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istorical-Critical Method
and Epistemology in Biblical Hermeneutics
마크 기작(Mark Giszczak)
Associate Professor of Sacred Scripture of Augustine Institute
PhD,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MA, Augustine Institute
B.Phil., Ave Maria College
Augustine Institute, Assistant Professor of Sacred Scripture
Specialization: Old Testament, Song of Songs, Biblical languages
http://catholicbiblestudent.com/2006/12/historical-critical-method-and.html
1. 서론 Introduction.
1988년에 카디널 렛징거(Cardinal Ratzinger)는 가톨릭 해석의 논의를 “철학적 논의”(philosophical debate)라로 정확히 꼬집어 말했다.1 레이몬드 브라운(Raymond Brown)은 비록 렛징거의 논평들이 특별히 그에게 향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자기 방어적 태도로 반응했다. 브라운은 철학이란 역사-비평적 주석과는 아무 상관이 거의 없거나 아주 없었다고 그리고 렛징거의 논평들은 디벨리우스와 불트만에 의해 야기된 유럽 사상 학파들에 향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브라운은 심지어 그 주제에 대해 논평할 만한 인물로 자신을 제시하기 위해 자신의 철학 석사 학위를 자랑스럽게 내보였다.2 나는 개인적인 비난들에는 관심이 없고 또한 과거의 방어적인 미사여구에도 관심이 없다. 그러나 나는 “가톨릭 해석”이라 일컬어지는 파악하기 어려운 먹이를 포획하는데 관심이 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도요새 사냥에 나서는 것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이 논문에서, 나는 그 논의의 한쪽 구석인 인식론(epistemology)을 탐사하려 한다. 비록 나는 성경학 전공 학생이지만, 나는 이 문제를 자세히 살피기 위해 철학적 방법들을 사용할 것이다. 나는 역사 비평 주석에 대한 기나긴 요약으로 독자를 지루하게 하지 않을 것이고, 다만 필요할 때 대표적인 사례들을 소개할 것이다. 나는 인식론적 질문에 있어서 아마도 더욱 영향력 있는 다른 질문들의 추출에 집중할 것이다.
브라운은 철학은 성경 연구의 객관적 과학적인 방법들과 관계가 없다고 그리고 역사 비평적 방법들은 그 자체로 철학적 지지가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역사 비평적 방법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들을 막기 위해, 브라운은 “우리가 그 방법 자체의 철학보다는 그 방법의 실천자들(practitioners)의 철학을 보다 자주 말해야만 한다”고 제안한다.3 그러나 연구의 모든 현장은 철학의 지원을 받는다. 철학적 모델들은 모든 학문이 그 위에 근거하는 기초를 형성한다. 형이상학, 인식론, 논리, 등등은 모든 과학의 무심결의 동료들이다. 예를 들면, 수학은 전통적인 논리학의 규칙들에 굳건하게 심어진다. 비-모순율(the Law of Non-Contradiction)은 초등학교 학생이 덧셈을 배우는 첫날부터 주어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만약 그가 틀린 답을 내면, 그의 선생은 그에게 크고 빨간 “X”표를 준다. 그 어린이는 몇 명의 우리 시대의 상위급 철학 교수들에 따르면 비모순율은 더이상 지탱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이 다른 대답들과 동등하게 타당하다고 그 선생과 논쟁하기 위한 철학적 교양을 갖고 있지 않다. 소수의 학문들만이 분명하게 그것들의 철학적 뿌리들을 연구한다. 학생들은 그것을 연구하고 참고서들과 교과서들을 읽는 과정에서 그 주제의 특질을 흡수하도록 기대된다. 그렇지만, 철학은 모든 학문의 깊은 이해(reach)에 있어서 왕으로 군림한다.
그러므로, 인식론은 철학의 주요 부분으로서 모든 과학들에서 결정적이다. 인식론은 “사람들이 사물들을 아는 방식”에 대한 연구다.4 인식론은 지식의 경계선들을 규정한다. 인식론은 인간의 마음에 이해 가능한 것과 이해 가능하지 않은 것을 구획한다. 역사 비평적 세계는 지식의 토대를 오해해 왔다. 이것이 렛징거의 “철학적 논의”의 인식론적 부분이다. 나는 성경적 인식론에 대한 역사적 견해들을 논의하기 시작하여 성경적 지식의 토대를 탐사해 나아갈 것이다. 둘째로, 나는 지식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추구할 것이다. 셋째로, 나는 역사적 지식의 특성과 언어 철학의 개요를 제시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성경적 지식”(biblical knowledge) 자체를 탐사할 것이다. 결론에서 나는 가톨릭 해석학을 위한 보다 나은 인식론적 준거틀의 필요성을 제안할 것이며 주석의 궁극적 목적을 지적할 것이다.
2. 역사적 견해들(Historical views).
라이트(N. T. Wright)는 역사 비평적 인식론들의 똥 덩어리를 분류함에 있어서 유용한 이분법을 제시한다.5 첫째, 그는 우리에게 계몽주의적 “실증주의”(positivist) 견해를 제공한다. 둘째, 우리는 비관적인 “현상주의”(phenomenalist)와 만난다. 이 단순화는 아주 도움이 된다. 첫 번째 인식론적 시각은 오만하고, 경솔하고, 독단적이다. 그것은 사람이 실재를 만나는 능력뿐만 아니라, 확실하게 사물들을 아는 능력을 주장한다. 이 낙관적인 시각은 가상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결과들을 산출하는 경험 과학을 엄청나게 신뢰한다. 그 결과들은 언제나 객관적이고, 객관적 관찰자에 의해 발견된다. 이 견해는 또한 19세기 후반의 지성인들로 하여금 모든 것, 종, 성경, 언어, 병 등등의 기원들을 추적하도록 이끌었다. 주석가에게, 낙관적 시각은 객관적이고 경험적인 연구에로의 고마운 초청이었다. 그는 한 본문의 문자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본문의 저자, 편집자, 저술 시기, 편집자들의 수 등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이트가 제시하는 두 번째 시각은 그가 “현상주의자”의 견해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는 이 견해에 대한 라이트의 용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용어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현상주의자들”(phenomenologists)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려 하는 것으로 부정확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용어를 “현상주의자”의 시각이라고 명명하는 데까지 확장할 것이다. 이 시각은 첫째 것과 비교할 때 비관적이다. 이것은 제한된 인식론을 붙잡는데, 그 안에서 아는 주체는 오직 진정으로 자기 자신의 감각적 지각들(sense perceptions)만을 알 수 있다. 그 주체는 자신의 감각들이 경험하는 대면들만을 알면서, 그러나 그 대면들이 자신을 자기 바깥의 실재와 연결시켜 주는 지 아니면 연결시켜 주지 않는지 모른 채 자신 안에 갇혀 버린다.6 이 인식론은 본래 에드문트 훗설(Edmund Husserl)에 의해 그의 『논리 연구』(Logical Investigations)(1900/1901, 개정판 1913-21)에서 개발된 것이었으며, 그의 학생 마틴 하이데거에 의해 그것의 논리적 규결로 이끌어졌다. 하이데거는 불트만의 동료가 되었다. 라이트의 이분법은 두 가지 일반적 견해들을 자세하게 분석한다. 나는 다음에 우리를 성경적 질문들에로 향하게 하기 위해 역사적 관점들을 제공할 것이다.
3. 역사 비평 학파의 세 가지 인식론적 잘못들.
나는 성경적 지식 문제를 소개하기 위해 역사 비평 학파 안의 성경 인식론에 대한 세 가지 견해들을 간략하게 설명할 것이다. 첫째, 우리는 역사적 예수 탐구의 창시자인 헤르만 라이마루스(Hermann S. Reimarus)를 시찰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논의의 여지가 있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주석가 루돌프 불트만을 만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유명한 가톨릭 학자 레이몬드 브라운(Raymond E. Brown)의 견해들을 공개할 것이다. 역사적 예수 탐구는 자만심이 강한 인식론적 오만으로 시달렸다. 이 지성적 운동의 지도자들인 라이마루스, 슈트라우스, 르낭과 후에 슈바이처는 역사 관찰자가 모든 역사적 증거를 상세히 살펴보고 무엇이 실제로 발생했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고전적인 “실증주의”(positivist) 견해를 주장했다.
라이마루스는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시신을 훔쳐내고는 예수의 메시지와 관계없는 교리들을 가르쳤다고 단정한다.7 그는 부활 사건을 “분명한 사실이거나 사기이거나 둘 중의 하나”로 간주한다.8 라이마루스는 그 첫 제자들이 그들의 메시야 기대들이 좌절된 이후 그들 자신의 종교를 창조하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제자들은 예수의 추종자들을 완전히 그들의 마음대로 한 단체로 만들기 위해 공상(fantasy)을 사용하고픈 유혹에 굴복했다”고 주장한다.9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대상과 함축적으로 성경 지식은 종교적 힘이라는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도들에 의해 고안된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이다. 성경 저자들은 그 독자들에게 진짜 역사를 전달하지 않고, 그들 자신의 새로운 철학에 따라 역사를 재창조한다는 것이다. 그의 관점에서, 신약은 태생적으로 속이는 것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루돌프 불트만은 그 탐구의 약점의 전도(inverse)를 구현한다. 만약 그 탐구가 지나친 교만으로 작동한다면, 불트만은 지나친 겸손으로 잘못을 범한다. 그는 예수의 생애에서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알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거부한다-“현상주의”(phenomenologist). 불트만은 20세기 초엽에 그의 “비신화화”(demythologizing) 프로그램을 주장했다. 그에게, 신약 저자들은 신화(myth)의 사용을 통해 신학 방법을 가르치려 했다. 그들의 “신화는 초월적인 것을 내재적인 것으로, 그래서 또한 이용 가능한 것(the disposable)으로 객관화 시켰다.”10 신약 안의 소위 “역사들 ”(histories)은 영원한 진리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적 목적을 위해 창조된다. 그에게, 성경 본문은 객관적인 의미를 갖지 않고, 그보다는 그 안에서 사람이 자신을 발견하는 역사적 정황들을 말한다.
그에게, “성경 본문이 실존을 거론하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다.”11 성경 본문은 오직 그것이 사람의 특별한 삶에 관련되는 한에 있어서 이해될 수 있다. 성경 본문은 지속적인 불변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는 “자연 과학을 위해 타당성을 갖는 주체와 객체의 체계는 역사적 이해를 위해 타당하지 않다”고 말할 정도로 이 견해를 취한다.12 역사적 문제들의 확실성은 영원히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다. 성경 본문의 기본적인 목적은 독자들의 삶의 정황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어서, 그래서 불트만에게 역사적 질문은 그것의 중요성을 잃는 것이다. 세속적인 역사 본문들을 위해서조차, 연구는 역사적 사건들의 객관성에 집중되지 않고, 그 안에서 그 본문이 독자를 교육하는 방법에 집중된다. 불트만의 주요 주장들 가운데 하나는 신약의 “신화적 세계상”(mystical world picture)의 불가해성(unintelligibility)이다.13 그에게, 하늘, 땅, 그리고 지옥이라는 삼층적 세계관(the three -story worldview)은 타당하거나, 적절하거나 또는 심지어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이 아니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신약 저자들의 세계관을 받아들인다면, 오직 “기독교의 선포를 현대인들에게 이해 불가능하고 불가능하게 만드는” 손실을 초래할 것이다.14 그에게, 신약은 역사적 사건들을 제시하지 않고, 다만 신화적 세계관의 정황 안에서 주어진 제자들에 의해 창조된 종교적 메시지를 제시한다. 성경적 지식의 대상은 신화적 개념으로 전락된다.
셋째로, 레이몬드 브라운은 해석학과 관련된 교회적 문제들에 관심이 있다. 그의 연구는 분명히 교회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본문의 역사적 의미와 본문의 현대 교회를 위한 의미를 극명하게 구분한다. 그는 “어떤 문구가 기독교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는 교회를 위한 문제지, 그 문구를 기록한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반-역사적 문제(semi-historical issue)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15
그에게, 저자의 의도적 의미와 교회를 위한 의미는 다르다. 그래서 본문이 그것의 현대 독자들에게 관련 있는 방식은 저자의 의도보다 더 중요한데, 이것은 불트만의 현상주의적 관점과 아주 유사하다. 저자의 의도는, 비록 그것이 연구 사항일지라도,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것이다. 브라운에게, 주석가의 직무는 저자의 의도를 발견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저자의 의도는 교회를 위한 의미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는 단순히 문자적 의미와 도덕적 의미 사이를 구분하지는 않는다. 그보다, 그는 당시의 인간 저자를 위한 성경의 이해 가능한 내용은 오늘날의 교회를 위한 성경의 이해 가능한 내용과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문자적 의미”(literal sense)와 “정경적 의미”(canonical sense)를 구별하며, 각각의 의미는 본문의 의미에 부분적인 통찰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16 그러나 궁극적으로 “의미를 위한 탐구는 제한이 없다.”17 본문 자체는 교회와 주석가 둘 다를 위한 해석의 대상이다. 그러나 각각을 위한 이해 가능한 내용, 즉 각각을 위한 본문의 의미는 서로 다르다. 브라운에게 “교회가 그 삶, 예전, 그리고 신학 안에서 성경을 이해하게 되는 길은 ‘성경적 의미’를 구성한다.”18 본문의 의미는 그것에 기독교 독자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해 가능한 내용이지만, 그러나 본문의 의미는 그것을 학자의 연구 대상과 다르게 만들 만큼 교회의 삶과 실천에 의해 형성된다. 성경적 지식은 그 중심에서 분할된다.
4. 지식의 본질(Nature of Knowledge)
위에서 제시된 가지각색의 이론들의 충돌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지식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착수해야만 한다. 나는 지식의 필수적인 측면들을 간략하게 요약한 다음, 그 측면들을 역사적 그리고 성경적 지식에 관련시키려 한다. 지식은 본질적으로 관계적(relational)이다. 주체(아는 자)는 대상(알려지는 것)과 관련된다. 주체는 대상을 창조하거나, 기획하거나, 어떻게든 고안해내지 않는다. 그보다는, 주체는 대상을 그것 자체의 독립적인 존재로서 그 자체의 근본적인 측면들과 함께 대면한다. 대상은 자체를 주체에게 실재적이고 이해 가능한 것으로 제시한다. 대상은 뚜렷하게 다른 존재다(그 안에서 어떤 주체가 자신의 행동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아는 자기-지식[self-knowledge]의 경우를 제외하고). 대상들에 대한 모든 지식은 또한 본질적으로 초월적이다. 주체는 아는 행위 안에서 자신을 넘어간다. 아는 행위는 주체로 하여금 자신 너머에 있는 실재를 대면하도록 몰아붙인다. 지식의 초월적 성격은 주체의 실재와의 진정한 접촉에 빛을 던져준다. 주체는 자신 안에 갇힌 채 있지 않고, 자신이 아닌 무언가를 실제로 알게 된다. 지식은 감각적 지각들에 대한 지식(후기 훗설, 하이데거 등등)으로 축소될 수 없고, 또한 철필에 의해 새겨지는 밀랍 판처럼 지성에 찍히는 수동적 인상(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으로도 축소될 수 없다. 아는 것은 그 사람의 행위이다. 그 사람은 진정으로 실재와 접촉하기 위해, 다른 존재들의 실존적 중요성 안에서 다른 존재들을 대면하기 위해 자신을 벗어나며, 자신을 초월한다. 이 초월적 행위는 본질적으로 수용적(receptive)이다. 아는 자는 그의 아는 행위를 통해 실재를 받는다(receive). 아는 자는 그의 지식 행위를 통해 대상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보다는, 아는 자는 그가 아는 대상의 본질(the essence of the object)을 받는다. 대상은 자신을 주체에게 실재적인 것으로 제시하며, 아는 자는 그것의 본질적 실재를 받기 위해 자신을 초월한다. 요약하면, 지식은 본질적으로 1) 관계적이며, 2) 초월적이고, 3) 사람의 행위이며, 4) 수용적이다. 나는 우리의 연구 내내 이 원리들에로 돌아갈 것이다.
5. 역사적 지식의 성격(Nature of Historical Knowledge)
역사적 지식은 인식론에서 특별한 문제이다. 만약 지식이 말과 같다면, 역사적 지식은 잡종 노새와 같다. 말은 순종, 강건하고 순수한 것이다. 반면에 노새는 보다 애석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 노새는 말과 당나귀의 결합의 불행한 결과물이다. 노새는 말도 아니고 당나귀도 아니다. 노새는 그 둘 사이 어디쯤인가에 걸쳐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역사적 지식은 “표준적 지식”과 역사적 저작의 복잡하게 얽힌 줄과의 결합이다. 역사적 지식은 그 무엇이든 2차적으로(또는 3차적이거나 4차적으로, 등등) 얻어진 지식이다. 예를 들면, 만약 내 친구가 내게 자기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말한다면, 나는 목격자로부터 역사적 지식의 한 부분을 얻은 것일 것이다. 반면에, 만약 그가 내게 내가 갇혀있는 교통정체가 어떤 특정한 교차로에서 난 사고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그의 증언은 더 의심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역사적 지식의 부분을 얻어 왔다. 만약 그가 그의 증언을 그가 그 사고를 친히 보았다고 말하거나 또는 그 사고에 대한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고 말함으로써 뒷받침 한다면, 나는 그의 말을 더욱 신뢰하게 될 것이다. 역사적 지식이란 본질적으로 증인이든, 기록자든, 또는 예술가든 어떤 개인의 증언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내가 역사적 지식을 얻을 때, 내가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묘사된 사건들을 알게 되는가? 나는 단지 저자/증인을 알게 되는 것인가? 나는 그저 실제 사건들과는 관련 없는 그 자체 특별한 의미를 갖는 본문/증언을 알게 되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지식의 노새적 성격에 직면한다. 회의주의자(불트만)는 내가 그것들을 스스로 접촉하지 않는 이상 역사가에 의해 묘사된 사건들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줄리어스 시이저는 암살되었다, 또는 샬레망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또는 아브라함 링컨은 게티스버그에서 연설했다는 것은 알려질 수 있는 사건들이 아니다. 회의주의자들에게, 내가 그 사건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과거 사건들을 묘사하고 있는 어떤 역사책을 읽을 때 나는 무엇을 알게 되는가? 나는 그 역사가의 문체와 능력에 대해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 나는 플로타크나 수에토니우스의 용어를 알아볼 수 있다. 나는 그의 작품들에 대한 주의 깊은 재검토를 통해 스테펜 암브로스(Stephen Ambrose)의 의도들을 분석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제한적으로나마 그 저자를 알게 될 수 있다. 그것 이상으로, 본문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갖는다. 만약 내가 그 사건들을 알 수 없다 해도, 그리고 저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해도, 나는 여전히 역사적 본문을 갖고 있다. 나는 본문의 내적 윤곽들, 그것의 산문의 특성을, 그것의 문법적 형식들 등등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고”(says) 있는 것은 내 관심사가 아니고, 오직 본문이 “의미하는”(means) 것만이 내 관심사다. 즉, 나는 그 말들의 상세한 의미들에 주의를 기우리느라 바빠서, 본문이 실제 삶과 실제 사건들에 대해 무언가 말하고 있다고 제안할 틈이 없다. 그것은 본문의 고결함을 존중하지 않는 것일 것이다. 이것은 본문을 그것의 환경에서 제거하는 것일 것이며, 본문을 부적절한 방식으로 인간의 삶에 관련시키려고 본문으로부터 그것의 박물관 소장품 품격을 박탈하는 것일 것이다. 본문은 흥미로운 고서로 존재하는 것을 벗어나 실제 사건들의 실제 기록이 되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회의주의자의 접근은 경험에 미치지 못한다. 내가 어떤 역사가/증인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때, 나는 실제로 무언가를 알게 된다. 나는 역사적 지식의 조각을 얻는다. 내 친구가 내게 그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말할 때, 나는 단지 그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내게 말한 사실만을 알지는 않는다. 나는 그 교통사고 자체를 실제로 파악한다. 내 지식의 대상은 그가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건 자체는 나의 아는 행위의 이해 가능한 대상이다. 나는 너머에 있는 사건의 실체를(essence) 받는다. 이것은 내 친구가 무오류하다거나 내가 모든 역사가/증인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그런 증인은 단지 그를 통해 실재들(realities)을 볼 수 있는 렌즈와 같다. 그 렌즈는 더럽거나 부분적으로 깨졌을 수도 있지만, 그것을 보여주려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교통사고를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내 지식은 그 진짜 사건에까지 확장된다. 나는 내가 그 사건을 알게 될 때 그것을 이해한다(apprehend).
6. 지식, 언어, 그리고 대인관계적 소통
(Knowledge, Language and Interpersonal Communion)
이것은 우리를 언어 철학으로 이끌어 간다. 역사의 독자인 우리는 우리가 읽는 역사적 사건들의 목격자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증언(testimony)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사건들에 대한 증언은 목격자들에 의해(by eye-witnesses) 언어를 통해(through language) 주어진다. 만약 어떤 사건이 내게 음성적으로 말해지거나 편지, 책, 또는 다른 문서를 통해 전달된다면, 나는 언어를 수령하는 자(recipient)일 것이다. 그보다는 나는 역사적 사건들에 관하여,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의미를 수령하는 자이다. 그러나 언어가 실제로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가? 또 다시 회의주의자는 논의에 끼어들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관점에서, 지식은 언어를 통해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진정으로 소통될 수 없다. 훗설적 현상주의자에게, 언어는 오직 내 환경 안으로 감각적 지각들(sense perceptions)을 넣는다. 나는 내 시야 안에서 검고 흰 상징물들을 발견할 수 있거나 내 청각으로 어떤 음파들을 들을 수 있지만, 그런 소리들이나 상징들의 일치는 내 감각적 지각들에 부과되는 것이다. 나는 언어에 의해 논의되는 실재들과 접촉하지는 않고, 오직 내 자신의 감각적 지각들만 대면할 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 지각들은 지식과 언어의 경험에 미치지 못하고, 그 경험을 정당하게 다루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언어는 실재적 지식을 소통할 수 있다. 만약 내 친구가 내게 노트르담이 풋볼 시합에서 졌다고 말한다면, 나는 내 친구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는 이상 실재적 지식을 얻을 것이다. 회의주의자와 현상주의자들은 언어적 소통을 통해 실재 사건들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내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회의주의자 관점에서, 나는 그가 얼마나 빨리 말하는지, 그가 즐겁거나 안타까운 표정을 보이는지 등등의 내 친구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시합 자체의 사건을 실제로는 알 수 없다. 이것은 나의 경험에서 제거된다. 그래서 내 지식은 반드시 불확실하고, 불안정하고 그리고 불충분하다. 회의주의적 관점에서, 나의 앎의 이해 가능한 대상은 내 친구의 언어 그 자체 또는 그의 언어에 대한 나의 감각적 지각이다. 그 시합은 사건처럼 내가 그것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게 이해 불가능하다. 나는 그것을 진정으로 알 수 없다.
다시, 나는 언어가 실재 사건들에 대한 지식을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이 내게 어떤 사실을 전달할 때, 나는 진짜 지식을 얻는다. 나는 그저 그의 음성의 윤곽들, 그의 글쓰기 방식들 또는 그가 소통하는 스타일을 알게 되지는 않는다. 나는 또한 전달자의 지각들, 세계관 그리고 철학적 전망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에 제한되지도 않는다. 나 스스로 그 사건들과 접촉한다(contact). 내 지식의 이해 가능한 대상은 전달자의 지식의 이해 가능한 대상과 동일하다. 그러나 역사에는 항상 제한이 있다. 그 제한은 내가 역사가의 (음성적 또는 기록적) 언어를 통해 실재를 대면할 때, 나는 필연적으로 이차적 대면을 갖는다는 것이다. 비록 내 지식의 대상이 역사가의 대상과 동일하다할지라도, 내 시야는 역사가의 정직성, 달변과 인간성에 의해 가려지고, 제한되고 그리고 조건 지워진다.
그러므로 역사적 지식의 획득은 언제나 나를 역사가와의 관계성 안에 넣는다. 역사가는 역사적 사건들을 보라고 나를 초청하여 그것들의 전망을 나에게 줄 뿐만 아니라, 그는 그의 눈을 통해 사건들 그 자체를 보도록 실제로 나를 초청한다. 나는 그 역사의 사건들을 보도록 그의 개인적 관점 안으로 영접 받는다. 언어 자체는 초청을 포함한다. 어떤 사람이 내게(특별히 내게 혹은 일반적으로 독자들에게) 말하거나 쓸 때, 그는 그와 함께 실재를 보도록 초청할 뿐만 아니라, 그를 알도록 초청한다. 언어를 통해, 화자/저자는 그의 공동체 안에서 그와 함께 실재를 보도록 청자/독자를 개인적으로 초청한다. 언어는 또한 필연적으로 인격 관계적이다. 인격이 아니면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 언어의 존재 자체는 사람들의 공동체의 존재를 암시한다. 왜냐하면 의사소통 자체는 오직 인격과 인격 사이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사건들과 실재들에 대한 개인적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다. 언어의 소통적이고 인격적인 성격 때문에, 언어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의사소통을 일으킨다. 만약 그 언어-상황 안에 포함된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한다면, 그들은 서로 정신적 교감을 형성한다. 비록 그들이 수 세기 떨어져 있다할지라도, 학생은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마키아벨리 등등 과거의 위대한 정신들을 친밀하게 알게 될 수 있다. 그 저자들의 언어는 오직 그들의 사상들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에 불과하며, 언어를 통해 그들은 그들의 독자들과 함께 하는 실제적인 개인 대 개인적 소통에로 자신들을 의도적으로 개방한다. 철학자들과 역사가들의 경우에, 이 교감(communion)은 전적으로 지적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파네스나 세익스피어같은 극작가들의 경우에, 획득된 교감은 정서에까지 확장될 수 있다. 십자가의 요한이나 아빌라의 테레사에서, 독자는 심지어 저자와 함께 영적인 인격 대 인격적 교감에 이른다. 인격 대 인격적 교감은 언어의 가장 지고한 목적이다. 역사의 독자는 자신으로부터 본문을 거쳐 역사적 저자와의 인격 대 인격 교감의 정황 안에서 보이는 실제 사건들에로 이끌린다. 우리의 중심 주제로 돌아와, 성경적 지식은 역사적 지식의 다른 형태들과 구별되는 몇 가지 독특한 조건들에 의해 규정된다.
7. 성경적 지식(Biblical Knowledge)
성경적 지식은 그 자체의 특별한 범주를 갖는다. 성경 비평가들은 다른 역사가들이나 문학 비평가들 집단보다 더 고도의 회의주의와 불신을 가지고 그들의 본문에 접근한다. 비록 많은 비평가들이 성경을 그저 역사적 유물로 보기 원할지라도, 그들은 그것을 그렇게 취급하지 않는다. 성경적 지식은 그것을 다른 역사적 지식의 유형과 다르게 만들게 하는 특별한 차원들을 취한다. 성경적 지식은 또한 성경적 신앙과 특별한 관계를 갖는다. 어떤 사람이 타키투스를 읽고 그가 로마 역사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을 믿을 때, 비평가들은 이것을 한 범주 안에 넣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고 마태나 바울이 쓰고 있는 것을 믿을 때, 이것은 완전히 다른 범주 안에 놓인다. 동의의 두 가지 행위들은 일종의 믿음이다. 첫 번째 믿음은 내가 “세속적 믿음”(secular faith)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신앙은 사람이 신문 기사, 방송 또는 세속 역사가의 작품을 대면할 때 언제든지 사용된다. 두 번째 믿음은 성경 저자들의 언급에 대한 믿음인데, 나는 “신성한 믿음”(divine faith)이라고 부른다. 신성한 믿음은 역사적 언급에 대한 믿음일 뿐만 아니라, 읽혀지고 있는 본문의 신적 기원의 인정을 포함한다. 자연주의자/무신론자가 선험적으로 이적들이나 역사 안으로의 신적 개입을 거부하는 것은 신성한 믿음을 통해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므로 세속적 역사 언급으로부터 획득된 종류의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적 언급의 본성 때문에 성경적 언급으로부터 획득된 종류의 지식과 다르다. 비록 어떤 해석자의 형이상학이 그가 이런 신학적 언급을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한다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첫 제자들의 대상을 또는 초기 이스라엘의 믿음을, 그리고 현대 신앙인들을 위한 믿음-지식의 대상을 꼭 끌어안아야만 한다.19
성경으로부터 모아지는 역사적 지식은 지난 몇 십 년 동안 뜨거운 감자였다. 대상(the object)이 문제다.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과 라이트(N. T. Wright) 사이의 예수의 부활에 대한 논쟁(debate)은 본문 비평적 문제들이나 전통적인 역사적 문제들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논쟁은 인식론적인 것이다. 크로산은 첫 제자들의 믿음의 대상-나는 여기서 믿음을 지적 동의, 지식의 한 유형으로 좁게 정의한다-은 “절대적으로 독특한 가정이거나 예수의 비범하게 신성한 고양(heavenly exaltation)”이라고 주장한다.20 라이트는 그들의 대상은 죽은 자들로부터 육체적으로 살아나신 예수의 실재 사건이라고 주장한다.21 그래서 우리는 성경적 지식의 참된 대상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만 한다. 나는 성경적 지식에 대한 다른 관점들을 이해하기 위해 한 개요를 보여주는 몇 가지 도표들을 제시하겠다.
내가 맨 처음 제시하는 도표는 세속적 역사적 지식에 대한 나의 요약이다. 이 도표에서 나는 역사적 사건과 역사적 본문의 독자 사이의 인식론적 관계를 보여준다. 첫째로, 본문의 저자는 발생하고 있는 사건을 목격한다. 이 점에서, 거기에 다양한 변경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저자는 그가 기록하고 있는 모든 사건들을 개인적으로 증언해 오지 않았을 수 있다. 그는 또한 다른 사람의 증언에 의존할 수 있다. 또한 그의 관찰들은 그 자신의 시각에 특유한 것이다. 예를 들면, 만약 역사가가 전선들의 한 측면에서 어떤 전투를 보고 있다면, 다른 측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그의 견해는 완전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로, 저자는 그의 글을 써내려 가려 한다. 이 순간은 또한 논란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 저자는 그가 관찰한 것들을 왜곡할 수 있다. 그는 그 자신의 견해들을 더할 수 있다. 그는 삽입하거나 제외하기 위해 특별한 자료를 선택할 수 있다. 그는 절대적으로 그 본문을 지배한다. 그는 낌새 없이 완전히 꾸며낸 이야기를 쓸 수도 있다. 저자가 그의 설명에 진실하고 성실하다면, 그는 그의 경험들에 의해 조건 지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며, 그 경험이 그의 쓰기를 장악하도록 허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진정으로 객관적인 관찰자는 없다. 객관성의 결여이외에도, 역사적 저자는 언제나 어떤 목적을 가지고 쓴다. 그가 대면하는 사건들은 특별한 이유들 때문에 그에게 의미 있다. 그 이유들이 그 사건들의 진정한 의미일 수도 있고, 진정한 의미가 아닐 수도 있다. 모든 역사적 언급은 그것이 묘사하는 사건들에 대한 어떤 해석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 해석은 그 사건들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도울 수도 있고 방해할 수도 있다.
셋째로, 본문 자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본문은 다양한 기술의 편집자들이나 필사자들에 의해 변경되거나 교체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여전히 저자의 글로 독자에게 제시한다. 다음으로 독자는 그의 모든 전제들과 철학적 편견들을 가지고 본문에 접근한다. 그는 사용된 언어에 충분히 익숙한 만큼 정직하게 본문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본문을 해석할 때 그것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언어에 대한 그의 접근조차도 자신의 경험들과 정신적 소속에 의해 윤색된다. 그는 객관적인 해석을 제공할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 해석자의 정체성과 자율성을 손상시키는 것일 것이다. 렛징거가 진술하는 것처럼, “순수한 객관성은 터무니없는 추상(abstraction)이다.”22 독자는 가능한 진실하게 본문을 이해해야 한다는 그리고 그것의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는 아주 어려운 직무와 함께 남겨진다. 예를 들면, 투키디데스(Thucydides)의 독자는 어떤 고고학적 유적들이 그 책에 언급된 도시들과 항구들과 일치하는 지를 결정해야만 한다. 그는 그리스 역사의 시대로부터의 다른 역사적 문서들과 조화를 이루는 다양한 역사적 인물들의 위치를 결정해야만 한다. 그 문제는 만만치 않다. 그러나 독자는 그 사건들 자체에 접근한다(access).
만약 독자가 본문을 허구가 아닌 역사적 기록물로 읽으려 한다면, 본문의 역사성에 지적으로 동의해야만 한다. 즉, 그는 실재 사건들에 대한 언급을 제공하는 데 있어서 본문의 정확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는 본문에 전달된 사건들은 실제로 발생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역사가는 그 실재 사건들을 제시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믿어야만 한다. 그래서 만약 독자가 어떤 전투 또는 한 고대인의 삶에 대한 언급을 읽는다면, 그는 그 전투나 그 고대인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실제적 발생을 받아들여만 한다. 역사의 기록의 제한성들에 대한 냉정한 인식과 함께, 독자는 그 문서의 역사성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나 위에서 논의된 것처럼 저자의 시각은 언제나 제한적이다. 모든 역사적 언급들은 불완전하다.
둘째로, 나는 표 2에서 성경 읽기를 위한 역사 비평적 인식론에 대한 나의 개요를 제시한다. 이 각본에서, 세속적 역사적 개요의 기본 뼈대는 유지되지만, 인식 과정의 내적 작업들은 상당히 수정된다. 첫 번째 표와는 상반되게, 저자는 구상하고 난 다음에 어떤 본문을 산출해 낸다. 세속적 개요에서 이 순간은 암시되지만, 그러나 결코 강조되지는 않는다. 성경 주석학에서, 구상 순간은 강력하고 철저하게 조사된다. 이것은 저자가 그가 대면해 온 사건들의 의미를 결정하는 순간이다. 이것은 지식 수신 이후의 반성적 과정이다. 저자가 어떤 글을 쓸 수 있는 때는 오직 저자가 그의 경험들을 평가하고 철학적-신학적 결론들을 내린 이후다. 이 사실은 성경 비평가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저자 개인의 평가를 강조하거나 심지어 공격하도록 허락한다. 역사 비평주의 시각에서, 저자의 견해 또는 평가는 언제나 사건들의 제시를 혼란스럽게 한다. 저자는 결코 도움을 주지 않고, 오직 독자의 이해를 방해할 뿐이다.
본문이 저자에 의해 산출된 후, 어떤 편집자나 편집 공동체에 의해 읽혀지고 편집된다. 엄청난 논쟁이 다양한 성경 본문들의 편집들의 중요성을 놓고 주석가들 사이에서 맹렬하게 일어난다. 어떤 책들은 다양한 자료들로부터의 조각들의 조합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경우에 도표는 저자의 다양성을 포함해야 한다. 다른 경우에, 주석가들은 어떤 개인적 저자의 작업은 그 후의 편집자들에 의해 손상되고, 교정되고, 편집되고, 불순물이 섞이게 되었다고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런 상황에서, 비록 편집자들과 개입하는 본문의 수가 증가하거나 감소할 수 있을지라도, 위의 개요는 잘 작동한다. 역사 비평 학자의 한 무리는 각 본문은 어떤 독립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전통적인 문학 비평은 글을 쓸 때 저자의 의도를 해석의 절대적 척도로 강조했다. 보다 최근에 문학과 성경 비평에서, 어떤 학자들이 본문은 “그 자체의 생애”를 갖는다는 것을 굳건하게 주장해 왔다. 한 번 본문과 저자가 분리되면, 본문은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 자체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 의미는 표 2에서 사다리꼴에 제시되는 것이다. 그 의미는 저자나 편집자에 의해 반드시 의도되지는 않으며, 본문의 사실상의 객관적 의미이다.
마지막 단계는 가장 어렵다. 독자는 기록된 그리고 편집된 본문을 대면한다. 세속적 역사 인식론의 단순성은 환영받는 반면에, 그 방법에 의해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역사적 독자(historical reader)는 본문을 통해 사건에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하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직무를 부여받는다. (나는 “역사적 독자”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정경적 그리고 수사적 독자들[canonical and rhetorical readers]은 본문의 실제 사건들과의 관계에 반드시 관심을 갖지는 않기 때문이다.) 첫째로, 독자는 본문 자체를 대면해야만 하며 그것의 의미를 결정하려고 시도해야만 하는데, 그는 그 의미에 제한적으로만 접근할 수 있다. 그의 접근의 한계는 저자로부터 그의 시간적 거리, 그의 언어적 차이, 그의 문화적 정황의 결여, 그리고 순수한 객관성을 확보하기에 그의 무능력에 의해 조성된다. 그 다음에 독자는 본문의 편집층들을 벗겨내기 시작하여 원래 본문 또는 저자에 의해 산출된 본문들을 발견해야만 한다. 이 과정은 힘들고 본질적으로 불확실하다. 본문 비평적 증거 없이는, 발췌들이나 발언들은 오직 가장 빈약한 논거들을 근거로 본문으로부터 떼어내질 수 있다. 그러나 편집 비평가들은 “보다 초기의” 그리고 “보다 후기의”, “덜 발전된” 그리고 “더 발전된” 사이를 지속적으로 구별하려는 그들의 직무와 시도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편집 비평을 통해 원 본문을 발견한 후, 독자는 저자의 시각을 제거해야만 한다. 그래서, 그는 가능한 최대한 저자의 신념들(persuasions)을 규정하고 분류하기를 시도한다. 이 분석은 역사의 실제 사건들을 둘러싸고 있는 커튼을 말아버리기 위해 사용된다. 마침내 역사의 실제 사건들이 드러날 수 있다.
불행하게도, 독자가 이 단계에 도달할 즈음이면, 본문에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는 그 모든 본문들, 편집들과 구상들에 의해 감추어진 사건들에로 거슬러 올라가 도달하기 위해 그의 역사적 믿음을 사용해야만 한다. 독자는 이제 그가 원하는 대로 본문을 해석하는 데 남겨진다.
표 3에서, 나는 성경 읽기에 대한 전통적 기독교와 가톨릭의 관점을 요약하기를 시도할 것이다. 이 전통적 인식론은 표 2의 역사 비평적 관점에 가깝기 보다는 표 1에서 세속 역사적 관점에 보다 더 가깝다. 오직 세 가지 차이점들이 있다. 첫째로, 본문의 글은 우리가 신적 저자를 말하는 만큼 신적 영감에 의해 보충된다. 하나님은 본문을 산출해 내기 위해 실제로 저자와 함께 일하신다. 영감 과정의 심리적 복잡 함들은 이 기획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지만, 그러나 영감은 본문이 기록되는 방식에 극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둘째로, 독자는 그의 본문 읽기에 있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다. 이것은 성령이 독자의 편리함을 위한 헬라어 사전이나 성구사전과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보다는, 하나님은 독자의 이해를 믿음을 통해 영적으로 돕는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이 선물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읽기에서 가장 최대한으로 사용된다. 믿음은 독자가 말씀들의 신적 기원을 받아들이는 것을 도우며, 하나님을 그 말씀들의 저자로 보도록 돕는다. 셋째로, 이 믿음은 세속 역사에서의 단순한 믿음보다 더 강력한 방식으로 독자를 사건들과 연결시킨다. 믿는 독자는 성경의 사건들을 보기 위한 광범위한 신적 전망을 얻는다. 그는 사건들에 대한 단순한 역사적 지식을 얻지 않고, 그것들의 의미에 대한 통찰력과 그것들의 실재성에 대한 초자연적 수용이 주어진다. 이런 방식으로, 성경적 지식은 다른 모든 역사적 지식 너머로 증가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영적 사건(spiritual occurrence)이다.
8. 결론(Conclusion)
우리는 이 분석 끝에 역사적 흥미와 실존적 개방성과 함께 진지하게 본문에 접근하는 새로운 인식론의 필요에 처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나는 우리가 “해석 행위를 주로(완전히는 아니고) 새로운 무언가의 창조보다는 본문 안에 있는 무언가의 발견으로” 보아야만 한다는 점에 있어서 스테펜 데이비스(Stephen T. Davis)에 동의한다.23 성경의 역사적 본문들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것들이지, 신앙-공동체의 정신적 투사물들(mental projections)이(라이마루스) 아니다. 또한 성경의 역사적 본문들의 역사성은 그것들이 보다 고도의 비-내재적 실재성을 가리킨다는 주장(불트만) 안에서 벗겨질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역사와 초월적 실재 사이의 연결을 부인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저자의 의도와 교회를 위한 의미 사이에 벽을 세울 필요(브라운)가 없다. 이런 진술은 성경적 의미를 근본적으로 불필요하게 둘로 쪼개는 것이다. 이것은 지식의 분리된 두 대상들을 완전히 제시하기 위해 본래 의미를 현대적 의미로부터 분리시킨다. 위의 입장들에 관하여, 나는 아래와 같은 루이스(C. S. Lewis)의 평가에 동의한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고대 본문들의 노선들 사이에서 읽을 수 있다고 믿으라고 내게 요청한다. 그 증거는 그들 자신이 (어떤 의미에서 논할 가치가 있는) 그 노선들을 읽을 능력이 명백하게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고사리의 포자를 본다고 주장하지만, 쏟아지는 햇빛 속에서 10야드 떨어져 있는 코끼리 한 마리를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24 실재를 조각들 안에 삽입하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는 우리의 능력을 제거한다.
그러나 어떤 인식론적 접근이 우리를 요구되는 정직함과 함께 본문으로 이끌어갈 것인가? 본문은 의심의 해석학(a hermeneutic of suspicion)으로가 아닌 신뢰의 해석학(a hermeneutic of trust)으로 읽혀져야만 한다. 성경의 역사적 내용은 다른 역사적 본문들이 이해되는 것처럼 실재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독자는 비록 사건들이 저자의 관점에 의해 윤색되었다할지라도 제시된 사건들의 역사성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역사적 사건들을 믿는 것을 넘어서, 독자는 저자와의 인격 대 인격적 소통의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독자는 인간 저자(human author)를 알게 될 뿐만 아니라, 본문을 기록하시는 신적 저자(Divine Author)도 알게 된다. 그 때에 성경 읽기는 단순히 지적으로 정보를 주는 사건이 되지 않고, 하나님과의 영적 소통이 된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이시며, 성경이 지시하고 있는 대상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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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notes
1 Ratzinger, Joseph, “Biblical Interpretation in Crisis: On the Question of the Foundations and Approaches of Exegesis Today,” in Biblical Interpretation in Crisis: The Ratzinger Conference on Bible and Church, Richard J. Neuhaus, ed., (Grand Rapids, MI: Eerdmans, 1989) 16.
2 Brown, Raymond E. “The Contribution of Historical Biblical Criticism to Ecumenical Church Discussion.” in Biblical Interpretation in Crisis: The Ratzinger Conference on Bible and Church, Richard J. Neuhaus, ed., (Grand Rapids, MI: Eerdmans, 1989) 44-6.
3 Ibid. 46.
4 Wright, N.T., The New Testament and the People of God, (Minneapolis, MN: Fortress, 1992) 32.
5 See Wright 32-34.
6 This is an extreme abbreviation of a very complicated philosophical position, but I believe that it is adequate for our discussion.
7 Kummel, Werner G., The New Testament: The History of the Investigation of Its Problems, (New York: Abingdon, 1972) 89-90.
8 Harrisville, Roy A. and Walter Sundberg, The Bible in Modern Culture, (Grand Rapids, MI: Eerdman’s, 1995) 60.
9 Ibid. 61. This is a paraphrase of Reimarus’ views.
10 Bultmann, Rudolf, New Testament and Mythology and Other Basic Writings, (Philadelphia: Fortress, 1984) 99.
11 Ibid. 152.
12 Ibid. 150.
13 Ibid. 3.
14 Ibid. 5.
15 Brown, Raymond E., The Critical Meaning of the Bible, (New York: Paulist Press, 1981) 40.
16 Ibid. 35.
17 Ibid. 35, footnote 20.
18 Ibid. 34.
19 어떤 사람들(불트만 등등)은 이스라엘인들과 제자들의 신앙들의 이해 불가능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 입장은 중심 문제를 회피한다. 제자들은 무언가를 믿었다. 그것에 대해 그들이 옳았는지는 지금의 논점이 아니다. 그들이 믿었던 “무언가”는 그들의 신앙-지식의 대상이 되도록 그것을 위해 이해 가능해왔어야만 했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현대의 신앙인들도 무언가를 믿는다. 신앙의 적대자들의 논거는 그런 신앙의 대상은 이해 불가능하다고 제안하지 말아야만 한다. 그보다는, 그 논거는 신앙의 대상은 이해 가능하지만, 비실재적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비실재성을 위한 논거는 이해 불가능성을 위한 논거보다 더 강하다. 무언가의 존재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무언가가 존재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비난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20 Crossan, John Dominic and N.T. Wright, The Resurrection of Jesus, (Minneapolis, MN: Fortress, 2006) 177.
21 Ibid. 16-23.
22 Ratzinger 7.
23 Davis, Stephen T., “What Do We Mean When We Say, ‘The Bible Is True?’” in But Is It All True?: The Bible and the Question of Truth, Padgett, Alan G. and Patrick R. Keifert, eds., (Grand Rapids, MI: Eerdmans, 2006) 97.
24 Lewis, C.S. “Fern-Seed and Elephants” in Lewis, C.S. Fern-seed and Elephants and Other Essays on Christianity, (Glasgow, England: Collins, 1978)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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