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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 조용기목사 신학

김한경의 이창승의 "바람직한 오순절적 성경해석과 영산의 성경 비교 연구에 대한 논평에 답변 (이창승)

한오신 2017. 12. 18. 23:25


김한경 박사의 이창승의 바람직한 오순절적 성경해석과

영산의 성경해석 비교 연구에 대한 논평에 답변

 

2017. 12. 11

이창승

 

 

 

 

A. 근본주의적 해석과 오순절적 성경해석 사이의 부조화 불언급

 

    김한경은 "예컨대 이 논문은 자유주의적 역사비평”, 혹은 고등비평과 오순절적 성경해석 사이의 충돌은 지적하면서도 근본주의적 역사적 해석과 오순절적 성경해석 사이의 부조화는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고 논평했다. 그가 말하는 오순절 신학자들이 제시해 온 근본주의적 역사적 해석과 오순절적 성경해석 사이의 부조화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

    필자가 파악해 온 바로는 그 부조화란 첫째, 근본주의자(구복음주의자)들의 세대주의적 해석은 오순절주의자들의 해석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초기오순절주의자들은 급박한 종말론적에 있어서 세대주의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어떤 학자들이 오순절주의의 특징을 종말론에서 찾으려했을 정도로 오순절운동에서 종말론의 위치는 중요한 것이었다. 초기오순절주의자들은 급박한 재림을 맞이하기 마지막 복음을 전할 능력을 방언을 그 증거로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통해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종말론의 구조는 세대주의적이었으며, 근본주의와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종말론 강조를 위해 세대주의 구조를 차용할 경우 하나의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 문제는 세대주의가 하나님의 세대적 섭리에 따라 성경을 기록하기 전에 발생했던 방언, 방언 통역, 그리고 예언 등 계시발생적 은사들은 성경의 기록과 또는 기독교 세계의 발생이후에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다는 은사중단론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은사지속을 주장하는 오순절 해석과 충돌된다는 것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종말론 논의를 위해서는 세대주의적 구조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은사론에서는 그 구조에 내포된 중단론을 거부해야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그래서 오순절주의 성경 해석은 세대주의적 안경을 쓰면서도 그 안경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대주의 관점에서 근본주의적 역사적 해석과 오순절적 성경해석은 김한경이 말하는 것처럼 전체적으로 부조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부분적인 부조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 부분적 부조화는 결국 1940년에 “plus power”로 불거졌으며, 근본주의와 오순절주의가 결별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적어도 1940년대 이전의 오순절주의자들의 성경해석법에 있어서 근본주의자들의 성경해석법에 있어서 별로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그 성경해석법은 벌코프 등이 제시한 것과 같은 개신교의 전통적인, 고등/역사비평을 배제한 문법적-역사적-신학적 해석이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이 전통적 해석에 은사지속론적 안경을 더했을 뿐이었다. 루터와 쯔빙글리 등 종교개혁자들이 다양한 신학적 주제들에 대한 토론에서 거의 합의를 이루었으나 다만 한 가지, 성찬에 그리스도의 임재 방식에 이견을 보여 연합이 결렬되었던 것처럼, 근본주의와 오순절주의가 성경에 접근하는 법은 거의 같았지만, 은사 중단론이냐 지속론이냐에서 차이가 났다. 그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근본주의와 오순절주의는 결국 1940년에 결별하고 말았다. 그리고 오순절주의의 가장 큰 교단인 미국 하나님의 성회는 고등/역사비평을 수용하는 복음주의연맹에 가입하였으며, 고등/역사비평에 무방비로 노출되게 되었다. 오순절주의는 근본주의 해석과의 부분적인 부조화를 피하려다 은사지속론 조차 먹이로 삼는 고등/역사비평 안으로 삼켜졌다.

    그 부조화는 둘째로, 소위 현재의 오순절 신학자들이 오순절의 정체성과 특징을 잘못 설정하는 것에서 발생하는 신기루 같은 것이다. 현재의 오순절 신학자들 다는 아니지만, 대부분은 오순절의 정체성을 성령의 역사또는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경험에 두고 있다. 그래서 오순절의 특징을 경험중심에 둔다. 그들은 성경 해석도 독자의 경험에 대한 지지근거 마련에 둔다. , 경험을 성경해석의 전제로 삼는다. 그리고 그들은 근본주의의 해석을 저자 중심, 교리중심 해석으로 묶어두려 한다. 사실은 근본주의 해석과 오순절 해석 사이에는 부분적 부조화가 있어 왔지만, 현재 오순절 학자들은 고등/역사비평을 받아들이고, 경험중심적 해석을 주장함으로써 오순절 해석과 근본주의 해석 사이에 전면적 부조화가 있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근본주의 해석도 경험을 강조해 왔다. 그 경험은 중생시 발생하는 구원론적 내적 경험이다. 그 경험은 루터의 로마서 연구로 인한 이신칭의, 즉 마음에서의 중생경험의 전통을 이어받는 것이다. 오순절 해석은 이런 구원론적 내적 경험을 받아들이면서도, 거기에 은사적 외적 경험을 더해왔다. 또한 사실 오순절주의는 경험에서 시작되지 않았고, 성경연구에서 시작되었으며, 경험으로 그 연구를 입증함으로써 시작되었다. , 오순절주의는 근본주의도 함께 공유하는 순복음 또는 오중복음의 첫 단계인 중생이라는 내적 경험에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 경험이라는 외적 은사 경험을 더하고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경험중심은 아니다. 그러므로 근본주의 해석과 오순절 해석 사이에 전면적 부조화를 설정하지 말아야 한다.

 

B. 오순절 신학자들이 역사비평의 긍정적인 성과를 받아들여 오순절 신학을 방어해왔으며, 오순절 신학을 발전시켰다는 점을 무시하고 예외 없는 반대 입장을 표명

 

    김한경은 고등/역사비평의 전제가 계몽주의적 이성임을 인정하였다. 그는 필자의 주장에 대해 역사비평이 계몽주의적 이성에 의해 영향을 받았고 불신앙적인 전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이 논문의 비판은 대체로 올바른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전제가 잘못되었다 해도 역사비평을 전면적으로 거부할 필요가 없다며 필자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다. 역사비평 자체가 잘못된 것이지만, 그러나 어떤 부분은 쓸 만한 것이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비록 불신앙적 전제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역사비평 자체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불신앙적 전제만 제거하고 신앙적 눈으로 역사비평을 잘 사용하면 긍정적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인가? 신정통주의와 신복음주의는 역사비평을 중립적이고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방법론으로 여기고 계몽주의적인 불신앙적 전제만 버리고, 신앙적 전제를 가지고 역사비평을 활용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한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방식도 아닌 것 같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불신앙적 전제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보면 잘못된 것이지만, 역사비평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으니, 오순절 신앙적 전제를 가지고 역사비평의 긍정적인 면을 사용하여 오순절신학을 방어하고, 나아가 오순절신학을 발전시킨다면,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냐는 것이다. 과학과 과학주의를 구분하여 불신앙적 전제를 가지고 있는 과학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잘 활용하면 되는 것처럼, 고등비평과 고등비평 만능주의를 구분하여 불신앙적인 전제를 가지고 있는 고등비평이라도 오순절 신학을 위해 잘 활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오순절 학자들이 역사비평을 사용하여 오순절에서 중요한 방언론과 성령세례론 등을 방어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잘한 것인가? 로버트 멘지스의 박사학위 논문을 읽어보라. 또한 필자의 논문 오순절 성경 해석의 역사와 평가를 읽어보라. 일면 로버트 멘지스가 편집비평을 사용하여 오순절의 주장들을 잘 방어하는 것 같은데, 다른 한편에서는 성경이 한낱 인간의 가공적 편집물로 전락해 버린다. 예를 들면, 멘지스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서 인용된 구약의 요엘서의 일부를 누가가 편집하면서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를 삽입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누가에게 성령은 발화를 일으키는 예언의 영으로서 고든 피와 제임스 던이 주장한 바울의 윤리적 영과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바울의 성령론 입장에서 오순절적인 누가의 성령론을 공격하지 말라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누가가 신학적 편집자로서 자기의 입장 표명을 위해 성경에 스스로 지어낸 말을 집어넣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베드로의 설교는 역사적 사실, 논픽션이 아닌 허구가 가미된 픽션이 되어버리고, 성경은 허구를 포함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편집비평으로 멘지스의 오순절 신학은 살아나고, 성경은 허구로 전락하여 죽었다. 멘지스는 이 폐해를 수습하지 않고 방치한다. 그가 이 폐해를 인식하지 못하고, 인식했더라도 방치하는 이유는 그가 사용하는 편집비평 자체가 그렇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의 실제로 일어난 것을 기록한 역사성을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성경의 기록의 실제적 역사성을 부인하고 있다. 그는 편집비평을 사용하며 그것을 넘어서지 않고, 그 안에서 사유한다. 편집비평은 성서 기록자는 신학자로서 여러 자료들(이 자료들에도 여러 민담, 전설, 동화, 이적 이야기, 신화 등등이 섞여있다고 주장)을 자기의 신학적 입장에서 허구적 말들과 꾸며낸 사건들과 혼합하여 성서를 편집했다고 주장한다. 편집비평은 편집자가 허구적 말들과 꾸며낸 이야기, 자료의 변용을 사용해서라도 자기의 신학을 주장했다는 것으로 만족한다. 성경이 죽어도 신학만 살아난다면, 편집비평은 개의치 않는다. 소위 오순절 학자들이 대부분 이렇게 하고 있다. 그들은 오순절 신학(물론 그것도 자신들 각자가 나름대로 생각하는 오순절 신학)을 살린다는 미명 하에 고등비평을 사용하여 성경을 죽이고 있다. 구지 고등비평과 고등비평 만능주의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고등비평에는 선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편집비평(고등비평) 전체와 계몽주의적 전제는 분리할 수 없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편집비평의 일부분만이라도 사용한다면, 그 결과는 계몽주의적 전제의 영향아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순절주의는 고등비평 전체를 죽이고 성경을 살려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오순절 신학도 산다. 진정한 오순절 신학은 고등비평 없는 해석, 성경도 살리고 신학도 살리는 윈윈 해석을 추구해야 한다.

 

C. 자신의 주장에 대한 반대 의견을 거의 언급하지 않음

 

    김한경은 영산의 성경해석에는 필자가 영산의 성경해석에 대해 제시한 네 가지 요소 이외에는 없는 것인가라고 묻는다. 그러면서 영산의 성경해석에 대한 다른 견해들을 소개하거나 짐작하여 언급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필자는 영산의 성경해석에 대한 기존의 논문들을 가능한 한 다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연구들을 필자가 제시한 네 가지 요소들에 녹여 넣었다. 또한 필자는 본인의 논문 서문에서 그 이전 논문에서 제시했던 네 가지 요소들만 가지고 영산의 성경해석을 연구하겠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러므로 왜 영산의 성경 해석에 그 네 가지 요소들 이외에 다른 것을 언급하지 않았느냐는 질타를 받을 이유가 없다. 또한 필자는 기존 연구자들의 주장이 필자가 보기에 옳다면 비판하지 않고 인용했으며, 옳지 않으면 비판했으므로 필자의 논문의 논쟁적 학문성은 의심받을 이유가 없다. 논문에서 필자는 학자들의 영산에 대한 성경해석 논쟁의 한 복판으로 들어가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웠다.

 

D. 다소 거친 표현들

 

    김한경은 필자가 역사비평을 버려야 함을 주장하면서 쓴 표현들에 시비를 건다.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편파적 시각에 따른 비웃임이 놓여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독.” 이런 필자의 표현들이 신학적 논문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과격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런 표현들은 필자의 다른 논문들에서는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 필자는 아주 펜촉을 무디게 해서 쓰느라 애를 먹었다. 파함과 영산이 고등비평과 고등비평가들에게 한 말을 생각해 보라. 파함은 고등비평을 마귀가 벌인 일이라고 폄하하며, 고등비평가들을 불신앙자들과 같은 자들이라고 비난하였다. 영산은 고등비평은 마귀가 인간의 이성과 과학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도전을 감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 고등비평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너뜨리려는 마귀의 도구라는 것이다. 이 말보다 더 과격한 표현이 어디 있는가? 파함과 영산의 표현에 비하면 필자의 표현은 양반이다. 김한경은 이런 파함과 영산의 고등비평 마귀 기원 주장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필자의 표현에 시비를 건다. 이 해석학 논쟁은 상아탑이 아닌 전쟁터다. 마귀의 고등비평에 휩쓸린 무리와 하나님의 고등비평 반대 무리의 전쟁. 이 전쟁터에서 필자는 너무나 무딘 칼을 사용했다. 전쟁터에서 품격을 따질 필요가 없다. 더 과격한 표현으로 더 과감한 공격을 시도했어야 했다. 이 전쟁터에 우군은 거의 없다. 복음주의 안에는 독일의 게르하르트 마이어, 에타 린네만 등의 학자들이 해석학의 전쟁터에서 고등/역사비평을 상대로 싸워왔다. 그런데 오순절 신학계에서는 필자 혼자 한국과 세계의 기라성 같은 오순절 학자들을 상대로 싸우는 양상이다. 사실, 그들은 신학계의 시골 골짜기에 있는 필자를 의식하지도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오늘도 홀로 날을 세운다.

 

    영산신학저널에 개재된 필자의 5가지 논문들은 거의 모두 오순절 해석과 관련된다. 그 논문들을 다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필자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의 블로그에 한국오순절신학연구소”(KIPT; Korea Institute of Pentecostal Theology)를 개설하였다. 이곳에서 그 논문들 이외에 다른 논문들도 다운 받을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거대해진 오순절 신학에서 파함의 신학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 영산 신학 안에서 영산의 신학은 어떨까? 영산이 거부한 고등비평을 기반위에 세워지고 있는 영산의 신학이 진정한 영산의 신학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