들이 있다. 이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현재 여기 도쿄에서는 부지 마련 비용이 건물값 자체보다 높지 않다면 적어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주님께 감사하게도 우리의 복음 문서 사역이 크게 진척되고 있긴 하지만, 일할 시간이 있는 능력 있는 번역자와 편집자가 충분하지 않다. 역량 있는 학자들만이 일본인과 같이 고도로 소양 있고 비평적인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문서들을 산출해낼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도 필요하다. 일본어 자체의 어려움은, 문체는 제쳐놓고라도, 식자 오류들을 없애기 위해 적어도 일곱 번 교정을 필수로 만든다. 우리는 오류 없이 문서를 산출해내려고 계속 노력하고 있다. 과로하고 있는 목사들과 실행위원들은 번역자로 봉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한 지붕 아래, 1층에 책을 보관할 장소를 갖는 하나로 통합된 문서선교국이 우리 일본 교단 전체 구성원들이 바라는 것이다.

 

    칼로우와 주르겐센은 한 달 후인 2월에도 일본에서 다급한 호소라는 글을 펜테코스탈 에반젤에 기고했다.

 

익어서 추수하게 된 밭을 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부패를 허락하는 설익은 밭은 비통한 것이다. 일본은 추수기에 접어들었다! 익은 곡식들이 손짓하고 있다. 사십 년 이상의 파종 이후, 추수 때가 되었다. 촉박한 시간이 우리를 서두르게 하고 있다. 이것을 무시하는 것은 가장 비통한 것이 될 것이다. 선교 사역에 있어서 적절한 시간의 이점을 무시하는 것은 생명과 돈 문제에 있어서 교회(또한 소위 기독교 국가들)에 큰 손실을 안길 것이다. 하나님은 일본에서 우리에게 열려있고 효과적인 문을 허락해 주고 계시다. 우리는 밀고 들어가야만 한다.

이 추수 결과를 보라! 일본에서 개척지들의 새로운 교회들은 전도 문서를 요구하고 있다. 그 신자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성회들에서 성령침례를 받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는데, 교육 문서를 요구하고 있다. 일본 교회 지도자들은 우리에게 주일 학교 교사들을 위한 훈련 교제, 목회자 계속 교육, 그리고 평신도를 위한 다른 라디오와 통신 과정을 요청하고 있다. “이전 과정이 종료되었습니다. 수강자명부에 있는 2,000명을 위한 다른 과정이 필요합니다라는 요청이다.

바쁜 목사들과 교단 실행위원들이 짬을 내어 문서 배포에 힘쓰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앞에 그 큰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여전히 적합한 문서는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의 파악에 따르면, 우리는 이 필요를 채워 줄 힘을 갖고 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인쇄된 복음문서들을 충분하게 그리고 제때에 공급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성경학교로 사용되어 온 한 훌륭한 건물은 우리가 단지 4,000달러면 활용가능하다. 성경학교는 확장된 여학생 기숙사를 건립해야 하고, 건립한다면, 우리가 현재의 건물 전체를 보다 저 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유리한 것들이 많은데,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현재 건물이 세워져 있는 부지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도쿄에서 부지들은 적어도 건물들만큼의 비용을 요구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제공의 유리한 점을 즉시 취해야만 한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문서선교국과 주일학교국 그리고 또한 성경학교에 적당한 시설들을 제공할 수 있게 되어 그 기관들을 한 발자국 전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문서선교국 관련 기관들을 한 지붕 아래 모아놓는 것은 일본 하나님의 성회 전체의 발전에 필수적인 것이다.

이 시점에서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와 지원은 주님의 포도원의 이 지역에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러분이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주님의 봉사(the service of the Mater)이기 때문이다!

 

    『펜테코스탈 에반젤19565월 판은 히로시마에 개척된 성회라는 칼로우의 글을 실었다.

 

1945년 무더운 8월 오전 8시가 조금 지났을 때였다. 그 젊은 아내는 그녀의 사내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아침을 준비하고, 이제 부엌에서 접시들을 씻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그 도시의 중심부로터 눈을 멀게 할 만큼 강력한 섬광이 비쳤다. 그녀는 마당으로 뛰어나갈 수 있었지만, 그 집은 그녀의 아기와 시아버지 위로 무너져 내렸다!

어린 시절부터 받아왔던 훈련의 결과로 본능적이고 반사적으로 먼저 그 아기에게로 그리고 그다음 지붕 들보가 관통한 그녀의 시아버지를 돕기 위해 뛰어갔다. 시아버지는 톱을 요구했지만, 그녀도 시어머니도 그 집의 잔해 가운데서 톱을 찾을 수 없었다. 이십 분도 안 되어 강력한 열광선과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 시작된 불이 났다. 시아버지는 그 둘에게 시간이 있을 때 도망쳐 살아남으라고 명령했다. 그 젊은 아내와 그녀의 시어머니는 히로시마 (広島市)를 덮쳤던 그 참사에서 탈출했다. 그러나 그들의 몸은 그 폭발의 영향을 받았다.

그로부터 십 년이 흘렀다. 그 과부는 시골로 이사했고, 그 젊은 아내와 그녀의 남편은 남은 두 아이와 함께 히로시마 근교로 이사했다. 그 젊은 아내는 자기 몸이 피곤할 때 안에서 피를 흘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과부는 자기 얼굴의 화상에 당황했다.

그 젊은 아내는 피흘리는 것이 멈추지 않으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느꼈고, 죽음의 공포에 떨었다. 그때 그들은 도쿄에 있는 중앙성경학교의 학생인 그녀의 여동생을 기억해냈다. 그 기독교인 자매가 그녀가 평안을 찾는 것을 도와줄 수 있었을까? 그날이 되어 그 성경학교 학생 야마구치 양(Miss Yamaguchi)과 두 명의 선교사들이 그 근교의 집에서 두 번의 예배를 드리러 왔다. 참석했던 그 두 사람은 두 번의 예배 만에 구원을 받을 만큼 새로운 종교를 잘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계속 하나님을 구할 수 있는 한 지속적인 교회를 적극적으로 원했다.

주님께서는 히로시마에서만 역사하신 것이 아니었고, 이 주 후 도쿄에서 만난 일본 하나님의 성회 임원들의 마음에서도 역사하셨다. 이 형제들은 그 히로시마 사람들이 절망적인 도시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진정으로 전해줄 수 있는 사자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들은 전도양양한 젊은 목회자들 가운데 하나인 고이치 기타노(Koichi Kitano, 北野耕)를 택했다. 그는그의 아버지가 그의 소년 시절부터 계획해 왔었던 오사카 시에 있는 한 큰 농아학교의 교장이 되기보다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했었다. 이 청년은 그의 소명과 헌신을 증명해 왔었다.

 

北野耕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인구 500,000명의) 히로시마에 한 성회를 개척하기 위해 문을 열어 오셨다. 그곳은 혼슈의 모든 다섯 개 남극단 관구들을 위한 전략적 중심지이다. 여기, 핵폭탄이 처음으로 그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였던 그 도시에서 순복음의 놀라운 힘이 알려지게 될 것이다.

이 훌륭한 일본 사역자를 돕고 싶으신가? 그렇다면, “일본 선교지를 위해, 히로시마의 현지인 사역자를 위해라고 지정된 헌금을 미주리, 스프링필드, 서 퍼시픽 스트리트 434, 해외선교국을 보내시라.

 

    칼로우는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일본 하나님의 성회의 출판부 부장직을 수행하며 소책자들이나 20권 이상의 서적을 복음출판사(福音出版社)를 통해 출판했다. 그녀의 수준 높은 일본어 지식과 일본인들의 일상어에 익숙함은 일본 사역에 있어서 탁월한 위치를 그녀에게 부여했다. 그녀의 일본어 학교 교사였던 기무라 히로시(木村) 박사가 영어 번역을 도왔고, 사쿠라마치(桜町)의 기무라 집에서도 개척 전도를 시작했다.

 

오카야마(岡山, 1958~1959)

 

    엘렌 야마다는 1954년에 센다이(仙台)에서 오카야마(岡山)로 옮겨 개척 전도에 종사하고 있었다. 엘렌은 사카이미나토(境港)에서의 개척 전도를 시작해 19579월에 휴가 귀국할 때 이번에는 도쿄의 칼로우가 오카야마로 가서 엘렌의 역할을 이어받았다. 칼로우는 오카야마에서 히로시마에 있던 기타노 고이치(北野耕)와 하와이에서 온 엘렌의 아버지와 함께 19597월 오카야마 신소그리스도교회( 岡山神召キリスト教会 ) 헌당에 힘을 쏟았다.

 

岡山市北区下伊福本町7-34에 있는 오카야마신소그리스도교회 岡山神召キリスト教会

 

 

    펜테코스탈 에반젤은 19597월에 가미: 소년들과 소녀들을 위한 한 이야기라는 제목의 칼로우의 글을 실었다.

 

이 페이지의 머리말로 내걸린 일본어는 하나님”(God)을 의미한다. 일본 어린이들은 그 단어[]가미라고 읽는다. 그런데 그들이 학교에서 그 단어를 읽을 수는 있겠지만, 그들 중 대부분이 오직 한 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모른다. BGMC(Boys and Girls Missionary Crusade)에 헌금해 온 여러분은 일본 주일학교 교재들을 출판하도록 도움을 줌으로써 많은 아이들이 한 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하는 데 도움을 주어 왔다.

다음 이야기는 여러분이 도와서 일본 어린이들을 위해 출판하게 된 책에 실려 있는 실화다.

수십 년 전에, 영국에 제시(Jessie)라는 이름의 작은 소녀가 있었다. 그녀가 학교에 갔을 때, 담임 선생님이 그녀에게 어떤 아이들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진정한 한 분 하나님에 대해 모른다고 말했다. 어느 날 밤, 제시가 별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는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별들을 만드셨어, 그래서 언젠가, 내가 자랐을 때, 진정한 한 분 하나님에 대해 모르는 아이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그분에 대해 말해 줄 거야.” 그녀는 그렇게 했다! 그녀가 자랐을 때 일본으로 갔고, 거기서 선교사로 사십 년을 일했다. 제시 길스피 양(Miss Jessie Gillepsy)는 소년들과 소녀들을 사랑했다. 그녀는 일본 전역의 유치원에서 그들을 가르쳤다.

한 어린 소녀가 유치원에 가서 예수 사랑하심을”(Yes, Jesus Loves Me)을 배웠다. 오래지 않아 그 어린 소녀는 성홍열로 아프게 되었다. 그녀는 부모에게 그녀의 선생임이 와서 그녀와 자기와 함께 기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하나님을 몰랐고, 그래서 제시 양이 오도록 하지 않았다.

그 어린 소녀는 점점 더 아프게 되었다. 아무도 그녀와 함께 기도하러 오지 않았다. 그녀의 집에서 아무도 어떻게 기도할지를 몰랐다. 그러나 이 어린 소녀는 주일학교에서 배웠던 한 노래를 불렀다.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배웠네 . . . 날 사랑하심, 나를 위해 죽으셨네, 하늘문을 여시고 들어가게 하시네 . . .” 그리고 어느 날, 만면에 웃음을 띈 채 주 예수님과 함께 있기 위해 하늘나라로 갔다.

이것은 새롭게 출판되는 책, “선교사 이야기”(The Making of a Missionary)에 있는 이야기들 중 하나다. 이 책은 일본의 많은 사람에 의해 읽혀질 것이다. 이 책은 백십칠 페이지이고, 출판 비용은 고작 일본 돈으로 삼십 센트인데, 여러분의 주일학교 헌금이 출판비용을 지불하는 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작은 헌금이 여기 일본에서 잡지, 신문, 그리고 어린이 주일학교 교재들을 출판하는 것에 도움이 되고 있다. 여러분의 도움에 감사한다. 많은 일본 소년들과 소녀들이 주일학교에서 칼라 카드를 받을 때 주일마다 여러분에게 감사하고 있다. 많은 부모들이 진정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책들을 읽을 때 여러분에게 감사하고 있다. 여기 일본에서 이 책들을 읽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

 

    휴가에서 돌아온 엘렌과 키타노가 195986일에 가루이자와의 마리아 주르겐센의 별장의 정원에서 결혼식을 올렸을 때 칼로우가 결혼식의 일체를 주관했다. 그녀는 195910월에 일본을 떠나 대만에서 2개월 정도 선교활동에 종사하고, 그 후 두 번째 휴가차 귀국했다.

 

휴가 귀국(1960~1962)

 

    휴가 귀국 중에 어머니 루스가 심장 발작으로 쓰러졌고, 칼로우는 오랫동안 어머니를 간호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병든 어머니와 함께 일본을 방문하는 방법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고, 그러던 중 그녀는 심혈을 기울이던 일본 하나님의 성회 출판부장직을 상실한 것을 알고 낙담했다. 그러던 중 한국 선교의 문이 열렸고, 칼로우는 선교지를 일본에서 한국으로 바꾸기로 했다.

 

 

V. 한국 선교

 

    196211일에 펴내진 미 하나님의 성회 목회자와 선교사 명부는 칼로우의 선교지를 한국으로 표기했다. 그러나 그의 주소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선교지부였다. 미국 하나님의 성회는 글로벌 컨퀘스트의 일환으로 선교 전도자 토미 리드(Tommy Fenton Reid)와 그의 아버지 알버트 리드(Albert Reid) 팀을 1962년 한국에 보냈다. 리드는 순복음의 불길이 조용기와 그의 사역 아래서 붙어 타오르고 있던 순복음 중앙교회에서만 사역하지 않고, 다른 도시들에서도 사역했다.

    리드 목사는 뉴욕 버팔로(Buffalo, New York)에서 알버트 리드 목사와 그의 아내 욜란다(Yolanda) 사이에서 태어났다. 소아마비를 고침 받은 후, 리드는 1953년에 전적으로 복음전도 사역에 뛰어들었으며, 아버지와 함께 전 세계를 여행하며 한국의 서울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서대문 중앙순복음교회에서 조용기 목사를 도왔다. 서울에서 성공을 거둔 후, 195926세의 나이에 리드는 필리핀, 마닐라로 가서 캐스드랄 오브 프레이즈”(Cathedral of Praise)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오순절 교회였던 벧엘 템플”(Bethel Temple)의 수석 목사로 임명되었었다.

 

아들 토미 리드(왼쪽)와 아버지 알버트 리드
1961년 토미 부자의 필리핀 집회소식
1962년 토미 리드의 전주집회 소식
1963년 토미 리드의 청주집회 소식

 

    그즈음에 전주의 강홍모(Hong-Mo Kang)의 부인이 서울 학교에 다니고 있던 두 딸을 방문했다. 강홍모의 부인과 두 딸은 서울에 있는 부흥회관에서 열리고 있던 모든 글로벌 컨퀘스트 집회들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들은 저녁 집회들에서 심한 질병들을 고침받았고, 모두 아침 집회들 동안 방언을 말하며 성령침례를 받았다. 전주로 돌아간 강홍모의 부인은 남편에게 일어난 일을 말해 주었다. 그러자 강홍모는 자기 부인을 서울로 다시 보내 부흥 팀들을 그의 영생장로교회와 1,600명의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던 영생고등학교로 초청했다. 그는 그 교회와 학교를 설립한 사람이었다. 그 교회는 독립 장로교회였다. 그것은 그가 오순절적 설교가를 그의 교회와 학교에 자유롭게 초청할 수 있는 이유였다. 조용기는 통역자로 그 팀과 동행했다.

    리드는 강홍모를 만나는 것이 염려스러웠다. 그는 한국에서 가장 높은 계급인 양반이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강홍모는 1921년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 대성리에서 부유한 집 자제로 태어나 전주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하여 경신학교에서 수학 후 일본 명치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전라북도도청에서 근무했다.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을 침범했을 때, 강홍모는 산속으로 숨었다. 그는 만약 목숨을 살려주신다면, 주님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이라 하나님께 서약하며 하나님의 보호를 간구했다. 1951년 전주로 돌아왔을 때, 강홍모는 거리에서 구걸하고 있는 많은 아이들을 보았다. 그들 중에는 그의 가문처럼 부유한 가문의 아이들도 있었다. 강홍모는 그 아이들을 모아 야학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했다.

 

강홍모

 

    전주남문교회 연혁을 보면 1952년 전에 폐쇄 되었던 영생보육원을 부활하여 당시 남문교회 담임 이해영 목사를 이사장으로 1951 5월에 장립을 받은 강홍모 장로를 부이사장으로 가정 학교 교감에 김삼순 사모로 조직하였다. 아마 이때 야학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당시 남문교회 예배당이 건평 약 80평 정도, 본당은 50~60평 정도, 이곳에서 40~50명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평일에 야학을 하던 학생들을 주일날 교회에 예배드리러 오라 했더니 남루한 행색에 냄새까지 나는 아이들이 예배당 거의 전부를 차지했다. 일반교인들이 앉을 자리가 없게 되었다. 이에 남문교회 교인들이 예배당을 더럽힌다고 불만이 고조 되었고, 당회는 강 장로에게 다른 곳으로 떠나기를 권유했다.

    이에 강홍모 장로는 당시 남문교회 원로목사이던 고득순(일명 명량)과 함께 남노송동 90번지 속칭 간납대(諫納臺, 현 천주교 전주교구청에서 군경묘지까지) 산속 한 모퉁이를 빌려서 천막과 판자로 두어 칸의 교실과 천막을 짓기 시작했다. 이것이 영생학원과 영생교회의 모태(母胎)였다. 당시 이 산의 주인은 이주상 씨로 후에 제10대 민선 전주시장을 지내신 사람인데 고득순 목사와 지인(知人)이라서 쉽게 허락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의외로 허락하지 않아 강 장로는 몇 차례를 찾아 간청 끝에 겨우 허락을 받아내었다.

 

 

 

 

 

    그 후 조금씩 지경을 넓혀 마침내 산 전부를 매입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35사단 공병대의 도움으로 학교 부지를 정리하고 교사(校舍)를 짓기 시작했다. 야학생들이 주일날 예배드릴 장소가 없어서 판자 교실에서 시작한 예배가 영생교회의 효시(曉示)였다. 이보다 앞서 강 장로는 남문교회 장로로 총회 총대로 피선되어 총회에 참석하였다가 총회 운영에 환멸을 느끼고 돌아와 기독교장로회를 떠나 무 교단으로 교회를 인도했다. 그의 영향력은 전주 지역 전역에 퍼졌다. 1962년 당시 전주에는 그의 기독교 교육 프로그램과 연계된 네 개의 교회들이 있었다.

    전주에 도착했을 때, 리드 일행이 받은 열렬한 환대는 예상하지 못한 정도였다. 강홍모는 그 팀을 전주역까지 마중 나왔고, 일행을 차에 태워 인구 이십만의 도시 전주의 거리들을 손수 운전했다. 그들을 태운 카라반 자동차가 영생고등학교에 접근하자 교복을 입은 수백 명의 학생들이 길에 도열 해 있었다. 그들이 받은 환영은 한 국가 정상의 국빈 방문을 위해서도 충분할 정도였다. 강홍모의 집에서 열린 간단한 환영회 후, 그 팀은 영생고등학교의 운동장으로 안내되었다. 1,600 명의 학생들이 공식 환영식이 진행되는 동안 대열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서 있었다. 학생들을 사열한 후, 그들은 강단에서 각자 짧게 말했고, 화환과 영생고등학교 방문 기념 금메달을 받았다.

 

영생고에서 열린 리드 일행 환영식

 

    글로벌 컨퀘스트 크루세이드의 한국 집행자(coordinator) 존 허스턴이 첫 예배때 설교했다. 청중들은 전심으로 반응했다. 둘째 날 저녁 절정에서, 리드는 자신이 소아마비를 고침받았던 것을 간증했다. 청중들은 전에 병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지만, 그들 중에서 스물다섯 명이 후에 그 예배 때 고침을 받았었다고 간증했다. 병 고침의 이적들이 전주 집회 동안 뚜렷하게 나타났다. 어떤 저녁 집회에서 앉은뱅이 두 명이 서서 고침 받았음을 간증했다. 몇 번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 뛰어와 앉은뱅이가 막 일어나 걸었습니다!”라고 외쳤다. 한 열여덟 살의 벙어리 앉은뱅이 청년이 그 부흥회 동안 걷고, 말하고, 그의 팔들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 장로교인들은 밤새워 기도했다. 리드 팀은 저녁 어느 시간이든 그들이 하나님께 전심으로 드리는 기도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네 시 반에 드리는 새벽 기도에 정기적으로 참석했다.

    매일 아침 열한 시에 열린 성령 집회들”(Holy Ghost Meetings)은 리드와 그 아버지가 보아왔던 그 어떤 집회보다 가장 감격스런 것들이었다. 그 큰 장로교회 건물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몇백 명이 밖에 서 있었다. 한 전도부인이 세어보니 그저 두 번 예배 만에 육십 명 이상이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았다. 한 예배에서는 성가대원들 중에서 이십 명이 성령께서 말하라고 주시는 대로 다른 방언을 말했다. 이백 명의 장로교인들이 십일 간의 예배들에서 성령침례를 받았다.

 

전주영생교회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뒷줄 왼쪽부터 리드, 리드의 부친, 조용기전도사, 강홍모 장로

 

    영생고등학교의 훌륭한 교육적 기회들 때문에 많은 비기독교 가족들이 그들의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고 있었다. 이 학생들은 이미 그 학교 성경 과목들을 통해 기독교적 분위기에 젖어 들었었다. 그들이 글로벌 컨퀘스트 크루세이드 동안 개인적인 오순절”(personal Pentecost)에 대해 들었을 때, 그들 중 많은 학생들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방언을 말하며 성령침례를 받았다.

    전주에서의 반응은 엄청난 것이었다. 군중들은 그 팅이 한국에서 보았던 것들 중에서 가장 큰 것이었다. 그 교회에서 가능한 모든 공간이 가득 찼고, 밀려드는 군중을 수용하기 위해 커다란 나무 강단이 그 교회 뒤편에 세워졌다. 적어도 천오백 명이 말씀을 들으며 두세 시간 동안 교회 밖에 서 있었다.

    강홍모의 주의를 사로잡았던 오순절의 메시지는 그의 마음에 생생한 것이 되었다. 그는 한 저녁에 밤새 기도 하다가 방언으로 말하게 되었다. 강홍모의 모든 가족이 오순절 축복을 받았다. 한국 사람들과 자신의 체험을 나누기 위해, 강홍모는 자신의 학교에서 얻는 수익의 십 분의 일을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쓰겠다고 결심했다.

 

강홍모 가족

 

    리드의 팀이 전주를 떠난 후, 칼로우는 영생고등학교와 영생장로교회에서 두 주간의 성경 공부를 열었다. 그렇게 오순절주의는 교단의 경계 너머로 확장되었다. 그로부터 칼로우는 한국에 머무는 대부분의 기간을 전주에 있는 영생고등학교 등 영생학원과 손잡고 일했다. 그곳에서 가르치는 일 이외에도 그녀는 자신이 담당한 약 1,000명의 상담자로서 일했다. 칼로우가 선교사가 되기 전 미국에서 받았던 교육자로서의 교육과 훈련, 자질 그리고 경험이 그의 영생학원 사역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영생고등학교 학생들과, 칼로우 그리고 강홍모

 

    학교법인 영생학원은 195355일 설립 인가를 받았고, 1955310일 재단법인 영생학원이 인가를 받으며 강홍모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195546일 영생고등학교 1회생이 입학했고, 19551224일 당국으로부터 영생고등학교 설립 인가(3학급 150)를 받았다. 그리고 19611120일 학칙변경을 통해 학급수 9학급, 6, 3, 450명으로 확장했다. 1962년 칼로우가 영생학원 사역에 합류 후 1965622일에 교사 및 강당이 준공되었다. 당시 영생고등학교의 위치는 교가에 나오는 것처럼 전주한옥마을 근처의 간납대 언덕이었고 남녀 공학이었다. 영생고등학교의 교육방향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교육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은 학생 추구학생의 소명과 적성을 발견하고 계발하는 교육,” 그리고 적성에 맞는 진로 선택이었다.

 

 

 

    칼로우에 따르면, 19637월경 허스톤은 조용기와 함께 전주 영생 고등학교와 교회에서 5일간의 집회를 열었다. 그 집회는 또한 미국 하나님의 성회 해외선교국 극동 선교지부 지부장 켓참(Maynard Ketcham)도 강사진에 참여했다. 2,000명이 훨씬 넘게 참여한 집회는 영생교회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학생들뿐만 아니라 나이 든 사람들도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 조용기는 특히 병자들을 위한 기도에 집중했다. 마지막 날 집회에서 조용기는 영생병원에서 신장문제로 죽어가던 한 청년을 위해 기도했다. 조용기가 사망을 꾸짖자, 그 환자는 일어나 말했다. “생명의 영을 받았습니다. 저는 죽지 않고, 살아날 것입니다.” 4시간 후, 그는 의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퇴원하겠다고 말했다. 곧 그와 그의 가족은 그 교회 예배들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칼로우에 따르면, 1964년 여름에도 허슨톤은 로버트 암스트롱(Robert Armstrong), 그리고 버드와 함께 전주 영생고등학교에서 6일간의 집회를 열기도 했다.

 

칼로우 한국선교 팜플렛

 

1963년 7월 악수하고 있는 칼로우와 조용기

 

 

    칼로우는 서대문 순복음중앙교회 청년부에서 사역하기도 했으며, 1965년 익산의 은광교회 개척과 전주 우아동 교회 개척을 도왔다. 전주에 머무는 동안 그녀는 수백 명의 개종자에게 물침례를 베푼 일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그 도시에서 완전히 물에 잠기는 침례를 받은 첫 번째 신자들이었다.

    칼로우는 196419일에 신설된 전주영생대학의 초대 학장으로 취임했다. 그 학교는 야간 4년제 5개 학과, 입학정원 110명의 학교였다. 국어국문학과(80, 학년당 20), 영어영문학과(80, 학년당 20), 상학과(80, 학년당 20), 법률학과(80, 학년당 20), 가정학과(120, 학년당 30)가 개설되었다. 칼로우는 학장직 임무 수행에 필요한 학위 취득을 위해 1965년부터 1년간 일시 휴가를 내고 하와이 주 호놀룰루의 하와이 대학에서 언어학을 배웠다. 19668월에 한국으로 돌아왔고, 19671월에 하와이 대학 대학원으로부터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6755일에 펴내진 미 하나님의 성회 목회자와 선교사 명부는 칼로우의 주소를 Yong Seng Schools, %97 No Song Dong, Jeonju, Jeonpuk, Korea로 표기했다.

    칼로우는 한국 선교 동안 펜테코스탈 에반젤에 선교보고의 글을 한 번도 기고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전주영생대학교본관 계단에 선 강홍모 부부

 

VI. 일본 재선교와 필리핀 선교 그리고 소천

 

국내 선교국(1968-1970)

 

    1967년 가을에 전주에서 일하고 있던 그녀에게 어머니가 다시 심장발작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왔다. 그녀는 어머니의 간호를 위해 19683월 해외선교국에서 국내선교국으로 소속을 옮기기로 하고 전주영생대학 제1회 졸업식 후, 6, 보다 정확하게는 5년 간의 한국 체류 선교를 마치고 아이다호주 남파로 돌아갔다. 19689월부터 1년간 그녀는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어머니의 병간호를 하면서 오리건주 머틀크릭(Myrtle Creek)의 학교에서 가르쳤다.

 

1969년에 칼로우가 워맥에게 보낸 자필 편지 1쪽
칼로우가 워맥에게 보낸 자필 편지 2쪽

 

 

    펜테코스탈 에반젤이 1969518일에 실은 한국인들이 귀국하는 선교사를 환송하다라는 제목의 글은 칼로우의 귀국과 이리은광교회의 개척과 성장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한국, 이리시에서 한국 신자들이 좋은 한복들과 교복들을 입고 휴가차 미국으로 돌아가는 선교사 마가렛 칼로우를 환송하기 위해 모였다. 칼로우 양은 이 도시의 선교 사역을 지휘했다.

그 사역은 권태관 목사가 이리에서 집회를 시작하기 위해 19658월에 서울에 있던 자기 집을 떠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한국군 분대 천막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달 안에 삼십 명이 죄로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작정했다.

신자들은 진흙벽돌들을 만들어 그 천막의 기초에 약 90cm의 벽을 쌓았다. 설교단이 놓이고, 맨 흙바닥 위에 놓인 볏짚 방석들이 그 새로운 성회의 첫 신도석들이 되었다. 이년 후 그 교회의 성도는 이백 명 이상이 되었다.

그 회중은 천막에서 그들이 구입한 작은 땅에 있는 판자집으로 이사했다. [19661130일 주현동 17번지에 교회 대지 161평을 매입했다. 1967115일 교회신축 기공 예배드리다.]  오 개월 안에 그들은 그들의 나무 신도석들과 기름 난로들을 갖춘 새로운 교회 건물로 이사했다. [1968112일 지하 10평 본당 40평의 성전신축을 완공하여 입당예배드리다.]

 

이리은광교회에서 열린 칼로우 환송식
현재 전라북도 익산시 주현동 17번지에는 은광교회가 없고 장로교단 아멘교회가 존재한다.

 

 

    196962일에 펴내진 미 하나님의 성회 목회자와 선교사 명부는 칼로우의 선교지를 Assemblies of God Mission, Box 26, Jeonju, Jeonpuk, Korea라고 표기했지만, 또한 주소를 Carlow Margaret E, P0 Box 548- Myrtle Creek OR 97457 (Far East)라고 표기했다.

 

 

    19698월에 어머니와 함께 하와이로 건너가 히로 제일 어셈블리 교회(ヒロ第一アッセンブリー教会, First Assembly of God)의 임시 목사를 맡았다. 19709월에 아이에아(Aiea)로 옮겨 라디오 하와이(Radio Hawaii)의 일본어 라디오 상담원으로 일하며 하와이의 일본계와 한국계 사람들 사이에서 전도했다. 그리고 주님의 인도에 따라 칼로우는 아이에아에 어머니를 남겨두고 19708월에 다시 해외선교국으로 이적하여 본토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으로 향했다.

 

4(1970~1976)

 

도쿄

 

    10년 만에 일본에 돌아온 칼로우의 도쿄 생활이 시작되었지만, 처음 2년간은 잠정적인 것으로 19709월부터 19726월까지는 도쿄도 구루마치(久留米町, 현 히가시쿠루메시(東久留米市)1950년에 설립된 크리스찬 아카데미 인 재팬(Christian Academy in Japan)에서 일본어, 스피치, 타이핑 등을 선교사 자녀들에게 가르쳤다. 19701212일에 하와이에 남겨두고 온 어머니가 아이에아로 갔다. 국제학교에서의 일을 끝낸 칼로우는 다시 중앙성경학교의 교단에 섰고, 호야 그리스도 교회(保谷キリスト教会, 현 니시도쿄 그리스도 교회(西東京キリスト教会)나 요코타 극동 군인 교회(横田極東軍人教会, 전 요코다 크리스찬 센터 현 요코다 ICA , Yokota International Christian Assembly)의 일을 도왔다.

 

 

Christian Academy in Japan (CAJ) is a K-12 school established in 1950 to provide Christ-centered education to the children of evangelical missionaries. While continuing in this purpose, CAJ also serves other families who desire this type of education for their children. We serve approximately 450 students in our day school program and more than 300 students in our Parallel Educational Services program. Our program uses English as the language of instruction and a North American curriculum.

 

西東京 キリスト 教会

 

5(1977~1980)

 

도쿄

 

    1977년 잠시 휴가차 귀국했던 그해 다시 도쿄로 돌아와 중앙성경학교와 요코타 크리스천 센터에서의 일을 계속했다. 요코타 크리스천 센터는 미국 군인이나 군속들을 대상으로 한 교회였지만, 일본인이 오는 경우도 자주 있어 그녀는 거기서 일본인 펠로우십을 결성시켰다. 1978년경부터 사야마 그리스도 교회(狭山キリスト教会)의 니시 노부유키·노지코 부부(仁司延之路子夫妻)가 정기적으로 그녀의 일을 지원했다. 칼로우는 이전부터 하고 있던 병원에서의 의사나 간호사들에게 영어 교수도 계속했다. 그녀는 거기서 받은 사례금을 여러 권의 책 출판에 사용했다.

 

 

휴가 귀국(1980~1981)

 

6(1981~1983)

 

도쿄

 

    1981년에 니시 노부유키(仁司 延之)가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칼로우는 1983년에 요코타(横田田)의 일을 니시 노리코(仁司路子)에게 맡겼다. 이 사역이 1983년에 요코타 그리스도 전도소(横田キリスト伝道所, 현 니시타마 그리스도 교회(西多摩キリスト教会)가 되었다.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선교사 규정에 따라 현역 선교사에서 은퇴하게 된 칼로우는 1984년에 일본을 떠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향했다.

 

1983년의 칼로우

 

7(1984~1989)

 

마닐라

 

    현역 선교사 은퇴 연령을 맞이한 칼로우이었지만, 1984년에 마닐라에 있던 극동 고등 신학원(極東高等神学院, FEAST, Far East Advanced School of Theology, 현 아시아 태평양 신학원 APTS, Aisa Pacific Theological Seminary)이 그녀를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의 영어 교사로서 초빙했다. 당시 기타노 고이치가 극동고등신학원의 사무국장 겸 학감이었습니다.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시니어 선교사로 마닐라로 옮긴 칼로우는 영어 말고도 나중에 요한복음 등을 가르쳤다. 또 극동고등신학원과 같은 부지 내의 벧엘성경대학(Bethel Bible College)에서도 가르쳤다. 또 기타노 고이치 · 엘렌 부부가 시작한 마닐라의 일본인 교회 저펜 크리스챤 펠로우십(Jananese Christian Fellowship)에서 선교목사로 섬겼고, 기타노 부부가 싱가포르로 옮긴 후에도 계속 봉사했다.

 

1964년 착공식
마닐라의 FEAST
1986년의 칼로우

 

은퇴와 소천

 

    19891221일에 칼로우의 해외 선교 생활이 끝을 맞이했다. 그녀는 마닐라를 떠나 199012월에는 오리건주 코밸리스(Corvaliis)에서의 은퇴 생활에 들어갔다. 그곳에서도 그녀는 기회를 만들어서 인근 일본계 사람들에게 전도를 계속했다. 그녀는 킹스 서클 어셈블리지 오브 갓(Kings Circle Assembly of God)에서 아주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녀의 조카딸들, 메리 칼로우와 니나 칼로우, 그리고 그녀의 조카 존과 버드 존스가 그녀를 돌보았다.

 

 

1998년의 칼로우

 

칼로우는 오리건, 온타리오(Ontario)에서 2005918일 소천했다. 그녀의 나이는 여든여덟이었다.

    토마슨 퓨너럴 홈(Thomason Funeral Home)의 주관하에 아이다호, 남파(Nampa, Idaho)에 있는 퀠러론 세미터리(Kohlerlawn Cemetery)에서 108, 토요일 오전 11시에 하관예배가 드려졌고, 칼로우는 그녀의 오빠, 로버트 곁에 묻혔다 ( Plot D 15 2 ). 그리고 남파의 퍼스트 어셈블리 오브 갓(First Assembly of God)에서 오전 1145분에 추모 예배가 드려졌다. 2007년에 미 하나님의 성회 총회가 발간한 인 메모리암(In Memoriam)27쪽에 남아이다호 지방회 소속이었던 칼로우의 사진을 올렸다.

 

 

 

 

 

 

 

 

    칼로우의 부고는 다음과 같이 그녀의 생애를 예찬했다.

 

마가렛의 삶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한 헌신과 희생의 빛나는 모범이었다.”

 

 

VII. 나가는 말

 

    마가렛 E. 칼로우는 일본을 위한 선교사였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칼로우를 잠간 한국에 파송하셨다. 칼로우가 한국에 온 이유는 중요하거나 거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 짧은 기간 동안 전주와 그 인근에서 쏟아부었던 오순절 신앙에 버무려진 교육적 자질은 좋은 열매들을 맺었다. 칼로우의 한국 사역은 다른 내한 오순절 선교사들의 사역과는 달리 특이하게 교단 경계를 넘어 강홍모와 동역하며 인재를 양성하는 지역 학원선교에 집중되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강홍모를 통해 하시려는 일에 칼로우가 가장 적합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본 선교를 잠시 막으시고 칼로우를 전주로 이끄셨을 것이다. 전주영생교회와 전주영생고등학교, 그리고 전주대학교 DNA에는 칼로우의 오순절적 순복음 신앙과 열정이 담겨있다.

 

전주영생교회

 

칼로우가 설립을 돕기도 했을 우아영생교회
전주영생고등학교
현재의 전주대학교
2024년 개교 60주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